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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과 체험 (다니엘 3장 13~18절)

by 【고동엽】 2022. 9. 9.

모험과 체험  (다니엘 3장 13~18절)

2007년도 표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교회”라는 표어에 맞추어 설교하느라고 연거푸 두 번이나 “사탄 마귀”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두 주일이나 사탄 마귀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제 마음 한편에는 이 악한 마귀들이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저와 우리 가정을 괴롭히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와 제 아내까지 지독한 감기로 고통을 당하다가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 가정이 애지중지하는 손자, 성호가 열이 심하게 오르며 경기까지 해서 오밤중에 병원 응급실을 찾아갔더니 빨리 입원시키고 척추에서 물도 뽑아서 위험한 병이 아닌지 검사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분명히 “마귀의 장난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부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빨리 퇴원시키고 척추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라” 하고, 우리 부부가 두 손 들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마귀는 패배한 원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치명타는 입히지 못하고, 감당치 못할 시험은 주는 법이 없나니라” 하는 영음이 들리면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 순간 제 자부도 두려움이 없어지고 마음이 평안해지더랍니다. 그후 열도 내리고 깨끗이 나아서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갈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적 행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1. 모험과 체험

  체험이 있는 신앙이라야 그 믿음이 살아 약동하는 믿음이 되는 것이지 체험이 없는 신앙은 하나의 이론에 지나지 않고 창백하고 냉랭한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날마다 체험을 축적해 나아가는 신앙이라야 살아 약동하는 능력 있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의 체험이든지, 성령의 불을 받는 체험이든지, 병 고침 받는 체험이든지, 철저한 십일조생활로 기적을 체험하든지 해야 살아 있는 참된 신앙을 소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하려면 모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험이란 위험한 일을 당할 각오도 해야 하고 손해 볼 각오도 해야 되고 때로는 명성도 잃고 목숨도 잃어버릴 각오도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난관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구차히 피하려들지 않고 용감히 도전해 나갔던 것입니다. 위험한 일이라고 요리조리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작년 WMC(세계감리교대회) 때, 7월 장마철이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사방에 산사태가 나고 물난리가 나지만 내일 시작인데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기도를 시켰다가 비가 멎지 않으면 “내 체면은 무엇이 되는가?” 하는 염려가 제게는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은 모험이기 때문에 배짱 좋게 더 크게 부르짖고 기도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비가 멎어서 온 교인들이 눈물 흘리며 감사하는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작하는 날부터 비가 멈추고 끝나는 날까지 비가 오지 않다가 다음날에야 비가 왔습니다. 신앙은 모험입니다. 모험을 감행하지 않으면 남 다른 체험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밤 4시경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심을 보고 베드로가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할 때 예수님께서 “오라”고 말씀하시자마자 베드로는 그 말씀을 붙잡고 물 위로 뛰어 내렸습니다. 얼마쯤 걸어가다가 의심이 생겨 빠지기는 했어도 물 위를 걸어본 체험은 베드로밖에 해보지 못했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물이 갈라진 위를 걸어가긴 했어도 물 위로 걸어보진 못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적 행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다니엘 3장에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자신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자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집어넣겠다고 위협하며 이제라도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도 했으나, 그들의 대답을 보십시오. 다니엘 3장 16~18절에 “…느브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하고 풀무불에 들어갔지만 머리 터럭 하나 타지도 않고 옷이 그슬리지도 않았습니다. 특별히 “그리 아니하실지라도”가 위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건져주시지 않고 타죽을지라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풀무불보다 더 뜨거운 신앙 때문에 풀무불의 시험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실 때 웬만하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이를 회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고 천하보다 귀하고 자기 생명보다 귀한 독자를 바칠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위대한 모험을 감행했고 순종한 후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산양을 발견하여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험적 신앙을 보시고 칭찬하시고 축복하시기를 창세기 22장 16~18절에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엄청난 모험이었습니다. 있는 재산 다 털어 바치라든지 집 한 채 바치라든지 하는 차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모험이었습니다. 남들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을 감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그 후손 중에서 천하만민이 구원받을 독생자 메시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에는 모험이 있어야 합니다. 또 만일 하나님이 그 독자를 다시 살려주시지 않았다고 해도 아브라함은 원망하거나 불평했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소년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 앞에 나가 마주 대항해서 섰을 때 그것은 참으로 보통사람으로는 꿈도 못 꿀 엄청남 모험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천추에 빛나는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작은 고난도 감수하지 않고 요리조리 피하며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구원은 받겠지만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큰 믿음의 소유자만이 큰 모험을 감행할 수 있고 남들이 못하는 체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내게 불리한가, 유리한가만을 따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크게 쓰임도 못 받고 큰 축복도 못 받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저의 부모님이 젊어서 평안남도 양덕으로 발령을 받아 이사를 갔는데 교회는 없고 무당, 박수, 점쟁이들만 많은 곳이었습니다. 가자마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황소를 잡아 산신령한테 제사를 드려야 하니 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 는 사람이라 그런 데에는 돈을 낼 수가 없다고 하니까 그러면 집안 식구가 죽을 수도 있고 큰 재앙을 받는다고 겁을 주더랍니다. “우리 식구가 죽어도 귀신한테 제사는 안 드린다” 하고 거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딸 둘 낳아서 다 죽은 다음 세 번째 낳은 아들 “선도”가 열이 40도나 올라가고 경기를 하고 죽어가더랍니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것 봐라, 이제라도 아들 살리고 싶으면 경도 읽고 푸닥거리를 해야 한다”라고 위협했지만, “우리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들이 죽어도 귀신 앞에 절하지 않는다”라고 단호히 거절했는데 아들은 이제 몸이 점점 식어가면서 “엄마, 엄마, 박복술 데려다 굿해줘…….”라고 애원하고, 믿음이 약한 남편은 “어서 죽기 전에 무당 데려다 굿 한번 해보자”라고 하는 것을 또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밀어놓고 뒷동산에 올라 간절히 기도하기를

“아들이 죽어도 믿음이 죽지 않게 하시고, 아들은 잃어도 예수님을 잃지 않게 해주세요. 만약 살려주시면 주의 종으로 바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아들이 살아나서 온 동네에 참 하나님을 증거했고 큰아들 다음으로 아들 셋을 더 주셔서 우리 4형제가 다 부흥사가 되고 세계적인 교회 목사가 되고 그 아들들이 4형제 뒤를 이어 다 목사가 된 것입니다. 모험적 신앙으로 마귀를 물리치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문이 크게 쓰임 받는 제사장 가정이 못 되었을 것입니다.

  2. 십자가 없이 영광은 없다

  고통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 없이 영광을 받는 순간은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8~39절에 예수님께서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는 일이 없이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에게 십자가 없는 삶을 살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라고 할 때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라고 간곡히 말하자 예수님은 단호히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고 꾸짖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베드로를 꾸짖은 것입니다.
  또 어느 날 마귀가 찾아와 예수님을 시험하기를 “십자가를 질 필요 없이 내게 절만 하면 천하만국을 다스리게 해주겠다”라고 할 때 예수님은 단호히 꾸짖으며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고 하셨고,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사탄을 대적하려고도 하지 않고 십자가를 질 생각도 하지 않고 쉽게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이용해서 성공만 하고 복을 받으려고만 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따라서 교회들도 교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만 해주고 달콤한 설교만 하고 재미있고 웃기는 설교만 해주려고 합니다. 물론 그런 설교가 아주 필요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안 믿는 사람들을 전도할 때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심각한 설교를 해서 경각심을 높이고 회개하고 결단을 내리게 하지 않는다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오늘 개신교인들이 천주교로 많이 가는 이유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찌하던지 쉽게만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잠깐 후에 썩어 없어질 육신의 쾌락과 안일만 추구하도록 도와주고 십자가 지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치 동물원의 사자가 전력투구해서 사냥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편안히 낮잠만 자고 하품만 하다가 먹이를 던져주면 그것을 물고 가서 먹는 것만 좋아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 교회만 부흥되기를 바라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고 많은 열매를 거두려고 한다면 그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면류관도 없는 법입니다. 대사도 바울이 얼마나 큰 고난을 겪었는지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 인물 중에는 최고의 사람인 대사도 바울이 이토록 고난을 많이 겪었는데 우리는 세상의 안일과 쾌락만 추구하며 무슨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최종 목표는 하늘나라이며 우리가 바라는 영광은 잠시 있다 없어지는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천국에서의 면류관과 영원한 상급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살면 교회가 죽고 내가 죽으면 그만큼 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I live, church die. I die, church live). 고린도후서 4장 10~12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희생하고 죽어지는 만큼 예수님의 생명이 크게 나타나 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안 다음부터 세상의 부귀영화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렸다고 했는데, 사도 바울이 똥과 같이 버린 것을 우리는 부둥켜안고 놓지 않으려 하지 않습니까? 십자가 없이 영광은 없습니다. 육신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어지는 만큼 장차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되고 세상에서 멸망할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 마귀는 십자가의 고난 없이 쉽게 예수님 믿으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마귀와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라고 합니다. 십자가 없이 영광이 없습니다.

할렐루야!

출처/김홍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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