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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제11강 참 유대인 (2:25-29)

by 【고동엽】 2022. 4. 16.

제11강 참 유대인 (2:25-29)

 

2:25­-29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지난 주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와야 하는지 유대인의 모습을 통해서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대로 살지 못하고 율법을 범했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었지만 자기가 자기 자신을 가르치지는 못했습니다. 위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쓸데 없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떠한 심정으로 나오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봉사의 직분을 감투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사회적인 지위를 그대로 가지고 나오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하나님을 결코 기쁘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죄인의 심정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러한 심정으로 나올 때에 우리의 예배가 비로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높아진 마음을 다 없애버리고 낮아지고 겸손한 심정으로, 죄인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이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예배드리는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를 다루고 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할례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을 읽어보면 유대인의 할례의 기원에 대해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이 99세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것을 요구를 하셨습니다. 그 뒤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지침으로 율법을 주셨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 너의 후손이 저 하늘의 별만큼이나, 저 바다의 모래알만큼이나, 저 땅의 티끌만큼이나 창대하리라. 그리고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해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이 언약에 대한 표징으로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할례였습니다.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난 지 8일 만에 양피를 베라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사내 아이들이 태어나면 위생적인 이유 때문에 포경수술을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고 하는 표시로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이 할례 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굉장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이 도에 지나쳐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할례가 마치 하나의 미신처럼 간주되었습니다. 누구든지 할례를 받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든지 간에 무조건 의롭다 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을 해버렸습니다. 자기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지옥 입구에 딱 버티고 서 있다가 할례 받은 사람이 지옥에 떨어지려고 하면 못 떨어지게 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 받은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이고, 잘못된 착각인지를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본문을 편의상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대지는 25절에서 2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한 육신의 할례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대지가 28절과 29절 상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 유대인은 누구냐, 진짜 유대인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를 행한 자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행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참 유대인이 되는 길은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람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된다고 우리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잠시 묵상하면서 혹시 유대인들처럼 우리에게도 자랑하고 과시하는 육신적 할례가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에 이와 같은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배설물처럼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의가 있다면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마련해주신 의, 복음에 나타난 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그 의 한 가지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우리에게 복음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이 육신의 할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한 마디로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빠져 버린 형식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율법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육신의 할례가 의미가 있지만, 도둑질하고 간음을 행하고 신사의 물건을 훔쳐서 팔아서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한 그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과 다를 바가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알기 쉽게 설명해봅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부부가 되었습니다. 손가락에 결혼 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삶을 살자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다니면서 마음속에는 온갖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자기 남편, 자기 아내 이외의 다른 남자, 여자와 계속 만나고 놀아난다면 그 반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는 의미로 할례를 행했는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고 율법을 범하는 삶을 살아갈 때 육신의 할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6절에서 똑같은 내용을 이번에는 거꾸로 설명해주었습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육신적으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것이 바로 할례 받은 사람처럼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육체적으로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아니했느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의 제도를 지켰느냐, 지키지 아니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이라고 하는 제도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기 위하여 율법을 허락해주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절대로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3:20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절대로 의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까? 율법이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3:20 말씀에서 율법으로는 무엇을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까?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서는 이와 같은 탄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탄식을 하게 될 때에 우리에게 고요히 들려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누가 나를!”이라고 탄식할 때 들려오는 음성이 누구의 음성인지 귀를 기울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누구의 음성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 3:24에서 이와 같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은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율법을 허락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할례를 받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례 받은 사람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새 언약의 관계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27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또한”이라고 했습니다. 또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이방인이 유대인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유대인이 이방인을 판단하는 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오히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 앞에서 정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니까 “의문”이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의라고 하는 것은 모형 의(儀)자이고, 문은 글월 문(文)자입니다. 중학생들이 학교에 갈 때 지구의를 들고가는 것을 보셨지요? 지구의는 지구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마음에 새긴 법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양심의 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있는 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글로 쓴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오히려 비록 율법이 없고 할례가 없지만 율법을 온전히 지킨 이방인들 앞에서 정죄를 받아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여기에 보면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내 힘으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있습니까?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신 그분과 연합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율법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무엇이라고 외치셨습니까? “내가 다 이루었다.”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그때 여러분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아직도 태어나지 않았다구요? 그때 구경만 하고 계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들도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바로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나의 옛사람이 온전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셨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마암아 하나님 앞에서 할례 받은 사람처럼 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장차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 우리가 오히려 유대인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두번째로, 그러면 참 유대인은 누구인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28∼29절 상반부에서 이것을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참 유대인은 겉모양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28절에서 진짜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대저”라고 하는 말은 “왜냐하면”이란 뜻입니다. 육신의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의롭다 함을 무조건 받는 것은 아닌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겉모양이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참 유대인이냐? 유대인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다 참 유대인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몸에 할례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영적인 견지에서 참 할례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봅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둘 다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삭은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마엘은 13살 때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 다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까? 두 사람 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자손은 아랍 민족이 되었습니다. 대대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자녀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삭의 두 아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삭에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은 에서, 또 한 아들은 야곱입니다. 에서가 형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분명히 한 아버지, 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사람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 다 약속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에서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돔이 되었습니다. 대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백성이 되고 만 것입니다.
겉모양이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그것이 참 할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유대인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9절 상반부에서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9절을 보십시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 진짜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 렘 4:4을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스스로 할례를 행하되 피부 가죽을 베는 것이 아니고 마음 가죽을 베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마음, 죄악 된 마음을 다 씻어버리고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변화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거래를 하기 위해서 일본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침에 만나 서로 인사를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오하이오 고자이마스.”
여러분! 일본 사람들에 대해서 잘 아시겠지만 인사할 때는 고개를 한참 수그리고 있습니다. 이분도 그것을 알고 일부러 오래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면서 고개를 천천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일본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또 한참 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때서야 일본 사람이 고개를 들면서 “오네가이시마스. 잘 좀 부탁합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 한 마디를 해놓고는 이것도 찔끔 부탁하고, 저것도 찔끔 부탁하고, 돈 한 푼 내지 않고 공짜로 모든 것을 다 해먹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야비해요? 얄미운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상대방을 존중해서 절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용해먹기 위해서 마음에는 아무런 존경심도 없으면서 겉으로만 외식적으로 굽신굽신하는 모습을 볼 때에 괘씸한 생각까지 든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진실로 하나님께 드리고 계십니까? 그렇지 아니하면 습관적으로, 타성에 젖어서 이 자리에 나와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드린다고는 하지만 건성으로 드리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얄밉게 보지 아니하실까 생각을 해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하나님께서 우리 때문에 이렇게 탄식하지 아니하시겠는지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내 아들아 너의 마음을 내게 다오.” 우리의 속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진짜 참 유대인이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29절 하반부에 그것을 우리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29절 중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참 유대인이 되는 길은 신령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의문에 속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 3:6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의문은 죽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문에 속한 사람은 율법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 혼자 힘으로 다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결국은 실수하고 쓰러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의문에 속한 사람은 자기가 넘어질 때 감싸주고 싸매주고 위로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용서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의문에 속한 사람은 이와 같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 언제나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면서 나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해서 괴로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내 속에 있는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하여 친히 하나님께 간구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경험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기도가 되지 않아서 그냥 “주여! 주여! 하나님! 하나님!”하면서 쩔쩔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라도 내 속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하나님께 간구해주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내가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못하지만 내 속에 있는 성령께서 나를 위하여 간구해주시는 그 음성을 듣고 다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연약합니다.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라도 우리에게는 의로운 대언자가 계십니다. 누구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나를 위하여 높고 높은 보좌를 내놓으시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 나를 위하여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도 나를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내 곁에 계시면서 나의 손을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변호해주실 것입니다. 나의 두 손을 하나님 앞에서 높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그래서 늘 감격 속에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확신에 찬 외침을 외칠 수가 있습니다. 어떠한 외침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와 같은 확신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29절 제일 끝부분에서 이러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유대인들은 할례를 자랑했습니다. 율법을 자랑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쓸 데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을 해주셔야 합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여러분께서 한번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이라고 하는 명칭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옛날 이스라엘은 모두 몇 지파가 있었습니까? 열두 지파가 있었습니다. 야곱이 레아와 결혼을 했습니다. 넷째 아들을 낳았을 때 레아가 이와 같이 외쳤습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양하리라.” 그러면서 넷째 아들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었습니까?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유다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이 유다라고 하는 이름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한 지파의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확대되어서 이스라엘이 북방 왕국과 남방 왕국으로 나누어질 때 남방 왕국의 이름으로 쓰였습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유대인이라고 칭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말의 뜻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찬양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쓰일 때는 찬양이라는 뜻이고, 사람을 향해 쓰일 때는 오늘 본문에 있는 말로 보면 칭찬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보세요. 칭찬이, 즉 유대인이라고 하는 말의 뜻이 어디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까? 참된 유대인이 되려면 그것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의를 아무리 내세워도 결코 참 유대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럽고 추한 누더기 같은 의를 가지고는 진짜 유대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주신 그 의, 복음에 나타난 그 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힘입을 수 있는 그 의만이 우리로 참된 유대인이 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위해서 유대인이라고 하는, “칭찬”이라고 하는 이름의 뜻을 사용해서 우리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유대인들은 육신적인 할례를 자랑했습니다. 육체의 할례를 받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착각인지를 우리에게 여지없이 깨우쳐주었습니다.
첫째로,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육신적인 할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참된 유대인은 누구냐? 육체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 아니고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세번째로, 참된 유대인이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사람에게서가 아니고 그것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길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오실 때에 혹시 여러분이 내세우고 있는 개인적인 자랑거리를 들고 오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할례가 무엇입니까? 나는 목사인데, 난 그래도 장로인데 하면서 교회 직분을 감투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박사인데 하면서 세상의 지식을 내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그래도 기업체 사장인데 하면서 사회적인 지위를 내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스로 속지 마세요. 그런 것을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절대로 어엿이 설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속이었습니다. 왕족인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존경받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어느 한 군데 흠잡을 곳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의 자랑거리가 그만큼 많은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뒤에 모든 육체의 자랑거리를 다 어떻게 했습니까? 해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배설물처럼 여겨 버렸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우리가 직접 한번 들어봅니다. 빌 3:7~9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여러분도 그러하십니까? 저도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아름다운 고백이 이 시간 저와 여러분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서 죽어 마땅한 저희들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고 또한 영적으로 참 유대인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참된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했사오니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마음을 늘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도 우리의 겉모양만 드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 진실된 마음, 속 중심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저희들이 다 되게 해주시옵소서. 우리가 자랑했던 육신적인 것들이 우리의 신앙에 방해가 된다면 사도 바울과 같이 다 떨쳐버릴 수 있는 결단을 이 시간 저희들에게 허락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우리가 힘 있게 의지할 수 있는 참된 성도의 모습들이 다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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