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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된 자의 3대 기본 의식 (시편 65편 1-13절)

by 【고동엽】 2022.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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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된 자의 3대 기본 의식  (시편 65편 1-13절)

세상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어느 날, 에드윈 휴즈 주교(Bishop Edwin Hughes)가 ‘하나님의 소유권(God’s Ownership)’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날 그 설교에 반감을 가졌던 한 부자 교인이 그 주에 주교를 점심식사에 초청했습니다. 식사 후 부자는 자신의 대저택을 다 둘러보게 한 후 전체가 보이는 곳에서 물었습니다. “주교님! 이 모든 것이 제 것이 아닙니까?” 그때 휴즈 주교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앞으로 100년 후에 같은 질문을 해보세요.”

우리가 가진 것은 얼마 후에 모두 우리 손을 떠나게 됩니다. 어느 것 하나 우리 것이 없고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현재 많이 가졌다면 그만큼 많이 감사하고, 또한 많이 드리고 베풀어야 합니다. 드리고 베푸는 돈은 영원한 기쁨을 주지만 움켜쥔 돈은 일시적인 기쁨만 주고, 결국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서 가난이 한이 된 가장 테비에(Tevye)는 노래합니다. “내가 만약 부자라면 온종일 마시고 떠들겠네. 내가 만약 부자라면 힘든 일도 않고 얼마나 좋을까? 내가 만약 부자라면 이 마을 한가운데 방 12개의 큰집을 짓고 사람들에게 구경시켜야지. 내가 만약 부자라면 아내 ‘골디‘를 이중 턱을 가진 마님으로 만들어 공작처럼 뽐내게 해야지. 아! 얼마나 행복할까?"

옛날에는 이중 턱과 배불뚝이를 부와 행복의 상징으로 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이중 턱과 배가 나온 것을 오히려 탐욕과 자기 관리 실패의 상징으로 봅니다. 평소에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은 잘 먹는 것이 소원이지만 매일 잘 먹는 사람은 잘 먹는 것이 결코 행복의 조건이 아닙니다. 결국 그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점점 수위가 높아지고 동시에 마음의 공허함은 점점 커지게 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비행기를 보면서 꿈을 꿨습니다. “저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한번 타고 싶다. 언제 비행기를 마음껏 탈 날이 올까?” 그런데 커서 그렇게 타보고 싶은 비행기를 원 없이 타게 되면 무슨 말이 나옵니까? “이제 비행기 타는 것이 정말 지겹다!” 하나님의 소유권에 대한 인식도 없이 풍요에 젖어 살면 언젠가 풍요가 지겹게 느껴지게 되고, 풍요가 지겹게 느껴지는 순간, 사람은 가장 공허하게 됩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절대 만족을 모릅니다. 소유의 가치관으로 살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생깁니다. 그 소유의 가치관을 이제는 “나누기 위해 소유한다”는 가치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의 전환이 없으면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의 욕구 자체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의욕’도 욕구입니다. 사람에게 살 의욕이 없는 것처럼 불행은 없습니다. 성욕, 물욕, 명예욕 등의 욕구가 있기에 때로는 일에 대한 책임감과 삶에 대한 추진력도 생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욕구를 잘못 관리해 지나친 욕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죄가 나오게 됩니다.

< 축복된 자의 3대 기본 의식 >

어떻게 욕구를 욕심으로 변질시키지 않고 창조적으로 승화시켜 복된 길을 잘 갈 수 있을까요? 그것을 위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3대 의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세상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본문 6-7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혼란)까지 진정하시나이다.” 이 말씀은 모든 세상 만물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통제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24편 1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이 세상은 마귀의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어떤 때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말이 잘 실감나지 않습니다. 인간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보면 마치 세상은 사단이 지배한 곳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행을 가서 너무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 감탄이 나오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씀이 실감나고, 세상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찬송가 78장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세상은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땅과 환경을 잘 관리하고 아름답게 만들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을 사랑합니다. 성도는 자연과 환경 보호에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장 3절 말씀을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천사들의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말씀은 깊이 살펴보면 이런 뜻입니다. 즉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고, 영성이 있는 사람이고, 영안이 열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영안이 있어야 합니다.

2.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본문 9-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 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 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이 말씀은 사람이 가진 모든 소유와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많은 소유를 성공의 지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성공은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아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의 모든 소유는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재능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재능을 ‘하나님으로부터 대부받은 달란트(talent on loan from God)’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표현대로 사람의 능력과 재능과 소유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대부받은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고, 때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빼앗아 가셔도 거기에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있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사명자의 자세입니다.

욥은 엄청난 재난을 겪으면서 부와 소유가 하나씩 없어졌고, 마침내 자녀들까지 다 몰살했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욥의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욥은 욥기 1장 21절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 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어떻게 그런 고백이 가능합니까? 자신의 소유와 자녀에 대해 철저히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즉 우리의 배우자와 자녀, 집과 물질, 재능과 능력, 그리고 몸과 마음도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참된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지만 때로 그것들을 도로 가지고 가실 때도 찬양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구절에서 비천에 처할 줄 안다는 것은 소유가 없어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풍부에 처할 줄 안다는 것은 소유가 많아도 교만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철저히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면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고도 불평하며 사는 불행한 사람이 되지 말고 적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하며 사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불평은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부러움과 질투도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성도는 썩고 없어질 물질과 세상 영광을 부러워하지 말고 영원히 남을 것, 즉 주일성수, 새벽기도, 봉사와 헌신, 선교와 구제 많이 하는 것과 같은 가치 있는 것을 부러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사람은 소유나 환경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다.

1808년 비엔나에서 대작 ‘천지창조’가 연주될 때 작곡자 하이든도 참석했습니다. 연주가 끝난 후 감격한 청중들은 모두 기립해 하이든에게 갈채를 보내자 당시 늙고 병약한 두 다리를 떨면서 일어나 말했습니다. “여러분! 저에게 갈채를 보내지 마십시오. 이것은 저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박수를 보냅시다.”

그 말을 하고 의자에 앉다가 실수해 뒤로 넘어져 결국 그 말이 하이든의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이 하이든의 마지막 말은 우리가 영원히 마음에 새겨야 할 말입니다. 아무리 갈채 받는 훌륭한 일을 하고 많은 소유를 가졌어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고,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저도 가끔 어려운 일을 겪으면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만 어렵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의 죄와 허물을 생각하면 이런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신비한 평안이 생깁니다. 그런 마음을 끊임없이 훈련했기에 어려움에도 낙심하지 않고 이제까지 잘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며 범사에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3.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다윗은 이 시편을 쓰면서 가장 복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고, 삶은 덤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빚을 졌습니다. 이제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계신 성령님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몸도 함부로 굴리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기 권리와 자기 뜻을 포기하고, 심지어는 생명까지 기쁘게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자신의 소유권을 포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가장 복된 길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디즈니 만화영화 중에 ‘토이 스토리(Toy Story)’란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는 앤디(Andy)라는 아이가 가진 장난감들의 이야기입니다. 두 명의 중요한 캐릭터는 보안관 인형인 우디(Woody)와 우주전사 인형인 버즈 라이티어(Buzz Lightyear)입니다.

앤디는 보안관 인형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앤디가 생일에 최신형 우주전사 인형 버즈를 선물 받고 그때부터 버즈를 좋아했습니다. 게다가 버즈는 화려한 외모로 다른 장난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러자 질투심에 사로잡힌 보안관 인형 우디는 어떻게 하면 우주전사 인형 버즈를 없앨까 계획을 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둘은 장난감을 괴롭히기로 유명한 앤디 옆집에 사는 시드(Sid)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디와 버즈는 잔혹한 시드와 그를 닮은 개 스커드(Scud)로부터 벗어나려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가까워집니다. 그때 우디는 버즈의 문제점을 봅니다. 그것은 버즈가 자신이 진짜 우주전사라고 착각하고 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우디는 버즈에게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해주려고 소리칩니다. “버즈! 너는 진짜 우주전사가 아니야. 어린이의 장난감이야.”

버즈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TV 광고를 통해 자신이 진짜 우주전사가 아니라 대만에서 수입된 인형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믿음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그는 그래도 자신이 우주전사임을 증명하려고 창문 밖으로 날려고 시도하다가 곤두박질쳐지고 팔 하나가 부러지면서 우디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버즈는 자존심이 상하고 너무 상심해서 죽으려고 목을 매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그래! 나는 어리석고, 작고, 의미 없는 장난감이야.”

그 모습을 보고 우디는 버즈에게 자신의 실체를 말해준다는 것이 오히려 버즈를 낙심시켰다는 것을 알고 더 중요한 실체를 보도록 버즈에게 말합니다. “버즈! 넌 잘못 생각하고 있어. 넌 중요한 존재야. 그 이유는 네가 우주전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것이기 때문이야.” 그 말을 듣고 버즈는 자신의 다리 아래를 봅니다. 그때 자신의 작은 신발 뒤의 라벨에 검은 잉크로 자신을 소유한 소년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둘은 시드의 손을 탈출해서 앤디의 이삿짐 차에 올라타고, 결국 새 집에서 우디, 버즈, 그리고 다른 모든 장난감들이 서로 친구가 되어 행복하게 지낸다는 영화입니다.

왜 우리가 소중한 존재입니까? 우리가 대통령이고, 재벌회장이고,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소유한 존재이고, 우리 마음의 라벨에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말씀을 새겨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의 것’이란 생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세밀하게 살피시고 가장 선하게 인도하시고 마침내 천국의 새 집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의 손에는 우리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손길로 우리를 세상 끝 날까지 잡아주시고 품어주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리는 일에 결코 인색하지 말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전부를 드리고 나눠도 아깝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 헌신에는 손해가 없습니다 >

얼마 전에 저의 글을 통해 여승훈 전도사님이 프랑스로 선교 떠나는 소식을 듣고 이틀 전에 전에 몽골의 임준호 선교사님이 이런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목사님! 지난 며칠간 감기몸살로 고생하다가 조금 기운을 차리면서 기도 힘으로 사는 자임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준다는 말을 들으면 힘이 되살아납니다. 선교후원비가 오면 기분이 좋고 당장 사역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지만, 누가 기도해 주신다는 얘기를 들으면 무엇보다 마음의 혈관에 은혜가 돕니다. 기도제목을 꼼꼼히 살펴 기도해 주신다니 그 이상의 큰 동역이 없습니다. 지속적인 기도의 동역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글을 썼습니다. “혹시 요삼일육선교회에서 저를 위한 지정 선교헌금을 보내시려면 저 대신에 프랑스로 선교 떠나는 여승훈 선교사 가정을 위해 사용해 주세요. 워낙 생활비가 높은 곳이니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들 것입니다.” 저는 그 메일을 받고 하루 종일 벅찬 감동 가운데 지냈습니다. 왜냐하면 요새 임준호 선교사님이 얼마나 힘들게 지내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님은 중국 내몽골로 들어가려고 몽골에서 이룬 성경학교 학장 자리와 6개 교회의 감독 자리를 포기했습니다. 현재 몽골은 종교의 자유가 있고, 전체인구는 250만 명인데, 한국 선교사가 몇 백 명이 있습니다. 반면에 중국령인 내몽골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고 인구가 몽골의 몇 배나 되는데 선교사가 거의 없습니다.

임 선교사님은 그곳에 더 선교가 필요함을 느끼고 결국 독립 선교를 시작했고, 중국 공안의 감시를 피하려고 우물 선교회를 만들어 중국에 들어가기 전 단계로 현재 몽골에서 우물파주기 사역과 교도소 사역을 하면서 사역비와 생활비를 혼자 조달하고 있습니다. 이제 돕는 곳이 별로 없기에 우리는 더 기도해야 합니다.

선교사님이 우물 파주는 팀을 이끌고 여러 곳을 한번 순회하는데 몇 만 불의 경비가 듭니다. 그 경비를 조달하려고 기러기 선교사가 되어 사모님은 LA에서 일하며 경비를 보태고 있고, 사역비를 절감하려고 선교사님이 직접 김치까지 담그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힘든 상황에서 자기에게 보낼 헌금을 여승훈 선교사 가정으로 보내라고 하니까 얼마나 감동이 됩니까? 그러니까 선교사님에게 더 많이 선교헌금을 보내고 싶습니다.

사실 선교사님의 그 고백은 결코 쉽지 않은 고백입니다. 그 고백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생각한 고백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역은 물질로 하지 않고 기도로 할 수 있다는 고백이고, 철저히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한 청지기의 고백이고, 선교를 사랑하고 후배 선교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고백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소유도 다 하나님의 것이고 구원받은 우리는 생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생명까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아낌없이 드리려고 해야 합니다. 남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자기 것을 챙기지 못하고 드리면 사람들 보기에는 어리석게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사람에게 사는 길과 축복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미션퍼블릭에서 낸 첫 번째 책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를 내서 지금까지 출판 비용을 빼고 약 4백만 원의 순수입이 있었습니다. 그 4백만 원이 있으면 이번 두 번째 책 출판 비용이 됩니다. 그런데 교회와 선교를 위해 수입 이상으로 헌금을 해버려서 이번 2월에 나올 두 번째 책 ‘하나님과 깊은 만남’의 출판비용은 어떻게 마련하나 다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 경영의 원리를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윤이 남았으면 그 이윤을 가지고 재투자를 해야 정상인데 헌금을 해버리니까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회도 재정이 있으면 건물과 프로그램에 재투자를 해야 성장하는데 우리처럼 크지 않은 교회가 선교한다고 하면 어떻게 성장합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 그렇게 살았어도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게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와 헌신의 축복입니다.

며칠 전에 시애틀에 계신 한 가까운 목사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그분은 욕심 없이 순수하게 헌신하며 목회하는 목사님입니다. 임준호 선교사님을 위해서도 많이 돕습니다. 그처럼 남에게 퍼주기를 잘하니까 본인 교회는 크게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교회나 성장시키지 무슨 선교냐?”고 어리석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장하지 못했어도 자녀들이 잘 성장했습니다. 아버지의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자녀들이 거룩한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26살인 둘째 아들이 컴퓨터 회사를 차렸습니다. 6개월 만에 작년 말까지 순수입만 70만 불을 벌고, 금년에만 3백만 불 정도의 순이익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순수하게 헌신하면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통해서든지 무엇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

헌신에는 반드시 열매가 따라옵니다. 교회에서 가장 기쁜 일은 새 신자가 늘어나는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기쁜 일은 헌신자가 늘어가는 것입니다. 헌신자가 되지 않으면 ‘헌 신자’가 됩니다. 우리는 감격과 감동과 감사를 잃어버리고 닳고 닳은 ‘헌 신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내 것을 기쁘게 드릴 줄 아는 ‘헌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소유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시고, 더 나아가 내 생명까지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헌신이란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처럼 헌신할 줄 아는 청지기 의식이 필요합니다.

며칠 전에는 미국 뉴욕에서 사업을 하는 한 집사님이 저희 선교회 후원사역에 기쁘게 헌신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얼마 전에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을 하는 목적도 선교를 잘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선교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요삼일육선교회가 문서선교와 선교사 후원 사역을 지금까지 지탱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은밀한 헌신자들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청교도들은 그런 청지기 의식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자녀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고 물질을 교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버드 대학은 존 하버드가 설립했는데, 설립자 자손은 대학에 한 사람도 개입하지 않습니다. 카네기 공대도 철강 왕 앤드류 카네기가 설립했는데 그는 돈만 내고 학교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시카고 대학도 석유 왕 록펠러가 설립했는데, 기부할 때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 조건으로 기부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잘 벌고 잘 쓰는 이런 청지기 문화가 뿌리내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편법과 범법을 해서라도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결국 큰 성공을 하고서도 결말이 추한 인생이 되고, 욕을 먹습니다. 욕심대로 살면 결말은 불행이지만 기쁘게 자신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더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온전한 청지기로서 나의 모든 소유권을 주님께 넘겨드리고 기쁘게 헌신하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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