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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 이해편◑/Comprehensive

내주하시는 성령의 은혜 (고린도전서 3:16)

by 【고동엽】 2026. 1. 20.

내주하시는 성령의 은혜 (고린도전서 3: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구절 앞에 섭니다. 너무 익숙해서 자칫 가볍게 지나칠 수 있으나, 실은 우리의 영혼과 삶의 토대를 흔들 만큼 무겁고 찬란한 선언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씀은 단지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존재 방식과 정체성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고, 그 의롭다 하심을 끝까지 붙드시는 과정 속에서, 우리 안에 실제로 임재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그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진리는 교회의 숨결이요, 성도의 눈물이며, 거룩의 시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집을 짓습니다. 바깥집은 손으로 짓지만, 속집은 하루하루의 선택과 욕망과 두려움으로 짓습니다. 어떤 이는 인정받고 싶은 갈망으로 방을 넓히고, 어떤 이는 불안으로 창문을 닫고, 어떤 이는 상처로 문을 잠급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가 짓는 집을 조금 더 고급스럽게 바꾸는 수준에 머물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 우리를 새롭게 만드십니다. 인간의 내면을 장식하는 종교적 취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거처로 삼으시는 신비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이때 성도의 삶은 더 이상 “내가 나를 운영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고 거하시는 삶”으로 옮겨집니다. 그 옮겨짐이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의 흐름을 보면, 바울은 교회를 향해 매우 실제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분열과 자랑, 사람을 중심으로 한 파벌, 성숙하지 못한 경쟁심이 교회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말하며, 사람을 붙들고 사람을 높이는 마음을 꺾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 질문은 지식의 부족을 탓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망각을 깨우기 위한 거룩한 흔들림입니다. 교회가 서로 물고 뜯는 순간, 교회는 자기 집단을 “인간의 동아리”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거하시는 곳, 하나님의 성전—거기서 분열과 교만은 단지 예의 없는 문제가 아니라, 성전의 거룩을 훼손하는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개인의 내면적 위로를 넘어, 교회의 본질을 바로 세우는 불꽃 같은 선포입니다.

“성전”이라는 말은 구약의 깊은 언어를 품고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표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성막을 통해 하나님 임재의 장막 아래 살았고,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자리로서 백성의 신앙과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성전도 완전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더 큰 성전, 곧 그리스도를 예표했습니다. 주님은 친히 성전이 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하신 그 말씀은 자신의 몸을 가리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몸을 찢기실 때,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고, 임재는 건물의 울타리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 결과, 교회와 성도는 이제 돌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성령께서 거하시는 살아 있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놀라운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백성 안에 성령 하나님이 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사시겠다고 하십니다. 누가 감히 그 은혜의 무게를 가볍다 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귀한 균형을 붙듭니다. 성령의 내주를 말할 때, 우리는 감정의 파도만으로 이를 확인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임하십니다. 성령의 내주는 구원 사건의 일부이며, 선택과 구속과 부르심과 칭의와 양자 됨과 성화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확실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는 어떤 특별한 사람만의 특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의 공통된 은혜입니다. 다만 그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방식은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눈물로, 누군가의 고요한 인내로, 누군가의 회개로, 누군가의 작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은 한 가지 색깔만 내시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다채롭게 빚으시는 거룩한 장인입니다.

또한 성령의 내주는 우리를 “신성한 자아”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안의 죄를 더 선명히 드러내고, 그 죄를 죽이며, 그리스도의 의를 사모하게 하십니다. 죄성은 여전히 남아 있고,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넘어지고 일어납니다. 그러나 내주하시는 성령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은혜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소유하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소유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붙드는 것 같아도, 더 깊은 진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의 손은 떨리지만, 하나님의 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령의 내주는 이 언약적 붙드심의 현재형입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가끔 방문하시는 분”이 아니라 “거주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방문은 잠깐의 인사로 끝나지만, 거주는 일상의 모든 결을 바꿉니다. 거주하는 분이 계시면 집의 분위기가 바뀌고, 말의 온도가 바뀌고, 선택의 방향이 바뀝니다. 신앙이 주일의 행사로 머물지 않고, 월요일의 마음가짐이 됩니다. 예배가 건물 안의 열정으로 끝나지 않고, 식탁 위의 태도와 직장 안의 정직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성령 내주의 실제성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만 남겨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사시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성령이 내주하신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흔들립니까? 왜 어떤 날은 믿음이 바닥에 떨어진 것 같습니까? 왜 기도는 막히고, 말은 거칠어지고, 마음은 쉽게 식습니까? 성령 내주의 은혜는 우리를 즉시 완전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새 생명”을 시작하시고, 그 생명을 길러 가십니다. 성화는 단번의 번쩍임이 아니라, 언약의 햇빛 아래에서 자라나는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는 하루아침에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살아 있고, 줄기에 생명이 흐르고 있다면, 계절이 오고 가는 동안 반드시 변화의 흔적이 나타납니다. 성령의 내주는 바로 그 뿌리의 생명입니다. 비록 잎이 시들어 보일 때도, 성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흐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 내주의 은혜는 “거룩의 부담”이 아니라 “거룩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실 뿐 아니라, 거룩할 수 있도록 거룩한 분을 우리 안에 두십니다. 성령은 계명을 새기시는 분입니다. 돌판이 아니라 마음판에, 겁을 주는 글씨가 아니라 사랑으로 새겨지는 뜻으로. 그래서 성령이 내주하시면, 죄를 즐기는 마음이 오래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죄를 지어도 편안히 눕지 못합니다. 세상이 주는 쾌락이 달게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떠나면 영혼이 마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불행이 아니라 복입니다. 양심이 예민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집은 이렇게 사는 곳”이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채찍이 아니라, 우리가 살도록 하시는 생명의 숨결입니다.

이 진리를 마음에 새기기 위해 한 가지 예화를 드리고자 합니다. 오래된 시골 교회에 작은 난로 하나가 있었습니다. 겨울이면 성도들이 모일 때마다 난로에 불을 지피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한 집사가 “불을 때는 일이 번거롭다”며 난로를 새 것으로 바꾸자고 했습니다. 교회는 큰돈을 들여 좋은 난로를 들여놓았습니다. 겉은 반짝이고, 모양도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겨울이 오니 예배당은 여전히 차가웠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난로가 문제가 아니라, 불을 지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난로는 불을 담기 위한 그릇이지만, 불이 없으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성도의 삶도 그렇습니다. 겉모양의 신앙은 번듯할 수 있습니다. 말도 성경적일 수 있고, 습관도 종교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 내주하시는 성령의 실제적 역사 없이, 우리는 차가운 종교로 남을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성령이 내주하시면, 비록 우리의 그릇이 낡아 보여도, 그 안에서 생명의 열이 흐르고 주변을 덥힙니다. 중요한 것은 겉의 윤택함이 아니라, 안의 불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따뜻하게 하고, 다른 이들을 살리는 열이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는 성령을 더 불러오자”는 감정적 구호로 끝나선 안 됩니다. 성령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성령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붙들린’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는 주권적 은혜로 시작되고, 그 은혜는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교회의 교제 속에서 자라납니다. 성령은 말씀을 떠나 임의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더욱 선명히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혜는 성경을 더 사랑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붙들게 하며, 자기 의를 내려놓고 은혜를 찬송하게 만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너희”는 개인 단수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즉 성령은 개인의 마음에만 머무는 분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를 말하면서 교회를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성령의 내주를 말하면서 성도의 교제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무례하고 냉혹해질 때, 우리는 단지 인간관계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의 분위기를 흐리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 판단 하나가 영적 공기를 바꿉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사랑의 영이시며, 거룩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은 진리 없는 타협으로 유지되지 않고, 사랑 없는 정죄로 굳어지지도 않습니다. 진리 안에서 사랑하며,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드는 공동체가 성전의 향기를 드러냅니다.

또한 성령의 내주를 아는 성도는 “자기 몸”을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 말합니다. 몸은 영혼의 껍질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질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으로 몸을 혹사시키거나, 게으름으로 몸을 방치하거나, 음란으로 몸을 더럽히거나, 중독으로 몸을 무너뜨리는 일은 단지 개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성전 훼손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율법주의로 빠지지 않습니다. “몸을 잘 관리해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으니, 그 거룩에 합당하게 몸을 돌보자”입니다. 순서는 언제나 은혜가 먼저입니다. 성령의 내주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거룩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자기 집으로 삼으시고, 그 다음 우리에게 집다운 삶을 가르치십니다.

성령 내주의 은혜는 또한 고난의 자리에서 찬란하게 빛납니다. 사람이 약할 때, “내가 나를 지킨다”는 확신은 쉽게 부서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믿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눈물이 흘러도, 마음이 떨려도, 세상이 흔들어도,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위로자이십니다. 위로는 단순한 달래기가 아니라, 진리로 붙드시는 능력입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십자가가 끝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를 하나님이 놓지 않으신다.” 성령은 이 복음을 우리 심장에 살아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 속에서도 절망을 끝까지 먹지 않습니다. 고난을 지나는 동안 오히려 성령의 숨결이 더 선명해질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우리를 성령께로 몰아붙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내가 붙든 믿음이 아니라, 나를 붙드신 은혜가 나를 살렸음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의 자존감을 세우는 문장이 아닙니다. “너는 대단한 존재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교만을 무너뜨리는 말씀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전은 자랑의 재료가 아니라, 두렵고 떨림으로 지켜야 할 거룩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내는 희망입니다.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다.” 우리의 연약함이 아무리 깊어도,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무거워도, 회개의 길을 열어 두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차가워도, 성령은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내주하시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집답게 살겠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교회 안에서 사람을 높이는 마음을 내려놓겠습니다. 분열의 씨앗을 뽑겠습니다. 나의 자랑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겠습니다. 내 마음의 방들을 주님께 열어 드리겠습니다. 닫혀 있던 문—용서하지 못한 문, 탐욕의 문, 두려움의 문, 비교의 문—그 문을 성령의 빛 앞에 열겠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집이 되도록, 말씀으로 청소하고 기도로 향을 피우며, 회개로 먼지를 털고, 순종으로 새 걸레질을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일임을 믿고, 겸손히 걸어가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늘 어딘가”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의 심장에 거처를 정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순간, 오늘의 작은 선택들이 달라집니다. 오늘의 말 한마디가 달라집니다. 오늘의 분노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오늘의 걱정을 안고 기도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하루가 더 이상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다시 마음을 들이십시오. 다시 무릎을 꿇으십시오. 다시 말씀을 펴십시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으십니다. 그 은혜가 오늘 여러분의 숨결을 새롭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요약

  • 고린도전서 3:16은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정체성의 선언이다.
  • 성령 내주는 감정의 체험을 넘어 언약적·구원론적 현실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하고 성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다.
  • 성전의 개념은 교회의 거룩과 연합을 요구한다. 분열·교만·사람 중심의 자랑은 성전 훼손의 죄가 된다.
  • 성령 내주는 성도의 일상을 예배로 변화시키고, 말씀·기도·성례·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라난다.
  • 성령 내주의 확신은 고난 가운데 위로와 인내를 낳고, 죄를 미워하며 회개로 돌아오게 하는 거룩의 능력이 된다.

묵상 포인트

  • 나는 신앙을 “하나님이 방문하시는 삶”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삶”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 내 마음의 어떤 방(상처, 비교, 정죄, 탐욕, 음란, 두려움)이 성령 앞에 닫혀 있습니까?
  • 교회 안에서 내가 뿌리는 말과 태도가 성전의 공기를 맑게 합니까, 흐리게 합니까?
  • 말씀과 기도에서 멀어질 때 내 영혼의 온도는 어떻게 변합니까?
  • 성령의 내주를 핑계로 방종하지는 않았는지, 혹은 성령의 내주를 믿지 못해 좌절만 키우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십시오.

강해

고린도전서 3장은 교회의 분쟁과 지도자 숭배 문제를 다루며, 바울은 사역자는 도구일 뿐이고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3:5–9). 이어서 교회를 하나님의 밭이자 건물로 비유하며(3:9),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고(3:11) 그 위에 무엇으로 세우느냐가 시험 받을 것이라 말한다(3:12–15). 이 맥락에서 3:16은 교회를 단순한 인간 결사체가 아닌 “성전”으로 규정한다. 성령의 내주가 교회의 본질이기에, 분열과 교만은 단순한 성격 문제나 운영 문제를 넘어 거룩의 문제로 드러난다. 교회는 성령의 임재로 인해 세상과 구별된 공간이며, 동시에 그 임재로 인해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가 된다. 성도 개인의 내주와 더불어 공동체적 내주가 함께 강조되며, 성령의 내주를 아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연합하고 거룩을 추구한다. 성령 내주는 교회의 윤리와 질서를 낳고, 말씀과 성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동체 가운데 실제화한다.

주석

  • “알지 못하느냐”는 고린도전서에서 반복되는 바울의 수사로, 무지 자체보다 “정체성 망각”을 깨우는 경고의 기능을 한다.
  • “하나님의 성전”은 단순히 ‘신앙이 중요하다’는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장소라는 구약적 의미를 그대로 끌어온 표현이다.
  •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신다”는 말은 성령의 “일시적 감동”이 아니라 “거주(내주)”의 개념이며, 교회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 문맥상 “너희”는 공동체적 의미가 강하며, 교회 전체를 가리키는 성전 개념이 우선적으로 적용된다. 다만 신약 전체 계시 안에서 성도 개인의 내주(성령의 전)도 함께 조화롭게 이해된다.

원어 주석 (헬라어-신약)

  • “ναὸς θεοῦ”(나오스 데우): 성전(특히 성소, 하나님 임재의 핵심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외곽 뜰까지 포함한 “ἱερόν”(히에론)과 구별된다. 바울이 “ναός”를 사용한 것은 교회를 “임재의 중심”으로 강조하는 뉘앙스를 가진다.
  • “οἰκεῖ”(오이케이): “거하다, 살다”의 의미로, 단순히 ‘있다’(εἰμί)보다 “거주”의 뉘앙스를 지닌다. 즉 성령은 손님이 아니라 거주자이시다.
  • “ἐν ὑμῖν”(엔 휘민): “너희 안에”로, 개인적 내면만이 아니라 공동체 가운데 거하심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문맥의 “너희”가 복수).

금언

  • “성령이 거하시는 곳에서, 성도는 더 이상 혼자 싸우지 않습니다.”
  • “성전의 거룩은 외형의 화려함이 아니라, 임재의 실제성으로 증명됩니다.”
  • “우리는 성령을 소유하지 못하나, 성령께서 우리를 소유하십니다.”
  • “거룩은 부담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은혜가 낳는 열매입니다.”
  • “교회의 연합은 인간의 타협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가 빚는 질서입니다.”

신학적 정리

  • 성령 내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성령 내주는 선택·유효부르심·중생·믿음·칭의·양자·성화의 긴 흐름 가운데 성도를 실제로 새 생명에 참여시키는 현재적 은혜다.
  • 성령 내주는 성도의 확신을 주되, 그 확신은 “나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완성”에 근거한다.
  • 성령은 말씀과 분리되지 않으며,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교회를 세우신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과 본질적으로 연결된다.

주제별 정리

  • 정체성: 성도/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소유이다.
  • 거룩: 성전의 거룩은 삶의 윤리와 공동체 질서를 요구한다.
  • 연합: 분열은 성전 훼손이며, 십자가 중심의 연합이 성령의 열매다.
  • 성화: 성령 내주는 즉각적 완전이 아니라, 지속적 변화의 근거다.
  • 위로: 내주하시는 성령은 고난 속 확신과 인내의 근원이다.

목회적 정리

  • 성령 내주는 신비이되 현실이며,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떠나지 않으신다”는 복음적 담대함을 준다.
  • 교회 분쟁과 상처의 현장에서 “우리는 성전”이라는 자각은 말과 태도를 정결케 하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 성령 내주를 감정의 강도와 동일시하지 말고, 말씀·기도·성례·교회의 교제라는 은혜의 방편 속에서 “거하심의 열매”를 점검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오늘 하루,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말과 선택을 절제하겠습니다.
  • 교회 안에서 사람을 높이는 습관과 비교의 언어를 내려놓고, 십자가 앞에서 겸손히 연합을 구하겠습니다.
  • 내 마음의 닫힌 영역을 성령 앞에 열어 드리고, 회개와 순종으로 성전의 질서를 회복하겠습니다.
  • 말씀과 기도를 삶의 중심에 다시 두어, 내주하시는 은혜가 일상의 숨결이 되게 하겠습니다.
  •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떠나지 않으심을 믿고, 낙심 대신 인내로 걸어가겠습니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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