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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2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by 【고동엽】 2022.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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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71쪽에 있는 글입니다.

 

 

22.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장 13~25절

 

 

 

 

 가끔 서점에 들러 로마서의 참고 도서가 진열된 코너 앞에 서면 그 중에서 한두 권을 뽑아 먼저 읽어 보는 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7장 1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저는 저자가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알아봅니다. 왜냐하면 그의 해석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참고서의 배경에 깔린 신학적인 흐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전체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대체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 본문은 로마서 중에서 해석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학자들 간에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논쟁의 초점이 되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먼저 본문 중에 나오는 '나'는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 주인공이 바울이냐, 아니면 제삼자냐 하는 것을 놓고 서로 의견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야기가 '언제'의 경험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바울이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가 예수 믿기 이전에 체험한 것이냐, 아니면 예수 믿고 나서 체험한 것이냐, 아니면 어떤 특별한 경우에 체험했던 이야기냐 하는 것을 놓고 서로 의견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예수 믿기 이전에 체험한 이야기를 쓴 것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그 주장이 옳은 것 같습니다. 반면에 그가 중생받은 다음의 심정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또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먼저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정해야 할 줄로 압니다.
 제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의 입장부터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한동안 방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는 이 본문을 중생받은 자의 체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유학시절 저를 지도해 주신 분은 저와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 교수님은 바울이 중생받기 전에 겪었던 영적 갈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말은 그 나름대로의 설득력 있는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 학기 동안 갈등을 하면서 연구를 계속하는 중 교수님의 입장이 매우 매력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7장에 기록된 영적 패배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매력을 안 느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이 본문을 중생자의 갈등으로 생각하는 자체가 성령 충만을 알지 못해서 생긴 부정적인 시각이라는 논리였으니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의 입장에 동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교회를 개척하고 10여 년이 넘도록 목회를 해 오는 과정에서 저의 생각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 본문은 중생받은 사람의 영적 갈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분들을 보아도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이런 체험이 따라다니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의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 볼 때도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래의 입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바울이 이 본문에서 자기가 중생받은 다음 몸소 체험한 내적 모순과 갈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은혜의 통로로서의 율법
 
 하나님의 자녀가 은혜를 받고 율법이 얼마나 거룩하고 선한가에 대해서 눈이 열리기 시작하면 자기는 죽어 버리고 죄가 살아납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13절은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합니다.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롬 7:13).
 
 우리가 율법의 거룩함을 알기 전에는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조그맣게 보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알고 나서는 죄가 더 크게, 더 검게, 더 악해 보입니다. 이럴 때 자기라는 것이 살아 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자기의 죽음을 맛보는 사람은 자기 속에 다른 일면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19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율법의 거룩함을 깨달은 사람은 그 말씀대로 행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선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므로 자연히 그것을 행하고 싶어하는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행해야 할 선이 무엇이며 행치 말아야 할 악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1절에도 똑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21절).
 
 그뿐 아닙니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22절).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생각할 때마다 너무 좋아서 그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말입니다. '즐거워한다'는 말은 인정한다는 것보다 월등히 강한 말입니다. 율법을 마음에 늘 되새기면서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시편 1편 2절에 나오는 말씀과 같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우리가 율법에 눈을 뜨면 바로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이상의 내용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율법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죽고 죄가 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을 분명히 분별하게 될 뿐 아니라 선을 행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이 얼마나 거룩한가를 새삼스럽게 깨닫는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은혜입니다.
 종종 보면 율법에 대해 아주 위험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율법에서 해방되었어. 이제 율법은 필요없게 되었어. 우리는 은혜 시대에 살고 있어. 그러므로 율법에 부담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야." 이렇게 율법을 경시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들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설혹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 해도 그것 때문에 멸망당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거나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여기서 말씀하는 계명은 복수로서 율법에 들어 있는 계명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을 사랑하려면 반드시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영의 눈이 열려 주의 법을 아는 은혜, 선을 간절히 행하고 싶어하는 은혜, 율법을 즐거워하는 은혜입니다. 성령받은 사람의 마음에는 이 세 가지 은혜가 뒤따라옵니다. 7장에 나오는 '나'라는 주인공은 바로 이런 은혜를 체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중생받은 사람이 틀림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생받은 자의 세 가지 모순
 
 그런데 참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 은혜를 받은 사람의 마음 속에는 늘 선을 사모하고 즐거워하는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자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는 갈등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율법을 알면 알수록 이런 갈등이 더 거세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면 생길수록 우리 속에 이런 갈등이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이런 갈등이 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모순입니다. 이 모순이 무엇인지 바울의 경우를 들어서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그는 지금 이 모순에 대해 솔직한 자기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치 못하는 모순
 
 첫째,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하지 못하는 모순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절).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못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악한 성향이 선한 성향보다 더 강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와 같은 모순을 자기 안에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절).
 
 얼마나 기가 막힌 자기 모순입니까?
 
 새사람과 옛사람이 공존하는 모순
 둘째, 한 지붕 밑에서는 살 수 없는 판이한 두 개의 소원, 성향, 법이 자기 안에 공존하는 모순입니다. 이것은 두 개의 자아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아라고 하기보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판이하게 다른 두 개의 성향 혹은 원리가 공존한다는 것은 무서운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절)
 
 이 말씀에서 우리는 '나'와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서로 상반된 두 개의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속'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로도 사용하고, 나쁜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18절의 '육신'과 23절의 '지체'와 24절의 '사망의 몸'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은 연약합니다. 부패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에 죄가 쉽사리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우리 몸은 죄의 작업장과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옳습니다. 우리 몸은 죄가 활동을 하는 장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내 속'은 '내 영혼'도 아니요 '내 새로운 자아'도 아닙니다. 그것은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몸입니다. 연약한 육체입니다. 이 속에 죄가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죄는 초대받은 손님이 아닙니다. 월세를 내는 하숙자도 아닙니다. 그는 무단 거주자입니다. 도무지 쫓아낼 수 없는 무법자입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불청객입니다. 이 죄가 우리 몸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불청객 때문에 25절에서 바울은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말씀에는 서로 대조가 되는 두 개의 존재가 나옵니다. 하나는 마음이요 하나는 육신입니다. 하나는 중생받은 새사람인 우리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옛 사람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몸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도 섬기고 죄의 법도 섬기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듯이 죄를 짓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고 성령으로 중생함을 얻은 새사람은 이중생활을 정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몸을 입고 사는 동안은 죄가 노크하면 쉽게 문을 열어 줄 수 있는 육신의 연약함을 평생 벗어던질 수 없는 고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상반된 두 실존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참 괴롭습니다.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은 이 갈등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대적합니다. 그러다가 번번히 우리가 원하는 순종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육체의 소욕에 패배를 당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이렇게 두 성향의 갈등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이 지금 자기 안에서 갈등의 처절함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모순
 셋째, 악한 소욕에 굴복하는 패배를 맛보는 모순입니다. 죄의 소원에 따라 결국 죄를 범하고 마는 모순을 바울이 자기 안에서 보고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3절).
 
 우리의 몸에는 죄를 짓고 싶어하는 소욕이 있습니다. 이것을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율법을 즐거워하고자 하는 소욕이 있습니다. 이것을 '내 마음의 법'이라고 합니다. 이 둘이 서로 싸웁니다. 그런데 번번이 내 몸에 있는 죄의 소욕이 이깁니다. 영적으로 패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본의 아니게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은 자기 안에 심각한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실존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생받은 사람으로서 이럴 수가 있느냐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자기 모순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어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우리에게 이런 모순이 있을 수 있습니까? 우리 옛 사람이 죽어서 더 이상 죄의 종이 될 수 없는 우리에게 이런 모순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어찌 율법에서 벗어나 성령의 사람이 된 우리에게 이런 모순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정말 수긍하기가 괴로운 이야기입니다.
 
 '오호라'의 탄식
 
 바울은 자기 안에서 이런 모순을 보면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모릅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빠질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14절에서 기막힌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절).
 
 이것은 7장에서 제일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죄 아래 팔렸도다"는 말은 현재동사로 쓰여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과거처럼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현재 시제입니다.
 어떻게 바울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앞 장에서 바울이 무엇이라고 역설했나요? 하나님의 자녀는 다시는 죄의 종이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자기를 놓고 '죄 아래 팔렸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면 바울이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그가 용서받지 못한 죄인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말입니까? 그가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로 원상복귀했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한 구절입니다. 저도 퍽 난처함을 느낍니다. 겸손하게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나름대로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라 감정적인 표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모순투성이인 자기 내면을 보면서 절망감을 느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바로 이 절망감을 감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꼴이 죄에 다시 팔려 간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하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고 봅니다. 23절도 감정적인 표현이 들어 있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3절).
 
 그는 실제로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절대로 다시 죄의 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울이 죄를 짓고 나서 자기 내면을 보고 마치 죄의 종으로 질질 끌려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께 유산을 받아 멀리 도망가서는 허랑방탕한 생활 끝에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거지꼴이 된 자기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스러웠는지 아버지께 다음과 같이 간청을 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9).
 
 이 아들의 말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적인 표현입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아들이지 품꾼일 수 없습니다. 똑같은 맥락으로 14절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무슨 말을 할지라도 그는 중생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지 죄의 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자기 안에 있는 모순을 보면서 견디다 못한 심정으로 그렇게 표현을 한 것뿐입니다. 내면의 이중성을 보면서 탄식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정말 놀랍습니다. 어쩌면 바울이 이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요? 그가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로마 교인들 앞에 이토록 자기의 약하고 부족한 부분을 송두리째 털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그가 위대한 인격의 소유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바울이 보았던 그런 자기 모순이 없습니까? 우리가 예수 믿고 중생받은 사람이라면 '이것은 바울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입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내적 모순과 갈등 없이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말씀에 해박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는 이상, 원하는 대로 행하지 못하는 모순을 보게 됩니다.
 또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간의 갈등을 봅니다. 가끔 죄를 짓는 영적 패배를 완전히 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인이면서 죄인입니다. 믿는 것을 보면 하나님 앞에 의인된 것이 틀림없는데, 하는 꼴을 보면 죄인처럼 보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이중적인 실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호라'의 탄식은 긍정적인 것입니다. 오히려 이 탄식이 없는 신앙생활이 비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호라'의 탄식은 우리가 가끔 체험해야 할 불가피한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호라'의 탄식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터져 나오는 탄식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때 오는 갈등과 가책과 고통과 회개의 눈물을 의미합니다. 우리 몸에는 죄가 거하고 있습니다. 이 죄가 처음에는 방문객처럼 며칠간 머물다 떠나는 손님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죄가 우리 속에 있기는 하지만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방심하거나 믿음이 약해지면 갑자기 죄가 주인 행세를 하려 듭니다. 불행하게도 그의 무서운 손아귀에 꽉 잡히면 영락없이 끌려갑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스스로 죄 짓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죄에 끌려갈 수 있는 약점을 누구나 지니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오호라' 하고 탄식할 만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호라'의 은혜
 
 그렇기 때문에 '오호라'의 탄식이 없는 신앙생활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오호라가 전혀 없다면 그는 거짓 믿음을 가졌거나 버림당한 사람일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에게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까? 원하는 대로 행하지 못하는 모순이 있습니까?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으로 갈등합니까? 당신에게 이와 같은 갈등이 있다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는 탄식이 있어야 옳은 것입니다.
 이 탄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중생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들을 수 없는 탄식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자기의 의지대로 만들어 내는 제품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큰 모순이 있는데도 '오호라'의 탄식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호라'의 탄식이 은혜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오호라'의 탄식은 죄를 범해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이유와 정반대가 됩니다.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가는 성결의 생활이 발전하면서 터지는 탄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사야를 들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보자마자 뭐라고 소리쳤는지 아십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목격하고 터져나오는 탄식이요 고통입니다. 그러면 이사야가 죄를 지어서 그렇게 탄식했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까이 보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기 내면의 더러움이 더 뚜렷이 드러나 보여서 탄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탄식은 은혜입니다. 그렇다고 선지자만이 이런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상당한 성숙의 단계로 들어선 믿음의 선배들에게서도 '오호라'의 탄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며 하나님의 계명이 얼마나 선한가를 더 깊이 깨달을수록 '오호라'의 탄식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고 박윤선 박사님은 신구약 66권을 주석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평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날마다 성경 속에 파묻혀 지내다시피 하시는 분이 무슨 죄를 범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에 그의 설교나 기도 중에, 또 사석에서 말씀하시는 내용 가운데 자주 이런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어. 인간이 이토록 악할 수가 있나? 썩고 냄새나는 무덤과도 같아." 우리는 그분이 죄를 많이 지었나 보다 하고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많이 범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기 안에 있는 더러움과 모순이 크게 보이기 때문에 터져나올 수 있는 탄식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오호라'의 탄식은 은혜입니다. 이것은 비중생자의 체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은혜입니다. 이와 같은 탄식은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을 건너뛰어서 성급하게 8장으로 들어가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일부 성경학자들이 7장을 괄호 안에 넣어야 할 부수적인 본문처럼 보는 시각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본문에서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4절에서 25절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십시오. 그것은 극적인 전환을 보여 줍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4, 25절).
 
 어떻습니까? 엉엉 울던 애가 금방 히히 하고 웃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오호라' 하고 탄식하던 바울이 어떻게 금방 '감사하리로다' 하고 소리칠 수 있습니까? 중간에 접속사도 하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급작스러운 전환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큰 진리가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오호라' 하고 탄식하는 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의 모순을 보고 갈등하고 괴로워합니다. '오호라' 하고 탄식하며 회개하고 고통합니다. 그러나 그 탄식의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안 됩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탄식의 자리에 오래 머무는 것을 은혜로 알았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하고 찬송을 부르면서 많이들 울었습니다. 눈물을 많이 흘려야 은혜받은 줄 알았으니까요. 물론 회개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울다가 끝나는 신앙생활이라면 얼마나 비정상입니까? '오호라'는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오호라'의 탄식은 짧아야 합니다. 우리의 갈등, 탄식, 회개의 눈물이 구원의 수단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탄식을 많이 해도 그 탄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조건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호라' 하고 탄식할 때마다 재빨리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 때문에 고통하고 괴로워하다가도 금방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뻐하며 할렐루야를 외쳐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상한 마음을 싸매고 눈물을 씻겨 주시는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우리의 약함과 허물을 용서하시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주시는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죄를 범해도 용서받을 수 있도록 의의 못으로 감싸 주시는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한 번 범한 죄를 다시 범하지 않도록 성령으로 우리를 무장시키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새롭게 다시 세워 주시는 분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울다가 즉각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괴로워하는 자리에 오래 머물면 안 됩니다. 재빨리 십자가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당신에게 '오호라'의 은혜가 있습니까? 즉시 '감사하리로다'의 은혜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뉴키즈 온 더 블럭 그룹이 우리나라에 와서 공연을 했습니다. 그때 젊은 아이들이 광란하는 장면을 보셨을 줄 압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낄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믿음 좋은 부인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그 애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 애들은 세상 음악이 최고인 줄 아니까 그렇게 푹 빠질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발광을 할 수밖에 없지요. 저는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해요. 만약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셨다면 저는 너무 좋아서 펄펄 뛰었을 거예요. 아마 그 애들 저리가라 할 정도로 발광을 했을 거예요. 사탄의 음악에 미쳤거나 예수한테 미쳤거나, 미친 사람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애들을 욕하지 않았어요." 제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분명히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항상 찬송이 있습니다. 항상 평안이 있습니다. 비록 비참한 지경에 빠져 탄식하며 울던 사람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에 활짝 웃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엉엉 울던 아이가 금방 웃는 것처럼 '오호라' 하고 탄식하던 사람이 금방 기뻐 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탄식의 자리에 오래 머물지 마십시오. 즉각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호라'의 탄식이 있는 자에게만 '감사하리로다'의 은혜가 따라옵니다. '오호라'가 없는 '감사하리로다'는 주님의 눈에 가증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오호라'의 탄식만 은혜인 줄 아는 것은 복음의 진수를 고의로 거부하는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오호라'의 은혜를 압니까? 당신은 반드시 '감사하리로다'의 은혜도 알아야 합니다. '오호라'의 탄식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가슴 가득히 체험한 심령에서 터지는 할렐루야가 매일 새롭게 터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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