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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쉐퍼-변증설교

by 【고동엽】 2011.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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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퍼의 변증설교 -1-

성인경목사[한국 라브리 총무]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변증설교를 즐겼지만 그렇다고 변증설교만을 한 사람은 아닙니다. 쉐퍼의 어린이 설교를 읽어보면 변증설교라기 보다는 강해설교 내지 이야기설교와 같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남아있는 그의 육성테이프 중에 로마서, 창세기, 출애굽기, 요한계시록 등을 언뜻 들으면 성경공부같지만 라브리(L'Abri)라고 하는 특수한 공동체에 모여든 청중들을 위한 변증설교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가 만났던 청중들을 위한 특수 설교였습니다. 본 강의에서는 한국교회와 설교자들에게 다소 도움이 될까 하여 쉐퍼의 변증설교의 몇 가지 기본적인 원리를 찾는 것에 집중하겠습니다.

1. 쉐퍼가 추구한 변증학과 변증설교의 목적

변증학(Apologetics)과 변증설교(Apologetic Preaching)는 한 그루의 '나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변증학이 나무 뿌리라면 변증설교는 나무 가지와 같습니다. 뿌리가 없는 나무 가지가 없듯이 변증학이 없는 변증설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변증설교는 변증학의 이론적 뿌리 위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복음 전도의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대에 탁월한 변증가로 알려진 쉐퍼의 변증학과 변증설교의 목적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쉐퍼는 "변증학의 첫째 목적은 방어(defense)이며 둘째 목적은 어떤 특정한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기독교를 전달(communication)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쉐퍼는 변증학의 이 두 가지 목적을 그의 변증설교에 적용했으며, 그 결과는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열매를 얻었습니다.

첫째, 세상의 도전으로부터 복음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쉐퍼는 변증학의 '방어와 전달'이란 두 가지 목적 중에, '방어'를 변증학의 소극적 측면이라고 했고 '전달'은 변증학의 적극적인 측면이라 했습니다. 방어와 전달은 변증학이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으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 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쉐퍼는 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방어는 반드시 필요하며 또한 사태를 대비하는데 적합한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기독교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방어는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대답이다. 이러한 대답은 나의 인격적 영적 지적 생활의 통일을 위해서 먼저 나에게 필요하며 그 다음에는 내가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하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 가하는 반론과 애매 모호한 의미가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에 대한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도 기독교를 짊어지고 갈 다음 세대들에게 역사적 기독교의 입장을 계속해서 파수하도록 기대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시대에 상관없이, 복음을 방어하고 파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업무입니다. 많은 변증가들이 나타나서 기독교를 변호한 것은 이 첫 번째 의미에 속합니다.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그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한 사람들입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의 '변명(Apology)'은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 신앙을 변호했습니다. 오리겐(Origen)의 '반 셀수스(Contra Celsus)'는 무신론자에 대한 답변이며, 어거스틴(Augustine)의 글들은 펠라기안주의(Pelagianism)에 대한 방어이며 기독교가 사회와 국가를 반대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변호입니다. 그러나 계몽주의에 영향을 입은 회의주의, 세속철학, 과학주의, 자유주의가 풍미하기 시작하면서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생각한 칼빈(John Calvin)의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천주교의 교리적 오염에 대해, 버틀러(Bishop Joseph Butler, 1692-1752)의 '유추적 종교(Analogy of religion)'는 회의주의적인 무신론 사조에 맞서 유신론증으로 싸웠던 증거들입니다. 그리고 카이퍼(A.Kuyper), 메첸(Gresham Machen), 반틸(Cornelius Van Til) 등은 신학적 자유주의를 향한 적극적인 방어를 펼쳤습니다. 이처럼 변증학은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변호하기도 하고 신학의 길잡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성경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복음을 방어하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3:15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변증학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복음에 대한 도전은 언제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복음에 대한 질문이나 신앙의 이유를 묻는 도전은 어느 때나 상존하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2)사람들의 질문에 "대답(απολογιαν, a defence)"을 준비해야 합니다. 여기의 "대답"이란 말은 법정적인 용어인데, 재판관 앞에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말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 내지 방어하라는 것입니다. 3)대답하는 기본 태도는 온유(πραυτητοσ, gentleness)와 존경(φοβου, respect)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난폭하게 질문을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무시하는 태도로 접근하면 안됩니다.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현대사상의 도전으로부터 복음을 방어하는 것이 변증설교이며 그 중에 복음을 방어하는 것이 변증설교의 일차적 업무입니다.

둘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변증학을 방어적인 목적에만 머물게 하고 복음을 전달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변증학의 가치를 반감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변증 방법을 사용하든지 복음을 전도할 목적으로, 특히 불신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실제적인 전달 도구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변증학의 장점이며 당연히 그것이 변증설교의 주요 임무가 되어야 합니다.
쉐퍼는 변증학의 전달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독교 변증학은 도개교(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판 성 둘레의 물을 건너기 위해 성벽에 매단 다리)가 있는 성 안에 살면서, 가끔씩 성벽 밖으로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변증학은 성 안에 틀어박혀 허리를 벽에 기대고 앉아서 적을 향해 '너희 놈들은 이 안까지 못 와!'하고 고함 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이론으로나 실천에 있어서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할 것 같으면 그는 20세기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과의 접촉을 잃어버린다... 도리어 자기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의 현실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그러므로 변증학의 적극적인 측면은 오늘의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증설교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설득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변증설교는 우선 기독인 자신을 위해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최상의 방어는 공격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참호로 둘러싸인 방공호 속에 언제까지나 숨어 있을 수 없으므로 공격을 해야 승리가 보장되고 문제를 극복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상대주의적이고 종교다원주의적인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이 대학교를 다니거나, 철학 서적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있는데 적극적인 변증이 없는 설교는 그들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영적 전쟁 시대를 살면서 성도들을 무장 해재시켜놓는 것은 일종의 도피적인 '범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속 사상과 반기독교적인 적군에게 둘러싸여 포로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잘못된 영성에 사로잡힌 바 있는 골로새서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교훈은 전달적인 변증을 잘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골로새서4:6에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크게 3 가지를 상기시킵니다. 1)마땅히 변증해야 할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특히 "각 사람"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사람마다 각자의 질문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질문에 주의해야 할 때에 살고 있습니다. 2)대답하고 변증하는 것(αποκρινεσθαι, to reply)은 교회의 사명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본래 "대답한다"는 말은 법정에서나 사무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3)변증하는 태도는 은혜스럽고(χαριτι, with grace)와 소금을 친 것처럼(υλατι ηρτυμενοσ, with salt seasoned) 하라고 변증할 때 온유와 존경하는 태도와 함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은혜스럽고 꼭 필요한 만큼만 말하는 것입니다.

 

 

 

 


3. 쉐퍼의 변증설교의 특징

쉐퍼의 변증설교의 특징은 다른 모든 탁월한 변증설교의 특징과 맥을 같이 하는데, 특히 바울 사도의 변증설교의 특징에서 발견되는 기본 원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방어와 공격, 혹은 방어와 전달이라는 두 가지 틀인데, 여기서는 그가 무엇을 그토록 방어하고 공격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쉐퍼의 변증설교는 언제나 기독교 진리 체계, 즉 기독교 세계관을 방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쉐퍼의 변증설교를 듣는 기쁨은 그가 다루는 주제에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신앙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키는 잘못된 영성에 대해서 가슴 아파했습니다. 특히 잘못된 영성은 기독교 진리를 평범한 일상생활과 분리하고 사회적인 책임을 무시하도록 방치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설교와 강연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한다면 신앙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법률적인 문제와 함께 삶의 전 역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 바른 영성이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잘 알다시피, 쉐퍼 전집의 통일적인 중심 주제가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인생 전반에 걸친 그리스도의 주권'입니다. 그는 설교에서 철학, 정치, 역사, 과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특히 현대적인 이슈를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분명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것은 비진리와의 타협을 배제하는 것이며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린도후서 4:2)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이것이 모든 설교자의 부름입니다.

우리도 주제에 제한을 두거나 고의적으로 껄끄러운 문제나 현대적인 이슈를 회피하므로 진리를 증거 하는 것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특히 정치, 경제적인 문제나 요즘과 같은 때는 선거와 관련된 문제 등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진리 전체 혹은 전체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독 신앙이야말로 신비적이지만 동시에 합리적이라는 것을 방어했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그의 책제목처럼 '이성으로부터 도피하여' 감정적 혹은 영적 체험만이 신앙이라고 말하던 시대였습니다. 신정통주의자들의 득세로 기독신앙의 초월성은 확보되면서도 합리성이 양보되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합리성이 짓밟히던 시대에, 쉐퍼는 신앙의 초월성과 합리성을 둘 다 붙잡으려고 애썼습니다. "로마서 5:5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의 의미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experientially)이 부끄럽지 않다는 의미이고, 1:16은 우리는 지적으로(intellectually) 복음의 내용이 부끄럽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는 로마서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영적 경험이 부끄럽지 않을 뿐 아니라 삶의 체계로서, 즉 '세계관(worldview)'으로서 기독교를 가지고 사는 것도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 신앙이 신비적이며 동시에 합리적이라는 것을 설교한 것인데, "신앙은 체험이다"고 떠들던 서양의 1960-70년대의 실존주의적 영적 풍토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소리였으며, 복음을 세속 사상으로부터 방어하고자 하는 쉐퍼의 열정이 보이는 설교였습니다. 쉐퍼는 신정통주의적이고 실존주의적인 신학계에 대항하여 "우리 기독인은 복음을 경험적으로나 지성적으로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평생 외쳤습니다. 그것은 바울사도가 로마서나 다른 로마 통치자들(아그립바, 베스도)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설교한다는 것은 복음을 방어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사리에 맞다", "합리적이다"라는 것을 과시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6:25)

둘째, 쉐퍼의 변증설교는 잘못된 세계관을 분석하고 파괴하여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종교 다원주의와 지적 상대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상아탑에서 시장바닥까지 모두가 "좋은게 좋다"는 시대이며 "진리는 없다"고 고함치는 시대입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진리가 시퍼렇게 살아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쉐퍼는 설교와 강의를 통해 그런 잘못된 세계관과 대결했습니다. "로마서 1:27은 레즈비언(lesbians)을 포함한 호모섹스(homo sexuality)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떠난 결과 성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타락이 발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소위 종교적인 사람들이 빅토리안(Victorian) 식으로 현실을 덮어두고 의연해 하려는 경향과는 대조적인 성경의 사실주의적(realism) 성격을 볼 수 있다"는 설교는, 쉐퍼가 얼마나 우리 시대의 유행하는 사조를 설교로 태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는 대결을 동반한다"는 그의 변증학의 신념이 설교에 적용된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1:9절에서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고, 고린도후서 10:5-6절에서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1)성경의 기초 위에 바로 서서, 2)비기독교적 사상을 비판하고, 3)성경적 세계관을 세워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모두 잘못된 세속 사상에 대한 적극적인 복음의 대결을 선포한 것이며 오늘날도 그와 같은 적극적인 설교, 즉 복음으로 잘못된 사상을 파괴하고 복음을 전달하는 시도가 절실한 때입니다.


특히 쉐퍼는 현대문화의 여러 가지 문제와 싸우며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현대문화는 주로 점점 경건의 능력이 없는 문화적 신비주의를 추구하고 있고, 절대적 진리를 상실한 감각적인 인식방법을 추구하고 있고, 이웃도 모르는 이기주의적인 자기만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의식없이 사는 현대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쉐퍼는 현대인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요구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석했는데, 1)개인적인 인격성의 확실성, 2)지식적인 통일성, 3)도덕적 딜레마의 해결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들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인간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정체성을 상실한 원인을 쉐퍼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습니다. 1)인간을 인간 이하로 비인간화시킨 현대신학과 허무주의 때문입니다. 현대 신학은 인격을 환영으로 전락시켰고, 허무주의는 인간을 무의미 속에 가두었다. 2)진리관에 근본적인 변화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상대주의, 이성에서의 도피, 준거틀 부재가 지식의 통일성을 파괴했다. 3)형이상학적, 심리적인 해결 방법은 인간의 딜레마(dilemma, 궁지)를 더 비참하게 만들뿐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죄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인간은 인격과 지식, 그리고 도덕적 궁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쉐퍼가 본 현대를 살아가는 죄인 된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인 분석을 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연구보다 문화 분석을 앞세우거나 서투른 문화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쉐퍼의 스승 반틸(C.Van Til)은 그 점이 설교자가 직면하는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설교자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배운 정도의 얕은 지식을 가지고 사회학, 정치학, 심리학 등을 강단에서 말하되 자신의 아마추어식 주장이나 편견을 하나님의 진리라는 겉옷에 싸서 말하는 것이다." 평생토록 문화적 변증학(cultural apoplogetics)을 추구한 쉐퍼가 스승으로부터 가장 귀담아 들어야 했던 따가운 충고였습니다.
2. 쉐퍼의 로마서 설교의 실제

쉐퍼는 변증학의 이러한 기본 목적을 로마서설교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1:16의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는 말씀을 보면, 바울이 여기에서 사용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는 개념은 로마서 5:5에 나오는 '부끄럽게 하지 않음은' 에서의 그것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5:5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의 의미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experientially)이 부끄럽지 않다는 의미이고, 1:16은 우리는 지적으로(intellectually) 복음의 내용이 부끄럽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는 로마서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영적 경험이 부끄럽지 않을 뿐 아니라 삶의 체계로서, 즉 '세계관(worldview)'으로서 기독교를 가지고 사는 것도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 당시 로마의 상황을 살펴보자. 그 당시 그곳은 매우 지적이고 철학적인 분위기였다. 이러한 곳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바울은 기독교의 내용, 기독교 세계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디모데후서 1:8,12,16에서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사슬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여'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부끄럽지 않다고 말한다. 기독교의 삶을 사는 것과 진리의 체계,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의 내용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라는 것은 주님의 매우 엄한 명령이고 평생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다(누가복음 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일이 잘 되어갈 때만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감옥에서조차(디모데후서 1:12)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어려울 때에도 기독교인으로서 삶과 기독교의 내용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쉐퍼는 이어서 "1:26의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란 구절은 이사야 3:16,17의 '주께서 말씀하신다.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목을 길게 빼고 다니며, 호리는 눈짓을 하고 다니며, 꼬리를 치고 걸으며 발목에서 잘랑잘랑 소리를 내는구나.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주께서 그들의 하체를 드러내실 것이다'(새번역)는 말씀의 병행구절이며, 바울은 여기에서 '동성간의 성관계(homo sexuality)'의 문제가 아닌, 왜곡된 이성간의 성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를 상실한 인간은 인간이 가진 아름다움 또한 상실한다.
1:27의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래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는 구절은 레즈비언(lesbians)을 포함한 호모섹스(homo sexuality)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떠난 결과 성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타락이 발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소위 종교적인 사람들이 빅토리안(Victorian) 식으로 현실을 덮어두고 의연해 하려는 경향과는 대조적인 성경의 사실주의적(realism) 성격을 볼 수 있다. 그리고 1:28의 '또한 저희가 마음(지성)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란 말씀을 보면, 바울은 여기서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지적인 반역을 먼저 다루고 있다. 즉 우리가 지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면('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 후에 하나님은 우리를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내버려두신다는 것이 그 순서이다. 즉 지적인 영역에서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먼저이고, 그 후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까지 미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타락은 지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므로 치료를 할 때에도 근본적으로 지적인 영역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떠났던 방향을 되돌려야 한다." 4. 쉐퍼의 변증설교 방법

첫째, 쉐퍼는 설교를 하기 전에 청중 분석부터 먼저 했으며 각 사람에게 알맞은 대답을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청중을 크게 세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1)진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고 진리를 찾는 사람, 즉 필립이 만난 이디오피아 내시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구약 이사야의 글을 읽으며 그 뜻을 알기 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사도행전8:26-39) 예수님이 만났던 니고데모(요한복음 3:1-20)나 베드로가 만났던 고넬료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사도행전10:30-47)

2)정직한 질문을 갖고 씨름하는 사람을 만났을 경우입니다. 아직 진리를 믿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고 참과 거짓이 있다고 인정하고 옳고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만났던 아테네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며(사도행전 17:16-21), 예수님이 만났던 부자 청년도 이런 경우입니다.(누가복음 18: 18- 23) 이를테면 그들은 정직한 영적 갈등과 질문을 가진 사람입니다.


3)진리가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경우입니다. 바울이 만났던 아그립바 왕(사도행전 26: 19-32)이 그런 사람인데 전제의 비일관성을 접촉점으로 삼아 시간이 걸리지만 대화를 풀어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쉐퍼는 청중들의 강점과 약점을 잘 분석하고 전했으며 특히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는 넘어지게 하는 돌(stumbling block)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 사람들의 강점은 율법에 대한 열심이지만 그것이 또한 그들의 가장 큰 약점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헬라 사람들의 강점은 그들의 지혜였는데 약점이 되었습니다.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미국사람들의 강점은 자유입니다. 그 자유 때문에 마약중독, 동성애, 총기사고 등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한국인들의 장점과 약점은 공부, 열심, 훈련 중에 어느 것이 장애물이 됩니까?

둘째, 쉐퍼는 변증설교라 하여 어렵게 하지 않고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쉽게 했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의 설교는 어느 누구의 설교보다 쉬웠습니다. 결코 현학적이거나 철학적이지 않고 평이했습니다. 그는 종종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말구유를 낮추어 양이 먹을 수 있도록 하면 모든 동물이 와서 먹을 수 있다." 그 말을 듣고 실천한 그의 제자 제람 바즈(Jerram Barrs, 미국커버넌트신학교 교수)는 "제가 발견한 것은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교하니까 어른들이 더 '유익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쉐퍼는 설교를 할 때 지성에만 호소하지 않고 전인격에 호소했습니다. 쉐퍼는 감정에만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성에만 호소하지도 않았습니다. 제람 바즈는 그것을 두고, "듣는 이의 지, 정, 의를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한다"고 했는데 정확한 지적입니다. 듣는 청중들의 지성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서와 그들의 의지도 움직일 수 있도록 설교해야 합니다. 쉐퍼는 자신의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전하면서도 감동과 열정을 가지고 전했습니다.


특히 쉐퍼는 설교에서 강한 도전과 갈등을 유발하고 선택을 촉구합니다. 그의 변증설교는 신앙을 견고하게 해 주고 그것을 어떻게 현대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변증설교의 가장 큰 장점은,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하신 것처럼, 기존의 잘못된 개념을 수정하고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거나, 현대적 문제를 도피하지 않고 재해석하고 대결하므로 청중들이 강한 도전과 선택의 기로 앞에 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에 필요하지만 말씀을 듣고 결단을 촉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쉐퍼의 변증설교는 라브리(L'Abri)라고 하는 특수한 공동체에서 행해지고 계발되어진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서 바다와 산을 넘어 알프스산의 론 계곡까지 찾아온 고뇌하는 젊은이들, 이를테면 불가지론자, 회의주의자, 마약환자, 동성애자들에게 주어진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변증설교가 좋은 설교방법이라고 하더라도 아무에게나 언제든지 남발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지적 상대주의와 종교다원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변증설교의 원리를 염두에 두고 설교하는 것이 점점 필요합니다. 변증설교로 인해 한국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흥왕해 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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