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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을 베푸는 삶
긍휼 없는 죄는 긍휼 없는 형벌을 받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긍휼 때문에 살면서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삽니다. 차머스라는 분이 쓴 「정오의 강풍」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런 얘기입니다. 건축 기사인 피어홈은 도처에 많은 다리와 터널을 건설했습니다. 이 때문에 큰 명성을 얻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는 질병과 실패로 부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낙향하여 삽니다. 피어홈의 이웃에 한 몰인정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매우 사나운 개를 기르고 있어 피어홈은 늘 위협을 느꼈습니다. 피어홈은 개가 너무 사납다고 여러 번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오히려 번번이 피어홈은 모욕만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불행은 갑자기 닥쳐왔습니다. 그 개가 피어홈의 어린 딸을 물어 죽인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일제히 개 주인인 이 노인을 비난했습니다. 파종기가 되었지만 그 노인에게 한 톨의 곡식 종자를 주거나 팔지 않았습니다. 그 노인은 맨 밭을 간 후에 씨를 달라고 애걸하였지만 그 노인이 거리에 나오면 사람들은 냉소하였습니다. 그런 노인의 모습을 본 피어홈은 다음날 아침 일찍 광에서 자신이 쓸 씨앗 반 되를 가지고 나와서 열심히 노인의 밭에 씨를 뿌려 주었습니다. 얼마쯤 지나자 노인의 밭은 파릇파릇한 반면 피어홈의 밭은 그 일부가 아직도 빈 땅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긍휼은 원수의 밭에 좋은 씨를 뿌리도록 요구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비록 우리 자신의 밭 일부가 맨 땅으로 남겨집니다.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베푼 후에 내가 손해보는 일입니다.
- 사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조갑제
▣ 하나님의 긍휼
유대인들에게는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우화적인 이야기를 담아 놓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기 직전에 먼저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그 천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천사인 ‘의의 천사’라는 이름을 가진 천사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창조하고 그 세상에서 가장 으뜸 되는 피조물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의의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그 인간들은 온갖 불의로 이 세상을 더럽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 천사인 '거룩의 천사'라는 이름의 천사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거룩의 천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셔서는 안됩니다. 그 인간들은 이 세상을 더러움으로 가득 채워 놓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번째 천사인 ‘빛의 천사’를 불러 또 다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빛의 천사는 “하나님, 절대로 인간을 창조하셔서는 안됩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을 어두움으로 만들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번째 천사인 ‘긍휼의 천사’를 불러서 또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긍휼의 천사는 다른 천사와는 전혀 다르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 이 세상은 불의하고 더러워지고 어두움에 잠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불의와 더러움과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저는 기어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과 긍휼로 돌보시며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상대하고 싶지 않은 그 사람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를 향해서 다가오시고 기다리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 5)
▣ 인류를 구원하신 위대한 긍휼
학가다는 유대인의 민족 문학서 또는 민족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문서이다. 이 문서에는 유대인들의 최대 축제인 유월절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노예로 잡혀 있다가 탈출하여 유대로 귀환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일로, 학가다는 유월절의 환희와 소중함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바로의 노예였다.”
세계 어느 민족사에서 이와 같이 굴욕적인 패배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예가 있을까? 더욱이 제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한 것이 아니라 “해방되었다”라고 수동형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해방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 곧 사람들의 힘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패배 속에서도 살아남게 한 비결이었다. 세상의 모든 문명은 다른 민족에게 정복되는 즉시 사라졌지만, 유대 문명은 이러한 태도 때문에 수천 년 전에 잃어버린 땅을 오늘날에 다시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고귀한 태생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구원은 바로 우리 자신이 처참한 죄인의 후예임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의 복음은 자신이 이미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인간의 가장 큰 긍휼은 그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킬 때 참된 해방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 말씀의 징검다리 / 정장복·주승중 엮음
▣ 판사의 긍휼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 뉴욕을 가게 되면 일반적으로 케네디 공항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뉴욕에는 케네디 공항 외에 또 하나의 공항이 있습니다. 그 공항은 라구아디아 공항입니다. 본래 이 라구아디아라는 이름은 뉴욕 시민이 아주 사랑했던 유명한 한 시장의 이름입니다. 라구아디아는 시장이 되기 전에 아주 유명한 명 판사였습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한번은 라구아디아 판사가 재판석상에서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노인은 추운 겨울에 가족들 없이 외롭게 사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돈도 없고 너무나 배고픈 나머지 다른 사람의 지갑에서 20불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판결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판사가 그 노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노인장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이 노인은 라구아디아 판사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판사님, 저에게 한 번만 긍휼을 베풀어주십시오.” 잠시 동안 그 노인장을 조용히 굽어보던 판사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맞습니다. 노인장에게는 정말 긍휼이 필요하시군요. 그러나 노인이 잘못한 그 20불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마침 제게 10불이 있군요. 제가 이 10불을 노인장을 대신해서 변상하겠습니다. 노인장을 춥고 배고프도록 버려 둔 데에는 저의 책임도 상당히 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0불이 더 필요한데 여기 계신, 이 법정에 계신, 방청하시는 여러분, 우리 사회와 여러분도 이 노인이 춥고 배고파 방황하도록 그리고 도둑질하도록 버려 둔데, 여러분도 공동 책임이 있습니다. 이 노인을 위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기부를 좀 하시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이 재판관의 명 판결을 보고 감동하여 자발적으로 헌금을 하여 그 노인을 구했습니다. 그 후 뉴욕 시민들은 라구아디아 판사를 긍휼이 많은 판사라고 인정하였고 그는 후일에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야고보서 2:13)
▣ 긍휼 효과
요즈음 우리 정치 현실을 보면서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007년 7000명이 재학 중인 서울의 모 대학에서 단 2명의 시각장애 학생을 위해 점자 달력을 특수 제작했다는 것입니다. 한 사회가 좀 더 성숙한 시민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소수를 배려하는 정치적, 사회적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선 다수에 따라 의사가 결정되고 진행돼야 합니다. 하지만 숫자에서 밀린 소수를 희생양으로 삼아선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더욱 배려하려는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때론 더 큰 사회적 효과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움직이지 않던 다수를 일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강한 자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약자를 품고 보호하시는 긍휼의 하나님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승룡 목사(대전 늘사랑침례교회)
▣ 율법대신 긍휼로
바리새인들처럼, 우리가 겉치레에만 사로잡혀 상처 입은 세상에 긍휼의 손길을 뻗치는 데 실패한다면 하나님은 매우 불쾌해하신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일을 ‘행하는 것’에 너무 바빴던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1~13).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 절기, 그리고 종교 의식들이 다 속임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행한 일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행치 않은 것’들 때문에 말이다. 그들은 진정으로 긍휼이 필요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다.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7).
1960~70년대에 고압적인 종교적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미국의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들은 ‘예수는 좋다. 그러나 교회는 싫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그들이 예수님과 교회를 이렇게 구분하게 된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우리는 교회 속에만 고립된 채, 하나님의 긍휼 어린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 자신을 단절시켜 버리진 않는가? 그렇다면 그건 바로 바리새인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이 아닌 은혜로, 긍휼로 이웃을 대하길 원하신다.
- 「예수님과 직접 만나라」/ 스킵 하이지그
▣ 부드러운 긍휼
내가 좋아하는 영화 ‘부드러운 긍휼’(Tender Mercies)은 서로 정반대의 두 사람이 결혼하여 사는 이야기다. 맥(Mac)은 술과의 싸움에서 진 남자였고, 여인은 베트남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유복자를 낳은 젊은 미망인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 결혼했는데, 여전히 맥은 술에 빠져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조용히, 상냥하게, 오래 참으며, 부드러운 긍휼로 하나님이 그녀의 남편을 다루실 것을 신뢰했다. 이야기는 맥이 우울증의 발작과 함께 밖으로 나가 술병을 산 다음, 소형 트럭을 몰고 가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그는 그날 밤 늦게 집에 돌아와,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아내가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는 아내에게 다가와서 말한다. “나는 술을 샀지만 쏟아 버렸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소!” 그리고 거기서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여 부드러운 긍휼로 남편을 주님께 인도한 한 여인의 단순한 이야기이다. 끝에서 맥은 그의 어린 의붓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는다. 부드러운 긍휼, 정의는 긍휼로 조절되고, 긍휼은 부드러움으로 싸여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긍휼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영화 속의 아내처럼, 우리는 우리의 요구를 줄이고 우리의 동정심을 늘려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너무도 자주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다. 그분의 부드러운 긍휼은 너무도 아름답게 그분의 주권과 그분의 공의와 그분의 거룩과 균형을 이룬다. 얼마나 불가사의한가! 우리의 허물에 대해 우리를 심판할 모든 이유를 가지신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그분의 긍휼을 베푸신다. 용서로 충만한 긍휼은 사랑으로 싸여 있다.
-하나님의 뜻에 담긴 신비, 그 아름다움 / 찰스 스윈돌
▣ 역지사지의 긍휼
수자원공사에 다니는 교우들과 교제하면서 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됐다. 유엔에서 물 부족 국가로 분류되어 있는 한국에서는 단순하게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는 또한 산림청 직원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며 쉼을 선물하는지도 알았다. 건기에 산불 예방과 진화에 밤낮 없는 그들 입장이 돼 보니 가족 일처럼 느껴졌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그리스도인에게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했다. 인간의 비참함 속에 친히 들어오셔서 인간의 언어와 풍습으로 생활하시고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모습에서 거룩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원형을 발견한다.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 사람과 가까워지기 위해 3S를 감내했다. 불 때는 문화로 온 방 가득 차 오르는 매캐한 연기(Smoke), 메주 띄우는 냄새(Smell), 온 동네 개들이 달려 나와 위협하는 소리와 밤새 굿하는 소리(Sound)를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맞았다. 선교사들의 분투가 눈물겹도록 고맙다.
/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
▣ 긍휼히 여기는 자
성경 :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만족감은 받는데서 오지 않고 사실은 주는데서 옵니다. 받는 기쁨만을 아는 경우를 속어로 거지근성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참 기쁨은 없습니다. 주는 데에 기쁨을 아는 사람은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행복하게 합니다. 뉴욕 역대 시장 중 가장 명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 (Laguardia) 씨였습니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온 노인이 기소되었습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습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라과디아 판사는 그 유명한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씨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불들도 나처럼 너무 잘먹은데 대한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 기도 : 자비로운신 하나님! 오늘도 긍휼히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긍휼히 여기라
성경: 시편 102 장 13 절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시102:13)
사일러스라는 어린 소년이 어머니에게 7센트의 용돈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사일러스, 그 중에서 1센트나 2센트는 아주머니 댁에 있는 선교헌금함에 넣는 것이 좋지 않겠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일러스는 아주머니 댁으로 가면서 선교헌금으로 얼마를 넣을지 고민했습니다. 한참 만에 사일러스는 2센트를 넣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양심의 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뭐라고? 배를 채우는 데는 5센트를 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겨우 2센트를 내겠다고?’ 그리하여 사일러스는 군것질에 4센트, 헌금에 3센트를 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가볍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헌금함에 다다른 사일러스는 눈을 딱 감고 용돈으로 받은 7센트 전부를 털어 넣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사일러스는 허기로 지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경위를 듣고 난 후 접시에 빵과 우유를 가득 담아 아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약속되어 있습니다(마 5:7). 하나님의 긍휼을 움직이는 힘은 긍휼을 베푸는 우리의 따뜻한 손길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힘 닿는 대로 도와 줌으로써,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도록 하루를 살아갑시다.
* 기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 긍휼에 관한 성경 말씀
0 (시102:13)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0 (시편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0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0 (누가복음 1: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0 (로마서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0 (로마서 11: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0 (에베소서 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0 (빌립보서 2: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0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0 (베드로전서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0 (유다서 1: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한태완 목사 360 주제별 예화모음(메일: jesus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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