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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 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누가복음 12:27-34)
요즘 제가 읽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피터 드래커의 자서전입니다. 95세의 학자가 쓰는 자서전입니다. 그의 책은 거의 다 읽었고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는 경제학자입니다. 세계경영학의 대부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자서전을 쓴 것이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자기를 평가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 자서전입니다. 그런데 거의가 자서전은 조금 자기를 높은 자리에서 평가를 합니다. 업적을 이야기하고요, 아니면 없는 것을 있게 하기도 합니다. 제가 읽은 드래커의 자선전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이야기를 쓰기보다는 자기의 인생에 영향력을 끼친 이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자서전을 시작을 합니다. 그는 제일장에 당신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가지고서는 말문을 열어 갑니다. 드래커를 다방면에 박식한 르네상스 지식인으로 키운 사람입니다. 할머니는 그에게 피아노와 음악, 그리고 사회생활에서의 예의를 가르쳤고 그는 할머니에게 많은 영향력을 받았다고 고백을 합니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피아니스트였으며 클라라 슈만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스승의 요청에 따라 요하네스 브람스를 위하여 피아노를 친 것이 생애 최대의 자랑거리로 여기며 사는 분이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의 할머니는 하인이나 상인 그리고 심지어 창녀에게까지도 모두 똑같이 대하는 그런 분이었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리치라는 창녀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에게 언제나 친절한 음성으로 그를 맞이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추운 날 리치 날씨가 추우니까 외투를 입고 있어요. 그렇게 말을 하는데 리치가 감기에 걸려서 힘들어하니 할머니는 6층이나 되는 아파트를 힘들게 올라가서는 감기약을 가져다주는 수고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친척이 할머니에게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숙녀가 그런 천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시면 어떻게 하시냐고.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그것은 예의가 아니다. 창녀에게 감기약을 가져다주시는 것은 격이 맞지 않아요. 나같이 늙은 여자와 그가 무슨 상관을 하기라도 하냐? 그리고 내가 그가 남자들에게 성병을 옮기는 것은 막을 수가 없지만 감기를 옮기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겠니?
그의 할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폭우가 심한 어느 날 그는 인도에서 미끄러지면서 차도로 내려섰고 그 일로 달여 오던 자동차에 치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운전사가 내려서 할머니를 병원으로 옮기려고 할머니 제가 병원으로 모시렵니다. 그때 이렇게 말씀을 하셨답니다. 젊은이 당신은 멍청하고 늙은 여편네를 너무나 친절하게 대하는 구려. 하지만 앰뷸런스를 불러주는 게 좋겠소. 당신 차에 낯선 여자가 타고 있으면 당신의 명예가 손상될지도 모르니 말이오. 세상 사람들은 말이 많거든. 십 분이 지나서 앰뷸런스가 도착을 했지만 관상동맥의 과다출혈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손자인 드래커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 노인이 살았다면 모르지만 거기서 죽었다면 그 젊은이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가?
자기가 하는 자기에 대한 평가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평가가 바로 되어야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도 있고 또 진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는지, 또 어느 정도의 사람으로 평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평가 기준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렇게 한번 가정하고 생각해보십시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그 평가보다 다른 사람들이 너를 평가해 주는 그 평가가 적을 때 나는 몹시 불만해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평가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이 보다 클 때, 보다 높을 때 우리는 불안하게 됩니다. 어차피 불만도 불안도 고통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 번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내가 나를 바로 평가하기가 어려운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서 나를 바로 평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이 인간관계나 혹은 자기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많은 고민과 번민을 안고 살게끔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너무 높이 평가하면 우상이 됩니다. 자기를 우상화해 가면서 자기 우상에 빠져 고통 중에 사는 불쌍한 사람을 많이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학 행위를 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를 학대합니다. 쓸데없는 인간이라고, 구제 불능한 인간이라고 자기를 항상 꾸짖으면서 사는 그런 비참한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자기 평가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어떤 이상을 지니고 살아왔는지, 그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가정교육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너무 그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해서 너는 훌륭한 사람이다. 훌륭한 사람이 꼭 되어야 한다. 너는 남의 아이와 다르다, 다른 아이와 다르다 해서 자꾸만 높이 많은 청구를 하게 되면 마침내 이것이 가상적인 이상이 되어 버려서 너무 높은, 너무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을 가진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이런 아이의 경우에는 여기에 다소라도 부합하게 살 수 있으면 좋고, 그렇지 못하면 아주 자기를 포기해 버리고 마는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 이상이 낮아서 현실 이하로 생각하고 사는 것도 걱정이지만 너무 높은 이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은 위선자가 되고 허위의 사람이 되기 쉬운 가능성을 말해주고, 또 때로는 절망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자기 능력, 자기 지식, 혹은 어떤 가능성과 무관한 이상이라는 것이 자기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자기 평가입니다.
이것은 자기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또 어떻게 요구하는가, 그래서 부모님의 요청 혹은 이웃의 요청 또는 친구들의 어떤 시선을 느껴 가면서 여기에 부합하게 사느라고 자기가 없는 그런 생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도 참 어려운 일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나야 나를 어떻게 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그 문제에 가장 귀한 착안을 합니다. 내가 나를 필요치 않다 하고, 이웃도 나를 필요치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필요하다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내게 지불해 주신 십자가의 엄청난 그 은총 안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 하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복수로 볼 때는 적은 무리, 곧 수적인 뜻이 되겠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작은 사람이라는 말도 되겠습니다. 어쨌든 수적으로 적은 것, 또 사람으로 보면 나약한 존재, 능력이 없고 권세도 없고 볼품도 쓸모도 없는 그런 사람, 관심 밖에 버려진 사람, 소외된 소수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확실히 저들은 적은 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그 앞에는 모름지기 열두 제자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예수님까지 포함해서 열세 사람입니다. 그것도 갈릴리 촌사람입니다. 아무 지위도 권세도 그리고 명예도 없는 사람들, 사나 죽으나 별로 누가 관심을 쏟을 그런 값어치의 사람들이 못 됩니다. 이런 초라한 사람 열세 명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린다고 해서 누구 하나 특별히 관심 있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하잘것없을 만큼 초라한 무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 너를 박해하는 자도 없고, 너의 가는 길을 막을 자가 없다. 그런고로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되겠습니다. 또 한편으로서는 자신을 적게 여기지 말라. 지식이 없다고, 명예가 없다고, 권세가 없다고 혹은 수가 적다고 해서 자신을 적게 여기지 말라는 그런 말씀인 줄로 압니다.
믿음은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는 말을 듣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십니다. "백합화를 보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누가 입히고 누가 먹이느냐?" 우리는 백합화를 보면서 하나님을 보고, 새를 보면서 또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돌보심, 그 속에서 자신을 보란 말입니다.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한 조각배가 풍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속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노를 저으려고 애를 쓰다가 풍랑이 심해질 때 완전히 손을 들고 맙니다. 그리고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적게 믿는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적게 믿는 자여,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주장하시고, 하나님이 이 적은 무리를 통하여 이루실 엄청난 역사가 앞에 있지 않느냐.
그들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뿐입니까? 그리스도가 여기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믿음 없는 이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말씀이 "적게 믿는 자여, 어찌 의심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결코 나 혼자가 아닙니다. 고독은 죄입니다. 믿음 안에 고독이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시고 그리고 내 가치를 평가하시고 당신의 십자가로 사랑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지불된 값이 여기에 있고, 보장된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피의 대가를 지불하고 사신 그 존재를 어떻게 평가하실 것입니까? 십자가만한 값으로 이미 지불한 그 엄청난 값으로 평가하고 그리고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수"는 수학적인 수가 아닙니다. 이것은 적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비록 수십만 명이 모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만의 모임이라면 적은 수입니다.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적은 무리, 이것이 큰 숫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 왕이 그 나라를 평정하고 보좌에 앉았을 때 그는 그 나라의 위엄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만일 전쟁이 난다면 군인으로 동원될 사람이 몇 사람이 있나 보자고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 활을 메고 적하고 정말 싸울 수 있는 사람, 창을 들고 방패를 들고 나가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 있나 보자 해서 많은 사람을 헤아렸습니다. 전체 인구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왜? 전쟁에 이기고 지고는 하나님이 어느 편에 서느냐에 달린 것이지 숫자가 많다고 이기고 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사람이 모였다고 하는 것이 문제지 어중이떠중이로 왔다 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이 가운데 친구 만나러 온 사람도 있고, 어쩌나 보자 해서 온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숫자가 얼마냐? 이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적인 어떤 수의 개념, 이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면 혼자라도 이것은 큰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것은 질적인 문제입니다. 죄인 만 명과 의인 한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인구가 얼마였는지 확실히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수만 명과 의인 열 명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거리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 한 사람을 만나라. 그리하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사람이 얼마든 간에 의인 한 사람과 바꿀 수 없는 것이요, 죄인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수가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 하나, 이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진리에 선 사람, 선에 속한 사람 그리고 의를 행하는 사람이 더욱 강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서 전쟁에 나가기 위하여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3만 2천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합지졸입니다. 지금 방금 모집해 놓은 군인입니다. 저쪽은 수십만 명입니다. 이 전쟁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수가 너무 많다. 줄여라" 하십니다. 기드온은 기가 찼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부득이 줄였습니다. 만 명으로 만들었습니다. "만 명은 너무 많다. 열 줄여라." 결국 3백 명을 만들었습니다. 기드온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3백 명 군인, 이것이 강한 것입니다. 이것이 큰 숫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은 우리는 너무나 하찮은 일에 매달려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를 합니다. 바람의 딸 한비야라는 분이 있습니다. 제가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잘 압니다. 그가 나를 아는 게 아닙니다. 제가 그 분을 압니다. 그는 비정부기구인 엔지오에서 긴급구호를 하는 분입니다. 전쟁이나 기근이 일어난 곳에는 어김없이 그가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처음으로 일을 하려고 케냐를 방문을 했답니다. 그는 거기서 충격을 받습니다. 그곳의 이동병원에서 사십대 중반의 케냐인 안과의사가 일을 하더랍니다. 그는 케냐의 대통령도 만나려면 며칠을 기다리는 유능한 의사입니다. 그래서 한비야씨가 물었답니다. 당신 같은 유능한 의사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이곳에서 전염병을 무릅쓰고 일을 하는 게 이상하네요? 전염성풍토병을 치료하는 그를 보면서 물었던 일이 자기를 가슴을 뜨겁게 하는 대답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어금니가 보일정도로 활짝 웃으며 대답을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돈 버는 곳에만 쓰는 것은 아깝잖아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이 뒤는 그런 사람을 원합니다. 길게 바도 오랜 세월을 살 수 있습니까? 그런데 싸우는 시간에 미워하는 시간에 거기에 허비하기는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여러분, 돈도 그런 것 아닙니까? 그저 어쩌다가 쉽게 번 돈은 아무리 많아도 나를 행복하게 못합니다. 땀 흘려 번적은 돈이 나와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한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어쩌다가 출세한 것, 그것은 별로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의롭게 때로는 천대를 받아도 여기에 공정한 강함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의와 함께 부자로 사는 것, 그것은 별로 바람직한 것이 못 됩니다. 진리와 함께 의와 함께 가난하게 살아도 여기에 더 큰 행복이 있고, 더 놀라운 강함이 있다고 하는 이러한 질적 수의 개념을 알아야겠습니다.
소년 다윗이 작은아이로서 전쟁에 나갔는데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장)고 그는 말하면서 큰 키의 장수 골리앗 대장을 물맷돌 몇 개로 때려눕힙니다. 이것은 그의 육체가 아니라 그의 정신이요. 그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진 이 무서운 소년, 그 신앙에 강함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생명은 강한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뚫고 비칩니다. 소금은 적은 것이지만 전체를 짜게 할 수 있습니다. 누룩은 적은 것이지만 전체를 썩게 할 수 있습니다. 많다 적다 말하지 맙시다. 부하다, 가난하다 그것도 말하지 맙시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이 생명적인 신앙만 있으면 산을 옮기겠다고 말했습니다. 부하냐고 묻기 전에 외로웠느냐고 물어 보십시다. 얼마나 벌었느냐고 묻지 말고 얼마나 진실했느냐고 물어 보십시다. 어떻게 출세했느냐고 묻지 맙시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정직했는지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생명은 미래 지향적인 것입니다. 보세요, 여기 열두 제자가 있습니다. 비록 적은 것이고 초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하여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 가운데서 열한 제자가 다 순교합니다. 이렇게 썩어지는 밀알이 되면서 온 세계의 수십억, 수백억의 많은 성도들이 구원받게 되는 거룩한 역사가 저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놀라운 신앙입니다. 믿음은 적은 씨앗에서 봄의 소리를 듣습니다. 꽃 냄새를 맡습니다. 가을에 추수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조그마한 씨앗 하나를 들고 새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여리고 성과 같은 큰 아성이라 하더라도 죄악의 도성인 경우에는 바로 눈앞에 있는 멸망을 보면서 슬퍼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복음의 씨앗이 온 세계에 충만하게 큰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로 임하게 하는 그 역사를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보면서 저 먼 미래를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약속된 미래, 이 결정된 미래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나갈 때마다 두 가지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었다. 이 땅을 내게 주었다. 혹은 내 발로 밟는 땅을 하나님이 다 내게 주었노라는 확신이요, 또 하나는 "다 내 손에 붙였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전부 다 과거사입니다. 아직 전쟁은 시작도 안 했습니다. "내게 주었다" "내 손에 붙였다" 하는 말만 떨어지면 전쟁은 끝난 것입니다. 그저 뒤처리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승리는 결정된 것입니다. 궁극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승리합니다. 그런 위대한 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세상을 보십시다. 이 복잡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넘어서 현실에 매여서, 발밑에 걸린 이 돌 하나에 매여서 아무 일도 못하고 그대로 손이 풀어지는 이런 나약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거친 광야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던 것처럼 그런 커다란 꿈, 그 같은 환상, 그 같은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적인 미래, 하나님의 엄청난 세계를 바라보면서 예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기까지는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반드시 이 일은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시던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기에 주님의 보장이 있습니다. 주님은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함께 계십니다.
이 귀한 신앙에 근거하여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런고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여 주시옵소서. 적은 무리에서 큰 무리를 보며, 고난과 실패 중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볼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 모든 역경과 좌절의 담을 넘어서 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복지에 축복이 있음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시며, 내가 처한 이 현실을 통하여 주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주와 함께 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담력과 용기와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배로의 부름 /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찌니라. 아멘.
참회의 기도 /
긍휼이 한량없으신 아버지 하나님
생각할수록 주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에 살지마는 우리는 지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한 가운데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온 세계가 전쟁과 재난, 기근과 인재 천재로 인하여서 많은 고생을 하고 있지마는 우리가 지금 평안한 가운데 주께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주님 주께서는 이처럼 한없는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시건만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고 주의 사랑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늘 낙심하며 근심하며 좌절하며 때로는 교만하며 하나님께 욕을 돌리며 산 것을 용서하여주시옵소서.
빛이 되라 하셨지만 어두움과 타협하며 살았고 소금이 되라 하셨지만 결코 우리는 세상을 바로 잡지 못하고,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지 못하고 죄악에 이끌리어 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단을 하지마는 실천에 옮기지 못했고 게으르고 나태함에 살아온, 그 소중한 은사를 땅에 묻어두고 지난날에 잘못한 것은 후회를 하면서 오늘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미련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썩어져야 할 육체를 위하면서 신령한 세계를 외면을 하면서 순간적인 일에 몰두하며 영원한 세계를 잊어버리고 산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평안하다고 재난당하는 사람을 돕지를 못하고 우리가 안일한 가운데 있으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위로를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바로살아가지 못했기에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바로 듣지 못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죄를 자복을 하오니 불쌍히 여기시고 이제 이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옵소서.
지금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죄를 생각을 하며 묵묵히 참회의 기도를 계속합니다.
용서의 선언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 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아멘.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 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누가복음 12:27-34)
요즘 제가 읽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피터 드래커의 자서전입니다. 95세의 학자가 쓰는 자서전입니다. 그의 책은 거의 다 읽었고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는 경제학자입니다. 세계경영학의 대부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자서전을 쓴 것이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자기를 평가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 자서전입니다. 그런데 거의가 자서전은 조금 자기를 높은 자리에서 평가를 합니다. 업적을 이야기하고요, 아니면 없는 것을 있게 하기도 합니다. 제가 읽은 드래커의 자선전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이야기를 쓰기보다는 자기의 인생에 영향력을 끼친 이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자서전을 시작을 합니다. 그는 제일장에 당신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가지고서는 말문을 열어 갑니다. 드래커를 다방면에 박식한 르네상스 지식인으로 키운 사람입니다. 할머니는 그에게 피아노와 음악, 그리고 사회생활에서의 예의를 가르쳤고 그는 할머니에게 많은 영향력을 받았다고 고백을 합니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 피아니스트였으며 클라라 슈만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스승의 요청에 따라 요하네스 브람스를 위하여 피아노를 친 것이 생애 최대의 자랑거리로 여기며 사는 분이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의 할머니는 하인이나 상인 그리고 심지어 창녀에게까지도 모두 똑같이 대하는 그런 분이었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리치라는 창녀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에게 언제나 친절한 음성으로 그를 맞이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추운 날 리치 날씨가 추우니까 외투를 입고 있어요. 그렇게 말을 하는데 리치가 감기에 걸려서 힘들어하니 할머니는 6층이나 되는 아파트를 힘들게 올라가서는 감기약을 가져다주는 수고를 하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친척이 할머니에게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숙녀가 그런 천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시면 어떻게 하시냐고. 그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그것은 예의가 아니다. 창녀에게 감기약을 가져다주시는 것은 격이 맞지 않아요. 나같이 늙은 여자와 그가 무슨 상관을 하기라도 하냐? 그리고 내가 그가 남자들에게 성병을 옮기는 것은 막을 수가 없지만 감기를 옮기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겠니?
그의 할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폭우가 심한 어느 날 그는 인도에서 미끄러지면서 차도로 내려섰고 그 일로 달여 오던 자동차에 치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운전사가 내려서 할머니를 병원으로 옮기려고 할머니 제가 병원으로 모시렵니다. 그때 이렇게 말씀을 하셨답니다. 젊은이 당신은 멍청하고 늙은 여편네를 너무나 친절하게 대하는 구려. 하지만 앰뷸런스를 불러주는 게 좋겠소. 당신 차에 낯선 여자가 타고 있으면 당신의 명예가 손상될지도 모르니 말이오. 세상 사람들은 말이 많거든. 십 분이 지나서 앰뷸런스가 도착을 했지만 관상동맥의 과다출혈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손자인 드래커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 노인이 살았다면 모르지만 거기서 죽었다면 그 젊은이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가?
자기가 하는 자기에 대한 평가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평가가 바로 되어야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도 있고 또 진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는지, 또 어느 정도의 사람으로 평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평가 기준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렇게 한번 가정하고 생각해보십시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그 평가보다 다른 사람들이 너를 평가해 주는 그 평가가 적을 때 나는 몹시 불만해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평가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이 보다 클 때, 보다 높을 때 우리는 불안하게 됩니다. 어차피 불만도 불안도 고통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 번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내가 나를 바로 평가하기가 어려운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내 마음을 알아서 나를 바로 평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이 인간관계나 혹은 자기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많은 고민과 번민을 안고 살게끔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너무 높이 평가하면 우상이 됩니다. 자기를 우상화해 가면서 자기 우상에 빠져 고통 중에 사는 불쌍한 사람을 많이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학 행위를 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를 학대합니다. 쓸데없는 인간이라고, 구제 불능한 인간이라고 자기를 항상 꾸짖으면서 사는 그런 비참한 사람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자기 평가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가 어떤 이상을 지니고 살아왔는지, 그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가정교육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너무 그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해서 너는 훌륭한 사람이다. 훌륭한 사람이 꼭 되어야 한다. 너는 남의 아이와 다르다, 다른 아이와 다르다 해서 자꾸만 높이 많은 청구를 하게 되면 마침내 이것이 가상적인 이상이 되어 버려서 너무 높은, 너무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을 가진 인간이 되기 쉽습니다. 이런 아이의 경우에는 여기에 다소라도 부합하게 살 수 있으면 좋고, 그렇지 못하면 아주 자기를 포기해 버리고 마는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무 이상이 낮아서 현실 이하로 생각하고 사는 것도 걱정이지만 너무 높은 이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은 위선자가 되고 허위의 사람이 되기 쉬운 가능성을 말해주고, 또 때로는 절망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자기 능력, 자기 지식, 혹은 어떤 가능성과 무관한 이상이라는 것이 자기를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자기 평가입니다.
이것은 자기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또 어떻게 요구하는가, 그래서 부모님의 요청 혹은 이웃의 요청 또는 친구들의 어떤 시선을 느껴 가면서 여기에 부합하게 사느라고 자기가 없는 그런 생을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도 참 어려운 일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나야 나를 어떻게 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그 문제에 가장 귀한 착안을 합니다. 내가 나를 필요치 않다 하고, 이웃도 나를 필요치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필요하다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내게 지불해 주신 십자가의 엄청난 그 은총 안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 하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복수로 볼 때는 적은 무리, 곧 수적인 뜻이 되겠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작은 사람이라는 말도 되겠습니다. 어쨌든 수적으로 적은 것, 또 사람으로 보면 나약한 존재, 능력이 없고 권세도 없고 볼품도 쓸모도 없는 그런 사람, 관심 밖에 버려진 사람, 소외된 소수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확실히 저들은 적은 무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그 앞에는 모름지기 열두 제자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예수님까지 포함해서 열세 사람입니다. 그것도 갈릴리 촌사람입니다. 아무 지위도 권세도 그리고 명예도 없는 사람들, 사나 죽으나 별로 누가 관심을 쏟을 그런 값어치의 사람들이 못 됩니다. 이런 초라한 사람 열세 명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린다고 해서 누구 하나 특별히 관심 있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하잘것없을 만큼 초라한 무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 너를 박해하는 자도 없고, 너의 가는 길을 막을 자가 없다. 그런고로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되겠습니다. 또 한편으로서는 자신을 적게 여기지 말라. 지식이 없다고, 명예가 없다고, 권세가 없다고 혹은 수가 적다고 해서 자신을 적게 여기지 말라는 그런 말씀인 줄로 압니다.
믿음은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 수 없는 말을 듣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십니다. "백합화를 보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누가 입히고 누가 먹이느냐?" 우리는 백합화를 보면서 하나님을 보고, 새를 보면서 또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돌보심, 그 속에서 자신을 보란 말입니다.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한 조각배가 풍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속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노를 저으려고 애를 쓰다가 풍랑이 심해질 때 완전히 손을 들고 맙니다. 그리고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적게 믿는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적게 믿는 자여,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주장하시고, 하나님이 이 적은 무리를 통하여 이루실 엄청난 역사가 앞에 있지 않느냐.
그들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많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뿐입니까? 그리스도가 여기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믿음 없는 이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말씀이 "적게 믿는 자여, 어찌 의심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결코 나 혼자가 아닙니다. 고독은 죄입니다. 믿음 안에 고독이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시고 그리고 내 가치를 평가하시고 당신의 십자가로 사랑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지불된 값이 여기에 있고, 보장된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피의 대가를 지불하고 사신 그 존재를 어떻게 평가하실 것입니까? 십자가만한 값으로 이미 지불한 그 엄청난 값으로 평가하고 그리고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수"는 수학적인 수가 아닙니다. 이것은 적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비록 수십만 명이 모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만의 모임이라면 적은 수입니다.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적은 무리, 이것이 큰 숫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 왕이 그 나라를 평정하고 보좌에 앉았을 때 그는 그 나라의 위엄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만일 전쟁이 난다면 군인으로 동원될 사람이 몇 사람이 있나 보자고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 활을 메고 적하고 정말 싸울 수 있는 사람, 창을 들고 방패를 들고 나가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 있나 보자 해서 많은 사람을 헤아렸습니다. 전체 인구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왜? 전쟁에 이기고 지고는 하나님이 어느 편에 서느냐에 달린 것이지 숫자가 많다고 이기고 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사람이 모였다고 하는 것이 문제지 어중이떠중이로 왔다 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이 가운데 친구 만나러 온 사람도 있고, 어쩌나 보자 해서 온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숫자가 얼마냐? 이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적인 어떤 수의 개념, 이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면 혼자라도 이것은 큰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것은 질적인 문제입니다. 죄인 만 명과 의인 한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인구가 얼마였는지 확실히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수만 명과 의인 열 명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거리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 한 사람을 만나라. 그리하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사람이 얼마든 간에 의인 한 사람과 바꿀 수 없는 것이요, 죄인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수가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 하나, 이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진리에 선 사람, 선에 속한 사람 그리고 의를 행하는 사람이 더욱 강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서 전쟁에 나가기 위하여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3만 2천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합지졸입니다. 지금 방금 모집해 놓은 군인입니다. 저쪽은 수십만 명입니다. 이 전쟁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수가 너무 많다. 줄여라" 하십니다. 기드온은 기가 찼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부득이 줄였습니다. 만 명으로 만들었습니다. "만 명은 너무 많다. 열 줄여라." 결국 3백 명을 만들었습니다. 기드온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3백 명 군인, 이것이 강한 것입니다. 이것이 큰 숫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은 우리는 너무나 하찮은 일에 매달려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를 합니다. 바람의 딸 한비야라는 분이 있습니다. 제가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잘 압니다. 그가 나를 아는 게 아닙니다. 제가 그 분을 압니다. 그는 비정부기구인 엔지오에서 긴급구호를 하는 분입니다. 전쟁이나 기근이 일어난 곳에는 어김없이 그가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처음으로 일을 하려고 케냐를 방문을 했답니다. 그는 거기서 충격을 받습니다. 그곳의 이동병원에서 사십대 중반의 케냐인 안과의사가 일을 하더랍니다. 그는 케냐의 대통령도 만나려면 며칠을 기다리는 유능한 의사입니다. 그래서 한비야씨가 물었답니다. 당신 같은 유능한 의사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이곳에서 전염병을 무릅쓰고 일을 하는 게 이상하네요? 전염성풍토병을 치료하는 그를 보면서 물었던 일이 자기를 가슴을 뜨겁게 하는 대답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어금니가 보일정도로 활짝 웃으며 대답을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돈 버는 곳에만 쓰는 것은 아깝잖아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가슴이 뒤는 그런 사람을 원합니다. 길게 바도 오랜 세월을 살 수 있습니까? 그런데 싸우는 시간에 미워하는 시간에 거기에 허비하기는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여러분, 돈도 그런 것 아닙니까? 그저 어쩌다가 쉽게 번 돈은 아무리 많아도 나를 행복하게 못합니다. 땀 흘려 번적은 돈이 나와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한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어쩌다가 출세한 것, 그것은 별로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의롭게 때로는 천대를 받아도 여기에 공정한 강함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의와 함께 부자로 사는 것, 그것은 별로 바람직한 것이 못 됩니다. 진리와 함께 의와 함께 가난하게 살아도 여기에 더 큰 행복이 있고, 더 놀라운 강함이 있다고 하는 이러한 질적 수의 개념을 알아야겠습니다.
소년 다윗이 작은아이로서 전쟁에 나갔는데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장)고 그는 말하면서 큰 키의 장수 골리앗 대장을 물맷돌 몇 개로 때려눕힙니다. 이것은 그의 육체가 아니라 그의 정신이요. 그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진 이 무서운 소년, 그 신앙에 강함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생명은 강한 것입니다. 빛은 어두움을 뚫고 비칩니다. 소금은 적은 것이지만 전체를 짜게 할 수 있습니다. 누룩은 적은 것이지만 전체를 썩게 할 수 있습니다. 많다 적다 말하지 맙시다. 부하다, 가난하다 그것도 말하지 맙시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이 생명적인 신앙만 있으면 산을 옮기겠다고 말했습니다. 부하냐고 묻기 전에 외로웠느냐고 물어 보십시다. 얼마나 벌었느냐고 묻지 말고 얼마나 진실했느냐고 물어 보십시다. 어떻게 출세했느냐고 묻지 맙시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정직했는지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생명은 미래 지향적인 것입니다. 보세요, 여기 열두 제자가 있습니다. 비록 적은 것이고 초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하여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 가운데서 열한 제자가 다 순교합니다. 이렇게 썩어지는 밀알이 되면서 온 세계의 수십억, 수백억의 많은 성도들이 구원받게 되는 거룩한 역사가 저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놀라운 신앙입니다. 믿음은 적은 씨앗에서 봄의 소리를 듣습니다. 꽃 냄새를 맡습니다. 가을에 추수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조그마한 씨앗 하나를 들고 새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여리고 성과 같은 큰 아성이라 하더라도 죄악의 도성인 경우에는 바로 눈앞에 있는 멸망을 보면서 슬퍼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복음의 씨앗이 온 세계에 충만하게 큰 역사를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로 임하게 하는 그 역사를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보면서 저 먼 미래를 바라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약속된 미래, 이 결정된 미래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나갈 때마다 두 가지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었다. 이 땅을 내게 주었다. 혹은 내 발로 밟는 땅을 하나님이 다 내게 주었노라는 확신이요, 또 하나는 "다 내 손에 붙였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전부 다 과거사입니다. 아직 전쟁은 시작도 안 했습니다. "내게 주었다" "내 손에 붙였다" 하는 말만 떨어지면 전쟁은 끝난 것입니다. 그저 뒤처리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승리는 결정된 것입니다. 궁극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의가 승리합니다. 그런 위대한 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세상을 보십시다. 이 복잡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넘어서 현실에 매여서, 발밑에 걸린 이 돌 하나에 매여서 아무 일도 못하고 그대로 손이 풀어지는 이런 나약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거친 광야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복지를 바라보던 것처럼 그런 커다란 꿈, 그 같은 환상, 그 같은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적인 미래, 하나님의 엄청난 세계를 바라보면서 예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기까지는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반드시 이 일은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시던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기에 주님의 보장이 있습니다. 주님은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함께 계십니다.
이 귀한 신앙에 근거하여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런고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여 주시옵소서. 적은 무리에서 큰 무리를 보며, 고난과 실패 중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볼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 모든 역경과 좌절의 담을 넘어서 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복지에 축복이 있음을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시며, 내가 처한 이 현실을 통하여 주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주와 함께 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담력과 용기와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예배로의 부름 /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찌니라. 아멘.
참회의 기도 /
긍휼이 한량없으신 아버지 하나님
생각할수록 주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에 살지마는 우리는 지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한 가운데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온 세계가 전쟁과 재난, 기근과 인재 천재로 인하여서 많은 고생을 하고 있지마는 우리가 지금 평안한 가운데 주께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주님 주께서는 이처럼 한없는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시건만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하고 주의 사랑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늘 낙심하며 근심하며 좌절하며 때로는 교만하며 하나님께 욕을 돌리며 산 것을 용서하여주시옵소서.
빛이 되라 하셨지만 어두움과 타협하며 살았고 소금이 되라 하셨지만 결코 우리는 세상을 바로 잡지 못하고,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지 못하고 죄악에 이끌리어 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늘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단을 하지마는 실천에 옮기지 못했고 게으르고 나태함에 살아온, 그 소중한 은사를 땅에 묻어두고 지난날에 잘못한 것은 후회를 하면서 오늘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미련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썩어져야 할 육체를 위하면서 신령한 세계를 외면을 하면서 순간적인 일에 몰두하며 영원한 세계를 잊어버리고 산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평안하다고 재난당하는 사람을 돕지를 못하고 우리가 안일한 가운데 있으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위로를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바로살아가지 못했기에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바로 듣지 못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죄를 자복을 하오니 불쌍히 여기시고 이제 이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옵소서.
지금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죄를 생각을 하며 묵묵히 참회의 기도를 계속합니다.
용서의 선언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 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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