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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편◑/정통 교리사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생애와 신학사상

by 【고동엽】 2009. 3. 31.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생애와 신학사상 / 홍미영

A. 서 론

B. 시대적 상황

1. 스위스의 정치적 조건

2. 스위스의 종교개혁적 상황

C. 쯔빙글리의 생애와 사역

1. 쯔빙글리의 성장과 교육

2.글라루스(1506-1516 )와 아인지델른(Einsiedeln: 1516-1518)의 쯔빙글리

3. 취리히에서의 쯔빙글리

D. 쯔빙글리와 그의 신학

1. 쯔빙글리와 루터의 대조

2. 쯔빙글리의 신학사상

1) 신학의 원천과 과제로서의 성서

2) 섭리와 예정

3) 교회와 국가

4) 성례전

E.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만찬 논쟁

F. 결 론

참고문헌

A. 서론
칼빈과 더불어 개혁파 교회(Reformed Church)의 창설자인 쯔빙글리는 성서와 고전교부들, 그리고 스위스의 애국적

인문주의에 그 사상적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 칼빈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칼빈의 그늘에 가려 정당한 평가와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개혁교회의 창시자를 칼빈으로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개혁교회운동은 쯔빙글리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그의 종교개혁의 출발은 용병제로 타락한 민족과

민중을 향한 사랑이었다. 결국 그는 하나님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종교의 자유와 스위스의 독립을 위해

47세의 젊은 나이에 불꽃같은 삶을 마감한 순교자였다.

본 소고는 쯔빙글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쯔빙글리의 생애와 신학사상, 그리고 루터와의 성만찬

논쟁과 더불어 루터와 쯔빙글리의 대조를 통해 쯔빙글리의 삶과 사상을 정리해 보았다.

쯔빙글리에대한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기 때문에, 필자의 임의대로 발췌하였으므로 더 깊은 연구를 원하면,

본 소고의 참고문헌을 보기를 바란다. 본 소고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한 쯔빙글리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고, 그의 정신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었으면 한다.

B. 시대적 상황

1. 스위스의 정치적 조건

16세기의 스위스는 유럽의 여러나라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여럿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연합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원시적인 튜톤족 유형의 행정체제 혹은 마을로 이루어진 연방체제 혹은 소규모적 공화국으로서 공동체의 실행권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자치주들(cantons)은 모두 독립체였으나 공동적인 연맹으로 묶여져 있었으며, 연방국기를 사용했다.

이러한 역사적 시작은 13세기에 쉬비츠(Schwyz), 우리(Uri), 운터발덴(Unterwaiden) 등의 삼림자치주들이 봉건영주들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고서 영원한 동맹을 결성함으로 시작되었으며, 각 자치주들은 스스로의 해방을 보전하도록

상호 도움을 준다는 서약을 하였다. 1291년 8월에 시작된 이 동맹은 정복, 매입, 자유연합 등의 형태로 점차 그 세력이

증가되어, 루체른(Lucerne), 취리히(Zurich), 베른(Bern), 글라루스(Glarus), 쭈그(Zug), 프라이부르크(Freiburg),

바젤(Basel), 샤프하우젠(Schaffhausen), 솔로투른(Solothurn)이 그리고 나중에 (Appengell)이 동맹에 가입하여

종교개혁 당시에는 모두 13개의 캔톤들이 되었다. 다른 지역들은 동맹회원은 되지 않았으나 자체 방어를 구축했는데,

그러한 곳으로는 발레와 성 갈렌 수도원에 부속된 도시와 변방이었다. 이들 13개 자치주들은 각각의 독립성과 행정체계들을 고수하였지만,

이러한 모든 도시의 최종적인 권력은시민으로서의 온전한 권리를 가진 모든 자유민에게 있었다.

독일어 사용권인 스위스는 주교의 통치를 잠깐 겪었지만, 이들이 교황청과 가졌던 관계는 전적으로 정치적이며 사업적인 것이었다.

이들 상거래의 주된 상품은 교황의 수비대와 교황의 이탈리아 전쟁수행에 필요한 보병이었는데 이러한 업무는 양측의 사절단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스위스의 대부분의 영토는 마인츠와 베상송의 대주교의 관할구역에 따라서 교회 행정체제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아레강은 이 두 지역의 경계선이었다. 황량한 산악지대는 아무런 교구에 속한 것은 아니었으나 막연하게 마인쯔 지역에 속한다고 주장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서 스위스 사람들은 모든 교회적인 사항으로부터

자유로웠르며 교회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배웠다.

2. 스위스의 종교개혁적 상황

스위스 교회도 독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매우 부패하여 개혁을 시급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무식하고 미신적이며, 부도덕하여 평신도들에게 악한 본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독신제도로 말미암아

축첩이 흔히 볼 수 있는 관행이 되었으며, 콘스탄스 주교는 첩에게서 태어난 자녀 한 명당 4길더의 벌금을 물리고 이를

용서해 주었는데, 그 수입이 한 해에 무려 7,500길더에 이르렀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의 교회는 필요한 경비를조달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판매하였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지방자치가 잘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여도,

대지주인 수도원들이 고율의 세금을 징수하였으므로 농민들의 생활이 궁핖하였다.

스위스 주민들은 외국의 용병제도로 인해 부패했다. 16세기가 시작되면서 이웃 주변국들과 상호교제가 이루어짐으로

스위스의 관습에 변화가 일어났다. 부르군디의 왕 찰스에 대해 계속 승리함으로서 전쟁을 치루고 있던 나라들은 스위스

군대를 용병으로 채용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따라서 스위스 자치주들은 최대의 금액을지불하는 곳으로 군대를 보내는 습관이

정착되었고, 이러한 용병들은 고향에 돌아와서 받은 돈으로 난폭한 생활을 유지함으로 부도덕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스위스 전 연맹에 속한 주민들의 타락을 가속화시켰다. 연맹은 또다른 방법으로 타락했는데, 스위스의

보병을 거래하는 커다란 힘은 교황청과 프랑스였다. 따라서 이들은 서로 상주 대리인을 파견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용병을 파견하도록 지도급 시민들에게 연금을 지불하였다. 쯔빙글리도 어린 시절에는 교황청이야말로 스위스가 동맹을

맺어야 하는 유일한 세력으로 믿었으며 수년동안 교황청의 연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쟁에 군목으로 참가한 경험 후, 그 폐해를 절감하고 종교개혁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를 비판했으며,

취리히로 가서도 계속 이를 반대했는데, 결국 그는 외국인 용병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반면에 상황의 진보를 보여주는 희망적인 표식들도 존재했다. 스위스는 전제군주국가가 아니라 각 주가 자치를 하는

연방 국가였기에 일찍부터 자유에 대한 열의가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향은 스위스 사람들로 하여금 강제나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게 했고 억압에 대한 항거를 행동화하게 했다. 지방자치를 통한 자유로운정치참여는 개혁운동에 대한

공감과 이해의 분위기를 조성케 하는데 중요한 바탕을 이루었다.

학문의 부흥은 사상의 자유를 자극했으며, 교회의 부패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바젤대학교는 각종 학문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곳에서 비엘 출신의 토마스 비텐바흐는 1505년에서 1508년 사이에 신학을 교수하면서 면죄부, 미사,

성직자들의 독신제도를 공격하고 비판했으며, 1524년 다른 7명의 신부들과 결혼했다. 쯔빙글리는 1505년에 그의 강의를

들었으며 많은 지식을 획득했다.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는 바젤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기를 보냈으며, 헬라어판

신약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책들을 출판했으며, 바젤에서는 또한 루터의 몇몇 작품이 재인쇄되어 스위스 전역으로

퍼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바젤이 아니라 취리히로부터 진전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인물은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적 문화와

대중적인 설교가로서의 능력과 교회개혁가로서의 실질적인 정력을 고루 갖추고 있었던 쯔빙글리였다.

C. 쯔빙글리의 생애와 사역

1. 쯔빙글리의 성장과 교육

울리히 쯔빙글리(Ulich(Huldreich) Zwingli)는 독일어권 스위스의 주도적인 개혁자로 1484년 1월1일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났다. 거기서 그의 아버지는 마을의 행정관이었고 유복한 환경이었다. 베젠의 참사회장인 그의 아저씨가 1496년부터 1498년까지

바젤과 베른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베른에서는 인문주의자 하인리히뵈플린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500년부터 1502년까지 2년동안 콘라드 켈티스가 고전학 대가로 있었던 비엔나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502년에서

1506년까지는 바젤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1504년 인문학 학사로 졸업하고 2년후 석사학위를 받았다.

바젤에서 그는 인문주의자 토마스 비텐바하(Thomas Wyttenbach, 1472-1526)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쯔빙글리는 그가

성서의 유일한 권위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용서의 유일한 대가라는 것과 면죄부의 무용함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가르침 아래 쯔빙글리는 자연스럽게 기독교 믿음의 초기 원천으로 돌아갈 것을 열망하고 일반적으로 미신이라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는 인문주의자가 되었다.

2.글라루스(1506-1516 )와 아인지델른(Einsiedeln: 1516-1518)의 쯔빙글리

1506년 쯔빙글리는 글라루스 도시의 교구 사제가 되었다. 글라루스에서 그는 바젤의 마지막 무렵에 느꼈던 환경의

영향력을 버리지 않고서 인문주의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헬라어를 공부했고 히브리어를 시작했으며

에라스무스 작품에 몰두했다. 그는 열심히 고전, 성경, 교회 교부들을 공부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설교자가 되었고 북부 소수 인문주의자 그룹의 존경받는 일원이 되었다.

글라루스에서 그는 글라루스 파견대의 군종사제로서 1512, 1513, 1515년 세차례에 걸쳐 자기 지역 출신들과 함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였다. 그 대가로 그는 교황 보좌 군종사제라는 직함을 얻었고 교황 연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의 참여경험은 스위스인들이 고용되어서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이 제도의 위해성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하였고, 그러한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죄악임을 확신하게 되자 그는 용병관례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스위스 군인들을 쓰기 원하는 프랑스가 글라루스 교구 활동을 방해하여, 그는 자리를 사임하지 않는 채 1516년

아인지델른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여기서 그는 설교자와 학자로서 그 명성이 더욱 커졌다. 또한 여기서 그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베른하르트 잔존(Bernhard Sanson)에 의한 면죄부 판매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이제 그는 진지한 히브리어 뿐만 아니라 알프스 북부 최고 헬라어 학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항상 루터에게 빚진 것을

인정하기 꺼려한 그는 후에 복음적 입장을 수용한 것을 아인지델른 체류기간으로 돌렸다. 1518년 그는 교황의 지도 신부

임명을 곧장 수락하였으나, 당시 그의 사생활은 순결서약을 깼다는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 취리히에서의 쯔빙글리

쯔빙글리의 용병 파병 반대와 설교자와 학자의 명성에 힘입어, 그는 1518년 취리히에 있는 대 민스터교회의 유급사제로

선출되어 1519년 1월1일 취임하였다. 그는 곧 전통적(스콜라)해석에 의지하지 않고 한절한절 마태복음부터 주석을

시작하였다. 1519년 9월 그는 전염병으로 거의 죽을 뻔 했는데, 이 체험은 진지한 자기 성찰을 일으켰고, 하나님의 사명에 대한

강한 의식을 일으켰다. 그의 영적 생활은 1520년 사랑하는 그의 동생과의 사별을 통해 더 깊어졌고 같은 해 교황의

연금을 사절했다. 1521년 그는 루터의 저작을 세세히 연구했으며, 계속 용병제도에 강하게 반발하는 설교를 했고

취리히시는 결국 1523년 1월 이를 폐지했다. 이러한 개혁으로의 깨달음은 독일의 개혁가처럼 번민과 고통에 찬 여로는

아니었다. 이는 인문주의자들의 방법론에 의한 부지런한 성경 연구, 교회 성직자들의 부정과 부패 및 용병제도에 대한

비판정신의 결과였다.

이렇게 쯔빙글리가 오랫동안 개혁 운동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가 강력하게 개혁운동을 시작한 것은

1522년이었다. 그 해 3월 일부 시민들이 성서의 유일한 권위를 주장한 쯔빙글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순절금식을 지키지

않았다. 이들은 쯔빙글리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함으로서 자신들을 정당화시켰는데, 이들에 의하면 쯔빙글리가

성경에서 명령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기독교인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즉시 이들을 방어하는 글을 썼다. 즉,「음식에 관한 선택과 자유; 범법성과물의; 특정한 기간 동안에 고기를

금지시킬 권위가 있는 것인가」(1522년4월16일)를 통해서 그는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책임은 개인에게 있으며, 개인은

공개적인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자유를 사용할 수있다고 선언하였다.

취리히를 관할하고 있던 콘스탄츠 주교는 혁신을 억누르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주의 시 정부는 신약성서는 금식을 의무로 하지 않았으나 좋은 의식으로서 준수되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성경을 증거로 히여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계속 설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 후얼마 안 되어서 보다 비판의 범위를 넓혀 성직자들의 독신제도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이를 명령하는 자들 자체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다고 선언하였다. 게다가 쯔빙글리가 취리히 주 정부가 제안된 종교정책의 변화를 수용하면

그 권위가 더 강화될 것이라고 하며 설득하자, 주 정부는 그가 제시한 변화를 점차 도입하였고,1523년1월 성경만을

표준으로 하는 공개토론을 명령했다. 이 토론을 위해 쯔빙글리는 짧은 형식의 67개 조항을 준비했는데, 이것은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함을 확인하고, 미사의 희생제사적 성격, 선행의 구원적 효과, 중재자로서 성자의 가치, 수도원 서약의

구속성, 연옥의 존재등을 부정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가 교회의유일한 머리임을 선언했고 성직자의 결혼을 옹호했다.

토론의 결과 시장이 쯔빙글리의 가르침은 정당성이 있으며, 따라서 그는 이단이 아니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취리히 자치주는 이렇게 해서 실제적으로 쯔빙글리의 견해를 채택했으며, 개혁자는 더욱 확신있게 개혁을

추진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몇몇 성상 파괴 폭동을 포함하여 도시 안에 긴장이 고조되자, 쯔빙글리와 그의 동료 목사 레오 쥬드(Leo Jud,1482-1542)는

미사와 성상의 사용을 다루는 또 다른 공개토론을 제의했고, 이 두 번째 토론은 1523년 10월 심의회 형식으로 열렸다.

쯔빙글리와 쥬드는 성상숭배를 공격하고, 미사의 희생제사적 성격을 부인하고, 평신도에게 떡과 잔을 다 주는 것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고, 모국어 예배를 주장했다. 심의회는 신중하게 움직여, 라틴어 미사와 떡만 주는 것을 고수하고,

교회로부터 개인 소유 성상만 조용히 제거할 것을 허락했다.

로마와 공개적으로 분리하게 된 결정적 변화는 1524년과 1525년에 왔다. 1524년 6월과 7월에 노동자들은 시의회의 명령을 받아 성상,

유물을 교회에서 제거했고 대 뮌스터(Gro m nster) 교회에서 오르간을 벽으로 봉했다. 그 해 12월에는 거의

저항없이 수도원들이 해체되었고, 그 재산은 교육과 빈민 구제를 위해 쓰여졌다. 미사도 1525년 수난주간까지 계속되다가 폐지되었고,

떡과 잔을 다 주는 단순한 모국어 예배가 확립되었으며, 주교의 사법권은 폐기되었으고, 예배는 설교를 중심한 독일어로 드려졌다.

옛 예배의 교리와 의식은 제거되었고, 쯔빙글리는 그의 주저「참 종교와 거짓종교 해설」

(The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에서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고 정당화 하였다. 그 동안 쯔빙글리는

1524년 4월 2일 1522년 초 비밀리에 결혼한 바 있는 과부 안나 라인하르트와 공식적으로 결혼하였다.

쯔빙글리는 또한 스위스 다른 지방과 인접 독일 지역의 교회개혁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힘껏 협조하였다.

바젤은 주로 1522년부터 거기서 계속 활동한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에 의해

점차 복음주의로 전향해, 1529년 미사를 페지했다. 스위스 캔톤 중 가장 큰 베른은 복음주의의 많은 준비와 노력,

그리고 쯔빙글리가 주도한 공개토론에 힘입어 1528년 개혁에 성공했다.

그러나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쭈그 등의 오랜 자치주들은 아주 보수적이었고 취리히의 변화에 반대했다.

1524년 그들은 이단에 대항하는 연맹을 결성했고, 1526년 스위스 연방은 바덴에서 종교토론을 개최했지만 쯔빙글리는

참석을 거절했다. 이 때 취리히를 제외한 모든 캔톤은 아직 공식적으로 카톨릭이었고, 토론 결과 카톨릭이 승리했다.

취리히는 당분간 고립되었지만 베른이 1528년 공식적으로 개신교화하자, 취리히, 콘스탄스,베른등 개혁파 도시들은

그 해 6월 "기독교 시민 동맹"을 출범시켰다. 이로 인해 스위스 연합이 분열되었고, 보수적인 로마 캔톤들은 "기독교 연맹"을 결성하여

대항했다. 1529년 6월 25일 카펠에서 강화조약이 취리히와쯔빙글리파에게 유리하게 체결되었지만 평화는 단지 휴전에 불과했다.

1531년 취리히가 곡물수송을 금지하며, 로마 캔톤들에게 복음주의 설교를 강요하자 전쟁이 재개되었다.

취리히는 쯔빙글리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전쟁준비를 제대로 못해, 1531년 10월 로마 캔톤들은 카펠에서 취리히 군대를

대파했고 쯔빙글리도 여기서 전사했다. 그는 카톨릭 고해신부의 도움을 거절한 후 죽었는데, 그의 육체는 그의 재가

개신교 성자 유골로 수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능지처참되어 불에 태워진 후 똥과 함께 섞였다.

전쟁의 패배와 쯔빙글리의 죽음으로, 취리히는 개신교 자치주들의 지도력을 상실하였으며 종교개혁의 주도권은 점점

베른과 제네바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제네바는 연맹의 동맹으로는 활약했으나 회원국은 아니었다.

뒤이은 강화조약(제2차 카펠 평화조약)에서 취리히는 동맹을 포기했고, 각 자치주에서 내부의 종교문제를 규정할

완전한 권리가 주어졌다. 따라서 독일처럼 스위스도 종교개혁은 파괴되지 않았으나 나라 전체를 석권하지 못한 채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도들이 자치주를 분할해서 서로서로 사이좋게 살아가는 형국이었다.

취리히 교회의 리더쉽은 쯔빙글리의 정치적 야망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유능하고 화해적인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에 의해 계승되었다.



D. 쯔빙글리와 그의 신학

1. 쯔빙글리와 루터의 대조

이 두 개혁가는 모두 평민출신으로 일반 대중을 잘 이해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관리의 아들이며, 수도원장의 조카였고,

도시 생활에 익숙한 인문주의자에게 교육을 받았다. 이 둘은 모두 경건한 부모와 교사들에 의해 카톨릭 신앙으로 양육되었지만

루터가 보다 이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리하여 끝까지 그 교리중 일부, 특히 성례론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양자 모두 신학 다음으로 음악과 시를 사랑했고, 쯔빙글리는 별다른 내심의 갈등없이 교황제도와 결별했지만,루터는

점진적으로 이러한 단계들을 거쳤으며, 심한 양심의 번민을 경험했다. 쯔빙글리는 합리주의로 루터는 신비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지만 모두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신봉했다. 쯔빙글리는 공화주의자였으며, 종교적인 개혁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개혁까지도 꿈꾸고 있었지만, 루터는 군주제를 신봉했고 정치나 전쟁으로부터는 초연하고자

했으며, 신앙과 교리의 개혁에 전력을 다했다.

쯔빙글리는 그 지성의 날카로움과 확신에 대한 용기에 있어서 루터와 동등했고, 온건한 태도와 남을 용납하는아량에서는 루터보다

뛰어났으나, 감화력, 사상적 깊이, 독창성에 있어서는 루터에 미치지 못했다.

루터는 현대적 독일어의 창조자였고, 일상어로 된 성경을 제공해 주었다. 쯔빙글리는 라틴어나 지방의 방언을

사용해야만 했고, 그의 동료 레오 쥬드가 제작한 스위스의 성경은 독일어 사용권 스위스에서만 사용되었지만 쥬드의

성경이 더 정확할 뿐만 아니라, 그 이후 성경 주석의 발전에 발 맞추어 개정을 거듭했다. 쯔빙글리는 루터가 독일인들

사이에서 누린 것과 같은 인기나 존경은 받지 못했으나, 두 사람은 각기 자기의 상황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인간적인 대조 외에 두 개혁가의 신학을 대조해 보면 쯔빙글리 신학의 특징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데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쯔빙글리는 인문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의 사조는 인문주의적 경향이 압도적이었고, 인문주의가

고대의 이상, 철학, 예술, 문학, 원전(原典) 등 옛 유산을 존중한 것과 같이 쯔빙글리는 성서와 초기 교부들의 저작으로

되돌아갔다. 그에게 성서는 개개인의 행위와 국가의 윤리와 교회의 실천을 통제하는 신적 율법이었다. 루터의 경우와 같이 종교적 체험의

결과로 개혁자가 된 것이 아니라 고전 연구와 성서 연구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쯔빙글리는 항상 온건한 성서적 인문주의자로 머물러

있었다. 이에 비해 루터는 타울러와 스타우피츠의 신비주의 학파를 거치며 번민했고,

수도원의 극심한 도덕적 치리를 경험한 후에 비로소 이신칭의의 교리가 주는 평화와 위안을 경험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와 루터사이에 게재하는 차이점의 근원은 성서에 대한 루터의 이해가 주로 그의 종교적 체험에 두고 있는 반면에, 쯔빙글리의

성서 이해는 주로 그의 인문주의적 수련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쯔빙글리의 개혁활동의 범위는 처음부터 루터의 그것보다 훨씬 광범위하였다. 쯔빙글리는 성서의 학도가 되기 전에 인생을 알기

위하여 배웠으므로, 그가 국가와 정부까지도 그의 개혁활동의 범위내에 포함시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그는 신권정치의

이상을 따랐다. 루터는 국가와 교회가 필요한 경우에는 제휴할수도 있다고 암시하였으나, 쯔빙글리는 국가와 교회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관계와 같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에 의하면 속권은 교회의 질서를

감독해야 하며, 한편 교회의 성서는 국가의 법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반 법률의 타당성은 그것이 성서에

부합되느냐에 달려 있으며, 정부가 기독교적 표준에 미달되면 그 때에는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또한 루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근본주제로 삼고 영적 순례의 고뇌의 길을 따랐다면, 쯔빙글리는 애국적이며 지적인

사고의 길을 따랐다. 쯔빙글리의 애국심은 당시 스위스의 많은 부락과 도시들이 수입의 원천으로 삼고있었던 용병제도의 실행에

반대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수세기 동안 스위스인들은 군인으로서 명성을 날렸고, 그 명성으로 인해 외국의 군주들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쯔빙글리 시대에는 이러한 제도가 일반적으로 용납되었으며, 반대하는 소리가 거의 없었다.

쯔빙글리 자신도 용병제도를 지원했으며, 이득도 보았지만, 군종사제로서 전쟁을 경험한 후, 무가치한 일로 생명을 잃는

것과 돈에 의해 용병들이 쉽게 팔려가는 것을 보고 용병제도를 공격하게 된다. 해가 지나면서 이러한 애국적인 관심은 교회의

개혁과 깊은 관련을 맺게 된다. 따라서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은 항상 민족주의적이며 정치적인 색채를 띠며, 이러한 색채는

그가 복음의 법에는 개별적인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쯔빙글리의 정치적 활동은 그의 태어난 고장이나 스위스의 문제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그는 헤세의 영주 필립(Landgrave Philip of Hesse)과 협력하여 매우 광범하고 과감한 정치적 책략에 몰두하였다.

그의 계획은 찰스 5세를 폐위하고 헤세의 필립을 독일의 황제로 등극시킨다는 것이었는데, 만일 루터가 이 계획을

알았다면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쯔빙글리를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루터는 복음이 세속적인 무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쯔빙글리는 1531년 카펠 전투에서 군복을 입은 채 쓰러졌으며, 쮜리히에 세워진 그의 기념비는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검을 들고 서 있다. 이러한 점도 루터와 대비를 나타내는 뚜렷한 실례(實例)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쯔빙글리가 루터의 영향을 받았는가하는 문제이다. 쯔빙글리 자신은 루터의 제자라고 불리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쯔빙글리는 1518년 이후에 나온 루터의 모든 저작들을 잘 알고 있었다. 죄와 회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총

등에 관한 그의 많은 표현은 듣는 자에게 루터의 사상과 같은 인상을 준다.

또한 그의 '67개 신앙개조'에는 루터의 사상을 반영하는 많은 개념들이 있다.

쯔빙글리는 자기가 루터와는 상관없는 독자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주 강조하였다.

"나는 루터의 이름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저작에서 읽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라고 하였다.

한편으로 쯔빙글리는 루터의 사상을 그대로 물려받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나도 비판적이었고,

기독교에 대한 거의 인문주의적-철학적 개념은 특별히 그의 체계적 저작 가운데서 차츰 더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넷째,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종종 루터의 경우와는 달리 참된 종교적 동기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방면에 있어서 루터와 쯔빙글리의 차이점은 몇 가지로 지적될 수 있다. 루터는 유아세례를 장려했는데, 이는 세례가

어린 아이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유아 세례를 행하는 이유로서,

세례가 그의 국민교회의 권속을 증가시키는 수단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루터가 의인의 교리를 강조한 것은

이 교리가 그의 영혼에 평화를 가져왔기 때문이었으나, 쯔빙글리는 이 교리가 행함으로 공적을 쌓는다는 로마교회의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무기가 되기 때문에 강조하였다. 루터는 예전을 존중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예전은 진정한

은총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그리스도께서 에전을 제정하시고 명하셨기 때문에 기독교의 외적

표시로서 그것을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상이점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의 추진력이

된 것은 그의 종교적 사상이었고, 단지 신학적 체계를 수립하는데 있어 루터와 달랐던 것이다.

다섯째,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사적 의의이다. 쯔빙글리는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와 칼빈과 같은 영도적 위치를 가지지

못하였다. 루터의 경우에는 그의 적들과 비방자들에게 계속하여 공격을 받았으나, 또한 죽을 때까지 추앙을 받았다.

쯔빙글리의 경우에도 공명자들과 지지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쯔빙글리를 자신의 영도자로 생각지 아니하고, 스스로를

독자적 신학자와 사상가로 자처하였다. 또한 쯔빙글리의 문헌적 공헌의 미약성을 들 수 있다.

루터와 칼빈의 경우처럼 심오한 사상을 내포한 대작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많은 문서를 남겼고, 그의 글들은

시적 영감이 흐르고 있으나 학문적 깊이가 결여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문헌적 공헌의 빈약은 그의 사상을 체계있게

후대에 전승시키는데 많은 약점을 안고 있고, 후대 교회의 주목을 끌지 못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2. 쯔빙글리의 신학사상

1) 신학의 원천과 과제로서의 성서

쯔빙글리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로서 성경에 접근했다. 그는 기독교의 참 본질을 재발견하는 길은 성경의 메시지를 발견해서

기독교의 갱신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성경은 영감과는 별도로 역사적인 우선성이 있기 때문에 후대에 생겨난

전통보다도 더 신빙성이 있는 증언이다. 또한 성경은 영감을 받았음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이며 인문주의적인 주장으로 인해서

우선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기초가 되는 면에서도 우선성을 지닌다. 그는 1523년 논쟁을 위해 편찬한 67개 신조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쯔빙글리도 "하나님의 말씀"이란 성경의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행동이라고 이해했다.

이러한 활동적인 말씀에 의지해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진다거나 성취되지 않기보다는 온 자연의 질서가

변경되는 편이 더 쉽다"고 말했다. 따라서 성경은 그러한 말씀의 표현이므로 오류가 없으며 성취될 것이 확실하다.

또한 그는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결코 길을 잃을 수 없다. 우리는 그의 말씀안에서 혼미하게 되거나,

당혹하게 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 당신의 영혼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생각되거든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붙드시오.

그러면 영혼은 깨우침과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영혼의 전체적인 구원과 의, 혹은 의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담겨져 있음을 인식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한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하나님의 본질됨의 지식-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올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의 실체와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는 풍뎅이가

인간을 아는 쪽이 더 많다는 표현으로 비교해 볼 수 있겠다. 이러한 현저한 차이는 창조자와 피조물을 나누는

현격한 거리감 때문이며, 쯔빙글리는 이러한 거리감을 예리하게 늘 인식하고 있었다.

2) 섭리와 예정

쯔빙글리의 하나님 관념은 절대자 관념과 연결된다. 그가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는 논증은 성경에 의존해 있다기 보다는,

하나 이상의 절대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불가능이라고 보는데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만물은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주장을 아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에게는 감추어진 것이 전혀 없으며, 알려지지 않은 것도 전혀 없고,

하나님의 장중을 벗어난 것도 전혀 없으며, 하나님에게 불복종하는 것도전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창조가

비록 모순된 듯하게 보일지라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여서 믿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지혜를 우리 인간들에게 다 계시하시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원대한 계획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의 섭리론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안녕과 존속을 위해서 계신다는 확신에 대한 재천명일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이러한 시각에서 예정론을 보는데, "예정과 자유의지와 공로의 전반적인 운영은 섭리에 의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실 뿐만 아니라 모든일을 행하시기 때문에 "이차적인 원인은 원인이라고 불리워져서는 안 되고",

하나님 한 분만이 만물의 일차적인 원인이시다. 만일 사람이 이 사실을 부인한다면 이교도 철학자들까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본성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절대적인 예정주의를제외한 또 다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에 침해가 될 뿐이다.

이러한 예정론에 근거해서 쯔빙글리는 구원을 행위에 의존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논박하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이지 인간 쪽의 노력의 결과는 될 수 없다. 성경에서 구원을 행위와 연결시키는 것 처럼

보이는많은 구절들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동시에 창조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까지 포함해서-하나님의 예정의 결과임을

생각하게 되면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선택된 자 안에서 하나님은 선행을 일으키신다. 그러므로 선행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선택된 자가 선행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택하심은 선한 행위까지 선택해 주신다는

의미를 갖는다. 반면에 버림받은 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설명해서 하나님은 유기된 자 안에서 악을 일으키신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악은 율법아래 있는 자에게만 전가될 뿐이고 율법을 넘어서 있는 하나님에게는 전가할 수 없다.

고대의 이교도인들과 아직까지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은 별도의 기준에 의해서 심판받기 때문에 선택된 자 가운데 있을

가능성이 크다-여기에서 쯔빙글리는 교황의 운명보다는 세네카나 소크라테스의 운명을 택하겠노라고 말했다.

3) 교회와 국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믿는 자들의 단체인 참된 교회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된 선택된 자들'

(electi que dei vountate distinati sunt ad vitam aeternam)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선택된 자들의 교회는 홀로

하나님께만 알려져 있다. 신앙은 선택된 자로 하여금 자기가 이러한 교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다른 권속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두 교회가 존재한 셈이다.

즉 교회의 예전에 참여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고 그를 고백하는 모든 자들로 구성된 '보이는' 교회와,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포함하는 '보이지 않는' 교회가 그것이다.

"우리는 또 하나의 거룩한 카톨릭, 즉 보편적 교회만을 믿으며, 이 교회는 가시적이기도 하며 혹은 불가시적이기도 함을

믿는다.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가시적인 교회는 하늘로부터 내려왔으며, 다시 말해서 성령의깨우치심에 따라서

하나님을 알며 포용하는 교회를 말한다. 이 세계의 모든 믿는 자들은 이 교회에 속한다. 신자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불가시적인 교회라고 부르지 않으며, 신자들의 눈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이 교회가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불가시적인

교회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하나님만이 아시며 스스로 알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시적인 교회는 로마의 교황이나 관을 가진 사람을 말하지 않고 전 세계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신앙한다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교회 안에는 내적인 신앙이 없으면서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거짓된 무리들도 포함

되어 있다. 그러므로 가시적 교회 안에는 선택된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의 일원이 아닌자들도 들어 있을 수 있다."

가시적인 교회는 불가시적인 교회의 징표이며, 주어진 직무가 복음의 선포이듯이 가시적인 교회는 직급에 따라서

훈련시켜야 하는 의무와 권위를 갖는다. 더욱이 이 교회는 지역사회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치리 책무는 개교회들

에 위임되어 있다. 또한 회중은 목회자를 누구로 삼을 것인가 지정할 수 있으며, 누가 회중을신앙으로 양육할 수 있을까

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사역자인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해서 판단할 따름이다.

쯔빙글리는 루터보다 훨씬 밀착된 교회와 국가의 연관성을 말했다. 이러한 생각은 율법의 기능을 이해하는 태도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데,

기독교의 법이 시민법보다 높다고 인정하지만, 이 두 법은 다같이 하나님의 법을 나타내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선택된 자의 무리에 들지 않음으로서 복음적인 법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도

시민법과 통치자들이 정한 법에서 명백히 드러난 대로 하나님의 법에 예속되어 있다. 더욱이 취리히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쯔빙글리는 교회와 국가가 병존하는 것처럼 말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교회"라고 부르는 단 하나의 기구가 정부(government)와

목회(ministry)라는 두 가지의 직능 혹은기능을 갖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정부와 예언이 다같이 필요한데, 예언이 우선적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몸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몸이 더 저급하고 낮은 부분이듯 이 정부가 없으면 교회도 없다.

다만 정부는 영적인 일과 거리가 먼 세속적인 상황을 통제하고 감독할 뿐이다." 쯔빙글리는 취리히의 정부를 구성하는

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면서 신정통치와 매우 유사한 정부의 운영을 꾀했다.

4) 성례전

쯔빙글리는 성례전을 각자가 내적으로 이미 소유하고 있는 은총에 대한 공식적인 증거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례전에 참가함으로서 각자는 교회의 일원임을 고백한다. 예전은 초자연적인 내용을 갖고 있지 않으며, 차라리

그것은 내적으로 이미 성취된 것을 나타내는 외적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성례란 징표 혹은 예전으로서 이것에 의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군사 혹은 군사가 되려고 함을 교회에게 증명해 보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에게 알린다기 보다는 교회 전체에게 알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믿음이 믿음을 확인해

주는 예전적인 징표가 있을 때에 한해서 완전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우리가

그것(신앙)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례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세례는 기독교인이 되는 첫 시작이며, 주의 만찬은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승리를

마음에 새기고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임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세례는 몸이 물로 씻음을 받는 의식이지만,

이 의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교회로 불러 모아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는 단지 내적 신생의 표시와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E.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만찬 논쟁
기독교 교리에 있어 쯔빙글리와 루터가 가장 다른 점은 성만찬 해석이었다.

이러한 불일치는 결국 복음주의 진영을 갈라놓았다. 루터에 있어 그리스도가 성찬에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한 말은

문자적으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봉헌된 떡과 즙에 임재하고,

떡과 즙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 의해 -죄 용서에 의해 구원에 이른 신자이든, 저주에 이른 불신자이든- 진짜로 받아들여진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루터는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임재한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523년 이후,

특히 실제적 임재를 격렬하게 배척했던 비텐베르크의 동료 안드레아스 칼슈타트(Andreas Bodenstein von Karlstadt)와

이 문제로 결별하게 된 이후에 실제적 임재는 루터의 성만찬에 관한가르침에서 점점 더 큰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칼 슈타트는 성만찬을 요한복음 6:63절("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에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영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1524년 후반 칼슈타트가 성만찬에 관한 세권의 소책자를 출판했고, 쯔빙글리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의 관계는 이 사건에 의해서 결정되었는데, 루터는 쯔빙글리를 자신의 예전의

동료였고 현재는 적인 칼슈타트일당으로 간주했다. 또한 1525년 1월말 루터는 「하늘의 예언자들에 대항하여. 성상과

성례의 문제에 있어서」(Against the Heavenly Prophets. In the Matter of Images and Sacraments)라는 논문을 통해

칼슈타트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쯔빙글리는 1524년 후반에 자신의 성만찬 이해에 본질적인 통찰을 획득했다. 문제는

"이것은 내 몸이요, 이것은 내 피다"라는 제정의 말씀의 의미였다.

1521년 화란의 인문주의자인 코르넬리우스 호엔(Cornelius Hoen)은 문제가 되는 마태복음 26:26의 "이다"(est)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

이다"(is) 또는 "--과 동일하다"(is identical with)라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한다"(라틴어: significat, 영어: signifies)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편지를 여러 사람들에게 보냈다. 쯔빙글리가 이 호엔의 주장을 들은 것은 1523년이었고

이것은 이미 그러한 경향을 보이던 쯔빙글리의 말씀에 대한 상징적 이해를 강화시켰다. 그 때부터 그는

성찬에서 어떤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도 부정했다. 그리스도는 떡과 잔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 확실히 영적으로 임재하시며,

신자들만이 성찬의 유익을 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떡과 포도주는 이미 임재해 있는 내적인 영적 은총의

외적 가시적 표지이고, 그래서 "먹는 것"은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edere est credere). 성찬은 감사와 기념의

공동식사이고 주님에 대한 충성을 공동 증언함으로서 신자들을 연합시킨다는 것이다.

1526년 이러한 대립된 해석은 격렬한 문서논쟁을 유발시켰다.

루터와 쯔빙글리 외에도 마틴 부처, 외콜람파디우스, 그리고 고지대 독일의 여러 신학자들이 참여했던 이 지상(紙上)

논쟁은 1528년까지 계속되었으며, 특히 루터와 쯔빙글리의 논쟁은 1527년과 1528년에 정점에 도달하였다.

1526년 루터는「광신도들에게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례(Sermon on the Sacrament of the Body and Blood

of Christ, Against the Fanaties)」를 출판하였고, 1527년 쯔빙글리는「우정있는 주석(Friendly Exegesis」을 통해 루터의

입장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루터는「"이것은 나의 몸이다"는 말씀은 여전히 광신도들에게 대적하고 있다(That these Words

"This is My Body" Still Stand, Against the Fanatics)」를 그 해 4월에 발표하였고, 다시 쯔빙글리는 6월에

「"이것은 나의 몸이다"는 말씀 가운데는 원래의 의미가 숨어 있다(That the words "This is My Body" Still have their Original Meaning)」는

논문을 통해 날카롭게 반격하였다. 1528년 3월 루터는「주님의 만찬에 대한 위대한 고백(Great Confession Concerning the Ldrd Supper)」

에서 짐짓 아랫 사람에게 겸손을 부리는 논조로 말하여 쯔빙글리를

분개하게 하였다.

이와같이 어느 쪽도 관용을 보이지 않았다.

쯔빙글리가 보기에 루터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 주장은 불합리한 카톨릭 미신의 잔재였다.

육체적 몸은 오직 한 장소에만 있을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어디에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육체적인 것들은 영적 실재를 담거나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 쯔빙글리의 해석은 이성을 "단순한 말씀" 위로 높이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실을 부정하는 죄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속성간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편재를 포함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의 특질이 그의 인성에

전달된다-라는 전통적인 기독론 교리에 호소하여,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가 수많은 제단에 동시에 임하는 것을 설명하려 하였다.

루터는 또한 신자가 신-인이신 그리스도 전체에 참여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인격의 분할을 피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대립으로 루터는 쯔빙글리와 그의 지지자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선언했고, 쯔빙글리는 루터가

로마의 대변자 요한 엑크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했다.

1528년 정치적 상황이 개신교도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1521년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를 정죄한 후 뒤이은 몇 년동안 신성로마 황제 챨스 5세는 외부적인 사건들의 압력 때문에

그의 독일 영지 안에서 일어난 개신교 "이단"들을 억압할 수 없었다. 그러나 1520년대 후반에 상황이 극적으로 황제에게

호의적으로 바뀌자 황제는 개신교도들에 대한 즉각적인 행동들을 취하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헤세의 필립은 그의 동료 루터파 영주들과 남부 독일과 스위스의 강력한 도시국가들 사이에 군사 동맹에 관해

협상하도록 시도했다. 쯔빙글리도 이 계획에 상당한 이점이 있음을 알았다.

취리히는 비록 바젤과 베른에 중요한 동맹자들이 있었지만 종교개혁을 받아들이지 않는 스위스내의 자치주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성찬논쟁이라는 하나의 장애물이 그러한 범 개신교 동맹의 앞길에 놓여 있었고, 헤세의 필립은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의

정상 회담만이 난국을 돌파하여 정치적 동맹을 위한 신학적인 토대를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1529년 10월 마르부르크(Marburg)에 있는 그의 성에서 회담을 열 것을 제안했다.

루터는 그의 영주인 삭소니의 존(John of Saxony)의 촉구에 못이겨 주저하면서 참여하는 데 동의했다.

루터, 멜랑히톤, 쯔빙글리, 부처, 외콜람파디우스와 그 외 참여한 신학자들은 그들이 이미 글 속에서 여러 번 고쳐 썼던

모든 문제들을 논의했다. 이 토론의 결과로 생겨난 15개조의「마르부르크 논제들」은 14개 조항- 삼위일체, 무구수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 신앙, 설교, 세례, 선행, 사적 참회, 세속 정부, 교회의 관례들-에 있어서는 동일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15번째 조항인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문제로양 진영은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 없었다.

양편이 떠났을 때, 쯔빙글리는 "지상에 비텐베르크 사람들 이상으로 내가 한 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지만, 신조적인 동맹도 군사적인 동맹도 맺어지지 않았다. 일치된 복음주의적 전선을 형성하려던

헤세의 필립의 희망은 좌절되었고, 종교개혁의 신뢰성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F. 결 론

쯔빙글리가 숨을 거두며 남긴 마지막 말, "그들은 몸을 죽일 수는 있을지 모르나,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은 그후

사태의 진전을 통해 증명되었다. 그의 몸은 그의 실수와 오류들과 함께 땅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정신과 뜻은 계속 살아

남았다. 그는 전형적인 스위스인으로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사람이었다. 루터가 전형적인 독일인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취리히에서의 그의 첫 번째 설교로부터 카펠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쯔빙글리의 생애는 상당한 반대에 직면하면서도

확고부동함과 용기로 점철되었다. 쯔빙글리의 용감한 개혁 프로그램은 단순히 교회만이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질서를

다시 잡는 것을 의미했다. 1885년 8월 25일에는 취리히의 시립 도서관 앞, 그가 설교했던 민스터 교회에 쯔빙글리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손에는 성경을, 한손에는 칼을 들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이 동상은 역사적으로 매우 정확한

쯔빙글리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습은 그를 비극적인 죽음으로 이끌었던, 쯔빙글리의 생애에 늘 따라다니던

긴장만이 아니라, 교회와 국가, 신학과 윤리, 관리와 목사, 개인과 공동체 등의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려는 그의 소망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쯔빙글리의 종교적 핵심은 그의 마지막 권면들의

하나에서 가장 잘 요약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담대히 행하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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