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고전 1:1~9)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오랫동안 사역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 있을 동안에 이 고린도교회에 관한 새로운 소식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소식들이란 거의 다 좋지 못한 것들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고린도교회에서는 그들 쪽에서 스스로 자기네들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하여 편지를 써서 몇 대표자들을 에베소에 파송하여 바울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그 편지를 받은 사도 바울이 그 고린도교회 안에 벌어지고 있던 여러 가지 많은 문제점들을 고쳐 주기 위하여 써 보낸 편지가 바로 이 고린도전서입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여러 초대 교회들을 보게 되지만, 이 고린도교회는 결코 모범적인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실 훌륭한 교회라 불리울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온갖 고질적인 문제점들로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교회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멸시 받아도 될 교회였느냐 하면, 결코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놀랍게도, 그런 고린도교회까지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리워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윤리적’인 비판들이 끝도 없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진리에 관한 것이 아닌, 그저 교회 행정적인 문제에 관한 것 한두 가지를 따지고 들면서, 마치 교회가 근본적으로 타락하고 변질되어 있는 양 매도하는 소리들이 무슨 유행병처럼 기독교 내에 번져가고 있습니다. 그런 소리를 그대로 들으면, 마치 이 지상에는 정말 신앙 생활 제대로 할만한 교회는 하나도 없는 듯이 여겨질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교회야말로 각 개인의 참된 신앙 생활의 장애물이 되고, 정말 혼자 집안에서 성경 읽고 기도하며 신앙 생활하는 것이 최상책인 것처럼 착각되어지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이겠습니까? 지상 교회에 문제가 좀 있다고 해서, 우리가 교회를 그처럼 함부로 비판하거나 혹은 아주 멀리하고 살아도 되는 것이겠습니까? 적어도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문제 많았던 고린도교회, 오늘날도 아무도 그 이름 따라서 교회 이름을 지으려 하지 않는 그런 인기 없는 교회를 두고서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서두부터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깍듯이 호칭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그처럼 높이 존중했던 것입니까? 왜 우리가 이 지상교회들을, 그 약점과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교회’로 귀중히 여겨야만 합니까?
첫째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로 부름받은 자들이 모인 곳인 까닭에 귀중한 존재입니다.
본문 1장 1절부터 3절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편지글의 발신자를 밝히는 서두에서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 선포자로서의 권위를 수신자들 앞에 분명히 밝혀 둔 것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세움 받은 사도였던 까닭에 이 편지도 여느 세상 사람의 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이었으며 신약 성경의 한 권이 된 것입니다. “소스데네”라는 이름은 사도행전 18장 18절에서 고린도의 회당장으로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사도 바울을 로마 정부에 고소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습니다. 만약 이 본문의 소스데네가 그 고린도의 회당장과 동일 인물이라면, 그는 나중에 회심하여 독실한 기독신자가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하여튼 이 본문의 소스데네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었고, 아마도 이 고린도전서의 편지를 대서하는 서기 노릇을 하고 있었을 가망성도 많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물론 “고린도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고린도는 당시의 각 민족과 나라들의 문화, 정치, 종교가 뒤섞인 거대한 가마솥과도 같은 사회로서, 자유민만 해도 25만에 이르는 대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즉 주후 50년 경에 이 도시는 ‘아가야’ 지방, 즉 오늘날의 그리이스에 해당되는 지역의 수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 제국 해군의 강력한 보호 아래 무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엄청난 부를 누림으로써 당대에 이름 높은 대 상업 도시로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그 부로 인하여 또한 각종 타락과 퇴폐의 최대 온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열 몇 개에 이르는 우상 신전이 세워져 있었고 거기에는 최소한 천 명이 넘는 신전 창녀들이 ‘종교적 매춘’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사랑의 여신’을 섬긴다는 미명으로 자행되던 고린도의 매춘이 당시 얼마나 유명했던지, 다른 도시에서도 ‘고린도 여자들(Corinthian girls)’ 하면 곧 창녀를 뜻하는 단어로 통하게 되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다양하고도 혼탁된 사회 문화 가운데 자리잡은 고린도교회였던 까닭에 사도 바울은 이 편지 서두에서부터 교회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ekklesia)’란 헬라어 자체는 원래는 일반 세속적 단체에도 붙일 수 있는 보통 단어였습니다. 하지만 70인역에서 이 단어가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뜻하는 말로 쓰여지면서, 신약에 와서는 ‘기독신자 공동체’를 뜻하는 아주 특수한 용어로 자리잡게 됩니다. 게다가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표현함으로써, 교회는 세상의 여느 단체들과는 아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것을 더욱 뚜렷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다.’라는 말은, 그 교회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의 교회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소유하시고 관장하고 계시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런 ‘하나님의 교회’란 어떻게 성립되는 것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것을 두고 “곧…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불러 주셔서’ 모이게 된,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하나하나 천국의 시민권을 부여해 주신 자들이 모이게 된 곳이 바로 교회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도란 또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라고 했습니다. 여기 ‘거룩하여지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로 인하여 죄로부터 깨끗하게 씻음 받은 상태를 뜻합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또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잊지 않고 포함시켰습니다. 그처럼 부름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게 되어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도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택하셨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하여 불러 주신 소명에 믿음으로 응답한 자들이며, 그처럼 그리스도께 연합된 자들이 모여서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은혜”와 “평강”이란 말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르심을 받은 성도에게만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는 특수한 인사말입니다. “은혜”는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죄 용서 받게 되는 유일한 원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구원이 죄인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이 된 것입니다. “평강”은 바로 그처럼 죄 용서 받은 자가 남은 생애에 누리게 되는 축복의 상태입니다. 더 이상 죄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그야말로 평안한 여생과 내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의 서두는 언듯 보기에는 편지글의 흔한 인삿말처럼 들리는 말이지만, 실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체험이 있는 성도들 사이에서만 제대로 통할 수 있는, 아주 뜻깊은 인사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모였다는 바로 이 사실이 고린도교회를 나머지 고린도시와 완전히 구별시켜 주는 특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은 고린도교회 안에만 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고린도교회에 몸은 담고 있어도 아직도 참된 신앙이 들어가지 못한 자들, 그래서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이 많이 섞여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고린도 시민들 중에서 분명히 구원받은 택자들을 하나님께서 불러 모아 두신 곳은 오직 고린도교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여전히,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교회’였던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스스로 모여 회칙 만들고 회장 뽑고 해서 세워진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성도들을 불러 모아 주심으로써 성립되는 공동체입니다. 아무리 문제가 있다 해도 이 교회 외에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란 것이 이 지상에 달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외에는 다른 어떤 종류의 신앙 공동체도 결코 만들어 놓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바꾸어 하자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과 상통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구원하신 성도는 반드시 교회 안에 불러 모으신다고 하셨으니,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분명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이 이 지상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고 다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 밖에 남아 있으면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귀중한 존재입니다. 비록 지상교회에 부분적인 문제점들이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성도를 불러 모아 놓으시는 곳은 오직 교회뿐이니, 이 교회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곳인 까닭에 귀중한 존재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4절에서 9절의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 다음 절인 10절 이하에서부터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대한 강하고 엄한 교훈과 경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정말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갖 종류의 심각하고 골치 아픈 문제들이 잔뜩 드러납니다. 사도적 권위에 대한 도전, 은사에 대한 오해, 부활에 대한 의심, 교인들 사이의 파벌, 빈부 차별, 음행, 불신 법정 소송, 우상 제물 문제 등, 절로 눈이 찌푸려지게 되는 문제들로 가득찬 교회가 바로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여기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는, 정말 이상해 보이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고린도교회도 일단 ‘하나님의 교회’였으며, 그처럼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으면서도 또한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넘치고 있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 감사 제목을 두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 은혜란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유하게 된 은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그의 안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변과 지식”이 풍성하게 된 것을 두고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머리 속에 많은 ‘지식’을 담고 있는 것과 그 아는 것을 말로 표현할 줄 아는 ‘수사술(구변)’은 당시 사회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겨졌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구변과 지식”을 얻게 되었음을 지적하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었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복음을 자신의 심령 속에 보유하는 것과 그 복음을 밖으로 사람 앞에 증거할 줄 아는 것은, 고린도시의 그 어떤 훌륭한 학교에서도 가르쳐 줄 수 없는, 오직 고린도교회 안에서만 배우고 누릴 수 있는 은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각양 은사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두 번째 은혜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각종 많은 은사를 받았었지만, 그 은사들을 서로 잘 협동하여 활용하지 못하고 서로 더 나은 은사를 받았다고 싸우는 폐단이 있던 교회였습니다. 비록 그런 문제는 있었을지라도, 어쨌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종류의 은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교회가 되었으니, 그것만 해도 또 감사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상 사는 재주만 가지고 살던 자들이 이제는 ‘하나님 섬기는 특기’를 한 가지씩 갖추고 살게 되었으니, 이것 역시 보통 은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교회를 통하여 누리는 성화 생활이 세 번째 은혜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을 뜻합니다. 바로 그날에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가 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재림시에 모든 성도들이 완전한 성화에 이를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완전 성화란 것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다른 교회 교인들보다 특별히 신앙 생활을 더 잘하고 더 경건해서 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 때문에 성도가 깨끗함을 입고, 그 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온전함을 입게 될 뿐입니다. 즉 우리 편에서는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마지막 날에는 다 무흠한 자로 인정되고 완전히 성화된 몸으로 천당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3장 13절에서도 “… 우리 주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 기도를 했습니다. 그 어떤 신자도 스스로의 힘으로 거룩해질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함으로써 그 그리스도의 성결하심을 힘입어 거룩한 자, 즉 ‘성도’라 불리게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비록 아직까지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약점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이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조금씩 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되어 결국에는 예수님 재림 때에 완전히 거룩하게 될, 성화의 은혜가 분명히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상과 같이 복음, 은사, 성화라는 이런 세 가지 은혜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가득 넘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너희를 고린도교회로 불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우상 종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저 장엄한 의식에 사로잡히게 하든지, 무슨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는지 하는 것들을 두고 ‘종교적 체험’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과 친히, 그리고 감히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아무리 일자무식이던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을 깨닫는 ‘지식’을 얻을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은 입을 열어 담대히 복음 증거하는 ‘구변’을 얻게 됩니다. 먹고 사는 일에만 쫓겨 살던 인생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교회 중심으로 섬기며 사는 놀라운 ‘은사’들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한 자라 해도 일단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입으면 끝까지 ‘견고케’ 해 주시는 성화의 은총에 안전보장을 받으면서, 그 남은 신앙 생활에 계속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더불어 교제하면서 누리게 되는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들은 결코 교회 밖에서는 체험할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교회 밖 어디에서 사람이 예배 더 잘 드리고 성경 말씀 더 잘 배우고 익힐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떠나 세상 어느 단체 안에서 사람이 하나님 일 위에 더 많이, 더 충성스럽게 섬길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그 어느 누구가 자기 혼자서 모든 시험을 다 잘 이겨내고, 끝까지 신앙 생활에 탈선하지 않고, 더 경건하고 더 거룩해질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교회’만이 각 개인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더욱 긴밀하게 교제하며 모든 은혜 생활을 더욱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인 까닭에, 이 지상교회는 실로 귀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 윤리 자체는 두말할 필요 없이 기독교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지상교회가 윤리를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현대판 바리새인적인 사고 방식이나 다름없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도 스스로 질 수 없는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려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교회 밖의 무슨 단체가 모든 교회를 감독하고 비판하는 치리권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교회 내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당회, 노회, 총회에서 해야 할 일이고 또 하는 일입니다. 만약에 목사들이 모여서 세상의 다른 전문인 사회를 비판하는 회를 만든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목사 아닌 사람들이, 목회 경험도 없는 신학자들이 교회를 함부로 비판하면, 마치 그것이 무슨 의로운 선지자적 사역이나 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지상의 어느 교회도 윤리를 완전히 지켜서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를 완전히 지킬 수 있는 교회는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아무도 완벽한 윤리의 조항 그 자체를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진리 문제는 그야말로 완벽해야만 하는 것이고, 또한 우리가 완전히 깨닫고 지킬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틀림없는 진리만 바로 선포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바로 비판하고자 하는 목사들은 무엇보다도 진리 문제를 가지고 따지는 것이며, 이단을 분명히 구별하는 일에 발벗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 비진리 이단을 구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참된 진리 안에 있는 교회들의 먼지를 터는 일, 그래서 결과적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고 사회가 교회를 보는 눈을 더욱 삐딱하게 만드는 일에 앞장 서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이 나라 기독교계 안에 적지 않은 것은,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상교회는 그 어떤 교회라도 크든지 작든지 약점들이 있고 문제점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을 냉정히 따져 본다면 서머나교회 같은 교회들보다는 오히려 고린도교회 같은 교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를 귀히 여기고 함부로 대해서는 아니될 이유는, 바로 이 교회들이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부르심을 받은 택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며,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의 진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곳은 교회뿐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구별하여 부르신 성도들이 모인 교회였고, 사람들의 약점들이 남아 있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작용하고 있던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불러 모은 택자가 모인 곳, ‘복음의 말씀’과 ‘섬기는 은사’와 ‘자라는 성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넘치고 있는 곳 - 바로 지상의 모든 참된 교회들입니다. 이 경향교회 역시 이와 같이 귀중한 ‘하나님의 교회’인 줄로 깨닫고, 바로 이 교회 안에서 함께 예수님 바로 믿는 신자들이 되고, 이 교회 안에서 주님의 크신 은혜들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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