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 신학이 지닌 매혹적 신비
Orientierung 2006년 1-2월호
위르겐 몰트만, 손규태 옮김
개인적 평가
디트리히 본회퍼는 20세기 독일출신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분이다. 폴란드에서 한국에 이르기까지 본회퍼 학회들이 조직되어 있고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에는 본회퍼 강좌가 설립되어 있으며 그의 글들은 독일에서 거듭 새롭게 출간되고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그는 오늘날도 시공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본회퍼의 이름이 주는 이러한 경이적 기적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의 초기 신학 작품들을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Kirchlciche Dogmatik)이나 불트만의 비신화화 프로그램과 비교해보면 비교할만한 것이 별로 없다. 1927년의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나 1929년의 『행위와 존재』(Akt und Sein)와 같은 학문적 연구서들과 1931-1932년의 베를린대학에서의 첫 신학 강의들에서 우리는 별로 중요한 내용들을 찾을 수 없어서 오늘날 우리가 그것들을 꼭 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의 신학적 발전에서 그것들이 중요하다면 특히 대리(Stellvertretung)라는 개념에서 그러하며 그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우리가 본회퍼로부터 이 연구서들만을 고려했다면 우리는 벌써 그를 잊어버렸을 것이다.1)
본회퍼는 1927년 베를린대학에서 라인홀드 세베르히(Reinhold Seeberg) 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회의 개념과 관련된 사회학은 오래전에 잊혀졌다. 그 논문의 부제인 “교회의 사회학에 대한 교의학적 연구”는 오늘날 누구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개념이다. “교회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는 주제는 매우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다. 본회퍼는 당시 매우 젊었고, 그는 약관의 21세에 박사가 되었다.
1928년 그가 스페인의 바셀로나에서 준목직을 마치고 나서 1929년 교수자격논문 “행위와 존재”를 작성했는데 그는 그것을 매우 아니 너무나 서둘러 작성했다. 여기서는 신학과 철학의 관계가 다루어졌다. 본회퍼는 독일의 관념론철학을 “자기폐쇄성의 원죄”로서 저주했다. 여기에 대해서 베트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자들은 본회퍼의 ‘잘 정리된 스타일’을 다시는 파악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2) 이 문서는 그가 아이러니하게 고백하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보니 그 자신에게도 “꽤나 동의를 얻기 힘든” 것이었다.3) 행위철학과 존재철학 사이에서 신학의 바른 장소가 어디냐 하는 문제는 매우 시대 제약적이어서 오늘날에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본회퍼는 23세에 교수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 젊었다.
20년대 말 독일의 문화개신교주의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교회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본회퍼는 이 신학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하르낙(Adolf von Harnack)과 트릴취(Ernst Troeltsch)에게서 사사를 받았으나, 그 후 바르트에게서 자극받아 신학에서 차지하는 새로운 교회성에 몰두한다. 이렇게 젊은 사강사(Dozent) 본회퍼는 자기의 학문적 경력을 교회와 더불어 쌓아간다. 그에게서 교회야말로 “신학과 윤리학의 원천”이었다. 바르트처럼 그는 현재적 그리스도와 더불어 “위로부터 수직으로” 시작하며, 역사적 예수와 더불어 밑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젊은 본회퍼를 바르트 자신보다 더 바르트적이라고 생각했다. 1933년 그의 마지막 강의 “창조와 타락”은 오직 교회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잘 이해할 수 있었다.4) 그렇지만 그의 주석학적 관찰들과 신학적 결론들은 칼 바르트의 창조론에 다시 등장하며 거기에 영향을 주었다.
1931년 본회퍼가 목사로 안수 받은 것은 베를린 대학에 교수자격(venia legendi)을 얻은 것만큼이나 중요했다. 그의 전기 작가인 베트게는 이것을 “신학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의 전환”이라고 묘사한다.5) 이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린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회는 당시 몇 년 동안 본회퍼에게는 교회론 즉 학문적 대상으로부터 그가 참여적 그리스도인으로 활동하는 장이 된 것이다. 그를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직으로 부른 것은 산상설교였다. 그는 교육담당 준목이 되어 베를린의 빈민지역에서 견신례학습을 지도했고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청소년 간사로서 국제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 밖에 모든 개인적 계획들은 정치적인 것들과 얽혀 있었다. 1933년 히틀러의 정권장악, 나치의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에 대항한 고백교회의 투쟁, 유대인 박해, 군비증강 등은 본회퍼에게는 신학을 학문적이고 교회적 사안으로부터 개인적 정치적 필연성으로 만들어버렸다. 1933년부터 그의 신학과 삶은 “실천적 신학”으로 하나가 된다. 1933년 그는 학문적 경력 쌓기를 중단했다. 왜냐하면 대학 내의 신학부들도 나치당에 의해서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본회퍼는 신학적으로 인식한 바를 삶으로 실천하기 시작하고 그의 삶에서 결단해야 했던 것을 신학적으로 검증하기 시작했다. 그의 개인적 실존은 신학적 실존이 되고 그의 신학은 점차 하나의 정치적 신학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개인적 삶이 정치적으로 도전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문화개신교주의의 국가신학자(Staatstheologe)가 아니었다. 그는 교회적 신학을 강조하는 선택을 했고 그것은 독일에서 교회투쟁에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점차 더 예언자적 신학의 성격을 띠게 되었는데 그것은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종교적 영역으로 폐쇄된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디트리히 본회퍼의 활동에서 놀라운 비밀을 풀 열쇠를 얻게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처럼 그것은 플뢰센베르그에 있는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1945년 4월 9일 그를 순교하게 만든 진정한 삶으로 실천한 신학(authentisch gelebte Theologie)이었다. 이 신학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들 아시아의 한국과 남미의 니카라과에서 믿음의 확신을 주었다.
1933년 이후 우리는 어디에서 본회퍼를 발견하게 되는가? 이것은 그의 삶에서 하나의 전기적(傳記的) 물음일 뿐만 아니라 “신학의 장소”(;ocus thologicus)에 대한 물음이다. 신학적 결단들에서 장소와 시간은 본회퍼에게는 점점 더 중요해졌다. 1933년 이후 본회퍼에게는 흔히 신학부에서 학문적 “상아탑”으로 꿈꾸었던 무시간적, 무장소적 신학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본회퍼를 만나게 되는 일련의 장소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933-35년 런던의 Forest Hill에 있는 독일인 교회 목사, 1835-37년 독일 Zingst와 핑겐발데에 세워진 고백교회의 목사훈련소 소장-그곳은 후에 불법단체로 폐쇄됨, 1938-40 고백교회를 위해 폼메른 지방 Gutshausern에 만들어진 비밀리에 운영되던 준목 훈련소에서 활동, 1939년 영국과 미국여행, 1939년 6월 전쟁준비중인 독일로 돌아옴, 1940-43년 군사방첩대 근무하면서 저항운동에 가담, 1943-1944년 테겔 형무소 수감, 1944-45년 제국안전성의 감옥에 수감, 1945년 4월 집단수용소 플뢰센베르그에서 처형당함.
우리는 그의 문서들을 위에서 언급한 장소들에다 배열하면 1935년의 『그리스도의 제자직』(나를 따르라)과 1935년의 『신도의 공동생활』은 목사후보생 수련소에서 씌어진 것으로 교회의 신학이며 후에 윤리학으로 출간된 단면들은 저항운동에 기여한 것으로 정치신학이며 『저항과 복종』(옥중서간)은 1943년 이후의 옥중신학이다.
본회퍼가 처형될 때 나이는 39세였다. 1933년부터 1943년 감옥에 들어가기까지 그는 꼭 10년 동안 독일이 어렵고 위험한 시절에 자기 신학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칼 바르트나 불트만이 활동했던 시간에 비하면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두개의 문서들, 『윤리학』과 편지의 모음인 『저항과 복종』은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친구인 에버하르트 베트게에 의해서 출간되었다. 우리는 본회퍼의 활동을 전 세계적으로 심도 있게 전달한 그의 노력에 감사한다. 우리는 이 책들을 아직 알지 못했던 전후의 몇 년간을 회상해 본다. 1950년까지 본회퍼는 단지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1945년 4월 9일 처형된 베를린의 고백교회의 신학자로 알려져 왔다.
『그리스도의 제자직』(나를 따르라)은 전쟁포로 후원회에 의해서 1946년에 인쇄되어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받아서 읽게 되었다. 거기에서 발견한 “값진 은혜”라는 개념은 특히 부자유한 수감자로 있던 나에겐 오히려 달성하기 어려운 율법으로 받아들여졌다. 『신도의 공동생활』은 나에게는 너무나 협소했다. 나는 군대에서 공동생활, 참호와 감옥생활의 강요에 진저리가 났었고 그래서 오히려 혼자서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추구했었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지향적인 본회퍼의 문서들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책들은 오늘날까지도 가톨릭의 수도원들이나 개신교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내가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인 1949년 『윤리학』과 1951년 『저항과 복종』이 출간되는데 그것들은 폭탄과 같이 나를 삼켜버렸다.6)
나는 매료되었고 황홀했고 해방되었다. 나는 그 책들을 저녁에 성무일과처럼 읽어서 이러한 새로운 신학적 초고들을 모두 단번에 습득하려 했다. 그것들은 1943년 4월 5일부터 1944년 10월 8일까지의 “감옥으로부터의 편지들과 비망록들”이었다. 그는 믿을만한 친구에게 자기를 움직이게 한 문제들과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그것들을 읽는 자는 그의 신학의 발전과정에 참여하게 되며 그것들의 미완의 생각들을 통해서 자신의 사고발전에 자극을 얻게 된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서 이미 모든 것이 완성을 보았고 8000쪽에 달하는 책에서 긴 호흡을 거쳐 아름답게 구성되었다. 불트만에게 그것은 항상 실존론적 해석이라는 동일한 방법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본회퍼는 이 편지들의 독자들을 하나의 열린 신학적 사고과정으로 이끌어갔고 새로운 생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했다. 이것은 오늘날에서만 아니라 신학에서 독특한 것이며 디트리히 본회퍼의 위대한 매력과 영향을 산출해 냈다. 그는 우리에게 어떤 교리체계나 교의학도 아니고 다만 삶의 신학과 과정 가운데 있는 신학을 남겼다. 나는 이제 당시 1951년 나와 나의 세대에게 중요했던 몇 가지 생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참된 세계성 - 땅에 대한 성실성- 성숙한 세계- “오직 고난 받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 등이다.
기독교 신앙의 참된 세계성
비좁은 감방에서 본회퍼의 사상은 이전보다 훨씬 폭이 넓어졌다. 그의 시선은 교회로부터 세상을 향했다. 그는 세속적 세계의 자유, 세상적 삶의 존엄성, 구약성서의 독특한 메시지, 땅의 아름다움과 차안(此岸)적 삶의 기쁨을 발견했다.7)
그는 신앙을 “전부를 건 행위, 생명을 건 행위로 여겼다. 예수는 새로운 종교로 부르지 않고 삶으로 부른다.”(246쪽) 그는 갑자기 “자연적 경건”(naturliche Frommigkeit)과 “무의식적 기독교”(unbewußte Christentum)에 관심을 갖는데 그것도 일반적으로가 아니라 저 특별히 교회적 기독교가 아니라 자신의 교양 있는 부르주와적 가정에서 실천하던 삶의 기독교에 관심을 갖는다. “삶의 전적 차안성”에서 비로소 그는 “믿는 것을 배우려고” 했다.(249쪽) 그가 생각한 것은 “계몽된 자들… 그리고 편안히 사는 자들의 평면적이고 밋밋한 차안성이 아니라, 철저한 훈련을 거친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인식이 항상 현재하는 깊은 차안성”이다.(248쪽) 그는 감방 안에서 세상적인 것을 희생한 종교적인 것, 차안성을 희생시킨 피안성, 생동성을 희생시킨 영성에 대항해서 투쟁했다. 그에게 믿는다는 것은 죽기까지 삶을 긍정하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고, 하나님이 세상에서 겪으신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계 현실성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성을 인식했고8) 두개의 영역들이나 신과 세계의 대립들에서 진행된 전통적 신학의 사고를 극복한다. 그는 완전한 “삶의 다성음”에서 즉 삶의 아름다움, 즐거움과 고통에서 믿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는 즐겨 악성 바하의 칸타타에서 나오는 대위법의 정선율(cantus firmus, 定旋律)과 음들의 다성음(polyphonie)의 개념들을 사용한다.(195쪽) 그는 구약성서의 사랑의 아가를 사랑했고 모든 인간의 열정들을 기독교적으로 억제하고 조절하는 것을 미워했다. 그는 현실적 삶을 구성하고 있는 쾌락과 저주의 강력한 대립들 속으로 파고들고 음악의 대위법(Kontrapunkt)을 그의 새로운 신학적 드라마에 도입한다.(192쪽면) 믿음이 정선율이라면 대위법들도 삶의 다성음에 첨가된다. “우리가 이러한 다성음 가운데 있게 되면 우리는 이 삶을 비로소 전적으로 동시에 알게 되며 정선율이 계속되는 한 어떤 것도 완전히 구원받지 못할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193쪽) “하나님은 삶의 한 가운데서 피안적이다.”(182쪽) 따라서 신앙은 삶의 한 가운데서 파악되어야 하며, 교회도 마을 한 가운데 존재해야 하고 삶의 변두리에 있는 공동묘지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
본회퍼는 바르트와 다른 전체 기독교적 전통이 구약성서를 신약성서로부터 해석하는 것과는 반대로 신약성서를 구약성서로부터 읽기 시작한다.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신약성서보다는 구약성서를 훨씬 더 많이 읽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때만 우리는 한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도 좋다. 우리가 삶과 땅을 그렇게 사랑해서 그와 더불어 모든 것을 잃고 마지막이 된 것 같을 때만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새로운 세계를 믿어도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에 적용시킬 때만 우리는 한번이라도 은총에 대해서 말해도 된다.”9) “우리는 궁극 이전의 것 안에 살며 궁극적인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인 말씀을 궁극 이전의 말씀 이전에 말해서는 안 된다.(113쪽)
우리가 1951년 이러한 생각을 전쟁을 치르고 난 독일에서 읽었을 때 우리는 여러 면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칼 바르트와 고백교회의 신학이 우리로 하여금 1934년의 바르멘 선언을 가슴에 새기게 했다. 즉 그리스도는 성서의 중심, 교회의 중심, 믿음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잘못되었으나 너희는 믿음 가운데 태어났다는 것이다. 실상 이것은 타당했으나 지평은 어디에 있으며 중심과 주변은 어디란 말인가? 그렇지만 모든 중심은 하나의 원을 위한 중심이며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할 때 중심에는 아무런 관계들도 가지지 않는 점이 남게 되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수직적이고 자기 자신에만 몰두하게 된다. 나치독재에 항거하는데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매우 타당했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서 역사에서 새로운 가능성들이 열렸는데 그것들을 우리는 수직적 신앙만을 가지고는 감당할 수 없었다. 본회퍼는 우리를 수직적으로 되어버린 교회성으로부터 참된 세상성으로, 신앙에서 삶으로 몰아넣었다.10) 다성음과 대위법이 없는 정선율은 음악을 표현하는데서 쉽게 지루해진다.
전후 시기는 독일에서는 새로운 시작의 시기가 아니라 복고의 시기였다. 아데나워 수상은 국가와 사회에서 낡은 것들을 복구했고(1945년 빨리 “말을 갈아탄” 옛 나치들을 복권시켰고) 교회는 과거의 낡은 특권적 지위를 되찾고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의 무신론적 이데올로기 배후에 새로운 “성숙한 세계”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 성숙한 세계는 더 이상 종교적으로 미성숙 상태에 있지 않았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우리들 젊은 신학자들에게는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기독교와 새로운 삶의 예언자가 되었다. 그는 불안과 정체된 세계에다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땅에 대한 성실성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간청한다. 땅에 성실하게 머물고 세상 저편의 희망들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음모자들, 삶의 멸시자들이다. 한때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가 가장 큰 죄였다. 그러나 지금은 땅에 대한 범죄자가 가장 끔찍한 자다”라고 본회퍼는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인용하여 말한다. 그것은 레온하르트 라가즈와 같은 종교사회주의자들과 많은 신학자들이 1920년대 하늘을 향한 기독교적 희망을 새롭게 방향잡고 피안적 희망을 하나님의 정의가 깃들인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희망과 새로운 땅으로 넘어가자는 구호였다. 이것이 “희망의 신학”을 향한 길이었다.
젊은 본회퍼도 여기에 속한다. 1932년 그는 열정을 가지고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간구에 관한 놀라운 강연을 하는데 거기에서 “땅과 하나님을 같이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11) 우리는 “저 세상 사람들”이 아니며 기독교는 “저 세상 사람들의 종교가 아니며” 그리스도는 이러한 약함을 원치 않고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그는 인간을 종교적 세계도피로 이끌지 않고 성실한 아들인 인간에게 땅을 되돌려 주신다. (6쪽)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를 있는 그대로의 땅의 주님으로서 사랑하며 땅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땅으로서 그것을 사랑한다….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로서 사랑한다.”(8쪽)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땅과 세계의 자녀들의 공동체를 강하게 요구한다. 그것은 땅과 고통과 굶주림과 죽음에 대한 성실성을 요구한다.”(9쪽)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서 부활의 나라이다.”(12쪽)
본회퍼는 1943년 감옥에서 땅에 관한 성실성에 대한 이전의 통찰로 돌아온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실성에 의거해서 그는 지상에서의 악에 대한 저항으로 나갔고 범죄자로서 감옥에 들어간다. 땅에 대한 이러한 성실성은 그리스도신앙의 “참된 세계현실성”이라는 그의 새로운 관점을 위한 신학적 근거였고, 이 땅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으며 이 땅위에서 그의 부활사건이 일어났고 이 땅이 장차 하나님의 정의의 장소가 된다.
땅에 대한 본회퍼의 성실성은 두 가지 관점에서 혁명적이다. 첫째, 전통적 기독교의 희망은 하나의 구속의 갈망이며 땅이 아니라 하늘을 향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사랑의 하나님 나를 경건하게 하사 하늘에 이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죽은 다음 그리스도교식의 부고에는 경건한 자들이 하늘에 갔다고 쓰고 있다. 거기에는 엄청난 세계부정이 자리하고 있다. 하늘이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라면 이 세상은 우리에게는 무의미하다. “손님들이 아름다운 별”(Helmut Thiliecke)이나 여행자가 하나의 다른 세계의 영원성을 향한 도상에 있듯이 우리는 단지 잠시만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머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땅을 착취하고 폐허를 남긴다. 종교적 세계부정의 다양한 형식들이 오늘날 환경파괴와 지구의 생태학적 파멸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이러한 종교적 자세들 때문에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고향을 느끼지 못하고 우리의 고향으로 존경하지 못하며 - 우리가 비록 땅의 피조물이지만 -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지구”(Sir 40:1)를 파괴한다. 반역으로부터 땅에 대한 성실성으로의 전환은 사실상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단순한 간구 안에 들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본회퍼의 땅의 신앙(Erde-Frommigkeit)을 필요로 한다.
둘째, 하나의 새로운 생태학적 신학이 종교적이고 실천적 세계부정과 대항해야 한다. 땅은 하나님의 첫 피조물이며 우리 인간은 땅에서 취해졌으며 현재나 미래에도 천사들이 하늘에 속한 것 같이 우리는 이 땅에 속한다. 땅의 구원, 하나님의 의가 거하는 저 새로운 땅 없이는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다.(벧후 3:13) 우리는 오늘날 세계정치를 만들지만 우리는 지구정치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세계경제를 만들지만 우리는 지구경제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세계종교들을 대화로 이끌어가나 우리는 지구의 종교를 필요로 한다.12) 우리는 “지구화 하고” 인터넷을 하며 사이버 월드에 살지만 오늘날의 지구는 이러한 신나는 지구인 동시에 깨어지기 쉬운 지구다. 본회퍼는 생태학적 위기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했으나 그의 땅에 대한 성실성의 신학은 훌륭한 생태학적 신학이다. 생태학은 땅에 대한 송영이다.
성숙된 세계
“계몽주의는 스스로 잘못된 미성숙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다. 미성숙은 다른 사람의 지시 없이 자신의 오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함이다.... 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임마누엘 칸트는 1783년 “계몽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본회퍼는 그의 마지막 편지들에서 “성숙된 세계”와 “세계의 자율성”을 말할 때 이 계몽주의의 개념을 채택한다. 본회퍼는 근대에서 거대한 문화적 발전을 보았다. 이 근대는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etsi Deus non daretur=239-247쪽) 우리가 살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성숙한 세계를 낳았다. 도덕적, 정치적 자연과학적 “작업가설”로서의 하나님은 사라졌다는 것과 이러한 “작업가설”을 그만두고 “하나님 없이 삶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지성적 성실성”에 속한다는 것이다.(241쪽)
그러면 우리는 성숙한 세계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218쪽) 본회퍼는 어떤 변증도 거부하고 자유주의 신학이 시도한 세계에 적응하는 것도 유보하며 칼 바르트의 “계시실증주의”에 기대지도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현재 세계에 대한 회의로 끌어들이려는 경건주의적 시도도 거부하며 신앙을 질병이나 죽음과 같은 삶의 한계상황에서 권하려는 시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그의 삶의 한가운데서 만나준다.”(227쪽) 우리가 여기서 출발할 때 우리는 세계의 성숙성을 인정해야 하며, 현대의 인간이 자신의 가장 강한 위치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236쪽) 그러나 그것은 무종교적으로 되어버린 세계에서는 “성서적 개념들의 무종교적 해석”을 요구한다.(239쪽) 본회퍼는 이러한 해석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매우 변증법적 도식을 남겨주었는데 많은 그의 제자들이 그것을 연구했다.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이러한 인식을 갖도록 강요한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삶을 처리할 그런 사람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해 주었다.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가신 하나님이다.(막 15:34)….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242쪽) 우리가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여기서 본회퍼가 본 것은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현대의 성숙한 세계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다. 그는 현대 세계에서 하나님을 내쫓는 과정을 새로운 골고다로 해석한다. 아니 헤겔이 성금요일을 사변적으로 해석하듯이 “하나님은 십자가상에서 자기를 세상으로부터 몰아내게 하고, 세상에서 하나님은 무력하고 약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를 돕는다.”13) “마태복음 8장 17절에서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도는 그의 전능함으로 돕지 않고 그의 약함, 그의 고난을 통해서 돕는다…. 여기서 ‘세상적 해석’이 적용되게 된다.”(242쪽) 이것은 하나의 매우 담대하고 개성적인 해석이나 그리스도의 세계로서 현대 세계를 신학적으로 매우 독특하게 해석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이러한 분석이 맞는지를 우선 검토해보자.
현대의 세계에서도 성숙한 인간들은 드물다. 나치시대나 공산주의 지배 하에서 당 자체의 지도 없이 자기의 오성을 사용할 기회는 없었다. 오히려 인간들은 극단적으로 미성숙하게 행동했고 단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주어진 언어규정들만을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다. 그것은 오늘날 정치적 정화성(political correctness, 차별 없는 표현으로 번역됨. 언어나 용어로 성별, 인종, 특정 문화집단을 차별하거나 소외시키는 것을 막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용어)을 의미한다.
성숙한 세계’로서 현대의 의미는 인간의 개인적 발달단계들을 인류의 발달단계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18세면 인간은 성인이 된다. 이전에는 그 나이에 사람은 후견인이 필요한 미성숙한 어린이였다. 이러한 전환은 현대의 진보신앙에 속한다. 이러한 진보신앙은 과거를 자신의 성숙의 전단계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스 로마시대나 중세기의 우리의 선조들은 미성숙하거나 우리들보다 덜 성숙하지 않았다.
19세기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에 의한 여러 측면에서 종교비판들이 있고난 다음 우리는 21세기 초에 와서 “종교 없는 시대에”에 들어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종교적 테러에 의해서 위협당하거나 종교적 구원갈망에 답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전에 모두가 다시 종교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기독교가 존재하는가 하면 비종교적 기독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종교를 세상에 가져오지 않고 새로운 삶을 가져왔다”는 본회퍼의 글은 이 두개의 기독교에서 타당하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제시한 이러한 통전적이고 실천적 삶, 성화되고 의인화된 삶이다. 말하자면 지상에서의 삶의 충만함과 천상에서의 영원히 생동적인 삶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삶의 완전한 차안성과 이성의 자유로운 성숙성으로 이끌어간다. 본회퍼가 현대 인간들에게 인식하고 놀라게 하기 위해서 제시한 것은 무의식적 그리스도교의 설계, 즉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우리가 본회퍼의 이러한 논제를 철저하게 고찰해 보면 그에게서 기독교적 실존은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자율적이며 성숙해서 자유롭고 책임적인 존재방식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어떤 인간타입이 아니라 인간을 만드신다.”(244쪽)
“단지 수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
“성숙한 세계”의 의미는 “수난 당하는 하나님”이란 말과 결합되어 있다.(242, 244) 내 생각에는 19세기와 20세기의 전체 독일 신학에서 이것은 매우 독특한 생각이다. 슐라이에르마하나 칼 바르트, 칸트나 키엘케고르, 에밀 부룬너나 불트만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수난”이라는 사고는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헤겔에서 이러한 사고가 등장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 세계사의 존엄한 주체, 나의 실존의 영원한 근원 등이나, 결코 무력하고 수난당하는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의 수난 가능성과 수난불가능성에 대한 상세한 논의가 1860년 이래 영국의 신학에서 있었다.14) 본회퍼는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런던의 Forest Hill 교회의 목사로 있었다. 그는 거기에서 예를 들면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에게서 “수난당하는 하나님” 인식과 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필자가 베트게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도 정확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본회퍼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본회퍼는 “수난 당하는 하나님”, “속된 세계에서 하나님의 수난”, “세상적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수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메시아적 수난” 등을 말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들은 곤고한 처지에 있는 하나님에게 나아가,
거처도 먹을 것도 없어 가난하고 수모를 겪는 그를 본다.
죄와 약함과 죽음에 삼켜버린바 된 그를 본다.
그리스도인들은 수난 당하는 하나님 곁에 선다.(247쪽)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있을 수 없느냐?”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당신은 나를 버리시나이까?” 여기서도 본회퍼는 골고다의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수난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메시아적 수난”으로서 본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수난은 배타적으로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동시에 오늘날의 무신적 세계상황을 내포한다. 이것은 무신적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수난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수난이다. 이 시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폭행자들의 무신성에서 고통을 당하고 “거처도 먹을 것도 없이 가난하고 수모를 겪고”있는 그 세계의 희생자들의 버림받음에서 수난을 겪는다. 이 편지들이 씌어진 상황에서 보면 분명해지는 것은 본회퍼가 하나님의 이러한 수난을 차안적 삶 가운데서 “같이 겪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도 “그리스도의 수난”(pathemata tou Christou)은 철저하게 예수의 수난만이 아니었고 사도들도 거기에 참여했고 그들은 “이 시대의 수난”으로까지 받아들인다.(롬 8:18)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파괴 대량학살의 경험에서 새로운 십자가 신학이 등장한다. 일본신학자 기타모리(北森)는15) 전후 일본에서 1946년 “하나님의 고통”을 서술했다. 나 자신도 전후의 독일에서 1972년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연구했다.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했던 우리는 독일비밀경찰의 감옥에서 나온 본회퍼의 메시지에 의지하고 있다. “오직 수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해서 칼 라너(Karl Rahner)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사고까지를 지배했던 수난 불가능하고 “무감각한”(apathischen) 하나님이라는 형이상학을 거부해버렸다. 우리가 보아왔던 죄를 짓고 고통당하는 일은 신성의 깊이에까지 이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냉정하게 아무렇게나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본회퍼와 관련해서 나에게 중요한 것은 궁극적인 것이다. 즉 수난을 통해서 도우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훌륭하게 통치하는 하늘에 계신 접근 불가능한 존엄한 자가 아니 “모든 것을 돌보는 하나님”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듯이, 아버지가 아이를 안아주듯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종과같이 자기 백성을 광야를 통해서 인도하고 자유의 나라로 이끌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수난과 죄를 감당하신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 상들은 십자가에 달린 자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양들처럼 자기의 어깨에 메고 있는 선한 목자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당하시는 하나님이다”(45쪽)라고 본회퍼는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직』에서 쓰고 있다. 그리스의 전설에 나오는 거인 아틀라스가 어깨에 지구를 떠메고 있어서 그것이 심연으로 빠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하나님은 무신적이고 하나님을 떠난 세계를 인내를 가지고 “떠받들고”(tragen) 수난을 당하면서 “참으시는”(ertragen) 분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에 언제나 새로운 미래를 열어준다. 이 세계를 떠받들고 참으시는 있는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다.(롬 15:13)
1) Sanctorum Communio. Eine dogmatische Untersuchung zur Soziologie der Kirche(Theologische Bucherei, 3). Munchen 1954에서 인용; Akt und Sein. Transzentalphilosophie und Ontologie in der systematischen Theologie(Theologische Bucherei. 5). Munchen 1956 - 여기에 대해서 필자가 해석을 시도한 논문은 “디트리히 본회퍼에게서 그리스도의 통치와 사회적 현실성”(Theologische Existenz heute, N.F, 71), Munchen 1959. 영어와 한국어로 번역됨.
2) E. Bethge, Dietrich Bonhoeffer. Theologie-Christ-Zeitgenossen, Munchen, 1986, 189.
3) 위의 책 248면
4)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II/1. Zurich 1945, 218f; Dietrich Bonhoeffer, Schopfung und Fall. Theologische Auslegung von Genesis 1-3, Munchen 1933
5) Eberhard Bethge, Dietrich Bonhoeffer, (각주 2), 247.
6) Dietrich Bonhoeffer, Ethik, Zsgst.u.hrsg, von E. Bethge, Munchen 1949; ders, Widerstand und Ergebung, Briefe und Aufzeichnungen aus der Haft. Hrsg v. E. Bethge, Munchen 1951. 나는 이 책들에서 인용하고 있다.
7) 필자는 Dietrich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1951년 판에서 인용한다.
8) Dietrich Bonhoeffer, Ethik, 55.
9) 우리는 본회퍼의 삶의 변증법적 신학을 통해서 “정신현상학”에서 1807년 기술한 헤겔을 회상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파멸에서부터 간신히 보호를 받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견뎌내고 거기에서 자신을 유지해 가는 삶 그것이 정신의 삶이다. 정신은 절대적 분열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함으로써만 자기의 진리를 획득한다.”(Philosophische Bibliotheck 114), Hamburg 1952, 29030.
10) 필자는 Die Gemeinde im Horizont der Herrschaft Christi.. Neue Perspektive in der protestantischen Theologie, Neukirchen 1959에서 위 내용을 채택했다.
11) Dietrich Bonhoeffer, Dein Reich komme. Das Gebet der Gemeinde um Gottes Reich auf Erden(Furch-Bucherei, 146). Hamburg 1958. 5. 앞으로는 이 책에서 인용함.
12) 내가 말하는 “지구의 종교”는 나치의 “피와 땅의 신학”이나 새로운 이방적 자연숭배가 아니라 구약성서적으로 땅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시편들이 말하는 하늘과 땅위에서의 피조물의 찬양을 말한다. 인간들이 지구상에 나타나기 전에 창조는 창조주에게 이미 영광을 돌렸다. “땅의 종교”에서는 많은 다양하고, 지역적 자연종교들이 보편적 상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른바 “세계종교들”은 지구의 생태학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그것에 별로 적합하지 않다.
13) 이러한 형식에서 본회퍼 이전에는 오직 헤겔이 “사변적 성금요일”(spekulative Karfreitag)을 말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의 종교” 즉 절대적 자유와 절대적 수난이 “하나님은 죽었다”라는 감정 위에 세워진다. G.W.F. Hegel, Glauben und Wissen(1803), Philosophische Biblioth다, 62 b, Hamburg 1962, 124.
14) 예를 들면 J.K. Mozley, Impassibility of God. A Survey of Christian Thought. Cambridge 1926; B.R. Brasnett, The Suffering of the Impassible God. London 1928; J.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Munchen 1972, und Trinitat und Reich Gottes. Munchen 1980, Kap 1.
15) 神의 苦痛의 神學이란 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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