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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자유하다(디모데후서 2장 8절~13절)

by 【고동엽】 202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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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자유하다(디모데후서 2장 8절~13절)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기독교를 특징지어 부르는 몇 가지 별칭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계시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란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행위를 말합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하려 하고, 그리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며, 심지어 자신이 신이 되려고 하는 일련의 행위를 통틀어 종교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종교행위를 배제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인간 세상에 들어오셨다는 데서부터 기독교가 출발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제시는 환상적이거나 몽상적(夢想的)인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이요 역사적이요 인격적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로 오십니다. 구원하십니다.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일컫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그 책의 종교'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나름대로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일반적인 종교가 가지는 경전의 개념과 기독교가 가지는 경전의 개념은 같지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 불교를 들어봅시다. 불교의 경전은 '팔만대장경'이라 불릴 만큼 방대합니다. 그러나 흔히 이 경전을 다 아는 사람도 없고 다 읽은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불교도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이 경전을 다 읽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단 한번도 불경에 접하지 않고도 불교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경전이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유교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회교의 코란경이 그 종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더라도 그것들은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 반하여, 기독교는 철저하 D쵥쵹TXT?게 성경 중심입니다. 성경이 절대적입니다. 기독교가 성경을 절대화한다 하여 기독교를 '그 책의 종교'로 부르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예수를 가리켜 메시아로도 인자라고도, 하나님의 아들로도, 주 또는 로고스(말씀)라고도 부릅니다. 이 모든 말의 의미는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표현하는 언어가 다르다 해도 똑같이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넷째로, 예수를 종말론적 계시자(啓示者)로 믿습니다. 예수 이외에 다른 계시자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성현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며 종말론적 계시자입니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승천하셨고 또 재림하시고 역사를 심판하실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외의 어떤 계시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이제 깊이 생각해봅시다. 성경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의 책입니다. 글입니다. 한 권의 역사서입니다. 창조시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라는 데에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역사서를 하나님의 말씀, 계시의 말씀, 길과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을 기록한 자들이 분명히 있고 그 이름이 성경에 수없이 등장합니다. 각 권이 기록된 시대적 배경이 다르고 기록된 사건도 모두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성경을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 속에 담겨 있는 '말씀성' 때문입니다. 말씀이라 하면 일반적인 언어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이라 하는 것을 헬라에서는 '레마' 또는 '레마타'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이라고 할 때에 이것은 '로고스'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계시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된 것은 바로 이 말씀성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생활하십니다.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제 이분을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라 하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사람으로 오신 이 예수를 그의 본래성과 본성을 따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이 이것을 아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하나님의 말씀이 육체를 입고 사람 세계에 장막을 치고 사람으로 사셨다--이것이 성육신의 역사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거듭거듭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독생자 하나님의 영광으로 예수를 보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보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때에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씀의 사건이 문자화되어 성경이라는 귀한 책으로 나타납니다. 이 증거의 말씀에 역사가 있고 여러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유명한 부흥사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단순한 역사서인 성경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까? 어떻게 성경의 영감(靈感)을 믿습니까?" 그의 대답은 매우 간결했습니다. "성경이 내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경을 읽어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직접 들려오기 때문이다"---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를 만납니다. 성경을 읽어가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성경은 계시를 받고 저자가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저자가 주축이 되어 계시를 받고 자기 생각대로 쓴 책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을 '목적영감설(目的靈感說)'이라고 합니다마는,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계시자가 저자를 고용하셔서 이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믿습니다. 유기적(有機的)으로, 계시자가 저자의 생활 환경과 그의 언어와 문화와 지식과 개념, 이 모든 것을 고용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입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 듣지 않는 사람, 반항하는 사람, 책 잡는 사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들을 귀 있어서 그것을 말씀으로 듣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들을 귀가 있어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서 떠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합니다. 말씀이 저자로 하여금 성령과 영감에 따라서 성경을 쓰도록 고용하셨습니다.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고 계시성이 있으며, 거기에 생명과 구원이 있음을 우리는 믿고 또 체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말씀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교회를 지배합니다. 말씀이 있고 성령이 있어서 교회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 떠들어댄다 하여도 말씀이 없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이 들려지고 성령의 역사가 함께할 때에 거기에 교회가 존재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일삼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에 붙들린 것이요 말씀에 포로된 것이다.' 말씀이 바울을 고용하여 그것을 전하게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중요한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9절)."

사도 바울은 감옥에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쇠사슬에 묶이고 나면 하나님의 사업도 하나님의 말씀도 다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에서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입니다. 나의 당한 일이, 내가 감옥에 들어와서 갇힌 것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차꼬에 매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자유하십니다. 말씀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감옥에 갇힘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로부터 2백 년 후에 마침내 로마는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매였지만 복음은 매이지 아니한다.' 스스로 존재하시고 스스로 자유하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은 죽지 않고 계속 전파됩니다. 바울의 전도사업은 때로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실패한 일이 없습니다.

바울의 실패를 다 모아서 합동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며 계속 확장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중단이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을 겪고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은 언제나 자유하시다.' 또한,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필요한 지혜도 그 속에 있습니다. 1950년, 중국은 모든 교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중국에는 더 이상 교회가 존재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당시 중국에는 3백만 교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산치하의 그 무서운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었고 말씀은 살아 역사 하셨습니다. 1982년 중국정부 당국이 내놓은 통계 자료에는 그리스도인이 무려 5천만에 이르고 있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이들은 자유로운 종교 환경 속에서 교제삼아 수양 삼아 다니는 교인들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교인이라고 밝히는 것은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며 당당하게 나선 자가 5천만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는 중국이 공산화되고 교회의 문이 닫히면 교회도 없어지고 말씀의 역사도 중단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강조하거니와 말씀은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말씀은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무한한 능력으로 계속하여 역사를 펴나가는 것입니다.

만주의 옛땅 심양 근방에 우리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습니다. 약 3백만 가량의 교민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 극동방송에서 전파로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성경 강해 프로그램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매일 방송하는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한다고 합니다. 혹시 빠뜨리는 것이 있을까 하여 세 사람이 각각 속기(速記)를 하고, 이것을 모아 새로 기록한답니다. 이렇게 작성된 노트를 가정교회에 나누어주어 이것을 읽고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몇 권 보내달라고 했더니 세 권을 보내주었습니다. 제가 로마서를 강해한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일일이 다 기록했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세 권 보내온 중에 두 권은 미국으로 보내고 한 권은 제가 지금 이렇게 소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이 방송을 듣는 시간이 새벽 4시입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말씀을 듣고 기록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편지와 함께 보내왔습니다. "이 방송은 우리의 젖줄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일만은 계속해주십시오. 방송 시간을 변경하지도 마십시오." 재미있는 사실은 이분들이 저도 그 시간에 방송국에 나가 방송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녹음방송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근자에 받은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저희들의 심령을 위하여 새벽마다 방송국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처했습니다. 그들은 이토록 소중하게 매순간 말씀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난 가운데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그러한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너무도 많은 신앙서적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성경 또한 지천으로 놓여 있습니다. 너무도 편하게 선교 방송을 접할 수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심령은 어떠합니까?

우리에게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위하여, 말씀의 역사가 있기 위하여 고난이 존재합니다. 정치적 이유로 억울하게 옥고를 치른 성도가 있습니다. 이름을 대면 여러분도 다 아실만한 분입니다. 한 3년 고생을 한 뒤 정부의 배려로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위로할 말이 없어 이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3년 동안 감옥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이분의 대답이 뜻밖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명색이 집사인데, 예전에는 성경을 다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참 잘되었다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성경을 읽었는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3년은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그렇습니다. 건강할 때에 성경을 읽는 것과 병들었을 때에 읽는 것은 다릅니다. 형통할 때에 바삐 한줄 읽는 것과 실패하고서 눈물 흘리며 읽는 성경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가정에서 편안히 읽는 것과 감옥에서 무릎을 꿇고 읽는 성경이 같겠습니까? 진실하게 깨끗한 마음으로 한번 읽어보십시다. 아무런 비판도 복잡한 연구도 필요 없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내 마음에 그대로 말씀하시는 그러한 체험이 필요합니다. 이 깨끗한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기 위하여 때로는 실패도 있어야 합니다. 전쟁도 필요합니다. 극심한 환난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역사의 중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왜 전쟁이 있느냐고 묻지 맙시다. 왜 환난이 있느냐고 묻지 맙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말씀은 그 큰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역사를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지 않을 때에 그가 나로 하여금 열게 하십니다. 내가 겸손하지 않을 때에 그가 겸손하게 하십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강권적으로 나를 사로잡고자 하십니다. 여기에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분명하게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나를 읽습니다. 내가 성경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나를 판단하십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건도 불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을 향하여 전폭적으로 마음을 엽니다. 말씀 속에서 우리의 합리성, 이성적인 욕구, 철학 등 어떠한 욕망이라도 다 충족됩니다. 아무 다른 소원이 없게 됩니다. 다윗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더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 말씀에 백 퍼센트 순종하면 백 퍼센트의 능력을 얻고, 십 퍼센트를 순종하면 십 퍼센트의 능력을 얻습니다. 전적으로 순종할 때에 우리는 그 말씀의 능력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의 한 분이신 김정준 목사님은 생전에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임종시에는 '저 좋은 낙원 이르니'라는 찬송을 불러다오. 요한계시록 20장 이하의 말씀을 계속 읽어다오. 그리고 내 묘비에는 아무 것도 쓰지 말고 오직 '임마누엘'이라고 기록해다오." 세상을 떠날 때에도 말씀에 의지합니다. 어느 분은 성경을 읽으면 가책이 많이 생겨서 못 읽겠다고 합니다. 가슴이 뜨끔하고 두렵다고 합니다. 그렇거든 좀더 읽으십시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모습이 보일 때까지, 진노하신 하나님의 얼굴이 변하여 사랑하는 아버지의 얼굴로 보일 때까지, '네 죄를 사했느니라'하시는 음성이 들릴 때까지,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 저 하늘나라가 네 눈에 환히 보일 때까지 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내 인격도 내 생활도, 내 운명도 완전히 말씀에 사로잡힌 바 될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사람이 마침내 찬송을 하게 됩니다. 복잡하게 시달리던 문제가 이제는 해결을 얻습니다. 말씀은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의 능력에 의지하고 이제 남은 생을 주께 헌신할 것입니다. 나는 갇혔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자유 하십니다.  

말씀은 자유하다(디모데후서 2장 8절~13절)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기독교를 특징지어 부르는 몇 가지 별칭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계시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란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행위를 말합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하려 하고, 그리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며, 심지어 자신이 신이 되려고 하는 일련의 행위를 통틀어 종교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종교행위를 배제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인간 세상에 들어오셨다는 데서부터 기독교가 출발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제시는 환상적이거나 몽상적(夢想的)인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이요 역사적이요 인격적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로 오십니다. 구원하십니다.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일컫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그 책의 종교'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나름대로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일반적인 종교가 가지는 경전의 개념과 기독교가 가지는 경전의 개념은 같지 않습니다. 비근한 예로 불교를 들어봅시다. 불교의 경전은 '팔만대장경'이라 불릴 만큼 방대합니다. 그러나 흔히 이 경전을 다 아는 사람도 없고 다 읽은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불교도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이 경전을 다 읽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단 한번도 불경에 접하지 않고도 불교도가 될 수 있습니다. 경전이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유교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이나 회교의 코란경이 그 종교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더라도 그것들은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 반하여, 기독교는 철저하 D쵥쵹TXT?게 성경 중심입니다. 성경이 절대적입니다. 기독교가 성경을 절대화한다 하여 기독교를 '그 책의 종교'로 부르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예수를 가리켜 메시아로도 인자라고도, 하나님의 아들로도, 주 또는 로고스(말씀)라고도 부릅니다. 이 모든 말의 의미는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표현하는 언어가 다르다 해도 똑같이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넷째로, 예수를 종말론적 계시자(啓示者)로 믿습니다. 예수 이외에 다른 계시자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성현의 한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며 종말론적 계시자입니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승천하셨고 또 재림하시고 역사를 심판하실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이외의 어떤 계시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이제 깊이 생각해봅시다. 성경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의 책입니다. 글입니다. 한 권의 역사서입니다. 창조시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역사서라는 데에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역사서를 하나님의 말씀, 계시의 말씀, 길과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을 기록한 자들이 분명히 있고 그 이름이 성경에 수없이 등장합니다. 각 권이 기록된 시대적 배경이 다르고 기록된 사건도 모두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성경을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 속에 담겨 있는 '말씀성' 때문입니다. 말씀이라 하면 일반적인 언어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이라 하는 것을 헬라에서는 '레마' 또는 '레마타'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이라고 할 때에 이것은 '로고스'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계시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된 것은 바로 이 말씀성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병을 고치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생활하십니다.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제 이분을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라 하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사람으로 오신 이 예수를 그의 본래성과 본성을 따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이 이것을 아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하나님의 말씀이 육체를 입고 사람 세계에 장막을 치고 사람으로 사셨다--이것이 성육신의 역사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거듭거듭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독생자 하나님의 영광으로 예수를 보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를 보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때에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말씀의 사건이 문자화되어 성경이라는 귀한 책으로 나타납니다. 이 증거의 말씀에 역사가 있고 여러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유명한 부흥사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단순한 역사서인 성경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까? 어떻게 성경의 영감(靈感)을 믿습니까?" 그의 대답은 매우 간결했습니다. "성경이 내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경을 읽어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직접 들려오기 때문이다"---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를 만납니다. 성경을 읽어가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성경은 계시를 받고 저자가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저자가 주축이 되어 계시를 받고 자기 생각대로 쓴 책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을 '목적영감설(目的靈感說)'이라고 합니다마는,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계시자가 저자를 고용하셔서 이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믿습니다. 유기적(有機的)으로, 계시자가 저자의 생활 환경과 그의 언어와 문화와 지식과 개념, 이 모든 것을 고용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입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 듣지 않는 사람, 반항하는 사람, 책 잡는 사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들을 귀 있어서 그것을 말씀으로 듣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들을 귀가 있어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서 떠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합니다. 말씀이 저자로 하여금 성령과 영감에 따라서 성경을 쓰도록 고용하셨습니다.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고 계시성이 있으며, 거기에 생명과 구원이 있음을 우리는 믿고 또 체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말씀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교회를 지배합니다. 말씀이 있고 성령이 있어서 교회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 떠들어댄다 하여도 말씀이 없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이 들려지고 성령의 역사가 함께할 때에 거기에 교회가 존재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일삼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에 붙들린 것이요 말씀에 포로된 것이다.' 말씀이 바울을 고용하여 그것을 전하게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중요한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9절)."

사도 바울은 감옥에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쇠사슬에 묶이고 나면 하나님의 사업도 하나님의 말씀도 다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 12절에서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입니다. 나의 당한 일이, 내가 감옥에 들어와서 갇힌 것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 사도 바울은 차꼬에 매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자유하십니다. 말씀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감옥에 갇힘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로부터 2백 년 후에 마침내 로마는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매였지만 복음은 매이지 아니한다.' 스스로 존재하시고 스스로 자유하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은 죽지 않고 계속 전파됩니다. 바울의 전도사업은 때로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실패한 일이 없습니다.

바울의 실패를 다 모아서 합동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며 계속 확장되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중단이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을 겪고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은 언제나 자유하시다.' 또한,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필요한 지혜도 그 속에 있습니다. 1950년, 중국은 모든 교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중국에는 더 이상 교회가 존재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당시 중국에는 3백만 교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산치하의 그 무서운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었고 말씀은 살아 역사 하셨습니다. 1982년 중국정부 당국이 내놓은 통계 자료에는 그리스도인이 무려 5천만에 이르고 있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이들은 자유로운 종교 환경 속에서 교제삼아 수양 삼아 다니는 교인들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교인이라고 밝히는 것은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모진 핍박과 어려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며 당당하게 나선 자가 5천만입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는 중국이 공산화되고 교회의 문이 닫히면 교회도 없어지고 말씀의 역사도 중단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강조하거니와 말씀은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말씀은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무한한 능력으로 계속하여 역사를 펴나가는 것입니다.

만주의 옛땅 심양 근방에 우리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습니다. 약 3백만 가량의 교민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 극동방송에서 전파로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성경 강해 프로그램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매일 방송하는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한다고 합니다. 혹시 빠뜨리는 것이 있을까 하여 세 사람이 각각 속기(速記)를 하고, 이것을 모아 새로 기록한답니다. 이렇게 작성된 노트를 가정교회에 나누어주어 이것을 읽고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몇 권 보내달라고 했더니 세 권을 보내주었습니다. 제가 로마서를 강해한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일일이 다 기록했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세 권 보내온 중에 두 권은 미국으로 보내고 한 권은 제가 지금 이렇게 소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이 방송을 듣는 시간이 새벽 4시입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말씀을 듣고 기록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편지와 함께 보내왔습니다. "이 방송은 우리의 젖줄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일만은 계속해주십시오. 방송 시간을 변경하지도 마십시오." 재미있는 사실은 이분들이 저도 그 시간에 방송국에 나가 방송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녹음방송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근자에 받은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저희들의 심령을 위하여 새벽마다 방송국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처했습니다. 그들은 이토록 소중하게 매순간 말씀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난 가운데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그러한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너무도 많은 신앙서적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성경 또한 지천으로 놓여 있습니다. 너무도 편하게 선교 방송을 접할 수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심령은 어떠합니까?

우리에게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위하여, 말씀의 역사가 있기 위하여 고난이 존재합니다. 정치적 이유로 억울하게 옥고를 치른 성도가 있습니다. 이름을 대면 여러분도 다 아실만한 분입니다. 한 3년 고생을 한 뒤 정부의 배려로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위로할 말이 없어 이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3년 동안 감옥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이분의 대답이 뜻밖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명색이 집사인데, 예전에는 성경을 다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참 잘되었다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성경을 읽었는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3년은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그렇습니다. 건강할 때에 성경을 읽는 것과 병들었을 때에 읽는 것은 다릅니다. 형통할 때에 바삐 한줄 읽는 것과 실패하고서 눈물 흘리며 읽는 성경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가정에서 편안히 읽는 것과 감옥에서 무릎을 꿇고 읽는 성경이 같겠습니까? 진실하게 깨끗한 마음으로 한번 읽어보십시다. 아무런 비판도 복잡한 연구도 필요 없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내 마음에 그대로 말씀하시는 그러한 체험이 필요합니다. 이 깨끗한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기 위하여 때로는 실패도 있어야 합니다. 전쟁도 필요합니다. 극심한 환난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역사의 중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왜 전쟁이 있느냐고 묻지 맙시다. 왜 환난이 있느냐고 묻지 맙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말씀은 그 큰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역사를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지 않을 때에 그가 나로 하여금 열게 하십니다. 내가 겸손하지 않을 때에 그가 겸손하게 하십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강권적으로 나를 사로잡고자 하십니다. 여기에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분명하게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나를 읽습니다. 내가 성경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나를 판단하십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건도 불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을 향하여 전폭적으로 마음을 엽니다. 말씀 속에서 우리의 합리성, 이성적인 욕구, 철학 등 어떠한 욕망이라도 다 충족됩니다. 아무 다른 소원이 없게 됩니다. 다윗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더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 말씀에 백 퍼센트 순종하면 백 퍼센트의 능력을 얻고, 십 퍼센트를 순종하면 십 퍼센트의 능력을 얻습니다. 전적으로 순종할 때에 우리는 그 말씀의 능력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의 한 분이신 김정준 목사님은 생전에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임종시에는 '저 좋은 낙원 이르니'라는 찬송을 불러다오. 요한계시록 20장 이하의 말씀을 계속 읽어다오. 그리고 내 묘비에는 아무 것도 쓰지 말고 오직 '임마누엘'이라고 기록해다오." 세상을 떠날 때에도 말씀에 의지합니다. 어느 분은 성경을 읽으면 가책이 많이 생겨서 못 읽겠다고 합니다. 가슴이 뜨끔하고 두렵다고 합니다. 그렇거든 좀더 읽으십시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모습이 보일 때까지, 진노하신 하나님의 얼굴이 변하여 사랑하는 아버지의 얼굴로 보일 때까지, '네 죄를 사했느니라'하시는 음성이 들릴 때까지,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 저 하늘나라가 네 눈에 환히 보일 때까지 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내 인격도 내 생활도, 내 운명도 완전히 말씀에 사로잡힌 바 될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사람이 마침내 찬송을 하게 됩니다. 복잡하게 시달리던 문제가 이제는 해결을 얻습니다. 말씀은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의 능력에 의지하고 이제 남은 생을 주께 헌신할 것입니다. 나는 갇혔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자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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