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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마24:37~51)

by 【고동엽】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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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마24:37~51)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외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更點)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을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우리는 지금 충격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진, 전쟁, 돌발사고, 살인, 폭력, 배신 등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우리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이 충격은 성격상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와의 단절입니다. 역사적인 맥락과는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역사를 보면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늘 같은 맥락 안에서 변화해왔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은 과거에 없던 것입니다. 역사적인 맥락과는 관계없이 단절되어버린 것입니다.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들입니다. 이를 시대의 비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비약적인 사건으로 인한 충격 가운데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미래적 충격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로 불확실성에 대한 충격입니다. 우수한 인재들이 많고 고성능의 컴퓨터가 있지만 일년 후, 한달 후에 있을 일조차 아무도 모릅니다. 갈수록 점점 더 모릅니다.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앞에 놓고 충격적인 공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난센스가 있습니다. 바로 비이성시대(非理性時代)에 산다는 것입니다. 충격시대를 살면서 비이성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때 베스트셀러가 되었던「Escape From Reaso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현대인은 이성(理性)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는 내용의 책입니다. 이성의 첫째 기능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당연히 생각하게 되어 있는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생각할수록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이성의 둘째 기능은 추리능력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이렇게 되겠다, 여기가 이러므로 저기는 이럴 것이다, 겨울에 눈이 많이 왔으니 내년에는 풍년이 들 것이다, 남을 배신했으니 나도 배신당할 것이다, 콩을 심었으니 콩이 날 것이다 --- 적어도 추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부 부정하려듭니다. 여기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런가하면 비판 능력이 있습니다. 자신을 비판합니다. 자기 양심, 자기 이성이 자기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판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다 씁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는 무감각의 시대, 망각의 시대, 비의식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의식 부정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지능개발이다 뭐다 하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점점 더 멍청해지려고 애를 씁니다. 잊어버리면서 살려고 합니다. 끽연, 음주, 오락, 폭력, 마약 복용 등은 바로 이성의 비판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방편입니다. 비의식적 행위이며 의식 배반적인 행위입니다. 극단적으로는 자기배신행위입니다. 스스로를 배신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느 칼럼니스트가 유명한 석학에게 물었습니다. "현대인을 두고 한마디로 표현하면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석학은 대답합니다. "현대인은 우주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며, 점점 더 모르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 현대인의 실상이 과연 이렇습니다. 많은 것을 배워 알고 있으나 정작 알아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의 양심과 정신을 깨끗이 보존하고 발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흐리게 하고 멍청하게 하여 바보천치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충격시대에 충격 없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나만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까지 바보로 만듭니다. 우민(愚民)정책이 바로 이것입니다. 국민을 어리석게 만드는 정책입니다. 운동경기 같은 행사를 필요 이상으로 개최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정신없이 빠져들게 합니다. 술에 취하도록 하고, 방탕한 생활을 장려함으로써 정말로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들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우리 국민에게 쓴 우민정책의 첫 번째가 술집과 유각(遊閣)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독립운동으로 일어서려는 젊은 지성인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리마다 술집을 열어 나라 잃은 젊은이들이 그 심정을 술로 달래게 했습니다. 이리하여 그 술책에 넘어간 젊은이들이 세상타령 하면서 술이나 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가 결국 인격파탄을 맞이하게 됩니다. 나라를 송두리째 먹어버리려는 치사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직도 우리는 그러한 식민지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독립한 나라의 국민은 술 마시지 않습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나태하게 풀어져서야 나라가 제대로 됩니까?
나라를 망치게 하는 정책적 요인들이 오늘도 그대로 남아 있어 문제가 됩니다. 너무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잘못된 일에 깊이 취해버렸습니다. 무분별한 향락, 환각제의 남용, 폭력행위가 요즘의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마약 --- 그저 자기 한 사람을 망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마는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점점 나쁜 쪽으로 발전하게 되어 급기야 사회문제를 야기시킵니다.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게 됩니다. 오늘의 조간신문에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이 환각제를 사용한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1만여 명에 가깝다고 합니다. 가공할 살인행위 입니다. 저 혼자 죽는 자살행위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행위인 것입니다. 여러분, '살인하지 말라'하신 계명을 기억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음주 운전도 살인행위입니다. 교통사고의 60%가 술과 관계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갑시다.
오늘의 본문에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42절)"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 --- 신약성경에는 이 말씀이 무려 22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듭하여 이 교훈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하실 때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는 베드로를 향하여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간곡히 부탁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저들은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마침내는 예수를 배반하는 비참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 '깨어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또 베드로전서 5장에서도 사도 베드로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8절)"라고 말씀하면서 겸손하라고 당부합니다. 종말론적 계시인 요한계시록 3장에서도 사데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면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너는 일깨워(2절)" --- 영적 각성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보면서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흥망성쇠의 역사가 어디에 연유해왔습니까? 성경적인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역사에서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외세 때문에 망한 나라는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빈약하여 망한 나라도 없습니다. 어느 나라 없이 망할 때에는 도덕적으로 망했습니다. 대로마제국이건 바벨론이건, 한 나라가 망한 것은 도덕적으로 타락해서였습니다. 죄로 인하여, 도덕적 타락으로 인하여 망했습니다. GNP가 높아졌다고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잘살게 된다고 하여 거기에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의 문제가 바로 깨어 있지 못한 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현세를 깊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영적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징조를 감지할 수 있는 지각을 키워야 합니다. 영적 시각, 영적 청각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지진과 기근, 또 도덕적 타락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여러분, 너무나 끔찍한 이야기이기에 이 강단에서 말하기가 죄송스럽습니다마는 에이즈(AIDS)라는 병에 대해서 한번 짚고 넘어가기로 합시다.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고 하는 이 끔찍한 병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기 위하여 저는 일부러 책을 사서 읽어보았습니다. 이 병은 원래 아프리카의 어느 제한된 지역의 원주민에게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다고 합니다. 사람이 원숭이와 성관계를 한 데서 비롯된 병이라고 합니다. 원인 자체도 끔찍하지만 전염되는 경로 또한 그렇습니다. 전염되는 원인의 95% 이상이 비정상적인 관계, 즉 동성연애자의 성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발생 원인이나 전염의 경로가 얼마나 더러운 병인지 알 수 있습니다. 동물조차 그런 행위는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이 지경에까지 타락했다니 실로 통탄해할 일입니다. 세계보건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앞으로 10년 후에는 세계 인구의 약 1억이 이 병으로 죽어 갈 것이라 합니다. 환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성의 극단적인 타락이 무엇을 말해준다고 생각하십니까? 충격의 시대에 사는데 충격이 없다 --- 깨달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시대에 사는데 무서운 줄 모른다 ---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나아가면 장차 이 시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래를 생각해보십시다. 요즘 쉽게 대할 수 있는 캠페인에 '일회용 면도기를 사용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에이즈의 전염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발소에서는 면도기를 한 번만 쓰고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만일 에이즈 환자가 사용했던 것을 정상인이 사용하게 되어 조금이라도 혈액이 전달되면 그대로 에이즈에 감염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깜짝 놀랄만한 일인데도 놀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현대인의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이대로 나아간다면 이 시대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깨어 있으라 --- 언제 종말의 날이 올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언제 나에게 죽음이 닥쳐올지, 언제 세상이 끝날지, 언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서 기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도적처럼 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준비한 사람에게는 도적처럼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향하여 준비해야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단 한 번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 다시 기회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답답한 경우를 주위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ph.D 과정을 공부하는 사람이었는데 5년 동안 부지런히 코스 워크(course work)를 했습니다. 그런데 막바지에 가서 연애를 하느니 뭘하느니 하면서 그만 공부를 게을리하여 성적이 부진했습니다. 정해진 정도에 평균점수가 도달해야만 논문을 제출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의 성적을 검토해본 담당교수는 '남아 있는 한 과목에서 A학점을 맞아야만 논문을 낼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 과목에서 B학점 이하를 맞게 되면 그 동안 공부한 것이 모두 헛일이 될 판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는 학교를 떠나야 한다고 교수가 경고합니다. 마지막 한 번의 테스트로 5년 동안의 공부가 판가름나는 순간입니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그는 시험 전날 그만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습니다. 단 한 번뿐인 마지막 기회 ---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메시지에 바른 응답을 해야 합니다. 종말이란 마지막 --- 즉 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종말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완전한 끝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죽음으로 끝난다면 잘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니므로 문제가 됩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어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야 합니다. 세상 끝나는 날이 주님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우리가 심판을 받아야 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이 세상이 끝나고 다음 세상이 시작됩니다.
내 생명이 끝나고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에 준비를 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 --- 준비하라, 각성하라는 것입니다. 멍청하게 생각 없이 있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유명한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1941년 12월 7일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일본군의 비행기가 항공모함에 실려 태평양을 건너 진주만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그들의 기습작전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합니다. 때마침 주말이어서 그곳의 미국 군인들은 술을 마시고 댄스파티에 가는 등 마음껏 즐기며 정신없이 흥청거렸습니다. 부대에는 데이타를 관리하는 군인마저 없었습니다. 견습병 한 명이 남아 데이타를 들여다보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고 있자니까 태평양으로부터 비행기가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놀란 견습병은 급히 상부에 전화를 걸어 보고합니다. 그러나 상관이라는 사람은 "아군의 연습기일 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하며 보고를 묵살합니다. 확인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어 진주만은 한순간에 불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브라질의 카스카벨 축구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팀입니다. 특히 그 팀의 골키퍼가 더 유명합니다. 그는 슈팅력이 좋아서 볼을 멀리까지 내차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경기 중 자기편 골문에서 내찬 볼이 그만 상대편 골문으로 쑥 들어가 버렸습니다.
당연히 상대편 골문도 골키퍼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설마 하면서 뒷짐지고 멍청하게 서 있었던 것입니다. 골키퍼는 한순간도 방심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정신차릴 때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항상 대기하는 마음으로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전세계를 웃기고 말았던 일은 사상 초유의 일이며 마지막 일이 되었습니다. 기다리는 자세에는 사건이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먼저 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본문에서는 오실 줄 알고 대비하여 기다리라고 말씀합니다. 도적과 같이 오리라 했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도적과 같이 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도적이라도 알고 기다리면 손님이지 않습니까? 올 줄 알고 준비하여 기다리면 언제나 반가운 손님입니다. 자기도 일하고 남에게도 일을 시키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가운데 맞으라고 말씀합니다. 남자분들, 저녁에 집에 돌아갔을 때에 아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맞아주는 것이 좋습니까? 기생처럼 화려하게 차리고 앉아 있다가 맞아주면 좋습니까? 저는 그저 앞치마 두르고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으로 맞아줄 때가 훨씬 아름다워 보입니다.
또 하나 죄송한 말씀을 드리기로 합니다. 케케묵은 사고방식이라고 비난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손톱이 긴 여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까닭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어머니께서는 가위로 손톱 귀퉁이만 똑똑 잘라내셨습니다. "나는 손톱 가운데를 잘라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을 많이 해서 닳아버리니 굳이 잘라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저는 손톱이 긴 여자는 영 질색입니다. 도대체 그 긴 손톱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그 손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남자를 할퀴려들겠다는 것입니까? 긴 손톱은 '나는 놀고먹습니다'라는 표증입니다.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을 하라니까 쓸데없이 병원에나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 없는 건강은 주시지 않습니다. 향락하라고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일해야 건강합니다. 건강해서 일하는 게 아니오 일함으로써 건강한 것입니다. 빈둥거리면서 건강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건강하게 만드는 보약도 따로 없습니다. 보약도 소화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일해야 소화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땀흘려 일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주님을 맞이하라' ---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흰옷으로 갈아입고 산에 올라가 맞이할 것도 없고, 금식하며 맞이할 것도 없습니다. 주의 일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중에 주를 맞이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일하면서 맞이하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깨어 있으라, 열심을 다하여 기도하라, 준비하라, 부지런히 일하라. 그런 중에 주를 맞으라고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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