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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실족하지 않는 자(마태복음 11:1-12)

by 【고동엽】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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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족하지 않는 자(마태복음 11:1-12)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이나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아마도 실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더라면 실망도 없었겠지만 잔뜩 기대를 했다가 수포로 돌아갈 때 우리의 삶의 보람은 와르르 무너지고 남는 것은 오로지 실망뿐일 것입니다. 그것이 많이 쌓이면 일종의 배신감까지 느끼게 됩니다. 보편적으로 기대감이 크면 클수록 실망감도 비례적으로 커집니다. 그렇지만 실망이 두려워 우리들의 생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죽은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대하고 실망했다가도 또 한 번 바라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어느 기자 회견에서 "이 세대는 간절한 소망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자기의 생명을 회복하게 된다면 소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회견 장에 참석했던 기자 중의 한사람이 "그 마지막 말은 지나친 비약이 아닙니까?"라고 힐난하자, 토인비는 옆에 있던 손자를 가리키면서 "그러면 내가 저 철없는 어린아이에게 이 세상은 소망이 없다라고 말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하더랍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다면 그것이 어찌 사는 것이겠습니까? 기대하고 바라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소망과 기대와 사랑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에게만 빛이 있고 그에게만 길이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하나의 기대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다시 말하면 예수의 말씀대로 살고, 예수를 위해 죽고, 예수로 인하여 새 힘이 샘솟는 사람은 마치 새 술에 취한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용기와 지혜를 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전적으로 위탁된 삶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To live is Christ)라고 말했듯이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곧 생명의 근원이며 더 나아가서는 생명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처음부터 어떤 기대나 목적 없이 예수님을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로울 것 없으니 교회에 나간다는 사람, 이 사람은 기독교인이라기보다 '상식 교인'이라고 불러야 적격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를 사교 장소로 착각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서양에서와 같이 전 국민이 기독교인일 때 어느 교단이나 교파에 속하지 않으면 사람을 사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가는 사람은 교회를 일종의 액세서리로 생각하는 '액세서리 교인'입니다.

또 주일학교 때부터 나오는 사람으로서 주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예배보는 '습관 교인'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에서 어떤 교양을 얻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자기 지식으로 비판하려 합니다. 이런 사람을 지칭하여 '교양 교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애당초 기대감 없이 교회에 나오는 교인은 또한 낙담도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도 혹은 재정적으로 의견이 엇갈려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혹은 기대를 했다가도 중도에 포기했다면 그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대상을 잘못 이해했거나 기대 자체가 빗나간 것이 아닐까요? 기대 자체가 애당초 잘못되었다면 그 기대는 끝까지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초점이 빗나갔을 때 우리는 절대로 만족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치 라디오의 주파수를 잘못 맞추었을 때 우리가 기대하는 방송을 들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내가 만든 욕망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감동시켜 주시고 계시하신 그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야 합니다. 그의 뜻으로 기도하고 그의 뜻에 의하여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고, 그 소망을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것이 바로 신앙 생활입니다.

여러분, 신비로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들어간 기도를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기도는 내가 가졌던 소원이 아니고 성령의 감화하심에 의하여 내 본래의 욕망과는 다른 기도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뜻으로 기도하고 이에 응답이 올 때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응답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그 약속 안에 근거하며 이 안에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약속에서 어긋난 인간의 추잡한 욕망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에는 실망과 실족이 뒤따르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에는 실망으로 가득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온몸에 털이 나있으며 가죽옷을 입고 광야에서 일생을 산앙인이었습니다. 오로지 메뚜기와 산꿀을 먹고 산 사람입니다. 그는 정의의 사람이었으며 불의를 보면 성난 사자처럼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이때 로마의 섭정하에 유대 땅을 다스리던 사람이 헤롯 안티파스, 헤롯왕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은 자기 동생을 로마로 보내고 나서 그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해 버렸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은 마음의 괴로움과 분노를 느꼈지만 누구도 감히 입을 열어 충고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의감으로 불붙은 세례 요한은 이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헤롯의 궁전에 들어가 "동생의 아내를 뺏은 죄는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크게 외치며 책망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갇힌 바 되었습니다.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감옥은 사방이 돌로 쌓인 아주 좁은 지하실이었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태어나 들소와 같이 드넓은 광야를 뛰어 다니며 자유롭게 살던 그가 좁고 습기찬 돌 감방에, 그것도 더럽고 냄새나는 지하실에 갇혔으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가 천년 같았을 것입니다. 감방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답답했습니다.

그는 차츰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하게 됩니다. 자기는 분명히 얼마 전에 메시야로 오신 이에게 세례를 준 적이 있었으며 세례 받은 그의 머리 위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의를 외치며 의롭게 살아온 자기가 지금 이렇게 고생하고 희생을 치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방문조차 하지 않으니… 왜 그는 말이 없을까 하고 세례 요한은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 분은 그리스도이실까? 이렇게 나의 고통을 알아주지도 않는 그가 진정으로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일까? 날이면 날마다 어두운 감방에서 언뜻언뜻 떠오르는 것은 이러한 의심과 실망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그는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 묻게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세례 요한, 그는 보통 평범한 인물은 아닙니다. 어쩌다 한 번 꿈을 꾸었거나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손으로 예수님을 만졌고 또 세례까지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를 준 후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같이 내려와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는 것을 직접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두침침한 지하 감방에서 그는 의심하게 되었고 또 실족하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낸 이유에 대하여서는 오랫동안 두 가지 해석이 전해 내려옵니다.

그 하나는 세례 요한의 마음속에 회의가 온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너무 답답해하기 때문에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보냈다는 동정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을 찾아와 매일 울분을 터뜨립니다. 선생님, 정말 메시야가 온 것입니까? 왔다면 왜 선생님이 이렇게 감옥에 갇혀 고생해야만 합니까? 어쩌면 그가 이렇게도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매일매일 감옥에 와서 세례 요한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참다 못한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직접 예수님께 가서 여쭈어보라고 보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해석은 세례 요한 자신도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에 비록 그가 분명히 계시를 받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지마는 현재 그의 상황이 너무나 억울하고 급박했기 때문에 결국 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다시 한 번 재확인하고 싶어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물었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세례 요한에게 회의가 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이 말은 결국 세례 요한 자신이 실족하고 있음을 암시한 말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예수로 인하여 실족하고 있으며 실망하고 있음을 판단하고 계신 것입니다. 진실로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복받은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왜 실족하게 되었습니까? 정의에 살고 믿음에 살던 사람이 왜 실족하게 되었을까요?

첫째로, 그가 예수를 고난의 메시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시면 권능을 행하고 능력을 베풀며 또 혁명을 일으키는 굉장한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습니다. 능력은 행하시지만 혁명을 일으킬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의외로 예수님은 너무나 조용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예수님께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엠마오로 가던 그들도 역시 권능의 예수를 바로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를 보고 그만 실망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자기의 생업을 게속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고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고난은 당연한 것이며 그의 사업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희생은 반드시 치러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엠마오의 두 제자들은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영광과 승리의 메시야만을 기대한 것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재미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요즈음 기독교인들은 너무 체면이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들은 잘 살려고만 한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이 시험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단이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아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너를 메시야로 받들어 따를 것이다"라고 유혹합니다. 성전에 뛰어내리는 일, 이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이때 예수님께서는 사단에게 이르시되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 요즈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고 있습니까? 내 기도를 들어주시나 안 들어주시나 시험하는 죄,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야 했던 죄입니다.

'슈퍼스타'(Supersta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보면 가룟유다의 죄와 불만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의 사람인데 왜 그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지 그는 불만을 갖고 있었고 또 그것을 시험하려 하였습니다. 혹 우리 가운데 가룟유다와 같은 시험에 든 사람은 없습니까? 가룟 유다뿐 아니라 예수님의 친동생들까지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행위에 대하여서는 불평이 많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 역시 불만이 많았습니다. "당신이 메시야인데 좀 화끈하게 내가 갇혀 있는 옥문을 부수고 나를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가 문둥병자를 고쳐주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으며, 소경이 볼 수 있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음을 가서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굉장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능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게 향한 것이었고 그의 복음전도의 방법은 일 대 일, 즉 맨투맨(Man to Man)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세례 요한은 그에게 좀더 정치적인 혁명을 기대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진정 그는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둘째는, 시간의 문제입니다. 지금 세례요한은 아주 초조합니다.

하루가 여삼추(如三秋)같이 느껴집니다. 메시야 오심을 믿기는 하지만 언제 그의 왕국이 건설될지 초조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구나 감옥에 갇혀 있는 그의 처지로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음도 역시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윗 왕은 시편에서 무수히 외치고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악인이 나를 조소하는 것이 언제까지이며,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언제까지입니까?" "사망 중에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옵니다.

내가 죽은 다음입니까? 그러나 그 때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에 대하여 너무 초조해하는 인간은 실망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마르다가 바로 이런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오라버니가 병이 들어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지만 예수님은 오지 않고 오라버니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비록 오라버니를 장례까지 치른 다음에 오셔서 살려 주셨지만 예수님은 그녀가 요구한 시간 내에는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늦게 오셨다고 해서 응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기대하는 시간과 오신 시간의 시차는 자칫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하시는 큰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간이 제한된 자기 시간으로 비판할 때 그는 절망하고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례 요한은 썩어져야 하는 한 알의 밀 알이었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고생하는 세례 요한은 감옥 문이 열려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옥문이 열리는 기적은 사도행전에 여러 번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에는 옥문이 열렸지만 야고보는 오히려 목이 베여 순교를 당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옥문이 열려 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아 죽는 것입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의 경우, 여러 번 기적이 일어났었지만 마지막 로마의 감옥에서는 그대로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왜 어떤 때에는 기적이 일어나고 또 어떤 때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 시간이 바로 그들에게 한알의 밀알로 죽어 썩어져야 할 가장 적절한 때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38에서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습니다. 당시는 유대법으로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돌에 맞던 시대입니다. 처음에 마리아는 여러 가지로 변명하지만 마지막에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돌에 맞아 죽거나 내 약혼자가 나를 버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주의 종이오니 당신의 역사에 필요한 대로 나를 써 주십시오라고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지금 이 시간 "너는 나의 역사를 위해 썩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자기 중심적인 문제 해결은 우리에게 실망을 줍니다. 오직 동정녀 마리아와 같은 신앙만이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기적은 온 우주에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넘쳐흐르는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그가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실 때 이에 응하고 절대 실족하지 않는 자는 오직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너희가 왜 광야에 나갔더냐?" "무엇을 바라고 나갔더냐?"고 예수님이 묻고 계십니다. 우리는 고난의 메시야를 알고 하나님의 시간을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기도:아버지 하나님, 주님을 믿고자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아직도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또 오직 현재의 내 고통과 소망만을 이루어 주기를 바라며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주님, 바라옵기는 저희 눈을 바로 뜨게 하시사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우리의 신앙이 주님의 부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닫도록 하옵소서. 인간적인 기대로 실족하지 않는 진정한 신앙의 알맹이를 갖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에 기꺼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키워주옵소서. 아멘.  

실족하지 않는 자(마태복음 11:1-12)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이나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아마도 실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더라면 실망도 없었겠지만 잔뜩 기대를 했다가 수포로 돌아갈 때 우리의 삶의 보람은 와르르 무너지고 남는 것은 오로지 실망뿐일 것입니다. 그것이 많이 쌓이면 일종의 배신감까지 느끼게 됩니다. 보편적으로 기대감이 크면 클수록 실망감도 비례적으로 커집니다. 그렇지만 실망이 두려워 우리들의 생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죽은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대하고 실망했다가도 또 한 번 바라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어느 기자 회견에서 "이 세대는 간절한 소망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자기의 생명을 회복하게 된다면 소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회견 장에 참석했던 기자 중의 한사람이 "그 마지막 말은 지나친 비약이 아닙니까?"라고 힐난하자, 토인비는 옆에 있던 손자를 가리키면서 "그러면 내가 저 철없는 어린아이에게 이 세상은 소망이 없다라고 말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하더랍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다면 그것이 어찌 사는 것이겠습니까? 기대하고 바라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소망과 기대와 사랑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에게만 빛이 있고 그에게만 길이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하나의 기대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다시 말하면 예수의 말씀대로 살고, 예수를 위해 죽고, 예수로 인하여 새 힘이 샘솟는 사람은 마치 새 술에 취한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용기와 지혜를 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전적으로 위탁된 삶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To live is Christ)라고 말했듯이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곧 생명의 근원이며 더 나아가서는 생명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처음부터 어떤 기대나 목적 없이 예수님을 믿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로울 것 없으니 교회에 나간다는 사람, 이 사람은 기독교인이라기보다 '상식 교인'이라고 불러야 적격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를 사교 장소로 착각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서양에서와 같이 전 국민이 기독교인일 때 어느 교단이나 교파에 속하지 않으면 사람을 사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가는 사람은 교회를 일종의 액세서리로 생각하는 '액세서리 교인'입니다.

또 주일학교 때부터 나오는 사람으로서 주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예배보는 '습관 교인'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에서 어떤 교양을 얻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자기 지식으로 비판하려 합니다. 이런 사람을 지칭하여 '교양 교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애당초 기대감 없이 교회에 나오는 교인은 또한 낙담도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도 혹은 재정적으로 의견이 엇갈려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혹은 기대를 했다가도 중도에 포기했다면 그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대상을 잘못 이해했거나 기대 자체가 빗나간 것이 아닐까요? 기대 자체가 애당초 잘못되었다면 그 기대는 끝까지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초점이 빗나갔을 때 우리는 절대로 만족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치 라디오의 주파수를 잘못 맞추었을 때 우리가 기대하는 방송을 들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내가 만든 욕망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감동시켜 주시고 계시하신 그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야 합니다. 그의 뜻으로 기도하고 그의 뜻에 의하여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고, 그 소망을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것이 바로 신앙 생활입니다.

여러분, 신비로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들어간 기도를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기도는 내가 가졌던 소원이 아니고 성령의 감화하심에 의하여 내 본래의 욕망과는 다른 기도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뜻으로 기도하고 이에 응답이 올 때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응답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그 약속 안에 근거하며 이 안에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약속에서 어긋난 인간의 추잡한 욕망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에는 실망과 실족이 뒤따르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본문에는 실망으로 가득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온몸에 털이 나있으며 가죽옷을 입고 광야에서 일생을 산앙인이었습니다. 오로지 메뚜기와 산꿀을 먹고 산 사람입니다. 그는 정의의 사람이었으며 불의를 보면 성난 사자처럼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이때 로마의 섭정하에 유대 땅을 다스리던 사람이 헤롯 안티파스, 헤롯왕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은 자기 동생을 로마로 보내고 나서 그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해 버렸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은 마음의 괴로움과 분노를 느꼈지만 누구도 감히 입을 열어 충고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의감으로 불붙은 세례 요한은 이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헤롯의 궁전에 들어가 "동생의 아내를 뺏은 죄는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크게 외치며 책망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갇힌 바 되었습니다.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감옥은 사방이 돌로 쌓인 아주 좁은 지하실이었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태어나 들소와 같이 드넓은 광야를 뛰어 다니며 자유롭게 살던 그가 좁고 습기찬 돌 감방에, 그것도 더럽고 냄새나는 지하실에 갇혔으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가 천년 같았을 것입니다. 감방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답답했습니다.

그는 차츰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하게 됩니다. 자기는 분명히 얼마 전에 메시야로 오신 이에게 세례를 준 적이 있었으며 세례 받은 그의 머리 위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의를 외치며 의롭게 살아온 자기가 지금 이렇게 고생하고 희생을 치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방문조차 하지 않으니… 왜 그는 말이 없을까 하고 세례 요한은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 분은 그리스도이실까? 이렇게 나의 고통을 알아주지도 않는 그가 진정으로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일까? 날이면 날마다 어두운 감방에서 언뜻언뜻 떠오르는 것은 이러한 의심과 실망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그는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 묻게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세례 요한, 그는 보통 평범한 인물은 아닙니다. 어쩌다 한 번 꿈을 꾸었거나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손으로 예수님을 만졌고 또 세례까지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를 준 후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같이 내려와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하는 것을 직접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두침침한 지하 감방에서 그는 의심하게 되었고 또 실족하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낸 이유에 대하여서는 오랫동안 두 가지 해석이 전해 내려옵니다.

그 하나는 세례 요한의 마음속에 회의가 온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너무 답답해하기 때문에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보냈다는 동정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을 찾아와 매일 울분을 터뜨립니다. 선생님, 정말 메시야가 온 것입니까? 왔다면 왜 선생님이 이렇게 감옥에 갇혀 고생해야만 합니까? 어쩌면 그가 이렇게도 무관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매일매일 감옥에 와서 세례 요한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참다 못한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직접 예수님께 가서 여쭈어보라고 보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해석은 세례 요한 자신도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에 비록 그가 분명히 계시를 받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지마는 현재 그의 상황이 너무나 억울하고 급박했기 때문에 결국 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다시 한 번 재확인하고 싶어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물었다고 하는 해석입니다.

둘 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세례 요한에게 회의가 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이 말은 결국 세례 요한 자신이 실족하고 있음을 암시한 말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예수로 인하여 실족하고 있으며 실망하고 있음을 판단하고 계신 것입니다. 진실로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복받은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왜 실족하게 되었습니까? 정의에 살고 믿음에 살던 사람이 왜 실족하게 되었을까요?

첫째로, 그가 예수를 고난의 메시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시면 권능을 행하고 능력을 베풀며 또 혁명을 일으키는 굉장한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습니다. 능력은 행하시지만 혁명을 일으킬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의외로 예수님은 너무나 조용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예수님께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엠마오로 가던 그들도 역시 권능의 예수를 바로 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를 보고 그만 실망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자기의 생업을 게속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고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고난은 당연한 것이며 그의 사업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희생은 반드시 치러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엠마오의 두 제자들은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영광과 승리의 메시야만을 기대한 것이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재미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요즈음 기독교인들은 너무 체면이 없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들은 잘 살려고만 한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이 시험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단이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아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너를 메시야로 받들어 따를 것이다"라고 유혹합니다. 성전에 뛰어내리는 일, 이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이때 예수님께서는 사단에게 이르시되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 요즈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고 있습니까? 내 기도를 들어주시나 안 들어주시나 시험하는 죄,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야 했던 죄입니다.

'슈퍼스타'(Supersta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보면 가룟유다의 죄와 불만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의 사람인데 왜 그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지 그는 불만을 갖고 있었고 또 그것을 시험하려 하였습니다. 혹 우리 가운데 가룟유다와 같은 시험에 든 사람은 없습니까? 가룟 유다뿐 아니라 예수님의 친동생들까지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행위에 대하여서는 불평이 많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 역시 불만이 많았습니다. "당신이 메시야인데 좀 화끈하게 내가 갇혀 있는 옥문을 부수고 나를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가 문둥병자를 고쳐주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으며, 소경이 볼 수 있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음을 가서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굉장한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능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게 향한 것이었고 그의 복음전도의 방법은 일 대 일, 즉 맨투맨(Man to Man)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세례 요한은 그에게 좀더 정치적인 혁명을 기대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진정 그는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둘째는, 시간의 문제입니다. 지금 세례요한은 아주 초조합니다.

하루가 여삼추(如三秋)같이 느껴집니다. 메시야 오심을 믿기는 하지만 언제 그의 왕국이 건설될지 초조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구나 감옥에 갇혀 있는 그의 처지로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음도 역시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윗 왕은 시편에서 무수히 외치고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악인이 나를 조소하는 것이 언제까지이며,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언제까지입니까?" "사망 중에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옵니다.

내가 죽은 다음입니까? 그러나 그 때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에 대하여 너무 초조해하는 인간은 실망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마르다가 바로 이런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오라버니가 병이 들어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지만 예수님은 오지 않고 오라버니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비록 오라버니를 장례까지 치른 다음에 오셔서 살려 주셨지만 예수님은 그녀가 요구한 시간 내에는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늦게 오셨다고 해서 응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기대하는 시간과 오신 시간의 시차는 자칫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하시는 큰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간이 제한된 자기 시간으로 비판할 때 그는 절망하고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세례 요한은 썩어져야 하는 한 알의 밀 알이었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고생하는 세례 요한은 감옥 문이 열려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옥문이 열리는 기적은 사도행전에 여러 번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에는 옥문이 열렸지만 야고보는 오히려 목이 베여 순교를 당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옥문이 열려 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아 죽는 것입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의 경우, 여러 번 기적이 일어났었지만 마지막 로마의 감옥에서는 그대로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왜 어떤 때에는 기적이 일어나고 또 어떤 때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 시간이 바로 그들에게 한알의 밀알로 죽어 썩어져야 할 가장 적절한 때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38에서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습니다. 당시는 유대법으로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돌에 맞던 시대입니다. 처음에 마리아는 여러 가지로 변명하지만 마지막에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돌에 맞아 죽거나 내 약혼자가 나를 버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주의 종이오니 당신의 역사에 필요한 대로 나를 써 주십시오라고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지금 이 시간 "너는 나의 역사를 위해 썩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자기 중심적인 문제 해결은 우리에게 실망을 줍니다. 오직 동정녀 마리아와 같은 신앙만이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기적은 온 우주에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넘쳐흐르는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그가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실 때 이에 응하고 절대 실족하지 않는 자는 오직 부활을 믿는 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너희가 왜 광야에 나갔더냐?" "무엇을 바라고 나갔더냐?"고 예수님이 묻고 계십니다. 우리는 고난의 메시야를 알고 하나님의 시간을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기도:아버지 하나님, 주님을 믿고자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아직도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또 오직 현재의 내 고통과 소망만을 이루어 주기를 바라며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주님, 바라옵기는 저희 눈을 바로 뜨게 하시사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우리의 신앙이 주님의 부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닫도록 하옵소서. 인간적인 기대로 실족하지 않는 진정한 신앙의 알맹이를 갖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에 기꺼이 자신을 바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키워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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