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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다메섹에 대한 심판 (1:3-5)

by 【고동엽】 2022. 4. 16.

제3강 다메섹에 대한 심판 (1:3-5)

 

1:3∼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에서 홀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길에 이르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스는 아모스 1장과 2장에서 다메섹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7개국(아람,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에 대한 심판을 먼저 전합니다. 그리고 난 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아모스가 단도직입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지 않았을까요? 구태여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심판을 경고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봅니다. 다윗 임금이 죄를 범했습니다. 자기의 충실한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했습니다.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또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우리아를 멀리 최전선에 보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다윗 임금에게 와서 다윗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단 선지자가 어떻게 했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다윗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비유를 들어서 빙 돌려서, 간접적으로 다윗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무리 다윗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해도 왕 앞에서 직접적으로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의 마음이 편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왕의 반발과 노여움만 사게 될 우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단은 다윗으로 하여금 간접적으로 죄를 깨닫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단 선지자는 더 효과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모스도 같은 방법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는 주변의 이웃 나라들이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이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이 죄로 인해서 멸망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 이스라엘도 똑같은 죄를 짓게 되었을 때 저들도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타난 각 나라의 심판의 순서가 어떠한 순서로 되어 있을 것 같습니까? 아람, 곧 다메섹부터 시작해서 블레셋, 두로, 에돔, 암몬, 모압, 유다, 이스라엘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이 순서가 과연 어떤 순서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히던 대적의 순서로 정해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이것을 지도 위에 그려보면 맨 먼저 멀리 북쪽에 있는 다메섹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남쪽 블레셋으로, 다시금 북쪽 두로로, 또 다시 남쪽 에돔으로 오면서 바깥에서 시작하여 점점 안쪽으로 소용돌이치면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조여 오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1.

그러므로 아모스의 메시지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에는 기분좋게 그 메시지를 듣고 있다가 점차로 얼굴 표정이 굳어지면서 나중에는 새하얗게 질려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모스 1장과 2장에 나오는 주변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분석을 해보면 똑같은 일정한 틀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그 구조를 분석해볼 수 있습니다.

(1) 서론적 전달자 양식(introductory messenger formula):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2) 기소 양식(indictment formula): "∼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3) 죄목(specific sin): "이는 저희가 …음이라"
(4) 벌(punishment): "내가 … 불을 보내리니 … 사르리라"
(5) 결론적 전달자 양식(concluding messenger formula):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선 아모스가 전하는 메시지의 틀에 따라 본문을 분석한 뒤에 그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메시지 자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일명 "전달자 양식"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내가 외치는 이 말씀은 내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나는 그저 전달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양식이 메시지의 첫부분에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서론적 전달자 양식"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둘째로,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양식이 1장과 2장에서 계속해서 반복이 됩니다. "어디 어디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기소 양식"이라고 합니다. 법정에서 검사가 "피고는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고 기소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셋째로, 그 서너 가지 죄 가운데서 특별한 죄목이 등장합니다. 다메섹의 특별한 죄목이 무엇입니까?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거민을끊으며 벧에던에서 홀 잡은 자를 끊으리니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길에 이르리라." 여기까지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벌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좀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을 우리는 "전달자 양식"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메시지의 맨 마지막에 나온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이것을 "결론적 전달자 양식"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일정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가면서 그 의미를 설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지금 아모스는 자기의 생각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자기가 전하는 메시지의 근원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하시는 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고 아모스 자신을 전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모스가 전하는 메시지에는 신적인 권위가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듣는 이들은 옷깃을 여미고 정신차려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 다메섹은 아람의 수도입니다. 본래 원문에 보면 "다메섹의 세 가지 죄로 인해서 그리고 네 가지로 인해서"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수치 대구법(numerical parallelism)이라고 합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서너 가지 죄라면 죄가 많다는 것입니까, 적다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다메섹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메섹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무나도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다메섹의 얼마 안되는 죄악까지도 용납지 않으시고 심판하신다는 뜻이겠습니까? 3+4는 7이지요. 성경에서 7을 무슨 수라고 합니까? 완전수라고 합니다. 따라서 서너 가지 죄라는 것은 죄가 꽉 찼다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 인간의 죄가 관영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저들을 홍수로 심판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다메섹의 죄가 꽉 차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암2:6 이하를 한번 읽어봅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몇 가지로 기록되어 있는지 한번 여러분의 손가락으로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암2:6∼8)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이스라엘이 지은 죄는 첫째,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둘째,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셋째,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넷째,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다섯째,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여섯째,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일곱째,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는 일곱 가지 죄입니다. 그러니까 서너 가지 죄라고 하는 것은 일곱 가지 죄로, 완전히 꽉 찬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메섹의 서너 가지의 죄로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죄라고 쓰인 히브리어가 왕하1:1에 보면 "배반"이라고 하는 단어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가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서로간에 세워놓은 언약을 지키지 않고 깨트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맺은 언약을 아람이 깨트리고 배반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약에 대한 증인의 역할을 하십니다. 그래서 언약을 맺은 당사자가 언약을 일방적으로 어길 경우에는 하나님의 벌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언제 어떻게 다메섹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깨트렸습니까? 뒤에 나오는 죄목 부분에서 이것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아모스는 말씀합니다.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죄를 반드시 벌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를 잘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서너 가지 죄 가운데서 특별한 죄목이 한 가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희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길르앗이라고 하는 곳은 요단 강 동편 야르묵 강과 얍복 강 사이에 있습니다. 원래 길르앗이라고 하는 곳은 창세기 31장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의 조상이었던 야곱이 아람의 조상인 라반과 경계를 정해서 침범하지 않을 것을 서로 언약하고 그 증거로 돌무더기를 쌓았던 곳입니다. 그 돌무더기를 라반은 아람어로 여갈사하두다라고 했고, 야곱은 갈르엣이라고 했습니다. 길르앗과 갈르엣은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이 이 언약을 무시하고 길르앗을 압박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압박했습니까?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했습니다. 아주 잔인하게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인도적인 모습입니까? 여러분, 옛날 시골에서 어떻게 타작했습니까? 긴 나무작대기에 가죽을 여러 가닥 달아놓은 것으로 곡식을 내려칩니다. 그렇게 해서 타작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분문에 보니까 철 타작기라고 했습니다. 가죽 끝에 쇳덩어리를 붙여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곡식을 내려치듯이 길르앗의 거민들을 압박을 했으니까 얼마나 잔인합니까?
4절에 보면 그것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나옵니다. "내가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리니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리라." 여기에도 대구법이 나오지요? "하사엘의 집"과 "벤하닷의 궁궐"이 대구를 이루고, "불을 보내리니"와 "사르리라"가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사엘이나 벤하닷이나 다 아람 나라의 왕입니다. "집"은 "궁궐들"과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궁궐이라고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안전한 지역이 아닙니까? 안전한 곳에 위치한 궁궐조차도 하나님께서 불을 보내서 살라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곳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요. 다메섹 전지역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불을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불은 전쟁을 상징하는 말인 줄 압니다. 전화(戰火)라는 말을 우리도 사용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서 전쟁에 의해서 아람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 5절에서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라고 했습니다. 성벽에는 문이 있고 그 문안에는 빗장이 있어 문을 열고 닫는데 사용합니다. 신3:5을 찾아보십시다.
(신3:5) 그 모든 성읍에 높은 성벽이 둘려 있고 문과 빗장이 있어 견고하며 그 외에 성벽 없는 고을이 심히 많았느니라
여러분! 옛날에는 이 빗장이 무엇으로 되어 있을 것 같습니까? 왕상4:13을 찾아보겠습니다.
(왕상4:13) 길르앗 라못에는 벤게벨이니 저는 길르앗에 있는 므낫세의 아들 야일의 모든 촌을 주관하였고 또 바산 아르곱 땅의 성벽과 놋빗장 있는 큰 성읍 육십을 주관하였으며
놋으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놋이 꺾이는 것입니까? 꺾이지 않는 것입니까? 꺾이지 않습니다. 최고로 단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조차도 꺾어 버리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꺾으신다는데 꺾이지 않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읽어봅니다. "내가 다메섹 빗장을 꺾으며 아웬 골짜기에서 그 거민을 끊으며 벧에던에서 홀 잡은 자를 끊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거민이라는 말은 조금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 "거민"과 뒤에 나오는 "홀 잡은 자"가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거민이라는 것은 일반 평민, 주민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원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홀 잡은 자"는 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거민이라는 것도 히브리어로 "앉은 자"라는 뜻인데 복수가 아니고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디에 앉은 자를 말하겠습니까? 보좌에 앉은 자, 곧 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왕을 끊어야 의미가 있지 평민 몇 사람을 끊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거민"이라고 하기 보다는 "보좌에 앉은 자," 또는 "왕"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줄 압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지명들, 즉 아웬 골짜기나 벧에던은 다 다메섹의 다른 별명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웬 골짜기에서 그 왕을 끊으며 벧에던에서 홀 잡은 자를 끊은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아람 백성이 사로잡혀 길에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다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길"이라고 하는 것은 도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 성경에 보면 두 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두 줄이 그어져 있다는 것은 지명을 의미합니다. 암9:7 말씀을 찾아보십시다.
(암9: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길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기에 보면 아람 사람들은 본래 "길"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길"은 아람 사람들이 본래 살았던 지역일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정확한 곳은 지금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힛데길 강(지금의 티그리스 강) 하류 줄기 어느 부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아람 백성들이 다 사로잡혀서 포로로 원래 있는 그곳에 끌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모스는 마지막으로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말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3∼5절까지 다메섹에 대한 경고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해서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는 말로 끝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말씀은 선지자 자신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의 이 예언은 왕하16:5∼9에 보면 역사적으로 그대로 성취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하16:5∼9) 이때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니라 당시에 아람 왕 르신이 엘랏을 회복하여 아람에 돌리고 유다 사람을 엘랏에서 쫓아내었고 아람 사람이 엘랏에 이르러 거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더라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 하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취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길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여러분, 지금 아모스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메섹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모스의 경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가 결국은 다메섹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서도 그것을 농담처럼 여기다가 큰 코 다친 사람이 있었지요? 누구였습니까? 롯의 사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곧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멸망될 것임을 예고했지만 롯의 사위들은 그것을 농담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소돔 성이 멸망당할 때 저들도 함께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죄에서 떠나라. 너희는 죄에서 떠나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서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속히 오리라!"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속히 오실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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