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핫지(Chares Hodge : 1797~1878)
1.찰스・핫지의 신학
찰스・핫지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로 반세기이상을 근무했다. (1822~1878)그는 누구보다도 American presbyterianism(미국 장로교 신학과 교리)에 있어서 그것을 형성할 수 있도록 기여한 신학자이다. 그가 프린스톤 신학교 재학시절에 알지볼트・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에게서 신학을 교수 받았을 뿐만 아니라 친히 사숙(私宿)까지 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프린스톤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가서 3명의 저명한 교수의 지도를 받고, 연구를 마친 후 귀국하였다.(3명의 저명한 교수:Tholock, Hengstenberg, Nesnder)
그는 귀국 후 즉시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교수직에 임명받고, 그의 교수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충실한 신학을, 즉 진정한 장로교 신학을 개발하는 일에 주력했던 것이다. 한편 프린스톤 학술지에 편집인으로서 많은 학술논문을 편찬 발표함으로써 미국장로교 신학의 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학술지:Princeton Review-Theology today), Archibald Alexander는 미국 최초의 장로교 신학자(1772~1851)이다. 이는 1812~1851까지 Princeton에서 교수했다. first theological proffesor, 즉 제일교수라는 별명을 받았다. C. Hodge는 그를 존경한 나머지 그의 아들을 Archibald Alexander Hodge(A.A. Hodge)로 이름을 지었다. Hodge의 저서로는 “로마서 주석”(1835)이 있는데 이는 그의 출세작이며, 1880에 19판을 출판했다. 그는 또한 교회 사학자였으며, 미국 장로교 헌법사(1839~1840)을 출판했는데 Ⅱ권으로 되어있다.
Hodge는 1856년 “에베소주석”을 썼고, 이어서 1857년에 “고린도전서 주석”을 썼고, 1859년에는 “고린도후서 주석”을 썼으며, 1871~1873에 걸쳐서 조직신학을 Ⅲ권으로 출판했다. Hodge·s Systematic theology는 모든 조직신학의 기본이 되고 있다.
① 프린스톤 신학의 산맥을 형성하다.
프린스톤 신학은 암스텔담 신학과 함께 Reformed theology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여기 프린스톤 신학의 산맥은 찰스・핫지를 최고봉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암스텔담 신학의 최고봉의 아브라함 카이퍼 인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C. Hodge신학의 특징은 합리적 경건성인데, 그것이 Princeton신학의 전체적 특징을 이루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 카이퍼 신학의 특징은 활동적 문화지향성인데, 그것이 암스텔담 신학의 전체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C. Hodge의 조직신학은 영어로 기록된 최대의 신학저서인 것이다.
②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에 입각한 장로회 신학을 수립하다.
장로정치의 의의와 중요성으로 교회론을 중요시하고, 이 근본정신은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에서 인용하였다. Princeton이 어떤 새로운 신학을 조직한 것이 아니고, 역사적 칼빈주의를 발전시킨 것이다. 교회는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는 기관이다. 우리의 신학도 교회 또는 장로교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도적 정통신학이어야 하고, 장로회 신앙이어야 하며, 복음주의적 기독교(Evangelical Chrlstianity)가 되어야 한다.
③ 합리적 신학전개에 뛰어나다.
C.Van Til 박사는 이따금 C. Hodge의 합리주의적 경향성을 비판했다. Hodge는 특히 그의 신론에서 합리적 신학을 취했다. 그러므로 평론가들은 Hodge가 신아의 초 논리성에 대한 인식이 약했었다고 비판했다. 어거스틴 사상은 Abraham Kuyper가 더 원만하게 반영시켰다고 Van Til은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평가를 하자면 C. Hodge는 Augustine사상을 지성적 차원에서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A. Kuyper는 문화적 차원에서 표현하고자 했다는 차이성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결코 C. Hodge의 합리적 전개를 나무랄 수가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 사상은“알기 위해서 믿는다.”,또는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적인 전개이다. 핫지는 두드러진 국가의 지성적 변혁기, 국가의 많은 구조와 제도가 재 정돈되고
교회 자체는 다소의 무질서와 혼란을 맞았던 그런 시기에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교회는 갈림길에 서 있었고 핫지는 교회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 갔으며 장로교에서 신학파의 암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핫지의 약점으로는 위대한 역사가가 아니어서 역사적 칼빈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논하였지만 칼빈이 결코 가르치지 않은 많은 것을 칼빈의 신학이라 믿었음을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그는 문화에 진지한 신학적인 반영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조직신학은 한편의 영원한 지혜, 유럽의 신학자들로부터 수집한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의 조직신학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소중히 간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철학적으로 빈틈이 없었으며, 철학을 소중히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핫지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것을 인식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러한 약점은 병적인 문화신학의 홍수를 퇴각시키려는 사람, 그리고 그 결과 교회사에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 안에 때때로 발생한다.
2. 찰스・핫지의 성화론
찰스・핫지는 「조직신학Ⅰ」 제1부 신론, 제8장에서 ‘성령론’을 다루고 있는데 ①성령의 본질②성령의 직무 ③성령의 역사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찰스・핫지는 성령의 직무를 설명하는 가운데 구속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직무를 심도 깊게 피력하고 있다. 찰스・핫지는
1.성령은 그리스도의 육체를 만드셨고 그 인간적 영혼에 그분의 사역에 필요한 모든 능력을 부여하셨다.
2.성령은 모든 신적 진리의 계시자이다. 성경의 교리들은 성령의 일들로 불린다.
3.성령은 거룩한 선진들이 신적 진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무오 하도록 인도하시고 그것을 또한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통해 모든 곳에서 그것을 지킨다.
4.세상에 죄를 납득하는 일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일,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사람들을 신앙과 회개를 실천하도록 인도하는 일, 이처럼 자신이 거듭난 자들 안에 새롭고도 신적인 생명의 원리로서 거하는 일은 성령의 특별직무이다. 이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신자들은 한 몸을 이룰 수 있도록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또 서로 간에 연합된다. 이것은 신자들을 믿음, 사랑, 그들의 내적 생명, 소망과 최종운명에 있어서 하나가 되게 하는 성도들의 교통의 기반이다.
5.성령은 또한 사람들을 교회의 직분으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그 직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필요한 능력들을 부여하신다.
찰스・핫지는 구속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직무를 피력하는 가운데 성화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찰스・핫지는 성령은 거룩한 선진들이 신적 진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무오하도록 인도하시고 그것을 또한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통해 모든 곳에서 그것을 지키신다. 모든 진리는 성령에 의해 능력으로 마음과 양심 위에 역사된다. 우리는 세상에서 도덕과 질서에 속해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전 포괄적 능력을 힘입고 있다.
그러나 흔히 일반은총으로 불리는 이 일반적 능력 외에도 성령은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조명하여 하나님에 의해 자유롭게 주어져 알 수 있도록 한다. 자연인은 영적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고 알 수도 없다. 모든 신자들은 성령에 의해 계몽되고 인도받기 때문에 신령한 자들로 불린다.
찰스・핫지는 구원과정의 모든 곳에서 성령의 능력이 포괄적으로 역사한다고 보고 성령을 방편으로 하는 성화를 논하고 있다. 찰스・핫지는「Systematic Theology」의 제18장에서 ‘성화론’을 다루고 있는데 “웨스트 민스터 요리문답에서 성화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사역,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거듭나게 되며, 죄에 대해서는 죽고 또 죽으며 의에 대해서는 살게 된다.
성화는 초자연적 사역이다. 고 말했고 성화의 초자연적 특성에 대한 증거로 성화의 주권자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거룩한 의식은 성령을 그들의 주권자로서 언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회개와 신의, 다른 은혜를 위하여 기도화하는 것을 배워왔다.”고 하며, “성도와 그리스도 상의 연합에 대한 모든 성경 말씀의 가르침과 성령의 내재하심이 성화의 초자연적 특성을 입증한다.”고 하며 성화의 방법에 대해서 “부단하고도 활발한 영육간의 활동에 대한 소명, 하나님의 사역이고 영혼은 믿음을 실천하도록 인도된다. 실천의 가치와 은혜를 통해 영혼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된다.”,“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 확고해진 성령의 내재하심은 새로운 영적인 삶의 근본이 된다.
성령의 내재하심의 권능을 적합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물러날 때 까지 끊임없이 증가한다.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하게 된다. 그것이 정신을 밝히는 성령의 임무이다. 성화의 사역은 성령의 모든 은혜의 실천을 위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행하심을 통해 수행된다.”고 하였다.
찰스・핫지는 은혜의 수단으로 교회와 성례의 중요성에서 “성자들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설립하는 것의 한 가지 위대한 결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지적, 사회적인 삶은 격리되어 고립되어서는 발달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왕직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시는 것에 대하여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을 통치, 복종, 지배, 보호, 구속하게 하시며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신다.”고 하였다. ‘성화의 열매는 선행이며, 적선의 열매임을 강조하고 “이 세상 삶에서의 타락 때문에 인간의 그 어떤 사역도 완전하게 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가치론이 버려져야 할 뿐만 아니라 좀 더 명확하게는 모든 적선의 사역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 핫지의 견해
1.구속의 언약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의 머리이시며 대표자가 되신다는 사실, 이 대표적 연합과 영원한 언약에 의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을 행한 것으로, 그들의 이름으로, 그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였으나 문자적인 것은 아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행위는 그들의 행위가 되었지만 이것은 대표적인 원리에 의해서이다.
2.구속의 언약에 의하여 그리스도께 약속된 상급은 그의 백성들의 칭의, 성화, 그리고 영원한 구원이다.
3. 그러므로 신자의 칭의의 법적 근거는 그들 자신의 의도,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거룩한 본성도 아니며, 그들의 이름으로 수행되고 겪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고난이며, 이것이 언약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정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으며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
1). 신앙의 참된 본질
회심에 흔히 따라붙는 여러 가지 동요를 이미 체험했고 또한 하나님이 자기를 받으시라는 소망에서 흘러나오는 평화를 느껴본 사람은 자연히 이제는 갈등이 지나갔고 승리를 얻었으며 신앙의 역사를 다 이루었다는 식으로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런 상상이 이내 사라져 버린다. 출생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회심이 신앙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젊은 어머니는 너무나 기쁨에 가득 찬 나머지 자기 앞에 놓인 사명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잠시 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품에 안은 갖난 아기를 바라보며 그 귀여운 모습과 그 생기발랄한 본능적인 움직임을 볼 때에 그 아기가 전적으로 자기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한 시간만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두어도 아기가 죽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린 그리스도인은 물론 처음에는 이제 할 일을 다 완수했다는 식으로 생각하게도 되지만 자기의 영적 생명이 너무나 가냘프기 때문에 끊임없이 보살피고 영양분을 주어야만 된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된다. 새 생명으로 거듭나자마자 그냥 버려두면 버림을 당한 갖난 아기처럼 그 영적 생명도 곧바로 확실하게 파멸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저질러지는 또 한 가지 실수는 신앙이란 변덕스러운 것으로 흥분의 상태와 부감각의 상태가 서로 교차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로 범한다. 이런 망상 속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때에만 신앙을 발휘하는 것이다. 몇 달 동안을 무관심속에 편안하게 살다가 마음에 감동이나 기쁨을 느껴도 그 다음 얼마 지나면 그런 것들이 다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저 그런 상태로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어떤 형태든 그런 식으로 간헐적인 것이 아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런 식으로 간헐적으로 사는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건강한 사람이 경련을 일으키고 다시 졸도하며 졸도했다가 다시 경련을 일으키는 법도 없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순전한 신앙이라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유지되지를 않는 것이다. 물론 변화는 있다. 건강한 때가 있고 병든 때가 있고 원기 왕성한 때가 있고 무기력한 상태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과연 신앙이라는 이름에 합당하다면 그것은 꾸준히 이어지며 활력이 있고 전진하는 법이지 그런 식의 발작이 정기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이보다 더 비근하게 나타나는 오류는 신앙을 내적인 섬김으로보다는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행위로 보는 것이다. 종교 집회에 참석하기 때문에 자기는 신앙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들은 공 예배에 참석하고 겉으로 신앙의 모양을 보이기만 해도 그리스도인 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이란 영적 삶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작을 가리켜 새로운 출생(거듭남, 신생)이라고 하며 새로운 창조요 영적부활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신앙의 원리 또는 근원은 신비로운 것이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말할 수가 없다. 식물의 생명의 형태도 다르고 동물의 생명의 형태도 다르고 이성적인 사람의 생명의 형태도 다르다. 이렇게 생명의 활동이 서로 다른데 감추어져 있는 그 활동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추적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영적생명의 본질도 그에 못지않게 파악이 불가능하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설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영혼 속에 새로운 종류의 활동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활동의 근원은 어디며 그것이 어떻게 유지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한 일들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활동에 무언가 영구한 원인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육체의 생명이 보고 듣고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영적생명이 그 존재가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중생할 때에 영혼의 상태에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중생한 영혼은 그 생각이나 목적이나 느낌에 있어서 과거와는 다르며 또한 그런 달라진 모습이 계속된다.
이렇게 달라지는 원인을 가리켜 때로는 새로운 마음, 은혜, 새사람, 내적갱신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용어들은 전부 영적생명의 원리를 지칭하는 것들로서 거룩한 열매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그렇게 영구하며 또한 항상 있기 때문이다. 신앙에 관해서 한때는 어느 정도 열심과 활력을 보이다가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마치 죽은 시체에다 전기 자극을 주어서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움직임을 잠시 보이게 만드는 것과도 같다. 그런 시체의 움직임을 잠시 보이게 만드는 것과도 같다.
그런 시체의 움직임은 그렇게 잠깐 생겼다가 곧바로 사라져버리고 그 다음에는 아무리 자극을 주어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를 않는다. 시체의 경우 생명의 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이 순전하다면 그 신앙은 새로운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따라서 그 신앙은 영구한 것이다. 더욱이 지각 있고 이성적인 존재들의 특징은 그 모든 행위에서 자발적이다. 충동적으로 행하고 또 즐겨하는 특정한 행위들이 있다. 동물들은 억지로 먹거나 마시가나 장난하지를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사상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며 느낌을 주고받을 때에 강압에 의해서 정신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동료들에게서 소외되어 지적생활과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속에 있는 것을 발산할 기회를 상실하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형벌 가운데 가장 극심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외와 감사와 사랑과 복종이야말로 새로움을 입은 심령의 자발적인 행위들이다. 그런 행위들을 통해서 영혼이 감추어지지 않고 억제되지 않은 상태로 자유로이 분출되는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억지로 혹은 강제적으로 실행되는 신앙은 가짜 신앙일 수밖에 없다. 벌을 받을까 무서워서 겉모양으로만 행하는 부모에 대한 복종은 존경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순종과는 매우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 역시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그런 섬김은 가짜요 우리가 그의 자녀인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기뻐하는 것으로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 규례들, 성소, 그의 임재가 모두 그들의 가장 큰 즐거움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병이 들면 일상적인 즐거움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병이 들면 일상적인 즐거움을 주는 여러 가지 것들에 별 흥미를 느끼지를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침체상태에 있게 되면 신앙에 속한 것들에서 거의 기쁨을 느끼지를 못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 영적생명에 속하는 것들에서 거의 기쁨을 느끼지를 못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 영적생명에 속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자발적으로 경건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그것이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형태를 취하든 간에 생명은 발전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주 가냘프지만 점차로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영적생명도 마찬가지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기쁨이 있지만 이것이 쇠퇴하는 경우가 아주 잦은데 이런 사실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도 신앙 그 자체가 자기 마음속에서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영적 삶의 발전 또는 쇠퇴를 가늠하는 기준으로는 아주 불확실한 것일 뿐이다. 어린 동물들이 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광경을 보면 그것들이 기쁨에 넘치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다 자란 동물에게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뛰노는 동물들의 신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모른다. 그것들 보다 절반 정도의 기쁨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성숙한 동물들에 비할 때에 견디는 힘도 절반 정도의 기쁨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성숙한 동물들에 비할 때에 견디는 힘도 절반밖에는 안되고 무언가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너무나 약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어린 그리스도인이 잠정적인 데서 행복감을 느끼고 자기들의 본성에서나 신선함에서 희열을 느끼지만 그보다 성숙한 자들에게서는 그런 것들이 없고 오히려 그런 느낌이 무르익어서 하나의 삶의 원리가 되며 더 기쁜 감정들이 보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안으로 정착되어 간다는 것이 전혀 이상스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기쁨이 바른 영적 삶이 자라나는 일을 가늠하는 적절한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그 기쁨은 본질상 진보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에서 성인으로 나아가면서 육체가 성숙해지며 또한 유아에서 성인으로 자라나면서 정신력이 발전하는 것과도 같다. 성인이 어린아이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에 당연히 있어야할 중요한 요소가 결핍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도 거룩함에 진보가 전혀 없다면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 진보를 입증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힘의 증가, 곧 믿음의 힘, 목적의 힘, 원리의 힘, 올바르게 행하는 힘, 악을 저항하는 힘, 고난을 견디는 힘 등이 증가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름지기 힘에서 힘으로 나아가며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거룩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은 외형적인 봉사가 아니다. 그저 두려움과 슬픔에서 오는 흥분상태에 이어서 평화와 기쁨이 따라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이어서 평화와 기쁨이 따라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계속 교차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참된 신앙은 영구한 행동의 원리요, 자발적인 시행이요, 본질상 발전적인 것이다. 그런 속성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요(벧후1:4), 영혼이 하나님께 화합하는 것이다.
신앙은 옛사람과 옛사람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새사람, 곧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골3:10),“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엡4:23-24)을 입는 것 이라고 한다. 이 두 구절은 동일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알 수 있는 능력을 지니도록 새로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지식이란 참되고 선한 것에 대한 지각, 인식, 인정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이처럼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성경에서 이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 지식이 영혼의 생명이다. 그 지식은 바로 하나님과 화합하여 진리를 지각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판단과 의지에 있어서 영혼을 하나님과 화합시켜 주는 것보다 더 고상한 도덕적 탁월함이란 없다. 이것을 가리켜 사도는 엡4:24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즉 진리에 기초하며 또는 진리에서 나오는 거룩함이란 의미이다.)이라고 부른다. 롬12:2에서도 거룩함에 대한 동일한 사상이 나타난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또는 확증하도록)하라”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며,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참괸 신앙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런 변화의 주체는 바로 전인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지각이 새로워지고, 목적이 새로워지며, 느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전신이 점점 더 깨이며, 의지가 올바른 규범에 더 복종하게 되고, 감정이 더 청저하게 정결케 되는 것이다. 사도는 데살로니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전5:23) 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성화(聖化)의 주체가 된다. 몸은 성령의 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이며,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덕분에 몸이 구속의 은택에 참여하며 장차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악한 영향이든 선한 영향이든 몸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다양하고 우리의 타락상태에서는 악한 영향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악한 영향이 대항하는 일이 성화와 역사에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또한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삶을 얻는 조건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선언한다.(롬8:13)그러므로 몸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죄를 섬기는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로 거룩하게 구별함으로써 되는 것은 물론 영혼에 미치는 그 몸의 영향을 억제하고 그 몸의 소욕을 절제하고 새로움을 얻은 사람의 뜻에 몸을 복종시킴으로써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화의 역사가 우리의 모든 기능에 다 미치듯이 영혼에 새겨지게 되어있는 하나님의 형상에는 도덕적으로 탁월한 모든 것이 포함되는 것이다. 사랑, 믿음, 온유, 자비 등 서로 다른 은혜들은 선(善)이라는 한 가지 동일한 원리가 달리 드러난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와 자비가 동일한 감정 혹은 동일한 성향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람을 정의롭게 만들어 주는 동일한 원리가 그 사람을 자비롭게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신앙, 혹은 신적 생명의 원리는 온갖 종류의 탁월함을 다 촉발시킨다. 또한 각 종류마다 골고루 영향을 미친다. 마치 식물이나 동물이나 이성적인 존재나 생명의 원리가 각 부분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영향을 미쳐서 전체가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가지가 커짐에 다라서 뿌리도 커진다. 몸의 이런저런 지체들이 자라날수록 몸 전체도 거기에 맞게 자라난다. 정신력에 속한 다른 능력들이 왕성하게 증가함에 따라서 판단력과 기억력도 증가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처럼 조화 있게 발전해 가는 것이다. 몸의 다른 부분이 성숙하게 자라는데 팔만 어린아이 때의 모습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끔찍한 결함의 상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는 판단력과 감정이 충만하게 발휘되는데 기억력과 양심은 유아 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 사람의 정신은 완전히 혼란 상태에 있을 것이다. 이런 균형 있는 발전의 법칙이 영혼의 생명에도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 과연 영혼에 생명이 존재한다면 그 생명은 온갖 형태의 선(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한 부분에 대해서는 탁월함이 나타나는데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탁월함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 그 탁월함은 신적생명, 혹은 새로운 마음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적생명이나 새로운 마음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적생명이나 새로운 마음은 본질상 모든 도덕적 탁월함을 다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람이 좋기는 한데 불친절하나는 말은 모순으로 느껴진다. 좋다는 말 속에는 정의롭다는 뜻과 자비롭다는 뜻이 함께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신앙이 있는데 부정직하다는 말 역시 모순이다.
신앙이란 경건성은 물론 정직성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religion)이라는 단어는 온갖 형태의 도덕적 탁월함을 포괄하고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신앙 혹은 새사람, 은혜의 원리, 마음속에 있는 신적생명의 원리 등의 단어들이 뜻하는 바는 모든 종류의 선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경외, 사랑, 순종, 정의, 자비 등은 서로 다른 형식으로 시행되지만 모두가 거룩이라는 한 가지 동일한 원리에 속하는 것들이다. 자비가 없는 거룩이란 있을 수가 없다. 또한 경외나 정의가 없는 것이다. 거룩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마음의 영이 새로움을 입은 사람은 성령의 다양한 온갖 은혜 가운데서 물론 대상과 형편에 따라서 표현방식도 달라지겠지만 도덕적 탁월함이 반드시 다 드러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내적인 생명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포괄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특별이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의 본성에 적합한 대상들에서 기쁨을 얻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외부의 대상들에게서 우리의 본성에 맞는 특질들을 접하면 거기서 만족과 욕구가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 영혼은 그것들이야말로 자지자신을 위해서 사랑해야할 선이라 여겨서 그것들에서 안식을 누리게 된다. 그 특질들이 고상할수록 더 순결하고 더 고상한 사랑이 자극을 받아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중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완전하심이 온갖 탁월함을 다 포괄하며 우리의 본성으로서 가능한 최고의 능력과 최대의 능력에 적합한 것임을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그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아서고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만족과 욕망의 최고의 대상으로 삼아 그 가운데서 안식은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저 도덕적 탁월함에서 만족을 얻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은 우리와 가장 친밀한 관계 속에 계신 인격적인 존재를 향한 사랑이다.
우리의 존재의 주인이신이시오 우리의 보존자시오 통치자이시며 의식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보살피고 보호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며 우리와 교제하시며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 우리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인 것이다. 이처럼 포괄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는 의존감, 의무감, 교제함이 개입된다.
또한 이 사랑은 그 사랑이신 그 대상이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을 인식함에 따라서 계속 수정된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하나가 찬양의 대상이 된다. 그 무한함이 무한하신 선하심과 연합하여 경이와 찬송과 경외와 만족을 자극하게 되고 그리하여 찬양으로 나오며 부복하여 예비하는 것밖에는 다른 표현이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보다 신앙의 본질에 더 필수적인 요소는 없다. 하늘이 열려 사람에게 그 모습을 드러낼 때면, 언제나 그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 우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절하는 모습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 땅위에서 행해지는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겸손한자와 회개하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경외와 사랑의 감정들이 시행되는 일은 그저 우발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좀더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바쁜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짐에 따라서 우발적으로 잠시 생겨나기도 하고 세상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잠겨서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기리며 그의 선하심에 대해 감사하며 그의 축복을 빌 때에는 그런 감정들이 지속적으로 생기게 되는 것이다.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충만하게 나타났던 헌신의 심령이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거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경건한 자들이다. 모두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며,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느끼며 그의 임재 속에서 즐거워하며 모두가 사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의 행위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린다. 영혼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가 없이는 신앙이란 없는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육체에 온기와 움직임이 없을 수가 없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육체가 급속히 부패하는 것처럼 영혼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어지면 망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굴복과 순종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굴복이란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다. 이 굴복은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들이 올바르게 그의 경륜들이 전부 지혜롭고 자비하며 정의롭다는 지각과 시인을 포함한다.
주위가 캄캄해질 때에도 그의 신앙으로 “공의와 판단이 그의 보좌에 거하도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새로움을 향한 영혼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에 대한 확신이 가득 차서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서 말하기를“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한다. 온 땅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의를 행하시리라는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불편한 마음과 의혹들로 인해서 마음의 평화가 깨어지고 죄책감이 더욱 가증되지만 이런 심령의 영향을 받으면 그런 불편과 의혹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또한 반드시 순종을 낳는다.
왜냐하면 영혼이 하나님과 화합하는 것이 참되고 올바른 것을 지각하고 사랑하는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합은 오직 순종을 통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마치 불순종이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반대된다는 증거이듯이 말이다. 하나님과 화해가 있거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이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듯에 대하여 마음과 삶으로 화합하는 것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피하지도 않는데도 그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과 같다거나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순종은 사랑이 필연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요 외모요 겉껍데기인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탁월한 것에 대한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에는 순종이 뒤따르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자신 사이에 마음의 화합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만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대상에게 기쁨을 주고자 하는 목적도 노력이 없다면 사랑이 아닌 것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14:21)에서 순종은 사랑의 증거라기보다는 사랑 그 자체가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고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꾸준하게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이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한층 충실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인데 만일 그런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그 뜻을 대적하는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그 마음속에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순종이 나타나는 법이다.
영적생명이 활동하는데 거기에 기쁨과 평안이 없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사물의 질서에 합당치 않는 것이다. 행복이 이처럼 기쁨과 평안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도는 “영의생각은 평안이니라.”(롬8:6)고 말씀한다. 어떤 것이 탁월할 때에는 그 탁월함을 누리는 것이 반드시 함께 있기 마련이다. 바른 감정과 사랑은 언제나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이 기쁨은 대상의 위엄에 따라 비례한다. 기쁨의정도가 기쁨의 종류가 거기에 비례한다. 감각적인 데서 나오는 사랑은 가장 저급한 행복을 준다.
사교적인 애정 다음은 지적인 능력 다음은 도덕적인 감정 다음은 신앙적 사랑의 순서로 기쁨의 품격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적 사랑에서 나타나는 즐거움은 다른 어느 것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순결하고, 더 고상하며, 더 만족을 주며, 우리의 본성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교제야 말로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가득차있으며 또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안을 준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기쁨(희락)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곧 영적 생명에 반드시 수반되어 그 생명을 증명해 주는 한 가지 요소라는 뜻이다.
기쁨은 건강이 흘러넘친다는 증거이며, 성령께서 새로움을 얻은 영혼에게 부어주시는 즐거움의 기름이다. 성령께서는 그 기름을 부어주셔서 그 영혼의 활동에 활력을 주시며 그 모양을 밝게 하시고 도한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는데 능동적으로 힘쓰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움을 얻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도덕적 탁월함에 있다면 또한 도덕적 탁월함이 곧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형편 가운데서도 올바로 느끼고 행동하도록 만들어 주는 정신의 상태를 뜻한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른 시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그 이웃을 향해서도 올바로 느끼고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이 선한 자들로 칭하는 사람들은 경건할 뿐만 아니라 자비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는 계명은 우리 이웃의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의무를 포괄적으로 진술해 준다. 여기서 의도하는 사랑이란 바로 우리 이웃들에 대해서 존중과 친절로 대하며 그들에게 성을 행하기를 구하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성향을 뜻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오래참고 친절하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잘되는 것을 기뻐한다. 이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하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는다. 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 안에서 기뻐한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란다.(고전13장)
사랑이 없이는 아무리 경건하다고 입으로 떠벌이고 은사가 많고 자기부인의 행위나 구제의 행위를 겉으로 행한다 해도 모두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충동하는 자기사랑이 우리 자연인의 본성에 속하듯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충동하는 자비는 새 사란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새사람이란 선한ㄱ사람, 곧 하나님을 닮아서 거룩하고 정의로우며 자비하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생겨나는 온유, 친절, 신뢰성 있는 기질은 개개인의 다양한 성격에 따라서, 삶의 여러 가지 관계에 다라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똑같은 느낌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라고 가르치지만 동시에 성경은 사람들이 한 가정의 식구들로서나 한 사회의 구성원들로서 맺는 특수하고도 더 밀접한 관계를 배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자비를 생겨나게 하는 동일한 신앙의 원리가 삶의 갖가지 관계들에 속한 온갖 사랑들을 행하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다. 그 신앙의 원리는 순종해야할 자에게 순종하도록 하고, 경외할 자를 경외하게 하며, 존귀히 여길 자를 존귀히 여기도록 만들어 준다.
자기와 동등한 사람들과 관계할 때에는 겸손하고 정당하며 친절히 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덕성이 참된 신앙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닮은 자들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긍휼히 많으시며 오래 참으시고 선하심과 진리가 풍성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부정직하고 불친절하며 교만하고 복수심이 있고 속이기를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지 않는 자들이요, 마음이 새로워진 일이 없는 자들이다. 악한 부모, 악한 자식, 악한 이웃이면서도 동시에 선한 그리스고인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은 것이다. 마음이 새로워진 사실이 겉으로 드러나는 도 한 가지 형태는 바로 자기부인의 모습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자기부인이 필요한 한 가지 이유는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려면 다른 사람의 유익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는데 있다. 우리의 욕망과 욕구 가운데 무질서하고 악한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된다. 복음이 제시하는 법칙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기쁘게 하려 해서는 안 되며 누구든지 이웃을 기쁘게 하고 그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요한 자로서 스스로 비천하게 되셔서 비천한 우리로 부요하게 하신 것이다. 자기부인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다가온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은 이기적이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양보하며 자기 자신의 만족과 심지어 자기의 권리까지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포기한다.
그가 추구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온전히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탁월한 특징이었듯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런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화합하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자기부인은 우리 인간의 본성의 부패함 때문에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 진다. 타락의 결과 감각의 영혼에 부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끊임없이 요구하며 들어주면 줄수록 더욱 요구가 커지는 것이다. 이성적인 사람도 육체를 정신에게 복종하게 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신앙인으로써는 더더욱 감각에 사로잡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은 육체를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요 몸을 쳐서 복종시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육체에 속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외형적이며, 마음의 악한 기질들이 영혼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교만, 허영, 시기, 악의, 자기사랑이 육체적인 탐욕보다도 깨뜨리기 어려운 원수들이다. 악한기질들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부패한 옛사람을 벗어버린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의무 가운데 가장 힘들며, 삶 속에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5:17)이러므로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원리는 성령을 따라 행하기 때문에 승리를 얻는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움을 입어서 거룩해진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만족을 얻고 안식을 얻는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그의 피조물과 자녀로서 관계를 가지며, 그 속에서 즐거워한다. 이들은 경건한 삶을 살며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과거의 육욕에 따라서 살지 않고 그들의 모든 대화에서 거룩한 모습이 드러난다. 정의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이웃을 향하여 정직하며 자비를 베풀며, 자기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한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일이며, 하나님의 형상에 화합하는 일은 자기부인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의 미묘한 악들을 대적해 나아가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관념은 성경에서 찾아야지 삶에서 찾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은 신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은 사랑하는데 있다고 말씀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경외와 헌신과 순종, 사람에게 자비와 공의를 행하며, 그들을 사랑하는데서 나타난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이러한 겉모양을 갖추었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양심이 증거 해 준다. 사람들은 서로 매우 다르면서도 동일한 특색과 동일한 사회적 성향과 동일한 정신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도함을 받으며, 또한 모두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룩이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필수적이다.
예수님께서 구주이신 것은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상태는 바로 거룩의 상태인 것이다. 구원이란 육체의 소욕과 마음의 악한 욕심에 종 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요 그를 섬기는 일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언제나 이 땅의 삶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거룩함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히12:14)우리의 마음과 삶이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에 습관적으로 지배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와 형상에 부합되지 아노고,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보이지 않는다면, 신앙인이 아니며,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요,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았고 거룩하여 졌으며, 또한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성도들이다. 이들은 영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지며, 정과 욕심을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심령이 가난하며, 온유하고, 청결한 자들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다.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완전해졌다함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그의 백성도 반드시 거룩해야 한다.
그러므로 거룩의 필연성은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에서 연유하며, 그 필연성은 절대적이며, 불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백성이 그의 거룩에 참예하는 자가 되지 않는다면 구세주의 사명과 고난의 계획과 목적 전체가 망쳐지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백성들이 거룩해져야만 비로소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이며, 또한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보상이 그의 백성들을 이끌어 그 자신의 형상과 화합하도록 하여 그가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장자가 되시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든지 구속의 매력과 영광은 바로 죄에서 구원함을 받는 것과 하나님을 닮아 가는데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야말로 의의면류관이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요, 그리스도인이 바라고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그 존귀함이요 축복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구원에 대한 사고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요 그의 소망을 산산이 깨뜨리는 것이다.
구원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구속의 계획 등 이 모든 것들이 거룩이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입증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지 도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든지 간에 거룩하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후사도 아닌 것이다.
2). 성화의 수단
우리는 타락한 존재로서 우리 스스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런 규칙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온갖 노력들이 그 지체로는 전혀 효과가 없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는 한 이성과 양심을 동원하여 아무리 노력해도 거의 소용이 없는 것이다. 타락이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이성, 선택적 양심, 사회적 삼정, 정의감, 두려움, 부끄러움 등이 있다. 이런 행동의 원리들은 기술적으로 운용하면 적절한 품행을 만들어내고 매우 온화한 성품과 가치 있는 성격을 만들어 내는데 많은 기여를 할 수가 있는 것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수단을 사용하여 우리 본성의 타락한 갖가지 악한 면들을 근절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감정 혹은 기분(affections)은 이성의 독당에도 양신의 명령에도 복종하지 않고 자기들의 법칙에 따른다. 그리고 이성과 양심의 본연의 영역을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산출시키고 유지시키는 일은 우리 자신이 지닌 목적의 힘으로도, 도덕적 사고의 힘으로도, 어떠한 규율로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교도들이 하는 은둔, 금욕적인 절제, 목욕, 순례, 고행, 성수를 뿌리는 것,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 종교의식에 참여 하는 이런 수단들 자체가 사람의 영혼에 은혜를 전달한다고 믿는 것이다. 성경은 곧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죽으심의 공효에 참예한자가 될 뿐 아니라 그들 속에 생명의 원리로서 거주하시며,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되도록 역사하시고 하나님 자신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참여한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사람이 율법 아래 있는 한 사람은 노예의 상태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감정을 가질 수도 없고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되면,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 전체가 변화된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의 죽으심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므로, 이제 그의 생명과 연합한자가 되었고, 연합의 결과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들 속에 성령님이 거하시게 되어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그리고 이 성령은 영혼에게만이 아니라 육체에게도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의 교리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양심이나 도덕적 동기의 힘으로나 극기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과 화복한 상태가 되며, 성령에 참예한자가 됨으로써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칭의가 되실 뿐 아니라 성화가 되시는 것이다. 그는 율법의 형벌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거룩한 자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에 의하면 칭의 없는 성화, 칭의 이전의 성화란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의 연합의 본질은 아주 신비한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이 비밀이 크도다.”(엡5:30.32) 연합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다. 그 효과가 분명하게 진술되어 있으며, 아주 충격적인 실례를 통해서 그 본질이 계시되어 있다. 우리 주님은 그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17:21~23)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도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량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14)말씀한다. (롬8:9~10, 고전 3:16)
성경은 이런 가르침으로 가득차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갈3:13~14) 구속의 은택에 참여했다는 유일한 증거는 바로 성령님께 참여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성령께서 전달하시는 놀라운 능력으로 드러나든지, 성령의 임재를 끊임없이 표시해 주는 거룩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 연합으로 나타나는 효과는 그리스도의 공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한 것이요, 성령의 내주하심은 우리의 성화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연합을 몸의 머리와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비유한다. 이런 비유적 표현이 담고 있는 주된 사상은 생명의 연합된 교류가 있다는 것이요 그와 그들 안에 동일한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이다. 몸이 한 영혼에 의해서 생명을 갖게 되고, 그 영혼을 통해서 온 지체들이 하나가 되며 공동의 생명을 전달받듯이 그리스도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전달되며 그 백성들이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그 백성끼리도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안에 자리하고 있고, 근원을 두고 있는 그 생명을 그의 백성 모두에게 부여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 또 다른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가지가 포도나무와 연합하여 그의 생명을 함께 나누며 그에게 절대적으로 그 나무에 의존하듯이 신자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생명을 나누며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전달되는 성령께서 그들 속에 생명과 결실의 원리가 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은 하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고 하셨는데 그 성령께서는 영적 생명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영적 생명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모든 일들의 근원이 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며(눅3:16), 성령으로 나며(요 3:5), 하나님의 영이 그들 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신령한 자들이라 칭함을 받는다.(고전3:16)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며(고전6:11),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롬8:15), 성령 안에서 살며(갈5:25),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하게 되고(엡3:16),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엡5:18)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죽이며(롬8:18),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으며(엡2:18),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찬미한다.(고전14:15 ) 그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지식의 근원이요(엡1:17), 기쁨의 근원이요(살전1:6), 사랑과 오래 참음과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근원이다.(갈5:22~23) 성령의 내주하심의 교리는 복음의 본질 속에 배어 있어서 절대적인 복음의 필수적 요소가 되어있다.
하나님의 영이 그의 백성들과 항상 함께 계셔서 그들의 내적활동과 외적행동을 인도하셔서 마지막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하늘의 순결함과 복락에 들어가도록 이끄신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복음에서 빼버린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거룩한 삶의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의 교리에 있다. 이 교리는 죄 사함에 대한 소망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힘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터를 세움으로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지며, 구속의 비밀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엡3:17~19)
신자는 바로 이 교리 덕분에 온갖 시련 가운데서도 꿋꿋이 설 수 있으며, 모든 원수들을 이길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사는 것이 그 자신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사시며 그의 삶에 필요한 은혜를 풍성히 베풀어주시며 그를 정결케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 있는 그의 친 배성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영적 생명의 근원이므로 그 생명을 유지하고 촉진시키는 수단은 모두가 이 교리와 연관되며 또한 그 효능이 생긴다. 그리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깨끗이 되며(행15:9),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며(행26:18), 믿음으로 살며(갈3:11),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엡2:8)
믿음은 이처럼 중요한 기능을 지닌다. 믿음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끈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 것으로 요구할 권리를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의 성령에 참여케 하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에게 오는 자는 생명의 물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사도는 이것이 성령을 의미한다고 말씀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 때 비로소 하아님께 나아가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 그의 거룩케 하시는 사랑의 영향력을 받을 확신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과 은혜에 사명을 다할 힘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시험을 이기며 사명을 다할 힘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일이다. 지극히 크고 귀한 약속들을 받아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게 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신자의 거룩함과 평강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시험을 당하여 낙심이나 죄에 빠질 때에 그를 바라보며 그에게 도움을 구하면, 인간의 의지로도 어떤 다른 동기로도 얻을 수 없는 큰 힘을 얻게 되어 그 힘으로 시험을 이기고 견디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유로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또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가득함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덕분에 우리는 영적생명의 근원인 성령을 받았으므로 성령께서 떠나시는 모든 일을 피하여 그 생명을 유지해 간다. 성경은 성령께서 근심하실 수도 있고, 성령을 거스리는 자들에게서 지그의 영향력이 소멸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영혼을 죄로 더럽히거나 무절제와 음란으로 육체를 더럽히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체들이요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화를 주장하시는 성령께로부터 나오는 올바른 생각과 의로운 목적과 거룩한 욕심은 계속 높이고 기려야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도덕성에 대한 사고도 필요하고 도 그것에 대해서 정당하게 대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에 의존하여 죄를 대적하고 올바른 감정을 배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며, 끊임없는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그를 의지함으로써 그 삶이 유지되는 것이다. 성령과의 교제는 주로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도는 성령을 받는 지정된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너희가 안할지라도 좋을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끈질기게 기도하며 특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심령 속에 유지되며 촉진 되도록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역사하사 그의 기쁘신 뜻대로 뜻을 갖게 하시고, 행하게 하신다는 교리는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 가운데서 자라나도록 합리적인 수단과 성경적인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와 모순 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은 인간으로서 파악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는 일깨우시고 가르치시고 설득하시는 일을 하시는데 이 모든 것이 이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내주(內住)하신다고 해서 우리 자신의 기능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그것들을 인도하셔서 행동하게끔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그 일을 사실 우리가 행해야 하며, 그렇게 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하나님의 역사에 속하고, 회개가 그리스도의 선물이지만 우리가 회개한다.
사랑, 온유, 양선 등 모든 은혜들이 성령의 열매들이지만 우리가 사랑하며, 온유하며 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이러한 영향 아래서 인도함을 받아 바른 기질과 감정을 행사함으로써 성화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힘을 계속해서 발휘하면 그 힘이 더 커지는 법칙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거듭난 영혼의 기질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경건한 감정은 그 어떤 것이든 경건의 원리를 강화시켜주며, 영혼을 영구히 보다 낮게 만들어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영향력에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 믿음, 간사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섬김에서 생겨나는 선행은 그런 행동 자체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갖는 한 시간의 교제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깊은 감동을 남기며, 언제나 악의 영향을 덜 받고 선의 영향을 더 받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또한 성령께서 영혼을 자극하여 거룩을 실천하도록 하며,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도록 이끌어주며, 그 영혼을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주며, 또한 하늘의 불변하고 완전한 거룩에 더 합당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행실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주로 진리를 묵상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생각과 감정에는 대상이 있기 마련인데 그 대상이 또한 그것들을 불러일으키는 성향이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선하심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 그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소망을 가질 수가 없다.
이런 감정들이 그 적절한 대상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 대상들이 또한 그 감정들을 자극하는 성향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부패하지 않았다면 그 대상들을 볼때마다 거기에 합당한 감정들이 반드시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패하였지만 그 대상들의 고유한 본질에서 나오는 성향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부패성을 교정하시고 제거하심에 따라서 그 대상들이 적절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진리로 거룩함을 입는다고 말을 하며(요17:19),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된다고 하며(요15:3),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다고 하며(약1:18),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고후3:18)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지속적으로 마음속에서 활동하도록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기대한다는 것처럼 불합리한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에 세상의 생각과 근심이 가득 차 있으면서, 특히 죄를 생각하거나 죄를 보고서 악에 감동받기를 잘하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우대하심에 부응하는 감정들이 그 속에서 강하게 자리 잡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와 그의 일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강하게 역사할 수 있겠는가? 사물의 본질 그 자체가 변화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일에 시간을 드리지 않고서는 거룩에 있어서 진전을 이룰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주는 진리인 것이다. 이 진리를 마음에 담을수록 이 진리와 교감하며, 그 의미를 깨우치고 우리 자신의 경우에 적용시키며 그 원리들을 수용하고 그 동기를 인식하며 그 약속에 기뻐하며 그 경고에 덜며, 그것에 영향을 받아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로 올라갈수록 더욱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선한 것을 분별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건에 뛰어난 사람들은 언제나 기도의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묵상의 사람들이었고 온갖 기쁨과 슬픔이 있는 세상의 영향에서 마음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계명과 약속들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진리에 대한 묵상 이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예배는 모든 경건한 감정을 시행하고 표현하는 것만은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교제를 유지하며 그의 은혜를 전달받는 지정된 수단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1)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4,7) 이것은 계시의 문제요 동시에 체험의 문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그들의 영의 아버지께 사적으로 공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일이 그들의 영적 힘을 새롭게 하는 주요 수단임을 깨달아왔다.
성소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선정이요, 성소의 예배는 손으로 지어지지 않은 하늘에 속한 영원한 성전의 예배를 미리 예비하는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은혜의 수단인 성례가 여기서도 적절한 위치를 차지한다. 옛 경륜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생제사와 의식들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성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일에 계속 발전하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
게 드리는 모든 지정된 예배의 형식과 예배의 기회에 신실하게 참석하는 법이다. 홀로 골방에서도 늘 예배하며,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성찬에 시강ㄴ을 엄수하여 참석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사람이 친한 친구와 교제 나누기를 바라고 애쓰듯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회를 구하고 찾을 것이다. 이러한 예배를 많이 나눌수록 하늘의 복락 가운데서 빛의 아버지와 나눌 완전한 교제를 더 잘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한다. 행동이 웅변의 전부라는 말이나, 행동이 신앙의 전부라는 말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생각과 감정의 표현이 아닌 행동은 결코 웅변이 될 수없고 경건한 마음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지 않는 행동에는 신앙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유지되어야만 비로소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의미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나타나는 악한 성향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신앙을 문 바깥으로 밀어내고 집안에 들이지 않고, 거리나 공중 집회나 묶어두며, 떠들썩한 겉치례와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흥분 이외에는 아무 음식도 주지를 않는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신앙의 힘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신앙의 힘의 근원을 잘라버리는 것이요 하늘에서 온유하고 거룩한 방문객을 시끄럽고 왁자지껄한 이 땅의 거민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과도 같다. 속으로 신앙이 있기보다는 겉으로 신앙이 있는 체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 마음을 부지런히 다스리기보다는 교회의 임무들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의 참 능력보다 신앙의 겉모양을 더 좋아하는 오류에 빠질 위험이 다분하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열심 있는 것을 좋아하고 바쁘기를 바라기 때문에 세상적인 일에도 아주 적극적으로 임하는데 이런 성향이 전혀 성격이 바뀌지 않은 채로 종교적인 활동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은 이와 정반대족에도 상존하고 있다. 신앙이 외형적인 행동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은 언제나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3:17).
어머니의 사랑이 반드시 어린 아기를 돌보는 행동으로 이어지듯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반드시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오로지 자기의 구원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과 관련된 행동만을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모든 관심을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제한시킨 나머지 한평생을 머뭇거리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모든 은혜들, 곧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사람을 향한 공의와 자비를 조화 있게 시행할 때에 비로소 영혼의 건강이 유지되고 촉진될 수 있는 것이다. 선을 행하면 사람이 더 나아지는 것이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자비의 원리가 강화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을 주는 사람이 또한 스스로 물을 받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셨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형제들의 육신적 영적 유익을 위하여 노력하는 자들에게, 구속자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대로 참된 신앙은 겉으로 과시하는 것도 아니요 감정으로 폭발적으로 분출시키는 것도 아니다. 참된 신앙은 영구하며 자발적이며 발전하는 영적 삶의 원리로서 전인(全人)에게 영향을 미치며, 온갖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참된 신앙이란 어느 한 가지 선한 성향이 아니라, 모든 올바른 감정과 행동의 뿌리요 샘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에서 사람을 향한 정의와 자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적절히 운영하는 데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신적인 생명은 이성이나 노력으로나 어떠한 미신적인 행동으로 얻어지거나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명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그의 모든 지체들 속에서 거하게 하셔서 이러한 생명을 얻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 신적인 생명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은혜의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하며, 또한 성령의 거룩한 영향력을 마음에 기리게 해주는 모든 일을 행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바로 영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진리를 묵상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우리의 모든 상대적인 의무들을 수행하는 가운데 모든 거룩한 기질들을 실천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세상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 주님과 연합하고 나면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일이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중생으로 시작된 영적 삶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속 지속된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 안에 거하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셔서 형편에 따라 필요한 모든 은혜와 보호하심을 그들의 살아 게신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구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한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씻음을 얻고 거룩함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리고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기업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만들어져서 결국 하나님의 그 복된 임재 속에 들어가게 되며, 그의 은혜와 사랑의 충만한 교제를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핫지는 구원론적 결론이 인간론의 전제에서 발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구속관의 결여는 부당한 죄관이 정정되기 전에는 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뿌리이며, 확고한 원리이다. 핫지의 생각은 신학파 신학자들의 생각과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신학파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실 때 형벌을 사용하시지만 그 목적은 죄를 금하고 죄인들을 바로 잡으시는데 있다고 믿었다. 이런 태도는 자연히 존재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며, 성결은 단순히 행복을 쟁취하는 최선의 길일 뿐 이라는 전제를 낳는다.
그래서 핫지는 “우리는 성결이 수단 그 이상의 어떤 것이며, 행복해지는 것이 거룩함의 목적이나 이유가 될 수 없으며, 기쁨이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이것은 상업적인 용어로 윤리적인 선택을 보는 결과를 낳는다. 선택하는 것은 타고난 권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유익을 산출하고 손실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덕은 보편적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 단지 행복의 수단으로 전략하기 때문에 그 지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http://kr.blog.yahoo.com/yoonhtec/3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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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핫지(Charles Hodge)의 신학학문론을 중심으로 본
프린스톤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간의 상호 연계성에 대한 고찰
-정관섭 교수
차 례
서 론 ............................................................................................................................... 1
본 론 ............................................................................................................................... 2
1. 신학의 학문성 .............................................................................................................. 2
2. 찰스 핫지의 신학 학문론 ............................................................................................... 4
3. 프린스톤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관계 ................................................................. 6
3.1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프린스톤 신학에 접목되기까지의 역사 ........................................ 6
3.2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란 무엇인가? ............................................................................. 8
3.3 프린스톤 신학에서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 ........................................................ 9
3.4 보론 : 프린스톤과 미국의 계몽주의 ............................................................................ 11
결 론 ............................................................................................................................. 12
서 론
불과 40년 전, 예일 대학의 역사학 교수 시드니 알스트롬(Sydney Ahlstrom)이 1955년 Church History지 에 발표한 한 논문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미국 신학 간의 연계성을 처음으로 언급한 이래, 이 논제는 복음주의 신학계에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이 논문에서 알스트롬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은 칼빈의 영향을 무시하였으며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영향으로 신합리주의를 낳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따라서 구프린스톤의 신학자들은 순수한 개혁주의 전통을 변질시키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미국의 근본주의 역사가 어니스트 샌딘(Earnest Sandeen)에 의해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샌딘은 자신의 주저, The Roots of Fundamentalism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헬벡 신앙 고백을 작성한 툴레틴과의 연계성을 주장하였으며, 더 나아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으로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1881년에 성경의 무오성 교리를 만들었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샌딘의 주장은 또 다시 로저스(Rogers)와 그의 제자 맥킴(McKim)에 의해서 한 차원 더 발전되었다. 로저스와 맥킴은 그들의 주저, The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에서 샌딘의 주장을 따라 성경의 무오성 교리가 19세기 프린스톤 신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교리이며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성경의 권위를 구원의 영역뿐만 아니라 과학과 역사적인 면에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보는 성경관은 최근의 현상이며 전통적인 성경의 권위는 구원과 행위에 제한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오(Inerrancy)가 아닌 불오(Infallibility)가 적합한 개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프린스톤 신학 간의 연계성을 널리 확산시킨 인물은 역사신학자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이다. 그는 자신의 주저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개혁주의 신학, 특별히 프린스톤 신학을 지배하였다고 보았다.
"인간의 지성은 영적인 분야에서 맹인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은 성경 저자의 유오한 견해가 반영된 것으로 보지 않고, 성경을 사건 자체에 대한 성경 저자의 무오한 증거로 보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마스덴은 성경의 무오 교리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만들어 낸 교리라고 주장한다.
인류의 전적 부패라는 칼빈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면 성경은 유오할 수밖에 없는데,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성경을 보는 관점에 반영되어 성경 무오를 낳았고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반진화론 사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스덴은 성경의 완전무오성 대신 성경의 정확성을 단지 신앙과 행위에만 제한시키기 위해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정확 무오'를 주장한다.
이처럼 프린스톤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간의 연계성에 관한 논제는 복음주의 신학계에서 일련의 커다란 쟁점으로 비화되었는데, 이 쟁점은 비단 조직신학계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신학계, 그리고 신약신학계에까지 널리 확산되었다. 그리고 한 신학 학파와 한 철학 학파 간의 연계성을 넘어서 이 쟁점은 성경 영감론에 대한 근본적인 재물음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논제가 자유주의와 복음주의 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 좌파와 우파 간에 일어난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신학지남]을 통해 이 논제에 관한 글이 발표되었는데, 1989년 권성수 교수가 "성경무오에 관한 7대 오해"라는 소논문에서 '구프린스톤의 신고안'이라는 소제로 이 쟁점을 다루었으며, 1994년에 박용규 교수가 "프린스톤 신학과 보편실재론"이라는 소논문에서 마찬가지로 이 쟁점을 보다 폭넓게 다루었다. 한 가지 공통적인 점은 이 두 교수의 입장이 모두 복음주의 우파의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 졸고에서는 이미 활활 타오른 프린스톤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간의 연계성이라는 논제를 다시금 취급하고자 한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이 논제를 가장 확연하게 보여주는 프린스톤 신학자인 찰스 핫지(Charles Hodge)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신학의 학문성에 대한 서론적인 언급을 다루고, 다음으로 찰스 핫지의 신학 학문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찰스 핫지의 신학 학문론을 중심으로 프린스톤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간의 연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론
1. 신학의 학문성
신학의 학문성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과연 신학이 학문이 될 수 있는가?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 신학과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학문은 드물 것이다. 철학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구약 성서의 역사까지 고려한다면 신학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중세기에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고 불리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서구에 있어서 대학이 처음으로 설립되었던 14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신학과를 가지지 않은 대학은 설립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신학과를 가지지 않는 대학교가 다소이지만 설립되었다. 그 대신 신과대학이 단독적으로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신학의 학문적 성격, 곧 학문성이 점차 의심스럽게 되었거나 부인됨으로써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룩한 교리를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13세기에 여러 가지 학과를 가진 대학이 설립되면서 그의 학문적 성격을 의심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자연과학이 크게 발전함에 따라 자연과학적 방법을 가지지 않은 학문의 분야들은 그들의 학문성을 의심받게 되었다. 무엇이 학문이며 무엇이 학문이 아닌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규범이 되는 것은 자연 과학의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사물들을 연구하는 분야의 학문들은 학문이 아니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신학이 의심을 받게 되었음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지만 철학도 이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철학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신앙 내지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적 방법이 주도하는 학문의 개념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변천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삶과 역사의 현실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이 현실의 모든 분야들이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서만 연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연과학적 방법 및 표상과 부합하는 학문만이 학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딜타이(W. Dilthey)였다.
그는 자연 과학에 대한 정신과학의 차이를 주장하면서,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그의 대상으로 가진 학문들의 전체" 를 가리켜 정신과학이라고 하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정신과학은 분석적 연구 방법이 아니라 이해하는 연구 방법을 가진다. 정신과학의 출발점은 개인의 "심리적-물리적 삶의 통일성이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외계 전체가 주어져 있다. 이 삶의 통일성은 자연과학의 관찰 방법에 따라 파악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딜타이의 견해는 그 당시의 많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학문의 개념에 대한 토의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학의 분야에 있어서도 학문의 개념에 대한 토의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그의 학문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토의의 중심점을 이루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신학자들의 입장은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입장이 계시신학의 입장이라면, 둘째 입장은 자연신학의 입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계시신학의 입장에 의하면 신학은 "신앙의 학문"이다. 이 학문의 연구 대상인 하나님은 경험적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그는 이세계에 대하여 초월하여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계에 속한 다른 사물들과 같이 하나의 학문적 연구대상이 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다른 사물들과 같이 인간에게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고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분석 및 파악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인간에 의하여 지배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하여 버릴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오직 "신앙의 대상"으로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그의 연구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 가운데서만,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 참여와 순종 가운데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신학은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특수한 학문"이다. 특수한 "신앙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주장하는 계시신학의 입장의 다른 한 가지 특징은 "교회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물론 자연신학의 입장도 신학의 교회성을 부인하 지 않으나 신학의 학문적 보편성을 강조하는 반면 계시신학의 입장은 신학의 교회성을 강조한다. 후자의 입장에 의하면 신학은 다른 학문들과 내면적 관계성을 가진 보편적 학문들 가운데의 한 분야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기 위한 "교회의 한 기능"이다. 바르트의 표현에 의하면, 신학은 "교회의 선포가 성서에 증언되어 있는 계시와 일치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자연신학의 입장에 의하면, 이러한 계시신학의 입장은 소위 말하는 학문의 보편성과 무제한성을 결여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를 신앙하는 사람에게는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인식될 수 있으나 그를 신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연구의 대상으로 인정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엄격한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현상과 연구의 대상을 전제하며 합리적 비판을 거부하는 절대적 권위의 내용들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계시신학의 입장은 비학문적인 입장이며 결국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자연신학의 입장은 비판한다.
이와 같은 반성 하에서 자연신학의 입장은 하나님을 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 안에서 인식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다른 학문들이 연구하는 현실의 모든 것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한다. 현실의 모든 것은 만물의 근원자인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원칙상 다른 학문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인식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신학과 일반 학문들은 대립 관계에 있지 않고 유기적인 전체에 속한다. 따라서 신학은 "특수한 학문"이 아니라한 "보편적 학문"으로 이해되며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 그의 학문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찰스 핫지(Charles Hodge)의 신학 학문론
핫지는 자신의 주저,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서론에서 자신의 신학 학문론을 피력한다. 핫지는 프린스톤 신학을 확고한 철학적 신학적 토대 위에 두려고 시도했는데, 특히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과학적 방법론에 의존해서 그렇게 했다. 이것은 그의 [조직신학] 서론 첫 단락인 "방법에 관하여"(On Meth od)에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과학에 존재하는 두 가지 요소는 사실과 관념이다. 사실은 항상 특수적이고 일반 지식 속에서만 알려지지만, 관념은 항상 합리적이고 과학적 지식 속에서만 알려진다. 성경은 마치 자연처럼 본질에 있어서 과학적으로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성경은 체계적이 되는 모든 사실들을 포함한다. 자연적 사실이 화학자들에게 맡겨진 것이라면, 성경 진리는 조직 신학자에게 맡겨진 것이다. 성서 신학자는 이러한 진리들을 분명히 하고 공고히 하는데 반해 조직 신학자는 이러한 사실적 진리들을 정돈하고 증명하고 조화시킨다.
인간의 정신 구성은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사실들' 혹은 '고립된 사실들의 단순한 축적'만으로는 만족하 지 못한다. 인간의 정신 구성은 '고등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적 진리 체계의 획득을 요구한다. 또한 신학에서는 사변과 신비라는 a priori (연역적) 방법 대신, 귀납이라는 a posteriori (귀납적)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 잘 정립된 사실들이 수집되면 사실들의 일어남을 결정짓는 일반 법칙이 추론될 수 있다.
과학자들은 '감각 인지', '정신 작용' 그리고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닌, 우리 본성의 구조에 주어진 그러한 진리들의 확실성이 믿을만하다고 당연시한다. 법칙은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연역한 다음 외부 대상에 돌려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 법칙은 "대상으로부터 연유하고 연역된 것으로 정신에 새겨진 것이다."
이러한 경험적 방법은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또한 사용될 수 있다. 자연이 과학자들의 소관(所關)이라면, 성경은 신학자들의 소관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정신 구조 속에 '믿음의 법칙', 어떠한 '객관적 계시'와도 모순될 수 없는 자명한 (즉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제일 진리'을 새겨 놓으셨다.
이러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개념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핫지는 성경적인 사고를 보여주었다.
자연과 인간의 정신 구조 속에 하나님 및 우리와 그 분과의 관계에 관해 계시된 모든 것은 성경은 내포되어 있으며 또한 인증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직 성경만이 개신교도들의 신조이다. 신학자들이 일종의 과학으로 환원시킨 진리들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외부 세계에, 우리 본성의 구조 속에, 그리고 신자들의 종교적 경험 속에 각각 부분적으로 계시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외부 세계로부터 추론함에 있어서 오류를 범치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이 드러내는 모든 것에 대한 보다 분명한 계시를 그의 말씀 속에서 소유한다.
신학자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 체계를 성경의 모든 사실로부터 끌어낼 때만이 이단을 모면할 수 있다. 혼란을 제거하는 길은 우리의 철학에 의해 성경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철학을 성경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이다. 이론이 사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이론을 결정한다. 이것을 무시하면 신학은 사변의 잡동사니로 전락하고 만다.
성경의 사실들은 인간의 직관적 진리와 성령의 가르침을 인증한다. 성경은 항상 자명한 진리이신 하나님을 인정한다. 이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을 범할 수 없는 분으로, 우리로 본성의 구조에 의해 어떤 사실을 믿게 해놓고선 성경 속에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사실을 믿도록 명령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핫지는 이렇게 요약한다.
그러므로 철학의 참된 방법은 귀납으로, 성경이 신학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사실 혹은 진리를 포함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마치 자연의 사실들이 자연 과학의 내용이듯이 말이다. 또한 귀납은 이러한 성경적 사실들의 상호 관계와 그것들에 연루되어 있는 원리들, 그리고 그것들을 결정짓는 법칙들이 사실 자체 속에 있으며, 또한 사실들로부터 연역된다. 마치 자연 법칙이 자연의 사실들로부터 연역되듯이 말이다. 원리들은 정신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이 아니며 사실과 별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원리와 법칙들은 사실들로부터 연역된 것이며 정신에 의해 인식된 것이다.
한편, 핫지는 신학에 적용시키는 귀납적 방법에 의해 성경을 "사실들이 모여 있는 객관적인 창고"라고 본다. 그는 인간이 가견적인 물질과 불가견적인 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가지고, 이와 동일한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을 통해서 주관은 이성을 이용하여 사실들을 모으고 이성은 제공된 증거를 판단한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의 지식뿐만 아니라 신앙의 지식도 인간의 정신에 보여진 증거들위에서 인식된다고 하였다. 결국 핫지는 단순히 이성적인 논증에 호소하는 방법이 아닌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에 호소하여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그의 영감론의 출발점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저자이며,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성경이 진리라고 증언하는 것은 모두가 진리이며, 성경이 옳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옳으며 틀리다고 하는 것은 다 틀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핫지에 따르면, 영감이란 성령께서 성경의 저자들이 오류가 없이 전달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영감은 완전 영감이지 부분 영감이 아니다. 핫지는 영감의 영향과 그 결과를 다음 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영감이란 성경의 저자들이 진리를 오류가 없이 전달하는 데 필요하다. 둘째, 영 감된 저자들은 성경을 기록하는 작업에 한해서만 무오하다. 셋째, 영감은 성경 저자의 의식을 파괴하지
않는다. 여기서 성경 저자들을 기계처럼 사용하였다는 기계적 영감론을 부인한다. 넷째, 성령의 지도는
성경 저자의 사상 그 이상이다.
핫지는 주장하기를, 영감은 완전하기 때문에 영감은 성경 전체에 미치며, '도덕적 종교적 진리'뿐만 아니라 '과학적이든 역사적이든 지리적인든 간에 사실들의 진술'에까지도 미친다고 했다. 그것은 또한 사실과 관념뿐만 아니라 단어에까지도 미친다. 그러나 이러한 영감은 성경의 원본에만 해당된다.
위에서 고찰한 것처럼 핫지는 자신의 책 [조직신학]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깔고 그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과학적 귀납주의와 성경 영감론이라는 상호 의존적인 두 가지 방법론에 의해서 결정되었는데, 전자는 후자 속에 암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핫지는,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를 위한 과학적인 체계적 지반으로서 또한 성경의 최상적인 권위를 설명하기 위한 완전한 자료로서 '인간은 누구나 실재 세계를 직접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상식철학의 기본 입장을 채택하여 자신의 신학적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확신이며, 그 확신은 반드시 이성적 기반 위에서 서 있다고 보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3. 프린스톤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관계
3.1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프린스톤 신학에 접목되기까지의 역사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프린스톤 신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식 되어 왔었지만 1955년 시드니 알스트롬(Sydney Ahlstrom)이 이 주제에 관한 논문을 출판할 때까지는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 후 구프린스톤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상당한, 심지어 독특하게 빚을 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서론 부분에서 대략 다루었으므로 상술하는 것은 생략한다. 그렇다면 구프린스톤은 어떻게 해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빚을 지게 되었는가?
시드니 알스트롬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구프린스톤에 영향을 미친 것은 스코틀랜드의 영향 력 있는 목사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이 1768년 고향을 떠나 프린스톤의 전신인 뉴저지(New Jersey) 대학의 학장이 되면서이다. 위더스푼은 학생들을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확신을 갖고 훈련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계보는 윌리암 그래함(William Graham)을 거쳐 프린스톤 신학교의 첫 교수인 아취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에게 전수되었다. 그래함이 알렉산더에게 가르친 것은 자신의 체험적 신앙을 옹호한 나머지 습득한 권위를 신뢰하지 않도록 자신을 점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곧 그래함의 교훈을 넘어 역사적 칼빈주의의 중요한 표현을 포용하였다.
그래함 밑에서 연구를 하면서 위더스푼이 프란시스 헛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과 토마스 리드(Thomas Reid, 1710-1796) 같은 스코틀랜드 사상가들로부터 빌려온 원리들 중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이들 철학자들은 아이삭 뉴톤(Isaac Newton)과 존 로크(John Locke)의 영국 '온건파' 계몽주의를 데이빗 흄(David Hume)의 회의주의와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의 관념주의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알렉산더가 이들의 입장을 표현하게 되면서 그들은 "보편 상식"은 "도덕 의식"과 같이 육체적 의식과 직관의 전달을 입증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신학교의 초기 강연들과 사후에 책으로 출판된 그의 노년의 강연에서 예시되었듯이 알렉산더가 이 '보편상식'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 계시의 실체에 관한 확고한 변증학적 초석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위더스푼, 그래함 그리고 그들의 스코틀랜드 스승들과 같이, 알렉산더는 경험주의와 귀납적 방법에 대해 열정적이었다. "자연철학자들"의 방법들은 모방하는 면밀한 탐구는 마치 위대한 뉴톤이 물리적 세계를 연구하듯이 윤리학과 신학을 성공적으로 연구하도록 만들었다.
찰스 핫지는 알렉산더와, 젊은 시절 자신의 목사이며 자신이 프린스톤에서 연구를 시작하던 1812년에 프린스톤 대학의 학장이 된 애쉬벨 그린(Ashbel Green)으로부터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프린스톤 대학에서의 그린의 중요한 교육적 변화란 대학생들을 위한 주 교재로 위더스푼의 도덕철학 강의를 다시 채택한 것이었다. 알스트롬은 "핫지의 윤리학의 기초와 자연 신학의 개념은 ...칼빈주의라기보다는 스코틀랜드적이다"고 주장한다. 핫지가 스코틀랜드 철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의 [조직신학] 서론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그는 교의학 체계의 구성을 과학적 탐구와 연계시켰다. "성경과 신학자와의 관계는 자연과 과학자와의 관계와 똑같다. 성경은 사실의 보고(寶庫)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분별하기위해 채택하는 방법과 똑같다."
한편, 찰스 핫지의 후계자인 워필드(B. B. Warfield)는 스코틀랜드 철학을 스코틀랜드 철학 체계의 최후의 변호자인 제임스 맥코쉬(James McCosh)로부터 배웠다. 제임스 맥코쉬는 위더스푼이 1세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1868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프린스톤의 학장으로 발탁된 인물이었다. 워필드는 복음주의 개신교의 대량의 지성적인 횡령을 포함하여 알렉산더나 핫지 당시와는 다른 형태의 도전에 직면하여, 역사적 기독교의 현대적 변형의 오류를 반대하여 수백 개의 논문과 수천 개의 서평을 썼다. 그의 지성은 식별력이 있었으며 그의 가슴은 역사적 칼빈주의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구프린스톤의 마지막 주자요 신프린스톤 태동의 산 증인인 그레샴 메이첸(Gresham Machen)에게까지 미쳤다.
3.2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란 무엇인가?
3.2.1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태동 배경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인 존 낙스(John Knox)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성한 후 스코틀랜드를 장로교 국가로 만들었다.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프랑스나 영국으로부터 고립된 채 존재하여 왔다. 그러나 1707년 스코틀랜드가 영국과 연합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교회에 유럽의 새로운사상, 특별히 계몽주의가 직접 간접으로 스코틀랜드 교회에 소개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유럽과 영국에서는 종교개혁 시대가 지나면서 이성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톤에 의해 발달된 과학적인 방법이 합리주의의 발흥을 촉진시켰고,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는 전통적인 통념에 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 철학은 단순히 사상의 영역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존 로크는 뉴톤의 과학적인 방법을 인간 지성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런 그의 개념은 보편상식론의 개념을 발달시켰다. 과학적 합리주의적 접근은 그의 "기독교적 합리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에 잘 반영되어 있다.
새로운 사상의 유입은 자연히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두 조류의 집단을 형성시켰다. 첫재는, 구칼빈주의를 고수하려는 복음주의자들과 둘째는, 자연 신학을 강조하는 좀더 합리적인 중도파였다. 상식철학은 중도파에서 발생한 것이다. 자연히 이 둘은 대립과 주도권의 다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투쟁의 결과 중도파가 승리하였고, 이들이 스코틀랜드의 대학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상식철학은 계몽주의와 18세기의 스코틀랜드 르네상스에서 꽃피운 철학"이었으며, 중도파가 기성의 스코틀랜드 교회를 장악하면서 발전되 었던 철학 사조였다.
3.2.2 토마스 리드(Thomas Reid)와 그의 상식철학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가장 뛰어난 인물은 토마스 리드(Thomas Reid)였다. 그는 [보편상식의 원리에 대한 인간 지성의 연구](An Inquiry into the Human Mind on the Principles of Common Sense)라는 책을 통해 데이비드 흄의 회의주의를 비판하였다. 흄은 이성과 경험 양자 모두에 의한 어떤 종류의 인식 가능성도 부정했다. 리드는 흄의 가정(假定)인 관념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것도 그것을 지각하는 정신 속에 있는 것 이외에는 지각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외부에 있는 것들을 정말 지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정신 속에 새겨진 그것들의 어떤 영상(影像)이나 심상(心像)을 지각할 따름이요, 우리는 이것들을 인상(印象)과 관념(觀念)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리드는 위의 책을 통해 흄의 회의주의를 공격하면서 실재론적 인식론을 주장하였다. 즉 경험과 이성에 의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리드는 이렇게 주장한다.
"지각은 감각이 가진 것 전부를 가졌고 또 그 이상의 것을 가졌다. 그것이 감각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대상을 직접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앞에 가지고 있으며, 이 대상을 통하여
정신 활동은 일어나는 것이다. 대상은 여기서 추리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소여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 외부에 있는, 그리고 그 존재가 결코 우리의 정신에 의존해 있지 않은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다. 그리고 또 우리가 외부 세계 안에 있는 어떤 물건들을 지각하는 까닭에, 우리는 이 외부 세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의 얼마를 안다. 그리고 이 지식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리드는 인식론적 상식을 강조하고 당시의 조류에 따라 베이컨과 뉴튼의 과학적 경험적 인식론을 수용한 다. 알스트롬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들은 인간의 정신적 및 도덕적 능력을 물리적인 용어로 환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리고 인간 기능의 특성을 분류함으로 인간의 경험을 내향화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리드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자들은 인간의 기능 혹은 인간의 참된 능력을 발견한다. 첫째는, 합리주의적 자유...둘째 자증적 도덕 직관을 가능케 하는 능력, 더 나아가 경험보다 선험적인 원리를 발견하여 인간은 사상적인 중재 없이도 객관적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리드에 따르면, 상식철학은 다음 몇 가지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인식론적 보편 상식이다. 인식론적 보편상식이란 우리의 지각은 실제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밝혀준다는 것이다. 리드는 이성과 경험에 의한 어떤 지식의 가능성도 부정하는 흄의 회의주의를 '인식론적 보편실재론'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공격하였다. 리드에게 있어서, 인과관계는 보편상식의 첫번째 원리로서 필수적인 진리였다. 우리가 지각한 것은 정확하게 우리의 지각의 대상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또한 리드는 일종의 언어적인 인식론과 세계관을 주장한다. 우리의 지성의 모든 활동 작용은 언어로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언어는 단순히 실체에 대한 관찰자의 반응의 표현이 아니라 세계를 실제 존재하는 그대로 충실히 반영한 것이다.
둘째는 방법론적 보편 상식이다. 이 사상은 세계와 종교에 관한 진리는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오는 엄격 한 과학적인 귀납법에 의해 확인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모든 진리는 경험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셋째로는 윤리적인 보편 상식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인간 존재는 직관적으로 어떤 물리적인 세계의 기초적인 실체를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떤 도덕성의 근본적 원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리드의 이러한 상식철학은 에딘버러 대학의 도덕 철학 교수였던 그의 수제자 두갈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에게 전수되어 두루 영향을 미쳤다.
3.3 프린스톤 신학(핫지의 신학)에서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분명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먼저 진리란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이기 때문에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오직 한 가지 메시지만 전달한다고 보았다. 또한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계시되었든 자연에서 계시되었든 간에 영원한 진리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진리가 귀납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베이컨적 사상은 당대의 미국 과학계를 지배하였는데, 이런 사상은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글에서 상당히 자주 발견된다. 베이컨적 원리를 따라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사실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것이 과학의 적절한 기능이라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과학과 신학의 유추를 통해 신학 작업을 하였다.
이러한 신학 작업을 가장 확연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이다.
만약 자연과학이 자연의 사실 및 법칙들과 관련된 것이라면, 신학은 성서의 사실 및 원칙에 관련에 것이 다. 전자가 외부 세계의 사실들을 정리하여 체계화시켜 그렇게 적용하는 법칙들을 찾는 것이라면, 후자는 성서의 사실들을 체계화시켜 이같은 사실들이 작용하는 원칙과 일반적인 진리를 알아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두 번째 원리, 곧 "방법론적인 보편상식"을 볼 수 있다. 프린스톤 신학은 이성을 하나의 방법론적으로 볼 때 자의적(自意的)인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샌딘(Sandeen)이 지한 바와 같이 칸트의 사고의 영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성서의 자료는 신학자가 원칙과 일반적 진리를 차출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서처럼 외부 세계의 사실로부터 어떤 법칙을 차출해 내는 것과 같은 원리를 적용시킨 것이다. 사실은 인간 지성이 인식하는 범주를 그 위에 적용시킨 다음에야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칸트의 이성 비판은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성서의 '사실'에 적용시킬 경우 이성은 결론을 차출하며 일반적인 원칙을 형성하며 또 의미와 암시를 결정하는 데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방법론적인 보편상식"의 원리가 지배한다.
한편, 1857년 한 논문에서 찰스 핫지는, 앞에서 이미 개관한 대로, 영감론이 성경 저자의 사상뿐만 아니라 그들의 언어까지 확대된다고 보았다. 성경 저자들이 정확한 언어를 선택하도록 영감하셨기 때문에 성령은 기록의 정확성을 보장한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기록된 성경의 모든 사실은 진리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A. A. 핫지와 워필드의 공동 작품인 "영감론"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이런 그의 영감론은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첫 번째 원리 곧 "인식론적 보편상식"이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즉, 우리의 지각은 외부세계의 관념(idea)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물체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상식철학자들은 보았기 때문에, 핫지를 위시한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이런 사상을 수용하여 성경을 "과거 자체의 무오한 반영"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성경은 역사적인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오류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으로부터 받은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영향은 완전하지도 않았고 충분히 이해되지도 않았다. 스코틀랜드 철학의 인식론적 및 방법론적 측면에 대한 몇 가지 유보 사항을 은닉했으며, 또한 그들은 중요한 교리에서 상식철학을 세 번째 원리인 윤리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규칙적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마크 놀(Mark Noll)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당대의 뉴잉글랜드의 신학은 좋아하지 않았다. 뉴잉글랜드 신학자들은 사실상, 팍(E.A. Park)의 말을 빌리면 "인간 신앙의 근본율"에 기초하여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전통적인 개혁주의
관점을 변경시켰다. 많은 교회의 선열들이 과소평가하여 온 "윤리적인 원리"는 "보편상식 철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에 관한 칼빈주의 신앙을 압도하거나 이따금 밝혀지지 않은 "성경의 선언들"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 확신과 대치시킬 만큼 승리감에 도취되지는 않았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보편적인 인간의 능력에 관한 스코틀랜드 신앙을, 인간의 도덕성에 미친 타락의 결과 및 인간의 전적 부패에 관한 개혁주의 확신과 서투르게 혼합시켜 윤리의 일차적인 원리를 논함으로써 물을 흐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대한 프린스톤 신학의 영향과 관련하여 다시 한번 마크 놀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다.
프린스톤 개혁주의 확신에 이 18세기 철학적 입장이 첨가되면서 그 결과는 항상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의식의 전달을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직관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확신하고 있었다. 일련의 변증적인 추론(reasoning)은 탐구자의 도덕적 선결 조건과 탐구의 목적에 대한 선결 전제가 없이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순진하다. 그리고 비록 그들의 칼빈주의는 반대 방향을 지적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철학적 충심은 때때로 과학적 실증주의자들과 비슷한 인상을 남겨 놓았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받은 상식철학의 영향은 테일러(N.W. Taylor)가 그랬던 것과 같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완전히 재구성하는 데까지 인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그들의 풍부한 전통적 개혁주의 신앙에다 상식철학 철학을 첨가시킨 것이다. 그 결과 테일러의 뉴헤이븐 신학보다는 내적으로 더 강하고 방법론적으로는 덜 엄격한 체계를 만들었다.
3.4 보론 : 프린스톤과 미국의 계몽주의
조지 마스덴은 자신의 책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Understanding Fundamentalism and Evangelicalism)에서 유럽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발흥한 미국 계몽주의와 프린스톤 신학의 관계성을 분석하고 있다. 이는 프린스톤 신학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게 된 배경을 보충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있다. 마스덴은, 아브라함 카이퍼와 워필드가 모두 강력한 칼빈주의적 유산을 가진 나라에서 성장했고, 두 사람이 모두 관용과 종교적 다원주의를 지지한 초기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두 사람이 모두 계몽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정치적으로 혁명의 시대를 겪으면서 변화된 자들이었다는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큰 차이점이 발견되는 이유를 문제로 제기하면서 그에 대해 이렇게 분석한다.
그것은 화란에 있어서 계몽사상은 17세기 이래 세속주의와 관계되어 왔기 때문에 화란의 칼빈주의자들은 1790년의 화란 혁명을 불란서 혁명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했고, 따라서 "배교적인" 혁명으로 규정했지만, 미국에 있어서는 칼빈주의자들과 그들의 복음주의적인 동료들이 미국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계몽사상과 과학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불란서 혁명 직후 얼마동안 가장 명망이 높던 예일대학 총장 티모시 드와이트를 위시한 미국의 일부 칼빈주의 지도자들은 계몽주의적인 '배도'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이름으로 반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와 같은 드와이트의 입장의 잔재가 그 다음 세기에도 계속 살아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계몽사상'을 '합리주의' 또는 '회의주의'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 때문에 진정한 양상을 잊어버리면 안된다. 계몽주의가 합리성과 과학적 사고에 관하여 보여준 태도에 관한 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계몽사상의 대가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18세기의 관점의 일부 다른 경향에 대하여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조지 마스덴은 미국 내에서 발견되는 계몽주의의 이같은 이중적이지만 긍정적인 관계를 명확히 이해시 키기 위해서 헨리 메이(Henry May)가 제시한 미국 계몽주의의 몇 가지 양상을 소개한다. "메이에 따르면, 미국에 영향을 끼친 유럽의 계몽주의는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질서, 균형, 종교적 타협의 이념들을 중시하는 뉴톤과 로크의 초기 온건한 계몽주의이다. 둘째는 볼테르와 흄으로 대표되는 회의적인 계몽주의이다. 셋째는 루소의 사상에서 자라난 것으로 지상 위에 천상을 이루려고 추구하는 혁명적 계몽주의이다. 넷째로는 회의주의와 혁명은 반대하나 과학, 합리성, 질서, 기독교 전통을 중시하는 18세기초의 신념의 정수들을 간직한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분파라고 할 수 있는 교훈적 계몽주의가 있다."
조지 마스덴은 이 네 가지 유형의 계몽주의 가운데 단지 첫째와 넷째만이 미국에 대하여 지속적인 영향 을 끼쳤다고 설명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프린스톤 신학과 연게되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의 혁명은 주로 아담스와 메디슨 같은 온건한 계몽주의 지지자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페인과 제퍼슨의 계몽 사상과 같은 급진적인 혁명적 사상들은 잠시동안 의미를 가지고 있긴 했으나 많은 영향력 있는 단체들은 불란서 혁명과의 연관성과 페인의 회의주의는 미국 문화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오히려 스코틀랜드의 교훈적 계몽주의가 종합을 위한 기초를 제공했다. 스코틀랜드 철학의 원리들에 따라서 미국 사상의 세 가지 흐름들, 곧 현대의 경험적인 과학적 이념들, 미국 혁명의 자증적 원리들, 복음적인 기독교는 조화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조화된 상태로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는 미국에서 현저하게 살아 남아 19세기의 처음 6,70년 동안 미국의 학계를 지배했다.
그런데 유럽의 상황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고전적 계몽주의의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살아남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성경적이고 보수적인 보수주의와 긴밀하게 연대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살아남은 은 계몽주의 그 자체에 대한 명시적인 헌신이 아니라 대다수의 18세기 사상가들이 확신을 가지고 외쳤던 경험주의적 기초를 가진 합리성의 근저를 꿰뚫고 흐르던 일반적인 철학적 기초에 대한 헌신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이 관찰한 바와 같이, 19세기 전반부 동안에 아이삭 뉴톤과 프란시스 베이컨은 복음주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위대한 신앙의 영웅으로 통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복음주의가 전성을 이루던 시대에 있어서 객관적인 과학 사상은 세속주의를 산출해 낸다는 죄를 뒤집어 씌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친한 기독교 신앙과 문화의 친구로서 과감하게 찬양을 받았다.
결론 - 논제 재(再)제시 및 해결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우리는 찰스 핫지로 대변되는 프린스톤 신학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아냈다. 또한 프린스톤 신학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근거해서 성경 완전 무오를 확증하고 있음도 보았다.
그렇다면, 서론에서 문제 제기한 것처럼,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은 어니스트 샌딘(Earnest Sandeen)이 처음 제시하였고, 로저스(Rogers)와 그의 제자 맥킴(McKim)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시하였으며,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이 공고히한 것처럼, 과연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은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교리인가? 이에 대해 박용규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글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베이콘주의 사상의 흔적을 그들이 사용한 신학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그러나) 성경의 저자들이 영감의 영향 아래 기록하였기 때문에 기록된 성경이 무오하다고 보았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무오하다고 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단서를 보게 된다. 그것은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으로 비로소 성경 완전 무오 사상에 귀결된 것이 아니라 이미 소유하고 있던 성경 무오 사상에 대한 확고한 설명을 위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신세를 입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권성수 교수나 박용규 교수가 모두 내세우고 있듯이, 성경 무오 사상은 프린스톤 신학자들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초대 교부들, 어거스틴(Augustine), 칼빈(Calvin), 청교도 윌리암 에임스(William Ames) 등은 바로 이러한 성경 무오 사상의 확고한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영감이 사상뿐만 아니라 언어에까 지 확대되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는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 과학, 그리고 연대기적인 면에까지 포 함된다'는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주장은 분명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성경 무오에 대한 보다 발전되 고 구체화된 독특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데이빗 웰스(David Wells)가 핫지에 대해 "그가 역사적 칼빈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논하였지만 칼빈이 결코 가르치지 않은 많은 것을 칼빈의 신학이라고 믿었음을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그는 계몽주의 철학인 보편실재론의 이점을 받아들였다. 핫지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것을 인식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라고 평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분명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세속 철학의 영향을 받아 정통 칼빈주의에서 벗어났다. 사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이 복음주의 좌파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을 피력함에 있어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사용했으며,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사상적으로 난관에 봉착하면서 자연스레 그 공격의 화살이 이 철학을 사용하여 설명한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을 향했기 때문이다.
왜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이용하면서까지 성경의 무오를 소위 '축자영감설'(성경 완전 무오)이라는 교리로 만들었는가? 성경은 분명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성경 자체의 무오성을 말하고 있지만,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 대해 마크 놀은 흥미 있는 말을 해주고 있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으레히 성경이 일차적으로 교리의 형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가? 다른 개혁파 교회는 비록 교리를 싫어한 것은 아니지만 경건성을 고취시키고 문화적인 개혁을 지지하는 데 성경을 사용하였다."
우리는 프린스톤 신학이 교회 내로 밀려오는 고등비평의 물결에 대항하기 위해 강도높은 성경 영감론과 무오 사상을 피력했다는 점에서 이해와 찬사를 동시에 돌려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이용하여 설명한 그들의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은 성경 자체가 말하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하나의 이론(a theory)이지 유일한 이론(the theory)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 자체가 말하는 성경의 무오성을 굳게 간직한 채, 성경 무오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늘 개방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복음주의 좌파가 던지는 문제 제기는 그러한 측면에서 받아들여야 할 도전이다. 동시에 그런 면에서 복음주의 우파의 반응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 문헌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3 vols, Grand Rapids: Eerdmans, 1946.
George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 The Shaping of
Twentieth Century Evangelicalism 1870-1925, New York: Oxford
Press, 1980.
W. Pannenberg, Theology and the Philosophy of Science,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6.
Earnest Sandeen, The Roots of Fundamentalism : British and American
Millenarianism 1800-1930,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Vander Stelt, Philosophy and Scripture : A Study in Old Princeton and
Westminser Theology, Marlton, NJ, 1978.
스털링 렘프레히트, [서양철학사], 서울:을지문화사, 1986.
조지 마스덴,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 서울:성광문화사, 1992.
제임스 바, [근본주의신학],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마크 놀, "프린스톤 신학," [프린스톤 신학], 서울:엠마오, 1992.
데이빗 웰스, "찰스 핫지," [프린스톤 신학], 서울:엠마오, 1992.
권성수, "성경무오에 관한 7대 오해," [신학지남], 1989년 여름호.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제1권, 서울:연세대학교출판부, 1986.
김균진,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개념에 대한 연구," [신학사상], 1984년 여름호.
박용규, "프린스톤 신학과 보편실재론," [신학지남], 1994년 가을,겨울호.
http://kr.blog.yahoo.com/mokpojsk/45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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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륜에 대한 핫지의 견해)
하나님의 경륜이란?
정진국 목사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자 된 나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을 것을 너희가 알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떤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엡 3:1-9)
하나님의 경륜은 성경(특히 신약 성경)의 중심 주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많이 다루어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가를 이번 강해를 통해서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경륜이란 단어의 성서적 고찰
단어적 의미
경륜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오이코노미아입니다. 영어로는 dispenation 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오이코노미아(경륜)는 헬라어로 가정이나 권속을 의미하는 (오이코스)와 법을 의미하는 (노모스)의 합성어로서 가정의 법 곧 가정행정을 의미합니다. 오이코노미아는 나눔 ,분배, 관리, 가정치리, 행정, 통치. 배역 등을 의미합니다.
▶ 이 단어의 뜻을 통해서 본 하나님의 경륜의 의미
① 하나님의 경륜은 가정을 다스리듯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정의할 수있다. (장두만)
②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풍성을 사람에게 생명으로 나누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가정관리인 것이다.
성서적 용례를 통한 의미
신약 성경에서는 이 경륜이라는 말이 두 가지 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는 눅 16장의 비유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청지기가 그것입니다. 둘째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나타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영의 개념을 나타낼 때 이 단어가 사용되어졌습니다. 즉 이 말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집안의 일을 돌아보거나 감독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말로써(눅16장)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어지는 하나님의 경영이나 관리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정리
신학자 찰스 핫지는 이 단어에 다음과 같은 두가지 뜻이 내포되어있음을 지적했습니다.
①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계획과 경륜을 의미함.
②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의 직분과 관리를 의미함.
※ 이 용어에 대한 신학적 관심은 첫 번째 용법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륜자라고 할 때 경륜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의중에 가지고 계신 목적(혹은 뜻)과 그 목적을 이루시는 방법을 의미합니다.(신학사전)
성서에서 이 경륜이란 말이 사용된 용법에 근거하여 신학자들은 정의하기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개해 나가는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학자들의 사상에 따라 그 뜻의 차이가 어느 정도 있기는 하나 대체로 이 말의 기본적인 뜻은 하나님이 그의 계획을 수행해 나감에 있어서 인간을 위한 그의 조치를 말한다.(기독교 대 백과 사전)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종합적 의미
(1) 하나님은 인간들을 창조하셨다.
(2)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지으실 때 어떤 목적이 있으셨다.
(3) 또한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놓으셨다.
(4) 성경은 그 목적과 계획을 이루는 방법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표현하였다.
(5) 즉 하나님의 경륜이란
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②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과
③ 그 계획을 성취하는 방법 곧 경영 전 과정을 의미한다.
http://blog.daum.net/timberkang/13209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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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 신학의 출현
이 세미나 페이퍼는 조직신학의 세미나
복음주의 신학을 이수하기 위한 것임
담당교수: 도한호
도학윤
침례신학대학교 M.Div., 1999.
1999. 12. 9.
목 차
서 론 --------------------------------------------------------- 1
. 근본주의 신학의 개념 ------------------------------------------ 1
1. 근본주의 운동의 배경 ----------------------------------------- 1
2. 근본주의 용어의 형성 ----------------------------------------- 2
3. 세대주의 영향 ----------------------------------------------- 3
. 근본주의와 미국 장로교 및 미국 침례교 --------------------------- 5
1. 근본주의와 미국 장로교 --------------------------------------- 5
2. 프린스톤 신학교의 변화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 -------------- 6
3. 근본주의와 미국 침례교 --------------------------------------- 8
. 성경관에 대한 고찰 ------------------------------------------ 10
1. 알취발드 알렉산드 ------------------------------------------ 10
2. 찰스 핫지 ------------------------------------------------- 11
3. 워필드 ---------------------------------------------------- 12
4. 그레샴 메이첸 ---------------------------------------------- 12
결론 ---------------------------------------------------------- 14
참고문헌목록 --------------------------------------------------- 15
서 론
종교개혁이후 신학의 역사를 개관하면 17세기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그대로 지키고자 노력한 정통주의의 시대이다. 그리고 18세기는 인간의 이성이 가지는 능력이 강조되며 계몽주의시대가 도래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개신교 자유주의 시대가 된다. 이때에 발전한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명명한다. 교수 목창균은 자유주의의 시작을 현대에서 종교가 어떻게 가능하며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하는 본질적인 질문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특정 신앙고백이나 신조에 종속되지 않고 그 시대에 적절하고 타당하게 만들려고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경험이나 정황에 둠으로써 인간 중심적 신학이 되었다.
자유주의는 동정녀 탄생과 예수님의 기적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등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부인한다. 자유주의는 성경의 영감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독특한 신성, 죄의 회개 그리고 개인의 부활과 같은 것들을 현대 문화에 내던졌던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19세기말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은 본래의 탄생 배경과 맞지 않게 여러 측면에서 오해와 괄시를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근본주의는 1900년에서 1930년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휩쓸었던 자유주의 물결에 대한 반대운동으로서 특별히 비일(D. Beale)은 근본주의의 형성과정을 두 시기로 구분했다. 첫째로 1857-1930년까지의 근본주의 운동을 비순응주의자(nonconformist)"라 하며, 둘째로 1930년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본주의 운동을 분리주의자(seperatist)"로 정의한다. 결국 비일(D. Beale)의 주장에 따르면 근본주의 운동의 시작은 19세기 중반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먼저 미국 내에서 근본주의 운동이 태동하기까지의 외적인 상황을 먼저 고찰하고자 한다.
. 근본주의 신학의 개념
1. 근본주의 운동의 배경
19세기말부터 미국 개신교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1861년 발발한 남북 전쟁 후 미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산업화와 함께 독일로부터 오는 고등비평과 영국으로부터 온 다윈의 진화론이 미국인들의 삶 전체뿐만 아니라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후반 미국은 농업국가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세계 주요 산업 강국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의 특징으로는 재벌의 증가와 이들을 통한 파급 효과이다. 반세기도 안되는 짧은 시간 안에 광대한 대륙에 철도가 종횡으로 개통되고 이를 따라서 사람들의 정착과 개발이 이루어졌다. 다행히 이런 일들을 수행한 재벌들은 충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이와 같이 재벌들의 축적된 부를 통하여 이미 설립된 교육기관에 관대한 기증이 시작됨으로 교육계의 지도력이 전환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미국사회의 변형은 주로 도시로의 인구이동, 이로 인한 도시의 급격한 팽창과 확대, 유럽으로부터의 이민 증가와 새로운 교단의 성립으로 설명된다. 특별히 도시의 성장은 남부보다는 북부에 두드러졌고, 이런 현상은 자연히 농촌 인구의 고갈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인구분포의 변화는 비단 농촌 인구의 유동뿐만이 아니라 이민 인구의 계속적인 증가도 한 몫 하였다. 더구나 해외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대부분 카톨릭 교도였으며 비영어권이었다. 그래서 1914년이 되어서는 카톨릭이 미국에서 단연 최고의 교파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미국인의 생활에 특히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미국은 세계사의 중심 무대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전쟁전의 미국은 수많은 다양한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큼 낙관적이었다. 미국의 이상주의와 기술에 의하여 정복될 수 없었을 만큼 심각한 도전은 없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신뢰와 도덕적 열정을 전쟁의 노력에 쏟아 부었으며, 결과적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성공은 대부분 전쟁에 국한되어 있었다. 일부 상반되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성화의 체험은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전쟁으로 인하여 급속한 세속화가 이루어지고 재즈(Jazz) 시대가 도래하였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은 승리로 종결되었으나 미국의 성전적() 열정은 교회 이상주의를 더욱 강화하였고 금주운동이 마침내 승리하여 1919년부터 발효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은 불안하였다. 러시아가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 적화되고 쿠 쿠룩스 클랜(Ku Klux Klan)이라는 반흑인 조직이 결성되고 후에는 카톨릭교도, 유대인, 비북유럽계까지 적대시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가 되어서는 세속화 현상이 밖으로 공개화 되기 시작하였다. 성()에 대한 이야기가 공공연해지고 선정적인 머릿기사의 타블로이드(Tabloid)판 신문이 1919년 시작되었다. 여성들이 공개석상에서 흡연하고 신교도에게 금기시 되었던 춤이 사회생활의 일부가 되고 심지어 교회의 청년 모임에까지 도입되게 되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미국 문화의 변질은 교회와 신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주었다.
2. 근본주의 용어의 형성
근본교리들(Fundamentals)이란 책자는 근면하고 관대한 평신도 기독인 실업가 라이만 스튜어트(Lyman Stewart 1840-1923)가 자기 소유의 출판사업을 태동시켰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근본교리들이다. 스튜어트는 1894년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하여 대표단 가운데 나타난 배교현상과 기독교에 대한 현대주의의 도전을 보고 이를 막고자 결심하게 되면서 딕슨(A. C. Dixon) 목사와 협력하여 근본교리들 12권을 한 질로 출판했다.
근본주의란 명칭은 자유주의가 근본원리(the fundamentals)로서 배척한 핵심적인 구속교리들을 습관적으로 언급하는 데서 발달된 것이다. 이 말이 사용된 것은 적어도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 해에 근본원리란 제목하에 복음주의 기독교를 해석하고 옹호하는데 기여하게 된 12권의 소책자 중 그 첫 권이 나왔다. 켈리포니아의 어떤 부유한 두 분 인사의 호의로 그 첫판은 영어 사용국의 목사, 전도사, 선교사, 신학생, 주일학교 교장, Y.M.C.A 및 Y.W.C.A 책임자들에게 주소가 입수되는 대로 무료로 다 보내어졌다. 결국 그것은 3백만부 이상 배부되었다. 이 책에 기고한 저자들 가운데는 오르(Adams orr), 워필드(B. B. Warfield), 앤드슨(Robert Anderson), 모올(H. C. G. Moule), 그리피드 토마스(W. H. Griffith Thomas), 토리(R. A. Torrey), 몰간(G. Campbell Morgan)등 같은 해박한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논문들 중 상당수가 학구적으로 철저히 다루어진 작품들이었다고 허버트는 그 평론에서 말하고 있다. 그 시리즈에는 논쟁의 내용이 된 근본 원리들에 대한 명확한 성경 해석들이 실려 있었다. 이 책들을 가지고 변증학자들은 그 근본원리에 반대하는 입장들과 그리스도의 능력에 관한 어떤 인상적이며 사사로운 증언들을 반대했다.
이와 같이 근본 원리들이 보수주의의 슬로건으로 사용된 것은 1910년 미 북장로교 총회에서 발간된 구원(Deliverance)이란 책자에서부터 였다. 이 때 근본원리는 출판 과정에 있었다. 이 책에는 신앙과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근본원리 들이 다섯 가지 조항으로 상세하게 열거되어 있었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예수님의 신성, 그의 동정녀 탄생과 이적, 우리 죄를 대신한 육체적 죽음, 그리고 육체적 부활과 승천, 이상 다섯 가지이다. 그 이후로 줄곧 미국복음주의자들은 근본원리라 하면 단지 이 조항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습관이 된 것 같다. 총회록이 약간의 수정과 첨가를 거쳐 최근의 근본주의 기관의 교리적 신조로 채택되었다. 이 기관들 중 첫째가 1919년에 결성되어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세계기독교 근본원리협회(World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였다. 1920년 북침례교 협의회의 복음주의자 대표 일단은 신약성서 신앙의 근본원리들을 재 진술, 재확인, 재강조 하기 위하여 그들 서로 예비회담을 가졌다. 그 후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발행한 침례교 잡지 파수꾼(Watchman-Examiner)에 실린 한 논문에서 근본원리들을 수호하기 위해 충성을 다해 싸우고자 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로 근본주의자들이란 명칭이 만들어졌다.
3. 세대주의 영향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또는 현대주의적 사조에 대한 반발로, 그들이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강하게 주장하는 근본적인 몇 가지의 교리 때문에 그러한 명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 근본주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신학 목록을 중심으로하는 하나의 신학적인 운동으로 보며 샌딘(Sandeen)과 같은 이는 신학 중에서도 영국의 전천년설을 그들의 핵심으로 보며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대표자인 다비(Darby)를 근본주의의 전형적인 인물로 본다.
하지만 허드슨(Hudson)은 근본주의 운동은 미국에 있어서 도시와 교외의 갈등이라는 상황을 배경으로 사회적으로 접근하기도 하며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이들도 있으며 반지성주의, 문화적 갈등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현대 신학, 자유주의, 현대주의, 특히 성서 해석에 있어서 고등 비평에 대해 극보수적인 반응을 보인데서 근본주의가 생겨났다고 보고 있다.
세대주의의 기원은 서로 이견이 있지만, 대개 19세기 초 영국의 형제주의 운동(Brethren Movement)을 주도했던 다비(J. N. Darby)에 의해 골격이 갖추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다비(Darby)는 세상의 역사를 일곱세대로 구분했다. 세대주의의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성경은 일곱 세대의 패턴을 통하여 모든 역사적 변화를 설명했다는 가정이다.
각 세대마다 하나님은 다른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인간을 시험하셨다. 인간들은 모든 시험에 실패했으며, 각각의 세대는 파멸적인 하나님의 심판으로 종결되었다. 첫 세대는 인간이 타락하여 죄에 떨어지고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남으로써 끝이 났고, 두 번째 세대는 홍수와 더불어 끝났으며, 세 번째 세대는 바벨탑과 더불어 끝났다. 우리는 여섯 번째 시대인 교회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 세대도 파멸과 하나님의 간섭의 날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7년에 걸친 전쟁과 재난의 날이 있은 후, 예수께서는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천년동안 다스린다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성경 특히, 예언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경의 무오류성을 진정한 신앙의 시금석으로 삼을 것을 가장 강조하는 계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서 들어온 이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전천년설은 예언을 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연구한 예언 수련회를 통하여 미국안에 확산되었다. 기차가 교통수단의 주종을 이루고 있던 시대에 새로운 휴가형태로 유행했던 여름수련회가 특히 효과적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드와이트 L, 무디가 세대주의의 체계에 대하여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세대주의 그 자체는 놀라운만큼 반현대주의적이었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세대주의는 현대주의의 반사체였다. 현대주의는 현대문화에 대하여 낙관적이었으나 세대주의는 비관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두 운동이 모두 성경과 역사와의 관계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현대주의는 인간역사라는 렌즈를 통하여 성경을 해석했으나, 세대주의자들은 오직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역사를 해석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근본주의 운동은 사경회 운동으로 번져갔고 특히 나이아가라 휴양지에서 모인 연례적인 성경 연구회는 가장 대표적이었는데 이 사경회 운동은 과학주의, 합리주의에 짓밟힌 성경의 권위를 되찾고 무시된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확립하자는 운동이었다.
. 근본주의와 미국 장로교 및 미국 침례교
1. 근본주의와 미국장로교
근본주의 논쟁이 시작된 1920년 초반에서 1929년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하고자 한다. 1920년대에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니고 많은 상황들이 전개되어 있었으나 본격적인 논쟁은 1920년에 시작되었고 극심한 대립의 양상은 1929년을 계기로 쇠퇴하였기 때문이다.
1910년 장로교 총회는 근본주의 5개 교리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1915년에는150명의 목사들이 근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Fundamentals)라는 글을 당시 총회장과 3명의 증경 총회장의 서명과 함께 총회에 제출하였다. 현대주의에 대한 미국내 근본주의의 대응은 분명해 보였고 활기차 보였다. 그러나 1921년 5월 침례교 목사인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은 뉴욕제일장로교회(Newyork First Presbyterian Church)에서 근본주의는 승리할 것인가? 라는 설교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본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포스틱(Fordick)의 의도는 교리나 신조보다는 교회론적인 면으로, 포괄적인 교회와 배타적인 교회를 구분하여 근본주의의 배타적이고 비타협적 교리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필라델피아의 아치 스트리트 장로교회(Arch Stewwt Presbyteiran Church) 목사 클라렌스 에드워드(Clarence Edward Macartney)가 불신앙이 이길 것인가?라는 제목을 붙인 설교로 응수하였다. 포스딕에 반대하는 메카트니는 보수주의 운동의 선봉에 서서 필라델피아 노회를 주도하여 뉴욕 강단에 대해 즉각 소송을 제기하도록 1922년 총회에 제의 하였다(포스딕은 장로교인이 아니었으므로 직접 그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결국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견지해 오던 5대 교리가 교회를 속박하는 역할을 한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대주의 신학에 신학적 논쟁을 벌인 보수주의의 대표자는 메이첸(J. G. Machen)이었다. 먼저 어번 선언(Auburn Affirmation)에 대하여 메이첸은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그는 어번 선언은 단순히 장로교 교리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의 특성에 관련된 모든 것을 반대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메이첸은 그의 저서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를 통하여 비록 자유주의가 관용을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기독교 내에는 자유주의를 위한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메이첸은 당시의 상황을 싸움의 시대로 정의하고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님을 천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자유주의 신학자가 기독교 교리를 하나씩 하나씩 적에게 내주고 나서 보유하게 된 것은 전혀 기독교가 아닌 별개의 범주에 속하는 전혀 다른 종교인 것이다. 실제로 어번 선언이 발표된 후, 기독교 세기 Christian Century 잡지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는 두 가지 별개의 종교들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양자간에는 더 이상 화합을 이룰 한계를 벗어났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두 세계가 충돌하였다. 근본주의자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요 현대주의자의 하나님과 다른 한 하나님이다. 두 세계의 생득적인 불일치는 상호관용의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라고 선언하였다.
메이첸의 저항이 있었지만 교계의 상황은 점점 더 현대주의에 유리하게 되었다. 1924년 미국 장로교총회는 총회장으로 포스딕의 설교에 대응했던 매카트니(C. E. Macartney)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비록 보수주의자가 총회장에 당선되었으나 어번 선언에 대한 문제를 무기 연기하게 되었고, 재판부에서는 교회가 구체적으로 교리적인 요강을 규정한 적이 없었기에 총회가 직분자들에게 교리시험을 실시할 권한이 없다고 판결하였다. 이것은 1910년, 1916년 1923년 5개 신조 선언을 공식적으로 반박한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보수주의자들 중에서도 중도파 보수주의에 의하여 자유주의의 승리가 촉진되었던 것이다.
1925년은 근본주의자들의 쇠락이 더욱 두드러진 해이다. 테네시주 데이턴(Dayton)에서 열린 세기의 재판, 즉 스콥스(Scopes)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실제로 근본주의 논쟁의 정점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1925년 봄 테네시 주에서는 가장 강력한 반진화론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은 공립학교에서 다윈설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제정되었다. 이때 스콥스는 주법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이때 기독교 측에서는 브라이언(William Jenning Bryan)이 반진화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재판의 결과는 브라이언의 참패였다. 대로우(C. Darrow)의 공세에 밀려서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전혀 대답하지 못하였다. 브라이언은 대로의 쉴새 없는 심리로 종교영역에서 그의 피상적인 사고와 부족한 준비를 드러내며 실수를 연발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전국으로 퍼지자, 근본주의자들의 무지와 고집스러움이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브라이언은 죽었지만 근본주의는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25년 총회는 오하이오 주에서 모여 어드만(C. R. Erdmans)을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근본교리들의 기고가인 어드만의 피선은 근본주의의 승리처럼 보였으나, 어드만은 본래 교리적 논쟁보다는 평화와 관용을 선호한 사람이었다. 어드만은 15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교단내 영적 상태와 불안 조성 원인을 규명하며, 이를 차기 총회에 보고하여 교회의 일치와 진보를 도모하려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1926년 총회에 이르러서는 어번 선언에 관하여 토의조차 하지 않고 논쟁의 유예기간을 가졌다. 그리고 1927년 총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대한 목사의 서명 수락 문제를 처리하며, 15인 위원회는 교회가 본질적 교리들을 정의한 적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1927년을 기점으로 미국 장로교회는 자유주의에 항거하거나 교회 자신의 신앙을 정의 내릴 수단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2.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의 변화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
프린스톤 신학교는 현대주의의 유입으로 미국 교계가 어려움을 겪을 때, 신학적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러기에 미국 장로교회에서 보수주의자들이 패배하고 자유주의가 승리함에 있어서 프린스톤의 역할과 위치, 신학적 태도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 교회가 현대주의에 서서히 젖어가자 프린스톤 역시 한 세기 이상 지켜 오던 신학흐름이 변질되었던 것이다.
1914년 관용주의적 보수주의자 스티븐슨(J. R. Stevenson)이 학장이 되기 전, 프린스톤은 장로교 전통신앙의 난공불락의 요새라 일컬어진 패튼(F. L. Patten)에 의해 보수신학을 고수하였다. 스티븐슨이 보기에 그동안 프린스톤은 구학파만을 고수하였으나 그의 교육방침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통합된 구학파와 신학파의 기관이다. 그러므로 신학교 학장으로서 나의 야심은 이 신학교를 어떤 특정한 당파의 학교가 아니라 전체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학교로 만들려는 것이다. 프린스톤 교수들은 이에 대하여 반대하였으나 몇몇 교수들이 학장의 의도에 도도함으로 분열이 시작되었다. 학장과 동조한 교수들은 현대주의자들은 아니었으나 당시의 신학사조에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투적 보수주의자로 메이첸이 이들과 대립한다. 그는 강의실에서, 교회에서, 책이나 논설 속에서 어디에 있든지 자유주의에 대항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지상과제는 프린스톤에 신학교 초기의 신학전통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었다.
프린스톤은 당시에 2개의 이사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교육프로그램을 관리하고 총회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운영이사회와 1822년 설립되어 재정을 관리하는 재정이사회이다. 장로교 논쟁이 치열할 때, 재단이사회는 스티븐슨 학장을 지지하며 메이첸의 교수직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운영이사회는 메이첸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에 총회는 1926년 프린스톤 사태를 연구할 위원회를 발족시켜서, 프린스톤의 분열은 교수진의 분열이라 평가하였다. 이 위원회의 보고가 채택되어서 1929년 33인의 새로운 재단이사회를 구성되어 1/3은 구 재단이사회에서, 1/3은 구 운영위원회, 1/3은 교회 전체에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스티븐슨 학장의 권위를 극대화하였고, 보수주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프린스톤 이사회에 어번선언에 서명한 두 사람이 포함되게 되었다.
이렇게 프린스톤의 상황이 변화되자 메이첸은 프린스톤 신학전통을 계승할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929년 7월 18일 약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프린스톤 신학교가 오랫동안 영예스럽게 견지해 왔던 하나님의 말씀과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대한 충성 정책을 흔들림 없이 계속할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메이첸은 3사람의 보수주의 교수들, 곧 윌슨(R. D. Willson), 반틸(C. Vantil) 그리고 앨리스((O. T. Allis)와 함께 새로운 신학교를 시작했던 것이다. 메이첸이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한 취지는 그의 개강예배 설교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프린스톤 신학교는 죽었지만, 프린스톤의 고귀한 유산은 살아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전통을 손상시키지 않고 지속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결국 메이첸은 프린스톤 신학 전통을 수호하기 위하여 새로운 신학교 설립과 교단의 분열까지도 감내하였던 것이다.
3. 근본주의와 미국침례교
기독교와 자유주의간에 투쟁이 교파 내에서 격화됨에 따라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 신조나 고백이나 조직신학에도 입장 표명을 하지 않는 자율적인 침례교인들조차, 자신들의 지교회들을 넘어서 자기들의 종말론 견해를 방어하는 데 그들의 장로교 형제들이 근본주의 초창기에 느꼈던 것보다 덜 강박감을 느꼈다. 비록 침례교인들은 이 운동의 처음 기간 곧 1857-1920년 동안 고참 보수파 근본주의의 지도력에서 장로교인들보다는 뒤졌지만 그들은 주요 공헌을 하였고 특출한 지도력도 제공하였다.
침례교인들은 근본주의자들이 천명한 신학적 견해를 받아 들였지만 정통주의의 교리적 입장이 만장일치의 옹호를 받는 신앙성명서가 되어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는 찬동하지 않았다. 남침례교와 북침례교의 거의 모든 무리들은 원래의 근본주의자들의 특징인 보수주의 신학을 학문적으로 제시하는데 높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종종 일어나고 있는 바와 같이, 원래 지도자들의 높은 이상들은 그들의 활동과 견해를 지지해 주는 동지들을 성공적으로 보유하지 못하였으며, 근본주의는 급격히 완고한 율법주의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리고 많은 침례교 학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지지할 수 없었는데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이에 대한 과격한 논쟁들 가운데 종종 나타나 있다.
물론 몇몇 침례교 학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지속시켜 나가는데 참여하였으며, 그들 자신들이 그들 다음 세대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완고한 자들임을 종종 입증한다. 근본주의 약점들은 1920년대를 넘어서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극단의 세대주의, 과도한 정서주의, 사회에서의 도피, 은둔, 복음에 대한 문화적인 도전 앞에 가지는 공포, 윤리적 문제에 대한 소홀함, 호전적인 신학 논쟁, 경건주의적 개인주의 등의 상당한 부정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후기 근본주의자는 신근본주의(Neo-Fundamentalism)라고 불린다. 신근본주의는 남침례교와 북침례교에 각각 분파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의 논쟁이 일어났던 시기에 서든침례신학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학장으로 에드가 영 멀린스(Edgar Young Mullins)가 선출되었다. 그는 이 시대에 남침례교인들을 안정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에스텝(William R. Estep)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멀린스와 로버슨(A. T. Robertson)은 모두 주도적인 근본주의자들의 집단에서 커다란 존경을 받았다. 어떤 탁월한 미남침례교인도 조직화된 근본주의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멀린스와 로버슨은 미남침례교인들의 삶과 신학에 다른 학구적인 지도자들과 똑같이 영향을 미쳤음은 의심할 바 없다.
멀린스는 비록 신학적 방법에 효과적으로 변화를 가져왔지만 침례교의 신학적 사고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는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성서의 완전한 진리 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멀린스에게 있어서 성서는 오류가 혼합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였다. 성서의 목적은 종교적인 것이며 따라서 성서는 그러한 견지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성서는 어느 부분에 있어서나 사실적이며 진리를 갖고 있다. 이른바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있던 시기에 멀린스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적 믿음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 1924년 미남침례교 교회학교부(Sunday School Board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는 그의 십자로의 그리스도교(Christanity at the Cross Roads)를 출간하였다. 그 책의 두드러진 구별 속에서 멀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약이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에 대한 논쟁은 이제 거의 찿
아볼 수 없다. 과학적 지식은 우리의 복음주의적 신앙을 옹호하는 쪽에서 이 문제들을
결정하여 왔다. 공격은 이제 기록들 자체의 기초들에 대하여 가해지고 있다. 중재
자들과 중립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눈을 감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리
스도교의 기초들을 그 역사적 기록들을 의심함으로써 파괴시키려는 시도가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멀린스가 말하였거나, 믿었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그의 저술들에서 취하고 있는 입장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의심도 주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신학적으로 칼빈주의적 침례교회 전승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제기한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이 칼빈주의 독특성에서 나온 것들은 아니며, 심지어 침례교 교리의 독특성에서 나온 것들도 아니다.
남침례교인들은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 (Baptist Faith and Message)로 알려져 있는 신앙 고백문을 작성하여 통과시킴으로써 1925년 진화론적 및 현대주의적 이론들에 응답하였다. 이 신앙 고백은 남침례교 총회의 교리적 통일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북침례교인들은 신학적인 자유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운동에 대하여 심각한 논쟁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 이러한 논쟁은 20세기 전반에 그들의 총회의 특징이 되었다. 반면에 남침례교인들은 그들의 신학적 확신들에 대하여 훨씬 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조화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증될 수 있다. 예컨대 텍사스 출신의 근본주의 지도자였던 노리스(J. Frank Norris)는 남침례교회의 지도층을 한번도 성공적으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그는 한 때 대단히 극단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죠오지 워싱톤 트우엣(George W. Truett: 달라스의 제일침례교회 목사)을 성서적 진리를 훼손시키는 인물로 비난하기까지 하였었다. 신학적으로 남침례교인들은 거의 모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노리스가 믿었던 것과 똑같은 교리들을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노리스 같은 근본주의자들의 신랄한 논쟁적 체계에 대하여서는 동조하려고 하지 않았다. 남침례교인들은 1925년 중요한 신앙고백을 투표로 인정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비록 몇몇 사항들에 있어서 애매 모호하다는 비평을 받아 왔기는 하지만 보수주의적 신학 체계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침례교인들은 북침례교인들과는 달리 그들이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로 나뉘는 명백한 분열을 경험하지 않았다.
북침례교 총회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선교사들과 교회들 내에서도 자유주의에 직면하였다. 자유주의와 관련된 문제들은 너무나도 심각하여졌기 때문에 침례교 근본주의자들의 총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 회의는 1920년 북침례교 전국 총회가 있기 바로 직전 뉴욕 주 버팔로(Buffalo)의 델라웨어 에버뉴 침례교회(Delaware Avenue Baptist Church)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발표된 모든 메시지들은 침례교 근본주의(Baptist Fundamentals)라는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회의의 참석자들은 총회가 전통적 침례교 교리들에 대한 교수들과 학교 이사들의 태도들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는 안건을 투표로 통과시켰다.
보수주의자들은 그 조사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생긴 논쟁은 비통함과 긴장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으며 그 다음 해 까지 계속 되었다. 학교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받았던 위원회가 다음 해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 학교 조사 위원회는 몇몇 문제들이 있음을 인정하였으나, 본질적으로 보고서가 침례교 교육기관을 옹호하였다. 총회가 신앙 고백문을 채택하도록 만들고자 한 보수주의자들의 시도들은 거듭 거듭 실패하였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이러한 20년대의 논쟁은 30년대, 40년대에도 계속되었고, 북침례교 총회에서 보수주의자들은 같은 교단 안에 있는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을 모으기 위한 근본주의자협회를 구성하였다.
. 성경관에 대한 고찰
근본주의 논쟁의 핵심은 성경관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근본주의를 정의할 때 성경관을 논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근본주의 논쟁은 전통적으로 고수되어 오던 성경관을 지키려는 무리들과 새롭게 변화된 세계관으로 과거의 성경관에 반기를 든 무리들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현대주의는 새로운 성경관을 제창하였다.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수용되지 않는 성경의 내용은 사실로써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초대교회가 신화로 첨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독론에 관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동정녀 탄생, 육체적 부활, 성육신 등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이러한 도전에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초자연적이고 동시에 역사적 사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두 본성, 동정녀 탄생, 성경의 영감, 성경의 권위를 세우고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성경관은 미국 장로교회에서 프린스톤 신학자가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기에 이들의 성경관은 곧 근본주의 성경관이라 하겠다. 이에 프린스톤 신학자들, 알렉산더, 찰스 핫지, 워필드, 메이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성경관을 개괄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1. 알취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프린스톤 신학의 출발점은 초대학장인 알렉산더(A, Alexander)이다. 성경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1812년 그는 학장 취임연설에서 성경을 신학교 존립을 위한 기초로 설정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5장 39절 성경을 찾으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그의 저서인 변증학의 6장에서 12장까지는 성경이 확증적이고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이며, 정전()이라는 외증들을 요약하고 성경의 권위는 성경 자체의 내증에 의하여 더욱 분명하게 설명된다고 말한다.
성경의 영감에 대해서도 알렉산더는 설명한다. 곧 영감은 성경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감독의 역할을 한다. 곧 성령의 감독하에 성경이 기록되었기에 오류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한 역사가가 성령에 의해 감동되어 성경을 기록할 때, 섭리된 목적에 부합되는 사건과 상황들을 선택하도록 역사한다. 그리고 사건이 내용 속에 모든 실수와 잘못들로부터 보호되도록 사건을 해설하게 돕고 힘을 준다. 그래서 영감받은 이들은 영감 받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문체나 표현 방법을 그대로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영감을 정의하며 완전영감(Plenary Inspiration)을 주장한다. 결국 알렉산더는 성경의 어느 부분이라도 오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와 같이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높이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2. 찰스 핫지(Charles Hodge)
찰스 핫지는 알렉산더를 계승하여 확고한 프린스톤 신학을 정립하고, 더욱 강력한 성경의 권위를 확립하였다. 핫지(Hodge)의 출발점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첫째,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다. 둘째,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성경이 진리라고 증언하는 것은 모두가 진리이다. 넷째, 성경이 옳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옳으며 틀리다고 하는 것은 모두 틀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핫지(Hodge)는 계시와 영감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영감은 신자의 마음속에 단순한 영적 조명이나 성화 하는 능력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영향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계시의 목적은 사람을 더욱 지혜롭게 하여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요, 영감의 목적은 오류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책들과 모든 부분은 꼭같이 영감된 것이다. 제한이 있을 수 없고, 저자와 저작 모두 영감 되었다는 것이다. 핫지(Hodge)는 영감론이 저자의 언어까지 영감 되었다고 주장한다. 성경 저자들이 정확한 언어를 선택하도록 영감 하셨기에 성경의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도덕이나 종교적 진리에만 무오한 것이 아니고 과학, 역사, 지리에 관하여 모두 무오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핫지(Hodge)의 성경관에서 독특한 것은 원본(Autographa)의 무오설이다. 성경 속에서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상이한 진술을 설명하기 위하여 제창되어진 것이다. 핫지(Hodge)의 시대에도 원본 무오설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원본의 무오성은 사본만이 남아있는 현재에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본무오설은 워필드(Warfield)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발전된다.
3. 워필드(B. B. Warfield)
워필드(Warfield)가 활동하던 시기는 선배들보다 기독교 진리에 관한 변증에 더욱 어려움을 겪는 시기였다. 독일신학의 유입, 진화론,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으로 신앙의 주관주의와 같은 도전이 거세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워필드(Warfield)는 성경 영감설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요 계승자로써 영감의 방법이 축자 영감인 것을 주장하였다. 워필드(Warfield)가 성경 영감 교리에 공헌한 것은 참으로 지대하다. 철저하게 구프린스톤 신학전통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이 이론에 관한한 전무후무한 공헌을 하였다. 성경이 그 자체의 영감을 교훈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망라하고 성경 속의 세부 원리와 일반 원리를 통원하여 영감교리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의 문헌집 대부분이 성경의 영감과 무오교리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1881년 핫지(A. A. Hodge)와 함께 출판한 영감(Inspiration)이라는 글에서, 성경의 축자영감 사상에 관한 교회의 역사적 확신을 기술하고, 당시대 양측 곧 보수주의와 현대주의의 전제들을 기술한 이후에, 성경의 자증에 기초한 전통적인 성경관을 주장한다.
워필드(Warfield)가 보기에 영감에 관한 성경의 주 본문은 세 가지 있다. 요한복음 10장 35절, 디모데후서 3장 16절, 베드로후서 1장 20절에서 21절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이다.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성서 해석은 교리 중심의 해석이 되기 쉽고 따라서 본문 전체를 개관적으로 보지 못할 위험이 뒤따르기도 한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성서의 영감성과 무오성의 교리를 입증하는 구절로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워필드(Warfield)의 성경 영감교리는 많은 비판을 받는다. 신정통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부룬너(E. Brunner)는 워필드(Warfield)가 프린스톤의 역사적 교리를 언어적 무오(Verbal Inerrancy)의 극단으로 끌고 갔다고 공격한다. 그러나 워필드(Warfield)의 성경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주로 원본 무오설에 집중된다. 즉 영감은 성경 저자들이 최초로 기록한 원본에만 적용된다는 이론이다. 이에 대한 워필드(Warfield)의 견해는 단호하다. 그는 말하기를 원본, 어떤 부분의 참 의미가 오늘날 결정적으로 알려진 역사나 과학의 진리 또는 명백히 확인되고 해석된 성경의 다른 부분과 직접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증명하라고 선언한다.
4. 그레샴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프린스톤 신학의 마지막 주자로 일컬어지는 메이첸(Machen)은 그의 선배들이 축척하고 주장해온 신학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는 구프린스톤에 철저하게 서 있는 찰스 핫지(C. Hodge)와 워필드(B.Warfield)의 제자였다. 메이첸(Machen)은 1881년 A. A. 핫지(A. A. Hodge)와 워필드(Warfield)가 저술한 영감(Inspiration)이란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성경은 물론 원본에 있어서도 완전하고, 무오하고, 유기적 영감의 책으로 전혀 오류가 없다고 한다. 메이첸은 이와 같이 선진들의 신앙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며 당대에 일어났던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선배들의 이론을 보완하였다.
우선 현대주의에서 가장 심하게 부인한 두 가지 기적을 역사적 사실로써 옹호하였다. 곧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이 그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of Christ)을 통하여 성경의 초자연적 무오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완전영감에 대하여 부가적인 설명을 더해주고 있다. 곧 완전영감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아름답다거나 똑같이 가치 있다는 것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는 성경의 각 부분이 똑같이 참되다는 것과 각 부분은 자신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선배들은 영감의 방법, 범위, 결과 등에 대하여 논의하였고, 메이첸(Machen)도 이를 동의하는 동시에 영감 받은 성경의 각 부분이 연합과 통일성이 공존함을 보완하였다. 또한 메이첸(Machen)은 성경이 종교와 영감의 책일 뿐만 아니라 과학과 외적 역사(external history)에도 무오하다고 말한다. 곧 성경의 과학적인 면을 더욱 강조하는 그의 태도이다. 성경은 사실이며, 과학이다. 이에 메이첸(Machen)은 말하기를 기독교는 과학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는 다른 지식 분야와 상호 관계가 없는 악의 없고 무익한 부수 현상이 아니다. 라고 하여 성경과 과학, 타학문과의 조화를 강조하였다. 또한 메이첸에게 있어서 성경은 교리에서 시작을 한다. 그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평하며 말하기를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만을 청중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어떤 계획과 권고는 없다. 단지 사실들, 교리들이었다. 성경 어디에서나 그렇다. 처음은 교리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생활이다. 결국 메이첸(Machen)에게 있어서 교리는 복음에서 추론한 것이 아니다. 메이첸(Machen)에게 있어서 교리는 처음부터 복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결 론
근본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험물인 듯한 인상을 주었고, 또 일종의 열광주의를 연상케 하고 있지만 그 본질에는 인간 생활의 기반이 되는 신앙이 깃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신앙이다. 그러나 그 곳에는 충분한 위안과 영감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이 신앙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성서로 돌아가서 비평가들의 초인간적 지도를 따르지 않고도 자유로이 성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신앙 가운데서 가치와 존귀의 의미를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지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이웃에게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손을 뻗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초자연주의를 강조하고, 성경의 객관적 계시와 정확무오한 권위에 정면 도전하고,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교리, 부활, 재림등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나, 거기서 몇 가지 약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첫째로, 근본주의의 약점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깊이 보지 못하는 점이다. 구약시대의 신자들 가운데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은 다같이 은혜언약에 속하는 구원방법의 계시이다. 구약이 은혜의 약속에 대해 계약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그 성취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연속성과 통일성을 갖는 것이다. 둘째로, 근본주의 약점은 일반은총(자연은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세속 학문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하여 마침내 반()지식주의로 흘러가고 말았다. 셋째로, 근본주의는 개인의 종교경험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적 경향을 보이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을 무시한다. 종교는 개인의 기도생활과 성경공부, 그리고 교회출석에 국한되고, 경제학이나 사회학, 그리고 자연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하여는 무관한 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문화, 과학은 성경신학에 의하여 지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정되고 제약을 받는다.
지금까지 근본주의의 운동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자유주의의 도전에 대항하여 다시 한번 성경의 권위를 확인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이해하려고 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 내에서 발생한 분열과 또한 세대주의 운동 등의 측면으로 가급적 이해하고자 하였다.
우리 한국적인 교회의 상황도 보수주의, 개혁주의를 앞세우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즉 1920년 이전의 초기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성경의 기본적인 것들을 수호하고자 하는 신앙의 결단과 응징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퇴색하고 변질된 근본주의의 갈림길인 신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의 현상은 우리가 경계해야만 하는 신학적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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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찰스・핫지의 신학
찰스・핫지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로 반세기이상을 근무했다. (1822~1878)그는 누구보다도 American presbyterianism(미국 장로교 신학과 교리)에 있어서 그것을 형성할 수 있도록 기여한 신학자이다. 그가 프린스톤 신학교 재학시절에 알지볼트・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에게서 신학을 교수 받았을 뿐만 아니라 친히 사숙(私宿)까지 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프린스톤 졸업 후 독일로 유학을 가서 3명의 저명한 교수의 지도를 받고, 연구를 마친 후 귀국하였다.(3명의 저명한 교수:Tholock, Hengstenberg, Nesnder)
그는 귀국 후 즉시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교수직에 임명받고, 그의 교수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충실한 신학을, 즉 진정한 장로교 신학을 개발하는 일에 주력했던 것이다. 한편 프린스톤 학술지에 편집인으로서 많은 학술논문을 편찬 발표함으로써 미국장로교 신학의 정립에 크게 이바지했다.(학술지:Princeton Review-Theology today), Archibald Alexander는 미국 최초의 장로교 신학자(1772~1851)이다. 이는 1812~1851까지 Princeton에서 교수했다. first theological proffesor, 즉 제일교수라는 별명을 받았다. C. Hodge는 그를 존경한 나머지 그의 아들을 Archibald Alexander Hodge(A.A. Hodge)로 이름을 지었다. Hodge의 저서로는 “로마서 주석”(1835)이 있는데 이는 그의 출세작이며, 1880에 19판을 출판했다. 그는 또한 교회 사학자였으며, 미국 장로교 헌법사(1839~1840)을 출판했는데 Ⅱ권으로 되어있다.
Hodge는 1856년 “에베소주석”을 썼고, 이어서 1857년에 “고린도전서 주석”을 썼고, 1859년에는 “고린도후서 주석”을 썼으며, 1871~1873에 걸쳐서 조직신학을 Ⅲ권으로 출판했다. Hodge·s Systematic theology는 모든 조직신학의 기본이 되고 있다.
① 프린스톤 신학의 산맥을 형성하다.
프린스톤 신학은 암스텔담 신학과 함께 Reformed theology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여기 프린스톤 신학의 산맥은 찰스・핫지를 최고봉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암스텔담 신학의 최고봉의 아브라함 카이퍼 인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C. Hodge신학의 특징은 합리적 경건성인데, 그것이 Princeton신학의 전체적 특징을 이루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브라함 카이퍼 신학의 특징은 활동적 문화지향성인데, 그것이 암스텔담 신학의 전체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C. Hodge의 조직신학은 영어로 기록된 최대의 신학저서인 것이다.
②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에 입각한 장로회 신학을 수립하다.
장로정치의 의의와 중요성으로 교회론을 중요시하고, 이 근본정신은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에서 인용하였다. Princeton이 어떤 새로운 신학을 조직한 것이 아니고, 역사적 칼빈주의를 발전시킨 것이다. 교회는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는 기관이다. 우리의 신학도 교회 또는 장로교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도적 정통신학이어야 하고, 장로회 신앙이어야 하며, 복음주의적 기독교(Evangelical Chrlstianity)가 되어야 한다.
③ 합리적 신학전개에 뛰어나다.
C.Van Til 박사는 이따금 C. Hodge의 합리주의적 경향성을 비판했다. Hodge는 특히 그의 신론에서 합리적 신학을 취했다. 그러므로 평론가들은 Hodge가 신아의 초 논리성에 대한 인식이 약했었다고 비판했다. 어거스틴 사상은 Abraham Kuyper가 더 원만하게 반영시켰다고 Van Til은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평가를 하자면 C. Hodge는 Augustine사상을 지성적 차원에서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A. Kuyper는 문화적 차원에서 표현하고자 했다는 차이성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결코 C. Hodge의 합리적 전개를 나무랄 수가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 사상은“알기 위해서 믿는다.”,또는 “믿기 위해서 알아야 한다.”는 식의 논리적인 전개이다. 핫지는 두드러진 국가의 지성적 변혁기, 국가의 많은 구조와 제도가 재 정돈되고
교회 자체는 다소의 무질서와 혼란을 맞았던 그런 시기에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교회는 갈림길에 서 있었고 핫지는 교회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 갔으며 장로교에서 신학파의 암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핫지의 약점으로는 위대한 역사가가 아니어서 역사적 칼빈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논하였지만 칼빈이 결코 가르치지 않은 많은 것을 칼빈의 신학이라 믿었음을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그는 문화에 진지한 신학적인 반영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조직신학은 한편의 영원한 지혜, 유럽의 신학자들로부터 수집한 작품으로 간주된다. 그의 조직신학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소중히 간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철학적으로 빈틈이 없었으며, 철학을 소중히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동시에 그는 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핫지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것을 인식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러한 약점은 병적인 문화신학의 홍수를 퇴각시키려는 사람, 그리고 그 결과 교회사에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 안에 때때로 발생한다.
2. 찰스・핫지의 성화론
찰스・핫지는 「조직신학Ⅰ」 제1부 신론, 제8장에서 ‘성령론’을 다루고 있는데 ①성령의 본질②성령의 직무 ③성령의 역사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특별히 찰스・핫지는 성령의 직무를 설명하는 가운데 구속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직무를 심도 깊게 피력하고 있다. 찰스・핫지는
1.성령은 그리스도의 육체를 만드셨고 그 인간적 영혼에 그분의 사역에 필요한 모든 능력을 부여하셨다.
2.성령은 모든 신적 진리의 계시자이다. 성경의 교리들은 성령의 일들로 불린다.
3.성령은 거룩한 선진들이 신적 진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무오 하도록 인도하시고 그것을 또한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통해 모든 곳에서 그것을 지킨다.
4.세상에 죄를 납득하는 일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일,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사람들을 신앙과 회개를 실천하도록 인도하는 일, 이처럼 자신이 거듭난 자들 안에 새롭고도 신적인 생명의 원리로서 거하는 일은 성령의 특별직무이다. 이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신자들은 한 몸을 이룰 수 있도록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또 서로 간에 연합된다. 이것은 신자들을 믿음, 사랑, 그들의 내적 생명, 소망과 최종운명에 있어서 하나가 되게 하는 성도들의 교통의 기반이다.
5.성령은 또한 사람들을 교회의 직분으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그 직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필요한 능력들을 부여하신다.
찰스・핫지는 구속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직무를 피력하는 가운데 성화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찰스・핫지는 성령은 거룩한 선진들이 신적 진리를 기록하는데 있어서 무오하도록 인도하시고 그것을 또한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통해 모든 곳에서 그것을 지키신다. 모든 진리는 성령에 의해 능력으로 마음과 양심 위에 역사된다. 우리는 세상에서 도덕과 질서에 속해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전 포괄적 능력을 힘입고 있다.
그러나 흔히 일반은총으로 불리는 이 일반적 능력 외에도 성령은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조명하여 하나님에 의해 자유롭게 주어져 알 수 있도록 한다. 자연인은 영적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고 알 수도 없다. 모든 신자들은 성령에 의해 계몽되고 인도받기 때문에 신령한 자들로 불린다.
찰스・핫지는 구원과정의 모든 곳에서 성령의 능력이 포괄적으로 역사한다고 보고 성령을 방편으로 하는 성화를 논하고 있다. 찰스・핫지는「Systematic Theology」의 제18장에서 ‘성화론’을 다루고 있는데 “웨스트 민스터 요리문답에서 성화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의 사역,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거듭나게 되며, 죄에 대해서는 죽고 또 죽으며 의에 대해서는 살게 된다.
성화는 초자연적 사역이다. 고 말했고 성화의 초자연적 특성에 대한 증거로 성화의 주권자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거룩한 의식은 성령을 그들의 주권자로서 언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회개와 신의, 다른 은혜를 위하여 기도화하는 것을 배워왔다.”고 하며, “성도와 그리스도 상의 연합에 대한 모든 성경 말씀의 가르침과 성령의 내재하심이 성화의 초자연적 특성을 입증한다.”고 하며 성화의 방법에 대해서 “부단하고도 활발한 영육간의 활동에 대한 소명, 하나님의 사역이고 영혼은 믿음을 실천하도록 인도된다. 실천의 가치와 은혜를 통해 영혼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된다.”,“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 확고해진 성령의 내재하심은 새로운 영적인 삶의 근본이 된다.
성령의 내재하심의 권능을 적합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물러날 때 까지 끊임없이 증가한다.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하게 된다. 그것이 정신을 밝히는 성령의 임무이다. 성화의 사역은 성령의 모든 은혜의 실천을 위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행하심을 통해 수행된다.”고 하였다.
찰스・핫지는 은혜의 수단으로 교회와 성례의 중요성에서 “성자들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설립하는 것의 한 가지 위대한 결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지적, 사회적인 삶은 격리되어 고립되어서는 발달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왕직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시는 것에 대하여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을 통치, 복종, 지배, 보호, 구속하게 하시며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신다.”고 하였다. ‘성화의 열매는 선행이며, 적선의 열매임을 강조하고 “이 세상 삶에서의 타락 때문에 인간의 그 어떤 사역도 완전하게 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가치론이 버려져야 할 뿐만 아니라 좀 더 명확하게는 모든 적선의 사역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 핫지의 견해
1.구속의 언약에서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의 머리이시며 대표자가 되신다는 사실, 이 대표적 연합과 영원한 언약에 의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을 행한 것으로, 그들의 이름으로, 그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였으나 문자적인 것은 아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행위는 그들의 행위가 되었지만 이것은 대표적인 원리에 의해서이다.
2.구속의 언약에 의하여 그리스도께 약속된 상급은 그의 백성들의 칭의, 성화, 그리고 영원한 구원이다.
3. 그러므로 신자의 칭의의 법적 근거는 그들 자신의 의도,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거룩한 본성도 아니며, 그들의 이름으로 수행되고 겪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고난이며, 이것이 언약에 의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정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으며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
1). 신앙의 참된 본질
회심에 흔히 따라붙는 여러 가지 동요를 이미 체험했고 또한 하나님이 자기를 받으시라는 소망에서 흘러나오는 평화를 느껴본 사람은 자연히 이제는 갈등이 지나갔고 승리를 얻었으며 신앙의 역사를 다 이루었다는 식으로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런 상상이 이내 사라져 버린다. 출생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회심이 신앙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젊은 어머니는 너무나 기쁨에 가득 찬 나머지 자기 앞에 놓인 사명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잠시 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품에 안은 갖난 아기를 바라보며 그 귀여운 모습과 그 생기발랄한 본능적인 움직임을 볼 때에 그 아기가 전적으로 자기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한 시간만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두어도 아기가 죽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린 그리스도인은 물론 처음에는 이제 할 일을 다 완수했다는 식으로 생각하게도 되지만 자기의 영적 생명이 너무나 가냘프기 때문에 끊임없이 보살피고 영양분을 주어야만 된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된다. 새 생명으로 거듭나자마자 그냥 버려두면 버림을 당한 갖난 아기처럼 그 영적 생명도 곧바로 확실하게 파멸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저질러지는 또 한 가지 실수는 신앙이란 변덕스러운 것으로 흥분의 상태와 부감각의 상태가 서로 교차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로 범한다. 이런 망상 속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때에만 신앙을 발휘하는 것이다. 몇 달 동안을 무관심속에 편안하게 살다가 마음에 감동이나 기쁨을 느껴도 그 다음 얼마 지나면 그런 것들이 다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저 그런 상태로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어떤 형태든 그런 식으로 간헐적인 것이 아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런 식으로 간헐적으로 사는 것은 하나도 없다. 또한 건강한 사람이 경련을 일으키고 다시 졸도하며 졸도했다가 다시 경련을 일으키는 법도 없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순전한 신앙이라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유지되지를 않는 것이다. 물론 변화는 있다. 건강한 때가 있고 병든 때가 있고 원기 왕성한 때가 있고 무기력한 상태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과연 신앙이라는 이름에 합당하다면 그것은 꾸준히 이어지며 활력이 있고 전진하는 법이지 그런 식의 발작이 정기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이보다 더 비근하게 나타나는 오류는 신앙을 내적인 섬김으로보다는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행위로 보는 것이다. 종교 집회에 참석하기 때문에 자기는 신앙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들은 공 예배에 참석하고 겉으로 신앙의 모양을 보이기만 해도 그리스도인 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신앙이란 영적 삶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작을 가리켜 새로운 출생(거듭남, 신생)이라고 하며 새로운 창조요 영적부활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신앙의 원리 또는 근원은 신비로운 것이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말할 수가 없다. 식물의 생명의 형태도 다르고 동물의 생명의 형태도 다르고 이성적인 사람의 생명의 형태도 다르다. 이렇게 생명의 활동이 서로 다른데 감추어져 있는 그 활동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추적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영적생명의 본질도 그에 못지않게 파악이 불가능하다.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설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영혼 속에 새로운 종류의 활동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활동의 근원은 어디며 그것이 어떻게 유지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한 일들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활동에 무언가 영구한 원인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육체의 생명이 보고 듣고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영적생명이 그 존재가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중생할 때에 영혼의 상태에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중생한 영혼은 그 생각이나 목적이나 느낌에 있어서 과거와는 다르며 또한 그런 달라진 모습이 계속된다.
이렇게 달라지는 원인을 가리켜 때로는 새로운 마음, 은혜, 새사람, 내적갱신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용어들은 전부 영적생명의 원리를 지칭하는 것들로서 거룩한 열매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그렇게 영구하며 또한 항상 있기 때문이다. 신앙에 관해서 한때는 어느 정도 열심과 활력을 보이다가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마치 죽은 시체에다 전기 자극을 주어서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움직임을 잠시 보이게 만드는 것과도 같다. 그런 시체의 움직임을 잠시 보이게 만드는 것과도 같다.
그런 시체의 움직임은 그렇게 잠깐 생겼다가 곧바로 사라져버리고 그 다음에는 아무리 자극을 주어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를 않는다. 시체의 경우 생명의 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이 순전하다면 그 신앙은 새로운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따라서 그 신앙은 영구한 것이다. 더욱이 지각 있고 이성적인 존재들의 특징은 그 모든 행위에서 자발적이다. 충동적으로 행하고 또 즐겨하는 특정한 행위들이 있다. 동물들은 억지로 먹거나 마시가나 장난하지를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사상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며 느낌을 주고받을 때에 강압에 의해서 정신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동료들에게서 소외되어 지적생활과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속에 있는 것을 발산할 기회를 상실하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형벌 가운데 가장 극심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외와 감사와 사랑과 복종이야말로 새로움을 입은 심령의 자발적인 행위들이다. 그런 행위들을 통해서 영혼이 감추어지지 않고 억제되지 않은 상태로 자유로이 분출되는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억지로 혹은 강제적으로 실행되는 신앙은 가짜 신앙일 수밖에 없다. 벌을 받을까 무서워서 겉모양으로만 행하는 부모에 대한 복종은 존경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순종과는 매우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 역시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그런 섬김은 가짜요 우리가 그의 자녀인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기뻐하는 것으로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 규례들, 성소, 그의 임재가 모두 그들의 가장 큰 즐거움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병이 들면 일상적인 즐거움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병이 들면 일상적인 즐거움을 주는 여러 가지 것들에 별 흥미를 느끼지를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침체상태에 있게 되면 신앙에 속한 것들에서 거의 기쁨을 느끼지를 못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 영적생명에 속하는 것들에서 거의 기쁨을 느끼지를 못하게 된다. 그러나 누구든 영적생명에 속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자발적으로 경건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그것이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형태를 취하든 간에 생명은 발전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주 가냘프지만 점차로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 그리고 영적생명도 마찬가지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 기쁨이 있지만 이것이 쇠퇴하는 경우가 아주 잦은데 이런 사실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도 신앙 그 자체가 자기 마음속에서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영적 삶의 발전 또는 쇠퇴를 가늠하는 기준으로는 아주 불확실한 것일 뿐이다. 어린 동물들이 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광경을 보면 그것들이 기쁨에 넘치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다 자란 동물에게서는 그런 일이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뛰노는 동물들의 신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모른다. 그것들 보다 절반 정도의 기쁨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성숙한 동물들에 비할 때에 견디는 힘도 절반 정도의 기쁨밖에는 느끼지 못하는 성숙한 동물들에 비할 때에 견디는 힘도 절반밖에는 안되고 무언가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너무나 약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어린 그리스도인이 잠정적인 데서 행복감을 느끼고 자기들의 본성에서나 신선함에서 희열을 느끼지만 그보다 성숙한 자들에게서는 그런 것들이 없고 오히려 그런 느낌이 무르익어서 하나의 삶의 원리가 되며 더 기쁜 감정들이 보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안으로 정착되어 간다는 것이 전혀 이상스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기쁨이 바른 영적 삶이 자라나는 일을 가늠하는 적절한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그 기쁨은 본질상 진보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에서 성인으로 나아가면서 육체가 성숙해지며 또한 유아에서 성인으로 자라나면서 정신력이 발전하는 것과도 같다. 성인이 어린아이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에 당연히 있어야할 중요한 요소가 결핍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도 거룩함에 진보가 전혀 없다면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 진보를 입증하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힘의 증가, 곧 믿음의 힘, 목적의 힘, 원리의 힘, 올바르게 행하는 힘, 악을 저항하는 힘, 고난을 견디는 힘 등이 증가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름지기 힘에서 힘으로 나아가며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거룩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신앙은 외형적인 봉사가 아니다. 그저 두려움과 슬픔에서 오는 흥분상태에 이어서 평화와 기쁨이 따라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이어서 평화와 기쁨이 따라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계속 교차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참된 신앙은 영구한 행동의 원리요, 자발적인 시행이요, 본질상 발전적인 것이다. 그런 속성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요(벧후1:4), 영혼이 하나님께 화합하는 것이다.
신앙은 옛사람과 옛사람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새사람, 곧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골3:10),“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엡4:23-24)을 입는 것 이라고 한다. 이 두 구절은 동일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알 수 있는 능력을 지니도록 새로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지식이란 참되고 선한 것에 대한 지각, 인식, 인정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이처럼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은 성경에서 이례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 지식이 영혼의 생명이다. 그 지식은 바로 하나님과 화합하여 진리를 지각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판단과 의지에 있어서 영혼을 하나님과 화합시켜 주는 것보다 더 고상한 도덕적 탁월함이란 없다. 이것을 가리켜 사도는 엡4:24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즉 진리에 기초하며 또는 진리에서 나오는 거룩함이란 의미이다.)이라고 부른다. 롬12:2에서도 거룩함에 대한 동일한 사상이 나타난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또는 확증하도록)하라”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며,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는 것, 바로 이것이 참괸 신앙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런 변화의 주체는 바로 전인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지각이 새로워지고, 목적이 새로워지며, 느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전신이 점점 더 깨이며, 의지가 올바른 규범에 더 복종하게 되고, 감정이 더 청저하게 정결케 되는 것이다. 사도는 데살로니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전5:23) 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성화(聖化)의 주체가 된다. 몸은 성령의 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이며,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덕분에 몸이 구속의 은택에 참여하며 장차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악한 영향이든 선한 영향이든 몸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다양하고 우리의 타락상태에서는 악한 영향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악한 영향이 대항하는 일이 성화와 역사에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또한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삶을 얻는 조건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선언한다.(롬8:13)그러므로 몸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죄를 섬기는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로 거룩하게 구별함으로써 되는 것은 물론 영혼에 미치는 그 몸의 영향을 억제하고 그 몸의 소욕을 절제하고 새로움을 얻은 사람의 뜻에 몸을 복종시킴으로써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화의 역사가 우리의 모든 기능에 다 미치듯이 영혼에 새겨지게 되어있는 하나님의 형상에는 도덕적으로 탁월한 모든 것이 포함되는 것이다. 사랑, 믿음, 온유, 자비 등 서로 다른 은혜들은 선(善)이라는 한 가지 동일한 원리가 달리 드러난 것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와 자비가 동일한 감정 혹은 동일한 성향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람을 정의롭게 만들어 주는 동일한 원리가 그 사람을 자비롭게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신앙, 혹은 신적 생명의 원리는 온갖 종류의 탁월함을 다 촉발시킨다. 또한 각 종류마다 골고루 영향을 미친다. 마치 식물이나 동물이나 이성적인 존재나 생명의 원리가 각 부분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영향을 미쳐서 전체가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가지가 커짐에 다라서 뿌리도 커진다. 몸의 이런저런 지체들이 자라날수록 몸 전체도 거기에 맞게 자라난다. 정신력에 속한 다른 능력들이 왕성하게 증가함에 따라서 판단력과 기억력도 증가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이처럼 조화 있게 발전해 가는 것이다. 몸의 다른 부분이 성숙하게 자라는데 팔만 어린아이 때의 모습 그대로 있다면 그것은 끔찍한 결함의 상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는 판단력과 감정이 충만하게 발휘되는데 기억력과 양심은 유아 때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 사람의 정신은 완전히 혼란 상태에 있을 것이다. 이런 균형 있는 발전의 법칙이 영혼의 생명에도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 과연 영혼에 생명이 존재한다면 그 생명은 온갖 형태의 선(善)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한 부분에 대해서는 탁월함이 나타나는데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탁월함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 그 탁월함은 신적생명, 혹은 새로운 마음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적생명이나 새로운 마음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적생명이나 새로운 마음은 본질상 모든 도덕적 탁월함을 다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람이 좋기는 한데 불친절하나는 말은 모순으로 느껴진다. 좋다는 말 속에는 정의롭다는 뜻과 자비롭다는 뜻이 함께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신앙이 있는데 부정직하다는 말 역시 모순이다.
신앙이란 경건성은 물론 정직성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religion)이라는 단어는 온갖 형태의 도덕적 탁월함을 포괄하고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신앙 혹은 새사람, 은혜의 원리, 마음속에 있는 신적생명의 원리 등의 단어들이 뜻하는 바는 모든 종류의 선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경외, 사랑, 순종, 정의, 자비 등은 서로 다른 형식으로 시행되지만 모두가 거룩이라는 한 가지 동일한 원리에 속하는 것들이다. 자비가 없는 거룩이란 있을 수가 없다. 또한 경외나 정의가 없는 것이다. 거룩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마음의 영이 새로움을 입은 사람은 성령의 다양한 온갖 은혜 가운데서 물론 대상과 형편에 따라서 표현방식도 달라지겠지만 도덕적 탁월함이 반드시 다 드러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은 내적인 생명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 가운데서도 가장 포괄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특별이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의 본성에 적합한 대상들에서 기쁨을 얻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외부의 대상들에게서 우리의 본성에 맞는 특질들을 접하면 거기서 만족과 욕구가 생겨난다. 그렇게 되면 영혼은 그것들이야말로 자지자신을 위해서 사랑해야할 선이라 여겨서 그것들에서 안식을 누리게 된다. 그 특질들이 고상할수록 더 순결하고 더 고상한 사랑이 자극을 받아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중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완전하심이 온갖 탁월함을 다 포괄하며 우리의 본성으로서 가능한 최고의 능력과 최대의 능력에 적합한 것임을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그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아서고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만족과 욕망의 최고의 대상으로 삼아 그 가운데서 안식은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저 도덕적 탁월함에서 만족을 얻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은 우리와 가장 친밀한 관계 속에 계신 인격적인 존재를 향한 사랑이다.
우리의 존재의 주인이신이시오 우리의 보존자시오 통치자이시며 의식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보살피고 보호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며 우리와 교제하시며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 우리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인 것이다. 이처럼 포괄적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는 의존감, 의무감, 교제함이 개입된다.
또한 이 사랑은 그 사랑이신 그 대상이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을 인식함에 따라서 계속 수정된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하나가 찬양의 대상이 된다. 그 무한함이 무한하신 선하심과 연합하여 경이와 찬송과 경외와 만족을 자극하게 되고 그리하여 찬양으로 나오며 부복하여 예비하는 것밖에는 다른 표현이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보다 신앙의 본질에 더 필수적인 요소는 없다. 하늘이 열려 사람에게 그 모습을 드러낼 때면, 언제나 그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 우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절하는 모습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 땅위에서 행해지는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겸손한자와 회개하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경외와 사랑의 감정들이 시행되는 일은 그저 우발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좀더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바쁜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짐에 따라서 우발적으로 잠시 생겨나기도 하고 세상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잠겨서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기리며 그의 선하심에 대해 감사하며 그의 축복을 빌 때에는 그런 감정들이 지속적으로 생기게 되는 것이다.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충만하게 나타났던 헌신의 심령이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거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경건한 자들이다. 모두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며,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느끼며 그의 임재 속에서 즐거워하며 모두가 사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의 행위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린다. 영혼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가 없이는 신앙이란 없는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육체에 온기와 움직임이 없을 수가 없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육체가 급속히 부패하는 것처럼 영혼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어지면 망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굴복과 순종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굴복이란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인정하고 따르는 것이다. 이 굴복은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들이 올바르게 그의 경륜들이 전부 지혜롭고 자비하며 정의롭다는 지각과 시인을 포함한다.
주위가 캄캄해질 때에도 그의 신앙으로 “공의와 판단이 그의 보좌에 거하도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새로움을 향한 영혼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에 대한 확신이 가득 차서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서 말하기를“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한다. 온 땅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의를 행하시리라는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불편한 마음과 의혹들로 인해서 마음의 평화가 깨어지고 죄책감이 더욱 가증되지만 이런 심령의 영향을 받으면 그런 불편과 의혹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또한 반드시 순종을 낳는다.
왜냐하면 영혼이 하나님과 화합하는 것이 참되고 올바른 것을 지각하고 사랑하는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합은 오직 순종을 통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마치 불순종이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반대된다는 증거이듯이 말이다. 하나님과 화해가 있거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이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의 듯에 대하여 마음과 삶으로 화합하는 것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피하지도 않는데도 그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과 같다거나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순종은 사랑이 필연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요 외모요 겉껍데기인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탁월한 것에 대한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에는 순종이 뒤따르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자신 사이에 마음의 화합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만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대상에게 기쁨을 주고자 하는 목적도 노력이 없다면 사랑이 아닌 것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14:21)에서 순종은 사랑의 증거라기보다는 사랑 그 자체가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고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꾸준하게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모습이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한층 충실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인데 만일 그런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그 뜻을 대적하는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그 마음속에 사랑이 있다면 반드시 순종이 나타나는 법이다.
영적생명이 활동하는데 거기에 기쁨과 평안이 없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사물의 질서에 합당치 않는 것이다. 행복이 이처럼 기쁨과 평안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도는 “영의생각은 평안이니라.”(롬8:6)고 말씀한다. 어떤 것이 탁월할 때에는 그 탁월함을 누리는 것이 반드시 함께 있기 마련이다. 바른 감정과 사랑은 언제나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이 기쁨은 대상의 위엄에 따라 비례한다. 기쁨의정도가 기쁨의 종류가 거기에 비례한다. 감각적인 데서 나오는 사랑은 가장 저급한 행복을 준다.
사교적인 애정 다음은 지적인 능력 다음은 도덕적인 감정 다음은 신앙적 사랑의 순서로 기쁨의 품격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적 사랑에서 나타나는 즐거움은 다른 어느 것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순결하고, 더 고상하며, 더 만족을 주며, 우리의 본성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교제야 말로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가득차있으며 또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안을 준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기쁨(희락)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곧 영적 생명에 반드시 수반되어 그 생명을 증명해 주는 한 가지 요소라는 뜻이다.
기쁨은 건강이 흘러넘친다는 증거이며, 성령께서 새로움을 얻은 영혼에게 부어주시는 즐거움의 기름이다. 성령께서는 그 기름을 부어주셔서 그 영혼의 활동에 활력을 주시며 그 모양을 밝게 하시고 도한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는데 능동적으로 힘쓰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움을 얻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도덕적 탁월함에 있다면 또한 도덕적 탁월함이 곧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형편 가운데서도 올바로 느끼고 행동하도록 만들어 주는 정신의 상태를 뜻한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른 시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그 이웃을 향해서도 올바로 느끼고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이 선한 자들로 칭하는 사람들은 경건할 뿐만 아니라 자비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는 계명은 우리 이웃의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의무를 포괄적으로 진술해 준다. 여기서 의도하는 사랑이란 바로 우리 이웃들에 대해서 존중과 친절로 대하며 그들에게 성을 행하기를 구하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성향을 뜻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오래참고 친절하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시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잘되는 것을 기뻐한다. 이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하지도 않는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는다. 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 안에서 기뻐한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란다.(고전13장)
사랑이 없이는 아무리 경건하다고 입으로 떠벌이고 은사가 많고 자기부인의 행위나 구제의 행위를 겉으로 행한다 해도 모두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충동하는 자기사랑이 우리 자연인의 본성에 속하듯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도록 충동하는 자비는 새 사란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새사람이란 선한ㄱ사람, 곧 하나님을 닮아서 거룩하고 정의로우며 자비하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생겨나는 온유, 친절, 신뢰성 있는 기질은 개개인의 다양한 성격에 따라서, 삶의 여러 가지 관계에 다라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성경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똑같은 느낌으로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라고 가르치지만 동시에 성경은 사람들이 한 가정의 식구들로서나 한 사회의 구성원들로서 맺는 특수하고도 더 밀접한 관계를 배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자비를 생겨나게 하는 동일한 신앙의 원리가 삶의 갖가지 관계들에 속한 온갖 사랑들을 행하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다. 그 신앙의 원리는 순종해야할 자에게 순종하도록 하고, 경외할 자를 경외하게 하며, 존귀히 여길 자를 존귀히 여기도록 만들어 준다.
자기와 동등한 사람들과 관계할 때에는 겸손하고 정당하며 친절히 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덕성이 참된 신앙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닮은 자들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긍휼히 많으시며 오래 참으시고 선하심과 진리가 풍성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부정직하고 불친절하며 교만하고 복수심이 있고 속이기를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지 않는 자들이요, 마음이 새로워진 일이 없는 자들이다. 악한 부모, 악한 자식, 악한 이웃이면서도 동시에 선한 그리스고인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은 것이다. 마음이 새로워진 사실이 겉으로 드러나는 도 한 가지 형태는 바로 자기부인의 모습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자기부인이 필요한 한 가지 이유는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려면 다른 사람의 유익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는데 있다. 우리의 욕망과 욕구 가운데 무질서하고 악한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된다. 복음이 제시하는 법칙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기쁘게 하려 해서는 안 되며 누구든지 이웃을 기쁘게 하고 그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부요한 자로서 스스로 비천하게 되셔서 비천한 우리로 부요하게 하신 것이다. 자기부인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다가온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은 이기적이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양보하며 자기 자신의 만족과 심지어 자기의 권리까지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기꺼이 포기한다.
그가 추구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온전히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탁월한 특징이었듯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런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화합하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자기부인은 우리 인간의 본성의 부패함 때문에 그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 진다. 타락의 결과 감각의 영혼에 부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끊임없이 요구하며 들어주면 줄수록 더욱 요구가 커지는 것이다. 이성적인 사람도 육체를 정신에게 복종하게 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신앙인으로써는 더더욱 감각에 사로잡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은 육체를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요 몸을 쳐서 복종시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육체에 속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외형적이며, 마음의 악한 기질들이 영혼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교만, 허영, 시기, 악의, 자기사랑이 육체적인 탐욕보다도 깨뜨리기 어려운 원수들이다. 악한기질들은 인간의 본성 가운데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부패한 옛사람을 벗어버린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의무 가운데 가장 힘들며, 삶 속에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5:17)이러므로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원리는 성령을 따라 행하기 때문에 승리를 얻는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움을 입어서 거룩해진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만족을 얻고 안식을 얻는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그의 피조물과 자녀로서 관계를 가지며, 그 속에서 즐거워한다. 이들은 경건한 삶을 살며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과거의 육욕에 따라서 살지 않고 그들의 모든 대화에서 거룩한 모습이 드러난다. 정의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이웃을 향하여 정직하며 자비를 베풀며, 자기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한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일이며, 하나님의 형상에 화합하는 일은 자기부인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의 미묘한 악들을 대적해 나아가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관념은 성경에서 찾아야지 삶에서 찾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은 신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은 사랑하는데 있다고 말씀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경외와 헌신과 순종, 사람에게 자비와 공의를 행하며, 그들을 사랑하는데서 나타난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이러한 겉모양을 갖추었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양심이 증거 해 준다. 사람들은 서로 매우 다르면서도 동일한 특색과 동일한 사회적 성향과 동일한 정신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도함을 받으며, 또한 모두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룩이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필수적이다.
예수님께서 구주이신 것은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상태는 바로 거룩의 상태인 것이다. 구원이란 육체의 소욕과 마음의 악한 욕심에 종 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요 그를 섬기는 일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언제나 이 땅의 삶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거룩함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히12:14)우리의 마음과 삶이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에 습관적으로 지배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와 형상에 부합되지 아노고,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보이지 않는다면, 신앙인이 아니며,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요,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씻음을 받았고 거룩하여 졌으며, 또한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성도들이다. 이들은 영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지며, 정과 욕심을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심령이 가난하며, 온유하고, 청결한 자들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다.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완전해졌다함도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그의 백성도 반드시 거룩해야 한다.
그러므로 거룩의 필연성은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에서 연유하며, 그 필연성은 절대적이며, 불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백성이 그의 거룩에 참예하는 자가 되지 않는다면 구세주의 사명과 고난의 계획과 목적 전체가 망쳐지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백성들이 거룩해져야만 비로소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이며, 또한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보상이 그의 백성들을 이끌어 그 자신의 형상과 화합하도록 하여 그가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장자가 되시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든지 구속의 매력과 영광은 바로 죄에서 구원함을 받는 것과 하나님을 닮아 가는데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야말로 의의면류관이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요, 그리스도인이 바라고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그 존귀함이요 축복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얼마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구원에 대한 사고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요 그의 소망을 산산이 깨뜨리는 것이다.
구원의 본질,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구속의 계획 등 이 모든 것들이 거룩이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입증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지 도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든지 간에 거룩하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후사도 아닌 것이다.
2). 성화의 수단
우리는 타락한 존재로서 우리 스스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런 규칙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온갖 노력들이 그 지체로는 전혀 효과가 없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는 한 이성과 양심을 동원하여 아무리 노력해도 거의 소용이 없는 것이다. 타락이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이성, 선택적 양심, 사회적 삼정, 정의감, 두려움, 부끄러움 등이 있다. 이런 행동의 원리들은 기술적으로 운용하면 적절한 품행을 만들어내고 매우 온화한 성품과 가치 있는 성격을 만들어 내는데 많은 기여를 할 수가 있는 것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수단을 사용하여 우리 본성의 타락한 갖가지 악한 면들을 근절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감정 혹은 기분(affections)은 이성의 독당에도 양신의 명령에도 복종하지 않고 자기들의 법칙에 따른다. 그리고 이성과 양심의 본연의 영역을 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산출시키고 유지시키는 일은 우리 자신이 지닌 목적의 힘으로도, 도덕적 사고의 힘으로도, 어떠한 규율로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교도들이 하는 은둔, 금욕적인 절제, 목욕, 순례, 고행, 성수를 뿌리는 것, 기도문을 반복하는 것, 종교의식에 참여 하는 이런 수단들 자체가 사람의 영혼에 은혜를 전달한다고 믿는 것이다. 성경은 곧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죽으심의 공효에 참예한자가 될 뿐 아니라 그들 속에 생명의 원리로서 거주하시며,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되도록 역사하시고 하나님 자신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행하도록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참여한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사람이 율법 아래 있는 한 사람은 노예의 상태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감정을 가질 수도 없고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되면,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 전체가 변화된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의 죽으심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므로, 이제 그의 생명과 연합한자가 되었고, 연합의 결과로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들 속에 성령님이 거하시게 되어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그리고 이 성령은 영혼에게만이 아니라 육체에게도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성화의 교리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양심이나 도덕적 동기의 힘으로나 극기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과 화복한 상태가 되며, 성령에 참예한자가 됨으로써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칭의가 되실 뿐 아니라 성화가 되시는 것이다. 그는 율법의 형벌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거룩한 자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에 의하면 칭의 없는 성화, 칭의 이전의 성화란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의 연합의 본질은 아주 신비한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이 비밀이 크도다.”(엡5:30.32) 연합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다. 그 효과가 분명하게 진술되어 있으며, 아주 충격적인 실례를 통해서 그 본질이 계시되어 있다. 우리 주님은 그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17:21~23)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요한도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량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14)말씀한다. (롬8:9~10, 고전 3:16)
성경은 이런 가르침으로 가득차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갈3:13~14) 구속의 은택에 참여했다는 유일한 증거는 바로 성령님께 참여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성령께서 전달하시는 놀라운 능력으로 드러나든지, 성령의 임재를 끊임없이 표시해 주는 거룩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 연합으로 나타나는 효과는 그리스도의 공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한 것이요, 성령의 내주하심은 우리의 성화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연합을 몸의 머리와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비유한다. 이런 비유적 표현이 담고 있는 주된 사상은 생명의 연합된 교류가 있다는 것이요 그와 그들 안에 동일한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이다. 몸이 한 영혼에 의해서 생명을 갖게 되고, 그 영혼을 통해서 온 지체들이 하나가 되며 공동의 생명을 전달받듯이 그리스도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전달되며 그 백성들이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그 백성끼리도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안에 자리하고 있고, 근원을 두고 있는 그 생명을 그의 백성 모두에게 부여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 또 다른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가지가 포도나무와 연합하여 그의 생명을 함께 나누며 그에게 절대적으로 그 나무에 의존하듯이 신자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생명을 나누며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전달되는 성령께서 그들 속에 생명과 결실의 원리가 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은 하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고 하셨는데 그 성령께서는 영적 생명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영적 생명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모든 일들의 근원이 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며(눅3:16), 성령으로 나며(요 3:5), 하나님의 영이 그들 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신령한 자들이라 칭함을 받는다.(고전3:16)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며(고전6:11),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롬8:15), 성령 안에서 살며(갈5:25),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하게 되고(엡3:16),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엡5:18)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죽이며(롬8:18),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으며(엡2:18),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찬미한다.(고전14:15 ) 그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지식의 근원이요(엡1:17), 기쁨의 근원이요(살전1:6), 사랑과 오래 참음과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근원이다.(갈5:22~23) 성령의 내주하심의 교리는 복음의 본질 속에 배어 있어서 절대적인 복음의 필수적 요소가 되어있다.
하나님의 영이 그의 백성들과 항상 함께 계셔서 그들의 내적활동과 외적행동을 인도하셔서 마지막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하늘의 순결함과 복락에 들어가도록 이끄신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복음에서 빼버린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거룩한 삶의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의 교리에 있다. 이 교리는 죄 사함에 대한 소망의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힘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터를 세움으로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강건해지며, 구속의 비밀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엡3:17~19)
신자는 바로 이 교리 덕분에 온갖 시련 가운데서도 꿋꿋이 설 수 있으며, 모든 원수들을 이길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사는 것이 그 자신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사시며 그의 삶에 필요한 은혜를 풍성히 베풀어주시며 그를 정결케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 있는 그의 친 배성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의 영적 생명의 근원이므로 그 생명을 유지하고 촉진시키는 수단은 모두가 이 교리와 연관되며 또한 그 효능이 생긴다. 그리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깨끗이 되며(행15:9),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며(행26:18), 믿음으로 살며(갈3:11),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엡2:8)
믿음은 이처럼 중요한 기능을 지닌다. 믿음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끈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 것으로 요구할 권리를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그의 성령에 참여케 하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에게 오는 자는 생명의 물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사도는 이것이 성령을 의미한다고 말씀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 때 비로소 하아님께 나아가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 그의 거룩케 하시는 사랑의 영향력을 받을 확신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과 은혜에 사명을 다할 힘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시험을 이기며 사명을 다할 힘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일이다. 지극히 크고 귀한 약속들을 받아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게 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신자의 거룩함과 평강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시험을 당하여 낙심이나 죄에 빠질 때에 그를 바라보며 그에게 도움을 구하면, 인간의 의지로도 어떤 다른 동기로도 얻을 수 없는 큰 힘을 얻게 되어 그 힘으로 시험을 이기고 견디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유로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또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이 가득함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덕분에 우리는 영적생명의 근원인 성령을 받았으므로 성령께서 떠나시는 모든 일을 피하여 그 생명을 유지해 간다. 성경은 성령께서 근심하실 수도 있고, 성령을 거스리는 자들에게서 지그의 영향력이 소멸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영혼을 죄로 더럽히거나 무절제와 음란으로 육체를 더럽히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체들이요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화를 주장하시는 성령께로부터 나오는 올바른 생각과 의로운 목적과 거룩한 욕심은 계속 높이고 기려야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도덕성에 대한 사고도 필요하고 도 그것에 대해서 정당하게 대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에 의존하여 죄를 대적하고 올바른 감정을 배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며, 끊임없는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그를 의지함으로써 그 삶이 유지되는 것이다. 성령과의 교제는 주로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기도는 성령을 받는 지정된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너희가 안할지라도 좋을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끈질기게 기도하며 특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심령 속에 유지되며 촉진 되도록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역사하사 그의 기쁘신 뜻대로 뜻을 갖게 하시고, 행하게 하신다는 교리는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 가운데서 자라나도록 합리적인 수단과 성경적인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와 모순 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은 인간으로서 파악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는 일깨우시고 가르치시고 설득하시는 일을 하시는데 이 모든 것이 이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내주(內住)하신다고 해서 우리 자신의 기능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그것들을 인도하셔서 행동하게끔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그 일을 사실 우리가 행해야 하며, 그렇게 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하나님의 역사에 속하고, 회개가 그리스도의 선물이지만 우리가 회개한다.
사랑, 온유, 양선 등 모든 은혜들이 성령의 열매들이지만 우리가 사랑하며, 온유하며 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이러한 영향 아래서 인도함을 받아 바른 기질과 감정을 행사함으로써 성화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힘을 계속해서 발휘하면 그 힘이 더 커지는 법칙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거듭난 영혼의 기질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경건한 감정은 그 어떤 것이든 경건의 원리를 강화시켜주며, 영혼을 영구히 보다 낮게 만들어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영향력에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 믿음, 간사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섬김에서 생겨나는 선행은 그런 행동 자체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갖는 한 시간의 교제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깊은 감동을 남기며, 언제나 악의 영향을 덜 받고 선의 영향을 더 받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또한 성령께서 영혼을 자극하여 거룩을 실천하도록 하며,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도록 이끌어주며, 그 영혼을 더욱 거룩하게 만들어주며, 또한 하늘의 불변하고 완전한 거룩에 더 합당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행실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주로 진리를 묵상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생각과 감정에는 대상이 있기 마련인데 그 대상이 또한 그것들을 불러일으키는 성향이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선하심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 그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소망을 가질 수가 없다.
이런 감정들이 그 적절한 대상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 대상들이 또한 그 감정들을 자극하는 성향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부패하지 않았다면 그 대상들을 볼때마다 거기에 합당한 감정들이 반드시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패하였지만 그 대상들의 고유한 본질에서 나오는 성향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부패성을 교정하시고 제거하심에 따라서 그 대상들이 적절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진리로 거룩함을 입는다고 말을 하며(요17:19),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된다고 하며(요15:3),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다고 하며(약1:18),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고후3:18)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지속적으로 마음속에서 활동하도록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기대한다는 것처럼 불합리한 일은 없을 것이다. 마음에 세상의 생각과 근심이 가득 차 있으면서, 특히 죄를 생각하거나 죄를 보고서 악에 감동받기를 잘하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우대하심에 부응하는 감정들이 그 속에서 강하게 자리 잡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와 그의 일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강하게 역사할 수 있겠는가? 사물의 본질 그 자체가 변화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일에 시간을 드리지 않고서는 거룩에 있어서 진전을 이룰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주는 진리인 것이다. 이 진리를 마음에 담을수록 이 진리와 교감하며, 그 의미를 깨우치고 우리 자신의 경우에 적용시키며 그 원리들을 수용하고 그 동기를 인식하며 그 약속에 기뻐하며 그 경고에 덜며, 그것에 영향을 받아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로 올라갈수록 더욱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선한 것을 분별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건에 뛰어난 사람들은 언제나 기도의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묵상의 사람들이었고 온갖 기쁨과 슬픔이 있는 세상의 영향에서 마음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과 계명과 약속들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진리에 대한 묵상 이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예배는 모든 경건한 감정을 시행하고 표현하는 것만은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교제를 유지하며 그의 은혜를 전달받는 지정된 수단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1)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4,7) 이것은 계시의 문제요 동시에 체험의 문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그들의 영의 아버지께 사적으로 공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일이 그들의 영적 힘을 새롭게 하는 주요 수단임을 깨달아왔다.
성소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선정이요, 성소의 예배는 손으로 지어지지 않은 하늘에 속한 영원한 성전의 예배를 미리 예비하는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은혜의 수단인 성례가 여기서도 적절한 위치를 차지한다. 옛 경륜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생제사와 의식들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성례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일에 계속 발전하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
게 드리는 모든 지정된 예배의 형식과 예배의 기회에 신실하게 참석하는 법이다. 홀로 골방에서도 늘 예배하며,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성찬에 시강ㄴ을 엄수하여 참석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사람이 친한 친구와 교제 나누기를 바라고 애쓰듯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회를 구하고 찾을 것이다. 이러한 예배를 많이 나눌수록 하늘의 복락 가운데서 빛의 아버지와 나눌 완전한 교제를 더 잘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선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한다. 행동이 웅변의 전부라는 말이나, 행동이 신앙의 전부라는 말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생각과 감정의 표현이 아닌 행동은 결코 웅변이 될 수없고 경건한 마음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지 않는 행동에는 신앙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유지되어야만 비로소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의미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나타나는 악한 성향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신앙을 문 바깥으로 밀어내고 집안에 들이지 않고, 거리나 공중 집회나 묶어두며, 떠들썩한 겉치례와 겉으로 드러내 보이는 흥분 이외에는 아무 음식도 주지를 않는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신앙의 힘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신앙의 힘의 근원을 잘라버리는 것이요 하늘에서 온유하고 거룩한 방문객을 시끄럽고 왁자지껄한 이 땅의 거민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과도 같다. 속으로 신앙이 있기보다는 겉으로 신앙이 있는 체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 마음을 부지런히 다스리기보다는 교회의 임무들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의 참 능력보다 신앙의 겉모양을 더 좋아하는 오류에 빠질 위험이 다분하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열심 있는 것을 좋아하고 바쁘기를 바라기 때문에 세상적인 일에도 아주 적극적으로 임하는데 이런 성향이 전혀 성격이 바뀌지 않은 채로 종교적인 활동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은 이와 정반대족에도 상존하고 있다. 신앙이 외형적인 행동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은 언제나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3:17).
어머니의 사랑이 반드시 어린 아기를 돌보는 행동으로 이어지듯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반드시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오로지 자기의 구원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과 관련된 행동만을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모든 관심을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제한시킨 나머지 한평생을 머뭇거리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모든 은혜들, 곧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사람을 향한 공의와 자비를 조화 있게 시행할 때에 비로소 영혼의 건강이 유지되고 촉진될 수 있는 것이다. 선을 행하면 사람이 더 나아지는 것이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자비의 원리가 강화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을 주는 사람이 또한 스스로 물을 받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셨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형제들의 육신적 영적 유익을 위하여 노력하는 자들에게, 구속자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대로 참된 신앙은 겉으로 과시하는 것도 아니요 감정으로 폭발적으로 분출시키는 것도 아니다. 참된 신앙은 영구하며 자발적이며 발전하는 영적 삶의 원리로서 전인(全人)에게 영향을 미치며, 온갖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참된 신앙이란 어느 한 가지 선한 성향이 아니라, 모든 올바른 감정과 행동의 뿌리요 샘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에서 사람을 향한 정의와 자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적절히 운영하는 데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신적인 생명은 이성이나 노력으로나 어떠한 미신적인 행동으로 얻어지거나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명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그의 모든 지체들 속에서 거하게 하셔서 이러한 생명을 얻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 신적인 생명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은혜의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하며, 또한 성령의 거룩한 영향력을 마음에 기리게 해주는 모든 일을 행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바로 영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진리를 묵상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우리의 모든 상대적인 의무들을 수행하는 가운데 모든 거룩한 기질들을 실천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세상을 버리고 우리 스스로 주님과 연합하고 나면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일이 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중생으로 시작된 영적 삶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속 지속된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 안에 거하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셔서 형편에 따라 필요한 모든 은혜와 보호하심을 그들의 살아 게신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구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한 우리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씻음을 얻고 거룩함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리고 빛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기업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만들어져서 결국 하나님의 그 복된 임재 속에 들어가게 되며, 그의 은혜와 사랑의 충만한 교제를 영원토록 누리게 되는 것이다.
핫지는 구원론적 결론이 인간론의 전제에서 발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구속관의 결여는 부당한 죄관이 정정되기 전에는 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의 뿌리이며, 확고한 원리이다. 핫지의 생각은 신학파 신학자들의 생각과 차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신학파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실 때 형벌을 사용하시지만 그 목적은 죄를 금하고 죄인들을 바로 잡으시는데 있다고 믿었다. 이런 태도는 자연히 존재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며, 성결은 단순히 행복을 쟁취하는 최선의 길일 뿐 이라는 전제를 낳는다.
그래서 핫지는 “우리는 성결이 수단 그 이상의 어떤 것이며, 행복해지는 것이 거룩함의 목적이나 이유가 될 수 없으며, 기쁨이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이것은 상업적인 용어로 윤리적인 선택을 보는 결과를 낳는다. 선택하는 것은 타고난 권리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유익을 산출하고 손실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덕은 보편적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 단지 행복의 수단으로 전략하기 때문에 그 지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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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핫지(Charles Hodge)의 신학학문론을 중심으로 본
프린스톤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간의 상호 연계성에 대한 고찰
-정관섭 교수
차 례
서 론 ............................................................................................................................... 1
본 론 ............................................................................................................................... 2
1. 신학의 학문성 .............................................................................................................. 2
2. 찰스 핫지의 신학 학문론 ............................................................................................... 4
3. 프린스톤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관계 ................................................................. 6
3.1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프린스톤 신학에 접목되기까지의 역사 ........................................ 6
3.2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란 무엇인가? ............................................................................. 8
3.3 프린스톤 신학에서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 ........................................................ 9
3.4 보론 : 프린스톤과 미국의 계몽주의 ............................................................................ 11
결 론 ............................................................................................................................. 12
서 론
불과 40년 전, 예일 대학의 역사학 교수 시드니 알스트롬(Sydney Ahlstrom)이 1955년 Church History지 에 발표한 한 논문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미국 신학 간의 연계성을 처음으로 언급한 이래, 이 논제는 복음주의 신학계에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이 논문에서 알스트롬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은 칼빈의 영향을 무시하였으며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영향으로 신합리주의를 낳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따라서 구프린스톤의 신학자들은 순수한 개혁주의 전통을 변질시키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미국의 근본주의 역사가 어니스트 샌딘(Earnest Sandeen)에 의해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샌딘은 자신의 주저, The Roots of Fundamentalism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헬벡 신앙 고백을 작성한 툴레틴과의 연계성을 주장하였으며, 더 나아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으로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1881년에 성경의 무오성 교리를 만들었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샌딘의 주장은 또 다시 로저스(Rogers)와 그의 제자 맥킴(McKim)에 의해서 한 차원 더 발전되었다. 로저스와 맥킴은 그들의 주저, The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of Scripture에서 샌딘의 주장을 따라 성경의 무오성 교리가 19세기 프린스톤 신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교리이며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성경의 권위를 구원의 영역뿐만 아니라 과학과 역사적인 면에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보는 성경관은 최근의 현상이며 전통적인 성경의 권위는 구원과 행위에 제한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오(Inerrancy)가 아닌 불오(Infallibility)가 적합한 개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프린스톤 신학 간의 연계성을 널리 확산시킨 인물은 역사신학자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이다. 그는 자신의 주저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개혁주의 신학, 특별히 프린스톤 신학을 지배하였다고 보았다.
"인간의 지성은 영적인 분야에서 맹인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은 성경 저자의 유오한 견해가 반영된 것으로 보지 않고, 성경을 사건 자체에 대한 성경 저자의 무오한 증거로 보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마스덴은 성경의 무오 교리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만들어 낸 교리라고 주장한다.
인류의 전적 부패라는 칼빈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면 성경은 유오할 수밖에 없는데,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성경을 보는 관점에 반영되어 성경 무오를 낳았고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반진화론 사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스덴은 성경의 완전무오성 대신 성경의 정확성을 단지 신앙과 행위에만 제한시키기 위해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정확 무오'를 주장한다.
이처럼 프린스톤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간의 연계성에 관한 논제는 복음주의 신학계에서 일련의 커다란 쟁점으로 비화되었는데, 이 쟁점은 비단 조직신학계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신학계, 그리고 신약신학계에까지 널리 확산되었다. 그리고 한 신학 학파와 한 철학 학파 간의 연계성을 넘어서 이 쟁점은 성경 영감론에 대한 근본적인 재물음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논제가 자유주의와 복음주의 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복음주의 좌파와 우파 간에 일어난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신학지남]을 통해 이 논제에 관한 글이 발표되었는데, 1989년 권성수 교수가 "성경무오에 관한 7대 오해"라는 소논문에서 '구프린스톤의 신고안'이라는 소제로 이 쟁점을 다루었으며, 1994년에 박용규 교수가 "프린스톤 신학과 보편실재론"이라는 소논문에서 마찬가지로 이 쟁점을 보다 폭넓게 다루었다. 한 가지 공통적인 점은 이 두 교수의 입장이 모두 복음주의 우파의 견해를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 졸고에서는 이미 활활 타오른 프린스톤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간의 연계성이라는 논제를 다시금 취급하고자 한다. 그러나 지면 관계상 이 논제를 가장 확연하게 보여주는 프린스톤 신학자인 찰스 핫지(Charles Hodge)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신학의 학문성에 대한 서론적인 언급을 다루고, 다음으로 찰스 핫지의 신학 학문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찰스 핫지의 신학 학문론을 중심으로 프린스톤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철학 간의 연계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론
1. 신학의 학문성
신학의 학문성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과연 신학이 학문이 될 수 있는가?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 신학과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학문은 드물 것이다. 철학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구약 성서의 역사까지 고려한다면 신학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중세기에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고 불리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서구에 있어서 대학이 처음으로 설립되었던 14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신학과를 가지지 않은 대학은 설립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신학과를 가지지 않는 대학교가 다소이지만 설립되었다. 그 대신 신과대학이 단독적으로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신학의 학문적 성격, 곧 학문성이 점차 의심스럽게 되었거나 부인됨으로써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룩한 교리를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13세기에 여러 가지 학과를 가진 대학이 설립되면서 그의 학문적 성격을 의심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자연과학이 크게 발전함에 따라 자연과학적 방법을 가지지 않은 학문의 분야들은 그들의 학문성을 의심받게 되었다. 무엇이 학문이며 무엇이 학문이 아닌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규범이 되는 것은 자연 과학의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사물들을 연구하는 분야의 학문들은 학문이 아니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신학이 의심을 받게 되었음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지만 철학도 이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철학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신앙 내지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적 방법이 주도하는 학문의 개념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변천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삶과 역사의 현실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이 현실의 모든 분야들이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서만 연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연과학적 방법 및 표상과 부합하는 학문만이 학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비판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딜타이(W. Dilthey)였다.
그는 자연 과학에 대한 정신과학의 차이를 주장하면서,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그의 대상으로 가진 학문들의 전체" 를 가리켜 정신과학이라고 하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정신과학은 분석적 연구 방법이 아니라 이해하는 연구 방법을 가진다. 정신과학의 출발점은 개인의 "심리적-물리적 삶의 통일성이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외계 전체가 주어져 있다. 이 삶의 통일성은 자연과학의 관찰 방법에 따라 파악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딜타이의 견해는 그 당시의 많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학문의 개념에 대한 토의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학의 분야에 있어서도 학문의 개념에 대한 토의는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그의 학문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토의의 중심점을 이루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신학자들의 입장은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입장이 계시신학의 입장이라면, 둘째 입장은 자연신학의 입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계시신학의 입장에 의하면 신학은 "신앙의 학문"이다. 이 학문의 연구 대상인 하나님은 경험적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그는 이세계에 대하여 초월하여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계에 속한 다른 사물들과 같이 하나의 학문적 연구대상이 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다른 사물들과 같이 인간에게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고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분석 및 파악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는 인간에 의하여 지배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하여 버릴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오직 "신앙의 대상"으로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그의 연구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 가운데서만,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 참여와 순종 가운데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신학은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특수한 학문"이다. 특수한 "신앙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주장하는 계시신학의 입장의 다른 한 가지 특징은 "교회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물론 자연신학의 입장도 신학의 교회성을 부인하 지 않으나 신학의 학문적 보편성을 강조하는 반면 계시신학의 입장은 신학의 교회성을 강조한다. 후자의 입장에 의하면 신학은 다른 학문들과 내면적 관계성을 가진 보편적 학문들 가운데의 한 분야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기 위한 "교회의 한 기능"이다. 바르트의 표현에 의하면, 신학은 "교회의 선포가 성서에 증언되어 있는 계시와 일치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자연신학의 입장에 의하면, 이러한 계시신학의 입장은 소위 말하는 학문의 보편성과 무제한성을 결여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를 신앙하는 사람에게는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인식될 수 있으나 그를 신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연구의 대상으로 인정될 수 없고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은 엄격한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현상과 연구의 대상을 전제하며 합리적 비판을 거부하는 절대적 권위의 내용들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계시신학의 입장은 비학문적인 입장이며 결국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자연신학의 입장은 비판한다.
이와 같은 반성 하에서 자연신학의 입장은 하나님을 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 안에서 인식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다른 학문들이 연구하는 현실의 모든 것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한다. 현실의 모든 것은 만물의 근원자인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원칙상 다른 학문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인식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신학과 일반 학문들은 대립 관계에 있지 않고 유기적인 전체에 속한다. 따라서 신학은 "특수한 학문"이 아니라한 "보편적 학문"으로 이해되며 학문의 세계에 있어서 그의 학문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찰스 핫지(Charles Hodge)의 신학 학문론
핫지는 자신의 주저,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서론에서 자신의 신학 학문론을 피력한다. 핫지는 프린스톤 신학을 확고한 철학적 신학적 토대 위에 두려고 시도했는데, 특히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과학적 방법론에 의존해서 그렇게 했다. 이것은 그의 [조직신학] 서론 첫 단락인 "방법에 관하여"(On Meth od)에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과학에 존재하는 두 가지 요소는 사실과 관념이다. 사실은 항상 특수적이고 일반 지식 속에서만 알려지지만, 관념은 항상 합리적이고 과학적 지식 속에서만 알려진다. 성경은 마치 자연처럼 본질에 있어서 과학적으로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성경은 체계적이 되는 모든 사실들을 포함한다. 자연적 사실이 화학자들에게 맡겨진 것이라면, 성경 진리는 조직 신학자에게 맡겨진 것이다. 성서 신학자는 이러한 진리들을 분명히 하고 공고히 하는데 반해 조직 신학자는 이러한 사실적 진리들을 정돈하고 증명하고 조화시킨다.
인간의 정신 구성은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사실들' 혹은 '고립된 사실들의 단순한 축적'만으로는 만족하 지 못한다. 인간의 정신 구성은 '고등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적 진리 체계의 획득을 요구한다. 또한 신학에서는 사변과 신비라는 a priori (연역적) 방법 대신, 귀납이라는 a posteriori (귀납적)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 잘 정립된 사실들이 수집되면 사실들의 일어남을 결정짓는 일반 법칙이 추론될 수 있다.
과학자들은 '감각 인지', '정신 작용' 그리고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이 아닌, 우리 본성의 구조에 주어진 그러한 진리들의 확실성이 믿을만하다고 당연시한다. 법칙은 인간의 정신으로부터 연역한 다음 외부 대상에 돌려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 법칙은 "대상으로부터 연유하고 연역된 것으로 정신에 새겨진 것이다."
이러한 경험적 방법은 신학자들에 의해서도 또한 사용될 수 있다. 자연이 과학자들의 소관(所關)이라면, 성경은 신학자들의 소관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정신 구조 속에 '믿음의 법칙', 어떠한 '객관적 계시'와도 모순될 수 없는 자명한 (즉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제일 진리'을 새겨 놓으셨다.
이러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개념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핫지는 성경적인 사고를 보여주었다.
자연과 인간의 정신 구조 속에 하나님 및 우리와 그 분과의 관계에 관해 계시된 모든 것은 성경은 내포되어 있으며 또한 인증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직 성경만이 개신교도들의 신조이다. 신학자들이 일종의 과학으로 환원시킨 진리들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외부 세계에, 우리 본성의 구조 속에, 그리고 신자들의 종교적 경험 속에 각각 부분적으로 계시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외부 세계로부터 추론함에 있어서 오류를 범치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이 드러내는 모든 것에 대한 보다 분명한 계시를 그의 말씀 속에서 소유한다.
신학자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 체계를 성경의 모든 사실로부터 끌어낼 때만이 이단을 모면할 수 있다. 혼란을 제거하는 길은 우리의 철학에 의해 성경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철학을 성경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이다. 이론이 사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이론을 결정한다. 이것을 무시하면 신학은 사변의 잡동사니로 전락하고 만다.
성경의 사실들은 인간의 직관적 진리와 성령의 가르침을 인증한다. 성경은 항상 자명한 진리이신 하나님을 인정한다. 이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을 범할 수 없는 분으로, 우리로 본성의 구조에 의해 어떤 사실을 믿게 해놓고선 성경 속에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사실을 믿도록 명령하는 그런 분이 아니다.
핫지는 이렇게 요약한다.
그러므로 철학의 참된 방법은 귀납으로, 성경이 신학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사실 혹은 진리를 포함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마치 자연의 사실들이 자연 과학의 내용이듯이 말이다. 또한 귀납은 이러한 성경적 사실들의 상호 관계와 그것들에 연루되어 있는 원리들, 그리고 그것들을 결정짓는 법칙들이 사실 자체 속에 있으며, 또한 사실들로부터 연역된다. 마치 자연 법칙이 자연의 사실들로부터 연역되듯이 말이다. 원리들은 정신으로부터 이끌어내진 것이 아니며 사실과 별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원리와 법칙들은 사실들로부터 연역된 것이며 정신에 의해 인식된 것이다.
한편, 핫지는 신학에 적용시키는 귀납적 방법에 의해 성경을 "사실들이 모여 있는 객관적인 창고"라고 본다. 그는 인간이 가견적인 물질과 불가견적인 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가지고, 이와 동일한 주관과 객관의 이원론을 통해서 주관은 이성을 이용하여 사실들을 모으고 이성은 제공된 증거를 판단한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의 지식뿐만 아니라 신앙의 지식도 인간의 정신에 보여진 증거들위에서 인식된다고 하였다. 결국 핫지는 단순히 이성적인 논증에 호소하는 방법이 아닌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에 호소하여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그의 영감론의 출발점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저자이며,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성경이 진리라고 증언하는 것은 모두가 진리이며, 성경이 옳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옳으며 틀리다고 하는 것은 다 틀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핫지에 따르면, 영감이란 성령께서 성경의 저자들이 오류가 없이 전달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영감은 완전 영감이지 부분 영감이 아니다. 핫지는 영감의 영향과 그 결과를 다음 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영감이란 성경의 저자들이 진리를 오류가 없이 전달하는 데 필요하다. 둘째, 영 감된 저자들은 성경을 기록하는 작업에 한해서만 무오하다. 셋째, 영감은 성경 저자의 의식을 파괴하지
않는다. 여기서 성경 저자들을 기계처럼 사용하였다는 기계적 영감론을 부인한다. 넷째, 성령의 지도는
성경 저자의 사상 그 이상이다.
핫지는 주장하기를, 영감은 완전하기 때문에 영감은 성경 전체에 미치며, '도덕적 종교적 진리'뿐만 아니라 '과학적이든 역사적이든 지리적인든 간에 사실들의 진술'에까지도 미친다고 했다. 그것은 또한 사실과 관념뿐만 아니라 단어에까지도 미친다. 그러나 이러한 영감은 성경의 원본에만 해당된다.
위에서 고찰한 것처럼 핫지는 자신의 책 [조직신학]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깔고 그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과학적 귀납주의와 성경 영감론이라는 상호 의존적인 두 가지 방법론에 의해서 결정되었는데, 전자는 후자 속에 암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핫지는,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를 위한 과학적인 체계적 지반으로서 또한 성경의 최상적인 권위를 설명하기 위한 완전한 자료로서 '인간은 누구나 실재 세계를 직접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상식철학의 기본 입장을 채택하여 자신의 신학적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확신이며, 그 확신은 반드시 이성적 기반 위에서 서 있다고 보는 철학적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3. 프린스톤 신학과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관계
3.1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프린스톤 신학에 접목되기까지의 역사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프린스톤 신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식 되어 왔었지만 1955년 시드니 알스트롬(Sydney Ahlstrom)이 이 주제에 관한 논문을 출판할 때까지는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 후 구프린스톤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상당한, 심지어 독특하게 빚을 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서론 부분에서 대략 다루었으므로 상술하는 것은 생략한다. 그렇다면 구프린스톤은 어떻게 해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빚을 지게 되었는가?
시드니 알스트롬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구프린스톤에 영향을 미친 것은 스코틀랜드의 영향 력 있는 목사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이 1768년 고향을 떠나 프린스톤의 전신인 뉴저지(New Jersey) 대학의 학장이 되면서이다. 위더스푼은 학생들을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확신을 갖고 훈련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계보는 윌리암 그래함(William Graham)을 거쳐 프린스톤 신학교의 첫 교수인 아취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에게 전수되었다. 그래함이 알렉산더에게 가르친 것은 자신의 체험적 신앙을 옹호한 나머지 습득한 권위를 신뢰하지 않도록 자신을 점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곧 그래함의 교훈을 넘어 역사적 칼빈주의의 중요한 표현을 포용하였다.
그래함 밑에서 연구를 하면서 위더스푼이 프란시스 헛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과 토마스 리드(Thomas Reid, 1710-1796) 같은 스코틀랜드 사상가들로부터 빌려온 원리들 중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이들 철학자들은 아이삭 뉴톤(Isaac Newton)과 존 로크(John Locke)의 영국 '온건파' 계몽주의를 데이빗 흄(David Hume)의 회의주의와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의 관념주의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알렉산더가 이들의 입장을 표현하게 되면서 그들은 "보편 상식"은 "도덕 의식"과 같이 육체적 의식과 직관의 전달을 입증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신학교의 초기 강연들과 사후에 책으로 출판된 그의 노년의 강연에서 예시되었듯이 알렉산더가 이 '보편상식'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 계시의 실체에 관한 확고한 변증학적 초석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위더스푼, 그래함 그리고 그들의 스코틀랜드 스승들과 같이, 알렉산더는 경험주의와 귀납적 방법에 대해 열정적이었다. "자연철학자들"의 방법들은 모방하는 면밀한 탐구는 마치 위대한 뉴톤이 물리적 세계를 연구하듯이 윤리학과 신학을 성공적으로 연구하도록 만들었다.
찰스 핫지는 알렉산더와, 젊은 시절 자신의 목사이며 자신이 프린스톤에서 연구를 시작하던 1812년에 프린스톤 대학의 학장이 된 애쉬벨 그린(Ashbel Green)으로부터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프린스톤 대학에서의 그린의 중요한 교육적 변화란 대학생들을 위한 주 교재로 위더스푼의 도덕철학 강의를 다시 채택한 것이었다. 알스트롬은 "핫지의 윤리학의 기초와 자연 신학의 개념은 ...칼빈주의라기보다는 스코틀랜드적이다"고 주장한다. 핫지가 스코틀랜드 철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의 [조직신학] 서론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그는 교의학 체계의 구성을 과학적 탐구와 연계시켰다. "성경과 신학자와의 관계는 자연과 과학자와의 관계와 똑같다. 성경은 사실의 보고(寶庫)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분별하기위해 채택하는 방법과 똑같다."
한편, 찰스 핫지의 후계자인 워필드(B. B. Warfield)는 스코틀랜드 철학을 스코틀랜드 철학 체계의 최후의 변호자인 제임스 맥코쉬(James McCosh)로부터 배웠다. 제임스 맥코쉬는 위더스푼이 1세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1868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프린스톤의 학장으로 발탁된 인물이었다. 워필드는 복음주의 개신교의 대량의 지성적인 횡령을 포함하여 알렉산더나 핫지 당시와는 다른 형태의 도전에 직면하여, 역사적 기독교의 현대적 변형의 오류를 반대하여 수백 개의 논문과 수천 개의 서평을 썼다. 그의 지성은 식별력이 있었으며 그의 가슴은 역사적 칼빈주의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은 구프린스톤의 마지막 주자요 신프린스톤 태동의 산 증인인 그레샴 메이첸(Gresham Machen)에게까지 미쳤다.
3.2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란 무엇인가?
3.2.1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태동 배경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인 존 낙스(John Knox)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성한 후 스코틀랜드를 장로교 국가로 만들었다.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프랑스나 영국으로부터 고립된 채 존재하여 왔다. 그러나 1707년 스코틀랜드가 영국과 연합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교회에 유럽의 새로운사상, 특별히 계몽주의가 직접 간접으로 스코틀랜드 교회에 소개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유럽과 영국에서는 종교개혁 시대가 지나면서 이성주의가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톤에 의해 발달된 과학적인 방법이 합리주의의 발흥을 촉진시켰고,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는 전통적인 통념에 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 철학은 단순히 사상의 영역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존 로크는 뉴톤의 과학적인 방법을 인간 지성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런 그의 개념은 보편상식론의 개념을 발달시켰다. 과학적 합리주의적 접근은 그의 "기독교적 합리성"(The Reasonableness of Christianity)에 잘 반영되어 있다.
새로운 사상의 유입은 자연히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두 조류의 집단을 형성시켰다. 첫재는, 구칼빈주의를 고수하려는 복음주의자들과 둘째는, 자연 신학을 강조하는 좀더 합리적인 중도파였다. 상식철학은 중도파에서 발생한 것이다. 자연히 이 둘은 대립과 주도권의 다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투쟁의 결과 중도파가 승리하였고, 이들이 스코틀랜드의 대학들을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상식철학은 계몽주의와 18세기의 스코틀랜드 르네상스에서 꽃피운 철학"이었으며, 중도파가 기성의 스코틀랜드 교회를 장악하면서 발전되 었던 철학 사조였다.
3.2.2 토마스 리드(Thomas Reid)와 그의 상식철학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가장 뛰어난 인물은 토마스 리드(Thomas Reid)였다. 그는 [보편상식의 원리에 대한 인간 지성의 연구](An Inquiry into the Human Mind on the Principles of Common Sense)라는 책을 통해 데이비드 흄의 회의주의를 비판하였다. 흄은 이성과 경험 양자 모두에 의한 어떤 종류의 인식 가능성도 부정했다. 리드는 흄의 가정(假定)인 관념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것도 그것을 지각하는 정신 속에 있는 것 이외에는 지각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외부에 있는 것들을 정말 지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의 정신 속에 새겨진 그것들의 어떤 영상(影像)이나 심상(心像)을 지각할 따름이요, 우리는 이것들을 인상(印象)과 관념(觀念)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리드는 위의 책을 통해 흄의 회의주의를 공격하면서 실재론적 인식론을 주장하였다. 즉 경험과 이성에 의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리드는 이렇게 주장한다.
"지각은 감각이 가진 것 전부를 가졌고 또 그 이상의 것을 가졌다. 그것이 감각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대상을 직접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앞에 가지고 있으며, 이 대상을 통하여
정신 활동은 일어나는 것이다. 대상은 여기서 추리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소여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 외부에 있는, 그리고 그 존재가 결코 우리의 정신에 의존해 있지 않은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품을 여지가 없다. 그리고 또 우리가 외부 세계 안에 있는 어떤 물건들을 지각하는 까닭에, 우리는 이 외부 세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의 얼마를 안다. 그리고 이 지식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리드는 인식론적 상식을 강조하고 당시의 조류에 따라 베이컨과 뉴튼의 과학적 경험적 인식론을 수용한 다. 알스트롬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들은 인간의 정신적 및 도덕적 능력을 물리적인 용어로 환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리고 인간 기능의 특성을 분류함으로 인간의 경험을 내향화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리드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자들은 인간의 기능 혹은 인간의 참된 능력을 발견한다. 첫째는, 합리주의적 자유...둘째 자증적 도덕 직관을 가능케 하는 능력, 더 나아가 경험보다 선험적인 원리를 발견하여 인간은 사상적인 중재 없이도 객관적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리드에 따르면, 상식철학은 다음 몇 가지로 분류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인식론적 보편 상식이다. 인식론적 보편상식이란 우리의 지각은 실제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밝혀준다는 것이다. 리드는 이성과 경험에 의한 어떤 지식의 가능성도 부정하는 흄의 회의주의를 '인식론적 보편실재론'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공격하였다. 리드에게 있어서, 인과관계는 보편상식의 첫번째 원리로서 필수적인 진리였다. 우리가 지각한 것은 정확하게 우리의 지각의 대상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또한 리드는 일종의 언어적인 인식론과 세계관을 주장한다. 우리의 지성의 모든 활동 작용은 언어로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언어는 단순히 실체에 대한 관찰자의 반응의 표현이 아니라 세계를 실제 존재하는 그대로 충실히 반영한 것이다.
둘째는 방법론적 보편 상식이다. 이 사상은 세계와 종교에 관한 진리는 경험적인 사실로부터 오는 엄격 한 과학적인 귀납법에 의해 확인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모든 진리는 경험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셋째로는 윤리적인 보편 상식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인간 존재는 직관적으로 어떤 물리적인 세계의 기초적인 실체를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떤 도덕성의 근본적 원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리드의 이러한 상식철학은 에딘버러 대학의 도덕 철학 교수였던 그의 수제자 두갈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에게 전수되어 두루 영향을 미쳤다.
3.3 프린스톤 신학(핫지의 신학)에서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분명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먼저 진리란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이기 때문에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오직 한 가지 메시지만 전달한다고 보았다. 또한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계시되었든 자연에서 계시되었든 간에 영원한 진리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진리가 귀납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베이컨적 사상은 당대의 미국 과학계를 지배하였는데, 이런 사상은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글에서 상당히 자주 발견된다. 베이컨적 원리를 따라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사실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것이 과학의 적절한 기능이라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과학과 신학의 유추를 통해 신학 작업을 하였다.
이러한 신학 작업을 가장 확연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이다.
만약 자연과학이 자연의 사실 및 법칙들과 관련된 것이라면, 신학은 성서의 사실 및 원칙에 관련에 것이 다. 전자가 외부 세계의 사실들을 정리하여 체계화시켜 그렇게 적용하는 법칙들을 찾는 것이라면, 후자는 성서의 사실들을 체계화시켜 이같은 사실들이 작용하는 원칙과 일반적인 진리를 알아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두 번째 원리, 곧 "방법론적인 보편상식"을 볼 수 있다. 프린스톤 신학은 이성을 하나의 방법론적으로 볼 때 자의적(自意的)인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샌딘(Sandeen)이 지한 바와 같이 칸트의 사고의 영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성서의 자료는 신학자가 원칙과 일반적 진리를 차출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서처럼 외부 세계의 사실로부터 어떤 법칙을 차출해 내는 것과 같은 원리를 적용시킨 것이다. 사실은 인간 지성이 인식하는 범주를 그 위에 적용시킨 다음에야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칸트의 이성 비판은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성서의 '사실'에 적용시킬 경우 이성은 결론을 차출하며 일반적인 원칙을 형성하며 또 의미와 암시를 결정하는 데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방법론적인 보편상식"의 원리가 지배한다.
한편, 1857년 한 논문에서 찰스 핫지는, 앞에서 이미 개관한 대로, 영감론이 성경 저자의 사상뿐만 아니라 그들의 언어까지 확대된다고 보았다. 성경 저자들이 정확한 언어를 선택하도록 영감하셨기 때문에 성령은 기록의 정확성을 보장한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기록된 성경의 모든 사실은 진리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A. A. 핫지와 워필드의 공동 작품인 "영감론"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이런 그의 영감론은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첫 번째 원리 곧 "인식론적 보편상식"이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즉, 우리의 지각은 외부세계의 관념(idea)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물체 자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상식철학자들은 보았기 때문에, 핫지를 위시한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이런 사상을 수용하여 성경을 "과거 자체의 무오한 반영"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성경은 역사적인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오류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으로부터 받은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영향은 완전하지도 않았고 충분히 이해되지도 않았다. 스코틀랜드 철학의 인식론적 및 방법론적 측면에 대한 몇 가지 유보 사항을 은닉했으며, 또한 그들은 중요한 교리에서 상식철학을 세 번째 원리인 윤리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규칙적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마크 놀(Mark Noll)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당대의 뉴잉글랜드의 신학은 좋아하지 않았다. 뉴잉글랜드 신학자들은 사실상, 팍(E.A. Park)의 말을 빌리면 "인간 신앙의 근본율"에 기초하여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전통적인 개혁주의
관점을 변경시켰다. 많은 교회의 선열들이 과소평가하여 온 "윤리적인 원리"는 "보편상식 철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에 관한 칼빈주의 신앙을 압도하거나 이따금 밝혀지지 않은 "성경의 선언들"에 대한 그들의 절대적 확신과 대치시킬 만큼 승리감에 도취되지는 않았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보편적인 인간의 능력에 관한 스코틀랜드 신앙을, 인간의 도덕성에 미친 타락의 결과 및 인간의 전적 부패에 관한 개혁주의 확신과 서투르게 혼합시켜 윤리의 일차적인 원리를 논함으로써 물을 흐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대한 프린스톤 신학의 영향과 관련하여 다시 한번 마크 놀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다.
프린스톤 개혁주의 확신에 이 18세기 철학적 입장이 첨가되면서 그 결과는 항상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의식의 전달을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직관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확신하고 있었다. 일련의 변증적인 추론(reasoning)은 탐구자의 도덕적 선결 조건과 탐구의 목적에 대한 선결 전제가 없이도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순진하다. 그리고 비록 그들의 칼빈주의는 반대 방향을 지적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철학적 충심은 때때로 과학적 실증주의자들과 비슷한 인상을 남겨 놓았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받은 상식철학의 영향은 테일러(N.W. Taylor)가 그랬던 것과 같이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완전히 재구성하는 데까지 인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그들의 풍부한 전통적 개혁주의 신앙에다 상식철학 철학을 첨가시킨 것이다. 그 결과 테일러의 뉴헤이븐 신학보다는 내적으로 더 강하고 방법론적으로는 덜 엄격한 체계를 만들었다.
3.4 보론 : 프린스톤과 미국의 계몽주의
조지 마스덴은 자신의 책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Understanding Fundamentalism and Evangelicalism)에서 유럽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발흥한 미국 계몽주의와 프린스톤 신학의 관계성을 분석하고 있다. 이는 프린스톤 신학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게 된 배경을 보충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있다. 마스덴은, 아브라함 카이퍼와 워필드가 모두 강력한 칼빈주의적 유산을 가진 나라에서 성장했고, 두 사람이 모두 관용과 종교적 다원주의를 지지한 초기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두 사람이 모두 계몽 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정치적으로 혁명의 시대를 겪으면서 변화된 자들이었다는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큰 차이점이 발견되는 이유를 문제로 제기하면서 그에 대해 이렇게 분석한다.
그것은 화란에 있어서 계몽사상은 17세기 이래 세속주의와 관계되어 왔기 때문에 화란의 칼빈주의자들은 1790년의 화란 혁명을 불란서 혁명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했고, 따라서 "배교적인" 혁명으로 규정했지만, 미국에 있어서는 칼빈주의자들과 그들의 복음주의적인 동료들이 미국 혁명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계몽사상과 과학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불란서 혁명 직후 얼마동안 가장 명망이 높던 예일대학 총장 티모시 드와이트를 위시한 미국의 일부 칼빈주의 지도자들은 계몽주의적인 '배도'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이름으로 반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와 같은 드와이트의 입장의 잔재가 그 다음 세기에도 계속 살아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계몽사상'을 '합리주의' 또는 '회의주의'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 때문에 진정한 양상을 잊어버리면 안된다. 계몽주의가 합리성과 과학적 사고에 관하여 보여준 태도에 관한 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계몽사상의 대가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18세기의 관점의 일부 다른 경향에 대하여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조지 마스덴은 미국 내에서 발견되는 계몽주의의 이같은 이중적이지만 긍정적인 관계를 명확히 이해시 키기 위해서 헨리 메이(Henry May)가 제시한 미국 계몽주의의 몇 가지 양상을 소개한다. "메이에 따르면, 미국에 영향을 끼친 유럽의 계몽주의는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질서, 균형, 종교적 타협의 이념들을 중시하는 뉴톤과 로크의 초기 온건한 계몽주의이다. 둘째는 볼테르와 흄으로 대표되는 회의적인 계몽주의이다. 셋째는 루소의 사상에서 자라난 것으로 지상 위에 천상을 이루려고 추구하는 혁명적 계몽주의이다. 넷째로는 회의주의와 혁명은 반대하나 과학, 합리성, 질서, 기독교 전통을 중시하는 18세기초의 신념의 정수들을 간직한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분파라고 할 수 있는 교훈적 계몽주의가 있다."
조지 마스덴은 이 네 가지 유형의 계몽주의 가운데 단지 첫째와 넷째만이 미국에 대하여 지속적인 영향 을 끼쳤다고 설명하면서, 이것이 어떻게 프린스톤 신학과 연게되었는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의 혁명은 주로 아담스와 메디슨 같은 온건한 계몽주의 지지자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페인과 제퍼슨의 계몽 사상과 같은 급진적인 혁명적 사상들은 잠시동안 의미를 가지고 있긴 했으나 많은 영향력 있는 단체들은 불란서 혁명과의 연관성과 페인의 회의주의는 미국 문화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오히려 스코틀랜드의 교훈적 계몽주의가 종합을 위한 기초를 제공했다. 스코틀랜드 철학의 원리들에 따라서 미국 사상의 세 가지 흐름들, 곧 현대의 경험적인 과학적 이념들, 미국 혁명의 자증적 원리들, 복음적인 기독교는 조화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조화된 상태로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는 미국에서 현저하게 살아 남아 19세기의 처음 6,70년 동안 미국의 학계를 지배했다.
그런데 유럽의 상황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고전적 계몽주의의 중요한 한 가지 요소가 살아남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성경적이고 보수적인 보수주의와 긴밀하게 연대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살아남은 은 계몽주의 그 자체에 대한 명시적인 헌신이 아니라 대다수의 18세기 사상가들이 확신을 가지고 외쳤던 경험주의적 기초를 가진 합리성의 근저를 꿰뚫고 흐르던 일반적인 철학적 기초에 대한 헌신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이 관찰한 바와 같이, 19세기 전반부 동안에 아이삭 뉴톤과 프란시스 베이컨은 복음주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위대한 신앙의 영웅으로 통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복음주의가 전성을 이루던 시대에 있어서 객관적인 과학 사상은 세속주의를 산출해 낸다는 죄를 뒤집어 씌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친한 기독교 신앙과 문화의 친구로서 과감하게 찬양을 받았다.
결론 - 논제 재(再)제시 및 해결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우리는 찰스 핫지로 대변되는 프린스톤 신학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아냈다. 또한 프린스톤 신학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 근거해서 성경 완전 무오를 확증하고 있음도 보았다.
그렇다면, 서론에서 문제 제기한 것처럼,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은 어니스트 샌딘(Earnest Sandeen)이 처음 제시하였고, 로저스(Rogers)와 그의 제자 맥킴(McKim)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시하였으며, 조지 마스덴(George Marsden)이 공고히한 것처럼, 과연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은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교리인가? 이에 대해 박용규 교수는 이렇게 주장한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글에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과 베이콘주의 사상의 흔적을 그들이 사용한 신학 방법론이라는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그러나) 성경의 저자들이 영감의 영향 아래 기록하였기 때문에 기록된 성경이 무오하다고 보았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무오하다고 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단서를 보게 된다. 그것은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영향으로 비로소 성경 완전 무오 사상에 귀결된 것이 아니라 이미 소유하고 있던 성경 무오 사상에 대한 확고한 설명을 위해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의 신세를 입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권성수 교수나 박용규 교수가 모두 내세우고 있듯이, 성경 무오 사상은 프린스톤 신학자들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초대 교부들, 어거스틴(Augustine), 칼빈(Calvin), 청교도 윌리암 에임스(William Ames) 등은 바로 이러한 성경 무오 사상의 확고한 소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영감이 사상뿐만 아니라 언어에까 지 확대되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는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 과학, 그리고 연대기적인 면에까지 포 함된다'는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주장은 분명 그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성경 무오에 대한 보다 발전되 고 구체화된 독특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데이빗 웰스(David Wells)가 핫지에 대해 "그가 역사적 칼빈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논하였지만 칼빈이 결코 가르치지 않은 많은 것을 칼빈의 신학이라고 믿었음을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그는 계몽주의 철학인 보편실재론의 이점을 받아들였다. 핫지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것을 인식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라고 평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분명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세속 철학의 영향을 받아 정통 칼빈주의에서 벗어났다. 사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이 복음주의 좌파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을 피력함에 있어서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사용했으며,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이 사상적으로 난관에 봉착하면서 자연스레 그 공격의 화살이 이 철학을 사용하여 설명한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을 향했기 때문이다.
왜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이용하면서까지 성경의 무오를 소위 '축자영감설'(성경 완전 무오)이라는 교리로 만들었는가? 성경은 분명 성령의 감동으로 인한 성경 자체의 무오성을 말하고 있지만,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설명하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 대해 마크 놀은 흥미 있는 말을 해주고 있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으레히 성경이 일차적으로 교리의 형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가? 다른 개혁파 교회는 비록 교리를 싫어한 것은 아니지만 경건성을 고취시키고 문화적인 개혁을 지지하는 데 성경을 사용하였다."
우리는 프린스톤 신학이 교회 내로 밀려오는 고등비평의 물결에 대항하기 위해 강도높은 성경 영감론과 무오 사상을 피력했다는 점에서 이해와 찬사를 동시에 돌려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이용하여 설명한 그들의 성경 완전 무오 사상은 성경 자체가 말하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하나의 이론(a theory)이지 유일한 이론(the theory)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 자체가 말하는 성경의 무오성을 굳게 간직한 채, 성경 무오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늘 개방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복음주의 좌파가 던지는 문제 제기는 그러한 측면에서 받아들여야 할 도전이다. 동시에 그런 면에서 복음주의 우파의 반응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 문헌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3 vols, Grand Rapids: Eerdmans, 1946.
George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 The Shaping of
Twentieth Century Evangelicalism 1870-1925, New York: Oxford
Press, 1980.
W. Pannenberg, Theology and the Philosophy of Science,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6.
Earnest Sandeen, The Roots of Fundamentalism : British and American
Millenarianism 1800-1930,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Vander Stelt, Philosophy and Scripture : A Study in Old Princeton and
Westminser Theology, Marlton, NJ, 1978.
스털링 렘프레히트, [서양철학사], 서울:을지문화사, 1986.
조지 마스덴, [미국의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이해], 서울:성광문화사, 1992.
제임스 바, [근본주의신학],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마크 놀, "프린스톤 신학," [프린스톤 신학], 서울:엠마오, 1992.
데이빗 웰스, "찰스 핫지," [프린스톤 신학], 서울:엠마오, 1992.
권성수, "성경무오에 관한 7대 오해," [신학지남], 1989년 여름호.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 제1권, 서울:연세대학교출판부, 1986.
김균진,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개념에 대한 연구," [신학사상], 1984년 여름호.
박용규, "프린스톤 신학과 보편실재론," [신학지남], 1994년 가을,겨울호.
http://kr.blog.yahoo.com/mokpojsk/45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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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륜에 대한 핫지의 견해)
하나님의 경륜이란?
정진국 목사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자 된 나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을 것을 너희가 알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떤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엡 3:1-9)
하나님의 경륜은 성경(특히 신약 성경)의 중심 주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많이 다루어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가를 이번 강해를 통해서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경륜이란 단어의 성서적 고찰
단어적 의미
경륜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오이코노미아입니다. 영어로는 dispenation 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오이코노미아(경륜)는 헬라어로 가정이나 권속을 의미하는 (오이코스)와 법을 의미하는 (노모스)의 합성어로서 가정의 법 곧 가정행정을 의미합니다. 오이코노미아는 나눔 ,분배, 관리, 가정치리, 행정, 통치. 배역 등을 의미합니다.
▶ 이 단어의 뜻을 통해서 본 하나님의 경륜의 의미
① 하나님의 경륜은 가정을 다스리듯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정의할 수있다. (장두만)
②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풍성을 사람에게 생명으로 나누어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가정관리인 것이다.
성서적 용례를 통한 의미
신약 성경에서는 이 경륜이라는 말이 두 가지 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는 눅 16장의 비유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청지기가 그것입니다. 둘째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나타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영의 개념을 나타낼 때 이 단어가 사용되어졌습니다. 즉 이 말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집안의 일을 돌아보거나 감독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말로써(눅16장)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어지는 하나님의 경영이나 관리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정리
신학자 찰스 핫지는 이 단어에 다음과 같은 두가지 뜻이 내포되어있음을 지적했습니다.
①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계획과 경륜을 의미함.
②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의 직분과 관리를 의미함.
※ 이 용어에 대한 신학적 관심은 첫 번째 용법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륜자라고 할 때 경륜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의중에 가지고 계신 목적(혹은 뜻)과 그 목적을 이루시는 방법을 의미합니다.(신학사전)
성서에서 이 경륜이란 말이 사용된 용법에 근거하여 신학자들은 정의하기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개해 나가는 것 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학자들의 사상에 따라 그 뜻의 차이가 어느 정도 있기는 하나 대체로 이 말의 기본적인 뜻은 하나님이 그의 계획을 수행해 나감에 있어서 인간을 위한 그의 조치를 말한다.(기독교 대 백과 사전)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종합적 의미
(1) 하나님은 인간들을 창조하셨다.
(2)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지으실 때 어떤 목적이 있으셨다.
(3) 또한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놓으셨다.
(4) 성경은 그 목적과 계획을 이루는 방법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표현하였다.
(5) 즉 하나님의 경륜이란
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②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과
③ 그 계획을 성취하는 방법 곧 경영 전 과정을 의미한다.
http://blog.daum.net/timberkang/13209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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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 신학의 출현
이 세미나 페이퍼는 조직신학의 세미나
복음주의 신학을 이수하기 위한 것임
담당교수: 도한호
도학윤
침례신학대학교 M.Div., 1999.
1999. 12. 9.
목 차
서 론 --------------------------------------------------------- 1
. 근본주의 신학의 개념 ------------------------------------------ 1
1. 근본주의 운동의 배경 ----------------------------------------- 1
2. 근본주의 용어의 형성 ----------------------------------------- 2
3. 세대주의 영향 ----------------------------------------------- 3
. 근본주의와 미국 장로교 및 미국 침례교 --------------------------- 5
1. 근본주의와 미국 장로교 --------------------------------------- 5
2. 프린스톤 신학교의 변화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 -------------- 6
3. 근본주의와 미국 침례교 --------------------------------------- 8
. 성경관에 대한 고찰 ------------------------------------------ 10
1. 알취발드 알렉산드 ------------------------------------------ 10
2. 찰스 핫지 ------------------------------------------------- 11
3. 워필드 ---------------------------------------------------- 12
4. 그레샴 메이첸 ---------------------------------------------- 12
결론 ---------------------------------------------------------- 14
참고문헌목록 --------------------------------------------------- 15
서 론
종교개혁이후 신학의 역사를 개관하면 17세기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그대로 지키고자 노력한 정통주의의 시대이다. 그리고 18세기는 인간의 이성이 가지는 능력이 강조되며 계몽주의시대가 도래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개신교 자유주의 시대가 된다. 이때에 발전한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명명한다. 교수 목창균은 자유주의의 시작을 현대에서 종교가 어떻게 가능하며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하는 본질적인 질문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특정 신앙고백이나 신조에 종속되지 않고 그 시대에 적절하고 타당하게 만들려고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경험이나 정황에 둠으로써 인간 중심적 신학이 되었다.
자유주의는 동정녀 탄생과 예수님의 기적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등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부인한다. 자유주의는 성경의 영감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독특한 신성, 죄의 회개 그리고 개인의 부활과 같은 것들을 현대 문화에 내던졌던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19세기말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은 본래의 탄생 배경과 맞지 않게 여러 측면에서 오해와 괄시를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근본주의는 1900년에서 1930년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휩쓸었던 자유주의 물결에 대한 반대운동으로서 특별히 비일(D. Beale)은 근본주의의 형성과정을 두 시기로 구분했다. 첫째로 1857-1930년까지의 근본주의 운동을 비순응주의자(nonconformist)"라 하며, 둘째로 1930년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본주의 운동을 분리주의자(seperatist)"로 정의한다. 결국 비일(D. Beale)의 주장에 따르면 근본주의 운동의 시작은 19세기 중반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먼저 미국 내에서 근본주의 운동이 태동하기까지의 외적인 상황을 먼저 고찰하고자 한다.
. 근본주의 신학의 개념
1. 근본주의 운동의 배경
19세기말부터 미국 개신교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1861년 발발한 남북 전쟁 후 미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산업화와 함께 독일로부터 오는 고등비평과 영국으로부터 온 다윈의 진화론이 미국인들의 삶 전체뿐만 아니라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후반 미국은 농업국가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세계 주요 산업 강국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의 특징으로는 재벌의 증가와 이들을 통한 파급 효과이다. 반세기도 안되는 짧은 시간 안에 광대한 대륙에 철도가 종횡으로 개통되고 이를 따라서 사람들의 정착과 개발이 이루어졌다. 다행히 이런 일들을 수행한 재벌들은 충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이와 같이 재벌들의 축적된 부를 통하여 이미 설립된 교육기관에 관대한 기증이 시작됨으로 교육계의 지도력이 전환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미국사회의 변형은 주로 도시로의 인구이동, 이로 인한 도시의 급격한 팽창과 확대, 유럽으로부터의 이민 증가와 새로운 교단의 성립으로 설명된다. 특별히 도시의 성장은 남부보다는 북부에 두드러졌고, 이런 현상은 자연히 농촌 인구의 고갈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인구분포의 변화는 비단 농촌 인구의 유동뿐만이 아니라 이민 인구의 계속적인 증가도 한 몫 하였다. 더구나 해외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대부분 카톨릭 교도였으며 비영어권이었다. 그래서 1914년이 되어서는 카톨릭이 미국에서 단연 최고의 교파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미국인의 생활에 특히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미국은 세계사의 중심 무대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전쟁전의 미국은 수많은 다양한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큼 낙관적이었다. 미국의 이상주의와 기술에 의하여 정복될 수 없었을 만큼 심각한 도전은 없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신뢰와 도덕적 열정을 전쟁의 노력에 쏟아 부었으며, 결과적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성공은 대부분 전쟁에 국한되어 있었다. 일부 상반되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성화의 체험은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전쟁으로 인하여 급속한 세속화가 이루어지고 재즈(Jazz) 시대가 도래하였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은 승리로 종결되었으나 미국의 성전적() 열정은 교회 이상주의를 더욱 강화하였고 금주운동이 마침내 승리하여 1919년부터 발효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은 불안하였다. 러시아가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 적화되고 쿠 쿠룩스 클랜(Ku Klux Klan)이라는 반흑인 조직이 결성되고 후에는 카톨릭교도, 유대인, 비북유럽계까지 적대시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가 되어서는 세속화 현상이 밖으로 공개화 되기 시작하였다. 성()에 대한 이야기가 공공연해지고 선정적인 머릿기사의 타블로이드(Tabloid)판 신문이 1919년 시작되었다. 여성들이 공개석상에서 흡연하고 신교도에게 금기시 되었던 춤이 사회생활의 일부가 되고 심지어 교회의 청년 모임에까지 도입되게 되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미국 문화의 변질은 교회와 신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주었다.
2. 근본주의 용어의 형성
근본교리들(Fundamentals)이란 책자는 근면하고 관대한 평신도 기독인 실업가 라이만 스튜어트(Lyman Stewart 1840-1923)가 자기 소유의 출판사업을 태동시켰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근본교리들이다. 스튜어트는 1894년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하여 대표단 가운데 나타난 배교현상과 기독교에 대한 현대주의의 도전을 보고 이를 막고자 결심하게 되면서 딕슨(A. C. Dixon) 목사와 협력하여 근본교리들 12권을 한 질로 출판했다.
근본주의란 명칭은 자유주의가 근본원리(the fundamentals)로서 배척한 핵심적인 구속교리들을 습관적으로 언급하는 데서 발달된 것이다. 이 말이 사용된 것은 적어도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 해에 근본원리란 제목하에 복음주의 기독교를 해석하고 옹호하는데 기여하게 된 12권의 소책자 중 그 첫 권이 나왔다. 켈리포니아의 어떤 부유한 두 분 인사의 호의로 그 첫판은 영어 사용국의 목사, 전도사, 선교사, 신학생, 주일학교 교장, Y.M.C.A 및 Y.W.C.A 책임자들에게 주소가 입수되는 대로 무료로 다 보내어졌다. 결국 그것은 3백만부 이상 배부되었다. 이 책에 기고한 저자들 가운데는 오르(Adams orr), 워필드(B. B. Warfield), 앤드슨(Robert Anderson), 모올(H. C. G. Moule), 그리피드 토마스(W. H. Griffith Thomas), 토리(R. A. Torrey), 몰간(G. Campbell Morgan)등 같은 해박한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논문들 중 상당수가 학구적으로 철저히 다루어진 작품들이었다고 허버트는 그 평론에서 말하고 있다. 그 시리즈에는 논쟁의 내용이 된 근본 원리들에 대한 명확한 성경 해석들이 실려 있었다. 이 책들을 가지고 변증학자들은 그 근본원리에 반대하는 입장들과 그리스도의 능력에 관한 어떤 인상적이며 사사로운 증언들을 반대했다.
이와 같이 근본 원리들이 보수주의의 슬로건으로 사용된 것은 1910년 미 북장로교 총회에서 발간된 구원(Deliverance)이란 책자에서부터 였다. 이 때 근본원리는 출판 과정에 있었다. 이 책에는 신앙과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근본원리 들이 다섯 가지 조항으로 상세하게 열거되어 있었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예수님의 신성, 그의 동정녀 탄생과 이적, 우리 죄를 대신한 육체적 죽음, 그리고 육체적 부활과 승천, 이상 다섯 가지이다. 그 이후로 줄곧 미국복음주의자들은 근본원리라 하면 단지 이 조항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습관이 된 것 같다. 총회록이 약간의 수정과 첨가를 거쳐 최근의 근본주의 기관의 교리적 신조로 채택되었다. 이 기관들 중 첫째가 1919년에 결성되어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세계기독교 근본원리협회(World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였다. 1920년 북침례교 협의회의 복음주의자 대표 일단은 신약성서 신앙의 근본원리들을 재 진술, 재확인, 재강조 하기 위하여 그들 서로 예비회담을 가졌다. 그 후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발행한 침례교 잡지 파수꾼(Watchman-Examiner)에 실린 한 논문에서 근본원리들을 수호하기 위해 충성을 다해 싸우고자 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로 근본주의자들이란 명칭이 만들어졌다.
3. 세대주의 영향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또는 현대주의적 사조에 대한 반발로, 그들이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강하게 주장하는 근본적인 몇 가지의 교리 때문에 그러한 명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 근본주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신학 목록을 중심으로하는 하나의 신학적인 운동으로 보며 샌딘(Sandeen)과 같은 이는 신학 중에서도 영국의 전천년설을 그들의 핵심으로 보며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대표자인 다비(Darby)를 근본주의의 전형적인 인물로 본다.
하지만 허드슨(Hudson)은 근본주의 운동은 미국에 있어서 도시와 교외의 갈등이라는 상황을 배경으로 사회적으로 접근하기도 하며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이들도 있으며 반지성주의, 문화적 갈등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현대 신학, 자유주의, 현대주의, 특히 성서 해석에 있어서 고등 비평에 대해 극보수적인 반응을 보인데서 근본주의가 생겨났다고 보고 있다.
세대주의의 기원은 서로 이견이 있지만, 대개 19세기 초 영국의 형제주의 운동(Brethren Movement)을 주도했던 다비(J. N. Darby)에 의해 골격이 갖추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다비(Darby)는 세상의 역사를 일곱세대로 구분했다. 세대주의의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성경은 일곱 세대의 패턴을 통하여 모든 역사적 변화를 설명했다는 가정이다.
각 세대마다 하나님은 다른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인간을 시험하셨다. 인간들은 모든 시험에 실패했으며, 각각의 세대는 파멸적인 하나님의 심판으로 종결되었다. 첫 세대는 인간이 타락하여 죄에 떨어지고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남으로써 끝이 났고, 두 번째 세대는 홍수와 더불어 끝났으며, 세 번째 세대는 바벨탑과 더불어 끝났다. 우리는 여섯 번째 시대인 교회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 세대도 파멸과 하나님의 간섭의 날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7년에 걸친 전쟁과 재난의 날이 있은 후, 예수께서는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천년동안 다스린다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성경 특히, 예언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경의 무오류성을 진정한 신앙의 시금석으로 삼을 것을 가장 강조하는 계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서 들어온 이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전천년설은 예언을 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연구한 예언 수련회를 통하여 미국안에 확산되었다. 기차가 교통수단의 주종을 이루고 있던 시대에 새로운 휴가형태로 유행했던 여름수련회가 특히 효과적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드와이트 L, 무디가 세대주의의 체계에 대하여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세대주의 그 자체는 놀라운만큼 반현대주의적이었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세대주의는 현대주의의 반사체였다. 현대주의는 현대문화에 대하여 낙관적이었으나 세대주의는 비관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두 운동이 모두 성경과 역사와의 관계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현대주의는 인간역사라는 렌즈를 통하여 성경을 해석했으나, 세대주의자들은 오직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역사를 해석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근본주의 운동은 사경회 운동으로 번져갔고 특히 나이아가라 휴양지에서 모인 연례적인 성경 연구회는 가장 대표적이었는데 이 사경회 운동은 과학주의, 합리주의에 짓밟힌 성경의 권위를 되찾고 무시된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확립하자는 운동이었다.
. 근본주의와 미국 장로교 및 미국 침례교
1. 근본주의와 미국장로교
근본주의 논쟁이 시작된 1920년 초반에서 1929년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하고자 한다. 1920년대에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니고 많은 상황들이 전개되어 있었으나 본격적인 논쟁은 1920년에 시작되었고 극심한 대립의 양상은 1929년을 계기로 쇠퇴하였기 때문이다.
1910년 장로교 총회는 근본주의 5개 교리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1915년에는150명의 목사들이 근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Fundamentals)라는 글을 당시 총회장과 3명의 증경 총회장의 서명과 함께 총회에 제출하였다. 현대주의에 대한 미국내 근본주의의 대응은 분명해 보였고 활기차 보였다. 그러나 1921년 5월 침례교 목사인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은 뉴욕제일장로교회(Newyork First Presbyterian Church)에서 근본주의는 승리할 것인가? 라는 설교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본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포스틱(Fordick)의 의도는 교리나 신조보다는 교회론적인 면으로, 포괄적인 교회와 배타적인 교회를 구분하여 근본주의의 배타적이고 비타협적 교리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필라델피아의 아치 스트리트 장로교회(Arch Stewwt Presbyteiran Church) 목사 클라렌스 에드워드(Clarence Edward Macartney)가 불신앙이 이길 것인가?라는 제목을 붙인 설교로 응수하였다. 포스딕에 반대하는 메카트니는 보수주의 운동의 선봉에 서서 필라델피아 노회를 주도하여 뉴욕 강단에 대해 즉각 소송을 제기하도록 1922년 총회에 제의 하였다(포스딕은 장로교인이 아니었으므로 직접 그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결국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견지해 오던 5대 교리가 교회를 속박하는 역할을 한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대주의 신학에 신학적 논쟁을 벌인 보수주의의 대표자는 메이첸(J. G. Machen)이었다. 먼저 어번 선언(Auburn Affirmation)에 대하여 메이첸은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그는 어번 선언은 단순히 장로교 교리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의 특성에 관련된 모든 것을 반대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메이첸은 그의 저서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를 통하여 비록 자유주의가 관용을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기독교 내에는 자유주의를 위한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메이첸은 당시의 상황을 싸움의 시대로 정의하고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님을 천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자유주의 신학자가 기독교 교리를 하나씩 하나씩 적에게 내주고 나서 보유하게 된 것은 전혀 기독교가 아닌 별개의 범주에 속하는 전혀 다른 종교인 것이다. 실제로 어번 선언이 발표된 후, 기독교 세기 Christian Century 잡지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는 두 가지 별개의 종교들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양자간에는 더 이상 화합을 이룰 한계를 벗어났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두 세계가 충돌하였다. 근본주의자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요 현대주의자의 하나님과 다른 한 하나님이다. 두 세계의 생득적인 불일치는 상호관용의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라고 선언하였다.
메이첸의 저항이 있었지만 교계의 상황은 점점 더 현대주의에 유리하게 되었다. 1924년 미국 장로교총회는 총회장으로 포스딕의 설교에 대응했던 매카트니(C. E. Macartney)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비록 보수주의자가 총회장에 당선되었으나 어번 선언에 대한 문제를 무기 연기하게 되었고, 재판부에서는 교회가 구체적으로 교리적인 요강을 규정한 적이 없었기에 총회가 직분자들에게 교리시험을 실시할 권한이 없다고 판결하였다. 이것은 1910년, 1916년 1923년 5개 신조 선언을 공식적으로 반박한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보수주의자들 중에서도 중도파 보수주의에 의하여 자유주의의 승리가 촉진되었던 것이다.
1925년은 근본주의자들의 쇠락이 더욱 두드러진 해이다. 테네시주 데이턴(Dayton)에서 열린 세기의 재판, 즉 스콥스(Scopes)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실제로 근본주의 논쟁의 정점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1925년 봄 테네시 주에서는 가장 강력한 반진화론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은 공립학교에서 다윈설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제정되었다. 이때 스콥스는 주법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이때 기독교 측에서는 브라이언(William Jenning Bryan)이 반진화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재판의 결과는 브라이언의 참패였다. 대로우(C. Darrow)의 공세에 밀려서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전혀 대답하지 못하였다. 브라이언은 대로의 쉴새 없는 심리로 종교영역에서 그의 피상적인 사고와 부족한 준비를 드러내며 실수를 연발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전국으로 퍼지자, 근본주의자들의 무지와 고집스러움이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브라이언은 죽었지만 근본주의는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25년 총회는 오하이오 주에서 모여 어드만(C. R. Erdmans)을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근본교리들의 기고가인 어드만의 피선은 근본주의의 승리처럼 보였으나, 어드만은 본래 교리적 논쟁보다는 평화와 관용을 선호한 사람이었다. 어드만은 15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교단내 영적 상태와 불안 조성 원인을 규명하며, 이를 차기 총회에 보고하여 교회의 일치와 진보를 도모하려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1926년 총회에 이르러서는 어번 선언에 관하여 토의조차 하지 않고 논쟁의 유예기간을 가졌다. 그리고 1927년 총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대한 목사의 서명 수락 문제를 처리하며, 15인 위원회는 교회가 본질적 교리들을 정의한 적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1927년을 기점으로 미국 장로교회는 자유주의에 항거하거나 교회 자신의 신앙을 정의 내릴 수단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2.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의 변화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
프린스톤 신학교는 현대주의의 유입으로 미국 교계가 어려움을 겪을 때, 신학적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러기에 미국 장로교회에서 보수주의자들이 패배하고 자유주의가 승리함에 있어서 프린스톤의 역할과 위치, 신학적 태도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 교회가 현대주의에 서서히 젖어가자 프린스톤 역시 한 세기 이상 지켜 오던 신학흐름이 변질되었던 것이다.
1914년 관용주의적 보수주의자 스티븐슨(J. R. Stevenson)이 학장이 되기 전, 프린스톤은 장로교 전통신앙의 난공불락의 요새라 일컬어진 패튼(F. L. Patten)에 의해 보수신학을 고수하였다. 스티븐슨이 보기에 그동안 프린스톤은 구학파만을 고수하였으나 그의 교육방침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통합된 구학파와 신학파의 기관이다. 그러므로 신학교 학장으로서 나의 야심은 이 신학교를 어떤 특정한 당파의 학교가 아니라 전체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학교로 만들려는 것이다. 프린스톤 교수들은 이에 대하여 반대하였으나 몇몇 교수들이 학장의 의도에 도도함으로 분열이 시작되었다. 학장과 동조한 교수들은 현대주의자들은 아니었으나 당시의 신학사조에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투적 보수주의자로 메이첸이 이들과 대립한다. 그는 강의실에서, 교회에서, 책이나 논설 속에서 어디에 있든지 자유주의에 대항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지상과제는 프린스톤에 신학교 초기의 신학전통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었다.
프린스톤은 당시에 2개의 이사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교육프로그램을 관리하고 총회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운영이사회와 1822년 설립되어 재정을 관리하는 재정이사회이다. 장로교 논쟁이 치열할 때, 재단이사회는 스티븐슨 학장을 지지하며 메이첸의 교수직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운영이사회는 메이첸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에 총회는 1926년 프린스톤 사태를 연구할 위원회를 발족시켜서, 프린스톤의 분열은 교수진의 분열이라 평가하였다. 이 위원회의 보고가 채택되어서 1929년 33인의 새로운 재단이사회를 구성되어 1/3은 구 재단이사회에서, 1/3은 구 운영위원회, 1/3은 교회 전체에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스티븐슨 학장의 권위를 극대화하였고, 보수주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프린스톤 이사회에 어번선언에 서명한 두 사람이 포함되게 되었다.
이렇게 프린스톤의 상황이 변화되자 메이첸은 프린스톤 신학전통을 계승할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929년 7월 18일 약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프린스톤 신학교가 오랫동안 영예스럽게 견지해 왔던 하나님의 말씀과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대한 충성 정책을 흔들림 없이 계속할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메이첸은 3사람의 보수주의 교수들, 곧 윌슨(R. D. Willson), 반틸(C. Vantil) 그리고 앨리스((O. T. Allis)와 함께 새로운 신학교를 시작했던 것이다. 메이첸이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한 취지는 그의 개강예배 설교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프린스톤 신학교는 죽었지만, 프린스톤의 고귀한 유산은 살아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전통을 손상시키지 않고 지속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결국 메이첸은 프린스톤 신학 전통을 수호하기 위하여 새로운 신학교 설립과 교단의 분열까지도 감내하였던 것이다.
3. 근본주의와 미국침례교
기독교와 자유주의간에 투쟁이 교파 내에서 격화됨에 따라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 신조나 고백이나 조직신학에도 입장 표명을 하지 않는 자율적인 침례교인들조차, 자신들의 지교회들을 넘어서 자기들의 종말론 견해를 방어하는 데 그들의 장로교 형제들이 근본주의 초창기에 느꼈던 것보다 덜 강박감을 느꼈다. 비록 침례교인들은 이 운동의 처음 기간 곧 1857-1920년 동안 고참 보수파 근본주의의 지도력에서 장로교인들보다는 뒤졌지만 그들은 주요 공헌을 하였고 특출한 지도력도 제공하였다.
침례교인들은 근본주의자들이 천명한 신학적 견해를 받아 들였지만 정통주의의 교리적 입장이 만장일치의 옹호를 받는 신앙성명서가 되어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는 찬동하지 않았다. 남침례교와 북침례교의 거의 모든 무리들은 원래의 근본주의자들의 특징인 보수주의 신학을 학문적으로 제시하는데 높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종종 일어나고 있는 바와 같이, 원래 지도자들의 높은 이상들은 그들의 활동과 견해를 지지해 주는 동지들을 성공적으로 보유하지 못하였으며, 근본주의는 급격히 완고한 율법주의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리고 많은 침례교 학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지지할 수 없었는데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이에 대한 과격한 논쟁들 가운데 종종 나타나 있다.
물론 몇몇 침례교 학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지속시켜 나가는데 참여하였으며, 그들 자신들이 그들 다음 세대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완고한 자들임을 종종 입증한다. 근본주의 약점들은 1920년대를 넘어서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극단의 세대주의, 과도한 정서주의, 사회에서의 도피, 은둔, 복음에 대한 문화적인 도전 앞에 가지는 공포, 윤리적 문제에 대한 소홀함, 호전적인 신학 논쟁, 경건주의적 개인주의 등의 상당한 부정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후기 근본주의자는 신근본주의(Neo-Fundamentalism)라고 불린다. 신근본주의는 남침례교와 북침례교에 각각 분파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의 논쟁이 일어났던 시기에 서든침례신학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학장으로 에드가 영 멀린스(Edgar Young Mullins)가 선출되었다. 그는 이 시대에 남침례교인들을 안정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에스텝(William R. Estep)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멀린스와 로버슨(A. T. Robertson)은 모두 주도적인 근본주의자들의 집단에서 커다란 존경을 받았다. 어떤 탁월한 미남침례교인도 조직화된 근본주의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멀린스와 로버슨은 미남침례교인들의 삶과 신학에 다른 학구적인 지도자들과 똑같이 영향을 미쳤음은 의심할 바 없다.
멀린스는 비록 신학적 방법에 효과적으로 변화를 가져왔지만 침례교의 신학적 사고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는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성서의 완전한 진리 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멀린스에게 있어서 성서는 오류가 혼합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였다. 성서의 목적은 종교적인 것이며 따라서 성서는 그러한 견지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성서는 어느 부분에 있어서나 사실적이며 진리를 갖고 있다. 이른바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있던 시기에 멀린스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적 믿음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 1924년 미남침례교 교회학교부(Sunday School Board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는 그의 십자로의 그리스도교(Christanity at the Cross Roads)를 출간하였다. 그 책의 두드러진 구별 속에서 멀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약이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에 대한 논쟁은 이제 거의 찿
아볼 수 없다. 과학적 지식은 우리의 복음주의적 신앙을 옹호하는 쪽에서 이 문제들을
결정하여 왔다. 공격은 이제 기록들 자체의 기초들에 대하여 가해지고 있다. 중재
자들과 중립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눈을 감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리
스도교의 기초들을 그 역사적 기록들을 의심함으로써 파괴시키려는 시도가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멀린스가 말하였거나, 믿었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그의 저술들에서 취하고 있는 입장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의심도 주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신학적으로 칼빈주의적 침례교회 전승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제기한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이 칼빈주의 독특성에서 나온 것들은 아니며, 심지어 침례교 교리의 독특성에서 나온 것들도 아니다.
남침례교인들은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 (Baptist Faith and Message)로 알려져 있는 신앙 고백문을 작성하여 통과시킴으로써 1925년 진화론적 및 현대주의적 이론들에 응답하였다. 이 신앙 고백은 남침례교 총회의 교리적 통일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북침례교인들은 신학적인 자유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운동에 대하여 심각한 논쟁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 이러한 논쟁은 20세기 전반에 그들의 총회의 특징이 되었다. 반면에 남침례교인들은 그들의 신학적 확신들에 대하여 훨씬 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조화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증될 수 있다. 예컨대 텍사스 출신의 근본주의 지도자였던 노리스(J. Frank Norris)는 남침례교회의 지도층을 한번도 성공적으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그는 한 때 대단히 극단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죠오지 워싱톤 트우엣(George W. Truett: 달라스의 제일침례교회 목사)을 성서적 진리를 훼손시키는 인물로 비난하기까지 하였었다. 신학적으로 남침례교인들은 거의 모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노리스가 믿었던 것과 똑같은 교리들을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노리스 같은 근본주의자들의 신랄한 논쟁적 체계에 대하여서는 동조하려고 하지 않았다. 남침례교인들은 1925년 중요한 신앙고백을 투표로 인정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비록 몇몇 사항들에 있어서 애매 모호하다는 비평을 받아 왔기는 하지만 보수주의적 신학 체계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침례교인들은 북침례교인들과는 달리 그들이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로 나뉘는 명백한 분열을 경험하지 않았다.
북침례교 총회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선교사들과 교회들 내에서도 자유주의에 직면하였다. 자유주의와 관련된 문제들은 너무나도 심각하여졌기 때문에 침례교 근본주의자들의 총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 회의는 1920년 북침례교 전국 총회가 있기 바로 직전 뉴욕 주 버팔로(Buffalo)의 델라웨어 에버뉴 침례교회(Delaware Avenue Baptist Church)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발표된 모든 메시지들은 침례교 근본주의(Baptist Fundamentals)라는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회의의 참석자들은 총회가 전통적 침례교 교리들에 대한 교수들과 학교 이사들의 태도들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는 안건을 투표로 통과시켰다.
보수주의자들은 그 조사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생긴 논쟁은 비통함과 긴장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으며 그 다음 해 까지 계속 되었다. 학교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받았던 위원회가 다음 해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 학교 조사 위원회는 몇몇 문제들이 있음을 인정하였으나, 본질적으로 보고서가 침례교 교육기관을 옹호하였다. 총회가 신앙 고백문을 채택하도록 만들고자 한 보수주의자들의 시도들은 거듭 거듭 실패하였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이러한 20년대의 논쟁은 30년대, 40년대에도 계속되었고, 북침례교 총회에서 보수주의자들은 같은 교단 안에 있는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을 모으기 위한 근본주의자협회를 구성하였다.
. 성경관에 대한 고찰
근본주의 논쟁의 핵심은 성경관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근본주의를 정의할 때 성경관을 논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근본주의 논쟁은 전통적으로 고수되어 오던 성경관을 지키려는 무리들과 새롭게 변화된 세계관으로 과거의 성경관에 반기를 든 무리들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현대주의는 새로운 성경관을 제창하였다.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수용되지 않는 성경의 내용은 사실로써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초대교회가 신화로 첨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독론에 관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동정녀 탄생, 육체적 부활, 성육신 등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이러한 도전에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초자연적이고 동시에 역사적 사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두 본성, 동정녀 탄생, 성경의 영감, 성경의 권위를 세우고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성경관은 미국 장로교회에서 프린스톤 신학자가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기에 이들의 성경관은 곧 근본주의 성경관이라 하겠다. 이에 프린스톤 신학자들, 알렉산더, 찰스 핫지, 워필드, 메이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성경관을 개괄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1. 알취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프린스톤 신학의 출발점은 초대학장인 알렉산더(A, Alexander)이다. 성경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1812년 그는 학장 취임연설에서 성경을 신학교 존립을 위한 기초로 설정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5장 39절 성경을 찾으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그의 저서인 변증학의 6장에서 12장까지는 성경이 확증적이고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이며, 정전()이라는 외증들을 요약하고 성경의 권위는 성경 자체의 내증에 의하여 더욱 분명하게 설명된다고 말한다.
성경의 영감에 대해서도 알렉산더는 설명한다. 곧 영감은 성경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감독의 역할을 한다. 곧 성령의 감독하에 성경이 기록되었기에 오류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한 역사가가 성령에 의해 감동되어 성경을 기록할 때, 섭리된 목적에 부합되는 사건과 상황들을 선택하도록 역사한다. 그리고 사건이 내용 속에 모든 실수와 잘못들로부터 보호되도록 사건을 해설하게 돕고 힘을 준다. 그래서 영감받은 이들은 영감 받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문체나 표현 방법을 그대로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영감을 정의하며 완전영감(Plenary Inspiration)을 주장한다. 결국 알렉산더는 성경의 어느 부분이라도 오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와 같이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높이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2. 찰스 핫지(Charles Hodge)
찰스 핫지는 알렉산더를 계승하여 확고한 프린스톤 신학을 정립하고, 더욱 강력한 성경의 권위를 확립하였다. 핫지(Hodge)의 출발점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첫째,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다. 둘째,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성경이 진리라고 증언하는 것은 모두가 진리이다. 넷째, 성경이 옳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옳으며 틀리다고 하는 것은 모두 틀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핫지(Hodge)는 계시와 영감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영감은 신자의 마음속에 단순한 영적 조명이나 성화 하는 능력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영향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계시의 목적은 사람을 더욱 지혜롭게 하여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요, 영감의 목적은 오류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책들과 모든 부분은 꼭같이 영감된 것이다. 제한이 있을 수 없고, 저자와 저작 모두 영감 되었다는 것이다. 핫지(Hodge)는 영감론이 저자의 언어까지 영감 되었다고 주장한다. 성경 저자들이 정확한 언어를 선택하도록 영감 하셨기에 성경의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도덕이나 종교적 진리에만 무오한 것이 아니고 과학, 역사, 지리에 관하여 모두 무오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핫지(Hodge)의 성경관에서 독특한 것은 원본(Autographa)의 무오설이다. 성경 속에서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상이한 진술을 설명하기 위하여 제창되어진 것이다. 핫지(Hodge)의 시대에도 원본 무오설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원본의 무오성은 사본만이 남아있는 현재에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본무오설은 워필드(Warfield)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발전된다.
3. 워필드(B. B. Warfield)
워필드(Warfield)가 활동하던 시기는 선배들보다 기독교 진리에 관한 변증에 더욱 어려움을 겪는 시기였다. 독일신학의 유입, 진화론,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으로 신앙의 주관주의와 같은 도전이 거세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워필드(Warfield)는 성경 영감설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요 계승자로써 영감의 방법이 축자 영감인 것을 주장하였다. 워필드(Warfield)가 성경 영감 교리에 공헌한 것은 참으로 지대하다. 철저하게 구프린스톤 신학전통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이 이론에 관한한 전무후무한 공헌을 하였다. 성경이 그 자체의 영감을 교훈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망라하고 성경 속의 세부 원리와 일반 원리를 통원하여 영감교리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의 문헌집 대부분이 성경의 영감과 무오교리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1881년 핫지(A. A. Hodge)와 함께 출판한 영감(Inspiration)이라는 글에서, 성경의 축자영감 사상에 관한 교회의 역사적 확신을 기술하고, 당시대 양측 곧 보수주의와 현대주의의 전제들을 기술한 이후에, 성경의 자증에 기초한 전통적인 성경관을 주장한다.
워필드(Warfield)가 보기에 영감에 관한 성경의 주 본문은 세 가지 있다. 요한복음 10장 35절, 디모데후서 3장 16절, 베드로후서 1장 20절에서 21절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이다.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성서 해석은 교리 중심의 해석이 되기 쉽고 따라서 본문 전체를 개관적으로 보지 못할 위험이 뒤따르기도 한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성서의 영감성과 무오성의 교리를 입증하는 구절로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워필드(Warfield)의 성경 영감교리는 많은 비판을 받는다. 신정통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부룬너(E. Brunner)는 워필드(Warfield)가 프린스톤의 역사적 교리를 언어적 무오(Verbal Inerrancy)의 극단으로 끌고 갔다고 공격한다. 그러나 워필드(Warfield)의 성경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주로 원본 무오설에 집중된다. 즉 영감은 성경 저자들이 최초로 기록한 원본에만 적용된다는 이론이다. 이에 대한 워필드(Warfield)의 견해는 단호하다. 그는 말하기를 원본, 어떤 부분의 참 의미가 오늘날 결정적으로 알려진 역사나 과학의 진리 또는 명백히 확인되고 해석된 성경의 다른 부분과 직접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증명하라고 선언한다.
4. 그레샴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프린스톤 신학의 마지막 주자로 일컬어지는 메이첸(Machen)은 그의 선배들이 축척하고 주장해온 신학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는 구프린스톤에 철저하게 서 있는 찰스 핫지(C. Hodge)와 워필드(B.Warfield)의 제자였다. 메이첸(Machen)은 1881년 A. A. 핫지(A. A. Hodge)와 워필드(Warfield)가 저술한 영감(Inspiration)이란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성경은 물론 원본에 있어서도 완전하고, 무오하고, 유기적 영감의 책으로 전혀 오류가 없다고 한다. 메이첸은 이와 같이 선진들의 신앙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며 당대에 일어났던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선배들의 이론을 보완하였다.
우선 현대주의에서 가장 심하게 부인한 두 가지 기적을 역사적 사실로써 옹호하였다. 곧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이 그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of Christ)을 통하여 성경의 초자연적 무오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완전영감에 대하여 부가적인 설명을 더해주고 있다. 곧 완전영감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아름답다거나 똑같이 가치 있다는 것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는 성경의 각 부분이 똑같이 참되다는 것과 각 부분은 자신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선배들은 영감의 방법, 범위, 결과 등에 대하여 논의하였고, 메이첸(Machen)도 이를 동의하는 동시에 영감 받은 성경의 각 부분이 연합과 통일성이 공존함을 보완하였다. 또한 메이첸(Machen)은 성경이 종교와 영감의 책일 뿐만 아니라 과학과 외적 역사(external history)에도 무오하다고 말한다. 곧 성경의 과학적인 면을 더욱 강조하는 그의 태도이다. 성경은 사실이며, 과학이다. 이에 메이첸(Machen)은 말하기를 기독교는 과학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는 다른 지식 분야와 상호 관계가 없는 악의 없고 무익한 부수 현상이 아니다. 라고 하여 성경과 과학, 타학문과의 조화를 강조하였다. 또한 메이첸에게 있어서 성경은 교리에서 시작을 한다. 그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평하며 말하기를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만을 청중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어떤 계획과 권고는 없다. 단지 사실들, 교리들이었다. 성경 어디에서나 그렇다. 처음은 교리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생활이다. 결국 메이첸(Machen)에게 있어서 교리는 복음에서 추론한 것이 아니다. 메이첸(Machen)에게 있어서 교리는 처음부터 복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결 론
근본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험물인 듯한 인상을 주었고, 또 일종의 열광주의를 연상케 하고 있지만 그 본질에는 인간 생활의 기반이 되는 신앙이 깃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신앙이다. 그러나 그 곳에는 충분한 위안과 영감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이 신앙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성서로 돌아가서 비평가들의 초인간적 지도를 따르지 않고도 자유로이 성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신앙 가운데서 가치와 존귀의 의미를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지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이웃에게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손을 뻗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초자연주의를 강조하고, 성경의 객관적 계시와 정확무오한 권위에 정면 도전하고,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교리, 부활, 재림등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나, 거기서 몇 가지 약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첫째로, 근본주의의 약점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깊이 보지 못하는 점이다. 구약시대의 신자들 가운데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은 다같이 은혜언약에 속하는 구원방법의 계시이다. 구약이 은혜의 약속에 대해 계약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그 성취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연속성과 통일성을 갖는 것이다. 둘째로, 근본주의 약점은 일반은총(자연은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세속 학문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하여 마침내 반()지식주의로 흘러가고 말았다. 셋째로, 근본주의는 개인의 종교경험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적 경향을 보이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을 무시한다. 종교는 개인의 기도생활과 성경공부, 그리고 교회출석에 국한되고, 경제학이나 사회학, 그리고 자연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하여는 무관한 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문화, 과학은 성경신학에 의하여 지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정되고 제약을 받는다.
지금까지 근본주의의 운동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자유주의의 도전에 대항하여 다시 한번 성경의 권위를 확인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이해하려고 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 내에서 발생한 분열과 또한 세대주의 운동 등의 측면으로 가급적 이해하고자 하였다.
우리 한국적인 교회의 상황도 보수주의, 개혁주의를 앞세우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즉 1920년 이전의 초기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성경의 기본적인 것들을 수호하고자 하는 신앙의 결단과 응징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퇴색하고 변질된 근본주의의 갈림길인 신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의 현상은 우리가 경계해야만 하는 신학적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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