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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버리노라(요한복음 10장 11절~18절)

by 【고동엽】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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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버리노라(요한복음 10장 11절~18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소련사람들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고, 미국사람들은 보험과 세금의 노예가 되어 있다.' 이는 소련의 한 지도자가 미국으로 망명한 후 기자회견에서 한 말입니다.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이념의 노예가 된 것은 비참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 자유세계에 살면서도 무서운 쇠사슬에 묶여 자유 없는 생을 살아가는 미국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현대인은 자유하지 못합니다. 나름의 사상, 나름의 고정관념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아집(我執)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전공 학문에 매여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비참한 정신적 노예가 잇습니다. 이들은 자신만의 세계관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정욕의 노예도 있고, 허무주의의 노예도 있고, 향락의 노예도 있습니다. 볼 것을 못보고, 들어야 할 바를 듣지 못하는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거룩함과 사랑과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요, 다스리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악과를 만드시고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네 운명은 네가 결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존재의 조건은 바로 이 독립과 자유비판 이성에 있는 것입니다. 자유선택의 능력, 자유로운 행위의 능력, 자유로운 생각의 능력, 그리고 양심의 자유---인간 됨의 특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도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날로 날로 자신의 인간 됨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간 됨은 그가 누리는 자유만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진정 내가 자유하고 있는가? 여러분, 이 점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첫째, 사람은 필연성에 묶여 있습니다. 아침식사를 했지만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가 고픕니다. 부득불 점심식사를 해야 합니다. '나는 자유니까 안 먹겠다'---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먹어야 한다는 데 매여 있습니다. 또 먹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을 하니 피곤해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이러한 필연성에 우리는 붙들려 있습니다. 자연현상인 이 본능에 예외 없이 끌려가고 있습니다. 둘째, 사람은 불가피성에 묶여 있습니다. 사회적 환경,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줄(bondage)이 우리를 꼼짝못하게 합니다.

언젠가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연세 높은 장로님 한 분이 아는 댁에 결혼식이 있어서 외출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시간이 다 되도록 일어나지는 않고 돋보기안경을 킨 채 낡은 수첩만 자꾸 뒤적거립니다. "뭘 그렇게 찾습니까?"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작년 우리 딸 결혼식 때 그 댁에서 얼마나 부조(扶助)했는지 확인하려고요. 균형을 맞추어야지요."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체면, 위신, 체통이 여기에 한데 얽혀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를 누리는 삶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런 것들을 모두 툭툭 털어 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천만의 말씀이지요. 예를 하나 더 들어봅시다. '약혼이나 결혼식이 너무 호화판이야. 선물도 지나치고…… 이럴 바에야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낫겠어'라고 큰소리치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그 집 딸 약혼식을 보니 그야말로 굉장합디다. "평소의 말씀과는 다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거요?" "닥치고 보니 남의 얘기 할 때와는 다르더군요." 큰소리치던 그분은 결국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이렇게 하라고 합니까? 꼭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건 엄청난 노예생활입니다. 이미 행한 일에 대한 결과가 강한 의무감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받았으면 주어야 한다는 연대성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이 피곤해도 사표를 내던질 수 없습니다. 자존심을 꺾고 그대로 굽신거립니다. 그에게는 처자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대성, 이런 강한 의무감이 무시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과거가 우리를 압박하고 미래의 삶이 우리를 압박합니다. 도덕성, 정치성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여기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어느 짓궂은 기자가 열한 명의 정치가에게 무기명 전보를 띄웠습니다. '당신이 계획하고 있는 일이 발각되었으니 빨리 피하시오.' 이렇게 말입니다. 다음날 확인해보니 모두가 도망가고 없더라는 것입니다. 협박받고 있습니다. 무서운 쇠사슬에 매여 꼼짝못하고 살아갑니다. 이래도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까? 바로 이것이 현대인이올시다.

진정한 자유는 자원성(自願性)에 있습니다. 자유로운 판단, 자유로운 결단, 자유로운 행위, 자유로운 양심---여기에 진정한 인간 됨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란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선택 안에서만 평가될 수 있습니다. '존재 양식은 주려는 의지, 공유하려는 의지, 희생하려는 의지에 있다'----독일의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말입니다. 차원 높은 말같이 들리지만 가장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주려는 의지 속에, 함께 나누려는 의지 속에 존재양상이 있고 나아가 자기를 희생하려고 할 때에 비로소 인간의 존재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죄와 사망과 사단과 율법---이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심령이 될 때에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가 있게 됩니다.

자유는 소유에 있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기를 내주는 데에 있다는 원리를 깨닫는 일이 중요하고 시급합니다. 인간의 참행복이란 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받으면 준 사람에게 종속됩니다. 받으려고 하는 마음은 언제든지 원망으로 바꾸어집니다. 존재의 양식은 아낌없이 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심령의 상태가 문제요 그 자세가 문제입니다. 그만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참인간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는 줄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 오륙십이 되어야 철이 드는 것 같습니다. '뭘 좀 주고 싶은데 줄 것이 없어'---그때에야 비로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있었으나 줄 마음이 없었고 이제는 주고 싶으나 줄 것이 없습니다. 돕고 싶으나 도울 것이 없어요. 이 시점이 생의 시작입니다. 여기가 존재의 출발입니다.

둘째는 누구에게 줄까?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가 누구인가?---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셋째는 나 스스로 상대방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 데 대한 고민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수고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어요. 이 고민은 그런 대로 존재의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무엇일까요?----'나는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식할 때에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평생을 통해 바칠 수 있는 일이 있고 대상이 있을 때에 그 또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 멋있는 사람은 봉사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람입니다. 저는 미국유학 당시 취미 삼아 고서적을 파는 서점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러다 아주 귀한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한국인의 멋’---1930년대에 외국사람에 의해 영어로 씌어진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한국인의 최고의 멋이 무엇이냐?----김삿갓이요, 그게 어째서 멋이 있는가?----한 그릇 얻어먹고 시 한 수 써놓고 미련 없이 돌아서 가지 않는가.' 아무 바람도 없이 툭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인의 멋입니다. 요즘은 멋이 없어요. 달라는 것도 많고 알아달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점점 볼품없이 타락해갑니다. 좀 멋있게 삽시다. 주고 바라지 않는 것---그것이 멋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인간관계 역시 그러합니다. 참된 자유란 여기에도 있습니다.

여러분, 선물과 뇌물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인간답게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을 줄 때에 선물로 주고, 받을 때에도 선물로 받습니다. 그러나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사람은 만사를 뇌물로 주고, 뇌물로 받습니다. 줄 때에 받을 마음으로 준 것처럼 받을 때에는 마음의 부담을 안고 받습니다. 부담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덜되었다는 뜻입니다. 만사는 선물이요, 선물로 주고 선물로 받아서 그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인간된 가치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위대한 생의 뜻을 엿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절)"---누가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누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노라---이 얼마나 멋있는 말씀입니까? 스스로 버리노라---사랑은 언제나 낭비성이 있습니다. 사랑의 이론에는 타산이 없습니다. 계산이 통하지 않습니다. 사랑만이 이 일을 가능케 합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 12:15)"---낭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끔 저는 약혼식 주례를 합니다. 그럴 때면 주례자로서 신랑측에서 신부에게 주는 예물을 열어봅니다. 어떤 집은 굉장히 많이 해줍니다. 번쩍번쩍하는 것들을 대하면 '신부는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단지 순간입니다.

'일생을 내 아들과 함께 살아주겠다고 오는 사람에게 이 선물을 주노라'---이러한 순수한 마음으로 정말 아낌없이 얼마라도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 속마음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많이 줘야 많이 가지고 오지'---이렇게 계산하고 있습니다. 받은 쪽도 이만저만 큰일이 아닙니다. '받은 만큼 많이 해가야 되는데……' 양쪽 다 피장파장이지요. 이렇게 되면 선물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인간관계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그렇게 부담스러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낭비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직 사랑---사랑으로 선택된 자유만이 인간의 가치를 높입니다. 증오는 사람을 노예로 만듭니다. 그러나 사랑은 나 자신도 자유 하게 하고 그 사랑 받는 자도 무한히 자유 하게 합니다.

그럴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빼앗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에 얽힌 일화 한 도막을 들어봅시다. 어느 날 선생 댁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이 방 저 방 열어보다가 마침내 선생이 계시는 서재의 문을 열었습니다. 선생은 촛불을 켜놓고 조용히 책을 읽고 계십니다. "노크를 하고 들어오지 그냥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선생께서는 껄껄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둑은 오히려 놀라서 덜덜덜덜 떨고 있습니다. "이거 미안하구만. 뭘 좀 줄 게 있어야 될 텐데…… 좀 뒤져보게나. 어디 쓸만한 게 없겠나? 그 보따리 속에 뭐라도 있으면 어서 가지고 가든지." 벌벌 떨고 섰던 도둑은 선생의 이 말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나가다가 순경한테 붙들렸습니다. "이 사람이 선생님 댁에서 이 물건들을 도둑질했다면서요?" 순경이 도둑을 붙들고 선생 앞으로 끌고 와 확인을 합니다. 이에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주었습니다. 날더러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나간걸요."

여러분, 평생을 도둑맞은 마음으로 살렵니까? 어떤 분은 자녀한테 주고도 빼앗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강도 만난 마음으로 살아요. 심지어 부부간의 결혼생활마저도 일생 다 빼앗겼다고 돌려 달라고 합디다. 왜 이 모양으로 살아가느냐 말입니다. '주었노라'---빼앗기는 게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미련 없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자유함이란 주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주어서 이루어지는 그 뜻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얻기 위하여 주노라'---썩어지는 밀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야 열매가 맺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루 속에 있는 밀 알은 아무리 많아도 생산적인 역사를 창조하지 못합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자루에서 나와 흙 속에서 썩어질 때에 비로소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이 저금통장에 넣어 은행에 맡긴 돈은 비생산적입니다. 거기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썩어질 때에, 내 손에서 떠나 그 누구에겐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바쳐질 때에 열매가 맺습니다.

우리는 영적 추수의 법칙을 알아야 합니다. 썩어지는 밀 알--새로운 의미의 역사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얻기 위해 버린다'---이것이 생산성이요, 여기에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소원,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종말론적 은혜를 알기 때문에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기에 내놓는 것입니다. 내 생명이 남겨지기를 바라거나 향락적으로 전개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다만 유용하게 쓰여지기를 바라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갑시다. 내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귀하게 쓰여지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디에 내가 쓰여지는가?--어떤 고귀한 일에 내 생명이 쓰여지기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삶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매컬러스터라고 하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사랑하는 아내를 잃자 그 충격으로 그는 중풍병환자가 됩니다. 휠체어를 타야만 하는 이 의사는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자살을 시도해서 간호원이 옆에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호원이 휠체어를 밀고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먼바다를 바라보면서 이 의사는 죽기 위한 계책을 꾸밉니다. "나를 높은 언덕으로 좀 올려다주오. 그리고 당신은 내려가서 수영이나 해요." 간호원이 수영하는 동안 빠져 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의사의 속셈을 까맣게 모르는 간호원은 그의 말대로 휠체어를 언덕 위에 올려놓고 즐겁게 수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 살려요!'---의사가 빠져 죽으려고 한 바로 그 순간, 간호원의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수영을 하다 발에 쥐가 난 것입니다. 온몸을 다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점점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데 그녀를 구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때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휠체어를 타고 있던 의사가 벌떡 일어나 물 속으로 뛰어들어간 것입니다. 간호원을 건져내 생명을 구합니다. 생명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물 속에 뛰어든 순간 이미 의사의 중풍 병은 감쪽같이 나아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바치는 순간 남도 살리고 나도 살더란 말입니다. 능동적이고 선택적인 큰 자유 안에 창조적인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주(主)는 스스로 버렸습니다. 그런고로 부활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얻기 위해 버렸습니다. 그런고로 참으로 얻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5절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십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참사랑과 참 믿음과 참 소망 안에서 스스로를 버릴 때에라야 가장 큰 자유를 향유할 수 있고, 가장 큰 행복을 얻을 수 있고, 가장 권세 있는 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버리노라---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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