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해편◑/예수 학자들

프란시스 쉐퍼-생애

by 【고동엽】 2011. 1. 7.
click 

프란시스 쉐퍼
Francis August Schaeffer Ⅳ

프란시스 쉐퍼.


그는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기독교인이 된 후에는 자기와 같은 입 장에 있던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 일생을 헌신한 전도자였다.

그의 책을 읽은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뛰어난 선생이요, 20세기가 낳은 영향력 있는 대 표적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쉐퍼의 교리적 정통성과 성경의 무오류성에 대한 고집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하 거나 예술과 문학에 대한 논평을 읽고 혼동을 겪고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에게서 사랑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혹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를 정 말로 아는 사람들은 그가 예수를 사랑하였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는 데 헌신했던 따뜻한 사람이었음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쉐퍼는 1912년 1월 30일 미국 펜실바니아의 독일계 미국인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온갖 질문과 갈등을 안고 자유주의 교회에 몇 년간 출석했으나 교회에서는 무신론이나 불가지론 외에는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스스로 성경을 철학과 비교해 보기로 하고 읽어가던 중 철학책 을 덮어버리고 성경을 6개월간 읽고 난 후에야 "모든 문제들이 성경 속에서 통 일된 사상 체계로 연결되어 마치 실타래가 풀려지듯이 다 해결된다는 것"을 발 견하게 된다. 그때 쉐퍼는 18세였다.

성경만이 유일한 답

그는 특히 성경이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바른 대답과 설명을 주는 진리 라는 것을 확신하고 후에 로마서 1:16-17절을 근거로 "나는 기독교를 지성적으 로나 경험적으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를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삼는다. 기독 교인이 된 후 함든 시드니 대학(Hampden-Sydney College)을 다니면서 보수적인 신앙을 배우던 쉐퍼는 펜실바니아 장로 교회에서 두 살 연하의 여학생 에디스 세빌(Edith R.M. Seville)을 만나 3년 후에 결혼한다. 그는 목사가 되고자 결 심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교단 분열로 새로 설립된 페이스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마쳤다. 졸업 직후에 성경장로교단의 첫번째 목사로 안수받았으며, 필라델피아와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교회에 10년간(1938-1947) 목 회에 전념했다.

그후 1947년 교단의 파송을 받아,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폐허가 된 유럽 교회 를 시찰하기 위하여 3개월간 13개국을 방문하고 여러 유럽교회 지도자들을 만난 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교회의 분열과 신학적 방향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면서 유럽 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다음 해 그는 안락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부인과 세 자녀들 데리고 유럽 선교를 위해 스위스 로잔으로 건너가 선교사로서 전유럽을 다니며, 무신론과 실존주의 신학에 깊이 물들어가 는 유럽 교회의 재건을 위해 매진하였다. 그는 성경켐프를 인도하며 수많은 젊 은이들과 어린이들을 만났으며 초기의 국제기독교교회협의회(IWCC) 결성을 잠시 돕기도 했으나 잘못된 방향을 알고는 과감하게 떠난다.

그의 교회관에 대한 책들 20세기 말의 교회(The Church At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오늘날의 교회의 사명(The Church Before The Watching World)은 이 때의 아픈 경험들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들이다. 그 당시 보수주의 자들은 사랑을 잃어 버렸고, 자유주의자들은 교회를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표지(The Mark Of The Christian)에서도 교회가 사랑 과 교리를 회복해야 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첫번째 위기

1951년은 그의 일생에 중대한 영적 위기를 맞이했던 해였으며, 전도자로서의 삶에 있어서 대전환점이 되었다. 쉐퍼는 아내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불신자의 입장에서 기독교 진리와 실천을 재고하며 알프스산 계곡과 건초 창고 속에서 기 도와 묵상을 한 결과 그 해 겨울이 끝나갈 무렵에는 성령의 충만을 체험한다. 후에 인터뷰에서 그는 "그 체험이 없었더라면 라브리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고 백했다. 그 때의 연구와 체험은 진정한 영적 생활(True Spirituality)이란 책 에 담겨 있다.

쉐퍼는 그 영적 위기 후에 1년 동안 안식년을 보내며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 서 교회 부흥을 촉구했으며 캘리포니아의 롱비치에 있는 하이랜드 대학 (Highland College)으로부터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스위스로 재부임하여 제2차 선교 사역을 시작한다.

주님이 주신 피난처 라브리

1955년 2월 15일 쉐퍼는 세 들어 살고 있던 천주교 지역에서 "종교적인 영향 을 끼친다"는 이유로 스위스 정부로부터 6주 내에 스위스를 떠날 것을 명령받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 한 가지 길이 열려 있었는데, 그것은 집을 하나 구입하여 스위스 영주권을 얻는다면 체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름 모를 150여 명이 조금씩 보내 준 헌금으로 알프스산 론 계곡의 작은 마을 웨이모에 있는 산 장을 하나 구입하여 스위스로부터 붸겨나는 것을 기적적으로 면하게 된다.

이 때의 모든 신비한 체험과 긴장된 이야기는 부인 에디스 쉐퍼 여사가 쓴 라 브리(L'Abri)에 아름다운 글로 남아 있다. 쉐퍼 여사의 책을 읽지 않고서는 쉐 퍼의 생애와 저서를 잘 이해할 수 없다. 쉐퍼 부부는 딱 한 권(Everybody Can Know)외에는 모두 각자의 이름으로 책을 썼지만 애초 저술 계획을 공동으로 세 웠기 때문이다.

그 해 여름 쉐퍼 부부는 찾아오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가정을 공개하고 전도 하기 위하여 미국 선교회를 사임하고 자신들의 집을 라브리(L'Abri는 불어로 '오두막', '피난처'라는 뜻이다)라고 부르기 시작한다(1955,6,4). 칼 헨리(Carl F.Henry)는 라브리를 방문하고 "영적 진료소"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쉐퍼 부부는 라브리를 시작할 때 다음과 같은 짧은 글 속에 '라브리의 설립 목적과 운영 원칙'을 밝히고 있다. "라브리는 사도행전 1:8의 '오직 성령이 너 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 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실재성에 헌신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라브리는 초대 교회와 종교 개혁 시대에 믿었던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역 사적인 기독교 맥락 위에 서있다. 그리고 라브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믿는 다. (1) 믿음으로,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교리를 진리로 수납한다. (2) 믿음으 로, 기독교는 이러한 초자연적인 사실들의 실재성에 의존하여 현실의 삶을 살아 간다." 그러므로 그의 책들은 라브리의 이러한 믿음과 생각과 생활의 열매들이 라 할 수 있다.

저술 활동

그 후 쉐퍼는 1984년 5월 15일 주님 곁으로 가는 날까지 30여 년을 세께 각국 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유럽과 미국의 교회에 지 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책들은 대부분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라브리를 찾아온 학생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거나, 그를 초청한 대학과 교회에서 나눈 강의의 열매이다. 1965년 쉐퍼는 미국의 휘튼 대학(Wheaton College)에서 일련 의 강의를 했는데 그것이 기초가 되어, 거기 계시는 하나님(The God Who is There)이 출판되었다. 그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아더 홈즈(Arthur Homes) 교수가 "쉐퍼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이런 대학 강연과 신학교 강연이 그 계기가 되었다. 우리 학교의 많은 학생들도 그에게 매료되었다"라고 한 말 은 사실이다. 방학 때가 되면 수많은 미국 대학생들이 스키를 메고 라브리를 찾아왔으니 말이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에는 쉐퍼의 기본적인 모든 사상 구조가 다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다른 모든 저서의 사상적 기초를 세웠을 뿐 아니라 정확한 전달 을 위해 신중하게 용어를 선정했고, 저작 활동의 기본적인 주제를 결정했다. 이 책보다 조금 앞서 출판되었던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는 이 책 의 서론이라 할 수 있으며, Escape From Reason의 포괄적인 전개라 할 수 있다. 그 후 쉐퍼가 5년 간의 각고 끝에 쓴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은 이 책의 후반부에 재기된 지적 질문에 대한 대 답을 주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권은 "쉐퍼의 삼부작"이라고 불린다. 쉐퍼 자신도 "나의 모든 사상의 틀을 제시하는 것은 이 세 권이다"고 말한 바 있다. 후기의 모든 저서들은 이 세 권의 사상을 전개하고 적용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니온 신학교의 커크(J.A.Kirk) 교수가 "쉐퍼의 첫 저서는 20세기 사상의 절망 속에 갇힌 많은 사람들의 막다른 상태에 대하여 성경적 기독교가 긴급하게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를 밝히고 있다"고 말한 것은 옳은 지적이다. 그의 저서의 처음부터 마 지막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사상 중에 하나는 "기독교는 우주와 인생의 모든 문 제에 대한 바른 설명과 대답을 주는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진리가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하여 변증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것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의 사역과 저서가 인정을 방아서 1971년 미국 매사츄세츠주의 고든 대학 (Gordon College)으로부터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쉐퍼와 같이 이런 철학적 전제에 의한 토론과 변증의 필요성을 역설하고도 서로간의 철학적 전제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화를 중단하고 고립을 자초했으나 쉐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패커(J.I.Packer)는 쉐퍼의 신학적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전제적 변증학을 높이 평가하여, "이런 점에서 쉐퍼의 사역은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철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바울의 첫번째 동기인 '기본적인 유신론증' 에서 나타난 교훈과 일맥 상통한다. 하나의 유신론적인 틀이 수립되었을 때만 이 죄, 죄의식, 구속, 믿음, 회개, 창의성, 그리고 사랑 등과 같은 용어들이 그 들의 진정한 기독교적 의미를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타임지는 그런 토론과 변증의 인생을 사는 쉐퍼를 두고 "지성인을 위한 선교사"라고 부르 기도 했다.

지성인을 위한 선교사

1974년 그의 아들 프랭키의 제안으로 첫번째 영화인 How Should We Then Live 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2년 후에는 완성된 영화를 상영하며 미국의 22개 도시에 서 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그 영화 제작에는 화란의 자유 대학교 미술 사 학자인 루크 마커 교수와 역사학자 제레미 젝슨 박사의 도움이 컸다. 그 영화 의 대본이었던 원고가 정리되어 책으로도 출판되었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제는 영화보다 책을 읽은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사실 영화와 책은 쉐퍼가 평소 라브리에서 서양 철학과 문화의 흐름에 대한 강연을 통하여 주장하던 것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쉐퍼 자신은 책에서, "서양 사상과 문화에 대한 지난 40여년 간의 연구를 기초로 20세기 사상의 흐름 과 발전을 살펴봄으로써 인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 후 쉐퍼는 에베릿 크프(Dr. Everett Koop, 후에 레이건 대통령시 미국 보 건성 장관 역임)와 함께 제2의 영화 제작을 시작 한다. Whatever Happened to the Humman Race(낙태, 영아, 안락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바로 그것이 다. 이 책은 1973년 미국 대법원에서 통과된 낙태법의 문제에 항거하고 생명 운동을 펼치기 위해 낙태, 유아 살해, 안락사에 대한 고발과 이를 중지할 것을 공개적으로 외쳐댄 것이다. 이 영화와 책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사회적인 책임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특히 낙태는 우리 시대의 잘못된 세계관과 윤리관 의 결과로 무책임한 의사와 비열한 부모가 함께 범하는 가장 처참하고 악질적인 살인이란 점에서 다른 어떤 사회적인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그 문제를 지적한 사람이 쉐퍼이다.

쉐퍼의 걸작 중의 하나인 A Christian Manifesto(기독교 선언)는 미국 기독교 법학회에서 변호사들과 나눈 대화의 결과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이 책은 오늘 날의 정치적인 다원주의시대를 향한 기독교적인 정치 선언이다. 이 책이 발행 된 1981년 쉐퍼는 흰 머리카락에 흰 턱 수염을 기르고 마치 현자와 같은 모습으 로, 워싱턴 정계의 정치인들과의 회합에서 미국 정치와 법률의 비성경적인 면들 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한 정치 권력은 하나님의 대리적 위임이라는 것과 성경적으로 돌아갈 것을 설파하기도 했다. 당시의 타임지는 그를 "근본주의의 사도"라고 다소 냉소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으나, '공산당선언'과 '인본주의선언'에 대항한 그의 분명한 기독교 법정신과 정치 사상이 인정 되어 사이몬 그린리프 법률학교(Simon Greenleaf School of Law)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는 영광도 얻었다.

헤롤드 브라운(Harold Brown) 교수의 말처럼 쉐퍼는 "복음주의 지도자들보다 는 복음주의 교인들에게 더 깊은 감동을 주었고, 자유주의자들보다는 자유주의 교회 교인들이 사회 참여에 대한 바른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해 주 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을 것 같다.

1993년 지병인 암이 악화되어 스위스에서 미국의 암센터 마요 병원으로 옮겨 갈 때가 그의 마지막 해인가 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병상에서 일으키셔서 10개 대학을 방문하며 마지막 순회 강연을 열정적으로 인도하도록 하셨다. 이 때의 강연들이 기초가 되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된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The Great Evangelical Disaster)가 출판되었다. 그는 평생 23권의 크고 작은 책을 저술했는데 전집에 빠져 있는 책이 고뇌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이다. 그리고 그 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촬영했다.

그의 책들과 영화는 세계 도처에 있는 지성인들을 만나는 길이 되고 있다.

* 본 글은 생명의 말씀사 도서안내 1995,년 3,4월호에 실린 글이다.

* 글쓴이는 성인경 목사(한국라브리 대표, 후암교회 협동목사)임.


click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