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친 것이 아닙니다(사도행전 26:19~32)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오늘의 본문 25절에서 바울은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합니다. 대단히 아이러니칼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바울을 향하여 베스도가 "네가 미쳤다"하니까 바울이 "아닙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정말 미쳤느냐, 안 미쳤느냐, 또 어째서 미쳤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느냐-이런 문제를 우리가 상고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왕 앞에서 마지막으로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이 귀중한 마지막 기회를 어떻게 해서든지 고통을 면하고 무죄임을 증명해서 석방되어보려는, 자기 구제를 위한 기회로 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기회만 주어지면 내 명예에, 내 물질에, 내 소욕에, 나 자신에게 이롭도록 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일반 상식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이 바로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중대한시간이지만 자기 구제를 위한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이 소중한 한 시간의 기회를 복음 전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점이 위대합니다. 나야 살든 말든, 잘되든 못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복음에 이르려 하고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전하려 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보려 하는 간절한 충정이 마지막까지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재판하는 이 중요한 시간에 그는 다시 담대하게, 또 요령 있게, 간결하게, 분명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죄함이나, 다른 구구한 얘기나, 억울하다거나 분하다거나……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이 재판이 이렇게 저렇게 잘못됐소, 어째서 나는 유죄판결도 없이 이렇게 2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썩어야 되는 거요? 나는 로마시민이요, 그런데 나에게 이렇게 해도 되는 거요?-이런 구차한 변명이나 항변이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고 자기가 예수를 만난 사건과 '내가 어째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내가 전하고 있는 복음은 무엇인가'하는 것을 확실하게 변증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19절 말씀을 보세요. 너무나도 분명하고 위대한 선언입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않았습니다. 이치에 맞든 안 맞든, 종래에 내가 어떻게 살아왔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져온 철학과 어떻게 관련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 하늘에서 내게 계시해주신 그것에 내가 순종하고 있을 뿐입니다, 함입니다. 이 얼마나 분명한 자세입니까?
전설 같은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종교개혁자 칼뱅은 예정론을 주장했는데, 특별히 이중예정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논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천당에 갈, 구원받은 사람이 예정됐다 하고 보니까, 반대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도 예정됐다 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흔히들 후대 사람들이 이것을 이중예정론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그 당시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이 예정됐다는 것은 기분이 좋지만 지옥에 갈 사람도 예정됐다는 것은 영 납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질문하고 아무리 설명 들어도 마음에 차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칼뱅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막 숨이 넘어가려는 그에게 제자가 또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이제 임종이 가까이 왔는데 그 이중예정론을 취소할 마음은 없습니까?" 칼뱅은 빙그레 웃으면서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Bible says so,-성경이 그렇게 말씀한다. 내가 기억하고 내가 아는 대로는, 내가 연구한대로는 성경이 그렇게 말씀한다. 나는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서 성경이 멎는 데서 멎었노라. 그것이 나의 신학이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입니다. 참 대단한 말이지요. 성경대로 순종했다-이치에 맞고 안 맞고는 자기도 잘 알아요.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납득이 가느냐 안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그는 '하늘로부터 보여주신 것, 하늘로부터 보이신 것을 내가 거역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증거 했고, 그래서 이 고생을 하고, 그래서 이 많은 환난과 고통을 겪고, 여러 분 죽을 뻔하고 매맞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얼마나 간결하고 얼마나 확실한 고백입니까? 하늘로부터 보여진 것을 그대로 순종하고 이 시간에 이른 것이라고 아주 딱 잘라 말씀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이 시간, 그는 유대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유의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따릅니다.
또한 그는 말씀합니다. '많은 환난과 고통이 있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왔더니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나를 보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죽을 뻔했지만 아직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귀한 말씀이예요. '내가 오직 복음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위해서 필요하니까 아직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을 많은 환난을 겪었지마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역사성과 성서적 증거를 간단하게 피력합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소중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22절로 23절을 보세요. '선지자들과 모세가 예언해온 바가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속에서 온전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그 예언이fulfill, 성취되었습니다'-바로 여기에 바울의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서 모든 성경을 다 해석하고 다 이해하게 됩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을 십자가와 부활사건 속에서 얻습니다. '당신들이 죽이고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신 예수 그리스도, 이 사건 속에서 성경에서 수천 년 동안 예언해온 예수에 대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 복음 때문에 내가 지금 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이방인의 빛입니다. 이방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복음의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그는 로마서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하여 스스로 복음의 빚진 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빚을 갚기 전에는 절대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죄인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복음의 빚을 졌기 때문에 이 빚을 꼭 갚기 위해서 이 수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그는 말씀합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禍)가 있을 것임이로라"-사도 바울은 그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는 예수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오직 복음 전하기 위해서 나의 남은 생이 존재의미가 있기 때문에 만약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을 전합니다'하는 뜻입니다. 바울은 정말로 몸과 정성과 생명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고 복음 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목사가 아니고 전도사가 아니더라도, 직장이 어디든지, 가정에서 일하든지, 이웃의 누구를 만나든지, 언제나 복음을 전한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치독일 치하에서, 정부에 반대하여 정치적인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무려 8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고생을 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독일 고백교회의 지도자인 마틴 리뮬러라고 하는 목사님입니다. 이분은 '이 나라를 건지려면 히틀러가 죽어야 된다, 저 히틀러는 적그리스도다, 2차 대전을 일으킨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정치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된 것입니다. 감옥에 8년 동안이나 갇혀 있으면서 목사님은 아주 한이 맺혔습니다. 그야말로 히틀러를 향해서 "이 원수, 이 죽일 놈"하며 있는 대로 욕을 다 합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아무리 소리지르면 뭐합니까? 어쨌든 이렇게 원한을 품고 그 많은 고생을 하다가 2차대전이 끝나면서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감옥에서 나올 때, 얼마나 자유로워하고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히틀러는 이미 죽었습니다. 목사님은「전쟁책임 고백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모든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다, 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목사님은 무려 일곱 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이렇습니다. 자기가 죽어서 하나님나라에 가 심판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습니다. 모두들 차례차례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문득 큰 소리로 심판 받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듣자하니 누가 자기보다 먼저 죽어서 온 모양인데 하나님께서 쩌렁쩌렁하게 "너는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는고"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죄인 대답하는 말이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대답하는 목소리가 낯익더랍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심판 받는 사람을 봤더니 바로 히틀러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꿈을 일곱 번이나 꾼 목사님은 마침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히틀러가 저렇게 된 것도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히틀러에게 복음을 전했더냐. 내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같은 엄청난 일이 생긴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고백서의 내용을 바꿉니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교회가 복음을 바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내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임을 나 자신에게 있다."
여러분, 오늘도 그런 사람들 많아요. 우리는 복음이 온 천하에 전해진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아요.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저렇게 말하는 분들이 많아요. "네가 나이가 들도록 이 집 저 집, 이 아파트 저 아파트 이사 다녀봤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저보고 예수 믿으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온 아파트의 맞은편에 사는 사람이 좌우간 무엇을 사 먹이고 봉사하고 별 짓 다해가면서 교회에 꼭 한번만 가달라고 졸라서, 더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따라왔다가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왜 진작 못 믿었나, 왜 그 많은 사람들은 나더러 예수 믿으라고 안 했나,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보세요. 바울은 정말 끝까지 복음을 전해요. 오직 복음입니다.
감옥에 있으면 감옥에 있는 대로, 핍박이 있으면 핍박이 있는 대로, 재판 받을 때는 재판 받는 대로, 어디서든지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애의 목적을 삼고 전심전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본문을 보세요.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24절)"-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로마총독이 볼 때에는 바울이 확실히 미쳤거든요. 이 '미쳤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이네'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치광이'라는 말은 '마이니안'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소개하는 이유는 이 말이 '마니아(mania)'라고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마니아'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요즘 아주 흔하게 쓰고 있습니다.
시판되고 있는 오디오 제품에도 이를테면 '롯데 마니아'니 하며 '마니아'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알고 씁시다. 원래 마니아라는 말이 미쳤다는 뜻입니다. '광적'이라는 말입니다. 워낙이 현대인은 부분적으로는 다 미쳐 가지고 산다 합니다. '마니아'-미치광이'입니다.
computer mania 라고 하면 computer 미치광이, audio mania 라고 하면 오디오에 미친 사람입니다. 원래 나쁜 뜻을 가진 이 말이 이렇듯 좋아서 미친다는 것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베스도가 볼 때에 바울은 'Jesus mania'입니다. 예수께 미친 사람이예요. 예수 미치광이지요. 이 말은 불명예스러운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은 미쳤다는 말을 좀 들어야 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광이라는 말도 좀 들어야지요. 책벌레라는 말도 들어보아야 합니다. 사랑도 그래요. 한 번쯤은 미쳐봐야지요. 이렇게 보면 미친다는 말을 그리 나쁘게만 해석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만을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한 가지에만 전적으로 몰두한다는 것이지요. 그 한 가지를 위해서라면 생명도 바쳐요.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 바치는 희생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게 '미친' 것입니다. 혼자서만 좋아하고 히죽히죽 웃는다면 미친 것이지요. 남이사 아랑곳없이 자기만 좋아 가지고 미쳐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요새 'computer mania'들이 많아요.
제가 아는 목사님 몇 사람도 computer에 미쳐 가지고 날 보고 자꾸computer 배우자고 하는데 나는 안 미치겠노라 했어요. 내가 만약에 그것을 시작했다 하면 틀림없이 나도 미칠 것이니 아예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이거 하는 사람들 보니까 대단해요. 목회 하는 사람들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 나와야 하는데, 얼마나 바쁩니까? 그런데computer 시작한 사람들 보니까 밤 2시까지 해요. 매일 밤 2시까지 앉아서 그것 만지다가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것이고 보니 잠을 잘 수 있어요? 잠이 부족해서 늘 몽롱해 있어요. 저를 만나면 "목사님, 이것 보세요" 하고는 수첩을 내보여요. 교인들 명단을 입력해놓은 수첩이지요. "보세요. 누르면 전화번호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 입력하느라 며칠 밤을 새웠고? 난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비서보고 아무네 집 몇 번이냐고 물어보면 될 일을 무엇 하러 그 짓하고 있어요? 골치 아프게" 하고 대꾸해 주었습니다. 요즘 computer 마니아들 참 많습디다.
밤낮 그것만 마주하고 앉아 딴 정신이 없어요. 밥 먹으라고 해도 모르고, 자라고 해도 아랑곳없어요. 이게 미친 것이거든요.
예수 미치광이-어떻습니까? 예수밖에 몰라요. 성경밖에 몰라요.
그저 시도 때도 없이 교회에 나가는 것밖에 몰라요. 교회 봉사하는 것밖에 몰라요. 남들은 알든 모르든 상관없어요. 나만은 항상 기뻐요. 항상 만족해요. 이것이 'Jesus mania' 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면 더 재미있어요.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라고 베스도가 말합니다. 너무 많은 지식이-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을 한번 비교해 봅시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초대교회에서 오순절 때에 성령을 받았지요? 성령 받아서 모두가 방언을 하지요. 그리고 그 비겁하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요. 이런 장면을 보고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못마땅해서 그들을 격하시키는 뜻으로 이렇게 조롱하지 않습니까? "새 술이 취했다." 술 취했다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베드로가 일어나서 "때가 제3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합니다. 제3시라면 우리네 시간으로 아침 9시쯤입니다. 아침 9시에 취했다니 무슨 소리냐, 나는 지금 맑은 정신으로 말한다-그리고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볼 때에 저들은 불학무식,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가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술 취했다고 조롱한 것입니다. 분명히 원인을 알 수 없는 특별한 능력으로 해서 저들이 저렇게 변화하였다고 인정한 셈입니다.
바울은 원래 지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베스도는 그를 보고 예수 미치광이라 말하지 않고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공부 많이 한다고 하더니 이상하게 미쳤구나-이런 말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복음을 전한다고 나서면 "저 사람 공부를 많이 하더니 저렇게 됐구나"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배운 바 없는 사람, 불학무식한 사람이 열심히 복음을 전할 때에는 다른 말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오로지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얘기할 때에는 같은 복음을 전해도 그것을 어떤 학문의 한 분파를, 어떤 지식의 한 분야를 열심히 전하는 것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를 들어서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한다고.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유식한 사람보다 오히려 무식한 사람, 고귀한 사람보다 오히려 천한 사람들을 들어서 쓰신다는 점을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아그립바 왕이 또 한마디합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 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8절)." 이에 바울은 "말이 적으나 많으나(29절)"라고 말씀합니다. 어쨌든 조금 마음으로 설득이 되는가봐요. 설득이 됐으면 충분히 설득 당하면 될 것인데 버티고 서서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설득해서 기독교인 만들려 하는구나'하고 비웃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얘깁니까? 아그립바 왕이 바울을 재판하고 있는데 바울은 죄수로 앉아 가지고 오히려 재판장을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도 예수 믿으시오'-굉장한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자세가 복음 전하는 자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29절)." 확실한 증거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얼마나 훌륭합니까? 이것이 증인입니다. 나와 같아야 됩니다. 나와 같기를 바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먼저 충만해야 됩니다. 내 마음이 은혜로 충만하고 내 마음이 확신에 차 있고 내 신학적 지식이 분명해야 됩니다. 거기 목숨을 걸고 생명을 걸만큼 확실해야 합니다. 그리고야 복음 전할 수 있지요. 내가 설교학 강의를 할 때에 늘 얘기합니다마는 하나님 말씀 전할 때에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분명하게 매듭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이상한 버릇들이 생겨 가지고, 무엇 무엇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는 식의 희미한 소리를 해요.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되어집니다'-희미한 소리. 그래서는 안돼요. 반드시 이래야 됩니다,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이것이 복음 전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독설 이래도 좋고 독단이래도 좋습니다. 독단적 의견이 아니고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미쳤다고 할만큼 양보 없는 확실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절대적 복음.
우스운 얘기입니다 마는 어떤 부인이 본인은 여집사님인데 남편은 교회를 안나가요. 어쩌다 한번 구경갈 정도인데 영 신앙이 생기지 않는거예요. 언젠가는 부흥회 때인데 남편을 잘 꾀어 가지고 한번 데리고 갔더니 여전히 졸다가 나오는 거예요. 아주 섭섭했지마는 다음날 또 같이 갔어요. 설교를 듣고 돌아갔습니다. 세 번째로 가는데 가면서 부인이"오늘은 맨 앞에 앉아서 은혜를 받읍시다. 그리고 구원받읍시다"했더니 그 남편, "나는 별로 은혜 받을 마음 없구만"해요. "왜요? 은혜 받아야지요" "당신 은혜 받았다며?" "나야 은혜 많이 받았지요" "은혜 많이 받고도 그 모양이라면 안 받은 내가 더 낫지"-보세요. 은혜 받았으면 은혜 받은 냄새가 나야 해요. 은혜 받았다고 떠들기만 했지 집안에서 말대꾸하고, 다툴 때에는 혼자 똑똑하여 한술 더 뜨니 이래가지고 무슨 은혜 받았다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 보세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란다-내가 먼저 만족하고 생명을 걸만큼 확신하고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이보다 중요한 일이 없어요. 저는 생각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맛있게 먹는 사람하고 같이 먹으면 음식이 시원치 않아도 입맛이 돌아요. 앞에 앉은 사람이 시덥잖은 기분으로 앉아 있으면 영 입맛이 없어져요. 재미가 없어요. 제가 언젠가 한번 텔레비전에서 건강에 대한 강의하는 것을 보았어요. 건강하려면 이래야 됩니다 저래야 됩니다 하는데 강의하는 사람의 몰골을 보니 비쩍 말랐어요. 당치않구나 싶었어요. 우선 강사 자신부터 건강해야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지요. 아무리 그럴듯한 소리 해보았자 그게 영 귀에 안 들어옵디다. 마찬가지로 뚱뚱한 사람이 살 빼는 법을 얘기하는 것도 당치않아요. 자신부터 살이 빠져 있어야 말발이 서지요.
전도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충만하고 나서 '제발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 같기를 바랍니다' 해야 진실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재판 끝에 아그립바 왕이 말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다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32절)"--뮈 이런 말을 해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치가들의 형태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경륜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더러 "네가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다"하십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될 귀중한 사명이 있기에 일이 이렇게 뒤틀리고 이렇게 어려워져서 결국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가게 되거든요.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 안에서 그 모든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가로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오늘의 본문 25절에서 바울은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합니다. 대단히 아이러니칼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바울을 향하여 베스도가 "네가 미쳤다"하니까 바울이 "아닙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정말 미쳤느냐, 안 미쳤느냐, 또 어째서 미쳤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느냐-이런 문제를 우리가 상고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왕 앞에서 마지막으로 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이 귀중한 마지막 기회를 어떻게 해서든지 고통을 면하고 무죄임을 증명해서 석방되어보려는, 자기 구제를 위한 기회로 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 기회만 주어지면 내 명예에, 내 물질에, 내 소욕에, 나 자신에게 이롭도록 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일반 상식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이 바로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중대한시간이지만 자기 구제를 위한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이 소중한 한 시간의 기회를 복음 전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점이 위대합니다. 나야 살든 말든, 잘되든 못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복음에 이르려 하고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전하려 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보려 하는 간절한 충정이 마지막까지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재판하는 이 중요한 시간에 그는 다시 담대하게, 또 요령 있게, 간결하게, 분명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죄함이나, 다른 구구한 얘기나, 억울하다거나 분하다거나……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이 재판이 이렇게 저렇게 잘못됐소, 어째서 나는 유죄판결도 없이 이렇게 2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썩어야 되는 거요? 나는 로마시민이요, 그런데 나에게 이렇게 해도 되는 거요?-이런 구차한 변명이나 항변이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고 자기가 예수를 만난 사건과 '내가 어째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내가 전하고 있는 복음은 무엇인가'하는 것을 확실하게 변증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19절 말씀을 보세요. 너무나도 분명하고 위대한 선언입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않았습니다. 이치에 맞든 안 맞든, 종래에 내가 어떻게 살아왔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져온 철학과 어떻게 관련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 하늘에서 내게 계시해주신 그것에 내가 순종하고 있을 뿐입니다, 함입니다. 이 얼마나 분명한 자세입니까?
전설 같은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종교개혁자 칼뱅은 예정론을 주장했는데, 특별히 이중예정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논리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천당에 갈, 구원받은 사람이 예정됐다 하고 보니까, 반대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도 예정됐다 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흔히들 후대 사람들이 이것을 이중예정론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그 당시 사람들은 구원받는 것이 예정됐다는 것은 기분이 좋지만 지옥에 갈 사람도 예정됐다는 것은 영 납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질문하고 아무리 설명 들어도 마음에 차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칼뱅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막 숨이 넘어가려는 그에게 제자가 또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이제 임종이 가까이 왔는데 그 이중예정론을 취소할 마음은 없습니까?" 칼뱅은 빙그레 웃으면서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Bible says so,-성경이 그렇게 말씀한다. 내가 기억하고 내가 아는 대로는, 내가 연구한대로는 성경이 그렇게 말씀한다. 나는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서 성경이 멎는 데서 멎었노라. 그것이 나의 신학이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입니다. 참 대단한 말이지요. 성경대로 순종했다-이치에 맞고 안 맞고는 자기도 잘 알아요.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납득이 가느냐 안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그는 '하늘로부터 보여주신 것, 하늘로부터 보이신 것을 내가 거역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증거 했고, 그래서 이 고생을 하고, 그래서 이 많은 환난과 고통을 겪고, 여러 분 죽을 뻔하고 매맞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얼마나 간결하고 얼마나 확실한 고백입니까? 하늘로부터 보여진 것을 그대로 순종하고 이 시간에 이른 것이라고 아주 딱 잘라 말씀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이 시간, 그는 유대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유의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따릅니다.
또한 그는 말씀합니다. '많은 환난과 고통이 있었습니다마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왔더니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나를 보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죽을 뻔했지만 아직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귀한 말씀이예요. '내가 오직 복음을 위해 살았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위해서 필요하니까 아직 죽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을 많은 환난을 겪었지마는 복음전파를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역사성과 성서적 증거를 간단하게 피력합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소중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22절로 23절을 보세요. '선지자들과 모세가 예언해온 바가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이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속에서 온전하게 성취된 것입니다. 그 예언이fulfill, 성취되었습니다'-바로 여기에 바울의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서 모든 성경을 다 해석하고 다 이해하게 됩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을 십자가와 부활사건 속에서 얻습니다. '당신들이 죽이고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신 예수 그리스도, 이 사건 속에서 성경에서 수천 년 동안 예언해온 예수에 대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 복음 때문에 내가 지금 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이방인의 빛입니다. 이방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복음의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그는 로마서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하여 스스로 복음의 빚진 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빚을 갚기 전에는 절대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죄인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복음의 빚을 졌기 때문에 이 빚을 꼭 갚기 위해서 이 수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그는 말씀합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禍)가 있을 것임이로라"-사도 바울은 그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는 예수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오직 복음 전하기 위해서 나의 남은 생이 존재의미가 있기 때문에 만약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을 전합니다'하는 뜻입니다. 바울은 정말로 몸과 정성과 생명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고 복음 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목사가 아니고 전도사가 아니더라도, 직장이 어디든지, 가정에서 일하든지, 이웃의 누구를 만나든지, 언제나 복음을 전한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치독일 치하에서, 정부에 반대하여 정치적인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무려 8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고생을 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독일 고백교회의 지도자인 마틴 리뮬러라고 하는 목사님입니다. 이분은 '이 나라를 건지려면 히틀러가 죽어야 된다, 저 히틀러는 적그리스도다, 2차 대전을 일으킨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정치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된 것입니다. 감옥에 8년 동안이나 갇혀 있으면서 목사님은 아주 한이 맺혔습니다. 그야말로 히틀러를 향해서 "이 원수, 이 죽일 놈"하며 있는 대로 욕을 다 합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아무리 소리지르면 뭐합니까? 어쨌든 이렇게 원한을 품고 그 많은 고생을 하다가 2차대전이 끝나면서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감옥에서 나올 때, 얼마나 자유로워하고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히틀러는 이미 죽었습니다. 목사님은「전쟁책임 고백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모든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다, 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목사님은 무려 일곱 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이렇습니다. 자기가 죽어서 하나님나라에 가 심판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습니다. 모두들 차례차례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문득 큰 소리로 심판 받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듣자하니 누가 자기보다 먼저 죽어서 온 모양인데 하나님께서 쩌렁쩌렁하게 "너는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는고"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죄인 대답하는 말이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대답하는 목소리가 낯익더랍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심판 받는 사람을 봤더니 바로 히틀러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꿈을 일곱 번이나 꾼 목사님은 마침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히틀러가 저렇게 된 것도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히틀러에게 복음을 전했더냐. 내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같은 엄청난 일이 생긴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고백서의 내용을 바꿉니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교회가 복음을 바로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내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임을 나 자신에게 있다."
여러분, 오늘도 그런 사람들 많아요. 우리는 복음이 온 천하에 전해진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아요.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저렇게 말하는 분들이 많아요. "네가 나이가 들도록 이 집 저 집, 이 아파트 저 아파트 이사 다녀봤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저보고 예수 믿으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온 아파트의 맞은편에 사는 사람이 좌우간 무엇을 사 먹이고 봉사하고 별 짓 다해가면서 교회에 꼭 한번만 가달라고 졸라서, 더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따라왔다가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왜 진작 못 믿었나, 왜 그 많은 사람들은 나더러 예수 믿으라고 안 했나,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보세요. 바울은 정말 끝까지 복음을 전해요. 오직 복음입니다.
감옥에 있으면 감옥에 있는 대로, 핍박이 있으면 핍박이 있는 대로, 재판 받을 때는 재판 받는 대로, 어디서든지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애의 목적을 삼고 전심전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본문을 보세요.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24절)"-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로마총독이 볼 때에는 바울이 확실히 미쳤거든요. 이 '미쳤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이네'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치광이'라는 말은 '마이니안'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소개하는 이유는 이 말이 '마니아(mania)'라고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마니아'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요즘 아주 흔하게 쓰고 있습니다.
시판되고 있는 오디오 제품에도 이를테면 '롯데 마니아'니 하며 '마니아'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알고 씁시다. 원래 마니아라는 말이 미쳤다는 뜻입니다. '광적'이라는 말입니다. 워낙이 현대인은 부분적으로는 다 미쳐 가지고 산다 합니다. '마니아'-미치광이'입니다.
computer mania 라고 하면 computer 미치광이, audio mania 라고 하면 오디오에 미친 사람입니다. 원래 나쁜 뜻을 가진 이 말이 이렇듯 좋아서 미친다는 것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베스도가 볼 때에 바울은 'Jesus mania'입니다. 예수께 미친 사람이예요. 예수 미치광이지요. 이 말은 불명예스러운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은 미쳤다는 말을 좀 들어야 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광이라는 말도 좀 들어야지요. 책벌레라는 말도 들어보아야 합니다. 사랑도 그래요. 한 번쯤은 미쳐봐야지요. 이렇게 보면 미친다는 말을 그리 나쁘게만 해석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만을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한 가지에만 전적으로 몰두한다는 것이지요. 그 한 가지를 위해서라면 생명도 바쳐요.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 바치는 희생을 즐거움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게 '미친' 것입니다. 혼자서만 좋아하고 히죽히죽 웃는다면 미친 것이지요. 남이사 아랑곳없이 자기만 좋아 가지고 미쳐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요새 'computer mania'들이 많아요.
제가 아는 목사님 몇 사람도 computer에 미쳐 가지고 날 보고 자꾸computer 배우자고 하는데 나는 안 미치겠노라 했어요. 내가 만약에 그것을 시작했다 하면 틀림없이 나도 미칠 것이니 아예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이거 하는 사람들 보니까 대단해요. 목회 하는 사람들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 나와야 하는데, 얼마나 바쁩니까? 그런데computer 시작한 사람들 보니까 밤 2시까지 해요. 매일 밤 2시까지 앉아서 그것 만지다가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것이고 보니 잠을 잘 수 있어요? 잠이 부족해서 늘 몽롱해 있어요. 저를 만나면 "목사님, 이것 보세요" 하고는 수첩을 내보여요. 교인들 명단을 입력해놓은 수첩이지요. "보세요. 누르면 전화번호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 입력하느라 며칠 밤을 새웠고? 난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비서보고 아무네 집 몇 번이냐고 물어보면 될 일을 무엇 하러 그 짓하고 있어요? 골치 아프게" 하고 대꾸해 주었습니다. 요즘 computer 마니아들 참 많습디다.
밤낮 그것만 마주하고 앉아 딴 정신이 없어요. 밥 먹으라고 해도 모르고, 자라고 해도 아랑곳없어요. 이게 미친 것이거든요.
예수 미치광이-어떻습니까? 예수밖에 몰라요. 성경밖에 몰라요.
그저 시도 때도 없이 교회에 나가는 것밖에 몰라요. 교회 봉사하는 것밖에 몰라요. 남들은 알든 모르든 상관없어요. 나만은 항상 기뻐요. 항상 만족해요. 이것이 'Jesus mania' 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면 더 재미있어요.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라고 베스도가 말합니다. 너무 많은 지식이-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을 한번 비교해 봅시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초대교회에서 오순절 때에 성령을 받았지요? 성령 받아서 모두가 방언을 하지요. 그리고 그 비겁하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요. 이런 장면을 보고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못마땅해서 그들을 격하시키는 뜻으로 이렇게 조롱하지 않습니까? "새 술이 취했다." 술 취했다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베드로가 일어나서 "때가 제3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합니다. 제3시라면 우리네 시간으로 아침 9시쯤입니다. 아침 9시에 취했다니 무슨 소리냐, 나는 지금 맑은 정신으로 말한다-그리고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볼 때에 저들은 불학무식,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가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술 취했다고 조롱한 것입니다. 분명히 원인을 알 수 없는 특별한 능력으로 해서 저들이 저렇게 변화하였다고 인정한 셈입니다.
바울은 원래 지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베스도는 그를 보고 예수 미치광이라 말하지 않고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공부 많이 한다고 하더니 이상하게 미쳤구나-이런 말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복음을 전한다고 나서면 "저 사람 공부를 많이 하더니 저렇게 됐구나"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배운 바 없는 사람, 불학무식한 사람이 열심히 복음을 전할 때에는 다른 말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오로지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얘기할 때에는 같은 복음을 전해도 그것을 어떤 학문의 한 분파를, 어떤 지식의 한 분야를 열심히 전하는 것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를 들어서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한다고.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유식한 사람보다 오히려 무식한 사람, 고귀한 사람보다 오히려 천한 사람들을 들어서 쓰신다는 점을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아그립바 왕이 또 한마디합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 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8절)." 이에 바울은 "말이 적으나 많으나(29절)"라고 말씀합니다. 어쨌든 조금 마음으로 설득이 되는가봐요. 설득이 됐으면 충분히 설득 당하면 될 것인데 버티고 서서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설득해서 기독교인 만들려 하는구나'하고 비웃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얘깁니까? 아그립바 왕이 바울을 재판하고 있는데 바울은 죄수로 앉아 가지고 오히려 재판장을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도 예수 믿으시오'-굉장한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런 자세가 복음 전하는 자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29절)." 확실한 증거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얼마나 훌륭합니까? 이것이 증인입니다. 나와 같아야 됩니다. 나와 같기를 바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먼저 충만해야 됩니다. 내 마음이 은혜로 충만하고 내 마음이 확신에 차 있고 내 신학적 지식이 분명해야 됩니다. 거기 목숨을 걸고 생명을 걸만큼 확실해야 합니다. 그리고야 복음 전할 수 있지요. 내가 설교학 강의를 할 때에 늘 얘기합니다마는 하나님 말씀 전할 때에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분명하게 매듭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이상한 버릇들이 생겨 가지고, 무엇 무엇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는 식의 희미한 소리를 해요.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되어집니다'-희미한 소리. 그래서는 안돼요. 반드시 이래야 됩니다,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이것이 복음 전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독설 이래도 좋고 독단이래도 좋습니다. 독단적 의견이 아니고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미쳤다고 할만큼 양보 없는 확실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절대적 복음.
우스운 얘기입니다 마는 어떤 부인이 본인은 여집사님인데 남편은 교회를 안나가요. 어쩌다 한번 구경갈 정도인데 영 신앙이 생기지 않는거예요. 언젠가는 부흥회 때인데 남편을 잘 꾀어 가지고 한번 데리고 갔더니 여전히 졸다가 나오는 거예요. 아주 섭섭했지마는 다음날 또 같이 갔어요. 설교를 듣고 돌아갔습니다. 세 번째로 가는데 가면서 부인이"오늘은 맨 앞에 앉아서 은혜를 받읍시다. 그리고 구원받읍시다"했더니 그 남편, "나는 별로 은혜 받을 마음 없구만"해요. "왜요? 은혜 받아야지요" "당신 은혜 받았다며?" "나야 은혜 많이 받았지요" "은혜 많이 받고도 그 모양이라면 안 받은 내가 더 낫지"-보세요. 은혜 받았으면 은혜 받은 냄새가 나야 해요. 은혜 받았다고 떠들기만 했지 집안에서 말대꾸하고, 다툴 때에는 혼자 똑똑하여 한술 더 뜨니 이래가지고 무슨 은혜 받았다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 보세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란다-내가 먼저 만족하고 생명을 걸만큼 확신하고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이보다 중요한 일이 없어요. 저는 생각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맛있게 먹는 사람하고 같이 먹으면 음식이 시원치 않아도 입맛이 돌아요. 앞에 앉은 사람이 시덥잖은 기분으로 앉아 있으면 영 입맛이 없어져요. 재미가 없어요. 제가 언젠가 한번 텔레비전에서 건강에 대한 강의하는 것을 보았어요. 건강하려면 이래야 됩니다 저래야 됩니다 하는데 강의하는 사람의 몰골을 보니 비쩍 말랐어요. 당치않구나 싶었어요. 우선 강사 자신부터 건강해야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지요. 아무리 그럴듯한 소리 해보았자 그게 영 귀에 안 들어옵디다. 마찬가지로 뚱뚱한 사람이 살 빼는 법을 얘기하는 것도 당치않아요. 자신부터 살이 빠져 있어야 말발이 서지요.
전도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충만하고 나서 '제발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 같기를 바랍니다' 해야 진실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재판 끝에 아그립바 왕이 말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다면 놓을 수 있을 뻔하였다(32절)"--뮈 이런 말을 해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치가들의 형태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경륜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더러 "네가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다"하십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될 귀중한 사명이 있기에 일이 이렇게 뒤틀리고 이렇게 어려워져서 결국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가게 되거든요.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 안에서 그 모든 사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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