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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핫지의 신학과 성화론

by 【고동엽】 2009. 4. 26.

찰스 핫지(Chares Hodge : 1979~1878)

1.찰스・핫지의 신학

찰스・핫지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로 반세기이상을 근무했다. (1822~1878)그는 누구보다도 American presbyterianism(미국 장로교 신학과 교리)에 있어서 그것을 형성할 수 있도록 기여한 신학자이다. 그가 프린스톤 신학교 재학시절에 알지볼트・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에게서 신학을 교수 받았을 뿐만 아니라 친히 사숙(私宿)까지 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프린스톤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가서 3명의 저명한 교수의 지도를 받고, 연구를 마친 후 귀국하였다.(3명의 저명한 교수:Tholock, Hengstenberg, Nesnder)
그는 귀국 후 즉시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교수직에 임명받고, 그의 교수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충실한 신학을, 즉 진정한 장로교 신학을 개발하는 일에 주력했던 것이다. 한편 프린스톤 학술지에 편집인으로서 많은 학술논문을 편찬 발표함으로써 미국장로교 신학의 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학술지:Princeton Review-Theology today), Archibald Alexander는 미국 최초의 장로교 신학자(1772~1851)이다. 이는 1812~1851까지 Princeton에서 교수했다. first theological proffesor, 즉 제일교수라는 별명을 받았다. C. Hodge는 그를 존경한 나머지 그의 아들을 Archibald Alexander Hodge(A.A. Hodge)로 이름을 지었다. Hodge의 저서로는 “로마서 주석”(1835)이 있는데 이는 그의 출세작이며, 1880에 19판을 출판했다. 그는 또한 교회 사학자였으며, 미국 장로교 헌법사(1839~1840)을 출판했는데 Ⅱ권으로 되어있다. Hodge는 1856년 “에베소주석”을 썼고, 이어서 1857년에 “고린도전서 주석”을 썼고, 1859년에는 “고린도후서 주석”을 썼으며, 1871~1873에 걸쳐서 조직신학을 Ⅲ권으로 출판했다. Hodge·s Systematic theology는 모든 조직신학의 기본이 되고 있다.

① 프린스톤 신학의 산맥을 형성하다.
프린스톤 신학은 암스텔담 신학과 함께 Reformed theology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여기 프린스톤 신학의 산맥은 찰스・핫지를 최고봉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암스텔담 신학의 최고봉의 아브라함 카이퍼 인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C. Hodge신학의 특징은 합리적 경건성인데, 그것이 Princeton신학의 전체적 특징을 이루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 카이퍼 신학의 특징은 활동적 문화지향성인데, 그것이 암스텔담 신학의 전체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C. Hodge의 조직신학은 영어로 기록된 최대의 신학저서인 것이다.

②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에 입각한 장로회 신학을 수립하다.
장로정치의 의의와 중요성으로 교회론을 중요시하고, 이 근본정신은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에서 인용하였다. Princeton이 어떤 새로운 신학을 조직한 것이 아니고, 역사적 칼빈주의를 발전시킨 것이다. 교회는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는 기관이다. 우리의 신학도 교회 또는 장로교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도적 정통신학이어야 하고, 장로회 신앙이어야 하며, 복음주의적 기독교(Evangelical Chrlstianity)가 되어야 한다.

③ 합리적 신학전개에 뛰어나다.
C.Van Til 박사는 이따금 C. Hodge의 합리주의적 경향성을 비판했다. Hodge는 특히 그의 신론에서 합리적 신학을 취했다. 그러므로 평론가들은 Hodge가 신아의 초 논리성에 대한 인식이 약했었다고 비판했다. 어거스틴 사상은 Abraham Kuyper가 더 원만하게 반영시켰다고 Van Til은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평가를 하자면 C. Hodge는 Augustine사상을 지성적 차원에서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A. Kuyper는 문화적 차원에서 표현하고자 했다는 차이성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결코 C. Hodge의 합리적 전개를 나무랄 수가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 사상은“알기 위해서 믿는다.”,또는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적인 전개이다. 핫지는 두드러진 국가의 지성적 변혁기, 국가의 많은 구조와 제도가 재 정돈되고
교회 자체는 다소의 무질서와 혼란을 맞았던 그런 시기에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교회는 갈림길에 서 있었고 핫지는 교회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 갔으며 장로교에서 신학파의 암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핫지의 약점으로는 위대한 역사가가 아니어서 역사적 칼빈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논하였지만 칼빈이 결코 가르치지 않은 많은 것을 칼빈의 신학이라 믿었음을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그는 문화에 진지한 신학적인 반영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조직신학은 한편의 영원한 지혜, 유럽의 신학자들로부터 수집한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의 조직신학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소중히 간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철학적으로 빈틈이 없었으며, 철학을 소중히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핫지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것을 인식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러한 약점은 병적인 문화신학의 홍수를 퇴각시키려는 사람, 그리고 그 결과 교회사에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 안에 때때로 발생한다.

 

 

2. 찰스・핫지의 성화론
찰스・핫지는 「조직신학Ⅰ」 제1부 신론, 제8장에서 ‘성령론’을 다루고 있는데 ①성령의 본질②성령의 직무 ③성령의 역사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찰스・핫지는 성령의 직무를 설명하는 가운데 구속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직무를 심도 깊게 피력하고 있다. 찰스・핫지는

 

1.성령은 그리스도의 육체를 만드셨고 그 인간적 영혼에 그분의 사역에 필요한 모든 능력을 부여하셨다.

2.성령은 모든 신적 진리의 계시자이다. 성경의 교리들은 성령의 일들로 불린다.

3.성령은 거룩한 선진들이 신적 진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무오 하도록 인도하시고 그것을 또한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통해 모든 곳에서 그것을 지킨다.

4.세상에 죄를 납득하는 일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일,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사람들을 신앙과 회개를 실천하도록 인도하는 일, 이처럼 자신이 거듭난 자들 안에 새롭고도 신적인 생명의 원리로서 거하는 일은 성령의 특별직무이다. 이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신자들은 한 몸을 이룰 수 있도록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또 서로 간에 연합된다. 이것은 신자들을 믿음, 사랑, 그들의 내적 생명, 소망과 최종운명에 있어서 하나가 되게 하는 성도들의 교통의 기반이다.

5.성령은 또한 사람들을 교회의 직분으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그 직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필요한 능력들을 부여하신다.

찰스・핫지는 구속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직무를 피력하는 가운데 성화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찰스・핫지는 성령은 거룩한 선진들이 신적 진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무오하도록 인도하시고 그것을 또한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통해 모든 곳에서 그것을 지키신다. 모든 진리는 성령에 의해 능력으로 마음과 양심 위에 역사된다. 우리는 세상에서 도덕과 질서에 속해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전 포괄적 능력을 힘입고 있다. 그러나 흔히 일반은총으로 불리는 이 일반적 능력 외에도 성령은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조명하여 하나님에 의해 자유롭게 주어져 알 수 있도록 한다. 자연인은 영적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고 알 수도 없다. 모든 신자들은 성령에 의해 계몽되고 인도받기 때문에 신령한 자들로 불린다. 찰스・핫지는 구원과정의 모든 곳에서 성령의 능력이 포괄적으로 역사한다고 보고 성령을 방편으로 하는 성화를 논하고 있다. 찰스・핫지는「Systematic Theology」의 제18장에서 ‘성화론’을 다루고 있는데 “웨스트 민스터 요리문답에서 성화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사역,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거듭나게 되며, 죄에 대해서는 죽고 또 죽으며 의에 대해서는 살게 된다. 성화는 초자연적 사역이다. 고 말했고 성화의 초자연적 특성에 대한 증거로 성화의 주권자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거룩한 의식은 성령을 그들의 주권자로서 언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회개와 신의, 다른 은혜를 위하여 기도화하는 것을 배워왔다.”고 하며, “성도와 그리스도 상의 연합에 대한 모든 성경 말씀의 가르침과 성령의 내재하심이 성화의 초자연적 특성을 입증한다.”고 하며 성화의 방법에 대해서 “부단하고도 활발한 영육간의 활동에 대한 소명, 하나님의 사역이고 영혼은 믿음을 실천하도록 인도된다. 실천의 가치와 은혜를 통해 영혼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된다.”,“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 확고해진 성령의 내재하심은 새로운 영적인 삶의 근본이 된다. 성령의 내재하심의 권능을 적합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물러날 때 까지 끊임없이 증가한다.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하게 된다. 그것이 정신을 밝히는 성령의 임무이다. 성화의 사역은 성령의 모든 은혜의 실천을 위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행하심을 통해 수행된다.”고 하였다. 찰스・핫지는 은혜의 수단으로 교회와 성례의 중요성에서 “성자들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설립하는 것의 한 가지 위대한 결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지적, 사회적인 삶은 격리되어 고립되어서는 발달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왕직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시는 것에 대하여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을 통치, 복종, 지배, 보호, 구속하게 하시며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신다.”고 하였다. ‘성화의 열매는 선행이며, 적선의 열매임을 강조하고 “이 세상 삶에서의 타락 때문에 인간의 그 어떤 사역도 완전하게 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가치론이 버려져야 할 뿐만 아니라 좀 더 명확하게는 모든 적선의 사역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 핫지의 견해

1.구속의 언약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의 머리이시며 대표자가 되신다는 사실, 이 대표적 연합과 영원한 언약에 의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을 행한 것으로, 그들의 이름으로, 그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였으나 문자적인 것은 아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행위는 그들의 행위가 되었지만 이것은 대표적인 원리에 의해서이다.

2.구속의 언약에 의하여 그리스도께 약속된 상급은 그의 백성들의 칭의, 성화, 그리고 영원한 구원이다.

3. 그러므로 신자의 칭의의 법적 근거는 그들 자신의 의도,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거룩한 본성도 아니며, 그들의 이름으로 수행되고 겪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고난이며, 이것이 언약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정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으며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

 

1). 신앙의 참된 본질
회심에 흔히 따라붙는 여러 가지 동요를 이미 체험했고 또한 하나님이 자기를 받으시라는 소망에서 흘러나오는 평화를 느껴본 사람은 자연히 이제는 갈등이 지나갔고 승리를 얻었으며 신앙의 역사를 다 이루었다는 식으로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런 상상이 이내 사라져 버린다. 출생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회심이 신앙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젊은 어머니는 너무나 기쁨에 가득 찬 나머지 자기 앞에 놓인 사명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잠시 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품에 안은 갖난 아기를 바라보며 그 귀여운 모습과 그 생기발랄한 본능적인 움직임을 볼 때에 그 아기가 전적으로 자기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한 시간만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두어도 아기가 죽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린 그리스도인은 물론 처음에는 이제 할 일을 다 완수했다는 식으로 생각하게도 되지만 자기의 영적 생명이 너무나 가냘프기 때문에 끊임없이 보살피고 영양분을 주어야만 된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된다. 새 생명으로 거듭나자마자 그냥 버려두면 버림을 당한 갖난 아기처럼 그 영적 생명도 곧바로 확실하게 파멸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저질러지는 또 한 가지 실수는 신앙이란 변덕스러운 것으로 흥분의 상태와 부감각의 상태가 서로 교차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로 범한다. 이런 망상 속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때에만 신앙을 발휘하는 것이다. 몇 달 동안을 무관심속에 편안하게 살다가 마음에 감동이나 기쁨을 느껴도 그 다음 얼마 지나면 그런 것들이 다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저 그런 상태로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어떤 형태든 그런 식으로 간헐적인 것이 아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런 식으로 간헐적으로 사는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건강한 사람이 경련을 일으키고 다시 졸도하며 졸도했다가 다시 경련을 일으키는 법도 없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순전한 신앙이라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유지되지를 않는 것이다. 물론 변화는 있다. 건강한 때가 있고 병든 때가 있고 원기 왕성한 때가 있고 무기력한 상태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과연 신앙이라는 이름에 합당하다면 그것은 꾸준히 이어지며 활력이 있고 전진하는 법이지 그런 식의 발작이 정기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이보다 더 비근하게 나타나는 오류는 신앙을 내적인 섬김으로보다는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행위로 보는 것이다. 종교 집회에 참석하기 때문에 자기는 신앙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들은 공 예배에 참석하고 겉으로 신앙의 모양을 보이기만 해도 그리스도인 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이란 영적 삶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작을 가리켜 새로운 출생(거듭남, 신생)이라고 하며 새로운 창조요 영적부활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신앙의 원리 또는 근원은 신비로운 것이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말할 수가 없다. 식물의 생명의 형태도 다르고 동물의 생명의 형태도 다르고 이성적인 사람의 생명의 형태도 다르다. 이렇게 생명의 활동이 서로 다른데 감추어져 있는 그 활동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추적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영적생명의 본질도 그에 못지않게 파악이 불가능하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설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영혼 속에 새로운 종류의 활동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활동의 근원은 어디며 그것이 어떻게 유지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한 일들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활동에 무언가 영구한 원인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육체의 생명이 보고 듣고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영적생명이 그 존재가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중생할 때에 영혼의 상태에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중생한 영혼은 그 생각이나 목적이나 느낌에 있어서 과거와는 다르며 또한 그런 달라진 모습이 계속된다. 이렇게 달라지는 원인을 가리켜 때로는 새로운 마음, 은혜, 새사람, 내적갱신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용어들은 전부 영적생명의 원리를 지칭하는 것들로서 거룩한 열매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그렇게 영구하며 또한 항상 있기 때문이다. 신앙에 관해서 한때는 어느 정도 열심과 활력을 보이다가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마치 죽은 시체에다 전기 자극을 주어서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움직임을 잠시 보이게 만드는 것과도 같다. 그런 시체의 움직임을 잠시 보이게 만드는 것과도 같다. 그런 시체의 움직임은 그렇게 잠깐 생겼다가 곧바로 사라져버리고 그 다음에는 아무리 자극을 주어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를 않는다. 시체의 경우 생명의 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이 순전하다면 그 신앙은 새로운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따라서 그 신앙은 영구한 것이다. 더욱이 지각 있고 이성적인 존재들의 특징은 그 모든 행위에서 자발적이다. 충동적으로 행하고 또 즐겨하는 특정한 행위들이 있다. 동물들은 억지로 먹거나 마시가나 장난하지를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사상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며 느낌을 주고받을 때에 강압에 의해서 정신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동료들에게서 소외되어 지적생활과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속에 있는 것을 발산할 기회를 상실하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형벌 가운데 가장 극심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외와 감사와 사랑과 복종이야말로 새로움을 입은 심령의 자발적인 행위들이다. 그런 행위들을 통해서 영혼이 감추어지지 않고 억제되지 않은 상태로 자유로이 분출되는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억지로 혹은 강제적으로 실행되는 신앙은 가짜 신앙일 수밖에 없다. 벌을 받을까 무서워서 겉모양으로만 행하는 부모에 대한 복종은 존경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순종과는 매우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 역시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그런 섬김은 가짜요 우리가 그의 자녀인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기뻐하는 것으로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 규례들, 성소, 그의 임재가 모두 그들의 가장 큰 즐거움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병이 들면 일상적인 즐거움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병이 들면 일상적인 즐거움을 주는 여러 가지 것들에 별 흥미를 느끼지를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침체상태에 있게 되면 신앙에 속한 것들에서 거의 기쁨을 느끼지를 못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 영적생명에 속하는 것들에서 거의 기쁨을 느끼지를 못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 영적생명에 속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자발적으로 경건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그것이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형태를 취하든 간에 생명은 발전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주 가냘프지만 점차로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영적생명도 마찬가지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기쁨이 있지만 이것이 쇠퇴하는 경우가 아주 잦은데 이런 사실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도 신앙 그 자체가 자기 마음속에서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영적 삶의 발전 또는 쇠퇴를 가늠하는 기준으로는 아주 불확실한 것일 뿐이다. 어린 동물들이 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광경을 보면 그것들이 기쁨에 넘치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다 자란 동물에게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뛰노는 동물들의 신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모른다. 그것들 보다 절반 정도의 기쁨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성숙한 동물들에 비할 때에 견디는 힘도 절반 정도의 기쁨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성숙한 동물들에 비할 때에 견디는 힘도 절반밖에는 안되고 무언가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너무나 약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어린 그리스도인이 잠정적인 데서 행복감을 느끼고 자기들의 본성에서나 신선함에서 희열을 느끼지만 그보다 성숙한 자들에게서는 그런 것들이 없고 오히려 그런 느낌이 무르익어서 하나의 삶의 원리가 되며 더 기쁜 감정들이 보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안으로 정착되어 간다는 것이 전혀 이상스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기쁨이 바른 영적 삶이 자라나는 일을 가늠하는 적절한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그 기쁨은 본질상 진보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에서 성인으로 나아가면서 육체가 성숙해지며 또한 유아에서 성인으로 자라나면서 정신력이 발전하는 것과도 같다. 성인이 어린아이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에 당연히 있어야할 중요한 요소가 결핍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도 거룩함에 진보가 전혀 없다면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 진보를 입증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힘의 증가, 곧 믿음의 힘, 목적의 힘, 원리의 힘, 올바르게 행하는 힘, 악을 저항하는 힘, 고난을 견디는 힘 등이 증가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름지기 힘에서 힘으로 나아가며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거룩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은 외형적인 봉사가 아니다. 그저 두려움과 슬픔에서 오는 흥분상태에 이어서 평화와 기쁨이 따라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이어서 평화와 기쁨이 따라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계속 교차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참된 신앙은 영구한 행동의 원리요, 자발적인 시행이요, 본질상 발전적인 것이다. 그런 속성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요(벧후1:4), 영혼이 하나님께 화합하는 것이다. 신앙은 옛사람과 옛사람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새사람, 곧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골3:10),“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엡4:23-24)을 입는 것 이라고 한다. 이 두 구절은 동일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알 수 있는 능력을 지니도록 새로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지식이란 참되고 선한 것에 대한 지각, 인식, 인정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이처럼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성경에서 이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 지식이 영혼의 생명이다. 그 지식은 바로 하나님과 화합하여 진리를 지각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판단과 의지에 있어서 영혼을 하나님과 화합시켜 주는 것보다 더 고상한 도덕적 탁월함이란 없다. 이것을 가리켜 사도는 엡4:24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즉 진리에 기초하며 또는 진리에서 나오는 거룩함이란 의미이다.)이라고 부른다. 롬12:2에서도 거룩함에 대한 동일한 사상이 나타난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또는 확증하도록)하라”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며,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참괸 신앙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런 변화의 주체는 바로 전인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지각이 새로워지고, 목적이 새로워지며, 느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전신이 점점 더 깨이며, 의지가 올바른 규범에 더 복종하게 되고, 감정이 더 청저하게 정결케 되는 것이다. 사도는 데살로니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전5:23) 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성화(聖化)의 주체가 된다. 몸은 성령의 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이며,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덕분에 몸이 구속의 은택에 참여하며 장차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악한 영향이든 선한 영향이든 몸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다양하고 우리의 타락상태에서는 악한 영향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악한 영향이 대항하는 일이 성화와 역사에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또한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삶을 얻는 조건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선언한다.(롬8:13)그러므로 몸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죄를 섬기는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로 거룩하게 구별함으로써 되는 것은 물론 영혼에 미치는 그 몸의 영향을 억제하고 그 몸의 소욕을 절제하고 새로움을 얻은 사람의 뜻에 몸을 복종시킴으로써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화의 역사가 우리의 모든 기능에 다 미치듯이 영혼에 새겨지게 되어있는 하나님의 형상에는 도덕적으로 탁월한 모든 것이 포함되는 것이다. 사랑, 믿음, 온유, 자비 등 서로 다른 은혜들은 선(善)이라는 한 가지 동일한 원리가 달리 드러난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와 자비가 동일한 감정 혹은 동일한 성향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람을 정의롭게 만들어 주는 동일한 원리가 그 사람을 자비롭게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신앙, 혹은 신적 생명의 원리는 온갖 종류의 탁월함을 다 촉발시킨다. 또한 각 종류마다 골고루 영향을 미친다. 마치 식물이나 동물이나 이성적인 존재나 생명의 원리가 각 부분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영향을 미쳐서 전체가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가지가 커짐에 다라서 뿌리도 커진다. 몸의 이런저런 지체들이 자라날수록 몸 전체도 거기에 맞게 자라난다. 정신력에 속한 다른 능력들이 왕성하게 증가함에 따라서 판단력과 기억력도 증가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처럼 조화 있게 발전해 가는 것이다. 몸의 다른 부분이 성숙하게 자라는데 팔만 어린아이 때의 모습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끔찍한 결함의 상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는 판단력과 감정이 충만하게 발휘되는데 기억력과 양심은 유아 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 사람의 정신은 완전히 혼란 상태에 있을 것이다. 이런 균형 있는 발전의 법칙이 영혼의 생명에도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 과연 영혼에 생명이 존재한다면 그 생명은 온갖 형태의 선(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한 부분에 대해서는 탁월함이 나타나는데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탁월함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 그 탁월함은 신적생명, 혹은 새로운 마음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적생명이나 새로운 마음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적생명이나 새로운 마음은 본질상 모든 도덕적 탁월함을 다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람이 좋기는 한데 불친절하나는 말은 모순으로 느껴진다. 좋다는 말 속에는 정의롭다는 뜻과 자비롭다는 뜻이 함께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신앙이 있는데 부정직하다는 말 역시 모순이다. 신앙이란 경건성은 물론 정직성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religion)이라는 단어는 온갖 형태의 도덕적 탁월함을 포괄하고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신앙 혹은 새사람, 은혜의 원리, 마음속에 있는 신적생명의 원리 등의 단어들이 뜻하는 바는 모든 종류의 선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경외, 사랑, 순종, 정의, 자비 등은 서로 다른 형식으로 시행되지만 모두가 거룩이라는 한 가지 동일한 원리에 속하는 것들이다. 자비가 없는 거룩이란 있을 수가 없다. 또한 경외나 정의가 없는 것이다. 거룩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마음의 영이 새로움을 입은 사람은 성령의 다양한 온갖 은혜 가운데서 물론 대상과 형편에 따라서 표현방식도 달라지겠지만 도덕적 탁월함이 반드시 다 드러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내적인 생명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포괄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특별이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의 본성에 적합한 대상들에서 기쁨을 얻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외부의 대상들에게서 우리의 본성에 맞는 특질들을 접하면 거기서 만족과 욕구가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 영혼은 그것들이야말로 자지자신을 위해서 사랑해야할 선이라 여겨서 그것들에서 안식을 누리게 된다. 그 특질들이 고상할수록 더 순결하고 더 고상한 사랑이 자극을 받아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중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완전하심이 온갖 탁월함을 다 포괄하며 우리의 본성으로서 가능한 최고의 능력과 최대의 능력에 적합한 것임을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그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아서고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만족과 욕망의 최고의 대상으로 삼아 그 가운데서 안식은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저 도덕적 탁월함에서 만족을 얻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은 우리와 가장 친밀한 관계 속에 계신 인격적인 존재를 향한 사랑이다. 우리의 존재의 주인이신이시오 우리의 보존자시오 통치자이시며 의식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보살피고 보호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며 우리와 교제하시며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 우리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인 것이다. 이처럼 포괄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는 의존감, 의무감, 교제함이 개입된다. 또한 이 사랑은 그 사랑이신 그 대상이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을 인식함에 따라서 계속 수정된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하나가 찬양의 대상이 된다. 그 무한함이 무한하신 선하심과 연합하여 경이와 찬송과 경외와 만족을 자극하게 되고 그리하여 찬양으로 나오며 부복하여 예비하는 것밖에는 다른 표현이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보다 신앙의 본질에 더 필수적인 요소는 없다. 하늘이 열려 사람에게 그 모습을 드러낼 때면, 언제나 그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 우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절하는 모습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 땅위에서 행해지는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겸손한자와 회개하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경외와 사랑의 감정들이 시행되는 일은 그저 우발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좀더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바쁜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짐에 따라서 우발적으로 잠시 생겨나기도 하고 세상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잠겨서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기리며 그의 선하심에 대해 감사하며 그의 축복을 빌 때에는 그런 감정들이 지속적으로 생기게 되는 것이다.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충만하게 나타났던 헌신의 심령이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거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경건한 자들이다. 모두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며,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느끼며 그의 임재 속에서 즐거워하며 모두가 사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의 행위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린다. 영혼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가 없이는 신앙이란 없는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육체에 온기와 움직임이 없을 수가 없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육체가 급속히 부패하는 것처럼 영혼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어지면 망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굴복과 순종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굴복이란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다. 이 굴복은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들이 올바르게 그의 경륜들이 전부 지혜롭고 자비하며 정의롭다는 지각과 시인을 포함한다. 주위가 캄캄해질 때에도 그의 신앙으로 “공의와 판단이 그의 보좌에 거하도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새로움을 향한 영혼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에 대한 확신이 가득 차서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서 말하기를“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한다. 온 땅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의를 행하시리라는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불편한 마음과 의혹들로 인해서 마음의 평화가 깨어지고 죄책감이 더욱 가증되지만 이런 심령의 영향을 받으면 그런 불편과 의혹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또한 반드시 순종을 낳는다. 왜냐하면 영혼이 하나님과 화합하는 것이 참되고 올바른 것을 지각하고 사랑하는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합은 오직 순종을 통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마치 불순종이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반대된다는 증거이듯이 말이다. 하나님과 화해가 있거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이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듯에 대하여 마음과 삶으로 화합하는 것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피하지도 않는데도 그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과 같다거나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순종은 사랑이 필연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요 외모요 겉껍데기인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탁월한 것에 대한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에는 순종이 뒤따르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자신 사이에 마음의 화합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만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대상에게 기쁨을 주고자 하는 목적도 노력이 없다면 사랑이 아닌 것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14:21)에서 순종은 사랑의 증거라기보다는 사랑 그 자체가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고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꾸준하게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이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한층 충실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인데 만일 그런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그 뜻을 대적하는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그 마음속에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순종이 나타나는 법이다. 영적생명이 활동하는데 거기에 기쁨과 평안이 없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사물의 질서에 합당치 않는 것이다. 행복이 이처럼 기쁨과 평안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도는 “영의생각은 평안이니라.”(롬8:6)고 말씀한다. 어떤 것이 탁월할 때에는 그 탁월함을 누리는 것이 반드시 함께 있기 마련이다. 바른 감정과 사랑은 언제나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이 기쁨은 대상의 위엄에 따라 비례한다. 기쁨의정도가 기쁨의 종류가 거기에 비례한다. 감각적인 데서 나오는 사랑은 가장 저급한 행복을 준다. 사교적인 애정 다음은 지적인 능력 다음은 도덕적인 감정 다음은 신앙적 사랑의 순서로 기쁨의 품격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적 사랑에서 나타나는 즐거움은 다른 어느 것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순결하고, 더 고상하며, 더 만족을 주며, 우리의 본성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교제야 말로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가득차있으며 또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안을 준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기쁨(희락)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곧 영적 생명에 반드시 수반되어 그 생명을 증명해 주는 한 가지 요소라는 뜻이다. 기쁨은 건강이 흘러넘친다는 증거이며, 성령께서 새로움을 얻은 영혼에게 부어주시는 즐거움의 기름이다. 성령께서는 그 기름을 부어주셔서 그 영혼의 활동에 활력을 주시며 그 모양을 밝게 하시고 도한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는데 능동적으로 힘쓰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움을 얻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도덕적 탁월함에 있다면 또한 도덕적 탁월함이 곧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형편 가운데서도 올바로 느끼고 행동하도록 만들어 주는 정신의 상태를 뜻한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른 시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그 이웃을 향해서도 올바로 느끼고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이 선한 자들로 칭하는 사람들은 경건할 뿐만 아니라 자비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는 계명은 우리 이웃의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의무를 포괄적으로 진술해 준다. 여기서 의도하는 사랑이란 바로 우리 이웃들에 대해서 존중과 친절로 대하며 그들에게 성을 행하기를 구하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성향을 뜻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오래참고 친절하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잘되는 것을 기뻐한다. 이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하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는다. 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 안에서 기뻐한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란다.(고전13장)사랑이 없이는 아무리 경건하다고 입으로 떠벌이고 은사가 많고 자기부인의 행위나 구제의 행위를 겉으로 행한다 해도 모두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충동하는 자기사랑이 우리 자연인의 본성에 속하듯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충동하는 자비는 새 사란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새사람이란 선한ㄱ사람, 곧 하나님을 닮아서 거룩하고 정의로우며 자비하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생겨나는 온유, 친절, 신뢰성 있는 기질은 개개인의 다양한 성격에 따라서, 삶의 여러 가지 관계에 다라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똑같은 느낌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라고 가르치지만 동시에 성경은 사람들이 한 가정의 식구들로서나 한 사회의 구성원들로서 맺는 특수하고도 더 밀접한 관계를 배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자비를 생겨나게 하는 동일한 신앙의 원리가 삶의 갖가지 관계들에 속한 온갖 사랑들을 행하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다. 그 신앙의 원리는 순종해야할 자에게 순종하도록 하고, 경외할 자를 경외하게 하며, 존귀히 여길 자를 존귀히 여기도록 만들어 준다. 자기와 동등한 사람들과 관계할 때에는 겸손하고 정당하며 친절히 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덕성이 참된 신앙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닮은 자들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긍휼히 많으시며 오래 참으시고 선하심과 진리가 풍성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부정직하고 불친절하며 교만하고 복수심이 있고 속이기를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지 않는 자들이요, 마음이 새로워진 일이 없는 자들이다. 악한 부모, 악한 자식, 악한 이웃이면서도 동시에 선한 그리스고인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은 것이다. 마음이 새로워진 사실이 겉으로 드러나는 도 한 가지 형태는 바로 자기부인의 모습이다.“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자기부인이 필요한 한 가지 이유는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려면 다른 사람의 유익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는데 있다. 우리의 욕망과 욕구 가운데 무질서하고 악한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된다. 복음이 제시하는 법칙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기쁘게 하려 해서는 안 되며 누구든지 이웃을 기쁘게 하고 그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요한 자로서 스스로 비천하게 되셔서 비천한 우리로 부요하게 하신 것이다. 자기부인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다가온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은 이기적이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양보하며 자기 자신의 만족과 심지어 자기의 권리까지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포기한다. 그가 추구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온전히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탁월한 특징이었듯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런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화합하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자기부인은 우리 인간의 본성의 부패함 때문에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 진다. 타락의 결과 감각의 영혼에 부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끊임없이 요구하며 들어주면 줄수록 더욱 요구가 커지는 것이다. 이성적인 사람도 육체를 정신에게 복종하게 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신앙인으로써는 더더욱 감각에 사로잡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은 육체를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요 몸을 쳐서 복종시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육체에 속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외형적이며, 마음의 악한 기질들이 영혼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교만, 허영, 시기, 악의, 자기사랑이 육체적인 탐욕보다도 깨뜨리기 어려운 원수들이다. 악한기질들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부패한 옛사람을 벗어버린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의무 가운데 가장 힘들며, 삶 속에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5:17)이러므로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원리는 성령을 따라 행하기 때문에 승리를 얻는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움을 입어서 거룩해진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만족을 얻고 안식을 얻는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그의 피조물과 자녀로서 관계를 가지며, 그 속에서 즐거워한다. 이들은 경건한 삶을 살며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과거의 육욕에 따라서 살지 않고 그들의 모든 대화에서 거룩한 모습이 드러난다. 정의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이웃을 향하여 정직하며 자비를 베풀며, 자기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한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일이며, 하나님의 형상에 화합하는 일은 자기부인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의 미묘한 악들을 대적해 나아가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관념은 성경에서 찾아야지 삶에서 찾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은 신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은 사랑하는데 있다고 말씀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경외와 헌신과 순종, 사람에게 자비와 공의를 행하며, 그들을 사랑하는데서 나타난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이러한 겉모양을 갖추었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양심이 증거 해 준다. 사람들은 서로 매우 다르면서도 동일한 특색과 동일한 사회적 성향과 동일한 정신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도함을 받으며, 또한 모두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룩이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필수적이다. 예수님께서 구주이신 것은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상태는 바로 거룩의 상태인 것이다. 구원이란 육체의 소욕과 마음의 악한 욕심에 종 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요 그를 섬기는 일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언제나 이 땅의 삶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거룩함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히12:14)우리의 마음과 삶이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에 습관적으로 지배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와 형상에 부합되지 아노고,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보이지 않는다면, 신앙인이 아니며,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요,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았고 거룩하여 졌으며, 또한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성도들이다. 이들은 영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지며, 정과 욕심을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심령이 가난하며, 온유하고, 청결한 자들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다.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완전해졌다함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그의 백성도 반드시 거룩해야 한다. 그러므로 거룩의 필연성은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에서 연유하며, 그 필연성은 절대적이며, 불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백성이 그의 거룩에 참예하는 자가 되지 않는다면 구세주의 사명과 고난의 계획과 목적 전체가 망쳐지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백성들이 거룩해져야만 비로소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이며, 또한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보상이 그의 백성들을 이끌어 그 자신의 형상과 화합하도록 하여 그가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장자가 되시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든지 구속의 매력과 영광은 바로 죄에서 구원함을 받는 것과 하나님을 닮아 가는데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야말로 의의면류관이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요, 그리스도인이 바라고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그 존귀함이요 축복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구원에 대한 사고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요 그의 소망을 산산이 깨뜨리는 것이다. 구원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구속의 계획 등 이 모든 것들이 거룩이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입증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지 도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든지 간에 거룩하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후사도 아닌 것이다.

 

2). 성화의 수단
우리는 타락한 존재로서 우리 스스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런 규칙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온갖 노력들이 그 지체로는 전혀 효과가 없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는 한 이성과 양심을 동원하여 아무리 노력해도 거의 소용이 없는 것이다. 타락이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이성, 선택적 양심, 사회적 삼정, 정의감, 두려움, 부끄러움 등이 있다. 이런 행동의 원리들은 기술적으로 운용하면 적절한 품행을 만들어내고 매우 온화한 성품과 가치 있는 성격을 만들어 내는데 많은 기여를 할 수가 있는 것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수단을 사용하여 우리 본성의 타락한 갖가지 악한 면들을 근절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감정 혹은 기분(affections)은 이성의 독당에도 양신의 명령에도 복종하지 않고 자기들의 법칙에 따른다. 그리고 이성과 양심의 본연의 영역을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산출시키고 유지시키는 일은 우리 자신이 지닌 목적의 힘으로도, 도덕적 사고의 힘으로도, 어떠한 규율로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교도들이 하는 은둔, 금욕적인 절제, 목욕, 순례, 고행, 성수를 뿌리는 것,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 종교의식에 참여 하는 이런 수단들 자체가 사람의 영혼에 은혜를 전달한다고 믿는 것이다. 성경은 곧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죽으심의 공효에 참예한자가 될 뿐 아니라 그들 속에 생명의 원리로서 거주하시며,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되도록 역사하시고 하나님 자신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참여한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사람이 율법 아래 있는 한 사람은 노예의 상태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감정을 가질 수도 없고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되면,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 전체가 변화된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의 죽으심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므로, 이제 그의 생명과 연합한자가 되었고, 연합의 결과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들 속에 성령님이 거하시게 되어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그리고 이 성령은 영혼에게만이 아니라 육체에게도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의 교리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양심이나 도덕적 동기의 힘으로나 극기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과 화복한 상태가 되며, 성령에 참예한자가 됨으로써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칭의가 되실 뿐 아니라 성화가 되시는 것이다. 그는 율법의 형벌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거룩한 자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에 의하면 칭의 없는 성화, 칭의 이전의 성화란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의 연합의 본질은 아주 신비한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이 비밀이 크도다.”(엡5:30.32) 연합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다. 그 효과가 분명하게 진술되어 있으며, 아주 충격적인 실례를 통해서 그 본질이 계시되어 있다. 우리 주님은 그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17:21~23)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도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량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14)말씀한다. (롬8

:9~10, 고전 3:16)

성경은 이런 가르침으로 가득차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갈3:13~14) 구속의 은택에 참여했다는 유일한 증거는 바로 성령님께 참여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성령께서 전달하시는 놀라운 능력으로 드러나든지, 성령의 임재를 끊임없이 표시해 주는 거룩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 연합으로 나타나는 효과는 그리스도의 공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한 것이요, 성령의 내주하심은 우리의 성화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연합을 몸의 머리와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비유한다. 이런 비유적 표현이 담고 있는 주된 사상은 생명의 연합된 교류가 있다는 것이요 그와 그들 안에 동일한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이다. 몸이 한 영혼에 의해서 생명을 갖게 되고, 그 영혼을 통해서 온 지체들이 하나가 되며 공동의 생명을 전달받듯이 그리스도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전달되며 그 백성들이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그 백성끼리도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안에 자리하고 있고, 근원을 두고 있는 그 생명을 그의 백성 모두에게 부여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 또 다른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가지가 포도나무와 연합하여 그의 생명을 함께 나누며 그에게 절대적으로 그 나무에 의존하듯이 신자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생명을 나누며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전달되는 성령께서 그들 속에 생명과 결실의 원리가 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은 하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고 하셨는데 그 성령께서는 영적 생명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영적 생명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모든 일들의 근원이 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며(눅3:16), 성령으로 나며(요 3:5), 하나님의 영이 그들 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신령한 자들이라 칭함을 받는다.(고전3:16)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며(고전6:11),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롬8:15), 성령 안에서 살며(갈5:25),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하게 되고(엡3:16),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엡5:18)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죽이며(롬8:18),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으며(엡2:18),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찬미한다.(고전14:15 ) 그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지식의 근원이요(엡1:17), 기쁨의 근원이요(살전1:6), 사랑과 오래 참음과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근원이다.(갈5:22~23) 성령의 내주하심의 교리는 복음의 본질 속에 배어 있어서 절대적인 복음의 필수적 요소가 되어있다. 하나님의 영이 그의 백성들과 항상 함께 계셔서 그들의 내적활동과 외적행동을 인도하셔서 마지막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하늘의 순결함과 복락에 들어가도록 이끄신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복음에서 빼버린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거룩한 삶의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의 교리에 있다. 이 교리는 죄 사함에 대한 소망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힘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터를 세움으로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지며, 구속의 비밀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엡3:17~19) 신자는 바로 이 교리 덕분에 온갖 시련 가운데서도 꿋꿋이 설 수 있으며, 모든 원수들을 이길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사는 것이 그 자신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사시며 그의 삶에 필요한 은혜를 풍성히 베풀어주시며 그를 정결케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 있는 그의 친 배성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영적 생명의 근원이므로 그 생명을 유지하고 촉진시키는 수단은 모두가 이 교리와 연관되며 또한 그 효능이 생긴다. 그리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깨끗이 되며(행15:9),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며(행26:18), 믿음으로 살며(갈3:11),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엡2:8) 믿음은 이처럼 중요한 기능을 지닌다. 믿음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끈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 것으로 요구할 권리를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의 성령에 참여케 하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에게 오는 자는 생명의 물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사도는 이것이 성령을 의미한다고 말씀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 때 비로소 하아님께 나아가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 그의 거룩케 하시는 사랑의 영향력을 받을 확신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과 은혜에 사명을 다할 힘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시험을 이기며 사명을 다할 힘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일이다. 지극히 크고 귀한 약속들을 받아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게 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신자의 거룩함과 평강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시험을 당하여 낙심이나 죄에 빠질 때에 그를 바라보며 그에게 도움을 구하면, 인간의 의지로도 어떤 다른 동기로도 얻을 수 없는 큰 힘을 얻게 되어 그 힘으로 시험을 이기고 견디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유로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또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가득함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덕분에 우리는 영적생명의 근원인 성령을 받았으므로 성령께서 떠나시는 모든 일을 피하여 그 생명을 유지해 간다. 성경은 성령께서 근심하실 수도 있고, 성령을 거스리는 자들에게서 지그의 영향력이 소멸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영혼을 죄로 더럽히거나 무절제와 음란으로 육체를 더럽히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체들이요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화를 주장하시는 성령께로부터 나오는 올바른 생각과 의로운 목적과 거룩한 욕심은 계속 높이고 기려야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도덕성에 대한 사고도 필요하고 도 그것에 대해서 정당하게 대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에 의존하여 죄를 대적하고 올바른 감정을 배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며, 끊임없는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그를 의지함으로써 그 삶이 유지되는 것이다. 성령과의 교제는 주로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도는 성령을 받는 지정된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너희가 안할지라도 좋을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끈질기게 기도하며 특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심령 속에 유지되며 촉진 되도록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역사하사 그의 기쁘신 뜻대로 뜻을 갖게 하시고, 행하게 하신다는 교리는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 가운데서 자라나도록 합리적인 수단과 성경적인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와 모순 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은 인간으로서 파악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는 일깨우시고 가르치시고 설득하시는 일을 하시는데 이 모든 것이 이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내주(內住)하신다고 해서 우리 자신의 기능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그것들을 인도하셔서 행동하게끔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그 일을 사실 우리가 행해야 하며, 그렇게 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하나님의 역사에 속하고, 회개가 그리스도의 선물이지만 우리가 회개한다. 사랑, 온유, 양선 등 모든 은혜들이 성령의 열매들이지만 우리가 사랑하며, 온유하며 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이러한 영향 아래서 인도함을 받아 바른 기질과 감정을 행사함으로써 성화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힘을 계속해서 발휘하면 그 힘이 더 커지는 법칙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거듭난 영혼의 기질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경건한 감정은 그 어떤 것이든 경건의 원리를 강화시켜주며, 영혼을 영구히 보다 낮게 만들어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영향력에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 믿음, 간사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섬김에서 생겨나는 선행은 그런 행동 자체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갖는 한 시간의 교제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깊은 감동을 남기며, 언제나 악의 영향을 덜 받고 선의 영향을 더 받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또한 성령께서 영혼을 자극하여 거룩을 실천하도록 하며,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도록 이끌어주며, 그 영혼을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주며, 또한 하늘의 불변하고 완전한 거룩에 더 합당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행실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주로 진리를 묵상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생각과 감정에는 대상이 있기 마련인데 그 대상이 또한 그것들을 불러일으키는 성향이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선하심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 그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소망을 가질 수가 없다. 이런 감정들이 그 적절한 대상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 대상들이 또한 그 감정들을 자극하는 성향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부패하지 않았다면 그 대상들을 볼때마다 거기에 합당한 감정들이 반드시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패하였지만 그 대상들의 고유한 본질에서 나오는 성향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부패성을 교정하시고 제거하심에 따라서 그 대상들이 적절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진리로 거룩함을 입는다고 말을 하며(요17:19),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된다고 하며(요15:3),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다고 하며(약1:18),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고후3:18)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지속적으로 마음속에서 활동하도록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기대한다는 것처럼 불합리한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에 세상의 생각과 근심이 가득 차 있으면서, 특히 죄를 생각하거나 죄를 보고서 악에 감동받기를 잘하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우대하심에 부응하는 감정들이 그 속에서 강하게 자리 잡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와 그의 일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강하게 역사할 수 있겠는가? 사물의 본질 그 자체가 변화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일에 시간을 드리지 않고서는 거룩에 있어서 진전을 이룰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주는 진리인 것이다. 이 진리를 마음에 담을수록 이 진리와 교감하며, 그 의미를 깨우치고 우리 자신의 경우에 적용시키며 그 원리들을 수용하고 그 동기를 인식하며 그 약속에 기뻐하며 그 경고에 덜며, 그것에 영향을 받아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로 올라갈수록 더욱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선한 것을 분별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건에 뛰어난 사람들은 언제나 기도의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묵상의 사람들이었고 온갖 기쁨과 슬픔이 있는 세상의 영향에서 마음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계명과 약속들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진리에 대한 묵상 이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예배는 모든 경건한 감정을 시행하고 표현하는 것만은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교제를 유지하며 그의 은혜를 전달받는 지정된 수단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1)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4,7) 이것은 계시의 문제요 동시에 체험의 문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그들의 영의 아버지께 사적으로 공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일이 그들의 영적 힘을 새롭게 하는 주요 수단임을 깨달아왔다. 성소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선정이요, 성소의 예배는 손으로 지어지지 않은 하늘에 속한 영원한 성전의 예배를 미리 예비하는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은혜의 수단인 성례가 여기서도 적절한 위치를 차지한다. 옛 경륜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생제사와 의식들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성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일에 계속 발전하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
게 드리는 모든 지정된 예배의 형식과 예배의 기회에 신실하게 참석하는 법이다. 홀로 골방에서도 늘 예배하며,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성찬에 시강ㄴ을 엄수하여 참석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사람이 친한 친구와 교제 나누기를 바라고 애쓰듯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회를 구하고 찾을 것이다. 이러한 예배를 많이 나눌수록 하늘의 복락 가운데서 빛의 아버지와 나눌 완전한 교제를 더 잘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한다. 행동이 웅변의 전부라는 말이나, 행동이 신앙의 전부라는 말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생각과 감정의 표현이 아닌 행동은 결코 웅변이 될 수없고 경건한 마음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지 않는 행동에는 신앙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유지되어야만 비로소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의미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나타나는 악한 성향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신앙을 문 바깥으로 밀어내고 집안에 들이지 않고, 거리나 공중 집회나 묶어두며, 떠들썩한 겉치례와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흥분 이외에는 아무 음식도 주지를 않는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신앙의 힘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신앙의 힘의 근원을 잘라버리는 것이요 하늘에서 온유하고 거룩한 방문객을 시끄럽고 왁자지껄한 이 땅의 거민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과도 같다. 속으로 신앙이 있기보다는 겉으로 신앙이 있는 체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 마음을 부지런히 다스리기보다는 교회의 임무들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의 참 능력보다 신앙의 겉모양을 더 좋아하는 오류에 빠질 위험이 다분하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열심 있는 것을 좋아하고 바쁘기를 바라기 때문에 세상적인 일에도 아주 적극적으로 임하는데 이런 성향이 전혀 성격이 바뀌지 않은 채로 종교적인 활동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은 이와 정반대족에도 상존하고 있다. 신앙이 외형적인 행동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은 언제나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3:17). 어머니의 사랑이 반드시 어린 아기를 돌보는 행동으로 이어지듯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반드시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오로지 자기의 구원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과 관련된 행동만을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모든 관심을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제한시킨 나머지 한평생을 머뭇거리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모든 은혜들, 곧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사람을 향한 공의와 자비를 조화 있게 시행할 때에 비로소 영혼의 건강이 유지되고 촉진될 수 있는 것이다. 선을 행하면 사람이 더 나아지는 것이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자비의 원리가 강화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을 주는 사람이 또한 스스로 물을 받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셨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형제들의 육신적 영적 유익을 위하여 노력하는 자들에게, 구속자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대로 참된 신앙은 겉으로 과시하는 것도 아니요 감정으로 폭발적으로 분출시키는 것도 아니다. 참된 신앙은 영구하며 자발적이며 발전하는 영적 삶의 원리로서 전인(全人)에게 영향을 미치며, 온갖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참된 신앙이란 어느 한 가지 선한 성향이 아니라, 모든 올바른 감정과 행동의 뿌리요 샘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에서 사람을 향한 정의와 자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적절히 운영하는 데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신적인 생명은 이성이나 노력으로나 어떠한 미신적인 행동으로 얻어지거나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명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그의 모든 지체들 속에서 거하게 하셔서 이러한 생명을 얻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 신적인 생명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은혜의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하며, 또한 성령의 거룩한 영향력을 마음에 기리게 해주는 모든 일을 행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바로 영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진리를 묵상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우리의 모든 상대적인 의무들을 수행하는 가운데 모든 거룩한 기질들을 실천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세상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 주님과 연합하고 나면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일이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중생으로 시작된 영적 삶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속 지속된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 안에 거하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셔서 형편에 따라 필요한 모든 은혜와 보호하심을 그들의 살아 게신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구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한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씻음을 얻고 거룩함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리고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기업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만들어져서 결국 하나님의 그 복된 임재 속에 들어가게 되며, 그의 은혜와 사랑의 충만한 교제를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핫지는 구원론적 결론이 인간론의 전제에서 발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구속관의 결여는 부당한 죄관이 정정되기 전에는 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뿌리이며, 확고한 원리이다. 핫지의 생각은 신학파 신학자들의 생각과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신학파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실 때 형벌을 사용하시지만 그 목적은 죄를 금하고 죄인들을 바로 잡으시는데 있다고 믿었다. 이런 태도는 자연히 존재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며, 성결은 단순히 행복을 쟁취하는 최선의 길일 뿐 이라는 전제를 낳는다. 그래서 핫지는 “우리는 성결이 수단 그 이상의 어떤 것이며, 행복해지는 것이 거룩함의 목적이나 이유가 될 수 없으며, 기쁨이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이것은 상업적인 용어로 윤리적인 선택을 보는 결과를 낳는다. 선택하는 것은 타고난 권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유익을 산출하고 손실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덕은 보편적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 단지 행복의 수단으로 전략하기 때문에 그 지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출처 :푸우도사 자료실~!^^ 원문보기 글쓴이 : 조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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