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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고난과 뒤따름의 의미- 본회퍼와 한국교회의 만남

by 【고동엽】 2021. 10. 27.
하나님의 고난과 뒤따름의 의미

- 본회퍼와 한국교회의 만남

강성영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다. 그의 삶과 죽음은 정의롭고 인간적인 세계를 건설하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커다란 감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이미 반세기가 지난 역사 속에서 히틀러의 폭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다가 폭력적인 죽임을 당하였다. 그가 39세가 되던 해, 그리고 나치정권의 패망을 눈앞에 바라보던 때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많은 것을 증언하고 있다. 죽음 앞에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아직도 커다란 울림을 남기고 있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생명의 시작이다. 나는 모든 국가적 이해를 뛰어 넘는 전세계적인 그리스도인의 형제 됨을 믿는다. 그리고 나는 승리가 우리에게 확실하다는 사실을 믿는다.


이 말은 본회퍼가 1945년 4월 9일 플로센부르그 수용소에서 불법적인 약식재판 후에 교수대에서 처형되기 직전에 치체스터의 조지 벨(George Bell) 감독에게 전하도록 그의 동료 죄수인 영국군 장교 패인 베스트(Payne Best)에게 남긴 것이다.(E. Bethge, Dietrich Bonhoeffer. Theologe. Christ. Zeitgenosse. Eine Biographie, Munchen 19866, 1037)


나는 본회퍼를 단지 우리가 과거의 역사 속에서 기념할 만한 한 사람의 독일 신학자로 보지 않는다. 우리가 각각의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샘물이 역사의 지층 밑바닥을 흐르는 경험의 물줄기에 닿아 있는 것과 같이 본회퍼와 우리는 고난의 경험을 통해 시공(時空)을 너머 연결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정책에 맞서 싸우다가 희생된 민중들과 라틴아메리카의 군사독재의 희생자들, 그리고 아시아에서 민권을 위한 전선에서 삶을 내던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본회퍼는 독일인, 신학자, 고백교회의 목사이기 보다 그가 핑켄발트(Finkenwald: 고백교회의 준목훈련원)에서 부르던 호칭처럼 ‘브루더’(Bruder), ‘형제’로서 남아 있다. 고난에 대한 집단적 기억은 역사를 살아 있는 생동감 넘치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으로부터 움직여지도록 작용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본회퍼의 삶과 죽음에 겹쳐지는 우리의 집단적 기억을 다시금 일깨워 볼 수 있기 위해 우리 의식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지나간 고난의 시간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본회퍼와 한국교회의 만남을 그와 민중신학자들의 집단적 경험과 그것으로부터 형성된 신학적 진술의 공통점과 차이를 비교해 봄으로써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본회퍼의 하나님의 고난에 대한 이해를 검토한 후에 한국교회의 책임과 영성의 방향을 나름대로 제시하려고 한다.




1. 디트리히 본회퍼와 민중신학 -고난의 경험에 대한 집단적 기억의 한 토막


먼저 본회퍼와 민중신학자들의 만남에 대한 기억을 함께 더듬어 나가자.
본회퍼와 민중신학자들의 만남의 장소, 정확히 말하면 민중신학자들이 본회퍼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신학을 만난 곳은 연구실이나 강의실이 아니라 감옥이었다. 신학함의 장소(locus)는 그 신학의 내용을 결정한다. 여기서 ‘장소’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실존적인 삶의 자리이다. ‘실존적’이란, 개인의 정체성과 의미성의 맥락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학문하는 사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 문화적인 삶과 그것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의식의 지평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 함’은 주지적,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적인 콘텍스트, 즉 사회적 자리에서 행해지는 실천적이고 집단적 의식의 행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장소는 곧 관점을 만들어 내고 그 관점 혹은 마르크스적 의미에서 계급적 이해에 따라 신학의 내용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신학은 단순히 세계를 관조하거나 단지 주어진 이론에 따라 해석하는 것에 그칠 수 없다. 그것은 곧 해방신학자들의 관점처럼 ‘선택’(Option)과 ‘편들기’(Parteinahme)를 통해 프락시스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천의 경험을 숙고함으로써 다시 이론을 형성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이 계속해서 일어난다고 하는 점이다. 본회퍼 신학과 민중신학은 바로 이러한 해석학적 고리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 양자는 파쇼적 독재정치와 그로 인해 생겨난 사회적 고난의 자리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고난의 경험을 통해 그들은 신학을 현실과 무관한 추상적인 이론체계로 만들지 않고 현실에 대한 바른 인식과 바른 행동(Orthopraxis)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공통점은 바로 그들의 신학함의 장소로부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본회퍼와 민중 신학자들은 약자의 ‘선택’과 ‘편들기’라는 정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 속에서 그리고 그로 인한 고난의 현장에서 그들의 신학을 전개해 나간 점에서 일치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70년대 군사독재 시절에 본회퍼의 삶과 신학 -특히 테겔 군사형무소에서 쓴 옥중서신은 감옥에 있던 수많은 학생들,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 간 것이다. 본회퍼와 한국교회의 만남은 바로 고난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그 역사적 실례를 들어본다.


1976년 3월 1일 명동에서 ‘민주 구국선언’에 서명한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이하 한신대) 그리고 서남동(연세대)은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던져졌다. 그들은 이미 한 해 전에 반정부적 활동으로 강단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안병무는 1988년 7월 20일 한 독일 선교신학자와의 인터뷰에서 바로 이 감옥에서의 경험, 정치범들과 다른 죄수들과 고난을 함께 한 자리에서 그의 신학적 실존이 어떻게 변하였는가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나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나는 세계를 그들의 눈으로 보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교회와 기독교가 어떻게 보이는가를 그들의 관점에서 물었습니다. 지적인 사색과 철학과 신학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삶의 중심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 … 그리고 나는 성서를 다시 읽었습니다. … 나의 시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이제는 그 반대로 매우 의미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새로운 탄생이었습니다. 나는 그때의 경험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V. Kuster, Theologie im Kontext. Zugleich ein Versuch uber die Minjung-Theologie, Nettetal 1995, s.123)


안병무의 이러한 시각의 전환은 본회퍼가 1942년 쓴 ‘10년 후’(Nach zehn Jahren)라는 짧은 에세이에 담긴 생각과 일치하고 있다.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가 세계사의 큰 사건들을 한번 아래로부터, 밀려나고, 혐의를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무력하며, 억눌리며, 업신여김을 당한 자들, 즉 고난 받는 자들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배운 것은 비교할 수 없이 가치 있는 경험으로 남는다.(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Neuausgabe, hrsg. v. E. Bethge, 3. Aufl. Munchen 1985 (= 이하 WEN) 27.)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학함의 자리(locus)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바로 고난당하는 자들의 관점에서 역사와 교회를 새롭게 보는 것을 배우고 억눌린 민중들과 박해받는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신학을 새롭게 전개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그들의 새로운 신학적 인식의 장소는 바로 고난의 현장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회퍼와 안병무의 신학을 공히 ‘경험의 신학’, 달리 표현한다면, ‘고난의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본회퍼와 민중신학자들이 공유하는 고난의 경험은 기존의 신 개념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 이해를 가져왔다. 먼저 본회퍼는 옥중에서 하나님의 초월과 전능의 의미를 혁명적인 방법으로 새롭게 해석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초월을 피안의 초월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삶의 한가운데 있는 초월을 말하였고, 하나님의 전능을 그의 권력과 지배로 보지 않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배척 받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는 무기력함과 약함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랑의 전능으로 이해하였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 이해에서 본회퍼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WEN 394)라는 수수께끼 같은 신학적 진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유사하게 민중신학자 안병무 역시 초월적이고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 민중 가운데 고난당하고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였다. 그 결과 고난 받는 민중 안에 있는 예수의 현존을 말하게 되고, 더 나아가 “민중예수”를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안병무는 그의 ‘민중 예수론’을 통해 본회퍼를 해석하기를, 본회퍼는 감옥에서 민중을 발견하고 신학자로서 그의 ‘민중 발견’을 신학적으로 정초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본회퍼를 인용해서 “민중”을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 정의한다.(안병무,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 서울: 한길사 1987, 56)


그러나 이와 같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신학에는 깊은 차이가 내포되어 있다. 본회퍼에게 민중의 고난은 하나님의 메시아적 고난과는 질적인 차이를 가진 것이다. 민중의 고난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메시아적 고난에 이끌려 들어가는 것”(WEN 395)으로서 ‘연대적 고난’을 의미는 것이지, 그 자체로 예수의 고난과 동치 될 수 없다. 반면에 안병무는 민중의 고난 속에서 예수의 고난을 발견하고, 그들을 동일한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민중 가운데 그리고 민중과 함께, 곧 민중으로서 역시 교회 밖에도 현존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평가를 유보하고 분석해 보면, 양자의 차이가 단지 악센트를 하나님의 고난에 두느냐, 아니면 민중의 고난에 두느냐 하는데서 온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결국 두 신학의 만남은 고난의 경험을 통해 사회적 현실 속에서 예수의 현존을 인지하고 이를 신학적으로 해석한 민중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결단을 통해 풍부하고 깊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결국 군사독재에 대해 저항하면서 민중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던 한국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나치정권 하의 고백교회와 비교하며 본회퍼의 삶과 신학에 커다란 감화를 받았다. 그들은 특히 본회퍼가 감옥에서 발전시킨 신학적 단상과 그의 전기적인 삶의 통일성을 주목하고 한국교회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자극제로 삼았던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한국교회가 본회퍼 신학을 만난 장소는 기성교회의 강단이나 상아탑의 교단이 아니라, 진리와 정의를 위한 투쟁과 고난의 현장이었다는 것이다. 본회퍼가 이미 1932년에 던졌던 중요한 그리스도론적 질문,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는 숨어계신 신에 대한 신학적 사변이 아니라, 고난의 현장에서 절박한 투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1970-80년대 격동의 한국사회에서 그리스도는 고난 받는 민중과 함께 하는 고난당하는 하나님이었다.




2. 하나님의 고난과 뒤따름 -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함께”


본회퍼는‘고난 받는 하나님’에 대한 성찰을 통해 분명히 루터가 1518년 ‘하이델베르그 논쟁’에서 제시했던 영광의 신학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 속에서 신인식의 길을 찾았던 십자가신학의 전통에 서 있다. 그러나 본회퍼의 하나님 이해의 궁극적 관심은 단지 교리적인 신인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종교개혁 신학의 그것과 구별된다. 본회퍼의 하나님 이해는 세계현실(Weltwirklichkeit)에서 경험하는 적그리스도적인 독일국가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저항과 그로 인한 개인의 고난과 유대인들의 집단적 고난에 대한 숙고에서 출발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새로운 윤리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신학함의 자리(locus)는 신학의 내용을 결정한다. 본회퍼가 신학을 한 장소는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자리가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에서 악마의 화신과 더불어 치열하게 싸웠던 저항(Widerstand)과 또 그로인한 고난을 받아들이는 복종(Ergebung)의 자리였다.


1944년 7월 마지막 희망이었던 히틀러 암살 계획마저 실패하게 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테겔의 군사형무소에서 본회퍼는 “하나님은 누구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확신은 인간에게 삶을 허락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적 작업가설과 같은 하나님 없이 살도록 요구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곧 우리를 버리신 분이다(막 15:34)!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산다.”(WEN 394) 이 역설적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바로 본회퍼의 하나님 이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역설은 종교적 신과 비종교적 신이라는 양신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전능과 무력, 즉 힘(Macht)에 대한 해석학적 성찰에서 풀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그의 강함의 사상에서 파악하는 것과 그의 약함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다. 무력함(Ohnmacht)의 관점에서 파악한 하나님 이해는 성서의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러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인 반면, 하나님의 전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결국 인간의 종교적 욕구와 권력의 투사일 뿐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그가 감옥에서 남긴 <그리스도인과 이교도>라는 시 속에서 잘 드러난다.


사람들은 그들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간다.
그들은 도움을 간청하고 행복과 빵을 구하고,
질병,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구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그리스도인과 이교도들 모두가 하는 일이다.사람들은 자신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간다.
그리고 가난하고 모욕당하며, 집과 빵도 가지지 못한 그를 발견하고,
죄와 약함과 죽음에 삼킨 그를 바라본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 곁에 서 있다.(WEN 382)


본회퍼에게 성서의 하나님은 그의 강함이 아니라 그의 약함으로, 그의 전능이 아니라 그의 고난의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돕는 분이다.(WEN 394) 결국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라는 말은 인간과 함께 고난 받는 하나님의 해방하는 능력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WEN 396)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 ‘없이’라는 말은 ‘권력에의 의지’의 종교적 투사로서의 하나님 이해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이 ‘없이’(Ohne)는 단순한 종교적 성향의 단념이나 포기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sicut Deus) 왜곡된 자유의 전횡과 권력의 무제약적인 욕망을 비판하는 사회비판적인 명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을 그의 피조물 가운데 선택하여 세계를 잘 가꾸고 지키라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위임에 응답하는 책임으로의 부름이고 뒤따름의 요구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탄생 100주년을 맞으며 “고난”을 중심으로 그의 신학사상과 민중신학의 친화성을 찾아보았다. 그가 처절하게 싸웠던 이유는 신학의 진리논쟁이 아니었다.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본회퍼 역시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라!”는 절규 속에 교회의 참된 모습을 회복하려고 싸웠다. 히틀러와 그 꼭두각시에 의해 유린된 거짓 예언자나 썩어가는 신전에서 향을 피우는 거짓 제사장이 아니라,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어야한다는 자각이었다. 그리고 그 참된 교회의 표지는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세계 안에서 책임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교회는 두 가지의 세계 내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모든 자연생명들을 보호하고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며, 둘째는 왜곡된 사회적 관계를 치유하여 인간의 삶 속에 정의를 세우고 ‘타인에 대한 존중’을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할 책임이다. 이러한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다른 피조물과 타인에 대해 무제약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소위 ‘전능과 지배의 신화’를 깨뜨리고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인 피조성과 공동피조성 및 동료인간성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구원 이기주의와 세속주의적 물질관, 물량주의적 성공주의와 대교회의 승리주의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겸허와 자기제한의 에토스를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곧 새로운 윤리의 요청일 뿐만 아니라 신앙적, 영적으로 요청되어지는 영성의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본회퍼와 한국교회의 대화와 만남을 모색하였다. 특히 본회퍼가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문명 속에서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신앙적 대결을 통해 남긴 신학적 편린들의 의미를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살펴보았다. 본회퍼의 경험의 특수성에서 도출된 신학은 한국교회의 역사적 경험의 물줄기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다. 특히 독재정치와 그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교회의 정치적 투쟁과 신학적 반성은 본회퍼와 민중신학자 사이에 ‘고난의 신학’이라는 공통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두 신학은 단순히 정치신학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발견하고 약자를 편드는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고 이에 상응하는 책임적인 삶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실천적 차원에서 커다란 동질성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회퍼를 통해 한국교회가 배워야하는 것은 현실을 보는 관점과 신학함의 자리의 중요성이다. ‘아래로부터의 관점’은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자리를 낮은 곳에 가지도록 하며, 바로 이러한 실천의 장에서 신학은 현실과 진지하게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본회퍼는 삶과 실천으로 말해 주고 있다.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의 개인적이며 사적인 강조가 생활신앙의 공동체적인 사회적 영성의 회복으로 바뀔 때에 이러한 전환이 가능하리라 본다. 본회퍼는 그의 단편적 삶 속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지는 않았다. 본회퍼는 39세의 짧은 생애에 비해 8000페이지에 달하는 많은 분량의 원고를 남겼지만, 체계적인 조직신학이나 윤리학의 대계를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그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우리 한국의 교회에게 말하는 것은 “기도와 사람들 사이의 정의의 실천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라(!)”(WEN 328)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서 현실과 신앙과 삶의 통일 속에서 “눈을 뜨고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본회퍼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신앙과 정신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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