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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아모스서의 표제(表題, Superscription) (1:1)

by 【고동엽】 2022. 4. 16.

제1강 아모스서의 표제(表題, Superscription) (1:1)

 

암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받은 말씀이라

암1:1은 아모스서의 표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본문이 시작되기에 앞서서 괄호 속에 넣어서 그 시의 배경에 관해 간략하게 기술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표제입니다. 선지서 가운데서도 아모스서의 표제는 가장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대략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가 있는 줄 압니다: 1) 책의 제목, 2) 저자, 3) 저자의 직업, 4) 저자의 고향, 5) 내용, 그리고 6) 시기입니다. 순서대로 간단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책의 제목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서는 제일 처음 등장하는 말이 "아모스의 말씀들"(         , the words of Amos)로 되어 있습니다. 책의 제목을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다른 선지서와 비교해볼 때에 이것은 특이한 표현입니다. 예컨대 호1:1을 한번 찾아봅니다.
(호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호세아서의 제목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선지서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도구의 역할을 하는 자들이기에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제목이 적합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아모스서에서는 그런 표현을 쓰지 않고 "아모스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구약 성경 어디에서 또 쓰였습니까?
(잠30:1)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잠31:1) 르무엘 왕의 말씀한 바 곧 그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혜문학인 잠언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아모스서에는 지혜문학적인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책 제목 자체에서도 이미 지혜문학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저자의 이름은 아모스임을 보여줍니다. 아모스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아모스서 이외의 성경 어디에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1:1에 보면 이사야를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물론 이사야나 아모스나 주전 8세기의 동시대에 속하는 선지자이기에 시대적으로는 부자의 관계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사야의 부친 아모스(    )와 본서의 저자 아모스(    )의 우리말의 음역은 같지만 히브리어로는 서로 다른 철자로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동일인이 아닌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해당 선지자의 인물됨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메시지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전하든지 간에,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 중요성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아모스는 어디 출신입니까? 그는 "드고아의 목자"라고 했습니다. 그의 고향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2마일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표고가 높아서 목축에 유리한 곳입니다.
(대하20:20) 이에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여러분, 호1:1과 암1:1을 비교해볼 때 두드러지는 차이가 한 가지 있습니다. 호세아에 대한 소개는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어느 사람을 소개할 때 그 사람의 족보를 이용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누구이고, 할아버지는 누구이며, 또 그 위에는 누구인가 등을 쭉 나열하면서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아모스에 대한 소개에서는 그것이 빠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아모스의 부친이 일찍 죽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시대에 별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해보았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인물이었다면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대신 아모스서는 아모스의 고향으로 아모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모스에게 있어서는 아모스의 부친보다도 그의 고향 드고아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드고아가 과연 어떤 중요성을 주는 곳일까요?
여러분, 우리 나라도 각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습니다. 예컨데 나주라고 하면 배의 특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이라고 하면 전통적인 교육의 도시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드고아는 무엇으로 알려져 있습니까? 다음 구절을 한번 읽어보십시다.
(삼하14:1∼3)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드고아에 보내어 거기서 슬기 있는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이르되 청컨대 너는 상제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같이 하고 왕께 들어가서 여차여차히 말하라고 할 말을 그 입에 넣어주니라
드고아에는 슬기로운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드고아는 지혜 있는 자들이 사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바로 그 드고아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니 지혜로울 수밖에 없지요. 실제로 아모스는 그의 메시지에서 보는 것처럼 그 당시 세계 정세에도 박학다식했으며(암1:3∼2:3), 그의 목자로서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혜를 이용하여 그의 메시지를 한층 힘 있게 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암3:3∼5, 12, 5:19).
넷째로, 아모스의 직업은 목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쓰인 목자(   )라는 단어는 1:2에 쓰인 목자(   )와는 원어상에 차이가 있습니다. 아모스의 본시의 직업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된 히브리어 "노케드"는 왕하3:4에서 모압 왕 메사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왕하3:4)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우리는 이 사실에서 아모스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비천한 신분의 목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상당히 생활 수준이 높은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임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줄 압니다. 그만큼 아모스는 교육 수준도 높았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여하튼 아모스의 직업이 본시 목자였다는 사실은 그가 아무런 선지자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뒤에 아모스는 7:14∼15에서 이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암7:14∼15)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위하여 아모스와 같은 목자를 들어쓰기도 하시고, 베드로와 같은 어부를 택하기도 하시며, 마태와 같은 세리를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바울처럼 많이 배운 사람도 귀하게 쓰시고, 베드로처럼 배우지 못한 사람도 귀하게 쓰십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내 모습 그대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고자 하실 때, 내가 과연 얼마만큼 부르심에 충성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다섯번째는, 아모스서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묵시라는 단어가 말씀이라는 단어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두 단어는 원칙적으로는 서로 짝으로서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묵시는 눈으로 보는 것이고,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단어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는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듣기만 했을 뿐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묵시를 눈으로 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모스는 청각적인 용어와 시각적인 용어를 함께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철저하게 받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아모스가 전하는 메시지는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아모스가 앞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주된 대상은 "이스라엘에 대하여"입니다. 물론 아모스는 1장과 2장에서 이스라엘 주변의 여러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외치고 있습니다만, 그 주된 대상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에 나오는 요소들을 중심해서 아모스서의 개요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1:1∼2  서론: 표제와 주제
(2) 1:3∼2:16  열국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이스라엘에 대하여" 내린 심판이 그 정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3) 3:1∼6:14  아모스의 말씀(설교)
 1) 3장  이스라엘의 운명
 2) 4장  하나님의 징계와 이스라엘의 불회개
 3) 5장  이스라엘에 대한 애가(5:1∼17) 및 그릇된 기대감에 대한 책망(5:18∼27)
 4) 6장  이스라엘의 현실적 만족감에 대한 책망
(4) 7:1∼9:10 아모스가 본 다섯 개의 묵시.  7장에 세 개(황충, 불, 다림줄)와 8장(여름 실과) 및 9장(성소 파괴)에 각기 하나씩 등장하고 있습니다.
(5) 9:11∼15  결론: 이스라엘의 회복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모스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압축적으로 이미 1:1에서 밝혀주었습니다.
마지막 여섯번째로, 시기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아모스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한 때가 언제입니까? 본문에 보면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 년에"라고 했습니다. 먼저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모스는 북방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여기서 남방 유다 왕의 이름이 앞서서 기록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아모스가 남방 유다 왕국 출신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기록된 아모스서를 읽는 일차적인 대상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남방 유다 왕국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아모스가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한지 수십 년도 채 못되어서 북방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비록 아모스는 북방 이스라엘을 향하여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지금 기록된 아모스서를 실제로 읽는 대상은 남방 유다의 백성들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모스서는 그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남방 유다 왕국의 백성들을 염두에 두면서 먼저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유다 왕의 이름은 단순히 웃시야라고 했는데 왜 이스라엘 왕의 이름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라고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또 다른 여로보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방 이스라엘을 창건했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왕상12:2)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두 사람을 구분해서 이스라엘을 창건했던 사람을 여로보암 1세, 그리고 아모스 당시의 이스라엘 왕을 여로보암 2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무튼 같은 이름의 두 사람을 구분짓기 위해서 여로보암의 부친 이름을 함께 기입을 한 것입니다.
아모스가 그의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한 것은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지진 전 이 년"이라고 했습니다. 원문에 따르면 지진이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라도 다 알고 있는 "그 지진"이라는 뜻입니다. 슥14:5을 한번 찾아봅니다.
(슥14:5) 그 산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지라 너희가 그의 산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
따라서 유다 웃시야 왕 때의 지진은 스가랴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반 사람들의 뇌리 속에 생생하게 기억될 정도로 큰 지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갈릴리 북쪽에 있는 하솔이라는 곳에서 얼마 전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그곳의 지층이 지진으로 인해서 깊은 굴곡이 생긴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과학적으로 그 연대를 측정해본 바, 주전 760년 경에 일어난 지각변동이었습니다. 만일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지진과 관련이 있다면 아모스의 예언은 주전 762년에 이루어졌고,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지 40년 만에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만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모스가 전하는 경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니느웨 백성처럼 회개했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아모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죄악된 길에서 돌이키지 않다가 결국은 멸망을 땅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드시고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시며, 말씀과 더불어 승리하시는 복된 삶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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