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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Hodge와 그의 時代

by 【고동엽】 2009. 4. 28.

Charles Hodge와 그의 時代

 

홍치모(Ph.D.)

미주총신/역사신학교수

 

 

들어가는 말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는 미국장로교회가 배출한 조직신학자로서 세계 4대 칼빈주의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현재의 프린스턴대학교의 전신인 뉴저지(New Jersey)대학을 졸업한 후 프린스톤 신학교에 진학하여 3년간 신학공부를 하고 독일에 가서 2년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줄곳 모교인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신학을 근 반세기 동안이나 가르치다가 작고한 위대한 조직신학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1)

지 교수가 장로교회의 조직신학자로서 대들보와 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신학계에서는 그의 신학에 대하여 분석적 연구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금번 왕성교회가 주최하는 핫지神學의 심포지엄을 개최함에 있어서 간단하나마 핫지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스켓치를 해보고자 한다.

 

1. 소년시절

찰스 핫지는 1797 12 27, 미국 독립운동의 발상지였던 필라델피아市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조상은 소위 Scottish-Irish 계통으로서 조부(조부)인 앤드류(Andrew)는 아일랜드로부터 미국으로 이민하여 필라델피아시 Water street 에서 상업을 시작하여 제법 재산을 저축할 수 있었다. 핫지의 아버지 Charles Hugh(1755-1798) 1773년 프린스톤대학(Princeton College)를 졸업하였다.2) 핫지의 아버지가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

 

미국에 있어서 독립전쟁이 바야흐로 발발하려던 무렵이었다. 대학안에서는 애국심과 독립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스 핫지의 아버지는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학을 전공했다.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펜실베이니아 연대에 입대하여 군의관으로 봉사하던 중 1776 11월 뉴욕시 근처에 있는 포트 워싱톤(Fort Washington)이라는 지역에서 전투를 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후 수개월 동안 고생 끝에 다시는 군대에 재입대를 하지 않는다는 선서를 한 후에 석방 되었다. 찰스 핫지가 나이 들어 성인이 되었을 때 회고록을 집필하였다. 그 때 핫지는 가문의 신앙전통을 알리기 위해 <우리들의 조상은 모두가 장로교 교인들이었고 애국자 들이었다>고 기록하였다.3)

국군의 포로에서 풀려난 핫지의 아버지는 필라델피아市로 돌아와 의사가 되어 의원을 개설하였다. 1790년 찰스의 아버지는 메리 브란챠드(Mary Blanchard)양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보스턴市에서 태어난 고아였다. 결혼하기 5년전 오빠가 살고있는 필라델피아市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비록 고아출신이었지만 친척들중에는 유명한 인사들이 있었다.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Bunker Hill 전투에서 전사한 육군소장 조셉 워렌(Joseph Warren)과 워싱턴 대통령의 각료였던 디모디 피커링(Timothy Pickering)은 그녀의 친척들이었다.

젊은이는 필라델피아市 제2 장로교회에서 아쉬벨 그린(Ashbel Green) 목사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그린 목사는 핫지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핫지의 후견인으로서 핫지가 결혼 할 때 까지 돌보아 주었다. 그는 프린스턴신학교의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서 핫지가 프린스턴신학교의 교수로 임명되는 일에도 직접 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부부는 다섯 아들을 두었었는데 1793년과 1795년에 유행했던 황열병 (Yellow Fever)에 걸려 세 아들들이 모두 사망하였고 두 형제만이 살아남았다. 큰 형인 Hugh Lemon Hodge 1796년에 출생하였음으로 찰스 핫지보다 한 살 위였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여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가 되었고 동시에 제2 장로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찰스 핫지 형제는 남달리 형제간의 정이 두터웠다. 핫지는 근 50년 동안 형에게 매주 한번은 편지를 써서 보내곤 하였다. 형은 동생보다 수입이 많았음으로 매달 동생에게 생활비를 보내곤 하였다. 당시 프린스톤신학교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교수들의 생활비를 제 때 지금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핫지의 자녀들이 대학에 진학하자 그들의 학비를 보조하는데 형은 인색하지 않았다.

런데 두 형제가 성장하는 동안 그들의 가는 길은 고난의 길 이었다. 찰스 핫지가 출생한지 7개월도 못되어서 그의 아버지 역시 황열병으로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어린 젖먹이 두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으니 찰스 형제를 양육해야 할 어머니의 고생은 어떠했으랴. 불행중 다행하게도 찰스 핫지의 두 고모님은 펜실베이니아 주와 뉴저지 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정치가와 결혼함으로서 그들로부터 양육비와 교육비를 보조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두 아들들 모두가 프린스턴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4)

런데 19세기에 들어서자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1806년 대륙봉쇄령을 선포함으로서 영국을고립시키려고 하였다. 영국은 미국과 교역을 계속하고 있었음으로 프랑스는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은 중립을 지키면서 프랑스하고 교역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자 영국은 대서양 공해상에서 미국선박을 납치하는 등 미국의 국위를 손상시켰다.

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 대통령 제퍼슨(Jefferson) 1807년 영국에 대한 경고수단으로서 미국선박의 외국 출항을 금지하는 출항금지법(Embargo Act)을 제정하였다. 이와같은 조치는 미국편에서 스스로 교역을 끊어 상대 국가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소극적 정책이었다. 이로 인해 미국의 대외 무역은 일체 중지되었고 영국도 식량이 궁핍해졌다. 그러나 이 법은 영국 공산품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미국이 오히펴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제퍼슨 대통령은 대통령에서 퇴임하기 전 통상금지법(Non-Intercourse Act)을 제정한 뒤 물러났지만 이 법은 출항금지법이나 내용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로인하여 찰스 핫지의 어머니는 남편이 남겨둔 적은 재산이기는 했지만 어느 무역상사에게 맡겨 이자를 받다가 그나마 이자는 커녕 원금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5)

로인하여 두 아들을 소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가정교육을 시킬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종교교육만은 철저하였다. 어머니는 두 아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매일 가르쳤고 암송시켰다.

1810년 핫지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뉴저지 주의 소머빌(Somerville)이라는 곳에 있는 고전어(古典語)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학교는 고모님댁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서 찰스 두 형제는 화란에서 이민 온 상류층 자제들과 교분을 맺으면서 사회적 기반을 닦았다. 핫지의 어머니는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프린스턴대학이 있는 동네로 이주하였다. 두 형제는 새로운 지적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2. 프린스턴대학 및 신학교 시절

찰스 핫지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거느리고 프린스톤으로 이주했던 1812년은 핫지의 생애에 있어서 뿐 만 아니라 미국 북장로교회사에 있어서 큰 변화를 일으켰던 해였다.

스 핫지가 프린스톤 대학에 입학한 것은 1812 9월 이었다. 그는 그해 대학 2학년에 입학하였다. 핫지의 집은 Witherspoon street에 있었다. 1795년 이후 프린스턴 대학은 John Witherspoon의 사위가 되는 Samuel Stanhope Smith 1768년부터 1794년까지 학장직을 맡고 있었다. Witherspoon 목사는 미국장로교회의 총회를 조직한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뿐 만 아니라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유일한 목사였다.6) Stanhope Smith는 비록 건강이 좋지 못한 몸이었으나 그는 최선을 다해서 새로 발전하고 있던 과학과 하나님의 말씀을 충돌시키지 않고 조화시키는데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스미스학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학 이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었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프린스톤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 중에서 신학지망생이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800년부터 1807년 사이에 학생들의 반항적 행동과 스트라이크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교단에서 임명한 이사들은 스미스학장의 지도력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12 6월과 8월에 각각 이사회를 소집하여 스미스학장의 은퇴를 논의한 결과 그를 퇴임시키기로 하고 대신 필라델피아시에있는 제 2장로교회 목사 아스벨 그린(Ashbel Green) 목사를 학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린목사의 학장 취임은 찰스 핫지의 생애의 진로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핫지를 위대한 신학자로 만든 사람은 곧 그린목사였다. 스벨 그린이 프린스턴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한 1812년은 프린스톤신학교가 설립되는 해 이기도 하였다. 그때까지 미국에서 목사를 교육시켜 일선 목회지에 파송시키는 일은 오늘 우리들이 실행하고 있는 것과 같이 특수 전문대학원으로서의 신학대학원(Seminary)은 없었다. 다만 대학 4년 과정에 있어서 장차 목사가 될 학생은 학교가 별도로 제정한 과목을 이수한 후 학생이 출석하는 교회가 소속되었어있는 노회(老會)에서 목사 시험에 시취하여 합격하면 목사가 될 수 있었다. 회중교회의 경우는 절차가 더 간단했다. 당시 하버드대학교나 예일대학교는 회중교회의 관할 하에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소위 서진운동(西進運動): Westward Movement)으로 많은 사람들이 西부개척을 위해서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사람들이 가는 곳에는 새로운 개척교회가 설립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교역자가 필요한 것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새로 개척되는 서부지역에서 설립되는 교회에 파송해야 할 교역자가 필요한데 종전과 같은 교역자 양성방법으로는 도저히 충당 할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신학교의 설립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스벨 그린 이외에 그와 뜻을 같이 하고 있던 뉴욕시의 젊은 목사 사무엘 밀러(Samuel Miller)가 있었다. 그 역시 교단이 직영하는 신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절감하고 있었다.7)총회의 결의를 걸쳐 1812년 프린스톤신학교는 개교하였고 아스벨 그린이 초대 이사장이 되었고 최초의 신학교의 전임교수는 버지니아 주 출신의 아취발드 알렉산더(Archifald Alexander)가 취임하였다.8) 알렉산더 교수는 영적, 지적으로 찰스 핫지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말하자면 핫지의 영적 및 지적 후견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렉산더 교수는 1772년 버지니아 주에서 Scottish-Irish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교육은 미국장로교회의 대들보라고 할 수 있는 위더스픈(John Witherspoon)의 제자 윌리암 그라함(William Graham) 밑에서 개인지도를 받았다. 알렉산더는 1790년 버지니아노회에서 목사 시취를 거쳐 안수를 받았다. 그 후 4년간 개인적으로 신학공부를 하면서 순회 전도목사 생활을 한 후 버지니아주 샤롯테 카운티(Charlotte County)에 있는 두 장로교회를 동시에 섬기는 목사가 되었다. 1797년에는 함프덴-시드니(Hampen-Sydney) 대학의 학장이 되어 10년 후 필라델피아 제3 장로교회로 이전하기 직전 까지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로 초방받기까지 학장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알렉산더교수는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하여 사로잡을 뿐 만 아니라 사람들을 끌어 모아 포용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찰스 핫지는 프린스톤 신학교가 설립되는 해에 신학교가 있는 동네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60년 동안을 생활하였다. 이 해는 미국 북장로교회사 뿐 만 아니라 프린스톤 신학교 그리고 핫지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역사적 전환점을 찍는 해 이기도 하였다.9)

지는 이 마을에서 60년동안 생활하면서 대학과 신학교 그리고 교단에서 발생했던 여러 가지 사건의 영향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영향을 받거나 자신이 사건에 개입하면서 한평생을 생활하였다. 1812 8 12일은 소년 핫지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매우 인상깊었던 날이었다. 그 날 핫지는 14세의 소년의 나이로, 프린스톤신학교 교수로 취임하는 아치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교수의 취임사를 들었다.10)

지와 알렉산더 교수와의 만남(encounter)은 뜻밖의 일이었다. 어느 여름날 핫지가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하기 전 고전어(古典語)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알렉산더교수가 그 학교 교정을 거닐다가 귀엽게 생긴 소년 핫지를 만나 헬라語 단어 πιστις가 무슨 말인지를 물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평생 사제지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나서 핫지가 알렉산더 교수에게 편지를 쓸 때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쓰기도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의 어머니 이외에 내가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알렉산더 교수님 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핫지는 자기의 첫 아들의 이름을 스승의 이름을 따서 Archibald Alexander라고 지어주었다.11)

1812년 가을, 핫지는 프린스턴대학 2학년에 편입하여 1816년에 졸업하였다. 핫지의 대학생활에서 얻은 수확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 상류층 인사의 자제들을 많이 사귀게 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중에서 감독교회의 감독이 되었던 Charles P. Mllvaine과 훗날 프린스톤대학의 학장이 되었던 John Maclean과 친교가 두터웠다. 그는 핫지가 창간한 Princeton Review誌의 기고자였다.

지의 대학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 의의가 있었던 사건은 그의 회심 즉 거듭남의 체험이었다. 프린스턴대학의초기 학장이었던 Witherspoon이 대학생들의 공적처세를 올바로 할 것을 강조하고 Stanhope Smith 학장이 학생들에게 과학탐구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할 것 같으면 Ashbbel Green 학장은 죠나단 에드워드 초대학장 모양으로 학생들의 경건생활(Piety life)을 강조하였다. 경건생활을 강조하는 한 방법으로 주일 오후에 실시하던 성겨공부를 폐지하고 소요리문답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시키는 것을 의무화 했다. 이 결과 1814년에서 1815년 사이에 대학안에서 부흥이 일어났다. 핫지는 1815 1 13일 친구와 더불어 자신의 신앙을 거부 하였다. 당시 프린스턴 대학가에는 105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는데 이중에서 삼분의 이 이상의 학생들이 회심의 체험을 가졌었다.12)

와 같이 회심의 결과 핫지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 신학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핫지는 1819년에 졸업하였다. 그의 졸업반 학생은 26명이었다. 그가 졸업하는 해 58명의 학생이 새로 입학하자 2명의 전임교수가 가르치기에는 학생의 수가 많아졌다. 젊은 전임강사가 필요했고, 총회는 새로 채용하는 전임교수의 사례금을 마련해야만 했다. 알렉산더 교장은 총회에 재정을 청원하기 전에 인물부터 물색하였다. 처음에는 핫지의 가장 친한 친구인 John Jehns군에게 물어 보려고 생각하였으나 그는 이미 감독교회의 목사가 되기로 이미 결정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1819 5 6일 아침, 핫지는 사소한 일 때문에 알렉산더 교장의 방에 갔을 때 알렉산더 교장은 핫지로 하여금 놀라 자빠질 질문을 던졌다. 그는 핫지에게 신학교 교수가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던 것이다.13)

지는 알렉산더 교수로부터 제언을 받고 몹지 당황하고 망설였다. 그때로 부터 1년간 자기 자신이 과연 신학교의 교수가 될만한 자질과 인격을 갖추고 있는가를 검증하였다. 1년이 지나자 총회는 1820 5월 핫지에게 1년간 보조교사 (조교와 같은 지위)로 임명하였다. 교수해야 할 과목은 성경원어였고 봉급은 연봉 400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그가 총회로부터 보조 교사로 임명을 받자 공교롭게도 오른쪽 허벅다리의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류마치스로서 간헐적으로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1820 10월 핫지는 뉴 잉글랜드지방을 여행하였다. 여행목적은 교파를 초월하여 여러 저명한 신학교 교수들을 만나 성경언어의 교수법과 성경해석에 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만났던 교수들 중에서 신학적 입장을 달리했던 인물을 한 두 사람 지적 할 것 같으면 안도버신학교(Andover Seminary)의 모세 슈트어트(moses Stuart)를 만났고,14) 예일 대학(yale University)의 테일러(Nathaniel W. Taylor)교수를 만났다.15)1812 11월 핫지는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동시에 스승 알렉산더 교수는 핫지로 하여금 교단안에서 하루 속히 인정받는 목사요 교수로 두각을 나타내긱 위해서 그로 하여금 작은 소책자 이기는 하지만 한 권의 팜프렛을 간행하도록 독촉하였다. 그 책의 제목은 “성경문학의 중요성에 관하여”(On the Importance of Biblical Literature)duTek. Dl 책자를 발행하는 것과 그간의 성공적인 교수의 경력을 인정받아 총회는 근동언어(근동언어)와 성경을 가르치는 정식교수로서 1822 5, 핫지를 임명하였다. 핫지의 나이 24세 때였다. 따라서 핫지의 연봉은 1천불로 증액되었다. 핫지는 정교수 임명과 동시에 사라 바티(sarah Bache)양과 결혼하였다.16)

문의 세계에 들어선 핫지는 유럽에서 유입되는 정보와 문헌은 입수하게 되자 자신이 우물 안에 갇혀있는 개구리와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핫지는 자신의 부족한 신학지식과 식견을 넓히기 위하여 유럽대륙에 건너가 신학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핫지의 독일유학은 그에게 있어서 학문을 연구하고 식견을 넓히는데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3. 할레대학과 베를린대학 시절

프린스턴신학교 당국은 핫지의 독일유학을 정식으로 허락하였고 2년간의 연구기간 중에라도 계속 봉급을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 핫지는 부인과 두 자녀를 어머니와 형에게 맡기고 유럽을 향해서 출발하였다.

지가 유럽으로 떠나자 그가 맡고있던 과목은 John W. Nevin이라는 독일계 청년학자가 대신 맡았다. 그는 훗날 독일개혁교회로 교적을 옮긴 후 소위 Mercerburg Theology라는 학파를 형성하였다. 핫지는 Mercerburg Theology의 성격과 내용에 관해서 많은 의심을 표명한바 있었다. 핫지의 유학기간은 1826 10월부터 1828 9월까지 만 2년간이었다. 핫지는 유럽에 도착하자 1827년 초까지 파리에서 불어.아랍어.시리아어를 공부하였다. 그후독일 할레(Halle)대학으로 가서 정식으로 신학연구에 착수하였다. 핫지는 주야로 쉬지않고 독일어를 공부하였는데 그의 독일어 교사는 유명한 고아의 아버지로 기도의 사람 George Muller였다.17)

지가 할레대학에서 사람은 자기와 거의 나이가 같은 봉년배였던 젋은 신학자 Augustus Tholuck였다. 토록교수의 본 이름은 Friedrich August Gottreii Tholuch(1799-1877)이다. 그는 1799 3 30일 독일 부레스라우(Breslau)에서 태어났다. 고향에 있는 Breslau 대학을 거쳐 Berlin대학에서 동방어를 당대의 유명한 Heinrich Friedrich Non Dieg(1750-1817)에서 배웠다. 베를린에 있을 때 독일 경건파 교인들과 교제함으로서 그들의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유명한 교회사가 Neander의 지도를 받았다.

시 독일은 계몽시대의 합리주의 사상과 새로 일어나고 있던 낭만주의 사상이 교체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Tholuck 교수는 철학자 hegel과 신학자 schleiermacher의 영향을 어느정도 받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사상에 동의하거나 동화되지는 않았다. 1821 22세때 교수자격 논문이 통과되어 1823년에 베를린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의 교수과목은 신구약성경과 변증학 그리고 18세기 교회사였다. 프러시아 정부의 후원으로 화란과 영국의 여러대학교의 도서관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1826 Halle대학교의 신학부의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핫지가 Halle 대학교을 방문하여 그외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당시 루터파교회의 보수신학자들은 이신론(deism)과 합리주의사상과 대항하기 위해서 인간의 종교적체험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수행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보다는 단지 막연하게 인간의 주관적 종교체험을 강조하고 있었다는 것을 핫지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핫지는 Halle대학에서 독일 루터교회의 경건파들의 신앙과 예배의 식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목격할 수 있었고 Berlin대학에 가서는 Schleiermacher의 강의와 설교를 직접 청강하였다. 그러나 핫지는 그의 강의를 듣고 회의감을 가졌거나 고민했다는 말은 없다. 이와같은 경험을 통해서 핫지는 확고부동한 장로교회의 조직신학자로서 대성할 수 있는 큰 기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프린스톤신학의 특징은 어디까지나 <경건과 학문>의 조화에 있었다.18)

러면 핫지가 독일에서 2년간 공부한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독일신학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이었다. 즉 독일신학자들이 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을 하지 않고 인간의 자율적사색(自律的思索)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Speclative Spirit of the German theologians most uncongenial)19) 더구나 Schleiermacher가 주장했던 신앙관, 즉 신앙이란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감정의 절대의존이란 말은 핫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핫지가 2년 동안 독일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미국에 있는 프린스턴신학교교수들을 비롯하여 어머니, 형님, 그리고 핫지를 아끼는 선배 및 동료 목사들의 끊임없는격려와 애정어린 충고가 쉴새없이 핫지에게 서신으로 전달되었다. 특히 1827년 알렉산더 교수가 핫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띄고 있다. 원문 그대로 인용할 것 같으면 다음과 같다. 20)

이글을 쓴 알렉산더 교수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하게 서 있는 핫지의 신앙과 신학사상에 대하여 조금도 염려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1827년 가을 핫지는 Berlin대학으로 옮겨갔다 그 곳에서 그는 당시 루터교회안에서 복음파(福音波)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던 성서학자 Ernest Wilhelm HEngstenberg 와 교화사가였단 johann Augustus Wilhelm Neander rythdnk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Berlin 대학으로 옮겨옴으로서 핫지는 Hegel의 철학과 Schleiermacher의 신학을 보다 가까이 접할 수 있게 됨으로서 두 사람의 사상을 보다 예리하게 비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지는 30대 초의 젊은 신학자로서 당시 독일에서 나로다 라고 자처하고 있던 당대의 일류 신학자들과 어께를 나란히 하고 교제하면서 신학을 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핫지로서는 학문의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신생국가인 미국에 있어서 고백적 칼빈주의 신학자로 성장하여 대성할 수 있게 하였다. 그것은 핫지 자신 뿐 만 아니라 미국장로교회의 큰 수확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핫지는 독일에서 연구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들려 당시 영국 국교회 안에서 복음파로 아려져 있던 찰스 시메온 (Charles Simeon)의 설교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외유생활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핫지는 2년간의 독일유학생활을 마치고 1828 9월에 프린스턴으로 돌아왔다. 그이 나의 31세였다.

 

4. 핫지와 프린스턴 신학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핫지는 독일에서 신학적 식견을 넓히고 지식을 쌓았지만 장로교 신학자로서 그의 신학적 충성심에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핫지가 미국에 돌아오자 다시금 다리의 신경통이 재발하여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의 강의와 연구에 치명적인 지장은 주지 않았다. 강의는 그의 연구실에서 진행하였다. 1828년부터 1840년경까지 핫지의 사생활은 비교적 평온하였다. 그러나 공적생활에 있어서는 반드시 평탄하지는 않았다.

선 미국장로교 역사에서 제2차 분열이라고 할 수 있는 구파(Old School)와 신파(New School_의 분열이 1837년에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자기의 은사라고 할 수 있는 아스벨 그린(ashbel Green) 교수가 프린스턴신학교 교수임에도불구하고 신파에 가담했다는 것이 핫지로서는 매우 난처한 입장이었다. 동시에 신파(新派)에서는 뉴욕시에 새로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신학교가 소위 뉴욕 유니온신학교로서 훗날 미국 자유주의 신학의 아성이 되어버렸다.21)

파와 신파가 분열하던 당시 분열의 원인과 각 파의 성격을 볼 것 같으면 장로교회의 근본교리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행정문제와 목사 안수문제등 주로 교회운영 전반에 거쳐 나타난 양자간의 견해가 더 컸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물론 New School에 속해있던 인사들이 가지고 있었던 장로교회의 기본신조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태도는 느슨한 편이었다.22)

지는 1828년에서 1838년까지 Princeton Review사에 약 28편의 논문을 기재하였다.23) 1849년 핫지가 52세가 되는 크리스마스 날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천국에 보내야만 했다.24) 아내와의 사이별은 그의 심장을 강타한 것 이나 다를바 없었다. 그 다음해인 1850년에는 사무엘 밀러(Samuel Miller)교수가 사망하였고, 그 다음 해 (1851)는 핫지가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아치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교수가 소천하였다. 돌연한 부인의 죽음으로 핫지는 홀아비가 되었고 두 선임교수의 사망으로 핫지는 프린스턴신학교의 선임교수가 되었다. 핫지는 1852 7 8일 해군장교의 미망인이었던 메리여사(mary Hunter Stockton)와 재혼하였다.25)

1850년 이후 그가 사망하던 1878년까지 핫지는 미국에 있어서 고백적 칼빈주의 신학(confessional Calvinst Theology)의 유일한 대변자가 되어 하버드신학과 뉴 헤이븐신학(NEW Haven Theology)을 대항하는 기수가 되었다.

50년 전에 예일대학교 신학부 교수인 알스트롬(Ahlstrom)은 그의 논문에서 핫지에 관해서 언급하기를 <19세기 중엽 미국 장로교 신학에 있어서 위대한 신학적 중재인>이였다고 한 바 있거니와 그의 말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26)

지의 저술활동은 Princeton Review에서 시작했지만 저서로서 처음으로 단행본을 간행한 것은 1841 생명의 길>이었다.

이 책은 미국 주일학교 연합회가 1824년 창설된 이래 처음으로 간행한 조직신학적으로 서술된 교리서였다. 이 책을 간행한 목적은 주일학교 교사들이 소년부와 청년부 그리고 장년부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교사지침서였다. 핫지는 이 책을 훗날 자신의 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직 신학의 골격(骨格)으로 삼았다. 이 책이 간행되자 큰 환영을 받았다. 주일학교 연합회에서 간행하였으니만큼 각 교파에서 이의없이 채택하여 사용하였다. 1843년에는 체 2판을 인쇄하면서 가격을 낮추어 75전에서 35전으로 판매하였다. 동시에 스페인어와 힌두어 그리고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핫지가 서거한 후 2년이 지난 1880년에는 3 5천부가 판매되었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핫지가 맨 처음 저서로 간행한 것은 1822 <성경문학의 중요성에 관한 논문>이었고, 이후 10년후에는 <교육체계에 있어서 성경의 위치>를 간행하였는데 이것은 필라델피아시에서 행한 설교를 체계적으로 엮은 것이다. 그리고 1835년에는 <로마서 주석>이 간행되었다. 핫지는 조직신학자이면서도 교회정치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미합중국 장로교회 헌정사>를 상하권으로 집필하여 간행하였다. 이 책을 간행하고 나서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생명의 길>을 간행하였던 것이다.

1846년에는 그간 The Princeton Review사에 기고했덙 논문들을 엮어서 신학논문집(Theological Essays)을 자신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이어서 1855 5 1일 장로교회 사학회 석상에서 행한 연설을 소책자로 <장로교 사상이란 무엇인가>를 간행하였다. 1856년에는 에베소서 주석과 고린도전서 주석을 간행하였고 1857년에는 제 2차로 <신학논설과 서평집>을 간행하였다. 동시에 같은 해 고린도후서 주석을 간행하였다. 핫지의 저서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지적할 것 같으면 역시 세권으로 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다. 이 책은 1871년에 제 1권과 2권이 간행되었고, 1872년에 제 3권이 간행되었다. 이 책이 간행됨으로서 핫지는 명실공이 보수적 칼빈주의 조직신학자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핫지의 조직신학게 대한 평과와 찬사는 이루다 표현할 수 없다. 심지어 루터파 신학자들도 핫지의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핫지의 조직신학이야 말로 장로교를 대표하는 조직신학의 급자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직신학게 기술된 그가 주장한 구절을 소개할 것 같으면 다음과 같다.

<과학이 과학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성경은 신학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여러 사실들(진리)의 보물 창고이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마치 자연철학자들이 자연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같다. 기독교신학자들의 의무는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에 관해서 계시하신 모든 사실들을 수집하고, 확인하며 순리대로 연결시키는데 있다. 모든 진리들은 성경에 있다. 신학자는 여러 사실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가운데서 과학자들이 자연을 다스리듯이 같은 법칙에 따라 신학자들도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신학교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모든 원리들은 사실들 (Fact)에서 나오는 것이지 추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27)

으로 핫지가 생전에 정면으로 마주쳤던 이데올로기는 1859년에 간행된 찰스 다윈(Charles Dawin)의 진화론이었다. 진화론은 당시 학문의 여러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만 아니라 신학에까지 큰 악영향을 끼쳤다. 다윈의 진화론이 제기되기 전에 이미 성경 연구에 있어서 고등비평이 시작되었지만 다윈의 진화론이 널리 소개됨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파괴시키는 고등비평적 연구는 더욱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핫지는 조직신학자로서 좌시할 수 없었다. 창조설이 도전을 받는다는 것은 곧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도전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간행되고 다윈의 남태평양 항해기가 출판되자 핫지는 그것들을 모두 읽었다. 그리하며 15년이 지난 1874년 핫지는 비로서 <다윈 주의란 부엇인가>를 집필하여 간행하였다.

 

맺는 말

핫지는 서구사상이 분열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과학이 물질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현실로 이끌어 가고 있었고 인간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합리화, 기술화, 방법화, 정밀화 ,효과화는 날이 갈수록 상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공시에 공리주의(功利主義)사상은 낭만주의사상과 병행하고 있었다. 인간생활의 모든 면에 있어서 효과의 극대화는 19세기 후반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고의 가치요 목표이기도 하였다. 과학적 사고의 합리성과 낭만주의적 감성을 동시에 추구하려고 시도하는 당시의 지성인들을 상대로 핫지는 기독교의 진리를 변호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구나 영국에서 극성을 부렸던 이신론(이신론자들에 대해서 핫지는 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의 철학자 아우구스트 콤트 (Auguste Comte)는 종교를 과학적 사회학으로 대치시키려는 주장에 대해서 그는 가차없이 비판하였다.28)

지는 종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과학사상을 비판했을 뿐 만 아니라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아 전통신학에서 이탈하여 신학의 궤도를 수정한 Hartford Horace Bushnell을 비롯하여 Andover E.A.Park 그리고 프린스톤 출신의 후배요 친구의 J.W. Nevin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Nevin에 대한 우정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지속하였다.29)

으로 언급하려고 하는 문제는 19세기 중반기를 전후하여 일어났던 미국 서부지역을 중심한 부흥운동이다. 이 운동의 주역을 담당했던 중심인물은 챡스 피니(Charles Finney)였다. 핫지는 피니의 부흥운동 자체를 무시하거나 비난하지 안하였다. 다만 그의 주장이 성경의 교리에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을 뿐이다. 피니는 주장하기를 인간은 스스로가 노력만 할 것 같으면 자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핫지는 피니의 주장에 대해서 침묵할 수 없었다.30)

지의 신학사상은 시종여일 했다. 1872년 핫지는 교수생활 50년을 맞이하는 기념석상에서 말하기를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새로운 신학사상이 결코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데 나는 감히 주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I am not afraid tosay that a new idea never originated in the Seminary)31)

 


1)세계 4대칼빈주의 신학자를 지적할 것 같으면 다음과 같다.

Charles Hodge (1797-1878)

Abraham Kyper (1837-1920)

Herrman Bavinck (1854-1921)

B.B.k Wirfield (1851-1921)

만약 5대 칼빈주의자로서 한 사람을 더 추가시키라고 할 것 같으면 스코틀랜드의 역사신학자요 Hodge의친구였던 William Cunningham (1805-1861)을 포함시킬 수 있다.

2)챨스 핫지의 전기는 그의 아들 A.A. Hodge가 쓴 < life of Charles Hodge>(1881)가 있다. 1969 Arone PRess에서 재판(개정판)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나 체제에 있어서 하등에 변화가 없다. 이하 생략하여 “Hugh Hodge, Princetonims 1769-1776 biographical Dictiona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0), pp. 295-297.

3)A.A.Hodge, Life, p.5. 영국의 크롬웰장군스코틀랜드를 점령하자 스코틀랜드에서 살고 있던 거주민들을 반 강제로 북아일랜드에 이주시켰다. 그 곳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아일랜드에 기근이 닥치자 집단적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을 가리쳐 Scottich-Irish라고 부른다.

4)Mark A. Noll, ed., Charles Hodge, The way of Life )The PAulist Press, New York, 1987), p.4.

5)Ibid.,p.4. 이보형, 미국사개설 (일조각, 2005), pp.96-97

6) Mark A. Noll, ed., Ibid, p.5.

7) Joseph H. Jones, The life of Asbel Green, (New York, 1849)

Belclin C. Lane, Democracy and the Ruling Elderiip: Samuel Millers Response to Jension Betiueen Clerical and lay Authority in Early 19th-Century America (1976) dl 논문은 1976년 프린스톤신학교에 제출한 신학박사 논문임. 홍치모, “프린스톤신학교 설립의 역사적 배경”, 신학지남(1983), 50, 1, pp.84-103.

8)W. Andrew Hoffecker, 홍치모 역, 프린스톤 신학사상, (한국로고스연구원, 1991), pp.15-83.

9)Mark A. Noll, ed., op. cit., p.7.

10)A.A. Hodge, The life of Charles Hodge, (New York, 1969), p.18.

11)Mark. A. Nall, op, cit., p.8.

12)Mark. A. Nall, Ibid.,p.9.

13)A.A.Hodge,op.cit.,The Life,p.65.

14)Jerry Wayne Brown, The Rige of Biblical Criticism in America, 1800-1870, The New England Scholars, (Wesleyan University Tress, 1969), 3장 및 6장을 참조할 것. 훗날 핫지는 로마서 주석을 집필할 때 Moses stuart의 사상을 비판하였다.

Stephen J. Stein, Stuart and Hodge on Romans 5:12-21:An exegetical Controversy About Original Sin Journal of Presbyterian History 47 (1969.12): pp.340-358.

15)Sidney E. Mead, N. W. Taylor, 1786-1858: A conneticut Liberal (Chicago, 1942). 핫지는 훗날 Princeton Reviewtk 에서 N.W. Taylor의 신학사상을 비판하였다.

16)A.A.Hodge, The Life, op. cit., pp.92-103. 핫지의 신부는 Benjamin Franklin의 증손녀 이다.

17)Mark A. Noll, op.cit.,p.14.

18) Philip Schaff, Germany; Its Universities, Theology and Religion (1857).

19) Mark A. Noll, op.cit., p.14.

20)A.A.hodge, The Life of Charles Hodge,p.160.

21)R.T.Handy, History of Union Theological Seminary,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1987)

22) Georgy Marsden, The Evangelical Mind and the New Scdhool Presbyterian Experience, (Yale University Press,1970)

23)Mark A. Noll, op. cit.,p.16.

24)Mark A. Noll, Ibid.,p.17.

25)Mark A. Noll, Ibid.,p.17.

26)S. Ahlstrom, The Scollish philosophy and American Theology, Church History 24, (1955, 9),p.265.

27)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1872-1873), vol I, pp.10-13.

28)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I. pp.254-261

What is Darwinism? (1874), pp.173-177.

29)George h. Shrivien, Passages in Friendship: John W. NEvin to Charles Hodge, 1872, Jornal of Presbyterian History, vol 58. (1980), pp.116-122.

30)Charles Hodge, Finneys LEcures on Theology Biblical Repertory and Roiceton Review 19(1947.4), pp.237-277.

31)A.A.hodge, Life of Charles Hodge(1880), p.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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