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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야하는 기도 (누가복음11:1-4)

by 【고동엽】 2022. 9. 23.

배워야하는 기도  (누가복음11:1-4)

지난 5월 24일, 교회 1층 로비에서 탁구선교회 주최 탁구대회가 있었습니다.  개회를 선언한 담임목사가 대회를 여는 의식으로 복식경기 첫개임을 하였습니다. 전도사님과 한 팀을 만들어 장로님 팀과 가진 게임은 아주 싱겁게 끝났습니다. 장로님 팀의 일방적인 승리였습니다. 당연히 질 줄 알았지만, 기분은 별로였습니다. 물론 우리 팀이 이겼으면 장로님들이 그랬겠지요. 그런 뜻에서 지는 것도 봉사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탁구는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최근 10년 동안은 라켓을 잡아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끔 다른 사람이 탁구 하는 것을 볼 때는 생각했습니다. ‘탁구, 어렵지는 않구나. 나도 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뿐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나는 잘하지 못하면서 남들이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훈수들고, 비판하는가 하면,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정죄까지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특별히 배우지 않고서도 잘하는 사람이 간혹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정말 잘하기 위해서는 좋은 선생님에게,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도생활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이 기도의 연속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마가복음 1장 21-39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하루의 삶을 읽어볼 수가 있습니다. 대단히 분주한 하루의 일과를 마친 예수님은 다음 날 새벽 여김 없이 새벽기도를 하셨습니다.  35절부터 37절입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던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어제 예수님의 하루일과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제자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이른 새벽 예수님은 어김없이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여유 있는 시간을 활용하신 것이 아니라, 일과였고, 삶의 경건한 습관이었습니다.
  누가복음22장 39절을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절정에 이르러는 또 하나의 기도생활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저녁기도의 습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우리는 이 기도를 예수님의 ‘게세마네 기도’라고 부릅니다. 지상에서 마지막 날 밤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상황이 다급해지자 갑자기 도움이 필요해서 하신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사역을 계속하시는 동안 이 저녁기도가 어느 새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습관을 누가복음21:37,38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이른 아침부터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밤이면 예수님은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기도로 하루의 피로를 푸셨습니다.
찬송가482장 4절입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
주 세상에서 일찍이 저 요란한 곳 피하여
빈들에서나 산에서 온 밤을 새워 지내사,
주 예수 친히 기도로 큰 본을 보여 주셨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기도생활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누가복음11:1은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제자들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그렇게 항상 기도하시는 모습을 제자들이 보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늘 그렇게 기도로 이어진 것은 ‘주님의 존재의 방식’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항상 기도로 열려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도의 문이 닫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닫힌다는 뜻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무화과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나무아래 숨었습니다.  
창세기3:8-10입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배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영적인 존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뱀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다음에 일어난 현저한 한 가지 변화는,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꺼려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는 방법이 하나님과의 교제였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그 영을 받은 사람이 통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존재방식이 기도였다는 말은
바로 기도의 영, 하나님과 교통하는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말입니다.
둘째, 제자들이 기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어떤 종교공동체에서 지도자들이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랍비들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도 정시에 일정한 형태의 기도문으로 기도하였습니다.(사도행전10:3,9)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세례요한 역시 그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마치고 나오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공동의 기도를 함께 드린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같은 영적인 기질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같은 비전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같은 목적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도문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년 초가 되면 기도문을 만들어 드립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비전이고, 지향해야할 교회의 목적이고, 같은 교회에서 영적인 삶의 기질을 맞추어가는 작업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자자들은 기도를 배우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에 한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5-8에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주기도문’ 이라 부르는 기도를 가르치시기 전에, 기도의 자세에 관하여 먼저 몇 가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는 무슨 내용으로 드리느냐보다 먼저 어떤 태도로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병원인 ‘메닝거 크리닉’을 세운 위대한 정신 분석가이신 ‘칼 메닝거’의 말입니다. “Attitudes are more important than facts.” 우리가 당면하는 수많은 일들 앞에서 그 일이 어떤 일이냐 어떤 상황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일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기도를 드리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로 기도하느냐 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기도에서 반드시 배제해야 할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였습니다.
무엇을 배우던 처음에 잘 배워야 합니다. 피아노든 운동이든 처음에 잘못 배워놓으면 그것을 고치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기도생활도 그렇습니다.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잘못 배워놓으면 자기가 하는 것이 진리인줄 생각하고 그 기준으로 다른 사라들을 평가하고, 심지어 정죄하기도 하며 모든 것을 자기식으로 바꾸어 놓으려 합니다. 무례함이 드러납니다.
1.외식하는 태도를 삼가라 하셨습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입니다.
마태복음6:5입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것은 신앙인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기도를 드리면서 사람을 의식하는 자세입니다. 내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기보다 내가 기도하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더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야하는가 이 문제를 생각하기보다. 사람들이 나를 기도 많이 한다고 칭찬할까에 관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6:6)
기도생활을 계속하다보면 주님의 이 가르침이 가슴에 와 닿을 때가 있습니다. 결국 이 가르침은 어디서 기도해야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의식하며 기도해야하는가를 가르친 것입니다.
기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해석하기도합니다. 거리, 예배당, 골방이라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혹은 차를 타고 가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정말 간절한 중심으로 하나님아버지께 간구하면,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골방입니다. 그러나 한적한 골방에서 기도하면서 사람들에게 내가 지금 골방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광고하면 그곳이 바로 길가이고, 운동장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마다 ‘탈릿’이라는 흰 천에 검은 줄 무니 있는 큰 천을 얼굴에 쓰고 기도하였습니다. 다른 것들과 차단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향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2.이방인의 태도를 버려라 하셨습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마태복음6:7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 이라는 말은 어린 아이들이 처음 말을 배울 때, 그 뜻도 알지 못하고 부모를 따라 말을 반복하는 발음을 뜻합니다.
열왕기상18장에서 엘리야와 바알선지자들이 영적으로 극한 대치를 하여 기도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바알선지자 450명이 응답받기 위하여 한 나절동안 계속하여 “바알이여, 바알이여,!” 라고 주문을 외우듯 소리쳤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19장에는 에베소에서 바울사도께서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우상숭배자들이 두 시간 동안이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라고 소리치며  대모를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19:34)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길게 기도하기 위하여 뜻 없는 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이 있다면 “길게 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응답의 조건인 불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버려야할 이방인들의 기도 태도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마태복음6:8에서 바른 기도의 태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심이 없는 기도는 무의미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도 일으킵니다.
마가복음11:22-24에서 예수님은 기도는 반드시 믿음으로 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하는 우리 자신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정성이 대단해서도 아닙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성경적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전적으로 응답을 약속하신 주님께 있습니다. 응답하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요한복음14:14 약속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예수의 이름에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약속에 응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처럼 무작정 길게 하는 기도보다 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마태복음6:9-13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르치신 이 기도를 바로 배워서 일생 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삶 속에 주님의 풍성한 응답을 받으며 사시기 바랍니다.


출처/최이우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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