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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이는 마땅한 바니라(에베소서 5장 1절~7절)

by 【고동엽】 2023.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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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마땅한 바니라(에베소서 5장 1절~7절)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I Am OK, You Are OK」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7백만 부나 팔렸다고 하는 이 책에서 저자 토머스 에이 하리스(Thomas A. Harris)는 '인간의 관계'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I am not OK, You are OK'의 관계입니다. 자기는 부정하고 타인에 대해서 긍정하는 그러한 관계를 뜻합니다.

자기에게는 매사가 불행의 연속인 것으로 보이고 남들은 무엇이든 잘돼 나가는 것만 같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심리적인 문제를 낳습니다. 피해망상증, 무기력,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I am OK, You are not OK'입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긍정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은 다 옳고 남이 하는 일은 언제든지 못마땅합니다.

우월감과 자만심에 빠지고 타인 비난형이 되기 쉬운 경우입니다.

세 번째는 'I am not OK, You are not OK'입니다. 나도 그르고 너도 옳지 않다는 식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최악의 경우입니다. 반복되는 실패의 감정이 체념을 낳고 무의미에 빠지고 파괴적인 인간을 만들어갑니다. 동반자살을 하는 심리 상태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나 자신도 부정해버리고, 험한 세상 살기 힘든데 너도 함께 가자는 것이지요. 이런 관계에서는 폭력이 나타나게 되고 파괴적 심리 상태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I am OK, You are OK'의 관계입니다. 자기 긍정인 동시에 타인에 대해서도 긍정합니다. 자기도 옳고 남도 옳습니다. 다른 사람의 세계를 아름답게 보는 동시에 나 자신도 아름답게 바라보는, 가장 바람직한 관계입니다. 가정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예로 들어봅시다. '나는 고생할 터이니 너만 잘되거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이것처럼 상대방을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는 또 없습니다. 먼저 나 자신이 행복해야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부모가 자녀들을 향하여 너희들 때문에 내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때에, 부모가 자녀로 인하여 먼저 행복해할 때에, 자녀들도 진정으로 행복해집니다. '너는 행복해라, 나는 불행하다'---이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음식을 먹일 때에도 부모가 먼저 맛있게 먹어야 아이들이 따라서 먹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바른 인간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피해 의식도, 자기 교만도 모두 해결되어야 합니다. 억지나 부득이함이 모두 문제가 됩니다. 여기에 실망과 절망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만족과 타인의 행복, 나 자신의 관계와 다른 사람의 관계가 동시적으로 선하게 성취되어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관계 개선이란 윤리형식이나, 제도나 구조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바른 인식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요건이 됩니다. 깊이 자신을 돌이켜보십시다. 당연한 바가 부당하게 느껴지고, 가장 마땅한 바가 못 견디게 못마땅하게 느껴질 때, 여기에서 불행이 시작됩니다. 나도 불행이요 남에게도 불행입니다. 가장 당연한 일이 왜 내게는 당연한 것이 되지 않습니까? 그토록 분명한 것이 마땅치 못하게 느껴진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내 존재 자체의 문제에서부터 이것을 풀어나가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서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떤 인간관계를 맺어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파생되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 인식이 있은 연후에, 자유롭게 그에 따라서 마땅한 바를 찾아 생각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 '마땅하다'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proper' 또는 'fitness'로 쓸 수 있습니다. '적중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경제생활을 비유로 들어 생각해보겠습니다. 부득이 항상 빚을 지고 생활해야 하는 경우를 가정해봅시다. 똑같은 경제생활이지만 빚을 갚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의무감에서 살아가니 이 얼마나 괴로운 생활이겠습니까? 억지로, 부득이해서, 죽지 못해서 살아갑니다. 노예적인 삶입니다. 이렇게 '채무형'이 있는가 하면 '저축형'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보상을 기대하며 삽니다. 남편을 사랑해도 '그 사람이 나를 얼마나 사랑해줄까?'를 생각합니다. 조그마한 일을 해놓고도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칭찬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께 많이 기도했는데 복을 얼마나 내려 주실까? 십일조를 바쳤으니 또 다른 것을 주시겠지……' 만사를 보상지향적으로 살아갑니다.

좀 심한 표현을 빌린다면 '장삿속'입니다. 마지막으로, 의무도 보상심리도 아닌 '자유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땅한 바, 당연히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마음으로 사는 것처럼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고, 해야 되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 무슨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없습니다. 당연히 그것을 할 뿐입니다. '마땅한 바'에 자기의 삶을 걸고 거기에서부터 사는 사람---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삶의 윤리를 'proper ethics'라고 합니다. 이것은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다. 율법을 준행 한다던가 선행을 한다던가, 성결하게 산다던가 진실하게 산다던가, 충성을 하고 봉사를 하고 사랑을 하고---다 좋은 이야기입니다 마는, 이 모든 일에 억지가 있고 부득이함이 있고, 공명심(功名心)이 있고 보상심리가 작용한다면 얼마나 피곤한 일이겠습니까? 아무 가치도 없는 일 아닙니까? 만일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값으로 형(形)을 치르듯 지켜나가는 것이라면 그 곤욕이 어떻겠습니까? 여담(餘談)입니다마는, 우리 나라의 조세 제도에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어떠 어떠한 잘못에 대해서 정부가 세금을 징수하겠다는 기사를 읽는 경우가 있습니다. 징벌과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벌금과 세금을 동일한 성격으로 간주하는 잘못된 소치입니다. 세금과 벌금은 엄연히 다릅니다. 세금은 국민의 당연한 권리요, 당연한 의무입니다. 국민이라면 당연히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금을 벌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국민들은 또 어떻습니까? 여차하면 '세금 감면'을 요구합니다. 이 세금에 대한 철학이나 인식이 누구 할 것 없이 다 부족합니다. 국민이면 기쁜 마음으로 금액의 다소를 불문하고 내는 것이 도리입니다. 또한 정부는 국민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좋은 인식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외국에서 공부할 때에 종종 겪은 일입니다 마는, 고속도로 공사를 하는 곳에는 으레 커다란 간판을 붙여놓습니다. "당신의 세금이 여기에 쓰이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기분 좋은 말입니까? 그러니까 고속도로는 내 것이요 내 힘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 위를 달리는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세금 내는 것을 강도 만난 것처럼 여기는 것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효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기왕에 부모님을 모시는 것, 즐거운 마음으로 효도를 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남의 부모들은 수(壽)도 짧건만 우리 부모들은 오래도 사시네'하는 마음으로 억지로 부모님을 모신다면 이것이 효도입니까? 게다가 효도해서 복 받겠다는 심보라면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남들의 이목이 있으니 모시지 않을 수는 없고, 체면상 효도할 수밖에 없는데, 또 성경에서도 부모를 순종하는 복을 가르치고 있으니 기왕이면 복을 받는 쪽을 택하겠다는 생각이라면 참으로 피차에 어려운 노릇입니다. 사랑의 행위가 또 그렇습니다. 아내는 살림을 하면서 '내가 어쩌다 요런 신세가 되었누' 한탄하면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해나갑니다. 남편은 또 가족을 위해 수고하면서 '내 어쩌다가 애들이나 줄줄이 낳고 이 고생인가.' 역겹고 죽지 못해 사는 생이라면 어찌 불평이 없겠습니까? 마음가짐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사랑 받기 위해서 사랑하고, 사랑을 얻기 위해서 사랑하고, 과거에 쫓기면서 사랑해야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한 바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거의 노예도 아니고, 미래의 환상에 끌려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행합니다. 베풀지만 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봉사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줍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진정한 성도의 윤리입니다. 저주가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앞에 있는 복을 받아내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할 뿐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절 이하에는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이스라엘에게 주실 때, 단순히 명령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들에는 전제(前提)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이 전제를 아주 중요한 문제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나는 4백 년 동안 종이었으며 앞으로 영원히 노예로 살수밖에 없었던 처지에서 너희를 구원해낸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얼마나 당연한 요구의 말씀입니까? 어떤 처지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어떻게 다른 신을 섬긴다는 말입니까? '너희를 애굽에서 구해낸 여호와 하나님이라.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지 말라!' 백 번 천 번 지당한 말씀입니다. 아무런 이의도 설명도 필요치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길입니다.

선물과 뇌물은 쓰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받은 사랑에 감사하면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드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물건이라도 뇌물이 될 때에는 '앞으로 어떠어떠한 이득을 취하겠다'는 계산이 앞서게 됩니다. 이를테면 만 원짜리 하나로 백만 원을 거두어들이겠다는 속셈이지요. 사람간에 교제의 인사를 나누는 것도 그렇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건강하시지요, 평안하십시오'하는 순수한 인사 속에 출세나 사업에 보탬이 될까 하는 욕심이 깔린다면 도무지 재미없는 일입니다. 그실 이런 유의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똑같은 행위요, 외형적으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으나, 내적으로는 천양지차(天壤之差)입니다. 일의 동기(動機)에서 중생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근본적으로 존재의식이 빗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은혜의 관계 이전에 은혜의 존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중국사람들을 전도할 때에 가장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주제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효도를 강조하는 나라이기에,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를 다하라는 말에 쉽게 수긍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것이 마땅하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하늘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면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입니다. 강화도 남단의 작은 마을에서 체험한 일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 한 분이 그곳에서 40여 년 간 목회를 했습니다. 마을 주민 60퍼센트 이상이 모두 예수를 믿고 목사님을 따랐습니다. 어느 해 추수감사절에 보니, 교인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하나님께 헌물을 가져옵니다.

의아한 생각이 들어서 그중 몇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대답합디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데, 내가 이만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옳습니다. 개념을 분명하게 해두어야 할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본받는 자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거듭 반복하거니와, 자녀가 되었으면 효도는 마땅한 도리입니다. 벌받는 것이 두려워서, 또는 받을 유산을 기대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효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을 하는 것이 사람의 길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 받았으니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하십니다.

사랑 받았으니 사랑하고,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고, 섬김을 받았으니 섬기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땅한 일 아닙니까? 이 당연한 일을 마땅하지 않게 생각하는 데서부터 불행과 불평이 비롯됩니다. 미국에서 함께 공부하던 친구 하나는 너무나 힘이 들고 괴로우니까 종종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러한 고생을 해야 합니까?" "모든 일은 당연히 있어야 할 일입니다. 학생이 공부하느라고 어려운 것은 당연하지요. 젊은 사람이면 젊은 사람대로 할 일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은 절대적 관계입니다.

세 번째는, 구속함을 받았으니 성결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예수께서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제물로 바쳐짐으로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당연히 정결한 삶을 살고 당연히 탐욕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는 이제 탕자가 아닙니다.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온 후에도 탕자의 방탕한 생활을 계속한다면 죽어 마땅합니다. 거저 받았다는 생각, 사랑 받았다는 생각, 엄청난 용서를 받았다는 감격이 없는 까닭에 용서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속함을 받았으면 마땅히 성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말, 성도의 행위, 성도의 갈 길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자에게 순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우리가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 어찌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까? 순교의 죽음이 저주가 아닙니다. 형벌이 아닙니다.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또한, 더러움과 탐욕을 버리라, 그리고 감사하라고 구체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감사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쉰을 넘으신 세대는 어떤 경우에 처하여도 불평할 것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6․25를 겪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까? 얼마나 큰 은혜를 힘입고 오늘까지 살아왔는데, 무슨 일을 만난들 불평할 수 있습니까? 오로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당연한 일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신분에 걸맞는 기쁨과 감사, 성결과 진실이 따르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득이한 생활, 불가피한 생활은 율법주의에 속한 것입니다. 내 존재를 깨닫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당연히 하는 생활을 이루어야 합니다. 몹시 말썽을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자녀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마땅히 할 바입니다. 끝까지 사랑할 때에 자녀들은 마침내 부모에게로 돌아옵니다. 끝까지 사랑해주시는 부모의 사랑이 그를 돌아서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토록 큰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받은 사랑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면 내가 지금 자녀에게 베푸는 사랑은 당연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칠순이 넘은 노부부가 돌밭을 갈고 감나무를 심습니다. 지나가던 길손이 호기심에 차서 묻습니다. "언제 따겠다고 이제 그 감나무를 심습니까?" "한 십 년 후면 따먹게 되겠지." "그래, 그때까지 사실 것 같습니까?" "내가 못 먹어도 좋다네. 내 후손들이 먹겠지. 내 할아버지가 심으신 감나무에서 내 아버지가 따먹고, 내 아버지가 심으신 감나무에서 내가 따먹었으니, 내가 오늘 후손을 위하여 이 감나무를 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가,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죽어 마땅한 자가 구원을 받았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진노의 자녀이더니, 이제 선택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찬송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어찌 더 할말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은혜로 인하여 나된 나---오직 은혜로 인하여 된 나를 생각할 때에 이제 당연한 일만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의무가 아닙니다.

보상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은혜일 뿐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윤리입니다. 오늘도 그 마땅한 길을 생각하고, 당연히 할 일을 할뿐입니다. 여기에 자유함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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