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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강 이스라엘의 그릇된 반응(4:4-5)

by 【고동엽】 2022. 4. 16.

제19강 이스라엘의 그릇된 반응(4:4-5)

 

4:4-5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동안 아모스는 이스라엘 주위의 여러 나라들이 범죄한 연고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들을 1장과 2장에서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모스는 계속해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2:6∼8에서 그들의 범죄상을 하나하나 낱낱이 파헤쳤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특별히 많이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건만(2:9∼11) 그들은 타락하고 부패할 대로 부패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음식이 쉬어서 못 먹게 되면 주부가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고 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악이 관영한 도시, 죄악이 관영한 나라를 하나님은 아까워하지 않고 엄하게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보시고서 탄식하셨습니다. "이거 완전히 쉬었구나. 완전히 썩은 고깃덩어리구나." 그러면서 불로써 소돔과 고모라를 쓸어 버리셨던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보시고 저들을 향한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은 3:9∼1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적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의 광포한 궁궐들을 파멸시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3:13∼15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이고 사회적으로 안전한 장소까지 다 제거해 버려서 저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을 철두철미하게 심판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우리가 이 말씀 가운데서 읽을 수 있는 줄 압니다. 뿐만 아니라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고리와 낚시로 꿰어서 짐승과 같은 모습으로 포로로 끌려갈 것임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경고를 듣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주어야 할 마땅한 반응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머리에 재를 뿌리고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통회 자복하고 뉘우쳐야 했을 것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죄악으로 인해서 완전히 멸망받게 되어 있었던 성이 하나 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이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본시 내리리라고 작정했던 재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어디였습니까? 예, 니느웨였습니다. 누구의 외침을 듣고 회개했습니까? 선지자 요나의 외침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이스라엘이 나중에 어디에 멸망당했습니까?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였던 것은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니느웨의 회개가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에 포로로 잡혀갔어도 조금은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가 원수의 땅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여 복을 받는 것을 볼 때 그는 당시로서는 괴롭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요나가 니느웨에서 복음을 전한 것이 단순히 원수의 나라만을 위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니느웨 백성들은 선지자 요나를 통한 심판의 경고를 듣게 되었을 때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리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듣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여주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스의 말을 듣고서 바로 그 자리에서 어떠한 반응을 보여주었는지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니느웨 백성들처럼 온전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 내용이 4:6∼11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내리신 다섯 가지 재앙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전히 쉬어 버린 음식처럼, 또 썩어 냄새나는 고깃덩어리처럼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가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스의 메시지를 듣고 궁여지책으로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이스라엘이 보여준 반응을 우리가 직접적으로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모스가 풍자적으로 한 말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반응을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는 줄 압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4:4∼5)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이 말씀 가운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벧엘이나 길갈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그것으로 자기들이 받게 될 형벌을 다 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것은 역겨운 범죄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에 보면 명령형 동사들이 많이 사용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실제로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해서 그와 같이 명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와 같은 명령형을 아모스가 사용했습니까? 비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풍자라고 합니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까불 때 우리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잘한다!" 그것은 실제로 잘하는 것이 아니라, 또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풍자적으로 비꼬는 것입니다. 꼴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은 꼴보기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벧엘이라고 하는 곳은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곳입니다.
(창12: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울러 그 뒤에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베고 자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삼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감격적인 서원을 하던 곳입니다(창28:10∼22).
그런데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종교적 요충지인 벧엘에 북방 이스라엘의 창건왕이었던 여로보암이 무엇을 설치했습니까? 금으로 만든 송아지를 설치해놓았습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이스라엘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단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제일 아래 있는 벧엘에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금송아지를 가리켜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린 신이라고 했습니다(왕상12:25∼33).
왜 여로보암이 그렇게 금송아지를 만들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다고 믿고 있었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북방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자동적으로 예루살렘에 쏠렸습니다. 영악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남방 유다 왕국의 예루살렘으로 쏠리는 것을 방지하고, 북방 이스라엘에게만 충성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두 개의 금송아지를 제조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단과 벧엘에 두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음과 같이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단에도, 벧엘에도 계신다. 그러니 구태여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다. 단이나 벧엘에 가서 경배를 드려라." 이때부터 벧엘은 북방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 벧엘이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암7:12∼13을 한번 찾아봅니다.
(암7:12∼13)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
여기에 보니까 벧엘은 왕의 성소요, 왕의 궁이라고 했습니다. 왕이 제사드리는 곳이 바로 벧엘이라는 것입니다. 또 왕의 궁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궁이라는 의미보다는 전이라는 의미로 번역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당시 수도는 사마리아니까 왕이 사는 궁궐은 사마리아에 있었습니다. 벧엘은 왕이 와서 제사드리는 성소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질책했습니다. "너희가 벧엘에 가서 제사드린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 아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가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더욱 범죄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을 여기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 벧엘뿐 아니라 또 하나의 지명이 등장합니다. 어디입니까? 길갈입니다. 금송아지가 있는 곳은 벧엘과 단인데 단이 기록되지 않고 대신 길갈이 기록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금송아지가 있는 벧엘만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송아지가 없는 다른 곳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그 어느 성소, 그 어느 산당에 가서 제사를 드리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다시 말해서 금송아지가 있는 벧엘과 금송아지가 없는 길갈 두 곳을 대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이스라엘에 있는 그 어느 곳에 가서 제사를 드리더라도 마찬가지 결과가 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길갈은 여리고 근처입니다.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건너면서 그곳에 가져온 열두 돌을 세운 곳이 바로 이 길갈입니다.
(수4:19∼20)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치매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그리고 수5:1∼10을 보면 여호수아는 바로 이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광야를 40년 동안 방황하는 가운데 장년들은 남김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단지 새로운 세대들만이 가나안 땅에 입성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광야에서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가나안의 여러 성들을 점령하기에 앞서 먼저 할례 의식을 길갈에서 행했던 것입니다.
사실 적들 바로 앞에서 할례를 행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할례를 받은 모든 남자들은 일단은 며칠 동안 꼼짝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에 순종해서 모두 다 길갈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가짐이 이때만 해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무튼 이 길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기 위해서 진을 치고 있던 본부였습니다. 뒤에 사울 왕이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 받았던 곳도 이 길갈이었습니다.
(삼상11:14∼15)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이처럼 길갈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길갈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많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곳에서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행위로 취급되었습니다. 아모스와 동시대 선지자였던 호세아도 길갈에서의 범죄 행위를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호4:15) 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지어다
(호9:15) 저희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서 저희를 미워하였노라 그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 방백들은 다 패역한 자니라
(호12:11) 길르앗은 불의한 것이냐 저희는 과연 거짓되도다 길갈에서는 무리가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며 그 제단은 밭이랑에 쌓인 돌무더기 같도다
자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벧엘에서, 길갈에서 행하는 범죄 행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들의 죄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벧엘이나 길갈로 간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 정성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또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벧엘에서 금송아지를 섬겼기 때문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아모스가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질책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의는 실현하지 아니하고, 그저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기 위해서 제물로 대신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아무리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전에 사울 임금이 아말렉과 싸울 때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무엇이라고 지시하셨습니까? 아말렉 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멸하고, 그곳에 있는 우양도 다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 임금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아니했습니다.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습니다. 자기의 공명심에서 그렇게 했는 줄 압니다. 또 양과 소 가운데서 좋은 것들은 남기고 나쁜 것들을 처치했습니다. 사무엘이 그것을 보고 질책하니까 무엇이라고 변명했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드리려고 그렇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말씀을 했습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지 제사드리는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와 똑같은 사상이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구절을 한번 찾아봅니다.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미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산상수훈에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제단 앞에서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바로 맺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과의 횡적 관계를 검토해서 그것을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원한을 품은 채 드리는 제물이 하나님께 바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가만히 더듬어서 이웃과 불편한 관계가 있으면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이 그에게로 가서 그를 용서해주며 그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와 하나님의 수직적인 관계도 바로 맺을 수 있고, 우리가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고,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함이 깃들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저버리고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 모든 진노가 다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귀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복채를 내면 재앙을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잘못된 사고방식을 아모스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통탄했던 것입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그 다음 4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구약 시대에는 각 가정마다 희생을 일년에 한 번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삼상1: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삼상1: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삼상1: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일년에 한 번이 아니라 아침마다 드린다고 했습니다. 또 구약 성경에 보면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몇 년마다 한 번씩 돌아옵니까?
(신14:28) 매삼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신26:12)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삼년마다 한 번씩 돌아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모스는 삼년이 아니라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아서 저들의 열심은 대단한 것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열심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까? 그들의 십일조를 기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가증스럽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원문에 보면 "너희"라는 대명사가 두드러지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희생과 십일조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를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시는 줄 압니다.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4: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수은제(酬恩祭)란 은혜를 갚는 제물, 곧 감사제(感謝祭)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쓰이는 수자는 잔 돌릴 수(酬)자입니다. 술 먹는 사람들이 술 좌석에서 한 잔 자기가 얻어먹으면 답례로 다른 사람에게 잔을 돌리지요? 보답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물에는 누룩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교병과 함께 드리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출23:18) 너는 내 희생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내 절기 희생의 기름을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지니라
(레2:11)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그런데 유일하게 유교병, 곧 누룩 넣은 떡과 함께 드릴 수 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수은제, 곧 감사제입니다.
(레7:13)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그 예물에 드리되
그래서 감사제를 드릴 때는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도 아무런 잘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룩 넣은 것을 수은제로 불살라 드릴지라도 이것은 율법에 저촉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질책하시는 것은 수은제에 왜 누룩을 넣었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은 내팽개치고 껍데기뿐인 의식적인 행위에만 연연해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낙헌제(樂獻祭)란 의무적으로 꼭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물입니다.
(레7:16)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레22:18) 아론과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중에 우거하는 자가 서원제나 낙헌제로 번제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려거든
(민15:3)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으로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는
하나님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예물이 얼마나 좋습니까? 아모스도 낙헌제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낙헌제를 드리되 외식적으로 드리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낙헌제를 드릴 때 외식적으로 드리는 저들의 모습이 오늘 본문에 어떤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까? 소리내어 광포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소리내어 널리 알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자신들이 제물 드리는 것을 큰 소리로 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가식적인 모습입니까?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외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제사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들을 드러내기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 마지막 부분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바가 아니라 "너희의," 곧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의 기뻐하는 바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제사는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완전히 상반된 짓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단순히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보니까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경건한 종교성에 대해서 질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절과 5절에서 이스라엘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제사 행위를 비판한 내용은 단순히 아모스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물을 드리고 있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본 두 절의 말씀을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종교의식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눈가림으로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베풀어주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하여 경건하다는 신자가 이웃을 향하여는 공의와 인자, 긍휼이 없다면 그 경건은 모양뿐일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겉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속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은밀한 가운데 보시고 은밀한 가운데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진실된 마음, 우리의 속 중심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마음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움직이면서 겉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듯한 가식적인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웃에게 선물을 받을 때 선물을 싸고 있는 포장이 더 중요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선물 자체가 중요합니까? 말할 것도 없이 선물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겉으로 나타난 형식에만 신경을 쓸 때가 있습니다. 내 진실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들어서 은혜스럽도록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습니다. 그런 것은 다 잘못입니다. 기도는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최면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진실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늘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셋째, 마5:23∼24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부패한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이웃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풀지 못하고 그대로 간직하며 살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편치 못하고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매면 저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맨 것을 이 땅에서 풀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풀어야 저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비록 우리가 이 시간에 우리의 두 발로 가지는 못하더라도, 조용한 가운데 우리의 마음으로라도 먼저 가서 맺힌 것을 다 풀어 버리는 역사가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로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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