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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 신학적 뿌리

by 【고동엽】 2011.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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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의 신학적 뿌리[2]-삶| 프란시스 쉐퍼 삶과 사상

Ⅱ. 프란시스 쉐퍼의 삶을 통한 사상적 흐름

프란시스 쉐퍼의 삶의 여정 속에 들어난 그의 사상적 흐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별히 그가 복음주의 교회의 지도자로서 어떻게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왔는지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자세한 그의 생애를 살펴보지는 않겠지만 그의 사상에 특별하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을 중심으로 삶의 연대기적 변화를 살펴보려고 한다.

1] 그의 어린 시절

1912년에 태어난 쉐퍼는 여타의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불신 가정에서 태어 났다. 현대적 포스트 모더니즘의 창을 열었다고 한 니체가 2대에 걸친 목사집안에 태어났으나 철저한 무신론자로서 생을 마친것과 매우 비교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쉐퍼의 부모는 자신들의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에 아이를 하나만 낳기로 하였다. 쉐퍼는 외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여 쉐퍼4세라고 지었다. 쉐퍼의 부모는 쉐퍼가 공학과 디자인 계통의 공부를 하여 편한히 살기를 원했다. 쉐퍼는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부하고 일하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의 성적은 올A였다.


그는 17살 때 기독교인이 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의 회심은 단순한 종교적 열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지적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쉐퍼는 소련에서 이민온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교재로 구입하여 읽던 [그리스 철학 입문서]를 읽다가 그들의 진리에 대한 기록에 매력을 같게 되었고 이러한 진리에 대한 자극은 그를 교회에로 인도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유주의 교회에서 설교를 유심히 들었다. 쉐퍼는 거기서 그 목사의 말은 자유주의적 사회윤리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알고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정직해지려는 열망 속에서 그는 자신의 불 신앙적 모습을 발견하고 다시 복음주의 교회에 나왔으며 그는 6주 동안에 성경을 통독하고 나서 그는 기독교인으로 회심하였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에게 경종을 울렸던 것은 창세기 였다. 내가 들어 보았던 어떤 종교의 가르침에서도 ,철학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참된 해답을 창세기에서 찾았다".

프란시스 쉐퍼는 기독교가 진리였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의 회심 사건의 중심은 바로 성경이었다.

2] 평생동역자와의 만남

1932년6월26일 제일장로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일신론자와의 토론이 있었다. 이때에 일신론자가 자신이 어떻게 무신론자가 되었는가의 입장에 대하여 에디스라는 한 젊은 여학생이 일어나 일신론자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논박하였고 이어서 쉐퍼가 일어나서 에디스와 같은 입장에서 일신론자를 논박하였다. 에디스와 쉐퍼는 이때 만남을 통하여 지적인 문제에 관하여 깊은 토론을 하였고 쉐퍼가 대학을 마칠 때까지 매일 편지를 나누었다. 에디스의 권유로 그레셤 메이쳔의 [기독교와 자유]를 읽고 나누었다. 이러한 지적 전쟁터에서의 만남은 라브리 사역을 위한 평생동역자로서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떨어져 있을때도 성경적이며 영적인 공감대를 갖기 위해서 날마다 [매일의 빛]을 읽었다. 그리고 드디어 1935년7월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다. 바로 쉐퍼가 메이쳔 교수가 있는 "웨스터 민스터"신학교에 입학한 후였다.


중국 선교사였던 아버지를 두었던 예디스와의 만남은 그의 사역에 중대한 영향을 가져온다. 사실 쉐퍼의 사역은 예디스가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특별히 이들의 결혼 생활은 그야 말로 가정의 아름다운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1935년7월6일에 결혼하여 48년10개월1주일이 된 1984년5월15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그들의 사역을 뒷바침 해주었다. 많은 이들이 가정 생활에 실패함으로 그들의 사역이 반감되는 것과는 다르게 이들의 만남과 사역은 많은 사역자들에게 좋은 본보기이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많은 도전을 준다. 예디스의 아름다운 고백이다.


"당신의 추억 박물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좋은 추억 그리고 생각하기 싫은 괴로운 추억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추억들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죄가 번성하고 타락한 이 세상에서 삶이 어떤 것인지 더 구체적인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것입니다. 또한 "지진"으로 무너진 집을 다시 짓는 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원점으로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도 가치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3]그의 학창시절

쉐퍼는 1931년에 버지니아 햄든 시드니대학에 들어갔고 1935년에 학급에서2등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예디스의 영향으로 프린스턴 신학교에 갈라져 나온 "웨스터 민스터 신학교"에 입학한다. 쉐퍼와 에디스는 성경이 주는 진리, 완전한 기준이 되는 객관적 진리를 믿는 메이쳔의 신학을 따라 갔던 것이다 .쉐퍼는 메이쳔 외에 탁월한 학자인 코넬리우스 반틸 문하에서도 연구하였다. 쉐퍼의 이러한 신학적 훈련은 그로 하여금 개혁주의 장로교인으로서 평생을 살도록 한 중요한 만남 들이었다. 그러나 신학교2학년 때 메이쳔 박사의 사망 후에 새 장로교회에 또 다른 시험이 왔던 것이다. 결국 쉐퍼는 맥크래 박사와 그 외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델라웨어 윌밍튼의 페이스 신학교를 건립을 도우려고 학교를 떠났다. 쉐퍼는 가을 학기 수업부터 훼이스 신학교에서 수업하였다. 그리고 쉐퍼는 이 훼이스 신학교에서 모든 과정에 평균 A를 받고 처음등록 학생이자 최초로 졸업한 졸업생이 되었다.


쉐퍼의 신학 수업은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이 나오고 성경관에 대한 논쟁의 흐름속에서 철저하게 성경을 믿고 있는 웨스터민스터와 훼이스의 신학생활은 그의 사역의 매우 중요한 주춧돌이 되었다.

4]라브사역 초기의 영적 갈등과 회복

유럽 순방을 통하여 새로운 사역에로의 부르심을 받은 쉐퍼는 그의 새로운 사역 초기에 심각한 영적 위기를 느낀다. 그것은 부르심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었다. 쉐퍼의 이러한 영적 갈등은 쉐퍼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심각하였다.

" 1951년과1952년에 나는 나의 생애에 있어서 영적인 위기에 봉착했었다. 내가 불가지론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이미 여러해 전이었다. 그 후 나는 미국에서 10년을 목사로 봉직했으며, 도 그후에는 나의 아내 에디스와 수년간 유럽에서 봉사해 왔다. 이 때에 나는 역사적 기독교의 위치와 가시적 교회의 순결성을 변호하고 나서야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점차로 나에게 문제가 닥쳐왔다. 그것은 실제에 대한 문제였다. 이것은 양면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내가 보기에, 정통주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노라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성경이 그토록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기독교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사건들 속에 있어야 할 사실상의 핵심적인 실재를 별로 찾아 볼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둘째로, 내 자신의 실재도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초창기보다도 더 약화되어 있는 모습으로 점점 나타나더라는 점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내 자신의 전반적인 위치를 재고해 보아야 하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 내외는 그 때 참페리에 살고 있었다. 나는 내 아내 에디스에게 솔직히 내가 다시 온전해 과거로 되돌아가서 불가지론에 이르러 문제 전반을 다시 한번 검토해야 하겠노라고 말했다. 이 때야말로 나의 아내에게도 진정 어려운 때였을 것으로 본다. 그 당시 내 아내는 나를 위해 무척 기도도 많이 했었음을 나는 알고 있다. "

불가지론자의 자리로 돌아간 그는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영적인 나눔 가운데 새로운 그릇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쉐퍼의 영적인 갈등과 회복의 현장에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인 흐름을 알 수 가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를 재고하는 가운데서 나는 또 다시 발견한 사실이 있으니, 무한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영존 하시는 기독교야말로 참되다는 것을 알만한 전적으로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좀더 나아가서 내 생애 가운데 심오한 차이점을 일으키는 기타 어떤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재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나는 다음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받은 교훈이 많이 있지만, 우리들의 현재의 삶을 위한 그리스도의 완성하신 사역의 의미에 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는 많이 들어보지 아니 했다는 것이 문제점이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 것이었다. 점점 태양은 밝히 떠오르고 노래가 흘러 나왔다."


쉐퍼의 삶은 자연스럽게 그의 사역의 방향이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 지를 명백하게 보여주게 되었다. 그는 개혁주의자로 그리고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자로 그의 삶이 방향지워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신학적 이해를 통하여 좀더 분명하게 들어 날 것이다.

4]사회관

프란시스 쉐퍼의 신학적 뿌리를 이해하는 네 번째 관점은 그의 사회관에서 볼 수 있다. 특별히 그의 국가와 법에 대한 이해는 그의 신학적 틀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쉐퍼는 국가와 법에 대한 이해를 청교도들의 사상에서 가져 왔다. 그는 낙스와 루더포드 그리고 이들의 영향아래 18세기의 부흥을 일으켰던 청교도들의 모습을 통하여 그의 사상을 정립하였음을 볼 수 있다. 쉐퍼는 기독교인과 국가와의 궁극적인 관계에 대하여 분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국가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국가에 권위를 주셨다면 그 국가는 자율적입니까? 정말 인간이 모든 것들의 척도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삶의 다른 모든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하나님의 법 아래 있습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의 외침과 동일한 것입니다. 낙스는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의회에 보내는 상소』에서 종교문제를 다루고나서 세속권력, 특히 왕권에 대한 저항의 문제를 다루었다. 왕이 전제[독재]를 할 때 신하들은 "엄한 권고와 충고"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저촉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교정하고 억제해야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왕들이 선하든 악하든 우리는 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은 낙스에게는 신성모독적인 발언으로 들렸던 것이다.

존 낙스의 사상은 청교도들의 큰 영향을 주었다. 특별히 낙스의 영향을 받은 1600년대의 인물인 사무엘 루더포드는 역사적인 책을 저술하였다. 그 책은 바로 『왕과법(Lex Rex)』이었다. 쉐퍼는 이 책을 기반으로 시민불복종운동의 원천으로 제시한다. 루터포드목사는 1644년경에 그의 유명한 책인 Lex Rex를 썼다. 이 책은 왕과 백성들 사이의 투쟁을 자아냈다. 당시 가장 뜨거운 문제인 왕과 법문제를 다루었다. 왕은 법위에 군림한다는 사상을 정면으로 대치한 내용이었다. 이 책은 언약도들의 정치원리와 정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힌 책이었다. 왕권은 백성들에 의해서만 수여되는 것이요 백성들이 원치 않을 때에는 왕의 권좌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왕은 국가의 가장 높은 종이며 언제나 섬기는 종임을 잊어서는 않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절대 권력이란 불합리하고 이치를 거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군주의 의지가 절대로 옳고 그름의 규범이 되어서는 안되며, 나라는 오직 법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왕권 신수설과 절대군주론을 굳게 붙든 왕으로서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지 않을수 없었고, 배포된 책은 모두 다 수거하여 불에 태워졌다. 이같은 발언은 존 로크가 민주주의 정신을 이야기 하기 50년전에 한 종로교 목사에 의해서 가르쳐졌으며 존 낙스이후로 스코틀란드 국민 정서이기도 하였다.이와 같이 쉐퍼의 사회사상은 스코트랜들의 청교도사상에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긴 여행을 통해서 쉐퍼의 신학적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쉐퍼의 사상을 한쪽면으로 치우치는 면이 있엇다. 일부는 프란시스 쉐퍼의 사상은 칼빈과 베자를 걸쳐 화란 개혁주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다른 일부는 칼빈과 낙스 그리고 청교도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어 졌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프란시스 쉐퍼의 사상은 어는 쪽에 치우쳐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두 부류의 개혁주의 사상을 모두 섭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별히 그의 사상은 전통적 개혁주의 사상에 서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쉐퍼의 개혁주의 사상의 형성에는 이미 살펴 본대로 교회사적 멘토들이 있었다. 존 칼빈, 존 낙스, 사무엘 러더포드, 그레샴 메이첸 , 반틸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도예벨트 ,한스 로크마커 이들 모두는 쉐퍼의 신학적 사고의 긴 여행에 영적 멘토요 동역자들이었다. 이들은 곧 쉐퍼였으며 쉐퍼는 이들의 영적 작업을 토대로 20세기의 인본주의 세계에 폭탄을 던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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