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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결심(마태복음 26장 31절~35절)

by 【고동엽】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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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결심(마태복음 26장 31절~35절)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윈스턴 처칠이 어느 날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를 방송하기 위해 BBC 방송국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가 택시를 잡아타고 "BBC 방송국으로 갑시다!" 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운전기사가 승차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까닭인즉슨 이제 한 시간 뒤에 위대한 정치가 처칠 경이 중요한 방송을 할 터인데 자기가 BBC까지 가다보면 그 방송을 듣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칠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1파운드를 내놓으면서 "그러지 말고 좀 갑시다"하고 짐짓 애원조로 부탁해보았습니다. 그러자 이 기사 아저씨, "에라 모르겠다"하더니 중얼거립니다. "타세요! 처칠인지 개떡인지 내가 알 게 뭐람. 돈이나 벌어야지."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말로 인하여 낭패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이 내 진심이 아니요 내 말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말이 사실이요 나의 참마음이었던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돌발적인 행동을 저질러놓고서 그것이 뿌리 없는 행동이요 내 본심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무심결에 불쑥 튀어나오는 말 한마디, 저도 모르게 저지르는 행동, 그 속에 나의 진실이 있음을 알고 우리는 겸손하게 자기를 돌아보면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에 끌려서, 혹은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행하는 경우도 있으나, 무의식적인 조건반사(條件反射)로서 그저 따라가고 따라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아랑곳없고 어느 사이에 다른 사람의 눈치만 보는, 그런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다른 사람의 비위에 맞는 행동과 말만을 골라서 하는 종속적 언행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나를 주도하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내 욕심입니까? 내 명예입니까? 아니면 내 본능입니까? 나는 누구한테 끌려 사는 것입니까? '나'라는 존재는 참으로 내가 믿을 수 있는 존재입니까? 나는 내 의지에 따라 행하고 있습니까?

깊은 지식, 정확한 판단, 그리고 결심 없는 행위라면 이것은 행위다운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따라가는 자가 아니요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에 끌려가며 거기에 나를 복종시켜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때때로 충동적인 행위가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환경에 따라가고, 일시적이요 순간적인 다른 사람의 평판을 너무 의식해서 나를 과신한 나머지 엉뚱한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습니다. 그 속에서 나의 나약함과 미련함, 그리고 아주 가소로운 나의 실체(實體)를 발견하고는 부끄러워질 때가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그렇게 초라하고 불쌍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약속하고 장담합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고 버리지 않겠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결심은 겨우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무참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호언장담하던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뿐만 아니라 저주까지 합니다.

어쩌면 사람이 이다지도 약할 수가 있습니까?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입니까? 우리는 베드로의 형편을 동정함과 동시에 나의 나됨을 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할 그 때에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딴에는 결심한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목숨을 건 결단도 섰을 것입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하나님 앞에 굳게 약속하는 숙명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크나큰 결단의 순간이 거짓말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베드로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원점으로 돌아가서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장담한 바로 그때부터가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베드로는 말합니다. '나는 주를 따르겠습니다, 죽을지언정 따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따르겠습니다' 하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왜 대화가 이렇게 전개되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지금 말만 하고 있을 뿐, 그것이 진실한 결단이요 확실히 믿을 만한 결심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께서 알고 계신 까닭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이 진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알았더라면 뒤에 그처럼 엄청난 실패는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무지(無知)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모르는 사이에 생각 없는 장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를 내세워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 우편에, 또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물으십니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대답합니다. "할 수 있나이다."

이제 한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나의 마시려는 잔'이라고 하실 때에 제자들이 과연 그 뜻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십자가를 그렇게 비유해서 하시는 말씀을 두고 저들은 아마 축제일의 포도주쯤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뜻도 모르고 내뱉는 장담, 그 결심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보다 더한 난센스가 또 하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6절입니다. 한번은 유대 땅 베다니 근방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피해 계시던 중에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 땅으로 가자' 하십니다. 전에 있었던 핍박을 기억하건대 그것은 참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이때 도마가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이것 또한 생각 없는 소리입니다.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 한마디, 이것이 얼마나 큰 실수이며 얼마나 큰 화를 자초합니까?

누가복음 9장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십니다. 어떤 핍박, 어떤 환난, 어떤 십자가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다 아시고 이 일을 위하여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도 생각하십니다. 그분은 유월절 양이 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십니다. 올라가시면서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결심하고 십자가를 향해 가노라, 너희도 결심해다오, 너희도 나와 함께 가자, 나를 따르라 ----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형편과 베드로의 나약함, 그리고 성경적인 예언도 아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결심하시고, 제자들에게도 같은 결심을 촉구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 깊은 뜻을 몰랐습니다. 그저 장담했습니다. 그 장담은 허세였습니다.

아마도 베드로의 생각에는 십자가라는 말이 실제로 일어날 역사적인 사건일 줄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인 현실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신령합니다. 하늘나라의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만사를 추상적으로만 이해했을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을 '정신적으로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겠지, 마음으로 희생하라는 말씀이겠지'라고 생각했음직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진짜 십자가요, 실제 사건이요. 구체적인 고난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를 생각할 때에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구체적이요, 현실적이요, 사건적입니다. 결코 마음으로 수양하고 정신적으로 생각할 그런 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참으로 희생, 참으로 십자가, 참으로 죽음을 말씀합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그 신비한 기적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능력의 예수님이 아무려면 정말로 십자가를 지실까 ---- 이렇게 생각했을 법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능력의 절정임을 몰랐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결정적으로 몰랐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저의 무지와 저의 나약함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체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죽을지언정 따르겠습니다, 결코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해보았자 마음만으로 되는 일입니까? 마음과 육체가, 생각과 현실이, 이상과 자기 실재의 거리가 얼마나 먼가를 미처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를 믿는 사람은 자기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르기에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라고 하는 것처럼 초라한 것이 없습니다.

언젠가 저는 홍 사장이라는 분과 함께 그의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분은 2만 명이나 되는 공장 직원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제게 설교를 부탁하고는 제 소개를 하셨습니다. "소망교회 목사님입니다. 제가 나가는 교회의 목사님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에 소개하는 말 한마디가 참 이상합디다. "이분이 제게 담배를 끊게 하신 분입니다." 저로서는 무슨 말인지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그분의 설명을 듣고서 알았습니다. 그는 담배를 하루에 세 갑씩이나 피우는 골초였다고 합니다. 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 보았고, 담배끊는 학교에도 갔었습니다. 그렇게 기를 쓰고 수단을 부려보아도 끊지 못했는데 제가 그것을 끊게 해드렸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인즉슨 언젠가 제가 설교 중에 "그거 하나도 못 끊으면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했는데 그것이 홍 사장님 마음에 딱 와서 부딪히더라는 것입니다. '담배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인데 그래, 내가 이거 하나 마음대로 못하면서 무슨 큰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제 말 한마디에 충격 받아 담배를 끊었다는 사연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담배 피우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피우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여전히 피우는 사람은 자신의 초라함을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것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새벽기도 나오시는 분들 중에서 '나는 적당히 하다가 그만두겠다'하고 시작하신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요컨대 '나는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 한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겠다'하는 마음의 결심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꾸준한 분들보다 들락날락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뭐든지 마음먹기가 쉽지,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꾸준히 실천한다는 것, 일생을 통하여 꾸준히 생활 속에 옮기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말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상황이야 어떻게 변하든지 순종하기로 했으면 순종하고, 섬기기로 했으면 섬겨야 합니다.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오늘 베드로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베드로 저를 알기보다 예수님께서 그를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말씀이 '네가 나를 모른다고 하리라' 하시면 '아, 그렇습니까?' 하고 받아들일 일이지 아니라고 우기다니요? 이것이 다 자기를 모른 결과입니다.

베드로가 또 하나 잘못한 것은 자기를 예외시한 점입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33절)." 내가 주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은근히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부터 잘못이 있습니다.

특별할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만은 예외입니다, 나는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아니기는 무엇이 아닙니까? 끝내는 베드로만 부인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멀찍이 피하는 것으로 말았지만 베드로는 형편없이 비겁했습니다. '나만은 따르겠습니다' 하더니 저만 예수를 모른다고 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교만이요 자기 과신이었습니다.

'나는(나만은)'이라고 할 때부터 잘못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고민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모든 사람 중에 속한 한 사람이요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특별하다, 나는 예외다' 라고 생각하는 거기에 병이 있습니다. 나만 특별히 잘 믿는다고 생각한다면 언젠가는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비참한 존재다' 라고 고백할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월 의식을 용납치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는 동안에 나를 잃어버립니다. 나 혼자 있을 때에는 나의 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내가 약하다는 것을 시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나는 강하다고 해버립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를 예외시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남을 정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르다는 말이요, 내가 강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약하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은연중에 내가 남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한 것은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0절을 보면 요한은 끝까지 주님을 따릅니다. 이 사실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더러 예언하시기를 '네가 앞으로 나를 위하여 이렇게 핍박받고, 이렇게 순교해야 되겠다'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또다시 엉뚱한 일에 신경을 씁니다. 요한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냉정하게 대답하십니다. 우리들도 꼭 귀담아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네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 21:23)." 딱 잘라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를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 신경 쓰느라고 스스로도 감당키 어려운 장담을 해놓고 마침내는 그 누구보다도 비참한 모습으로 무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몰랐던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나를 믿는 것이 불 신앙으로 통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성경의 예언도, 예수님의 경고도 다 부인했습니다. 나를 믿고, 예수님의 말씀은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경고하시건만 그 경고를 무시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 없는 용기는 만용(蠻勇)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41절)" 부탁하시는데 나만 믿고 잠자더니 끝내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비참한 인간으로 전락했습니다. 나를 과신하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해야 했고 그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리라, 내가 다시 살아나리라,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갈릴리에서 만나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과장하고, 내가 나를 과신하는 한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살아나서 갈릴리로 가리라 너희 보다 먼저 가겠다 ---- 이 소중한 말씀이 베드로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자기 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의 귀에는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다음에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그 옛날 친히 지어주셨던 이름 베드로, 그 소중한 이름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베드로란 반석, 바윗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한 사람이 바위는 무슨 바위입니까? 조약돌도 못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가슴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사뭇 '베드로야 베드로야' 하고 사랑스럽게 부르시던 예수님이 이제는 "시몬아"하고 부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대답을 봅 시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이 아십니다.

나는 내 마음을 모릅니다. 나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주님, 주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비록 주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그래도 지금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주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이제 비로소 자신을 압니다. 내 마음이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감히 자기 결단을, 자기 결심을 내어놓지 못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낮출 때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시몬의 결심(마태복음 26장 31절~35절)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윈스턴 처칠이 어느 날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를 방송하기 위해 BBC 방송국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가 택시를 잡아타고 "BBC 방송국으로 갑시다!" 했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운전기사가 승차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까닭인즉슨 이제 한 시간 뒤에 위대한 정치가 처칠 경이 중요한 방송을 할 터인데 자기가 BBC까지 가다보면 그 방송을 듣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칠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1파운드를 내놓으면서 "그러지 말고 좀 갑시다"하고 짐짓 애원조로 부탁해보았습니다. 그러자 이 기사 아저씨, "에라 모르겠다"하더니 중얼거립니다. "타세요! 처칠인지 개떡인지 내가 알 게 뭐람. 돈이나 벌어야지."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말로 인하여 낭패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이 내 진심이 아니요 내 말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말이 사실이요 나의 참마음이었던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돌발적인 행동을 저질러놓고서 그것이 뿌리 없는 행동이요 내 본심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무심결에 불쑥 튀어나오는 말 한마디, 저도 모르게 저지르는 행동, 그 속에 나의 진실이 있음을 알고 우리는 겸손하게 자기를 돌아보면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본능에 끌려서, 혹은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행하는 경우도 있으나, 무의식적인 조건반사(條件反射)로서 그저 따라가고 따라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아랑곳없고 어느 사이에 다른 사람의 눈치만 보는, 그런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다른 사람의 비위에 맞는 행동과 말만을 골라서 하는 종속적 언행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나를 주도하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내 욕심입니까? 내 명예입니까? 아니면 내 본능입니까? 나는 누구한테 끌려 사는 것입니까? '나'라는 존재는 참으로 내가 믿을 수 있는 존재입니까? 나는 내 의지에 따라 행하고 있습니까?

깊은 지식, 정확한 판단, 그리고 결심 없는 행위라면 이것은 행위다운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따라가는 자가 아니요 오히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에 끌려가며 거기에 나를 복종시켜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때때로 충동적인 행위가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환경에 따라가고, 일시적이요 순간적인 다른 사람의 평판을 너무 의식해서 나를 과신한 나머지 엉뚱한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습니다. 그 속에서 나의 나약함과 미련함, 그리고 아주 가소로운 나의 실체(實體)를 발견하고는 부끄러워질 때가 많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그렇게 초라하고 불쌍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약속하고 장담합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고 버리지 않겠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결심은 겨우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무참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호언장담하던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뿐만 아니라 저주까지 합니다.

어쩌면 사람이 이다지도 약할 수가 있습니까?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입니까? 우리는 베드로의 형편을 동정함과 동시에 나의 나됨을 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할 그 때에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딴에는 결심한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목숨을 건 결단도 섰을 것입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하나님 앞에 굳게 약속하는 숙명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크나큰 결단의 순간이 거짓말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베드로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원점으로 돌아가서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장담한 바로 그때부터가 문제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베드로는 말합니다. '나는 주를 따르겠습니다, 죽을지언정 따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따르겠습니다' 하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왜 대화가 이렇게 전개되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지금 말만 하고 있을 뿐, 그것이 진실한 결단이요 확실히 믿을 만한 결심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께서 알고 계신 까닭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이 진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알았더라면 뒤에 그처럼 엄청난 실패는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무지(無知)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모르는 사이에 생각 없는 장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를 내세워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 우편에, 또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물으십니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대답합니다. "할 수 있나이다."

이제 한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나의 마시려는 잔'이라고 하실 때에 제자들이 과연 그 뜻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십자가를 그렇게 비유해서 하시는 말씀을 두고 저들은 아마 축제일의 포도주쯤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뜻도 모르고 내뱉는 장담, 그 결심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보다 더한 난센스가 또 하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6절입니다. 한번은 유대 땅 베다니 근방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피해 계시던 중에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 땅으로 가자' 하십니다. 전에 있었던 핍박을 기억하건대 그것은 참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이때 도마가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이것 또한 생각 없는 소리입니다.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 한마디, 이것이 얼마나 큰 실수이며 얼마나 큰 화를 자초합니까?

누가복음 9장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십니다. 어떤 핍박, 어떤 환난, 어떤 십자가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다 아시고 이 일을 위하여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도 생각하십니다. 그분은 유월절 양이 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십니다. 올라가시면서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내가 이렇게 결심하고 십자가를 향해 가노라, 너희도 결심해다오, 너희도 나와 함께 가자, 나를 따르라 ----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형편과 베드로의 나약함, 그리고 성경적인 예언도 아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결심하시고, 제자들에게도 같은 결심을 촉구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 깊은 뜻을 몰랐습니다. 그저 장담했습니다. 그 장담은 허세였습니다.

아마도 베드로의 생각에는 십자가라는 말이 실제로 일어날 역사적인 사건일 줄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인 현실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신령합니다. 하늘나라의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만사를 추상적으로만 이해했을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을 '정신적으로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겠지, 마음으로 희생하라는 말씀이겠지'라고 생각했음직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진짜 십자가요, 실제 사건이요. 구체적인 고난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를 생각할 때에 추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구체적이요, 현실적이요, 사건적입니다. 결코 마음으로 수양하고 정신적으로 생각할 그런 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참으로 희생, 참으로 십자가, 참으로 죽음을 말씀합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그 신비한 기적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능력의 예수님이 아무려면 정말로 십자가를 지실까 ---- 이렇게 생각했을 법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능력의 절정임을 몰랐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결정적으로 몰랐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저의 무지와 저의 나약함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체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죽을지언정 따르겠습니다, 결코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해보았자 마음만으로 되는 일입니까? 마음과 육체가, 생각과 현실이, 이상과 자기 실재의 거리가 얼마나 먼가를 미처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를 믿는 사람은 자기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모르기에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라고 하는 것처럼 초라한 것이 없습니다.

언젠가 저는 홍 사장이라는 분과 함께 그의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분은 2만 명이나 되는 공장 직원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제게 설교를 부탁하고는 제 소개를 하셨습니다. "소망교회 목사님입니다. 제가 나가는 교회의 목사님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에 소개하는 말 한마디가 참 이상합디다. "이분이 제게 담배를 끊게 하신 분입니다." 저로서는 무슨 말인지 선뜻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그분의 설명을 듣고서 알았습니다. 그는 담배를 하루에 세 갑씩이나 피우는 골초였다고 합니다. 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 보았고, 담배끊는 학교에도 갔었습니다. 그렇게 기를 쓰고 수단을 부려보아도 끊지 못했는데 제가 그것을 끊게 해드렸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인즉슨 언젠가 제가 설교 중에 "그거 하나도 못 끊으면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했는데 그것이 홍 사장님 마음에 딱 와서 부딪히더라는 것입니다. '담배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인데 그래, 내가 이거 하나 마음대로 못하면서 무슨 큰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제 말 한마디에 충격 받아 담배를 끊었다는 사연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담배 피우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피우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여전히 피우는 사람은 자신의 초라함을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것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새벽기도 나오시는 분들 중에서 '나는 적당히 하다가 그만두겠다'하고 시작하신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요컨대 '나는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 한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겠다'하는 마음의 결심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꾸준한 분들보다 들락날락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뭐든지 마음먹기가 쉽지,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꾸준히 실천한다는 것, 일생을 통하여 꾸준히 생활 속에 옮기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말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상황이야 어떻게 변하든지 순종하기로 했으면 순종하고, 섬기기로 했으면 섬겨야 합니다.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오늘 베드로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베드로 저를 알기보다 예수님께서 그를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말씀이 '네가 나를 모른다고 하리라' 하시면 '아, 그렇습니까?' 하고 받아들일 일이지 아니라고 우기다니요? 이것이 다 자기를 모른 결과입니다.

베드로가 또 하나 잘못한 것은 자기를 예외시한 점입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33절)." 내가 주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은근히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부터 잘못이 있습니다.

특별할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만은 예외입니다, 나는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아니기는 무엇이 아닙니까? 끝내는 베드로만 부인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멀찍이 피하는 것으로 말았지만 베드로는 형편없이 비겁했습니다. '나만은 따르겠습니다' 하더니 저만 예수를 모른다고 해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교만이요 자기 과신이었습니다.

'나는(나만은)'이라고 할 때부터 잘못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고민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모든 사람 중에 속한 한 사람이요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특별하다, 나는 예외다' 라고 생각하는 거기에 병이 있습니다. 나만 특별히 잘 믿는다고 생각한다면 언젠가는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비참한 존재다' 라고 고백할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월 의식을 용납치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는 동안에 나를 잃어버립니다. 나 혼자 있을 때에는 나의 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내가 약하다는 것을 시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나는 강하다고 해버립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를 예외시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남을 정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르다는 말이요, 내가 강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약하다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은연중에 내가 남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한 것은 베드로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0절을 보면 요한은 끝까지 주님을 따릅니다. 이 사실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더러 예언하시기를 '네가 앞으로 나를 위하여 이렇게 핍박받고, 이렇게 순교해야 되겠다'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또다시 엉뚱한 일에 신경을 씁니다. 요한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냉정하게 대답하십니다. 우리들도 꼭 귀담아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네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 21:23)." 딱 잘라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를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 신경 쓰느라고 스스로도 감당키 어려운 장담을 해놓고 마침내는 그 누구보다도 비참한 모습으로 무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몰랐던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나를 믿는 것이 불 신앙으로 통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성경의 예언도, 예수님의 경고도 다 부인했습니다. 나를 믿고, 예수님의 말씀은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경고하시건만 그 경고를 무시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 없는 용기는 만용(蠻勇)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41절)" 부탁하시는데 나만 믿고 잠자더니 끝내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비참한 인간으로 전락했습니다. 나를 과신하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해야 했고 그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리라, 내가 다시 살아나리라,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갈릴리에서 만나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과장하고, 내가 나를 과신하는 한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살아나서 갈릴리로 가리라 너희 보다 먼저 가겠다 ---- 이 소중한 말씀이 베드로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자기 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의 귀에는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다음에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그 옛날 친히 지어주셨던 이름 베드로, 그 소중한 이름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베드로란 반석, 바윗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한 사람이 바위는 무슨 바위입니까? 조약돌도 못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가슴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사뭇 '베드로야 베드로야' 하고 사랑스럽게 부르시던 예수님이 이제는 "시몬아"하고 부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대답을 봅 시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이 아십니다.

나는 내 마음을 모릅니다. 나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주님, 주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비록 주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그래도 지금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주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이제 비로소 자신을 압니다. 내 마음이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감히 자기 결단을, 자기 결심을 내어놓지 못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처럼 스스로를 낮추고 낮출 때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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