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쉐퍼 들여다보기
신동식목사
쉐퍼의 출생과 그의 성장과정을 아는 것은 그를 바로 이해하는데 참으로 중요하다. 특별히 쉐퍼가 그의 사상을 펼치던 시대의 사상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쉐퍼의 출생의 시대를 아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쉐퍼는 1912년에 태어나서 1984년까지 살았던 20세기 최대의 복음 전도자이다.] 쉐퍼가 1912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당대의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라고 불리는 쟈크 엘룰또한 1912년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시대가 얼마나 위험한 시대였는지를 알고 지성세계에 위대한 사역자를 보내어 준 것이다. 사실 이 시대에 사상가들 뿐 아니라 마틴 로이드 존스,빌리 그래함,그리고 존 스토트 같은 위대한 복음의 설교 사역자들을 보내심으로 20세기의 영적 전쟁의 심각성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의 생애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의 시대는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신학적으로 대 격변기를 보냈던 시기였다.
제1절 불신가정의 외아들로서의 유년시절
쉐퍼는 1912년 1월 30일 펜실베니아 저먼타운의 파스토리아 거리의 독일계 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기독교인들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기독교 교육을 받아 본적은 있지만 그러나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쉐퍼의 부모는 자신들의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에 아이를 하나만 낳기로 하였다. 쉐퍼는 외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쉐퍼4세라고 지었다. 쉐퍼의 부모는 쉐퍼가 공학과 디자인 계통의 공부를 하여 편한히 살기를 원했다. 쉐퍼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부하고 일하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의 성적은 올A였다. 그의 가정에서의 삶은 그에게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평범한 불신자의 가정의 삶처럼 살았던 것이다. 그의 외부적인 활동이란 11세때 보이스카웃이 후원하는 웅변대회에서 우승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L. G. PARKHUST Francis A Schaeffer: The Man and His Message, 프란시스 쉐퍼 성기문 역 [서울:두란노 1995].pp.33
쉐퍼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평범한 가정의 삶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쉐퍼를 부르시기로 결정하셨던 것이다. 쉐퍼가 그렇게 강조하였던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 바로 쉐퍼 자신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제2절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으로서의 회심
프란시스 쉐퍼는 16살이 될 때까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쉐퍼는 여전히 불가지론 자였다. 억지로 교회만 출석할 뿐이었지 그는 전혀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그에게 회심의 계절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17살 때 기독교인이 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의 회심은 단순한 종교적 열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지적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쉐퍼는 소련에서 이민온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교재로 구입하여 읽던 [그리스 철학 입문서]를 읽다가 그들의 진리에 대한 기록에 매력을 같게 되었고 이러한 진리에 대한 자극은 그를 교회에로 인도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유주의 교회에서 설교를 유심히 들었다. 쉐퍼는 거기서 그 목사의 말은 자유주의적 사회윤리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알고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쉐퍼는 더욱더 철학 서적을 일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자유주의도, 철학도 그의 질문에 대답을 제시하지 못했다.]ibid.,pp.33 1800년도 이후에 불어닥친 신학적 자유주의는 실존주의 철학과 함께 온 세상을 뒤엎었다. 칼 바르트를 비롯하여 루돌프 볼트만, 본 회퍼,폴 틸리히,칼 라너등으로 신학적 자유주의는 정통 교회를 뒤흔들었으며 결국 복음의 메시지보다는 사회윤리적인 관점의 설교가 주를 이루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쉐퍼의 고민과 회심이 있었던 것이다.
쉐퍼의 정직해지려는 열망 속에서 그는 자신의 불 신앙적 모습을 발견하고 교회에 나왔으며 그는 6주 동안에 성경을 통독하고 나서 그는 기독교인으로 회심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에게 경종을 울렸던 것은 창세기 였다. 내가 들어 보았던 어떤 종교의 가르침에서도 ,철학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참된 해답을 창세기에서 찾았다”]Edith Shaefer, "The Tapestry" [Word Book, Waco,1981]pp.52
라고 말했다.
1930년 8월 그는 어느 천막 집회에서 복음을 듣고 성경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가 진리였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는 그에게 의미가 있었으며 논리적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삶에 대한 해답과 삶에 제기되는 문제들에 관해서 서로 대화하고 함께 나눌 수 있었던 합리적인 하나의 체계였다.
쉐퍼는 말하기를 “우리의 믿음의 확실한 근거는 진실 되다는 것이다. 지식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진실 되다는 것에 근거하여 행동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경험적인 관계로 인도하겠지만 기본은 개념이지 경험이 아니다”]프란시스 쉐퍼,기독교 영성과 지성사이의 대화 정혜숙 역[서울: 솔로몬 1994]pp.53
쉐퍼는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하심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제 거대한 20세기의 사상들과의 싸움의 못자리가 준비되어진 것이다.
제3절 새로운 전환점 - 믿음의 동역자를 만난 청년기.
쉐퍼의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점은 청년기에 있어서의 믿음의 동역자들과의 만남이었다. 쉐퍼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 자신의 삶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였다. 쉐퍼는 성령의 힘으로 감화되었고 자신의 미래의 선택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였다.ibid.,pp.35
쉐퍼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 그의 삶은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며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도의 삶은 그의 사역의 기반이었다. 기독 지성인들이 범하기 쉬운 영적인 삶에 대하여 그는 균형 잡힌 삶을 살았다. 그의 기도의 삶은 그가 믿는 진리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었고 확신에 찬 행위였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라브리 사역의 기본원리이기도한 것이다
쉐퍼는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 바로 쉐퍼에게 온 것이다. 그러나 쉐퍼의 부모는 외아들의 목사가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쉐퍼는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리었고 부모님의 심한 반대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목회의 길을 설명하고 집을 나왔다. 그로부터 1년후 쉐퍼의 부모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쉐퍼는 1931년에 버지니아 햄든 시드니대학에 들어갔고 1935년에 학급에서2등으로 졸업하였다. 그는 대학 생활중에 종교적 확신을 갖는 학생들을 학대하는 기숙사에 자진하여 들어갔고 그리고 문학연구회 회장, 기독학생연합회 임원이었고, 목회협회 임원이었다. 또한 그는 테파 카파 누 형제회의 회원을 역임하였다. ] 그러나 그는 이후에 세상의 조직들에는 가담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 이유는 세상의 조직들은 기독인의 삶과 신앙 에 갈등을 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러한 쉐퍼의 활동적인 삶은 그의 후기의 사역에 있어서 좋은 못자리가 되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쉐퍼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어떤 지적인 이론도 ,재미를 위한 게임도 아니었다. 기독교는 생활 그 자체이며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며 가능한 널리 전해야 할 메시지 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실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일관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31년 그가 겨우 열아홉살일 때도 그는 가난한 흑인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려고 매주 숲을 지나서 걸어 다녔다. 그는 그리스도안에서는 인종이나 피부색의 장벽이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시대적으로 흑인들에게 많은 편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쉐퍼는 편견 없는 마음으로 일관하였다. 쉐퍼의 이런 관심은 어떠한 배경에서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쉐퍼의 모든 사역의 원동력이었다.]L.G.파커스트,op.cit.,pp.40-41
마치 제네바시를 다스리기 위한 칼뱅의 법학 공부를 통한 준비처럼 쉐퍼의 활동적인 삶은 곧 바로 그의 목회 사역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뿐 아니라 쉐퍼의 학창시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평생동역자를 만났다는 것이다. 1932년6월26일 제일장로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일신론자와의 토론이 있었다. 이때에 일신론자가 자신이 어떻게 무신론자가 되었는가의 입장에 대하여 에디스라는 한 젊은 여학생이 일어나 일신론자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논박하였고 이어서 쉐퍼가 일어나서 에디스와 같은 입장에서 일신론자를 논박하였다. 에디스와 쉐퍼는 이때 만남을 통하여 지적인 문제에 관하여 깊은 토론을 하였고 쉐퍼가 대학을 마칠 때까지 매일 편지를 나누었다. 에디스의 권유로 그레셤 메이쳔의 [기독교와 자유]를 읽고 나누었다. 이러한 지적 전쟁터에서의 만남은 라브리 사역을 위한 평생동역자로서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떨어져 있을때도 성경적이며 영적인 공감대를 갖기 위해서 날마다 [매일의 빛]을 읽었다. 그리고 드디어 1936년6월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다. 바로 쉐퍼가 메이쳔 교수가 있는 “웨스터 민스터”신학교에 입학한 후였다. 이러한 에디스와의 만남은 쉐퍼의 사역에 강력한 힘이 되었다. 에디스는 1914년11월3일 중국에서 태어났다. 중국내지 선교회에서 부친의 선교사역을 살펴보며 언어를 배웠고, 가정이라는 문화의 가치를 발견했다. 에디스의 다양한 삶의 여정은 쉐퍼의 다양한 사역에 특히 동양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하였다. 특별히 에디스의 부친 조지.H. 세빌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였던 로버트 딕 윌슨과 그례섬 메이쳔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이러한 에디스집안의 환경은 쉐퍼의 신학의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제4절 실질적 사역으로서의 초기 목회사역.
쉐퍼는 대학 졸업 후에 메이쳔 교수가 있는 웨스터 민스터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쉐퍼와 에디스는 성경이 주는 진리, 완전한 기준이 되는 객관적 진리를 믿는 메이쳔의 신학을 따라 갔던 것이다.쉐퍼는 메이쳔 외에 탁월한 학자인 코넬리우스 반틸 문하에서도 연구하였다. 쉐퍼의 이러한 신학적 훈련은 그로 하여금 개혁주의 장로교인으로서 평생을 살도록 한 중요한 만남 들이었다. 그러나 신학교2학년때 메이쳔 박사의 사망후에 새 장로교회에 또 다른 시험이 왔던 것이다. 결국 쉐퍼는 맥크래 박사와 그 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델라웨어 윌밍튼의 페이스 신학교를 건립을 도우려고 학교를 떠났다. 쉐퍼는 가을 학기 수업부터 훼이스 신학교에서 수업하였다. 그리고 쉐퍼는 이 훼이스 신학교에서 모든 과정에 평균 A를 받고 처음등록 학생이자 최초로 졸업한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 후에 쉐퍼는 1938년부터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는 필라델피아 글로브시에 있는 언약 장로교회의 목사로 봉사하였다. 3년후 그는 성경장로교의 그레이크 레이크 노회의 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쉐퍼는 그해에 펜실베니아 체스터의 성경장로교회의 부목사로 일하였다. 쉐퍼의 목회는 성공적이었다. 빠른 교회의 성장이 쉐퍼의 목회에 있어졌다. 에디스는 쉐퍼가 설교할 때에 그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목사 부인으로서 에디스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책임중의 하나라고 느꼇다.ibid.,pp.51
쉐퍼는 기도와 말씀의 사람답게 많은 이들을 치료하며 특히 신유의 역사도 일어나곤 하였다. 쉐퍼는 자신의 이러한 성취에 대하여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련의 일들이 성경을 믿고 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1943년 쉐퍼의 부친은 돌아가셨고 그해에 세인트 루이스에서 그의 새로운 사역이 시작되었다. 쉐퍼는 주2회 설교하고 수요일 저녁 기도모임에서는 성경 강해를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한 성경공부와 자매들에게는 성경공부 인도법을 가르쳤다. 곧 그 도시에 20개 정도의 지하실 방이 생기게 되었다]ibid.,pp.56
. 실질적인 평신도 제자운동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쉐퍼의 평신도 제자운동은 그의 모든 사역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기 위한 사역의 주체자들이 바로 평신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은 그의 사역의 동역자들과 그리고 그의 영향아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동역자들의 면면을 볼 때 뚜렷해짐을 볼 수 있다.] 레인 데니스가 엮은 프란시스 쉐퍼의 삶과 사역에 기고한 인물들만 보더라도 그의 사역의 열매가 평신도들 사역에 있음을 분명히 알 수있다. 그리고 그의 자녀인 프랭키 쉐퍼 5세가 바로 영화감독을 함으로서 자기 분야에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쉐퍼의 평신도 사역은 그의 사역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쉐퍼의 목회는 실질적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는 신학적이며 지적인 논쟁들에 관해선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는 경험과 감정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렇지만 그 경험과 감정은 기독교 신앙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즉 기독교 신앙은 모든 부분이 확신할 만한 진리로 이루어진 성경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공유되어야 할 진리이다. 기독교인들은 기도가 변화를 일으킨다는 믿음 가운데 살아야 한다.L.G.파커스트,프란시스 쉐퍼,op.cit.,,pp.59
쉐퍼의 목회 사역은 참으로 성경을 믿는 이들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체스터에서의 2년 남짓한 사역을 하면서 교회의 건축을 도울 수 있었다. 특별히 그는 교인수가 500명이 넘는 이 교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격이 없는 나눔을 가질 수 있었다. 부두 노동자, 농부, 또는 학교 교사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성장 배경이 이러한 분위기였기에 그는 더더욱 관심과 사랑을 가질 수 있었다. 목자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또한 배울려고하는 것은 참으로 귀중한 은사임이 틀림이 없다. 20세기의 혼란 속에서 바른 진리를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적인 전도자로서의 쉐퍼로만 보는 것은 매우 편견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쉐퍼의 목회사역은 이렇게 현실적이고 실제적이었다. 이렇게 훈련된 쉐퍼를 하나님은 또다른 사역에로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제2장 쉐퍼를 향한 하나님의 두 번째 부르심 - 라브리 사역
제1절 영적인 쉼터 - 건초더미속에서의 부르심
쉐퍼의 남은 40여 년간의 사역은 영적 쉼터라고 불리우는 라브리 사역에 있다. 쉐퍼는 세인트 루이스에서 목회를 하던 1947년에 미국 기독교 교회협의회와 장로교 해외선교회 독립협회를 위해서 유럽으로 첫 여행을 하게되었다. 쉐퍼는 3개월 동안의 여행을 통하여 생애의 전환점을 가지게 되었다. ·쉐퍼의 가족은 이 여행의 결과로 유럽에 있을 것인가,떠날것인가 두방향으로의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였고 결국 그들은 모든 안정된 곳을 버리고 영적 전쟁터인 유럽에 남기로 한 것이다.]에디스 쉐퍼,라브리 박경옥,박하영 역[서울:호도애 1994]pp.37
쉐퍼는 유럽의 모습이 모든 것이 갈기갈기 찟어진 채로 나뒹굴고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럽은 신앙과 질서 있는 사고를 가치 없이 만들어 버리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흐름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라는 미명아래 절대적 진리는 사라지고 오로지 상대주의적 사고가 편만해 있는 유럽은 바로 쉐퍼가 있어야 할 전쟁터였다.
쉐퍼는 유럽으로의 여행을 통하여 많은 동역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중에는 에버릿 쿠퍼박사와 그의 평생의 동역자였던 화란의 미술사가 한스 로크마크였다. 이들의 만남은 쉐퍼의 사역에 크나큰 기둥들이었다. 쉐퍼는 분명한 성경적 입장으로 인하여 많은 곳으로부터 강연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역가운데 그에게도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신앙에 대한 반성이었다. 쉐퍼의 이러한 영적 갈등은 쉐퍼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심각하였다.
“ 1951년과1952년에 나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 영적인 위기에 봉착했었다. 내가 불가지론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이미 여러해 전이었다. 그 후 나는 미국에서 10년을 목사로 봉직했으며, 도 그후에는 나의 아내 에디스와 수년간 유럽에서 봉사해 왔다. 이 때에 나는 역사적 기독교의 위치와 가시적 교회의 순결성을 변호하고 나서야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점차로 나에게 문제가 닥쳐왔다. 그것은 실제에 대한 문제였다. 이것은 양면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내가 보기에, 정통주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노라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성경이 그토록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기독교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사건들 속에 있어야 할 사실상의 핵심적인 실재를 별로 찾아 볼 수가 없었더라는 점이다.
둘째로, 내 자신의 실재도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초창기보다도 더 약화되어 있는 모습으로 점점 나타나더라는 점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내 자신의 전반적인 위치를 재고해 보아야 하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 내외는 그 때 참페리에 살고 있었다. 나는 내 아내 에디스에게 솔직히 내가 다시 온전해 과거로 되돌아가서 불가지론에 이르러 문제 전반을 다시 한번 검토해야 하겠노라고 말했다. 이 때야말로 나의 아내에게도 진정 어려운 때였을 것으로 본다. 그 당시 내 아내는 나를 위해 무척 기도도 많이 했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프랜시스 쉐퍼,“진정한 영적 생활” , 권혁봉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8]pp.5-6.
쉐퍼는 날씨가 청명한 때는 산 속을 거닐고 비가 오는 때에는 낡은 오두막집 건초더미사이로 거닐면서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를 생각하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기도하고 거닐었다. 이러한 쉐퍼의 영적 갈등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로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를 재고하는 가운데서 나는 또 다시 발견한 사실이 있으니, 무한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엄존하시는 기독교야말로 참되다는 것을 알만한 전적으로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좀더 나아가서 내 생애 가운데 심오한 차이점을 일으키는 기타 어떤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재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나는 다음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받은 교훈이 많이 있지만, 우리들의 현재의 삶을 위한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사역의 의미에 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는 많이 들어보지 아니 했다는 것이 문제점이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 것이었다. 점점 태양은 밝히 떠오르고 노래가 흘러 나왔다.“] ibid.,pp.6
그러나 바로 이러한 쉐퍼의 영적 갈등과 회복은 진정한 라브리 사역으로의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쉐퍼의 영적 갈등이 없었다면 라브리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라브리의 진정한 기초의 과거와 현재이다. 역사적 기독교의 해답을 가르치고 정직한 질문에 대해 정직한 대답을 제시하는 일은 실로 중차대한 일이다. 그러나 실재에 이르는 것은 노력을 통해서이다. 이런 노력을 통한 실재가 없었더라면 라브리와 같은 기민한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ibid., pp.6-7
라브리에서의 그의 사역은 절대적 진리를 위한 투쟁이었다. 라브리에는 국적과 연령, 배경과 관심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와서 진리에 대하여 토론하고 진리를 찾고 있다.ibid.,pp.18
라브리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하였다.
“라브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삶과 일속에서 증거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그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기도를 기초로 하여 살기로 한 것이다.“]ibid.,pp.21
제2절 영적인 나팔 소리 라브리의 메시지
라브리의 사역의 목적은 앞에서 보았듯이 분명하였다. 라브리의 분명한 사역은 특히 라브리의 기도 선언에 잘 나타나고 있다.
① 우리는 우리의 재정적, 물질적 필요를 기도로 하나님께만 아뢰고 사람에게 요청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한 사람들에게 사역에 동참하신다는 생각을 주신 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②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만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기를 기도한다. 라브리를알리기 위한 홍보물을 돌리지도 않는다.
③ 우리는 위원회를 열어 우리 스스로 장래를 계획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을 계획하셔서 날마다 그 계획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인도하시기를 기도한다.
④ 우리는 일반적인 경로를 통해 간사로 와 달라고 간청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간사만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한다.]ibid.,pp.21 라브리 사역의 소개는 에디스가 지은 라브리에 소상하게 기록되어있다.
바로 라브리의 위대한 사역의 시작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었다. 라브리는 시대적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다가올 60년대의 무질서와 영적 위기에 있어서의 영적 쉼터요 충전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었다.
라브리의 기본 사역은 사고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쉐퍼는 이 라브리 사역의 처음부터 인간 생활전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기에 라브리의 소명과 목적에는 방문자들의 지성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생활속에서의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포함된다. 라브리의 아름다운 모습은 라브리는 모든 사람의 정직한 질문을 신중하게 취급합니다. 라브리는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과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라브리는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진리라면 그것은 종교적인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도 정직한 대답을 준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답변”을 주는 것이 바로 라브리의 기본 입장인 것이다.] 라브리 편지 제23호 “국제 라브리 안내지” 한국 라브리 자료센터
이러한 라브리의 사역의 모습은 상대주의와 절대적 권위가 무너져 버린 그래서 혼란과 부패가 편만한 유럽과 미국을 향한 영적인 오두막이자 충전소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쉐퍼는 라브리를 찾아온 이들을 항상 초보로 돌아가도록 한다.에디스는 쉐퍼가 한 남학생에게 하는 흥미 있는 질문 네 가지를 기록하였다.
첫째, 당신은 성경에 분명하게 계시된 대로 무한하시지만 인격적으로 알 수 있는 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가?
둘째, 당신은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셋째,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공간과 역사 속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는가?
넷째, 당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해하셨던 일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무릎을 꿇었는가?] 크리스토퍼 캐서우드,“5인의 복음주의 지도자들 ” 김영우역 ,[서울:엠마오 1987] pp.165
이것이 바로 라브리가 행하는 사역 현장의 모습이다. 쉐퍼는 내담자들과 대화하면서 항상 모든 질문의 배후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였다. 이러한 쉐퍼의 라브리의 사역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몰려들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경만이 모든 진리요 삶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음을 선포하였던 것이다.
쉐퍼에게 있어서 사역은 “전적으로 목회”였다. 그는 자신을 근본적으로 한 사람의 복음 증거자로 보았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내 주신 주로 지적인 문제를 지닌 자들로부터 던져지는 특수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는 자신을 학적인 철학자로 여기는 것을 부인하였지만 자신의 철학이 분명하다는 사실만큼은 주장하였다.]ibid.,pp.168
쉐퍼의 라브리 사역의 위대한 업적은 바로 이원론적 신앙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가를 보여 주는 데 있었다. 성경은 분명히 “기독교는 모든 실재의 진리이다”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기독교가 관여하며, 기독교가 답변하지 못하는 문제의 영역은 없다는 사실이다. 즉 모든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요 모든 진리가 바로 하나님의 진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쉐퍼는 신앙의 궁극적 모습을 분명히 하였다.
“만일 당신이 신앙의 기반이 단지 경험뿐이라면 그 기반은 견고하지 못해서 환난의 바람이 불 때 당신의 신앙은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기독교를 순수 지성주의로 생각한다면, 환난의 바람이 불 때 그것 역시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기반은 반드시 경험이 아닌 내용이어야만 된다. 이때 비로소 기독교 신앙은 전인격을 포괄하나 그 기반은 인식에 있는 것이다."]ibid.,pp.170
이러한 의지와 감정이 있기 전의 지성이 먼저인 신앙을 분명히 하는 것이 바로 쉐퍼의 사역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라브리의 사역은 아니었다. 쉐퍼의 동료이자 제자인 오스 귄네스는 말하기를
“라브리의 사역은 진리도 중요하였지만 사람도 중요하였다. 이 두 가지가 바로 라브리의 비밀이었다”]ibid.,pp.171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라브리는 사람을 사랑하는 곳이다. 그리고 스위스의 라브리 간사인 엘리스 포터의 말대로 이외의 라브리의 특별한 관심분야는 라브리가 증거 하고자 하는 나팔소리를 더욱 분명하게 하여줌을 볼 수 있다. 포터는 말하기를 라브리가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신앙의 합리성이다. 라브리는 기독교 신앙이 비합리적이거나 실존적인 비약이라고 믿지 않는다.
둘째는 성경의 권위외 무오성이다. 라브리의 무기는 바로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위에 있다.
셋째는 악의 문제와 대결이다. 악에 대한 철저한 인식만큼 라브리는 악의 문제에 대한 전면적인 싸움과 대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넷째는 바른 영성의 문제이다. 라브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른 영성에 기초한 초자연적인 영적 실재성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루중의 자연적인 생활과 초자연적인 생활의 매 순간순간이 모두 가치 있고 의미가 있는 인생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 입니다. 그것은 바른 영성위에서만 가능함을 강조한다.
다섯째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다. 인간이란 누구인가? 인간이 누구인가를 바르게 알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인다.
여섯째 사회적인 책임에 대하여 연구한다.] 엘리스 포터,“라브리란?” “혼돈시대 속의 확실성을 찾아서” 성인경편 [서울: 일지각 1996] .pp. 200-203
제3장 결 론
불신가정에서 태어나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에디스를 만나고 함께 주의 군사가 된 쉐퍼의 삶은 하나님이 이 창조의 세계를 어떻게 이끌어가고 계신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현대인의 아픔을 치료하고 교회의 무너짐을 막아주는 병원이자, 주춧돌의 역할을 감당한 라브리의 모습은 쉐퍼의 삶을 넘어 하나님의 세밀하신 간섭하심에 감격할 뿐이다.
기독교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시대에 하나님은 뛰어난 변증가를 보내주셔서 성경의 하나님이 실존하는 진리임을 분명히 들어내도록 한 그의 삶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무척이나 큰 도전이 되는 것이다. 스위스의 작은 지역, 작은 공동체, 그리고 작은 사람인 쉐퍼는 하나님의 실제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사람을 귀중히 여기며, 성령의 능력을 확신하며, 도덕적 상대주의에 경종을 우리는 쉐퍼와 라브리의 사역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는 목회자로, 전도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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