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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성결설교 78편

거룩만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엡5:25~26, 요17:19

by 【고동엽】 2022. 2. 24.

거룩만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엡5:25~26, 요17:19                 

존 라일, 『거룩성화

 

성경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구원에 꼭 필요한 세 가지는,

칭의와 중생과 성화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거듭나서 의롭다 함을 받고 성화된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된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만약 그런 상태로 숨을 거둔다면, 천국에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영화롭게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성화의 참된 본질

 

 

 

예수께서 어떤 사람을 참된 신자로 부르실 때,

성령을 통해 신자에게 역사하시는 영적인 일을 성화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역사하시는 사람을 일컬어, 성경은 “성화된” 사람이라고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죄를 보혈로 깨끗하게 하실 뿐 아니라,

죄와 세상을 향한 본성적 사랑에서 그를 분리시키시고,

그의 마음에 새로운 원리를 심으셔서 삶의 실제적인 경건을 이루어 가신다.

 

성령이 “말씀으로 하지 않고”(벧전3:1) 고난이나 섭리적인 임재를 통해 일하시는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방편으로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주 예수께서는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루셨다.

대속의 죽음을 통해 죄의 죄책에서 그들을 건지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심으로 죄의 지배에서도 건지셨다.

그들을 의롭다 하셨을 뿐 아니라 거룩하게 하셨다.

 

주님은 그들의 “의로움”이 되셨을 뿐 아니라 “거룩함”이 되셨다(고전1:30).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9).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5~26).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24).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였으니”(골1:21-22).

 

이 다섯 본문들을 주의 깊게 살펴 보라.

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 칭의를 일궈내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성화도 이루셨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여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다(삼하23:5).

성경은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하시는 자”, 그 백성을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로 칭하고 있다(히2:11).

 

 

 

 

1) 성화는 그리스도인이 참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에 참여함으로 생겨나는 불변의 결과이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15:5).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가지는 더 이상 살아 있는 가지가 아니다.

 

마음과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도 없는 형식적인 연합일 뿐이다.

 

인격을 성화하지 못하는 믿음은 마귀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 이는 “열매가 없는 죽은 믿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 아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의 믿음이 아니다.

 

요컨대, 삶의 성화가 없으면 그리스도를 믿는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한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구속받은 것에 깊이 감사하며 주님을 위해 살아간다.

 

많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한다. 예수의 보혈로 깨끗하게 된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진 자는,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약2:17, 딛1:1, 갈5:6, 요일1:7, 3:3).

 

 

2) 성화는 중생의 귀결이요 필연적인 결과이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새로운 본성과 원리를 따라 항상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

 

거듭났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지내고 세상을 따라 부주의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가르침은,

중생의 감격을 모르는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며, 형제를 사랑하고, 자신을 지키며,

세상을 이긴다고 분명히 말한다(요일2:29, 3:9-14, 5:4-18).

 

 

요컨대, 성화가 없는 곳에는 중생도 없으며, 거룩한 삶이 없다면 새 생명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3:9).

 

3) 성화야말로 구원의 핵심요소인 성령의 내주하심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사람의 영혼에 거하시는 성령은 결코 졸거나 주무시지 않고, 항상 신자의 마음과 성품과 삶에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신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말한다(갈5:22). 이 같은 열매가 발견되는 바로 그곳이 성령이 계신 곳이다.
물결과 나무와 연기에 미치는 영향으로 바람이 부는 것을 알 듯이, 사람의 행실에 미치는 결과로 성령이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으로 행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안에 성령이 계시다고 믿는 것은 터무니 없는 소리이다(갈5:25). 거룩한 삶이 없는 곳에는 성령도 계시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인치심이 성화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이다(롬8:14).

 

 

 

 

4) 성화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확실한 표지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자들의 숫자와 이름을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으시고 감추어 두셨다.

 

그러나 택함을 알 수 있는 분명한 한 가지 길을 주셨다.

택함을 받은 사람은 거룩한 삶을 통해 알려지고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거룩하게 하심으로 -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고(벧전1:2).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하려고 택함을 받은 자들이며(살후2;13),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자들이며”(롬8:29),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엡1:4).

 

데살로니가의 신자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본 사도 바울이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살전1:3-4).

 

최소한 성화의 모양이 드러나지 않는 곳에는 택함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성령이 ”모든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성화한다“고 교리문답은 정확하고 지혜롭게 가르친다.

 

 

 

 

5) 성화는 항상 눈에 보이게 드러난다.

교회의 위대한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내리는 성화는, 그리스도처럼 “숨겨지지 못”한다(마5:14).

“나무는 그 열매로 아나니”(눅6:44).

 

참으로 성화된 사람은 겸손으로 옷 입어 스스로에게서는 오직 연약함과 부족함만 보게 된다.

잘 알려진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의인이 주인의 칭찬과 관심을 받을 만한 일을 행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것과 같다.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나이까?”(마25:37).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서 다른 성품과 태도, 인격과 삶의 습관을 본다.

삶에서 거룩한 모습을 나타내지 못해도 “성화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이며,

“성화”라는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빛이 매우 작고 희미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두운 방에서는 아무리 작은 불빛이라도 눈에 띄게 마련이다.

아무리 미약한 생명이라도 박동이 있다면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해도, 그에게 있는 성결함은 어느 정도 느껴지고 보여지게 된다.

세속성과 죄 외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성도”는 일종의 괴물이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전혀 성도로 인정하지 않는다!

 

 

 

 

6) 성화는 모든 신도들 개개인의 책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신자에게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특별한 의무와 책임이 있다.

신자는 거듭나지 못하여 눈멀고 생명 없는 사람과 다르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자이다. 빛과 지식, 새로운 원리를 가진 자이다.

그들이 거룩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들 자신의 책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은혜와 새 마음과 새 본성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는 그들에게 어떤 핑계도 듣지 않으실 것이다.

 

항상 깨어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를 항상 책임 있는 존재로서 교훈한다.

죄인을 구원하신 구주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새롭게 하는 은혜를 주셨다면,

그분은 또한 우리가 잠들지 않고 그 은혜를 사용하기를 바라신다.

 

이 사실을 잊음으로 많은 신자가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스스로 무익하고 위로를 누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7) 성화는 점점 자라는 것이고 그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에서,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17:17) 한 것도

그 의미이다.

 

사도 바울이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도록 기도한 의미이다(살전5:23).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도 영적인 삶을 살기 시작한 이래로

그들은 더 보고, 더 알고, 더 느끼고, 더 행하고, 더 회개하고, 더 믿음으로 성화에 있어 성장해 간다.

 

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정도에 비례한다.

“은혜 안에서 자라”고(벧후3:18), “더욱 많이 힘쓰”게 된다(살전4:1).

 

 

 

 

8) 성화는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의 방편을 얼마나 부지런히 사용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방편”이라 함은 성경 읽기, 개인 기도, 정기적인 공예배 참석, 정기적으로 설교 듣기,

정기적인 성찬 참여 등을 말한다.

 

이 방편은 성령이 영혼에 새로운 은혜를 공급하시고,

속사람에 시작하신 일을 견고하게 하시는 지정된 통로이다.

 

“고통 없이는 영적인 유익도 없다.” 성경 읽기와 기도와 주일을 잘 누리는 일에 소홀하면서

성결에 있어 큰 진보를 기대하는 신자는, 밭에 씨를 뿌려 놓고 추수 때까지 전혀 밭을 돌보지 않으면서

한 해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농부와 다르지 않다.

 

우리 하나님은 친히 정하신 방편(수단, 즉 기도, 말씀, 성례, 예배 등)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시다.

 

 

 

 

9) 성화되었다고 해서 내면의 큰 영적 투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투쟁이라 함은

모든 신자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옛 본성과 새 본성, 육체와 영의 사투를 의미한다.(갈5:17).

 

 

이는 우리가 건강한 상태에 있으며,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양심의 평화뿐 아니라 내면에 전쟁도 있다.

 

“죄 없는 완전”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로마서 7장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나 어리고 불안정한 그리스도인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사람만이 “내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가장 탁월한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의 종들도 그들의 경험으로 제 말을 확증해 주고 있다.

그들의 일기와 자서전과 삶이 그 증거이다.

 

내면의 갈등이 결코 그 사람이 거룩하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가장 탁월한 신자라 해도, 그의 마음은 서로 대적하는 두 군대 진영의 피비린내 아는 싸움터일 뿐이다.

 

“본성의 부패는 중생한 자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세례를 받은 우리도 많은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17조).

 

 

 

 

10) 성화를 통해 사람이 의롭게 되지는 않지만, 성화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이 말이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이제까지 살았던 가장 거룩한 성도의 가장 거룩한 행위조차도 불완전하고 결점투성이이다.

 

성도의 거룩한 행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의 맹렬함을 견딜 수 있고, 죄를 보상할 수도 있고,

천국을 상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0-28).

 

우리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의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뿐이다.

우리로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는 유일한 권리는,

우리의 행실이 아닌 그분의 공로를 통해서만 얻는다.

이 진리를 위해서는 기꺼이 죽을 수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성화된 사람의 거룩한 행실은, 비록 그것이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너무나 기쁘시게 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3:20).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2).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이 가르침을 잊어버리지 말자. 단지 데이지 꽃을 꺾어오거나

방안을 아장아장 걸어 다니기만 해도 부모가 어린 자녀의 노력에 기뻐하듯이,

우리의 천부께서도 믿는 자녀의 보잘 것 없는 행위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단순히 행실의 질이나 양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동기와 원리와 의도를 살피신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지체로 여기시고,

그 아들로 말미암아 그들을 눈동자 같이 기뻐하신다.

 

 

 

 

11) 성화는 위대한 심판 날에 우리의 성품을 뒷받침하는 가장 절대적인 증거로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삶에서 성화되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아무 소용없다.

 

위대한 백보좌 앞에서 생명책들이 펼쳐지고, 무덤이 그 갇힌 자들을 내어 놓고,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심판받을 그때, 필요한 한 가지 증거는 바로 성화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참되고 진실하다는 증거가 없다면,

우리의 부활은 단지 정죄를 위한 것이 될 것이다. 그날에 효력 있는 유일한 증거는 오직 성화이다.

우리가 어떻게 말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했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12) 성화는 천국으로 가는 우리의 훈련과 준비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천국은 본질상 거룩한 곳이다. 천국에 사는 모든 사람,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다 거룩하다.

천국에서 행복하려면, 이 땅에 있는 동안 천국을 위한 준비와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죽은 후에 영광 가운데 성도로 드러나기를 바란다면, 살아 있을 때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뿐 아니라 성령의 사역도 필요하다.

대속의 피도 필요하지만,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는 의롭게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성화되어야 한다. 성화되지 못한 사람이 천국에 이른다 한들,

그곳에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본질적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 곳에서 행복을 느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이 자기 성향과 습관, 성품과 맞지 않는데, 기쁨을 누릴 사람이 어디 있는가?

새장에서 독수리가 행복해 하고, 양이 물속에서 기뻐하고,

올빼미가 이글거리는 정오의 태양을 반겨 맞으며, 물고기가 마른땅에서 춤추기 전까지는,

성화되지 못한 사람이 천국을 기뻐할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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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의 가시적 표지들

 

 

 

 

1) 신앙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참된 성화는 아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해 너무 많이 들은 나머지,

사람들은 기독교 용어와 어투에 무분별하게 익숙해져 있다.

 

한편으로는 세상을 위해 살면서 죄에게 종 노릇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심, 구주, 복음, 평화, 값없는 은혜” 등에 대해

거침없이 쏟아놓는 사람들의 경박하고 무정한 말을 듣는 것은

참으로 메스껍고 혐오스럽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성화되어야 한다(요일3:18).

 

 

2) 참된 성화는 일시적인 종교적 감정에 있지 않다.

몇 가지 종교적 감정을 느낀 것을 가지고 거듭나고 성화되었다고 상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상태는 없다.

 

거짓된 종교적 열광 뒤에는 치명적인 영적 질병이 따라온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서는 어떤 실제적인 변화도 없는데,

복음 설교에 감동을 받고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두렵다.

 

이들이 느끼는 아픔과 이들이 맛보았다는 평화는 단지 표면적인 감흥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돌짝밭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들은 자처럼,

기쁨으로 말씀을 받기는 하지만 이내 복음을 떠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

이전보다 더 나쁘고 완고한 마음이 되어 버린다.

 

 

 

 

3) 참된 성화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이나 외면적 헌신에 있지 않다.

많은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성이 내면의 거룩을 대신하게 될까 두렵다.

저는 외적인 의로움이 마음의 성화를 이루어 내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더욱이, 외적이고 감각적이고 형식적인 기독교를 좇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세속에 몰두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허영과 자만으로 치닫는 것을 본다.

실제 성화는 극히 미미하면서도, “외적인 신앙 활동”만 많을 수 있다.

 

 

 

 

4) 성화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물러나 사회적 의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세대마다 거룩을 추구한다는 구실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의무를 거부했다.

 

광야에 묻혀 지냈던 은자들이나 수도원에 틀어박혀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로부터 도망쳐 월등히 높은 수준의 거룩에 다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다. 우리가 어딜 가든 모든 악의 뿌리가

우리 마음에 드리워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대못질을 하고 틀어박혀 있어도

마귀를 막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갈등과 어려움을 회피하는 것이 참된 거룩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것이 거룩이다.

 

온실의 화초와 같은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삶의 여건에서도 무성하게 자라는 강하고 굳세게 나타나는 것이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바로 그곳에서

부패한 것들 가운데 뿌려진 소금처럼, 어둠 속에 밝혀진 등불처럼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거룩의 기초적인 요소이다.

동굴 속으로 숨어 버리는 사람은 성화된 사람이 아니다.

 

가정에서, 거리에서, 거래처와 사업장에서 주인 또는 종업원으로서,

아비 또는 자녀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성화된 사람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5) 성화는 가끔 우발적으로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성화는 지속적으로 내면에 역사하는 새로운 하늘의 원리이다.

 

성화는 사람의 크고 작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 흘러넘치는 것이다.

성화의 처소는 마음이다 우리 몸의 심장처럼,

성화는 우리의 모든 성품에 일정하게 영향을 끼친다.

 

성화는 외부로부터 힘을 받아 물을 퍼내는 펌프와 다르다.

오히려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같이, 속으로부터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항상 흘러나온다.

 

오늘날도 돌발적인 충동으로, 가정의 우환이나 질병, 재난 등을 통해

갑작스럽게 일깨워진 양심을 따라 올바르게 행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회개한 것도 아니고, 성화된 것도 아니다.

참된 성도는 히스기야처럼 모든 일에 하나님의 계명을 옳게 여기고(대하31:21),

전심으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한다(시119:104).

 

 

 

 

6) 성화는 하나님의 법을 항상 존귀하게 여기고, 삶의 규칙으로 삼아

그 법에 순종하며 살려고 항상 힘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십계명이나 율법과 관계 없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율법을 통해 신자에게 죄를 확신하게 하시고,

칭의를 위해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성령은 또한 친절한 안내자로서,

신자가 성화를 추구하면서 율법을 신령하게 사용하도록 이끄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십계명을 경시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바울은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쓰면 선한 것”이라 했고(딤전1:8).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고 했다(롬7:22).

 

 

 

 

7) 성화는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삶을 통해 보여주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부단히 애쓰는 것이다. 특히 이런 가르침은 산상수훈과 사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는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가 끊임없이 제시되고 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

 

 

 

 

8) 성화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편지에서 교회 앞에 제시한 표준에까지 이르는 삶을 살려고

항상 애쓰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었다 해도,

그 속에서 모든 관계에서 행할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와 습관, 성품,

그리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분명하고도 실천적인 지침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그 편지를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이런 지침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원한 안내로, 하나님께서 친히 영감을 주신 것이다.

 

 

 

 

9) 성화는 우리 주님이 자신의 삶을 통해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주신

능동적 은혜에 대한 관심, 특히 사랑의 은혜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통해 나타난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성화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주변의 모든 사람의 행복은 더해 주고 슬픔은 덜어 주려고 애쓴다.

또한 모든 사람을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셨던 주님을 닮으려고 노력한다.

 

말로만 아니라, 기회를 얻는 대로 자기부인의 수고와 실천을 통해 그렇게 한다.

구원하는 믿음과 실제 회심의 은혜는 항상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한다(골3:10).

 

 

 

 

10) 성화는 기독교의 수동적 은혜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통해 나타난다.

수동적 은혜란 특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서로를 용납하는 것을 통해 드러나는 은혜를 말한다.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우리에게 본으로 제시하기 위해 이 점을 강조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1-23).

 

주기도문의 용서와, 성령의 열매들 중 오래 참음, 자비, 양선이 수동적 은혜이다.

수동적인 은혜를 얻는 것이 능동적인 은혜를 얻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수동적인 은혜야말로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성경이 강조하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용서를 본받아 살지 않으면서

성화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습관적으로 성마르게 짜증 내거나

항상 신랄한 말로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

앙심을 품은 사람, 악의적인 사람은 그 속이 세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칭의와 성화의 공통점과 차이점

 

 

 

 

칭의와 성화는 별개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칭의와 성화의 같은 점;

 

1) 칭의와 성화는 모두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2) 칭의와 성화는 모두 그리스도가 영원한 언약을 통해 자기 백성을 위해 이루신

위대한 구원 사역의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는 용서와 거룩이 흘러나오는 생명의 샘이다.

 

 

3) 칭의와 성화는 모두 동일한 사람에게서 발견된다. 의롭게 된 사람은 항상 성화된 사람이고,

성화된 사람은 항상 의롭게 된 사람이다. 하나님게서 이 둘을 찍지어 주셨고, 결코 나뉠 수 없다.

 

4

) 칭의와 성화는 모두 동시에 시작된다. 의롭다 여김을 받은 그때에 또한 성화하게 된다.

 

 

5) 칭의와 성화는 모두 구원에 꼭 필요하다. 누구든지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용서와 더불어

새로워진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보혈과 더불어 성령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영원한 영광의 이름을 가질 뿐 아니라 그 이름에 걸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칭의와 성화의 다른 점;

 

1) 칭의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다.

성화는 그 정도가 아주 미약할지라도 내면에서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2) 칭의를 통해 우리가 얻는 의로움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되어 누리게 되는 위대한 중보자인

그리스도의 영원하고도 완전한 의로움이다.

 

성화를 통해 우리가 얻는 의로움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우리 안에 새겨진 것이지만, 여전히 많은 불완전과 연약함으로 점철된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다.

 

 

3) 칭의는 우리 자신의 공로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성화에서는 우리 자신의 행위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애쓰고, 힘쓰고, 분투하고,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4) 칭의는 완성되고 완전한 일이며,

사람은 그가 믿는 바로 그 순간에 완전히 의롭게 된다.

성화는 불완전한 일이고, 천국에 이르기까지는 완전해지지 않는다.

 

 

5) 칭의는 더 이상 자라나지 않는다. 성화는 분명히 점진적인 사역이다.

삶이 지속되는 한 계속해서 자라고 확장한다.

 

 

6) 칭의는 우리의 인격,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는 것,

그리고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구원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성화는 우리의 본성과 마음의 도덕적 갱신과 관련이 있다.

 

 

7) 칭의는 우리에게 천국의 권세를 주고, 천국에 들어갈 담력을 준다.

성화는 우리로 천국에 합당하게 한다. 우리가 천국에 살게 될 때 천국을 누리도록 우리를 준비시킨다.

 

 

8) 칭의는 우리 밖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로, 다른 사람이 쉽게 분별하지 못한다.

성화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사람의 눈에 명백히 드러나 숨기지 못한다.

 

 

 

 

 

◑몇 가지 분명한 적용점

 

1)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처한 위험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했다(히12:14). 성화 없이는 구원도 없다.

 

교회를 다니거나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 가운데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참으로 두렵고, 끔찍하고, 놀라운 생각이다.

성화되지 못한 영혼이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성경이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진실하며 거짓말을 못한다!

 

2) 우리 각자의 상태를 분명히 알고, 스스로 성화되었다 느끼고 알기까지는 결코 쉬지 말자.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기기 기뻐하는가!

이는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물음이다. 성화되었는가? 아닌가?

만약 아니라면, 우리의 잘못이다.

 

3) 성화되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갈 길은 명확하고 분명하다.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해야 한다. 핑계가 아닌 전적인 필요를 가지고 믿음으로 그분께 자기 영혼을 드리며, 하나님과의 평화와 화해를 구하러 그리스도께 가야 한다. 탁월한 의사의 손에 자신을 맡기듯이 우리를 그분의 손에 맡기고, 자비와 은혜를 구하며 울부짖어야 한다. 우리가 먼저 살아야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다.

 

4) 거룩에 더욱 자라가고 더 성화되기를 원한다면, 항상 처음처럼 계속 전진해야 한다.

항상 새롭게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한다. 그분은 모든 지체에게 생명과 힘을 주시는 머리이다.

 

날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자기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은혜와 능력을

충만하신 그분으로부터 날마다 얻는 것이야말로 점진적인 성화의 위대한 비밀이다.

 

 

머뭇거리고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자는

일반적으로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소홀히 하고, 성령을 근심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5) 이 땅에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기껒해야 자기 자신에 대해 날마다 겸손해야 할 이유밖에는 찾을 것이 없고,

매 시간 자비와 은혜를 필요로 하는 빚진 자라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빚이 많을수록 우리 자신의 불완전을 더 볼 수 있다. 새롭게 되고,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입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흠 없이 완전해지는 일이 아직 우리를 기다린다.

우리가 천국을 갈망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6) 높은 표준의 거룩에 다다르기 위해 분투하고 성화를 중요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방앗간에 매인 말처럼, 교회당과 예배 주변을 맴돌며 이리저리 오갈 뿐,

도무지 자라지를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옛길에 우뚝 서서 탁월한 거룩을 추구하고,

담대하게 다른 사람에게 함께 거룩한 길을 가자고 요청하자. 이 길만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거룩이 행복이다.

가장 위로가 넘치는 일생을 산 사람은 다름 아닌 성화된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일반적으로 삶 전체를 보면, “성화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앗아갈 수도 없는 견고한 위로를 누린다.

 

“지혜의 길은 즐겨운 길이요”(잠3:17).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시119:165).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30). 또한 성경을 말한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4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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