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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4(마 6:9~1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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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4(6:915)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로써 가장 온전한 기도입니다. 필자는 가끔 마지막 숨을 몰아 쉬는 사람들에게 주기도문을 외우도록 권하며 또한 간호하는 분들께도 옆에서 계속 읽어 드리라고 부탁 을 합니다. 정말 나의 정신이 혼미해져갈 때, 이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 서 어떤 기도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무의식 중에라도 주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고, 이 기도에 연합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주기도문 중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세 번째 기원을 공부하겠습니다. 이 문장은 우리말로 옮기면서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원문대로는 "당신의 뜻이 땅에 이루 어 지이다.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의 순서로 "당신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가 주문장입니다. 이 기원은 앞 장에서 본 "나라 에 임하시옵소서" 하는 말과 표현만 다를 뿐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단 지 "나라이 임하시옵소서"는 보다 강한 표현이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는 나라가 임해 주기를 바라는 것에 대 한 보충설명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두 기도의 제목을 갈라보면 또 그런 대로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는 강한 권력(power)이 임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고, "뜻이 이루어지이다"하는 것은 조금 더 부드럽고, 좀더 선교적이며, 자원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강하게 표현해서 죽일 사람은 죽이고, 살릴 사람은 살려서 하나님의 심판과 권세가 그대로 이 땅에 임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린 학생들이 하나님께 쓴 편지 중에서 "하나님, 나쁜 사람이 많습니다. 제발 힘 좀 내세요" 하는 순수한 기도문을 보고 크게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생각으로는 악이 이기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힘 좀 내시라는 순수한 표현이었습니다. 사실 "나라이 임하시옵소서" 하는 말은 강한 권세가 그대로 임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속히 당신의 마음대로 온 세계를 다스려 주기를 바라는 힘의 통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그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이다" 하는 말씀은 자원적이요 선교적인 의미입니다. 강압적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뜻을 받아서 지키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온 세계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이 뜻을 지키도록 원한다는 것입니다. "뜻을 지킨다"는 말은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나라는 주권을 의미하고 그의 뜻이란 나라의 법입니다. 지금 우리는 민주 국가에 살기 때문에 민주화라는 말도 듣고 국민의 의사가 곧 법이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법은 국민의 의사가 종합되어야 하고 국민의 의사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 열 사람 중 아홉 사람이 모두 못된 일을 하자고 동의했다 해서 그 나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민주주의가 최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방법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물론 진리도 아닙니다. 원래 악한 사람만 모아 놓고 민주주의 하자면, 악한 법외에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도둑들을 모아 놓고 민주주의 하면 도둑질 외에 무슨 다른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민주주의 보 다 더 중요한 것은 진리입니다. 100명 가운데서 99명이 동의해도 틀린 것은 틀린 것이고, 한 사람이 주장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 당시의 상황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은 대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민주주의적인 측면에서 보면 틀린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말하기를 "모두가 너를 죽이라 하는데 도대체 진리가 무엇이냐"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제자들까지도 도망가고 없는 이 시점에서 혼자 진리를 찾아서 뭐하느냐고 비웃는 질문이었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디 엘 무디는 예수께서 일생동안 가장 마음 아픈 순간이 바로 이 때였을 것이라고 추리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에는 예수님도 할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므로 민주주의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란 말도 그 나라의 법이므로 하나님 나라의 법, 즉 왕국의 법을 의미합니다. 옛날, 왕국의 법이란,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의 생각이 법이었습니다. 복잡하게 헌법을 만들어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말하면 그것이 곧 법이었습니다. 사실 지혜있고 능력이 많은 왕이 있어서, 그가 말하는 것이 곧 법이고 진리일 수 있다면 복잡하지 않고 얼마나 좋습니까? 백성들은 따르기만 하니 그야말로 편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 모두가 판단하고 만들어야 하니 문제가 많습니다.

최대 공약수를 찾아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이 ""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이므로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백성들의 요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는 것"은 권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하는 것은 선교적이고 자원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22 이하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그랬습니다. 여기서 뜻을 이룬다는 말은 병을 고치거나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뜻"이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보다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요, 사랑이요,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에 대해 좀 생각하겠습니다. 뜻이 하늘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하늘이란 하나님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과는 반대되는 세계로써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가 아니라 신령한 세계, 즉 형이상학적인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이 행사되는 그 세계인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졌다 하는 그 의미는 첫째, 천사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시고 천사들이 그를 받들어 섬깁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종말적 계시자입니다. 그런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오셨다는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도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켰고 의롭게 살았으며 병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뜻을 이루러 온 것이 아니라 보내신 자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러 왔다" 등 계속해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현실 속에서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면 보통 의(), 진리, 사랑 등으로 모두가 추상적인 것들입니다. 이 추상적인 것을 현실 속에 옮기는 데에는 대단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가령, 어느 처녀가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그 처녀의 신랑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건강은 좀 부족하더라도 진실하고, 돈은 좀 없어도 의로운 사람으로 신앙 좋은 청년이어야 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녀의 신랑감인지 아닌지는 대답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진실한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알지만, 바로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지는 알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희생하고 죽어야 하는 것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 일을 위해 온 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내일 아침에 빌라도의 손에 넘기워서 이렇게 죽어가야 하는 이것이 아버지의 뜻인가 하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추상적인 진리를 현실 속에 구현하고,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이 땅에 이루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가끔 사업하시는 분들이 필자에게 찾아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저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좀 구별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사실 제가 그들의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저 역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리어 "당신에게 어느 쪽이 좀더 이롭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거의 같은 비중으로 두 가지 방향을 이야기하면서 그래도 조금 자신에게 이로운 쪽이 이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저쪽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서슴치 않고 저는 대답합니다. 정말 때로는 둘 다 아름답고 의로운 길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둘 다 똑같이 좋다면 좁은 길로 가거나, 손해보는 길을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손해보면, 누구에겐가는 반드시 이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조금이라도 더 이롭고자 하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뜻이 굽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추상적으로만 진리를 생각다면 현실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찾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곡히 기도하시며 십자가를 결정합니다. 그런고로 십자가의 희생, 순종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건이 의미상으로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내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가지로 구분해 보면, 하나는 내 매일의 생활(daily life)에서, 즉 구체적인 현실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6:38이나 에베소서 6:6을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화 되어가야 합니다. 로마서 12:2, 골로새서 4:12을 참고해 보면, 내가 웃는 것, 우는 것,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조차도 정말 예수님의 마음 같아져야 되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어떤 신학자는 입맛신학(tasting theology)이라고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억지로 내 의지로 끊어 버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음식으로 말하면 입맛이 변해 주어야지 나의 노력으로 하려면, 작심삼일로 실패하고 맙니다. 흔히, 술을 먹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만, 결심한대로 성공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술맛이 싫어지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세계에 계속 매력을 느끼는 한 관계를 끊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강조하기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악인은 언젠가는 넘어질 것입니다. 비록 나는 손해를 보았더라도 내 편이 좋고 잘했다는, 그 의로움에 대한 만족과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의로운 길에 대해 늘 불만스럽고 괴로움을 가진다면 어떻게 그 길을 가겠습니까? 쉬운 예를 들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시간 시간 즐겁고 기뻐야 하는데, 집사이니까 체면상 안 나갈 수 없어 나가고, 누구 때문이라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중요한 것은 입맛이 변해야 합니다. 물질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치품이나 보석 등이 자꾸 좋아지면 자기도 모르게 보석가게 앞에서는 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필자는 본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다는 것은 내 것이나 남의 것이나 보는 그 자체는 마찬가지입니다. 먹는 것이 아니라 결국 보는 것이므로 구경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윈도우 쇼핑(window shopping)은 내 것은 아니지만 보고 싶을 때 언제나 볼 수 있어서 얼마나 좋습니까? 내 것이란 집에다 깊숙이 간직해 놓고 잃어버릴까 염려하며, 죽기 전에 어떻게 처분할까 고민하니 애물덩어리입니다. 그러니, 백화점에 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고루고루 구경하고 즐기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반드시 나의 것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조금만 방향을 돌리면 이렇게 편한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던 것을 나도 사랑 하고, 그리스도께서 즐겨 잡수시던 것을 나도 즐거이 먹고,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이 나도 좋아, 점점 그리스도화 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도록(imitating Christ) 늘 기도하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중동의 정치가는, 그가 다시 두 번 더 태어날 수만 있다면, 첫째 소원은, 이천년 전에 태어나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앉아 말씀도 듣고 그 얼굴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다시 태어나도 오늘 이 세대에 태어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대는 문제가 많고 도전적이므로 한번 살아볼 만한 때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천년 전보다야 요즈음 여러 가지 의미에서 더 살만한 세대입니다. 물론 부정적인 측면도 대단히 많습니다. 어느 때 보다 복잡한 세대여서 하루가 멀게 대형 사고가 터지고, 미국에서 감기가 돌면 우리 나라에서 재채기가 나올 정도로 모든 일이 민감하며, 중동이 삐걱하면 기름 값이 올라 내 생활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니 걱정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심각하게만 생각하지 마십시다. 어떤 소용돌이를 치더라도 역사의 결국은 하나님께 있으니 너무 나와 연결해서 걱정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좀더 초연한 자세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뜻으로 이끌어져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마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핍박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의 말씀처럼 천국을 마음에 두기만 하면 문제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로 앞에 놓고서도 "잠깐 후에는 네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조금 후에는 보리라", 그 모진 고난도 잠깐이면 넘어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 초연한 세계관을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이 내 성품 속에서 내 인격 속에서 이루어지고 또 나를 통해서 이 가정 안에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운명론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뜻이 아니라 특별히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나를 살려 두는 것입니까?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혹시 지난날에 어려운 시련이 많았습니까? 무슨 일이든지 의미 없는 일은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우연이 있어도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실수라는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는 실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제 지난날의 나의 생을 종이 한장 넘기듯이 한장 한장 넘겨보십시다. 의미 없는 것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하니, 모두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하기 위해 의미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우연한 사고 같고 우연한 기회인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함께 하신 하나님이, 앞날에도 함께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하고 그리고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긴 설명을 요하는 문제이지만 쉽고도 간단하게 그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다 하는 것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음악이 제일 중요하고, 글쓰는 것이 중요하고, 운동하는 것이 중요하고, 돈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각자 나름대로 우선 순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필자의 경우는 설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튼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그 길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둘째로 자신에게 가장 쉬운 일이 무엇입니까? 쉽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방향으로 내게 달란트를 주신 것입니다. 그 일은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허락하신 일이므로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돌발적으로 사람을 기용하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을 쓰시기 위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하셨고, 모세를 쓰시기 위해 80년을 준비하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오늘 내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노래하는 것이 즐겁고 쉬우면 열심히 노래하고, 청소하는 것이 쉬우면 열심히 청소하고, 심방하는 것이 쉬우면 열심히 심방 하십시다. 무엇이든지 자신 있는 것으로 열심히 하면 그것으로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 일은 쉬울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줍니다.

만약에 하기 힘들고 불평이 생긴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기만 하면 즐겁고 미치기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열심히 하십시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부러워하지 말고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뜻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명론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뜻은 다양합니다. 개별적으로 각각에게 주신 것이므로 모든 일이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중에는 무엇인가 하려다가 잘 안 되면 너도 나도 목사 되겠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목사가 되려면 우선 온 교인들이 쳐다보기에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용모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서양에서는 목사를 공동 애인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조금도 무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목사고시를 국가적으로 치르는데, 건강, 용모에서부터 음성, 지식, 신앙등 최고의 인격을 고릅니다. 그래서 독일 목사님들은 모두가 잘 생기고 진짜 멋쟁이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요즘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대학 학력고사 점수가 시원찮으면 목사나 하라고 권유하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다양하게 너무나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그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 길로 전적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어차피 여러 가지를 할 수는 없으므로 다른 생각일랑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작고하신 이 동범 선생님은 찬송을 특별히 은혜스럽게 부르시는 분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세상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어떤 사건으로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났었습니다. 그 후로는 죽을 때까지 찬송만 부르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유혹이 많았습니다만 모두 뿌리치고 찬송만 부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신 분입니다.

셋째로 명심할 것은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은 반드시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좋아 보이는데 하나님은 저것을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의 뜻을 고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잘 가다가 때로는 도중하차하여 내 뜻으로 돌아서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일단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다른 곳은 보지 말고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합니다. 목사님 중에서도 도중에 방향전환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신학생들 중에서도 1학년 마치고 방황하여 좀 쉬다가 들어오고, 또 쉬다 들어오고 하여 갈 지자 걸음을 걷는 학생들을 봅니다. 사실, 온 정성을 기울여도 잘 될 것인지는 미지수인데, 시간 낭비하고 방황하면 얼마나 손해입니까? 유혹이 있음을 알고 내 뜻을 포기하는 결단이 있어야겠습니다.

넷째로 명심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에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희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곧 순종을 낳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 붙잡힌 바 된 그것을 나도 잡으려고 좇아간다. 아버지의 뜻을 내 뜻으로 삼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순종이요, 최고의 선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 분은 교회 일에 너무 지쳐서 아주 피곤한 상태였는데 드디어 열흘 후에는 휴가를 얻게 되었습니다. 부인과 함께 오랜만에 얻은 휴가를 즐기자고 의논하면서 노끈으로 열 개의 매듭을 만들어 하나씩 잘라가며 기다리기까지 했습니다. 마치 초등학교 학생들이 소풍가는 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하루 하루를 세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틀을 남겨 놓고 목사님이 덜컥 앓아 누웠습니다. 휴가고 뭐고 다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 목사님은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여보, 다시는 인간 마음대로 휴식할 때를 정하지 맙시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쉬라 하시면 쉬고, 일하라 하시면 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게 향하신 구체적인 뜻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임무요,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는 자를 보호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이 임무입니다.

이제 그 뜻을 알고 준행해 나가는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단지 그 뜻에 순종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뜻을 따르는 자에게는 실패란 없습니다. 항상 승리와 감사와 찬양이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게서 이루어지이다" 하는 기도로써 자신을 제물로 바칠 때 큰 영광이 있게 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갑자기 편도선이 부어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누워서 생각하니 설교도 못하고 심방도 못하니 여러 가지 불평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왜 편도선을 만들어서 부었다 내렸다 하게 해서 수술까지 받게 하시나 하고 원망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영감을 주시기를, 편도선은 이제 좀 쉬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적신호라는 것입니다. 목이 붓거든 과로했으니 쉬라는 표시기(indicator)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 표시가 없다면 "너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도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때에 붓게 하셔서 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오히려 감사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향하 신 뜻이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감사할 것뿐입니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오늘 내게서 이루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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