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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5(마 6:9~1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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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5(6:915)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지금까지 공부한 주기도문은 모두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부터는 사람을 위한 간구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우리 자신을 위한 첫째 간구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기도로써, 간단하면서도 의미깊은 내용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너무나도 유치한 기도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만 깊이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돌보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너무 영적으로만 생각해서 신령하게만 해석하려는 고집이 있습니다. 말씀 그대로 순수하게 받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돌보심으로 글자 그대로 먹을 것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도입니까? 이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들이 구하는 내용은 대개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이런 것들만을 귀하게 여깁니다만, 성경은 물질적이고 대단히 현실적입니다. 그래서 윌리임 템플은 "기독교는 모든 종교 중에서 가장 물질적인 종교다"라고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물질을 부정적이거나 신앙과 위배되는 것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정신적인 차원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 즉 신령한 것을 중하게 여깁니다만 동시에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계와 인간의 육체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위한 양식도 구하라고 주님은 가르치고 계십니다. 사람은 무엇보다 우선 먹어야 삽니다. 병원에서 치료하는 것도 결국은 직접 간접(주사)으로 다 먹여서 치료하는 것입니다.

가끔 금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이 분들도 대부분은 물은 마시면서 금식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며칠 못 가서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체를 잘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몸을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신다는 신학적인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아프면 바로 직전에 적신호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둔해서 지나가고, 알면서도 무리하게 지나가면 앓아 눕게 됩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보다는 오히려 집이나 보석 등 물질을 더 귀중하게 여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물질이 어떻게 건강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만 세상에는 물질을 더 우선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강이란 그저 위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높은 차원에서, 즉 신앙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몸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양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양식은 생명유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식을 분석해 보면, 모두가 생명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썩은 것을 의미하므로, 썩은 것이 양식이 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먹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엄밀한 의미에서 식물도 동물도 살아있는 것만 먹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죽은 것을 먹는 것 같지만, 세포가 죽는다는 것은 썩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산 것을 먹는 것입니다. 필자가 미국에서 어느 스테이크 하우스에 갔는데 스테이크가 굉장히 연하 고 맛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맛이 좋다고 칭찬을 했더니 웨이터가 그 비결을 특별히 알려주겠다고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생색을 내며 다가왔습니다. 그 웨이터의 말에 의하면 고기를 잡아서 얼리지 말고 영상 5에서 5일간을 보관했다가 구우면 가장 연한 스테이크가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굉장한 인생철학을 말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먹도록 하셨는데 이상하게도 먹는 양식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호랑이는 언제나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만을 먹고, 어떤 동물은 또 숨이 넘어간 것만 먹고 이렇게 순서 껏 먹다가 마지막 정말 썩은 것은 여우가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먹는 것은 어느 순서쯤 됩니까? 사람은 썩기 바로 직전의 상태를 가장 맛있는 고기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로 잡은 고기는 질겨서 맛이 없고, 부패한 것은 냄새도 나고 또한 먹었다 해도 몸에서 받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맛있는 스테이크란 5에서 보존하고 잡은지 5일정도 되는 고기라는 것입니다. 이 상태의 고기는 완전히 죽은 고기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산 것이므로, 결국은 생명을 먹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생명을 먹어서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여, 내 생명을 보존해 주옵소서"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둘째로, 양식은 생명유지 뿐만 아니라 먹어서 즐기는, 즉 입맛을 즐기는 의미가 있습니다. 먹는다는 것이 반드시 먹고살아야만 해서가 아니라 즐기기(enjoy) 위함도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껌과 담배가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먹는 것을 자주 즐기고 싶으나 계속 먹으면 살이 찌고 부작용이 생기므로 씹되 넘기지 않는 것이 껌이지 않습니까? 담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사람은 먹는다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입맛이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크롬웰 장군은 식사할 때마다 "하나님이여, 귀한 음식을 주시고 왕성한 식욕도 주시어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입맛이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여자 분이 한끼 먹어서 한달 정도 견딜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하루 세 번씩 반찬 장만하고 설겆이 하는 것이 귀찮아서 하는 불평인 듯 합니다만 그 분도 먹는다는 것이 즐거움임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먹는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 하루에 세끼를 먹도록 만드신 것 같습니다. 입맛은 하나님이 주신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먹는다는 것은 사람이 움직이는 힘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일할 수 없듯이 모든 운동의 원동력은 음식으로부터 옵니다.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맛을 향유하며 일할 수 있는 힘을 얻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배후에는 또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음식은 많이 장만되어 있으니 구하기만 하면 주시겠다는 허락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구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구하는 자에게는 허락이 이미 기다리고 있는 것이므로 구해야 하는 우리의 순서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공급자(support)로서, 아버지 되시고자 하심입니다. 적어도 하루 세 번씩은 아버지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구할 때, 아버지 어머니는 베푸는 재미가 있습니다.

필자의 친척 가운데 8남매를 둔 가정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큰 식구를 이끌기에 아버지 혼자 너무 힘이 들어 새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새 어머니를 어머니로 부르지 않아 고민을 하다가, 가족회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요구할 때 아이들이 "어머니, 주십시오"라고 말해야만 주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새 어머니는 옷을 빨아서도 자기 방에 모두 정리해 놓고 아이들이 어머니라고 불러야만 주었더니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즉 이 말씀은 적어도 하루에 세 번씩은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깊은 관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구하기만 하면 주겠다는, 즉 공급자가 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친히 주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받는 기쁨이 있고 하나님은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구할 것이 없는 자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열심히 구해야만 되겠습니다. 혹 어떤 분은 하나님께는 신령한 것만 구해야지 시시하게 양식 따위를 어떻게 구하느냐고 말합니다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가 고상하면 얼마나 고상할 것 같습니까? 이런 것은 논하지 말고 그저 아쉬운 대로 아버지께 구하십시다. 주시는 자가 되고 싶은 아버지의 의도를 알아서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구하면 기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사실, 양식이라고 하면 한 가지만은 아닙니다. 우선 육신을 위해 먹는 양식이 있고 둘째는, 정신()을 위한 지식의 양식이 있습니다. 정신도 계속 양식을 먹어야 바른 정신으로 살 수 있으므로 여러 방면에서 계속 배워야 합니다. 지식을 먹지 않으면 정신도 녹이 납니다. 셋째는 영의 양식, 즉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신명기 8 : 3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은 만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먹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 : 51에 보면, "나는 산 떡이다"라고 예수님 자신이 떡이 되고 양식이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들의 생명의 공급자이심을 알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음, 일용할 양식(daily bread)에 대해 생각하겠습니다. 양식은 그날 그날 필요한 것으로 매일 먹어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한끼 먹고 여러 날을 견딜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은 날마다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묘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번역함에 따라 날마다의 양식, 다음날을 위한 양식, 그리고 필요한 양식 등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날 그날 적절하게 필요한 양식이란 뜻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곳은 출애굽기 16:1-21절까지의 내용으로 만나가 내려온 사건입니다.

만나는 매일매일 하늘로부터 내려왔습니다. 미련한 사람이 내일 몫을 걷어 놓았더니 다 썩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내려서 매일매일 걷어 먹는 것이 만나입니다. 만약, 내일 만나가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굶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만 허락하신 것입니다. 매일매일 계속 주셔야만 먹고 살 수밖에 없도록 매일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양식이란 필요한 분량 외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령, 온 국민이 먹고 남는 쌀이 있다면 언젠가처럼 막걸리 해먹자고 쓸데없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요즈음은 세계가 넓어져서 곡식이 넉넉하면 수출도 합니다만 잉여 농산물은 처치가 곤란할 때가 더 많습니다. 미국은 때로 잉여 농산물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고 합니다. 언젠가 필자가 미국농촌을 방문했을 때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부분적으로 땅을 쉬게 한다고 했습니다. 농사짓지 않아도 지은 만큼 나라에서 돈을 준다는 것입니다. 만약 땅을 모두 활용해서 농사를 지으면 과잉 생산으로 곡식 값이 안정이 되지 않아, 오히려 더 많은 문제가 생기므로 농사짓기 전에 돈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량은 꼭 필요한 만큼만 있어야지 더 이상은 필요치 않습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필요만 만큼만 음식을 장만해야 합니다. 때로 여분이 생기면 맛이 변질되고 결국 버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만 계속적으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진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은 신령한 면에서도 일용할 양식은 마다하고 잔치(부흥회)에만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잔치 집에 가서 한끼 실컷 먹고, 몇 달씩 굶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양식이란 된장국이라도 매끼마다 거르지 않고 먹어야지, 한 두끼 잘 먹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하루 저녁 부흥회 다녀왔다고 그 다음 일주일은 새벽기도를 빠지는 분이 있습니다. 영적인 양식도 매일매일 시간시간 얻어야 합니다. 흔히 신앙의 질이 어떠냐고 따집니다만 교회 성장학에서는 시간시간 얼마나 교회에 출석했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질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입니다. 한두 달만 교회에 빠지고 나면 주일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다섯 달만 빠지면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시간시간 예배에 참석함으로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입맛을 너무 가려서 걱정입니다. 설교하는 분에 따라서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안 나가기도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음식이란 입맛이 있든 없든 여러 가지를 골고루 먹어야 건강합니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철저합니다. 입맛이 있건 없건, 아프건 건강하건 일정량을 반드시 먹는 것이 저의 철학입니다. 배가 아파도 굶지 않고 소화제를 먹어가며 식사를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사실 입맛이 까다로우면 자기 자신에게 해롭습니다. 필자는 목사의 입장에서 변명을 겸하여 말씀드립니다만 설교를 매 시간마다 어떻게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설교학에서는 일 년에 두번 정도 유명한 설교를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많고 많은 날에 무슨 수로 귀한 말씀만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들은 것을 또 들어도 늘 귀하게 들려야 합니다. 그저 부지런히 듣다가 보면 성령께서 감화케 하시어 일생 처음 느끼는 감동도 주시고 말씀에 부딪쳐 깨달음도 주시니 열심히 들어야 하겠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또한 적절한 방법으로 벌어야 합니다. 그리고 양식이란 내 체질에 맞아야 합니다. 남이 좋다고 내게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실 것이므로 주신 것에 대해 고맙게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가 가려서 되겠습니까? 다소 쓴맛이 나더라도 내게 유익한 것을 주시므로 기도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입니다. 내게 양식을 주신 것과 함께 이웃에게도 주십사고 하는 이웃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유명한 썬다 씽이 인도에서 선교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그가 열차 안에서 쪽지 복음을 돌리면서 전도를 하는데, 한 사람이 그 쪽지를 찢어 차창 밖으로 던졌답니다.

썬다 씽은 속이 상했지만 참으면서 "하나님이여"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쪽지는 훨훨 날아 철로에 떨어져서, 마침 그 시간에 어느 청년이 자살하기 위해 철로에 나왔다가 그 쪽지와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쪽지를 주워 보니, "생명의 양식"이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죽으려는 그에게 생명의 양식이란 매우 자극적으로 들려,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행인은 기독교에 대해 좀 알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기독교를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기에 한 마디로 잘라 말해 주었습니다. "그 쪽지는 성경이라는 책에서 찢겨진 것인데, 그것을 읽으면 사람 못쓰게 되오, 그러니, 읽지 마시오. 아니 그것을 읽으면 사람이 죽게 됩니다"라고 인상깊게 일러주었습니다. 자살하려던 청년은 성경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났고, 철도 자살보다는 생명의 양식을 읽고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어, 성경을 구해서 열심히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태복음부터 계속해서 읽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찢어진 성경 조각도 사람을 살리는 양식이 되었습니다. 리빙스턴 선교사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양식으로 받아, 그 힘으로 위대한 전도의 역사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육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계속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내게 필요한 양식은 오늘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성경 한 구절을 보기 전에는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영의 양식부터 먼저 취하겠다는 자세입니다. 오늘 양식 오늘 얻지 못하면 오늘 내가 살 수 없습니다. 비실비실하여 힘이 없고 시험을 이길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또 감사하며 받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또한 내 양식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양식을 위해 함께 구하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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