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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90쪽에 있는 글입니다.
23. 정죄함이 없는 성령의 사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장 1~11절
어떤 성경학자는 로마서 8장을 놓고 문학적으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흐르던 여러 갈래의 강물이 로마서 8장에서 하나의 생명수 강을 이루어 하나님의 어린양 보좌 앞에 깔린 수정처럼 맑게 흐르고 있다." 또 어떤 분은 "성경이 다 불타서 없어진다 해도 로마서 8장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믿기로는 성경에 있는 말씀은 전부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어느 말씀이 더 좋고 어느 말씀이 덜 좋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로마서 8장을 놓고 이처럼 극찬하는 것은 그것이 대단히 은혜스러운 말씀이라는 것을 설명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평소에 로마서 8장을 즐겨 외웁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생활하다 보면 새록새록 받는 은혜가 많습니다. 우리는 곤고한 인생의 여로를 힘겹게 걸어가는 나그네입니다. 갖가지 인생고로 인한 어두운 그림자가 시시때때로 우리를 엄습해 옵니다. 그때마다 이 로마서 8장을 마음에 담고 깊이 묵상하면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경험을 통해 8장에 담긴 서른아홉 절의 말씀이 우리가 겪는 갖가지 문제들에 대해 가히 전천후적인 대답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때, 마음의 정욕이 발동할 때, 성령의 은혜가 의심날 때, 고독을 느낄 때, 기도의 응답이 오지 않을 때, 고통에 빠질 때, 소망이 흐려질 때 등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이 말씀은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마서 8장을 꼭 암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두고두고 귀한 은혜를 받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1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7장까지 오면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님 앞으로 나오는 자는 이미 죄의 종이 아니며 얽매였던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바울이 가르쳐 줍니다. 가끔 '오호라' 하는 탄식이 터질 때도 있지만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놓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는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 '그러므로'입니다. 이 '그러므로' 때문에 우리는 8장 안에 흐르고 있는 은혜의 강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 1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1절).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온 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고소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고소할 자도 없고 하나님 역시 우리를 죄인으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7장까지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정죄함을 받지 않는 이유는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정죄당할 수 없는, 보다 실제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죄함을 당하지 않는 실제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이야말로 우리가 정죄받을 수 없는 결정적이요 실제적인 이유가 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8장에서 '성령'이라는 단어가 20번 이상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8장을 일컬어서 성령장이라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말씀이요, 성령이 역사하는 말씀이요,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은총의 보좌 앞으로 인도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분명히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면 그 순간부터 우리 마음에 성령이 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외 없이 성령을 모시고 삽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절).
예수 믿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판정하는 조건을 성령을 모셨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이것을 부정한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
성령을 모시고 사는 자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9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9절).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확실한 사실은 육신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옛사람이 아닙니다. 죄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육신의 소욕에 지배를 당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대신 성령 안에 거하는 사람이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10절).
성령을 모신 사람은 그 영이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육은 이미 죽었습니다. 여기서 '죄로 인하여 죽었다'는 말은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육신이 부패했다, 또는 약해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차적으로 육신이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신 사람은 이 썩을 몸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절).
비록 우리의 몸이 죄로 인하여 썩어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리 몸도 영광스럽게 다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받은 자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은 몸마저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다시 살아납니다.
9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을 좀더 주의 깊에 살피면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9절).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다가 금방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10절).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다가 또 그리스도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거나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본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러나 설명을 조금 붙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3년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영으로만 계십니다. 재림하실 때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게 영과 육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어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자로 그 모습을 나타내신 이후 세 가지 양상으로 존재하십니다. 처음에는 육신으로 보이셨고, 이제는 영으로 계시며, 그 다음에는 영과 육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가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때입니다.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습니까? 성령을 통해서 계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해도 전혀 틀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삼위일체가 갖는 신비한 요소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성령이 계신다는 것을 지나치게 구별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내 오른편에 계시고 그리스도는 내 왼편에 계신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삼위 되신 하나님의 본체는 그만큼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시고 사는 자는 살아 계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을 하늘에서 내려오시게 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요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분은 날마다 우리 안에 거하시고 항상 흘러넘칠 만큼 우리 안에 충만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심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을 감정이 아닌, 실제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교회에서 찬송을 인도할 때 처음에는 208장을 불렀다고 합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형제 자매들이 한마음이 되어 찬송가를 힘있게 불렀습니다.
그 다음에 부른 찬송은 218장이었습니다. "주 예수 내 맘에 오사 날 붙들어 주시고...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속에 찾아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 이 찬송을 부르다가 목사님과 교인들이 약간 당황했다고 합니다. 언제는 주님이 마음에 계신다고 하다가 언제는 마음에 들어오시라고 하는 가사 내용이니 생각을 깊이 하고 부르는 사람이면 뭔가 좀 이상하다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218장을 부르자고 하는 목사님을 향해 "목사님, 그 찬송은 혼자 부르세요. 저는 이미 예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다시 들어오시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라고 해도 잘못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218장이 틀린 찬송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님을 다시 모셔야 할 필요성을 심리적으로 느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을 모심으로써 늘 주님과 함께 살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성령께서 하시는 일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무엇을 하시기에 그를 모신 자가 정죄를 당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절).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가 이루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4절).
성령께서는 무엇을 근거해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이루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이 근거가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3장부터 7장까지의 말씀을 요약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3절 앞에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를 넣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3절의 내용이 2절 말씀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은 3절 말씀의 목적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면 3절을 잠깐 봅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3절).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믿기 이전에 육신의 부패성과 연약성 때문에 아무리 율법대로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해도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를 지키면 두 개를 범하고, 두 개를 지키면 열 개를 범하는 것이 우리의 처지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도무지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른 방도를 강구하셨는데 그것을 3절에서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3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를 화목 제물로 삼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율법의 모든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그것을 근거하여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새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해놓으신 일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성령은 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습니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고 죽으셨습니다. 성령은 그 일이 우리에게 가능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킴
그러면 성령께서 하시는 두 가지 일을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로 성령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정죄를 당치 않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6장에서 우리의 새로운 신분에 대해 배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8장에 와서 새삼스럽게 성령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입니까? 6장 6절과 8장 2절은 어떻게 다릅니까?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앞의 말씀은 근거요, 뒤의 말씀은 적용입니다.
알기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죄수를 석방시키려면 판사가 석방서를 써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도소 소장이 그것을 가지고 옥문을 열어 줍니다. 같은 맥락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이 내어 놓으신 석방서와 같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석방서를 근거해서 죄와 사망의 옥문을 열고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해방될 수 있는 모든 근거를 마련해 주셨고 성령은 그 일을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해 주십니다. 물론 시간 차이는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일은 2천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에 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죽음에 우리를 포함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우리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고 어떤 동기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 성령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되어진 일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실제로 적용하신 것입니다. 시간적인 차이는 있지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다시는 죄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죄가 육체의 연약함을 이용하여 접근할 수는 있어도 노예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해방시킨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쑥스럽지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치고 받는 싸움은 꼭 한 번 해보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입니다. 저보다도 훨씬 체구가 큰 우리 반 아이와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야말로 격렬한 싸움을 한 것 같습니다. 결과는 뻔했습니다. 제가 실컷 두들겨 맞았습니다. 코피가 터지고 온 몸에 멍이 들었습니다. 저는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 현장에 누군가가 나타나서 내 편을 들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마침 담임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오셨습니다. 그때부터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그 힘센 주먹으로 나를 마구 치던 아이가 풀이 팍 죽어 버렸습니다. 갑자기 고개를 푹 떨어뜨린 채 아무 말을 못했습니다.
성령님은 마치 담임 선생님과 같은 분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모시기 전에는 날마다 육신 때문에 죄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이리저리 끌려 다녔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성령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자리를 잡으시자마자 행패를 부리던 죄가 맥을 못 추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모신 사람의 특징입니다. 당신은 성령이 자신 안에 계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도 당신을 정죄하지 못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생명의 능력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죄인처럼 다룰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통해서 승리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데 누가 우리를 죄인이라고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정죄하거나 고소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 성령을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심
두 번째로 성령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가 정죄를 당치 않게 하십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4절).
여기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목적 가운데 하나를 밝히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를 모를 때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5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이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5~8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니까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신에 끌려다니는 사람은 생각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매사가 자기 중심적이요, 세상 지향적입니다. 항상 땅의 것만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아직 영적으로 은혜를 받지 못한 분은 아마 이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매일 어떤 생각을 하며 생활합니까? 그 생각의 초점이 당신 자신, 아니면 세상에 있나요?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로 그 생각에 깊이 빠져 들면 나중에는 도저히 자기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집니다. 결국 그 행동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지을 때가 많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이 이만큼 중요합니다.
육신을 좇는 사람
몇 년 전 미국의 어느 신문에 자기가 고양이로 변하고 있다는 생각에 깊이 빠진 부인의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아멜라라고 하는 이 부인은 20년 동안 고양이 음식을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 나라에는 애완동물용으로 개발된 식품이 다양합니다. 인스턴트로 만들어져 있어서 필요할 때 언제든지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 밥이라 해도 우리나라의 라면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이 부인이 키우던 고양이가 죽어 버렸습니다. 애지중지하던 고양이가 죽어서 그는 몹시 허전했습니다. 그는 넉넉한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예비로 사 둔 고양이 밥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을 식사 때마다 먹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먹기 시작한 것이 버릇이 되어서 20년 동안 먹었다고 합니다. 그는 외롭게 혼자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게는 정신적인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양이 밥을 먹으면서 자기가 점점 고양이가 되어 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20년 동안이나 고양이 밥을 먹어서 그런지 진짜 고양이 행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고양이처럼 가르릉 가르릉 소리를 냈습니다. 화가 날 때는 고양이가 하듯이 야옹야옹 소리를 냈습니다. 경계해야 할 사람이 접근하면 고양이가 하듯이 쉬잇쉬잇 소리를 냈습니다. 심지어 그 부인의 생긴 모습도 점차 고양이처럼 변해 갔습니다. 제가 그의 사진을 보았는데 그렇게 봐서 그런지 몰라도 진짜 고양이처럼 보였습니다. 스스로 고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모습도 고양이를 닮아갈 수 있나 봅니다. 생각이 이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 사람의 특징은 밤낮 육신의 생각에 몰입해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가 원하는 것만 추구하면 마귀가 이끄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그 모습이 마귀처럼 바뀌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 마귀 같은 사람이 왜 이렇게 많습니까? 신문 지상과 TV를 통해 잘 아시겠지만 며칠 전에 경악할 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성 승객에게 친절한 태도로 드링크를 마시게 하여 실신시킨 다음 짐승 같은 짓을 상습적으로 했던 그 택시 기사의 얼굴을 보셨나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십 명을 그런 식으로 짓밟았다니 마귀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가 밤낮없이 무슨 생각만 하고 살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여자들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까 하는 것만 궁리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마귀가 아니면 그런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정말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성령을 좇는 사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생각이 자기 중심적이다보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육신을 좇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사고의 혁명을 일으킵니다. 그 혁명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7, 8절의 내용을 반대로 읽으면 됩니다. 이렇게 읽어 보십시오. "성령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기 때문이니라 성령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느니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하려는 생각만 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순종할까? 그것만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땅 위의 생물이 공기 중에서 살고 있듯이 성령의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공기 중에서 호흡할 때 공기가 그를 채워 주듯이 그리스도가 그를 채워 줍니다. 성령의 사람은 자기 자신의 생각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그의 생각의 전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생각'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mind'라고 표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mind'를 주로 '마음'이라고 번역합니다. 생각은 곧 마음입니다. 생각은 마음의 흐름이요, 표현입니다. 생각이 가면 마음이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아름다운 선물이란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분주한 중에도 예쁜 카드나 엽서를 띄워 보냅니다. 이것은 돈으로 따지면 하찮은 것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 보는 사람은 매우 흡족해합니다. 거기에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담겼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를 생각해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좇는 사람은 그 마음이 항상 하나님에게 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분의 명령대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분을 기쁘시게 할까? 항상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최고, 최선의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욕망이 따로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이 바로 자기의 뜻인 것입니다.
6절에서 영의 생각은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생명이 있는 삶은 무엇입니까? 영으로 지배되는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뜻합니다. 우리는 비록 땅 위에서 살고 있지만 마음만은 늘 하나님 나라로 향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생활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을 내가 생각하면 그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받들면 그것이 성결한 삶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사람이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자리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계명이나 조항을 가지고 따지기보다는 율법에 담겨 있는 정신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율법의 요구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알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자기 사랑이 너무 강한 육의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신 다음부터 우리는 사랑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자기보다 하나님을, 그리고 이웃을 말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율법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방종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가끔 '오호라'의 탄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거룩한 삶을 꺾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 이상의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면 저절로 축복이 따라옵니다. 다시 한 번 6절 마지막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성령을 좇아서 살면 평안이 찾아옵니다. 집에 있는 자녀가 마음의 평안을 누리려면 부모와 충돌이 없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평안을 누리려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다른 데서 찾지 마십시오. 마음의 평안은 우리가 얼마만큼 성령을 따라서 생각하느냐, 얼마만큼 성령을 따라서 행동하느냐, 얼마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느냐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다른 데서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성령의 생각을 따르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께서 지시하시는 길이 아닌 엉뚱한 길로 걸어가는데 그 마음속에 계시는 성령이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의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신문 지상을 통해서 저는 어느 정당의 요직에 있는 장로님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주일날 오전 중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골프장에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아마 여러 번 갔나 봅니다. 정치적 중대 사안이 지도자들의 주말 골프 회동에서 터져 나오는 예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 골프장에 안 가면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분이 주일에 골프장에 안 가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성령의 생각대로 따르지 않으니까 자기 마음에 평안이 없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끔 주일 예배를 빼 먹고 가족이 모여 산이나 들로 소풍 가는 가정을 봅니다. 그들을 보면서 성령께서 얼마나 탄식하겠습니까? 성령이 탄식하시는데 그들의 마음이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놀면서 하루 종일 불안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보낼 것입니다. 소풍과 마음의 평안을 맞바꾼 대가를 단단히 치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자의 마음에는 절대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면서 우리의 모든 생각을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행동을 지배하십니다. 성령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면서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을 통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함을 얻은 우리가 어떻게 정죄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제 성령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정죄함을 당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 고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보고 죄인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을 모신 사람의 특권이요,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1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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