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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6(마 6:9~1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기도문은 우리가 자주 외우는 기도이기에 생각 없이 그냥 줄줄 외우는 과오를 저지르기 쉽습니다. 생각 따로 입술 따로로 기도문의 깊은 뜻을 외면한 채 기계적으로 외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공부하는 동안 다시 한번 그 뜻을 살려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귀한 뜻을 알고 바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기도문은 분명하게 기도의 순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관한 것이 우선이고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위한 간구가 있습니다. 바로 앞장에서 우리들을 위한 첫째 간구인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에 대해 공부했고, 이 장에서는 둘째로 죄사함에 대한 간구를 공부하겠습니다.
사람은 육신을 입은 존재이기에 계속적으로 양식을 먹어야 삽니다. 그래서 첫째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양식을 위한, 즉 생명을 위한 간구를 했습니다. 또한 영적으로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존재이기에 신령한 말씀을 계속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소홀히 여기든지 충실히 받지 못하면 영양 실조가 되어 문제가 생기는 줄 압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영이 사는 길은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 중에 가장 큰 말씀은 무엇입니까? "네 죄를 사했느니라"고 하는 죄사함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할 복이 많지만, 반드시 받아야 하고 또 계속적으로 받아야 할 복은 사죄함입니다. 복음서에서 보면 지붕을 뚫고 내려보내진 환자에게도 예수님은 먼저 "네 죄를 사했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신령상으로 하나님께 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는 사죄에 대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양식 다음에 구하고 있는 것이 용서인 것은 그만큼 용서의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에 나오는 가장 큰 목적도 사죄함을 받기 위함입니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존재와 목적도 죄사함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제목 가운데 가장 큰 기도의 제목이 "하나님이여, 우리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잊어버리고 시시한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자식을 위해서나 남편 또는 아내를 위해서 하는 기도는 모두가 2차 3차의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기도는 죄사함의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서야 평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고통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난 때문입니까, 혹은 명예 때문입니까? 고통의 이유는 오직 죄와 죽음 때문입니다.
몸이 아플 때에도 사실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것 때문에 죽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크지 않습니까? 병의 밑바닥에는 항상 죽음에 대한 고통이 짙게 깔려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보다 더 큰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죽어도 천당 간다는 것만 보장되면 죽음이 문제이겠습니까? 결국 죽음의 뒷면에는 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콤플렉스(complex)다, 또는 인페리어리티(inferiority)라고 합니다만 신앙적 입장에서는 죄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고, 병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죄의 형벌로써 망한 것 같고, 형벌로써 병이 나지 않았나 하는 두려움으로 고통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해야 할 최우선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의 기도는 귀한 복음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6 : 12),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용서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실례를 들면, 어떤 아이들은 잘못한 뒤에도 부모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매를 때리면서까지 잘못했다고 말하기를 재촉하지만 입을 꼭 다문 채 고집을 부리면, "이놈아 제발 잘못했다고 말하라"고 오히려 어머니가 애원을 합니다.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면 어머니는 다 용서할 터인데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주님께서도 얼마나 답답하시면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들이 알아서 용서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잘못을 하고서도 잘못했다는 말을 할 형편이 못되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용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용서에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가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회개 없이는 용서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도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용서하지 못하신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가끔 임종의 자리에서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신앙고백을 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를 구주로 믿습니까?" 하고 물으면 숨을 헐떡이면서도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봅니다.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래서 칼빈이 예정론을 말했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마지막인데 하필이면 "아니오"라고 대답하며 죽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못하십니다. 아무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첫째 조건입니다. 둘째는 윤리적인 것으로, 먼저 남을 용서하라는 조건입니다. 이웃을 용서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해야지, 자기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용서만 바란다면 그런 기도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종교성과 윤리성을 같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은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어야 할 존재이지만 그러한 의와 자격 또는 용기마저도 없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이런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벌써 용서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제사법입니다.
만약에 율법만 만들어 놓으시고, 이것을 지키면 살고 범하면 죽는다고 했다면 이것으로 끝났을 것인데, 하나님은 또 제사법을 만드셨습니다.
아마도 인간들이 죄 지을 것을 미리 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죄값은 사망이라는 법을 만드시고 또 죄를 지으면 용서받을 길도 만드신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law and Grace)는 언제나 같이 있습니다.
다음, 이 본문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문제는 죄입니다. 죄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기서 죄에 대한 개념을 정리했으면 합니다. 현대는 죄를 심리학적으로 보고, 사회학적으로 보고, 공리주의로도 보고 그리고 상대주의로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서양 사람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면 다 옳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 좋고 나 좋은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나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생각입니다. 또한 공산주의 사상으로 "결과에 의해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이론입니다.(The end justify means) 비록 나쁜 방법을 썼다해도 결과만 좋으면, 그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이론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좋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아주 잘못된 말입니다. 서울을 가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바로 가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결과나 목적이 좋았다 해서 방법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하는 것은 공산당의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상대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죄는 절대적인 것으로 실존하는 실재의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절대적인 관계에서 죄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 쓰여진 죄의 용어는, 원래 헬라어로는 다섯 가지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모두 죄라고 번역해 버렸습니다. 헬라어는 우리말보다 상당히 표현이 다양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랑이란 용어도 헬라어로는 어원이 전혀 다른 네 가지 단어가 있듯이 죄에 대해서도 성격이 다른 다섯 종류로 나뉘어져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어들을 한번 살펴봄으로써 죄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가 있었으면 합니다. 첫째, '하말티아'라고 하는 말로써,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화살이나 총을 쏠 때 과녁의 주위에는 몇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제일 중심부인 과녁은 새까맣게 칠해 놓아, 그것을 뚫어야 제대로 맞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빗나가서 다른 부위에 화살이 떨어질 경우, 이것이 하말티아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물건을 훔친 것은 물론 죄지만 구제하지 않은 것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므로)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과녁을 바로 찔러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한 것은 빗나간 것으로 죄입니다.
둘째는 '파라바시스'로, 줄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줄을 그어놓고 그 줄대로 걸어가야 하는데 줄을 잘못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마치 도시 교통에서 차선을 위반하면 대단히 위험한 일인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줄대로 똑바로 가지 않고 삐딱하게 갔다든지 줄을 넘어섰다면 그것은 죄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정직하고 진실하게 정도(正導)를 걸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면 죄입니다. 소위 외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파라푸토마(Slipping across)'로, 미끄러져서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서 있어야 될 사람이 자제하지 못해서 미끄러져 넘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감정이나 욕심 등은 자기 스스로 다스려야 합니다. 먹고 싶다고 다 먹고 자고 싶다고 다 잘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만약 그 자제력을 잃어버렸다면 술 취한 사람같이 중심이 흔들려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됩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되고, 쓰지 말아야 할 돈을 쓰게 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게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자제해야 할 시간에 자제력을 잃고 감정에 치우치고 욕심에 치우치는 것을 미끄러져 넘어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아노미야'로 불법(lawlessness)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노미야'는 법이란 말인데 '아'자가 붙어 법의 반대인 불법이란 말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법이 없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 역시 죄입니다.
다섯째는 '오훼일네마'로, 채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무는 빚을 졌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죄가 바로 채무를 뜻하는 내용입니다. 빚이란 미리 받은 바가 있어서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갚지 않으면 언제나 남아 있게 되고, 또한 늘어납니다. 빚을 갚지 않고서는 해결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빚진 죄인이라는 말이 있나 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빚은 하늘나라 장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혼자 뉘우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잘못 생각하기를 혼자 뉘우치고 다시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결단하면 죄가 사해지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빚이므로 갚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떤 공로를 세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빚은 빚진 그 분에게 갚아야만 사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이지 주관적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개념입니다.(히브리적 사상) 또한 빚은 장부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결산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대 앞에서 계산할 때가 온단 말입니다. 지금은 빚지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지만 언젠가는 채근하게 마련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갚기 전에는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갚지 못하면 누군가가 대신이라도 갚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제 우리는 용서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할 당연한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 빚은 어떤 것들입니까? 하나님을 공경해야 할 부채를 졌습니다. 순종하고 봉사해야 할 부채입니다. 사랑해야 하며 헌신해야 하며 남을 이해해야 할 부채입니다. 이런 빚들을 잔뜩 지고 있으므로 이것을 갚지 않고서는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계속적으로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서 날마다 회개해야 하느냐고 못마땅해합니다만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죄는 더 많이 느끼게 됩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더러움이 나타나지 않고 밝은 곳에서는 더러움이 환하게 드러나듯,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내가 더 큰 죄인임을 깨달아 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고 허탈한 상태에 있을 때 예수께서 깊은 곳에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대로 던져서 물고기를 잔뜩 잡고서는 바로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백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무엇입니까? 물론 베드로는 죄인입니다만 이 시간에 그가 말하는 죄는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을 때의 베드로의 생각은 좀 고약했으리라 짐작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목수요 베드로는 어부로서 물고기 잡는 일은 베드로가 프로급입니다.
그런데 목수가 어부에게 그물을 저쪽으로 던지라고 지시한다는 것은 베드로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으리라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대답하며 순종했지만 물고기가 잡히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빈 그물을 들고 "그곳이라고 물고기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이 잡히자 그는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믿지 못한 죄를 그는 자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면 살인이나 간음 또는 도적질한 것들만을 생각하게 됩니다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의심한 죄도 대단히 큰 죄입니다. 절망하는 것도 큰 죄입니다. 필자가 자주 강조합니다만 죽고 싶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큰 죄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생명에 관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들로서는 정말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함부로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자식이 부모 앞에서 한숨을 쉬거나 죽고 싶다는 절망적인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부모님께 이 이상 더 가슴에 못박는 일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되고 기뻐해야 되고 찬양해야 할 우리들이 모두 절망하고 한숨짓고 눈물을 흘리니 이것이 빚진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회개의 윤리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진 빚을 사하고서야 나도 하나님 앞에 나의 빚을 사해 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내가 남을 용서하면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전혀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또 하나는 이웃의 빚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하나님께 진 빚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좀 섭섭한 마음이 생길 때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섭섭하게 해 드렸냐는 생각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억울한 말을 했습니까? 돌이켜서 나는 하나님께 어떤 자세로 살았는지를 살펴보면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레이 선생님이 길을 지나가다가 잘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웨슬레이가 잘 아는 친구와 사이가 나빠져서 서로 욕하고 저주하며 원수로 지내는 중이었습니다. 웨슬레이 선생은 그에게 "형제여, 아직도 그 친구를 미워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럼요" 당연하듯 대답했습니다. "이제 웬만하면 용서하시지요" 하고 화해를 권했지만 그는 여전히 이를 갈면서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그놈만은 죽어도 용서할 수 없다고 욕을 하더랍니다. 이 때 웨슬레이는 한 말씀했습니다.
"좋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당신은 절대로 죄 지으면 안 됩니다." "왜요?" "그렇게 남을 용서하지 못하니 당신도 용서받지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당신은 죄 지으면 안 됩니다"라고 따끔하게 일렀습니다. 그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 속에서 무엇인가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물론 죄를 지었습니다만 앞으로도 죄 지을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아무리 맹세하고 결심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미리 죄 지을 생각을 조금 해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용서받을 여유를 두라는 뜻입니다.
과거의 죄를 용서받을 때에도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해야 용서받을 것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남의 죄를 많이 용서할 수 있어야 앞으로 내가 지을 죄도 용서받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내가 회개할 때에 그 속에 겸손의 윤리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14절 15절에서 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주를 달아 한번 더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은 용서에는 조건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무조건의 용서를 바란다면 나도 남을 무조건 용서해야 하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를 세우고 공로를 세우고 착한 일을 하는 이런 일에는 부족함이 있을 수 있으나 용서에 한해서는 절대 조건입니다. 혹시 원수 맺은 일이 있다 해도 마지막 숨 넘어 갈 때에는 완전히 용서하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주기도문을 외울 때 이 부분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외우지를 못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남을 용서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자기자신도 용서받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굉장한 의는 이루지 못해도 용서만은 완전해야 합니다. 나만이 특별히 억울하고 분하다고 자기 사정이 특이함을 호소합니다만 아무리 억울해도 용서만은 완전해야 됩니다. 용서에 관한 한 부족이 없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들에게 다른 의는 없더라도 용서의 의만은 조건 없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큰 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용서를 구할 때 내가 할 용서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작정 용서만 구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용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기도 중에 원수를 용서하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순교사에 보면 순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기도를 본받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스데반도 이와같은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도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하여 용서를 빌면서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평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왔고 의롭게 살았다 해도 마지막에 자기를 죽이는 자를 향해서 "두고 보자"라고 한을 품고 죽는다면 어찌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자기를 죽이는 그 원수까지 용서하고서야 천국 문이 열립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우리 주위에 있는 여러 사건들은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용서는 천국에 가는 절대 조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천국은 무조건 가는 것으로 들렸을지 모르지만 신중하게 살피면 반드시 세 가지가 구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과 어린아이 같은 마음과 용서입니다.
이것들은 절대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사해 주겠습니다. 그와 같이 내 죄도 사해 주옵소서"라고 먼저 용서하면서 용서를 비는 그런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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