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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입을 넓게 열라(시편 81편 8절~16절)

by 【고동엽】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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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입을 넓게 열라(시편 81편 8절~16절)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신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 마음의 강팍한 대로 버려두어 그 임의대로 행케 하였도다 내 백성이 나를 청종하며 이스라엘이 내 도 행하기를 원하노라 그리하면 내가 속히 저희 원수를 제어하며 내 손을 돌려 저희 대적을 치리니 여호와를 한(恨)하는 자는 저에게 복종하는 체 할지라도 저희 시대는 영원히 계속하리라 내가 또 밀의 아름다운 것으로 저희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케 하리라 하셨도다


어떤 아버지가 여행길에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자녀들이 방안에 모여 앉아 정신없이 TV를 보고 있습니다. 오랜만이라 아버지는 아이들과 좀 친숙해 지고 싶은 마음에 그 옆에 나란히 앉으면서 "TV에 나오는 저 이야기가 무슨 얘기냐?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거지?"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아이가 "아빠는 알 필요 없어요. 얘기해도 못 알아들을걸 뭐"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대를 단절의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우선 언어소통에 단절이 왔습니다. 같은 한국말을 하고 있지마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한 집에서 수십 년을 함께 살았지마는 아직도 마음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소리는 있는데 대화는 없습니다. 저마다 제 소리만 했지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말을 들어서 후련한 것이 아니라 할말 했다고 시원하다 합니다. 이런 정도의 생이라면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관심이 다르고, 세대 차가 있고, 그리고 목적이 다르기에 전혀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학문의 단절이 왔습니다. 모든 것이 전문화하고, 또 좁은 의미에서 전문성을 찾고 있기 때문에 다른 부문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 전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공과를 하는 사람과 문과를 하는 사람 사이에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전문적으로 연구를 깊이 한 사람, 많이 한 사람끼리일수록 더욱 더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루종일 저 나름의 전문세계에 살던 사람이 집에 돌아오면 어찌 아내가 자녀들과 얘기가 되겠습니까? 머리 속에는 지금 내가 연구하던 것으로만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점점 더 어렵습니다. 대화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도덕적 단절입니다. 한 사람의 선이 다른 사람에게는 악이 됩니다. 한 곳에서의 의는 다른 곳에서 불의가 됩니다. 한 사람의 성공이 다른 사람에게는 실패가 됩니다. 이리하여 사랑과 증오가, 의와 불의가 혼선을 빚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자기가 옳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저쪽에서는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단절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나의 뜻과 나의 말, 나의 마음이 그 어딘가에는 통하지를 않습니다.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사방이 다 막힌 감옥에서 저마다의 마음이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안 듣는 세대, 닫힌 세대, 그리고 스스로 소외당하는 세대를 우리는 살아가도 있습니다. 단절의 이유가 있다면, 긴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마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집착입니다. 누구할 것 없이 자신에게 집착하느라 다른 사람의 세계에까지 마음을 열 여유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열등의식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사람이 마음을 닫아버리는 중요한 이유는 열등의식입니다. 뭔가 다른 사람에 비하여 자기가 좀 부족하다 싶을 때에 그 누구에게도 여유를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한 피해의식입니다. 지난날에 맛본 실패, 그 악몽을 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실패가 앞에 있을까 해서 겁이 납니다. 겁이 나기 때문에 도통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폐쇄된 마음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또 하나, 때로는 지나친 욕심입니다. 이보다 결정적인 것은 불신입니다. 내가 나를 믿지 않고 남도 믿지 않습니다. 자연히 대화는 닫히고 맙니다. 우리는 이 같은 단절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12절에 보면 결정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마음의 강팍한대로 내버려두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서에 보면 1장 24, 26 28절에 걸쳐 세 번이나 "내버렸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God gave up-무서운 선언입니다. 강팍한 마음, 굳어지는 마음대로 내버려두었다---곧 듣지 않는 마음, 굳어진 마음, 강팍한 마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굳어지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자신의 심리상태를 보더라도 이제 이 일 후로는 아무 희망도 사랑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굳어진 마음, 닫힌 마음, 비뚤어진 마음,---이런 마음상태로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아주 짧은 문단이면서 아름다운 한 폭의 그 과도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혹 사진을 좋아하십니까? 저 는 그림이나 사진을 좀 유심히 보는 편입니다. 사진작가들의 작품집도 몇 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내가 가보지는 못했어도 아름다운 경치 같은 것을 즐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작가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어떤 시각에서 포착하는지 유념해서 보면 대체로 두 가지의 시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은 산과 물을 함께 찍는 것입니다. 산만 있어도 삭막합니다. 물만 있어도 재미가 없습니다. 산과 물이 함께 있을 때에 작품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아름다움의 극치를 묘사한 것은 바로 어미 새가 새끼에게 모이를 먹이는 장면입니다. 이런 장면을 포착한 사람이 많아요.
그 그림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어미 새가 새끼에게 모이를 먹이는 모습이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생각하는 시각입니다.
어느 전시회에 갔다가 가장 큰상을 받았다고 하는 한 사진작품을 보았습니다. 바로 어미 새가 새끼에게 모이 먹이는 장면을 찍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제비나 비둘기 같은 것을 주위에서 가까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새들이 새끼한테 모이를 먹이는 장면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포유류는 새끼를 낳으면 젖을 먹여 키우지만 날짐승들은 알을 낳아 가지고 그걸 품어서 부화시킨 다음에 젖을 먹이는 게 아니라 모이를 물어다 먹여 키웁니다. 그러느라고 어미 새가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릅니다. 새끼가 스스로 날아다니면서 모이를 자급할 때까지 그렇게 먹이는데 암수 두 마리가 부지런히, 부지런히 날라다 먹입니다.
입에 물고 와서 먹이기도하고 스스로 먹었던 것을 목을 비틀어가면서 토하여 먹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성애, 그 생명력이야말로 신비롭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새끼들은 아직 눈도 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미 새가 모이를 물고 오면 가까이 온 줄을 알고는 입을 딱딱 벌립니다. 이렇게 입을 벌렸을 때에 보면 몸은 작고 입만 커요. 몸뚱이는 보이지도 않아요. 그런 것들을 어미 새가 차례차례 먹입니다. 제일 크게 벌린 놈부터 먹입니다. 이미 받아먹은 놈은 먹었는데도 다른 놈들 입 벌릴 때에 또 벌립니다. 어미는 그것을 다 압니다. 너는 가짜다, 저리 가라 하는 모양입니다. 먹은 놈은 많이 벌리지 않는 대요. 어미는 이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어쩌다 병들었거나 시원치 않은 놈은 입을 크게 못 벌립니다.
입을 벌리지 못하면 그 새끼는 굶어 죽습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모이를 물어다 여기까지 오는 것은 어미 새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닫힌 입을 열게 할 재주는 없어요. 입을 열어야만 모이를 주고 모이를 주어야 저가 먹고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신비롭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10절)." 입만 열어라 하심입니다. 걱정하는 것도 많고 문젯거리도 많으나 잊어버리고 입만 넓게 열어라, 그러면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하십니다. 어떤 화가는 이 말씀을 소재로 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굳게 닫힌 문, 오래 전에 닫힌 문, 이끼가 끼고 먼지가 끼어 있는 문 앞에서 서시어 그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문에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손잡이가 없는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밖에서 문을 확 열어 젖히시는 것이 아니라 두드리고 안에서 열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도 그렇게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문 열어 드리기를 기다리십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들으라. 듣기를 원하노라, 어찌하여 듣지 않으려 하느냐, 들으라, 들으라 하십니다. 열라는 말씀은 명령이기도 하고 권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강제성은 없습니다.
자원해서, 우리 자신이 열어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열라는 말씀은 또한 믿음을 요구하심입니다. 날짐승의 새끼들이 눈도 감은 채 입을 엽니다. 이거야말로 전적인 신뢰입니다. 으레 어미 새가 좋은 것으로 먹여 줄 줄로 알고, 먹을만한 것, 소화할만한 것, 내게 필요한 것, 내게 합당한 것을 입에 넣어줄 줄로 알고, 입만 넓게 엽니다. 만일에, 어미 새가 까딱 실수라도 하면 새끼는 죽습니다. 그러나 어미 새는 결코 실수를 하지 않을 뿐더러 새끼들은 전적으로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믿습니다-전적으로 의지합니다. 그래서 넓게 여는 것입니다.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어미 새는 모든 새끼들을 다 사랑합니다. 다 사랑하지마는 특별히 입을 넓게 여는 새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슬하에 여러 형제가 있다 하더라도 보세요, 분명히 다 내 자식이지마는 개중에는 억지로 사랑하는 자가 있고, 기쁨으로 사랑하는 자가 있는 법입니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자녀가 있고, 받지 못하고 비실비실 하다가 겨우겨우 하늘나라에 간신히 들어가 는 자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을 보면 아주 충만하게, 만족하게,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부득이해서, 현대신학자들이 하는 말대로, 교회 나가자니 마음에 안 들고, 안나가자니 지옥 갈 것 같고, 안갈 수도 없고 갈 수도 없고 해서 끌려 다니듯 어영부영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각합니다. 나갈까말까하다가 말입니다. 일찍부터 서두르면 안됩니까? 꼭 이렇게 어딘지 주춤해 가지고 돌아가니까 시원치 않거든요.
여러분, 같은 자녀라도 사랑 받는 것은 달라요. 부모가 말로는 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더 주고 싶은 자녀가 있고, 주기가 좀 아깝다 싶어지는 자녀가 있어요.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어떤 사람이 사랑을 받는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지식 있는 사람, 훌륭한 사람, 잘난 사람, 아니꼬워요. 반갑지 않아요. 여러분이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수용성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receptivity 수용성의 크기에 때라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나한테 뭘 갖다주는 사람이라고 반가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주는 것을 기쁘게 받는 사람이 좋아요.
잊지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셨을 때에 두 자매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극진히 영접을 합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대접하려고 부엌에 들어가 수선을 떨면서 음식을 열심히 만들고,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 무릎 앞에 앉아서 조용히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좀 시샘이 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야, 마르다야, 많은 것으로 준비할 것 없다, 한 가지라도 좋은 것이다, 그런데 네 동생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쪽을 사랑하셨어요. 왜 그러신 것 같습니까? 한 사람은 음식을 대접하려고 했었는데 반갑지 않아요.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는 자가 더 반가워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누가 더 사랑을 받는 것입니까? 잘 듣는 자입니다. 열심히 잘 듣는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제가 이 강단에서 내려다보노라면 다 아름답게 보이고 귀하게 봅니다마는 개중에는 제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인지 아십니까? 차라리 조는 사람은 피곤해 조는가보다 하고 불쌍히 여깁니다. 제일 싫은 사람은 바로 딴청부리는 사람입니다. 보면 알아요. 그리고 팔짱끼고 있는 사람들, 팔짱 딱 끼고 무슨 말 하나 보자 하는 것 같은 마음, 참 보기 싫은 마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랑을 받는 것은 사람에게서나 하나님께로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들이는 마음이 좋아야 됩니다. Total acceptance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입을 넓게 열고 받아들이는 그 마음, 그 인격이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당장 이제 나가면서라도,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내가 반가운 사람, 헤어지면 또 만나고 싶고, 그의 말을 듣고 듣고 또 듣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입니까? 바로 입을 넓게 열고 있는 사람, 즐거운 마음과 소망과 기대와, 그리고 충만한 마음으로 입을 열고 있는 그런 상태, 그런 심령이 어디서나 사랑을 받는 법입니다.
로버트 슐러가 기도의 4단계를 말했습니다. 먼저 간구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둘째는 중보의 기도가 있습니다. 셋째는 감사의 기도가 있고, 넷째는 상담의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욕심이나 제목을 놓고 그대로 관철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기도의 제목 자체를 상담 제목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십시오, 받아야 하겠습니까? 말아야 하겠습니까? 가야 하겠습니까 말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경륜과 주님의 뜻 안에서 내가 따라가겠습니다-----바로 이런 기도가 응답 받는 기도입니다. 이런 마음이 사랑 받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제목을 하나 놓고는 이루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안 이루어지면 안 믿겠습니다…… 별사람이 다 있어요. 기도가 아니라 공갈협박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 사랑 받지 못해요. 받아서 좋은 일이라면 받고, 없어서 좋은 일이면 없어도 좋고…… 뜻대로 하십시오, 그저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바로 이런 마음, 넓게 여는 마음입니다. 또한 이것은 순종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들어보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고 듣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사람도 아닌 로마사람 군인 백부장을 칭찬하십니다. 온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본 일이 없다고 높이 칭찬하십니다. 이 사람의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가라시면 가고 오라시면 오겠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고 내 밑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곧 순종하겠습니다----이러한 자세입니다. 이렇게 입을 넓게 열 때에 주님께서는 참 좋은 믿음이라고 칭찬하십니다. 그리하여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그대로 채워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입니다. 어떤 장군의 딸이 밖에 나갔다가 낯선 사람으로부터 인형을 닮은 보석상자를 하나 받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딸은 이것을 놓고 자랑을 합니다. 아버지가 묻습니다. "누가 주더냐?" "모르는데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더냐?" "키큰 사람이던데요." 장군이 가만히 보다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알지?"하고 묻습니다. 딸이 대답합니다. "압니다." "그러면 그걸 내다버려라." "안돼요, 이 귀한 걸 왜 내다버려요?" "내다버리라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알면 내다버려라." 딸은 징징 울면서 밖에 나가 내다버리고 돌아섭니다. 그 순간, 그 물건이 꽝하고 터지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이 장군을 죽이려고 폭탄을 들여보냈던 것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아까운 것이라도 버리라 하시면 버리는 것입니다. 잡으라 하시면 잡는 것입니다. 가라 하시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넓게 연 마음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십니다. 돌을 옮겨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옆에서 일단 항의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나는데요." "안다. 그러나 옮겨놓으라" 주님의 말씀대로 돌을 옮겨집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돌을 옮겨놓으니 예수님께서 눈을 우러러 하늘을 바라 기도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치십니다. 이렇게 되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무덤에 찾아가셔서 "돌을 옮겨놓으라" 하시니 참 순종하기 어려운 순간입니다. 그러나 입을 넓게 연 사람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여러분, 현실은 이제 막간 것 같습니다. 우리의 노력, 하찮습니다. 인간의 기술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 놀라셨겠지마는 제가 지난주간에 LA에 가 있는 동안에 지진이 났어요. 제가 거기 한 몇 년 산 적이 있습니다. 옛날에도 가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마는 이번에는 좀 달라요. 침대가 흔들흔들하고 우르릉 꽝꽝 합니다. TV가 떨어지고 가구가 엎어집니다. 다리가 다 끊어지고, 길이 다 상하고, 불이 나고……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모두가 말합니다. 현실은 여기서 끝났다고. 인간의 노력,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한번 요동치니까 모든 것이 하잘것없습니다. 고속도로, 그게 뭐 대단한 것입니까? 한낱 아이들 장난감이나 다름없습니다.
여러분,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뜻 앞에 입을 열고 있는 것입니까? 얼마나 자원적으로, 얼마나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까?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연 만큼 채우리라 하십니다. 시편 107편 9절에 말씀합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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