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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21세기에 쉐퍼가 주는 의미

by 【고동엽】 2011.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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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쉐퍼가 주는 의미

성인경(L'Abri Fellowship)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그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갔지만 21세기의 문턱에서 진리를 찾아 길을 헤메는 고뇌하는 청년 대학생들에게는 23권의 크고 작은 책 속에 담아놓은 그의 깨달음과 그가 세운 라브리공동체는 작은 소망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진리가 땅에 떨어지고 영성이 메마르고 인간의 존엄성을 잊어가는 세대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패커(J.Packer)가 잘 지적했듯이 “추측컨대 그의 강연과 책이나 영화와 같은 풍자들은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것 같지만 그 어떤 것들보다 더 오래 영향력이 지속될 것이다”고 한 말이 정확한 예견이 되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주목해야 할, 특히 21세기에 쉐퍼가 주는 의미를 몇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신학적으로 쉐퍼의 영성(靈性, Spirituality)에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온갖 불건전한 영성운동의 와중에 서 있는데, 불교나 유교적 영성, 서양 이원론적 영성 혹은 다원주의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인 영성들이 영적 무기력을 조장하거나 괴물같은 영성을 퍼뜨리거나 혹은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영적 질서가 어지럽혀지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런 영적 혼란의 때에 쉐퍼가 주는 첫째 의미는 성경적인 영성 찾기입니다.  

쉐퍼는 그 자신이 영적 위기를 여러 차례 경험하면서 과연 ‘바른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통찰로부터 “바른 영성이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뿐만 아니라 타락의 결과로 파생된 전 인간의 회복, 즉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의 회복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삶의 전 영역에서 영적 실체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바른 영성의 강조점을 삶의 전 영역, 즉 예술, 문학에서부터 법과 정부의 영역까지를 예수님의 주재권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말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성령의 초자연적인 영적 상황 가운데 있음을 자각하고 순간순간 예수님의 구속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의 [True Spirituality, 진정한 영적 생활]이란 불후의 명작에서 이런 기독인들의 삶의 방법을 일컬어, “순간순간마다 믿음으로 내주 하시는 성령님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김창범씨는 쉐퍼의 이런 영성을 “스팬스의 경건주의와는 다른 1)통합적 영성의 회복, 2)현재적 영성의 회복, 3)실천적 영성의 회복, 4)문화적 영성의 회복의 특징이 있다”고 했는데 정확한 진단이라 생각합니다. 쉐퍼는 라브리(L'Abri)의 운영원칙을 정하면서도 그런 영성을 살려서 “만약 라브리가 영적 실체가 상실되었으면서도 제도나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 계속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차라리 문을 닫아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둘째, 철학적으로 쉐퍼는 그가 살던 시대의 세속 사상과 대결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양적 성장과 건물 건축에 바빠서 세속사상이 성도들의 생각을 잠식하고 비독교적인 세계관에 물든 삶을 사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최근에 나라를 시끄럽게 만든 대표적인 사건들의 핵심에는 기독교인들이 다 끼여 있었고, 대부분은 헌신된 기독교인들로 알려졌으나 알고보면 그들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들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쉐퍼는 문화 현실이나 교회의 타락의 아픔도 보았지만 그 보다는 그 이면에 흐르는 진리관의 변화가 가져오는 결과가 오늘날 유럽교회를 텅비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분석한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진리관의 변화란 진리에 대한 기존의 통념이 깨어진 것을 말하는데, 절대적인 진리관에서 상대적 진리관으로의 변화입니다. 쉐퍼는 이 진리관에 변화가 오기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일한 전제(presupposition) 아래에서 살았는데, 이 변화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단정합니다.

쉐퍼는 이 진리관의 변화의 경계선을 ‘절망의 선(The line of despair)'이라고 규정했고, 그러한 전환의 책임을 철학사적으로는 헤겔(G.W.F. Hegel)과 키엘케골(Soren Kierkegaard)에게 두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근대의 비기독교인의 사고에 중요한 두 가지 변화를 일으켰는데, 진리는 절대적이라는 믿음에서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믿음으로, 이성에 의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오직 신앙의 비약에 의해 믿음에 이를 수 있는 믿음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 ‘절망의 선’ 이전에는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도 공통적인 용어와 전제들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것이 다 붕괴되었다고 믿었습니다.

한국교회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상적 문제, 즉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나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동양범신론적 사상과 같은 세속 사상을 도피하기보다는 지혜롭게 대결해야 합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가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폭력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동양사상과 관련해서는 범신론적 신비주의나 김용옥 박사가 주장하는 ‘몸철학’ 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시급히 할 일은 하루 속히 반지성주의에서 벗어나서 모든 분야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세째, 사회적으로는 쉐퍼의 반낙태운동이나 기독교 정치선언과 같은 일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진리는 대결을 동반한다”는 것을 철저히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상아탑 속에서 진리를 깨치지도 않았지만 진리를 상아탑 속에 가두어 두는 것을 방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영혼구원을 그의 사명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리 없이 죽어 가는 태아들을 위해 낙태반대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산주의와 인본주의의 공격에 의해 무너지고 있던 민주주의와 법치정신의 퇴보에 대해서도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세계교회가 이러한 사회적인 책임을 무시하는데는 근본적인 원인이 숨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보편화되어 있는 정교분리(政敎分離原則) 사상, 혹은 영혼구원과 사회참여의 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 사상은 종교인들에 의해서는 사회 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정치인들에 의해서는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국민들의 말을 묵살하고 침묵시키는 구실로 사용되었습니다. 정교는 분리될 것이 아니라 구분되어야 한다고 믿은 사람이 쉐퍼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잘못된 사회적 태도를 가지고 정부에 권력의 근거와 한계에 대한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거나 불어도 충분히 들리도록 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쉐퍼는 “정부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로서 시민불복종운동과 무력사용의 가능성을 ‘최후의 선’으로서 경고해 두자”고 말했습니다. 그는 “만약 정부가 권력을 남용하고 있는데도 적절한 단계에서 시민불복종이라는 최후의 선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에 따라 산다고 말할 수 없다”고 단정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이 담긴 [기독교 선언]이 출판되었던 1980년대 초의 뉴스위크지는 쉐퍼를 “근본주의의 사도”라고 다소 비판적인 찬사를 보냈는가 하면, 정치인들은 그를 초청하여 강연과 토론시간을 갖고 그 영향력을 크게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법률가 존 화이트헤드(John Whitehead)는 당시의 교계 상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미국 법률계의 방향에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 쉐퍼의 주장에 대해 복음주의적 교회에서는  처음에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곧 태도가 바뀐 것은 그들이 더 이상 중간 입장에 서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쉐퍼는 사랑으로 대결하기를 촉구했습니다. 그의 노년에 무디잡지(Moody)와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진리가 대결을 동반한다 하여 무작정 덤벼서는 안되며, 먼저 기도하면서 기독교가 참된 진리라는 것이 당신의 뼈에 사무치게 되거든 그제야 진리를 위해 개혁자가 되라”고 하는 다소 조심스러운 충고를 잊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는 통일과 한국정치의 성숙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부패, 빈부격차, 청소년 문제, 음란문화, 낙태, 복제 등의 문제에 대해 그 사상적 뿌리를 파헤치고 윤리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고 사회적 불의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을 멈출 때에 복음이 더욱 힘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째, 전도적으로는 그가 20세기말의 문화를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그런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전달하는데 탁월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올리브 바클레이(Olive R. Barclay)가 규정했듯이 쉐퍼의 복음 전도방법은 ‘문화적 변증학(Cultural Apologetics)’이라고 불려집니다. 문화적 변증학은 반틸과 도이벨트의 변증학보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강조하며 현대문화를 전도의 접촉점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쉐퍼는 변증학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한 실천적 변증가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간과했던 전제적 변증학(presuppositional apologetics)의 중요성을 인정했습니다. 불후의 신학 업적을 이룩한 핫지(C. Hodge)까지도 전제의 중요성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인과 불신자는 동일한 전제가 있다는 인식 하에 신학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관의 변화로 일어난 전제의 변화를 제일 먼저 감지한 사람은 반틸(C.Van Til)이었습니다. 더 이상 진리라든가, 논리, 도덕이 통념 되지 않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쉐퍼는 반틸의 그러한 통찰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반틸은 전제가 바뀐 것은 보았으나 바뀐 전제가 비일관적이며 비논리적이라는 점을 간과했다고 보았습니다. 이 점이 반틸과 쉐퍼의 차이이며, 전제에 의한 토론을 주장하는 프란시스 쉐퍼가 주장하는 변증학의 핵심입니다.

반틸은 전제에 의한 변증의 필요성을 역설하고도 전제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화를 중단하고 고립을 자초했으나, 쉐퍼는 전제가 달라도 대화가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패커(J.Packer)는 쉐퍼의 이러한 전제적 변증학을 높이 평가하여, “이런 점에서 쉐퍼의 사역은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철학자들로부터 쫓겨나기 전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바울의 첫번째 동기인 ‘기본적인 유신론증’에서 나타난 교훈과 일맥상통한다. 하나의 유신론적 준거틀이 수립되었을 때만이 죄, 죄의식, 구속, 믿음, 회개, 창의성, 그리고 사랑 등과 같은 용어들이 그들의 진정한 기독교적 의미를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금세기 안에 세계복음화를 완성하리라!’는 꿈을 꾸었던 사람들의 전도방법의 실패가 비지성적인 대중운동에 있었음이 판명된 지금에 와서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온 세계교회가 쉐퍼의 전제적이고 문화적인 변증학에 귀를 기울일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가 잃어버린 예수님과 바울의 문화를 접촉점으로 하는 전도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즉 지성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는 지성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정직한 대답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심리적인 갈등으로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사랑과 인정(認定)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죄로 씨름하는 사람에게는 자학, 자살, 자만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적입니다.

오늘날처럼 전도가 잘 안되는 때에는 성령의 세미한 인도하심을 받아 상대방의 문화적 배경과 갈등의 실체를 먼저 파악하고 적절한 복음의 다리를 찾아보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그 후에 복음을 명확하게 전해도 늦지 않습니다. 다리부터 놓고 그 다음에 복음이란 보물보따리를 건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쉐퍼의 제자이며 미국 커버넌트신학교의 변증학 교수인 제람 바즈(Jerram Barrs)는 “복음을 위한 다리 놓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섯째, 교회적으로는 교회 공동체의 실체와 매력을 찾도록 호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구속받은 성도들 간에 서로 거룩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온갖 비성경적인 교회상이 굳어질대로 굳어져서, 교회가 성령의 공동체이기 보다는 목사의 공동체로, 진리의 공동체이기 보다는 교권의 공동체로, 교제의 공동체이기 보다는 위계의 공동체로 교회의 본질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쉐퍼의 [20세기 말의 교회] 등에서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병에 우리보다 조금 일찍 걸렸던 서구 교회를 향한 메세지 즉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는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교회 공동체라는 것은 먼저 교리적인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말은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성경대로 설교하고, 성경 전체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생과 우주의 모든 문제에 대한 바른 대답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2)다른 하나는 성도들간의 사랑과 교제의 아름다움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쉐퍼의 책 제목과 같이 [기독교인들의 표지]입니다.

쉐퍼가 본 가장 효과적인 전도도 기독교인들이 공동체적으로 말씀을 순종하며 아름답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라브리에서 실천했던 것입니다.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복음의 방어와 전달을 갖춘 최종적인 변증학은 기독교인 개인과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적인 교제에서 가견적으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이다.” 라브리는 제도적인 교회는 아니지만 구속받은 성도들이 불신자들과 잠간동안 함께 지내면서 거룩과 사랑을 맛 보도록 하여 예수님을 만나도록 사람들을 돕는 곳이며, 불신자들의 입장에서는 라브리는 기독교의 실체와 매력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실험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공동체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기독교의 진리는 변호되기만 할뿐 아니라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개인, 기독교 가정, 공동체, 교회) 이러한 가견적인 변증의 삶에 실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리와 실천 사이에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두 가지를 다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진리와 교제가 아름답게 실천되는 공동체를 만들어 봅시다.

쉐퍼가 주는 의미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1)바른 영성을 찾아라, 2)세속 사상과 대결하라, 3)사회 악을 정복하라, 4)문화로 복음의 다리를 놓아라, 5)살아있는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들은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큰 약점들이고 또한 가장 민감한 사안들입니다. 알고보면 쉐퍼가 서구 교회를 위해 씨름한 것도 같은 문제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씨름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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