프란시스 쉐퍼의 삶과 사상[1]
20세기의 위대한 개혁자 프랜시스 쉐퍼의 삶과 사상
신동식목사
차 례
1 .서 론
Ⅱ. 본 론
제1장 쉐퍼의 삶의 여정
제1절 사역자로 부름받은 쉐퍼
제2절 건초더미에서 부르심- 라브리 사역
제3절 영적인 나팔 소리 라브리의 메시지
제2장 프란시스 쉐퍼의 사상의 여정
제1절 개혁과 성경의 사람
제2절 쉐퍼 문화 변증의 전도자
Ⅲ.결론.
Ⅰ. 서 론
한국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로 마이너스 성장이 되어지고 있다. 교회의 숮자가 해마다 감소되고 있는 현상이다. 들려오는 소리는 교회 개척은 물건너간 일이라는 것이다.이러한 현상을 반영이라 하듯 교회 주일학교 즉 유년부,초등부 그리고 중고등부,청년부의 감소는 몇몇교회를 제외하고는 심각한 상태에 도달하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정채성이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제고하여야 한다는 무언의 소리인 것이다. 복음이 바로 선포되는 곳에는 반드시 변혁의 물결과 함께 성장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사실이다.행2:47
특별히 이러한 감소의 현상중에서 청년들의 감소는 눈에 뛰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청년들의 감소는 내일의 한국교회를 어둡게 하는 요인으로 부각되어지고 있다. 지금은 기성세대들이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얼마되지 않아 기성세대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될 때에 이 땅의 교회도 같이 사라지지 않을까 염려가 될 정도이다. 내일의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지성인이라면 이것이 누구의 문제이고 어떤 문제인지 고민할 것이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 교회가 그리 많지 않다는 현실이다. 지금도 교회 정치와 권력의 싸움에 불필요한 힘을 소진하고 있는 교회가 부지기수라는 보고는 낯설지 않다. 이러한 현상속에서 보고 자라난 청년들의 영적 사고는 빈곤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청년들이 선택하는 최후의 길이 개종이나,아예 복음을 저버리는 사실이다.
이것은 교회안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밖에서 더욱 붉어져 나오고 있다. 사회에서의 한국교회의 영향은 눈에 띠게 약화되고 있다. 특별히 70년대 경제 성장시기에 힘을 발휘하였던 교회의 영향력은 만불시대가 도래하면서 그 역할을 부에 의한 여가활동에 모두 반납하고 있다. 이제 교회의 위상이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개교회 중심의 교회론과 성속 이원론을 강력히 주장하였던 이론은 이제 시대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 그런사고를 가지고는 이 시대에 결코 살아 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안목의 변환이 없는한 새시대의 변화는 바라 볼 수없다.
이러한 현상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80년대부터 한국의 지성계를 훈련시켰고 이제는 평신도층까지도 확장되어가고 있는 “세계관 운동‘이다. 세게관 운동으로 인하여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이었던 이원론적 신앙생활의 극복이 시작되었다. 특별히 세계관운동은 윤리운동과 접목함으로 신앙과 윤리를 거꾸로 사는 외식적 신앙생활에 경종을 울리었다. 더구나 평신도 사역자를 위한 운동이 됨으로 젊은 층의 그리스도인들을 복음안으로 다시 품게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90년대 후반가지 지속 되면서 신학교 안에서도 일어 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관 운동은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였고 마침내 문화시대가 도래함으로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문화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렇게 엄청난 사회변혁시기에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킨 것은 일부 깨어있는 기독지성인의 세계관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운동은 사회 변혁의 꿈을 가지게 되었고 일부나마 기독교 사회를 위한 일련의 일들을 하게 되었다.사회변혁을 위한 운동으로서 경제정의 실천연합회가 결성되었고, 기독교 윤리실천운동본부, 낙태반대연합회,외국인을 위한 희년선교회,그리고 최근에 일어난 마이클 잭슨 내한 공연 반대운동등 기독교의 바른 이념을 가진 사회변혁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세계관운동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곳곳에서 사회 변혁을 위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사회의 문화변혁을 위한 근저에는 귀한 기독교 사상가들이 많이 있다. 신학적으로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도예벨트를 끈으로 하는 신 칼빈주의 영향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근본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다름아닌 프란시스 쉐퍼의 사상이다. 그의 일련의 책들은 기독 지성인들의 사고를 깨우게 하였고, 무엇이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삶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였다. 특별히 문화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함께 문화 사역자로서 비젼을 가질려면 쉐퍼의 사상을 반드시 넘어가야 할 정도로 쉐퍼의 영향은 지대 하였다.서울대 기독학생이 중심이 되었던 기독교 학문연구회의 세계관 프로그램중 현대인의 세계관 과정이 바로 쉐퍼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이다.
이것은 문화에 대한 미숙아 정도에 불가한 우리에게 문화에 대해서 그리고 역사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즉 쉐퍼를 통하여 Pardime Shift각 된 것이다. 사실적으로 쉐퍼로 인하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역자는 참으로 많은 것을 볼 수있다. 그러나 이러한 쉐퍼의 사상은 너무 한쪽에만 취우친 감이 있다. 쉐퍼를 진정으로 안다면 쉐퍼는 단순한 문화 이론가나 문화 사역자가 아니었다. 그의 위대한 비젼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쉐퍼는 행동하는 목회자요,사회 개혁가였으며 그는 전도자였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 전도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즉 기독교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있으며 성장 둔화와 함께 인본주의적 사고가 판을 치고 있는 이 시점 에서 쉐퍼를 살펴 봄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라고 믿는 신앙이라면 사회 변혁을 위한 바른 사고와 그리고 행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변혁론자인 동시에 전도자인 쉐퍼를 연구함은 우리 시대에 있어서 매우 의미있는 것이다. 특별히 고등사회가 되는 현시대에 있어서의 쉐퍼의 연구는 한국교회에 중요한 관심이 될 것이다
20세기의 위대한 개혁자 프랜시스 쉐퍼의 삶과 사상
신동식목사
Ⅱ. 본 론
제1장 쉐퍼의 삶의 여정
쉐퍼의 출생과 그의 성장과정을 아는 것은 그를 바로 이해하는데 참으로 중요하다.특별히 쉐퍼가 그의 사상을 펼치던 시대의 사상의 흐름를 알기위해서라면 더더욱 쉐퍼의 출생의 시대를 아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쉐퍼는 1912년에 태어나서 1984년까지 살았던 20세기 최대의 복음 전도자이다.] 쉐퍼가 1912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당대의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라고 불리우는 쟈크 엘룰또한 1912년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시대가 얼마나 위험한 시대였는지를 알고 지성세계에 위대한 사역자를 보내어 준 것이다. 사실 이시대에 사상가들 뿐 아니라 마틴 로이드 존스,빌리 그래함,그리고 존 스토트 같은 위대한 복음의 설교 사역자들을 보내심으로 20세기의 영적 전쟁의 심각성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의 생애에서도 볼 수있듯이 그의 시대는 정치적,경제적 그리고 신학적으로 대격변기를 보냈던 시기였다.
제1절 사역자로 부름받은 쉐퍼
쉐퍼는 불신 가정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 그의 부모는 쉐퍼가 평범한 사람이 되기를 바랬던 보통의 사람이었다. 그의 가정은 부유한 가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을 얻기를 바랬던 쉐퍼는 그의 나이 17살되던해에 성경을 읽고 또한 한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였다. 그후 그는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쫓아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나와 신학수업을 준비하게게 되었다. 이러한 쉐퍼의 준비기간중에 만나 에디스는 그의 인생을 더욱 확고히 하는 귀한 만남이 되었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이둘의 만남은 그들의 사역이 어떻게 진행될것인지를 가늠케하였다. 이후 개혁주의 신학교를 나오고 단독 목회를 열심히하는 중에 그는 교회 연합회의 요청으로 유럽을 탐방하게 되었고 이 탐은 쉐퍼와 그의 가족으로 하여금 새로운 역사를 이끌 결단을 하게 되었다. 온갖 무질서와 허무주의 그리고 영적 방황에 폐허가 되어있는 유럽을 보면서 그는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유럽에 남게 되어 라브리라 불리우는 사역을 하게 되었다.
제2절 건초더미에서 부르심- 라브리 사역
쉐퍼의 남은 40여년간의 사역은 영적 쉼터라고 불리우는 라브리 사역에 있다. 쉐퍼는 세인트 루이스에서 목회를 하던 1947년에 미국 기독교 교회협의회와 장로교 해외선교회 독립협회를 위해서 유럽으로 첫 여행을 하게되었다. 쉐퍼는 3개월 동안의 여행을 통하여 생애의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다. ·쉐퍼의 가족은 이 여행의 결과로 유럽에 있을 것인가,떠날것인가 두방향으로의 갈등을 겪게 되었다.그리고 그들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였고 결국 그들은 모든 안정된 곳을 버리고 영적 전쟁터인 유럽에 남기로 한 것이다.]에디스 쉐퍼 라브리 박경옥,박하영 역 호도애 서울 1994 p37
쉐퍼는 유럽으로의 여행을 통하여 많은 동역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중에는 에버릿 쿠퍼박사와 그의 평생의 동역자였던 화란의 미술사가 한스 로크마크였다. 이들의 만남은 쉐퍼의 사역에 크나큰 기둥들이었다. 쉐퍼는 분명한 성경적 입장으로 인하여 많은 곳으로부터 강연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역가운데 그에게도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신앙에 대한 반성이었다. 쉐퍼의 이러한 영적 갈등은 쉐퍼의 말에서 볼 수있듯이 매우 심각하였다.
“ 1951년과1952년에 나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 영적인 위기에 봉착했었다. 내가 불가지론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이미 여러해 전이었다. 그 후 나는 미국에서 10년을 목사로 봉직했으며, 도 그후에는 나의 아내 에디스와 수년간 유럽에서 봉사해 왔다. 이 때에 나는 역사적 기독교의 위치와 가시적 교회의 순결성을 변호하고 나서야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점차로 나에게 문제가 닥쳐왔다. 그것은 실제에 대한 문제였다. 이것은 양면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내가 보기에, 정통주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노라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성경이 그토록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기독교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사건들 속에 있어야 할 사실상의 핵심적인 실재를 별로 찾아 볼 수가 없었더라는 점이다.
둘째로, 내 자신의 실재도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초창기 보다도 더 약화되어 있는 모습으로 점점 나타나더라는 점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내 자신의 전반적인 위치를 재고해 보아야 하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 내외는 그 때 참페리에 살고 있었다. 나는 내 아내 에디스에게 솔직히 내가 다시 온전해 과거로 되돌아가서 불가지론에 이르러 문제 전반을 다시 한번 검토해야 하겠노라고 말했다. 이 때야말로 나의 아내에게도 진정 어려운 때였을 것으로 본다. 그 당시 내 아내는 나를 위해 무척 기도도 많이 했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프랜시스 쉐퍼 “진정한 영적 생활” 권혁봉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8] pp 5-6.
쉐퍼는 날씨가 청명한 때는 산속을 거닐고 비가 오는 때에는 낡은 오두막집 건초더미사이로 거닐면서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를 생각하고,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거닐었다. 이러한 쉐퍼의 영적갈등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로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를 재고하는 가운데서 나는 또 다시 발견한 사실이 있으니, 무한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엄존하시며 기독교야 말로 참되다는 것을 알만한 전적으로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좀더 나아가서 내 생애 가운데 심오한 차이점을 일으키는 기타 어떤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재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나는 다음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받은 교훈이 많이 있지만, 우리들의 현재의 삶을 위한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사역의 의미에 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는 많이 들어보지 아니 했다는 것이 문제점이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 것이었다. 점점 태양은 밝히 떠오르고 노래가 흘러 나왔다.“] ibid., pp6
그러나 바로 이러한 쉐퍼의 영적 갈등과 회복은 진정한 라브리 사역으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쉐퍼의 영적 갈등이 없엇다면 라브리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라브리의 진정한 기초의 과겨와 현재이다.역사적 기독교의 해답을 가르치고 정직한 질문에 대해 정직한 대답을 제시하는 일은 실로 중차대한 일이다. 그러나 실재에 이르는 것은 노력을 통해서이다. 이런 노력을 통한 실재가 없었더라면 라브리와 같은 기민한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ibid., pp6-7
라브리에서의 그의 사역은 절대적 진리를 위한 투쟁이었다. 라브리에는 국적과 연령,배경과 관심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와서 진리에 대하여 토론하고 진리를 찾고 있다.]에디스 쉐퍼 p18
라브리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하였다.
“라브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삶과 일속에서 증거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그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기도를 기초로 하여 살기로 한 것이다.“]에디스 쉐퍼 p21
제3절 영적인 나팔 소리 라브리의 메시지
라브리의 위대한 사역의 시작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었다. 라브리는 시대적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다가올 60년대의 무질서와 영적 위기에 있어서의 영적 쉼터요 충전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었다.
라브리의 기본 사역은 사고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쉐퍼는 이 라브리 사역의 처음부터 인간 생활전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기에 라브리의 소명과 목적에는 방문자들의 지성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생활속에서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포함된다. 라브리의 아름다운 모습은 라브리는 모든 사람의 정직한 질문을 신중하게 취급합니다. 라브리는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과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라브리는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진리라면 그것은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도 정직한 대답을 준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답변”을 주는 것이 바로 라브리의 기본 입장인 것이다.] 라브리 편지 제23호 “국제 라브리 안내지” 한국 라브리 자료센터
이러한 라브리의 사역의 모습은 상대주의와 절대적 권위가 무너져 버린 그래서 혼란과 부패가 편만한 유럽과 미국을 햔한 영적인 오두막이자 충전소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쉐퍼의 라브리 사역의 위대한 업적은 바로 이원론적 신앙이 얼마나 모순된것인가를 보여 주는 데 있었다. 성경은 분명히 “기독교는 모든 실재의 진리이다”라고 가르친다.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기독교가 관여하며,기독교가 답변하지 못하는 문제의 영역은 없다는 사실이다.즉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요 모든 진리가 바로 하나님의 진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쉐퍼는 신앙의 궁극적 모습을 분명히 하였다.
“만일 당신이 신앙의 기반이 단지 경험뿐이라면 그 기반은 견고하지 못해서 환난의 바람이 불 때 당신의 신앙은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기독교를 순수 지성주의로 생각한다면, 환난의 바람이 불 때 그것 역시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기반은 반드시 경험이 아닌 내용이어야만 된다. 이때 비로소 기독교 신앙은 전인격을 포괄하나 그 기반은 인식에 있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캐서우드 pp.170
이러한 의지와 감정이 있기전의 지성이 먼저인 신앙을 분명히 하는 것이 바로 쉐퍼의 사역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라브리의 사역은 아니었다. 쉐퍼의 동료이자 제자인 오스 귄네스는 말하기를
“라브리의 사역은 진리도 중요하였지만 사람도 중요하였다.이 두가지가 바로 라브리의 비밀이었다”]크리스토퍼 캐서우드 pp.171
제 2 장 프랜시스 쉐퍼의 사상의 여정
많은 사람들이 쉐퍼를 이해 하기를 문화 사역자나 기독교 문화 이론의 선구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쉐퍼를 너무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쉐퍼의 목적과 관점은 분명하였다.
제1절 개혁과 성경의 사람 쉐퍼
쉐퍼의 신학 사상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쉐퍼의 학문의 기간들은 모두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이었고 본인 스스로가 장로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규정할 수 있는 말은 “그는 성경의 사람이었다.”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그의 회심의 사건에서도 분명히 알 수있고 그의 목화회사역 그리고 그의 라브리사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성경의 진리를 믿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당시대의 성경유오설자들과 맞섰으며 성경무오설을 믿고 고백하는 이들과 함께 그 유명한 시카고 선언을 작성하였던 것이다.
파커스트의 말을 빌자면 “쉐퍼는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인 성경에 근거해야 하며 이런 중생을 체험한 이후에야 일생을 통해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쉐퍼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성경의 약속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며,하나님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세상을 위하여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며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L.G. PARKHUST p71
이런 사상의 열매는 그의 신학 수업에 분명한 열매가 있는 것이다. 그의 웨스터 민스터와 훼이스 신학교의 신학은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 이었다. 그래서 그의 변증적인 모습을 보면 은사인 반틸의 영향을 받았음을 볼 수있다. 물론 그둘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사상, [쉐퍼는 이것을 세계관이라 부른다.] 그리고 인식론과 인간의 타락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일치점이 있음을 볼 수있다.]성인경 “반틸과 쉐퍼” 프랜시스 쉐퍼읽기 예영커뮤니케이션 서울 1996 p198-204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기를 쉐퍼의 신학의 영향과 형성은 개혁주의 신학 특히 신칼빈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있다. 신칼빈주의자들의 세계관운동은 쉐퍼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관과 동일하다. 그렇다고 쉐퍼의 신학의 근본이 신칼빈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개혁주의 신학의 형성이 자연스럽게 신칼빈주의 영향을 받아드렸다고 볼 수있다.
제2절 쉐퍼 문화 변증의 전도자
쉐퍼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쉐퍼를 문화사역자로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잘못된 말이다. 쉐퍼는 문화사역자가 아니라 문화 변증을 통한 전도자라고 하여야 바른 표현이 될 것이다.
쉐퍼를 가장 확실하게 그리고 독특하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변증일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쉐퍼의 문화사상을 알 수있다. 그의 초기의 저서를 통한 사상은 이 사실을 아는데 중요한 단추이다. 그의 삼부작이라고 일컸는 [이성에서의 도피],[거기 계시는 하나님],[거기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종합이라 할 수 있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를 통하여 기독교 변증의 쉐퍼식 방법을 알 수있다.
쉐퍼는 이러한 시대적 혼란에 대한 접근을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하지 않았고 동시대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동시대의 언어와 방법을 통하여 접근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문화를 통한 접근 이었다. 쉐퍼는 문화는 사람들의 세계관읗 형성하고 그문화에 따라서 사람들은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역사와 문명에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이 흐름은 인간의 사상에서 유래되는 것이고,인간의 사상에 근원을 둔다.인간은 내적 정신 생활에 있어서는 특이한 존재이다. 즉 그들의 정신세계는 그들의 행동을 결정짓는다.이것은 그들의 가치체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프란시스 쉐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 박형용역 생명의 말씀사 서울 1990 p15
또한 “사람들은 전제를 가지고 있다.그리고 그들은 그들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이상으로 이러한 저네들의 기초위에서 더욱 일광성있게 살아갈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제란 개인이 인생을 보는 기본적 방법 즉 그의 기본적인 세계관,자신들의 틀을 통해 세상을 보는 기본적인 방법을 뜻한다.”]프란시스 쉐퍼 p15
쉐퍼는 이러한 원리의 입각하여 현대문화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았다. 그는 서구 문화의 사상의 흐름을 살펴봄으로 서구문화사상의 근거를 보이고 오늘의 시점의 모습을 논증하였던 것이다.
첫째, 로마 - 현대문화의 뿌리
이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많은 수의 역사학자들도 이러한 견해에 동의한다.]자크 엘룰도 그의 사상의 출발점을 로마로 보고 있다.
그러나 쉐퍼는 단순히 그들의 문화에만 관심을 두도 있지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 관심을 두었다. 쉐퍼는 현대문화에 획을 근 로마에 그 출발점을 두면서 말하기를 “로마에는 많은 종교와 신들이 허락되어있었다. 그 신들의 신성은 인성에 의해서 설명되었다. 한마디로 그들의 신은 인격적이고 전능한 절대적 신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즉 충분히 위대하거나 영원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그들의 사상과 생애에 연관 시킬 수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가치체게는 개인적으로로나 정치적으로 인생의 긴장을 감당하기에 흡족 할 만큼 강하지 못했다. 로마인들이 가졌던 인간신들은 빈약한 존재들이었고 그러한 기초 위에 있는 로마는 멸망될 수밖에 없었다.”]프란시스 쉐퍼 p17-18
쉐퍼가 로마에서 발견한 것은 절대적 기반이 없는 문명이나 개인은 압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을때는 견디지만 그보다 강한 압력이 오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절대적 기준이 없는 사회와 개인을 보았던 것이다. 쉐퍼는 비유로 말하기를 “로마의 다리는 당시의 마차가 다닐 수 있는 튼튼하지만 오늘날의 트럭이 지나가면 무너지고 말것이다.”고 하였다.]프란시스 쉐퍼 p20
둘째, 이성의 시대의 기반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과 은총의 분리
쉐퍼는 인간의 재탄생 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의 기반을 마련하여 준 아퀴나스의 사상을 말하고 있다.아퀴나스는 그의 인간관에서 부분 타락을 말하고있다.즉 인간의 의지는 타락하였으나,인간의 지성은 손상받지 않았다고 함으로사람들은 인간적인 지혜를 의지 할 수있고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비기독교 철학자의 가르침을 자유로이 섞게되어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아래 이 세상을 “자연과 은총”의 부분으로 이분화 시켰다.아퀴나스의 기여는 인간과 자연에게 중요성을 주었지만 그러나 개별자들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것이 되게 하므로,결국 개별자의 의미를 상실 되게 만들었다.
아퀴나스의 본래 의도가 어떠 했든간에 그의 사상이 낳은 결과는 엄청났다. 오래동안 잠자고 있던 자연과 이성이 날개르 펼치고 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모습에 뒤따라올 두가지 모습이 첫째는 중세의 점차로 각성된 문화 사상과 각성된 경건이며 둘째는 성경과 초기 교회의 교훈에 대하여 심해지는 왜곡이다.]프란시스 쉐퍼 p55
바로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한파가 몰아닥쳤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한파에 대응한 또하나의 흐름이 있어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개혁운동이었다.
셋째, 이성의 꽃과 감정의 열매- 계몽주의의와 낭만주의의 태동
르네상스를 통한 계몽주의는 철저한 이성중심의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속에서 모든 것의 기준이 이성이 되어짐으로 절대적 가치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다. 계몽주의 사상은 “이성,자연,행복,그리고 자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절대적 기준은 인간이성이며, 그에따른 행복과 자유에 근거한다
이성이 모든 것에 행복을 줄 수있다고 믿은 세대들에 의해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은 새로운 삶을 줄수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이러한 혁명을 통하여 죽은 사람이 이전의 어떤 혁명에 의하여 죽은 사람의 숫자보다 많다는 것이다. 양심이 기준이 되는 시대의 결과였다.
계몽주의 열풍은 한번도 식어지지 않고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가졌던 이성적 낙관론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현대 철학의 문을 열었던 네사람은 이러한 계몽주의의 이상이 허상으로 끝났음을 말하였던 것이다. 특별히 그중 매우 주요시 보아야 할 인물이 바로 장자크 루소인 것이다. 루소의 등장으로 계몽주의적 인본주의에 새로운 변화가 이우러진 것이다. 즉 현대적 인본주의가 출현한 것이다. 루소는 인간이 오직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했을 때 개체 사물,개별자와 그것들의 의미 사이에 긴장이 있으므로 절정기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의 문제를 새롭게 발전시켰다. 그는 이 문제를 자율적 자유와 자연적 자유의 개념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시기로부터 이전 시대의 낙관론적 희망이 사라지고 비관론으로 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로 문을 연 이들은 보편자와 개별자에 의미를 주고자 했던 통일된 대답을 향한 기대를 포기 한 것이다. 이성이 계몽주의의 영웅이었다면 이제 감정은 낭만주의의 영웅이 되었다. 루소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 낭만주의 시대를 열은 것이다.이들의 사상은 이 한마디에 잘 나타나있다.
“모든 창조물은 자연의 가슴에서 즐거움에 도취되도다”
결국 자연적인 것이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루소의 영향은 사회계약론을 통해서 사회영역과 자연을 도덕적 기초로 삼으려는 시먼법의 영역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에밀을 통해서 교육계에 영향을 미쳤으며,낭만주의 문학과 음악에 그리고 고갱의 미술에게 까지 대단히 넒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고귀한 야만인이 문명인보다 뛰어남을 역설한그의 힘이었다.]프란시스 쉐퍼 pp165
둘째로 현대인의 문을 연 인물은 바로 임마누엘 칸트였다. 칸트 또한 동
일한 문제를 다르게 표현하였지만 여전히 실패하였던 것이다. 칸트는 이 세계를 본체계 즉 가치와 의미의 개념을 가진곳 과 현상계 즉 측정되고 무게를 잴 수 있는 세계,외부세계,과학의 세계로 보았다. 그리고 이 세계를 결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역시 루소와 같이 통일된 길을 찾을 수없었던 것이다. 오직 인간에게서 출발하여 현상계와 본체계를 연결하는 길은 없었다.]프란시스 쉐퍼.,pp174
이것이 혀대인이 도달한 하나의 정거장이었다. 그래도 더눅 발전하면 무엇인가 희망을 갖을 수있을 것이라 믿었다. 바로 이 믿음의 결과 이 시대의 매우 중요한 흐름을 열게 된 것이다. 이 들이 바로 진정 현대인의 시조라 할 수있다.
넷째, 상대주의 유령 - 실존주의와 변증법의 출현
쉐퍼는 현대문화가 앓고있는 상대주의적 유령의 근원을 헤겔과 실존주의자 키에르케골에게 두었다.
헤겔은 인류역사상 인식에 있어서의 엄청난 변혁을 가져온 인물이다. 그의 변증법적 사고 즉 正.反,合의 사고는 이제까지의 사고체계를 흔들어놓았다. 그는 “진리는 쩔대적이라는 믿음에거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믿음으로의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었다. 헤겔은 이전의 직선적인 사고를 제거하고 그것을 삼각형으로 바꾸어놓았다. 즉 반정립대신에 진리에 도달하는 현대인의 방법으로서 우리는 종합이라는 방법을 가지게 되었다. 헤겔은 이 종합을 실제로 이성에 의해서만 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관념론자였다.]프란시스 쉐퍼. p30
이러한 헤겔의 등장 이후 사람들은 누구든지 무엇을 생각하든지 종합의 방법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쉐퍼는 헤겔을 절망의 선으로 보았다. 그러나 헤겔은 절망의 선아래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절망의 선안으로 들어간 인물의 출발점은 바로 헤겔의 인식론은 인정하면서 그의 방법론에 반기를 든 네델란드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 였다.
키에르 케골은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많은 평가가 있을수있다.그의 삶과 신앙적 열심은 참으로 우리에게 도전을 많이준다 그러나 쉐퍼는 이러한 것보다 더중요하게 키에르케골을 보아야 할 것은 그가 “이성에 의해 진리에 이를수 있다”는 믿음에거 “믿음의 비약에 의해서만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의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러한 키에르 케골의 사상은 헤겔 사상에대한 대안으로 나왔다. 키에르케골의 사상은 합리적인것과 논리적인 것을 완전히 분리시키고 말았다. 즉 합리적인것과 신앙은 상호간에 아무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합리주의적 인간이 인간생활의 실제적인 것들 즉 목적 의미 사랑의 타당성같은 것들을 취급할 경우 합리적인 사상을 버리고 부득이 거대한 비합리적인 신앙의 비약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다.]프란시스 쉐퍼 기독교와 현대사상 -거기계신 하나님- 홍치모역 성광 서울 1992 p32
이러한 키에를 케고르의 영향은 신학적으로는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로 철학적으로는 철학적 실존주의의 양대 자양분이 되었다.
이들의 영향은 기독교가 초월성을 고수하는 대신에 비합리적인 종교로 전락하는 희생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존슨이 말하기를
“지성이 무시되던 17세기에는 경건주의와 신비주의가 꽃 피웠으며 그때에 잃어버린 기독교적 지적 주도권은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서구 현실이다.” ]성인경 프란시스 쉐퍼의 문화 사상 1996년 총신대원 역사학회 세미나 자료집 p6
이것은 바로 오늘 한국교회가 처해있는 현실이기도 하다.한국 교회가 지적인 권위를 잃어버린 결과가 바로 기독교부흥의 후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전 영역에서 기독교의 지적인 권위가 살아있지 못하다면 우리 교회는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사상의 흐름은 결국 2차 세계대전을 거친 후의 1960년대라는 엄청난 문화적 격변기를 가져왔고 오늘날의 사상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합리적인 권위를 상실하게된 기독교는 젊은이들에게 진리의 힘을 줄 수없고 결국 동양의 신비주의로 도피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쉐퍼는 이러한 현실인식을 통하여 합리적 기독교를 문화적 모습을 통하여 증거하였던 것이다.
쉐퍼는 이렇게 문화사상의 흐름을 살펴봄으로서 현대문화의 혼돈과 무질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상대주의적 사고속에서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진리를 증거하였던 것이다. 바로 문화변증의 전도인것이다.
쉐퍼는 사상은 행동을 낳는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사상에대한 이해가 없이는 오늘의 문제를 풀 수없다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단순히 문화에 대한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전도의 접촉점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쉐퍼는 문화를 통하여 만났고 문화를 통하여 이야기 하였고 그리고 문화를 통하여 상대주의적 진리의 허구성을 들쳐내고 절대적 진리를 증거하였던 것이다. 쉐퍼는 말하기를 “현대인과 접촉을 가질려면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선교를 시작하는 것이다“]ibid p212
고하였다.
쉐퍼의 이러한 사상적인 조류에 대한 이해는 그의 절망의 선에 대한 사고에서도 분명히 볼 수있다. 쉐퍼는 1800년전 유럽과 1935년 전 미국 그리고 1890년 후 유럽과,1935년 후의 미국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절망의 선이 그어졌다고 하였다. 이러한 절망의 선은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포기하고 새로운 기준이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하였다. 즉 성경의 부정에서 이 선은 그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단계별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절망의 선
① 독일 ⇒ 영국 ⇒ 미국
② 지식인 ⇒ 교양인 ⇒ 중산층
③ 철 학
미 술
음 악
문화 일반
신 학
쉐퍼는 이러한 도식을 말하기를
“각 단계는 어떤 시간적인 단계를 표시하고 있다. 위에 있는 것일수록 초기에 속해 있으며 아래로 내려 갈수록 후기에 속해 있다. 이러한 순서로 진리의 변화가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첫째는 지리적으로 확대해 갔다. 독일에서 시작하여 영국 그리고 미국으로 확대되었다. 둘째는 각 사회 계층으로 침투해 드러갔다. 지식인에서 교양인을 거쳐 최후에는 중산계급에게 까지 이르렀다. 셋째는 도식에서 보여 주는 것과 같이 하나의 학문영역에서부터 다른 영역에로 이동해 갔다. 또한 그것은 철학자로부터 신학자에게서 끝나고 말았다.”]프랜시스 쉐퍼“기독교와 현대사상” 홍치모역 [서울;성광문화사1992] pp.22
이러한 사상적 흐름에 대한 쉐퍼의 이해는 그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식의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역사적 이해는 그로 하여금 사역에의 일관성과 확신성을 가져다 주었다. 그의 사상에의 여정에 있어서 그의 신학적 사상 즉 개혁주의적 신학과 성경관 그리고 문화에 대한 분명한 인식하에서의 문화변증을 통한 전도자로서의 삶은 모든 진리가 하나님의 진리임을 삶의 전 영역에 나타내기를 바랐던 것이다.
제3장 쉐퍼에 대한 비평적 이해
쉐퍼는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있었던 지성세계에 복음의 위력을 나타냈던 하나님이 보내신 인물임이 틀림없다. 쉐퍼가 활동하던 시대는 말 그대로 지성의 혼란기 였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말미암아 합리주의적 낙관론이 무너지고, 더 이상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생각지 아니한 허무주의의 삶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던 시대이다. 더구나 이때에 개방된 동양권에 대한 문호개방과 서구 시대의 새로운 사상의 주체로 떠오른 실존주의 사상, 그리고 월남전에 반대, 말 그대로 혼란의 시대였다. 더구나 이전 시대와는 다른 대중매체의 위력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던 시대요 그동안 정신적 주체였던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로 인하여 하나님 죽이기에 몰두하고 있었고, 여기에 엘비스 프레슬리로 시작되어 비틀즈로 이어지는 ROCK 음악은 젊은 지성인들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하였고, 이와 함께 지성의 전당이라하는 대학에는 온갖 마약과 섹스 그리고 히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사상이 정신없이 맴돌고 있던 시대였다. 아마도 그 만치 혼란 스러운 시대는 없었을 정도롤 1960년대의 상황은 말 그대로 정신적 아비규환의 시대였다.
정말로 소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시대였다. 여기에 젊은 대학생들의 과격한 분노가 데모로 이어졌고,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정의가 없으며, 하나님의 절대 진리가 없는 것 처럼 보이는 시대였다. 이미 지성 세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죽은 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많은 상람들이 동양으로의 여행을 즐겼고, 동양에서 새로운 진리를 찿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절대 진리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문화적인 현상을 통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으며, 참 다운 진리는 이미 있으며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희망이라고 역설 하면서 영적 오두막인 라브리를 통하여 히피와 마약, 그리고 상대주의의 유령에 휩싸여 있는 젊은 지성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증거 하였던 것이다. 참다운 절대적 진리가 존재함을 역설 하였고, 그의 책인 이성에서의 도피, 거기 계시는 하나님,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 진리를 역설 하였고,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기독교 선언 ,20세기 말의 교회, 위기의 찬 복음주의등을 통하여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를 강조 함으로서 자유주의 신학에 의하여 죽은 듯이 있었던 복음주의 신학의 바른 기준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쉐퍼의 전도 방법이나. 접근 방법은 많은 사람들을 깨우게 하였고, 지성 세계에 도전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영향은 정치,경제,문화,교회 그리고 학계에 이르기 까지 엄청난 영향을 주었으며, 20세기의 위대한 복음주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의 복음전파는 이전까지 지성에 대하여 무관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이 되었고, 사회역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확고히 말함으로써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눈을 뜨게 하였던 것이다. W.C.C.식의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인하여 사회참여에 부정적인 복음주의 교회로 하여금 바른 시각을 가지고 복음주의적인 사회참여를 가져오게하는 새로운 변화를 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문화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가운데 있었던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들로하여금 문화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가제하였고 이 분야에 있어서는 예언자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쉐퍼가 죽은지 13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의 끼쳐진 영향을 본다면 문화에 대한 그의 시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 수있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 있어서는 쉐퍼의 이 영향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 생각한다. 문화와 사회, 그리고 믿음과 삶의 영역에 있어서 너무나 이원론적인 사고에 빠져있던 한국교회롤 하여금 세상과 문화 그리고 사회외 믿음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바른 시각을 열어준 것은 참으로 중요한 공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쉐페의 위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면에서 생각해 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홈즈같은 기독교 철학자가 제시하고 있듯이 쉐퍼의 철학적 사고는 너무 단편적이라는 사실이다. 특별히 키에르 케고르의 철학 사상에 대한 판단은 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너무 편협적이다는 지적은 계속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한가지 생각 해 볼 수 있는 것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사회속에서의 절대진리인 말씀을 증거하였던 엘룰같은 경우는 쉐퍼가 말하고 있는 헤겔이나. 바르트를 자신의 기반으로 삼고 복음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점에 있어서 쉐퍼의 절망의 시대에 관한 관점을 돌아 볼 수 있는 여지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쉐퍼의 문화 변증은 어떤 면에서 너무나 도식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상의 흐름을 칼날같이 나누어 보는 것은 자신의 논지를 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너무나 근본주의적인 색채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오늘날 미국제 복음주의자들의 형태에서 볼 수 있듯이 복음주의 위기가 가져다준 아픔이다. 오히려 쉐퍼의 관점이 개혁주의적이고 성경적인 관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쉐퍼가 가져다주는 영향력은 더욱 큰 것은 사실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하나님이 보내주신 쉐퍼의 삶과 사상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현대 문화속의 복음 전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한 분명한 해안을 줄 것이다.
Ⅲ.결론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쉐퍼가 20세기 후반에 증거한 복음의 열정은 정말로 위대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표현대로 자신을 전도자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사명은 상대주의 유령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죽어 가고 있는 젊은 지성인들에게 바른 복음의 실체를 확신 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이점은 누구라도 부인 할 수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쉐퍼가 20세기에 키친 영향은 그 어느 누구보다 위대한 것이다. 바르트의 영향이 위대한 것처럼 쉐퍼의 영향 또한 바르트 못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개혁주의 사상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또한 개혁주의 사상을 서고에서 끄집어내어 20세기의 개혁자답게 세상에 분명하게 보여 주었던 전도자이다. 그는 병마와 싸우는 순간에도 오로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싸우다 간 사람이었다. 프란시스 쉐퍼는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을 안 직후 “내가 암에 걸린 것이 하늘에서의 싸움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나는 역사적 기독교가 사실이라고 고백하고 믿었던 것에 따라 살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 p27
라고 말했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그는 5년반 이상을 암과의 전쟁을 치루었으며 그 기간동안에도 여전히 기독교는 진리임을 확신하면서 살았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날 이렇게 기도하였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전 저의 일을 끝냈습니다. 저를 본향으로 데려가 주십시오.저는 지쳤습니다.”]ibid. p27
하나님은 현대의 사상적 혼돈시기에 참 진리를 위하여 싸웠던 사랑하는 자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본향으로 데려 가셨다. 위대한 복음주의자 그리고 위대한 문화사역자 그리고 더욱 위대한 복음 전도자 쉐퍼는 이 땅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역을 마치고 본향으로 간 것이다. 쉐퍼가 간 길에는 정말로 많은 씨앗을 뿌려졌고 그를 통한 복음의 열매는 20세기의 혼합된 세계관속에 신음하며 살고 있는 영혼들에게 단비와 같은 신선감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복음의 사역의 만개는 21세기가 될 것이다. 특별히 우리 나라에서는 더욱 꽃피게 될 것이다.
쉐퍼의 사상은 신학적으로는 개혁주의이고, 문화적인 기반은 신 칼빈주의이고 역사적으로는 청교도 신앙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있다. 그러나 쉐퍼에게 있어서 이러한 영향들은 20세기의 혼합된 세계관 속에서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쉐퍼의 사상으로 모든 것이 용해되어 누구도 할 수없었던 매우 독특한 자신의 사상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볼 수있다.
한국 교회가 쉐퍼가 강조하였고 애써왔던 지성의 회복을 위한 지성세계에 대한 투자와 전도 그리고 문화에 대한 바른 이해, 교회의 바른 표지를 세우지 않는다면 한국교회 또한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전도자요 개혁자인 쉐퍼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함으로 21세기의 개혁자로서의 길을 준비하자.
제 2 편 프랜시스 쉐퍼의 사상의 여정
많은 사람들이 쉐퍼를 이해하기를 문화 사역자나 기독교 문화 이론의 선구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쉐퍼를 너무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쉐퍼의 목적과 관점은 분명하였다.
제1장 쉐퍼의 신학 사상
제1절 성경 무오사상
쉐퍼의 신학 사상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쉐퍼의 학문의 기간들은 모두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이었고 본인 스스로가 장로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규정할 수 있는 말은 “그는 성경의 사람이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그의 회심의 사건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고 그의 목회사역 그리고 그의 라브리사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성경의 진리를 믿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당시대의 성경 유오설자들과 맞섰으며 성경무오설을 믿고 고백하는 이들과 함께 그 유명한 시카고 선언을 작성하였던 것이다. 쉐퍼는 온 전한 성경관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한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복음주의가 될 수없다고 말하였다.]프랜시스 쉐퍼,No Final Conflict (궁극적 모순은 없다) 김원주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95]pp .48
특별히 그는 로잔대회의 연설에서 우리가 확고하고 강경한 성경관을 고수해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였다.
“첫째는 성경을 확고하게 고수 하는 것만이 성경이 스스로에 대해 가르치는바와 또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대해 가르치신 바를 충실히 따르는 길이다. 그리고 둘째는 이제 앞으로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것이다.우리와 우리의 영적 자녀와 육적 자녀에게 말이다. 그런데 확고한 성경관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앞으로 닥칠 어려운 시대에 대해 준비를 하지 못할 것이다.“]ibid.,pp.41
성경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없는 한 상대주의 세상에 기독교는 아무것도 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확고한 성경관만이 상대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세워진 영향력이 있는 문화의 압력을 버틸 수있다.그러므로 확고한 성경관을 위하여 하나가 되어 싸우자고 외쳤다.
쉐퍼는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인 성경에 근거해야 하며 이런 중생을 체험한 이후에야 일생을 통해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하는 것]L.G. PARKHUST,프란시스 쉐퍼,pp.71
이라고 하였다. 또한 쉐퍼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성경의 약속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며, 하나님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세상을 위하여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며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L.G. PARKHUST,프란시스 쉐퍼,op.cit.,pp.71
고 하였다. 그는 확고한 성경의 .사람이었다.
쉐퍼가 말하고 있는 복음주의적이라는 말은 20,30년대에 영국에서 사용한 말로서 메이첸과 그의 다른 동지들이 미합중국에서 뜻했던 바 그것, 즉, 여러 형태와 정도를 지닌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성경을 믿는 기독교”를 뜻했다.1940년대 중엽에 이르러서는 복음주의라는 말이 미합중국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특히 여기서의 복음주의라는 말은 성경을 믿되 스스로를 삶의 전체 영역으로부터 단절시킴이 없이 하고, 기독교를 사회, 정치, 문화의 현실적 필요성에 효과적으로 접촉하게 하도록 시도 한다는 함축성과 더불어 쓰였다. 또한 이 말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인도하되 아울러 그 문화 안에서 소금과 빛이 되도록 한다는 함축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프란시스 쉐퍼, 위기에 찬 복음주의 윤두혁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87]pp.107]
이렇듯 쉐퍼가 복음주의라고 말하고 있는 이 관점은 그가 복음주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모든 사람을 말하고 있는 점에서 일반적인 광의의 복음주의는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쉐퍼의 신학은 개혁적 복음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의 열매는 그의 신학 수업과 교단 분열의 역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웨스터 민스터와 훼이스 신학교의 신학은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이었다. 그의 변증적인 모습을 보면 은사인 반틸의 영향을 받았음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둘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사상, [쉐퍼는 이것을 세계관이라 부른다.] 그리고 인식론과 인간의 타락에 대하여 많은 부분에서 일치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윌리암 에드가 “반틸과 쉐퍼” 김종철,박진숙역 프랜시스 쉐퍼읽기 성인경엮음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1996] pp.198-204 ]
또한 그가 비록 구 프린스톤 신학의 문제점을 논하고 있지만 그의 신학적 스승이었던 메이첸의 영향아래 있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전통적 개혁신학을 가지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쉐퍼의 신학의 영향과 형성은 개혁주의 신학 특히 신칼빈주의[화란] 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신칼빈주의자들의 문화 세계관운동 그리고 하나님의 영역주권 사상은 쉐퍼가 말하고자 하는 신학과 동일하다. 그렇다고 쉐퍼의 신학의 근본이 신칼빈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쉐퍼는 구 프린스톤 신학이나 화란신학의 잘못을 지적하기를 그것을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거기에는 성경의 진리를 이론적인 영역에 제한시키는 경향이나 어떤 비현실적인 관점이 담겨있다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개혁 역시 비판하기를 종교개혁 역시 지적인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하는 약점이 있다고 말하면서 옳은 교리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안따까움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쉐퍼는 역동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옳은 교리에 대해서는 긍정하고 자유주의나 카톨릭 교리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부정을 표시하면서 그 다음에 성령과 영적 교제를 하고 순간 순간 인도하시는 그리스도께 우리 삶을 맡겨야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1][레인 T.데니스,Letters of Francis A. Schaeffer 고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홍치모역,(서울:기독지혜사1986]pp.73 ]
2]다만 그의 개혁주의 신학의 형성이 자연스럽게 신칼빈주의 영향을 받아드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이러한 영향아래 생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적 전통을 믿는 이들과의 화합을 언제나 추구하였다. 그는 교단 분열시 앞장에 서있었지만 나중에 그는 아쉬워하였다.]쉐퍼는 가시적인 교회의 순결성을 위하여 기구의 분리가 올 때에라도 교회의 표지를 상실하면 추잡한 모습만을 보여 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탄원하노니 그런 순간이 만약에 오거나 실제로 오거든 오히려 여러분은 세상 앞에 나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주목할 만한 사랑을 내 보일 어떤 길을 찾기 바란다. 추잡한 당파로 갈라진다면 세상은 추잡성만 보게 될 것이다. 세상은 외면하고 말 것이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추잡한 것을 보면 여러분의 아들딸들을 몇 명이라도 잃게 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친구들에게 대해 거친 욕지거리를 하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들은 부모된 여러분을 떠날 것이다. 그런즉 여러분은 가시적 교회의 사랑을 보여주고 또 그 교회의 순결성은 두 원리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실천해 보인다는 것을 잊음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자녀들을 버리거나 기타 다른 사람들을 멀리 떨어지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프란시스 쉐퍼, 오늘날의 교회의 사명 권혁봉역,[서울:생명의 말씀사1991]pp.90]
이러한 관점에 있어서 쉐퍼는 개혁주의 사상을 가진 복음주의자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쉐퍼는 그의 신학적 교의를 분명히 하여 근래의 실존주의 신학인 칼바르트를 중심으로한 신정통주의 신학을 자유주의신학이라 배척하였다.]ibid.,pp.21-29. 쉐퍼는 칼바르트는 그의 임종시까지 계속 고등비평이론을 용납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한다고 하였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성경은많은 오류가 있었다고 했다. 칼바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성경의 진술이 역사적으로는 허위일 수 있으나 종교적으로는 진실하다고 한다.칼바르트의 기본 입장은 성경은 그 속에 여러 가지 종류외 과오가 있음은 물론이지만 그것이 문제시되지 않으니 단지 성경만 믿기만 하라는 것이다.칼바르트는 그의 교의학Ⅱ에서 인식론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실존주의자라고 명백히 밝혔다. 이렇듯 칼바르트를 위시한 실존주의 신학은 신자유주의로서 그들은 타락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이런 죄악된 길에 돌아오게 되었느냐는 성경의 설명을 폐지하면서도 인간은 잔인한 존재라는 실제주의는 굳게 잡으려고 노력한다.그는 성경의 역사성을 부인하면서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결과를 고수하려고 한다.그들에게는 에덴동산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이러한 교리는 예수님의 신성의 문제,삼위일체간의 구별문제,인간과 그리스도간의 구별문제,멸망자와 구원자와의 사이에도 명백한 구별이 없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쉐퍼의 관점은 명백하였다.
그는 복음주의 신학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세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첫째는 역사적 기독교의 완전한 교리적 입장이 명확하게 견지되지않으면 안된다. 둘째,온갖 정직한 질문에 대하여 정직하게 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역사적 기독교가 뛰어난 변증법이나 심리적 통합점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기 위하여, 이 20세기에도 하나님이 실제하고 있다는 것을 개인적,또는 공동적으로 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프란시스 쉐퍼, The God Who is There 기독교와 현대사상 홍치모역, [서울:성광문화사 1992]pp .263]
그의 신학은 1930년대의 자유주의의 물결을 방어하였던 위대한 사상가겸 학자들인 벤자민 워필드,제임스 오르,그리피드 토마스,캠벨 몰간,그레샴 메이첸등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개혁적 복음주의이다. 이러한 쉐퍼의 신학적 배경은 그의 사회 개혁운동에 대한 배경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의 사회 개혁 사상에서 얻은 결론
이상에 살펴보았듯이 20세기의 거장 프랜시스 쉐퍼의 사회개혁의 분명한 인식은 "절대권위의 회복, 절대 기준의 회복"에 있다. 쉐퍼는 모든 사회 현상의 붕괴에는 바로 이러한 절대 권위의 붕괴에 기인하고 있음을 본 것이다. 그가 이 시대를 말하면서 절망의 선 아래 사는 시대라고 한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절대권위의 붕괴는 성경 권위의 붕괴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그러므로 부조리한 사회의 회복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지적하였듯이
"만일 어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참조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부조리 하다."
는 것을 자각하는데서 시작한다. 무한한 참조점을 회복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이 무한한 참조점이 바로 절대권위요, 절대기준의 회복인 것이다. 쉐퍼는 여기서 그의 사회개혁의 출발점으로 보았고 이것의 회복만이 진정한 사회개혁의 완성이라 본 것이다. 쉐퍼는 인간 사회의 문제의 근원 즉 삶의 영역에 나타나는 세계관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러한 세계관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삶의 전 영역에 나타날 것임을 보았다. 이러한 선지자적인 인식은 현실의 문제에 대하여 행동하는 성경적인 응답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펴 본대로 쉐퍼의 사상은 신학적으로는 개혁주의이고, 문화적인 기반은 신 칼빈주의이고 역사적으로는 청교도 신앙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있다. 그러나 쉐퍼에게 있어서 이러한 영향들은 20세기의 혼합된 세계관 속에서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쉐퍼의 사상으로 모든 것이 용해되어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매우 독특한 자신의 사상으로 만들어졌다. 특별히 개혁주의 자들이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 이었다는 비판을 쉐퍼는 막아주는 역할을 하면서 균형 잡힌 개혁주의 사상을 실천하였다.
이렇게 균형 잡힌 개혁주의자 프란시스 쉐퍼의 사회개혁사상을 통하여 우리가 도전 받을 수 있는 것은
첫째로 개혁자의 삶은 사상과 삶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쉐퍼의 문제는 일관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그의 사상은 매우 일관되어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인생 전반에 걸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였던 그의 사상은 복음주의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전인 것이다. 사상은 행동을 낳는다는 일반론이 바로 쉐퍼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쉐퍼는 초기부터 주장하였던 '내적 사상세계는 외적인 행동을 결정 짖는다"는 주장을 누구보다도 일관성 있게 실천하였던 것이다. 사상과 삶이 일치되지 않으면 그것은 두 가지의 문제일 것이다. 첫째는 그의 사상이 오류가 있는 것이거나 둘째는 그 사상을 믿고 있지 않다는 결론뿐이다. 그런의미에서 쉐퍼의 사상과 삶은 일관성이 있었고, 일관된 그의 삶은 하나님의 진리임을 증거 하는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처럼 말과 행동이 밤 낯으로 달라지는 시대에 쉐퍼의 모습은 하나의 등대인 것이다.
그동안 개혁주의라고 부르짖었던 많은 부류들은 이러한 일관성이 없었다. 진리는 실천으로 나타나야하는 기본적인 모습도 개혁주의 교회에서 찾아 볼 수 없었다. 자칭 개혁주의라 일컫는 교회들이 내적인 성장에만 몰두하다니 정장 돌아보고 주도권을 잡아야 할 사회에서 그 키를 빼앗기고 말았다. 즉, 진리라고 외치는 복음이 교회 안에서만 메아리 쳤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일관성이 없는 삶을 살게 하였고 결국 사회에서 영향력이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교회는 울리는 꽹과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교회의 권위, 성경의 권위, 구원의 진리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일관성 있는 세계관과 삶이 살아나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신앙적 세계관의 재점검을 요구하는 것인 동시에 바른 세계관을 정립해야함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볼 수 있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를 다시금 인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을 살면서 21세기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주요한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가 지적하였듯이 점점 종교개혁의 원리가 사라지는 현상에서 그는 개혁의 원리를 재인식하게 하였던 것이다. 문화의 문제뿐 아니라 정치, 사회의 문제, 그리고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세 문제까지 잊어지고 있었던 원리들을 재인식하게 하였던 것이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정권 유착적인 모습은 개혁주의 교회의 치욕적인 모습인 것이다. 개혁주의라 부르고는 있지만 개혁주의 교회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개혁주의는 단순히 교회성장을 통해서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더구나 개혁주의 교회 목사라고 소개하면서도 정작 문화와 정치 그리고 환경과 사회의 질서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혹 관심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2차나3차의 문제이다. 이것은 세상의 소금과 빛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포기하고 있는 것을 본다.
국가에 대한 태도도 여전히 왜곡되어져 있다. 독재국가의 통치원리인 정교분리의 원칙을 개혁주의라고 인식하고 있는 어리석은 모습들은 청산해야 될 것들이다.
이것은 분명히 개혁주의의 유산이다. 우리가 개혁주의라고 한다면 교회는 이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쉐퍼도 지적하였지만 사회 개혁의 주체로서 나서지 않으면 그 자체가 인본주의 세계에 협력하는 것이요 그것은 곧 죄 인 것이다. 특별히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참여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볼 때 손봉호의
견해처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수준을 볼 때 협의의 정치참여보다는 광의의 정치참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주]
[주] 손봉호, “한국 기독교인의 정치참여 한계“, 신앙과 학문 [서울:기독교 학문연구회1997].pp.9. 협의 정치 참여는 법적이고 제도적인 권력을 행사 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고 거기서 국가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다.기독교 정당을 만드는 것도 같은 것이다.광의의 정치참여는 제도적,정치적,법적인 권력을 갖지 않으면서도 간접적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나 기관에 영향을 끼침으로 국가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손봉호는 광의의 정치참여를 말하는 이유를 “첫째 우리 유권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수준은 정단한 수단을 통하여 권력을 얻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둘째, 그리스도인 유권자들도 민주의식 성숙도에 있어서 비기독교인 유권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셋째, 우리 사회가 다종교 사회이므로, 비록 보편적인 정의를 위하여 노력할찌라도 다른 종교 신자들이 정당하게 평가해 줄 가능성이 희박하다.”[ibid.,pp.9-11.]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을 본다면 기독교적 시민운동이 가장 적절한 모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프란시스 쉐퍼가 강조한 한계선으로서의 시민 불복종운동은 일종의 기독시민운동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영역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이 운동은 사회전반에 걸친 운동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당 정치 참여에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주]
[주]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빔 리트케르크가 주장하였던 것처럼 기독교 정당이 세워져야함을 목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의 전초적으로 소수의 기독교 정치세력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빔 리트케르크,세상을 정복하라, 라브리 편지제36호,[서울:라브리],pp.7 또한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기독교입장로만 하는 것은 또다른 독재와 같다는 의미있는 말을 하였다.[ibid.,pp.7]
넷째는 오늘 우리를 향하여 현실적 선지자가 되기를 가르쳐 주고 있다.
쉐퍼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마지막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특별한 노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① 인본주의 사고 방식을 가진 지금 세대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인식해야하며
② 기독교인으로서 참된 세계관을 알 뿐 아니라 세계관에 따라 살아야 한다.
③ 우리는 노예제도 섀와 산업혁명이후의 시대를 돌아보면서 노에 제도를 반대하여, 축적된 부의 무자비한 사용에 반대하여 공개적으로 소리를 높이고 행동했던 엘리자베스 프라이, 샤프츠베리경, 윌리엄 윌버포스 그리고 죤 웨슬리 같은 기독교인들에게 감사한다.
④ 정치의 성장에 관하여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이미 그것을 지지하는 판단이다.”1)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 개혁 교회가 심각하게 보아야 할 부분이다. 지금 한국 교회는 침체기에 들어갔다.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 기독교가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것은 젊은층들이 점점 교회를 등지고 로마 카톨릭이나, 무교회주의자로 이동한다는 데에서 분명해진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 교회 내부의 문제이다. 한극의 1/4이 된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회의 영향력은 없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무능이요 죄악이다. 이원론적 사고 때문에 모든 영역에의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해야 하는 명령을 감춰버리므로 결국 세속적 인본주의 자들에게 내주었고 결국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상실되는 사회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진정으로 사회의 소금이되려면 사회를 향한 외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쉐퍼가 강조한 것처럼 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주]
[주] 쉐퍼의 현실주의와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를 바로 이해 하여야 할 것이다. 두 사람 모두다 죄악의 현실 가운데서 사랑을 전제하는 정의의 구현을 향하여 힘쓸 것을 부르짖었음은 높히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니버가 산업사회와 현대문명의 제문제들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키에르 케고르의 지혜를 좇아 하려고 한 것과,문화적인 면에서 교회는 물론 성경까지를 개혁의 대상으로 본 것은 그의 큰 실책이자 과오라고 본 박아론의 평가는 쉐퍼와 니버의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박아론 ,현대신학 연구,[서울: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1].pp.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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