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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지도자 되게 한 지도자/행 9:26-31

by 【고동엽】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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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되게 한 지도자/행 9:26-31/곽선희목사설교


  
나폴레옹이 그 어느 날 옷을 입혀달라고 부관에게 부탁을 합니다. 옷을 입혀주고 있는 부관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옷을 좀 천천히 입히게. 지금 나는 바쁘단 말일세"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지금 바쁘시답니다. 그러나 옷은 천천히 입히랍니다. 여러분 그 심정을 알겠습니까? 그 속셈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바쁜 때일수록 더 침착해야 되거든요. 옷 입히는 사람까지 서둘러대면은 이젠 정말 폭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지금 바쁘네. 옷을 천천히 입히라' 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욕구라고 하는 것은 그 사회성에 비출 때, 때로는 그 인간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그 자체가 모순적일 때가 많습니다. 이 욕구가 충족되면서 만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행복과 욕구는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욕구 자체가 이중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때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말이에요. 자 이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사회적 욕구 가운데 하나가 뭐냐하면 평등하고자 하는 욕구에요. 평등에로의 욕구. 남이 가진 것은 나도 가져야겠어요. 남이 되는 것이면 나도 돼야겠어요. 남이 차를 타면 나도 차를 타야겠어요. 남과 같아지려는 마음이 있어요. 때로 이것을 상대적 성공, 상대적 빈곤이라고 합니다. 남과 같지 못할 때 아주 괴로운 것이에요. 내가 꼭 배가 고파서 그런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잘사는 걸 보니까 내 마음이 편하지를 않아요. 내가 걸어갈 때에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길이지만, 다른 사람이 좋은 차를 타고 휙 지나가는 것을 보노라면 발에 힘이 빠지거든요. 영 못마땅해요. 잘사는 친구의 집을 방문하고 오면은 우리 집이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좁은지, 이게 사람 사는 건가 하고 아주 불평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 집 마련했을 때는 얼마나 행복했는데 오늘은 이렇게 처참할 수가 없어요. 이게 바로 인간의 욕구입니다. 같아지고자 하는 마음, 평등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만일에 같아졌다고 생각하면은 바로 그 시간 마음이 바뀝니다. 이것은 남과 달라지려는 마음, 특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자아실현의 욕구가 빗나가는 것입니다. 자기실현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건만 이것이 병리적으로 작용할 때 이상하게 시기 질투가 한 급 높아질 때 이런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는 남이 못 가진 걸 가져야만 됩니다. 같은 것으로는 만족하질 않습니다. 백화점에 걸려있는 예쁜 옷을 보고 어렵사리 돈을 마련해서 그 옷을 샀다고 합니다. 사 가지고 나오는데 똑같은 옷을 입은 여자가 지나가요. 이제 그 옷을 입을 수가 없게 된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참 이상한 거예요. 이게 여자의 마음이라면서요. 나는 잘 이해가 안 되요. 어쨌든 특별하려는 마음, 같은 걸 가지고는 만족치 못해요. 더 특별하게, 아주 개성 지향적, 그런 만족을 추구해 나가는 것인데, 사실은 이건 끝도 없습니다. 이것은 구제 불능입니다

 

사실. 오늘 이 세계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노동의 동기 유발입니다. 그래서 평등을 지향해서 동기유발을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사회주의요, 공산주의고요, 그게 아니라 인센티브를 주어서 동기유발을 하겠다고 한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결국은 자본주의가 이긴 것 같이 느껴집니다. 평등 가지고는 안 되요. 그래서 부득불 일 잘하는 사람에게 더 주고 일 못하는 사람은 추방하고, 쓸모 있는 사람은 높이고, 없는 사람은 이렇게 퇴직 당하게 됩니다. 같은 직장에서도 인센티브를 줍니다. 그리하므로 동기를 유발해서 열심히 일하도록 해보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인센티브의 한계가 어디 있느냐, 문제는 창의성 유발에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오늘 와서 기업과 세상이 이렇게 휘청하는 것이올시다.


자, 문제는 지도자의 문제입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날 때 그리고 서로 신뢰할 수 있을 때 여기서 진정한 평안히 있고 비록 대접을 못 받아도 평등하지 못해도 인센티브가 없어도 만족하게 '저분과 함께 일하리라, 저분의 뜻을 따르리라' 하는 이런 분위기가 되어야 되겠는데, 이것을 뭐 사명의식이라고 하고 뭐 가치관이라고도 하고 뭐 여러 가지로 설명해 봅니다만은 결국은 이런 얘기에요. 어떤 분을 만나서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삶의 존재를 찾고 보람을 찾게 될 때 이제 저분과 함께 일하므로 내 생을 다 바쳐도 좋다, 하는 그런 지경에 도달하게 되면 여기서 능력이 발동하는 거죠. 이거는 대우를 받느냐 못 받느냐 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요. 월급이 많으냐 적으냐,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지도자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평등에로의 만족을 주고, 인센티브라고 하는 만족을 주고,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되요. 창의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만족을 주어야 이게 지도자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 지도자 문제에 걸려있습니다.


보세요, 아브라함 메슬로우(Abraham Maslow) 라고 하는 사회심리학자의 말입니다. 소위, 하이어라키 오브 휴먼 디자이어(Hierarchy of human desire)라고 하는 아주 중요한 논문이 있죠. 사람의 마음속에는 생리적 욕구가 있고 안전에 대한 욕구가 있고, 소속감에 대한 욕구가 있고, 존중에 대한 욕구가 있고,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 Self-actualization,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충족하겠습니까? 이것이 평등과 인센티브로 가능하냐 이것입니다. 여기에 지금 고민이 있습니다. 지도자라는 것은 대체로 세 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인도합니다. 하나는 형벌로. 그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불이익이 가해질거다. 저분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게 불이익이 온다. 그래서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을 말을 조련하는 입장에서 보면은 채찍이라고 보죠. 또 하나는 보수와 보상과 칭찬으로. 그래서 유익을 주게 됩니다.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서 순종하고 이익을 위해서 순종하고, 이 두 경우가 있죠, 그래서 당근이냐 채찍이냐, 이런 말을 합니다. 당근, 채찍 가지고 안됩니다. 요새 '길들이기'라는 말을 합니다. 당근으로 채찍으로. 그런데 길들이는 사람도 피곤하고 길들여지는 사람은 더 피곤합니다. 이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중요한 길은 참으로 존경하는 길입니다. 존경받고 신뢰하고 믿고 믿어주고, 그럴 때에 비로소 이 신뢰가 가장 위대한 생산적 동기가 됩니다. 그래서 이 지도자라는 것은 결코 독재자가 아닙니다. 물론 선생도 아닙니다. 지도자일 뿐입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날 때 우리는 스스로 판단할 것도 없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르고 그를 존경하고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이보다 더 훌륭한 행복도 없고 또 생산적 능력도 없다,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지도자의 위대성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두 가지로 나누어 봅니다. 부수적 위대성이 있습니다. 학벌, 재산, 외모, 지위, 배경 뭐 이런 거. 이런 분들이 지도자가 되겠지요. 학벌 높은 사람, 재산도 있는 사람.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소유경영인, 전문경영인. 그러나 이것가지고 안됩니다. 이것은 인격경영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본질적 위대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성숙한 인격, 그의 인내성, 그의 사랑, 그의 비전, 그의 동정, 그의 결단력, 가장 핵심적인 것이 그의 신뢰성입니다. 믿어주는 것입니다. 서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 몰라도 좋아요. 믿을 수 있어요. 존경과 믿음, 그런 인격적 관계가 지도력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새 아주 유명하게 잘 읽히는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가 The Power of Great Partnership 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 "위대한 이인자들"라고 번역을 했는데요, 데이빗 히넌과 워렌 베니스가 두사람의 공저로 나온 책입니다. 여기서는 일인자도 중요하지만은 이인자가 중요하다. 이인자가 없는 일인자가 없다. 그래서 이인자들이 얼마나 중요한가,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은 이분들이 있어서 일인자가 있는 것이다 하는 그런 중요한 역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 중에 한 말씀만 드릴께요. 거대한 중국 땅을 통일하고 중국인민 공화국을 세운 바 소위 우리가 아는 "모택동, 마우쩌뚱"이라고 하는 사람, 이 사람 뒤에는 "저우언라이, 주은래"라고 하는 분이 항상 같이 있습니다. 어떤 때 사진을 보아도 뒤에 주은래가 있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그는 비하인드 맨으로서 모택동을 도왔습니다. 모택동은 아주 거칠고 투박한 성격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은래는 잘 생긴 지성적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모택동은 독학을 한 사람입니다. 공부한 바가 없어요. 그래서 그는 공부를 많이 했어요. 독학으로. 그 책을 보니까 기차여행을 할 때마다 책을 40권씩 가지고 다녔다고 그래요. 계속 시간만 있으면 책을 보는 공부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나 주은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정규적으로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유학을 한사람이에요. 그는 지성인이었어요. 이 두 사람이 함께 합니다. 제가 주은래씨를 존경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그가 세상 떠날 때 "나를 불태워 가지고 비행기로 전 중국에 뿌려라." 그는 묘비도 없습니다. 기념비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참 좀 부럽습니다. 우리 나라 지도자들은 이미 만들어놨던 묘까지 다시 고쳐가면서 야단입니다. 이 묘에 문제가 있는거라구요. 자, 이런 주은래씨가 뒤에 있었어요. 닉슨 대통령이 이 사실을 이렇게 정리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택동이 없었다면 중국혁명은 결코 불붙지 아니했을 것이지만 하지만, 주은래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타서 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이 두사람이 함께 있음으로 해서 일을 가능케 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는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을 압니다. 베드로를 압니다만은 바나바에 대해서는 그저 이름만 알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그는 유대사람으로 헬라파 유대인으로 철저한 그리스도인이에요.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는 극적인 장면을 경험합니다. 예수를 만나 그가 중생 하여 새사람이 되고 예수 믿는 사람을 모아서 잡아죽이려고 체포하려고 가던 그 다메섹에 들어가서 예수를 전합니다. 자, 그러니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스데반을 죽인 사람이요, 다메섹에 있는 교인들을 잡아가기로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온 사람이요.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고 피했습니다. 그리스도 인들이 그를 영접하지 못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어요. 마지막엔 핍박을 받게 되고요, 그리고 다시 보세요.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유일하게 바나바가 그를 믿어줍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됨을 믿지 않을 때, 그 과거가 너무 무섭거든요. 그러나 바나바 만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도 바울을 영접합니다. 그는 믿고,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데리고 가서 많은 사도들에게 소개합니다. 자기 명예를 걸고 소개하고 그리고도 핍박이 있어서 그가 저 고향 다소로 가서 운둔하고 있을 때 바나바가 다소까지 가서 그를 찾아옵니다. 11장 25절에 보면은요. 그리고 안디옥에서 1년 동안 함께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1차 전도 여행, 세계전도 여행 때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다닙니다. 이 얼마나 굉장합니까? 이래서 사도 바울에게 발동이 걸린 거에요.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은 처음에는 바나바가 주도요, 그러나 그 다음에는 사도바울이 높아지고 바나바의 존재는 뒤로 사라집니다.


왜 그런 바울을 믿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인이요, 하나님이 바울과 함께 역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쓰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계시하셨다는 그 계시적 역사를 그는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었어요. 나머지 모든 것은 다 덮어 버렸어요. 다 잊어 버렸어요. 그리고 바울을 믿었습니다. 전적으로 믿고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었습니다. 마침내 자기를 낮추고 그를 높이고, 하나님의 사람됨을 높이고 하나님의 역사 하시는 주의 종으로 높이고 높이고 자기는 사라졌습니다. 사도바울이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바나바는 아주 품성적인 그리스도 인입니다. 원래 덕망이 있는 사람이요,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 없는 바울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바울없는 바나바 또 역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제 2인자가 있어서 제 1인자가 있었고, 1인자는 2인자를 믿었습니다. 전적으로 믿고 그 충성과 진실 그 믿음,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서 다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믿었어요.


지도자는 어떻게 지워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종은 어디서 나타나는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지도자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 난 것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나라 장관이 평균 6개월밖에 못한다면요? 남의 나라는 대통령을 바꿔가면서도 장관을 하더만 우리는 어떻게 되어서 이모양이요? 지도자를 알아볼 줄도 모르고 지도자를 키울 줄도 모르고 지도자를 믿어주지도 않아요. 이런 난세에는 어느 지도자도 나타날 수가 없어요. 지도자 구실을 할 수가 없어요. 지도자가 없으면 우리는 다 목자 없는 양과 같아요. 어떤 경우에도 편할 수 없어요. 여러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돈을 가지고 있은들 이 돈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 경제가 어디 가 있습니까?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거죠.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큰 일을 할 수도 없어요. 지도자는 믿고 세우고 키우고 믿어주고, 그리할 때에 귀한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세상에 왔고 역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높이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할 것이고 나는 쇠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집니다. 제 2인자 바나바가 있어서 제 1인자 바울이 있었습니다. 지도자를 지도자 되게 한 그 지도자, 참으로 아쉽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말 지도자를 알고 믿고 키우고 세울 줄 아는 거기에 도달할 때만이 우리가 다 같이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물질도 있고 평안도 있고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 지도자가 눈에 보이지 않고 또 우리 주변에 없는 듯 하기에 이래서 우리는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고 전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는 지도자를 주시고 또 그를 위하여 제 2의 지도자를 주시고 제 3의 지도자를 주셔서 서로 믿고 신뢰하고 존경하면서 아름답고 귀한 저 미래를 창출할 수 있게 큰 은사를 더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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