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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서 녹취 1

by 【고동엽】 2023. 1. 12.
오늘은 성경의 맥 마지막 시간으로 시가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모세오경, 역사서, 예언서, 복음서, 신약의 역사서인 사도행전, 바울 서신과 공동 서신을 쭉 공부했는데 마지막으로 시가서를 보겠습니다. 시가서는 욥기부터 아가까지의 다섯 개의 본문이고 주로 운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욥기를 공부하고자 하는데 욥기를 읽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질문하시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여기 기록된 모든 내용들이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인가, 아니면 신앙인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하나의 문학 작품인가 이런 질문들을 많이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이 성경은 일차적으로 역사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경은 계시의 책이라는 겁니다. 계시라는 것을 풀게 되면 그동안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뜻이 밝히 드러나는 것이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 인간은 땅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우리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질적 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만남을 갖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로 자기를 낮춰 주시던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만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로 자기를 낮추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계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먼저 하나님이 선제적으로 자기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알려주지 않는 이상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 길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제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셔야 되는 것이고 두 번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선제적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고 할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 주셔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매일 자기를 드러내 주시기는 하시는데 우리를 만나셔서 라틴어로 계속해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매일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자기를 드러내시고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알려주시기는 하십니다. 그런데 라틴어로 계속 말씀하신다고 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겁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의 뜻이 밝히 드러남,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글로, 21세기를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관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개념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알려주셔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럴 때만 계시가 성립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어떤 책인가 라고 했을 때 성경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뭐냐면 성경은 계시의 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는 계시의 책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밝히 알려주는 계시의 책이라는 겁니다. 계시라고 하는 것은 하나로 획일화 되지 않고 굉장히 다양한 도구와 수단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알려주실 때 출애굽 같은 사건으로 자기를 나타내 주시기도 하시고 홍해 도하 같은 사건으로 자기를 나타내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십계명과 율법 같은 율법의 조항으로 자기를 나타내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시편 같은 찬양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도 하시고 때로는 예언자의 선포 같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도 하시고 또는 신약에 나오는 것처럼 다양한 편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기도 하십니다. 그것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문학 작품입니다. 우리가 문학이라고 하게 되면 허구, 가짜 이런 식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데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 문학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교훈이 있는 겁니다. 이 교훈이 중요한 겁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사건이어야만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죠. 그것이 실제 있었던 사건이건 아니면 어떤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이건 중요한 것은 뭐냐면 실제 있었던 사건인가 아니면 만들어진 이야기인가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중요한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건이 실제 있었던 이야기인가 아니면 어떤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인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여전히 흑암의 권세 가운데 있는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돌아오기를 우리 하나님이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지 그리고 돌아온 자들에 대해서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두 팔 벌려 환영해주고 계신지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돌아온 탕자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특별히 조심하셔야 될 것이 뭐냐면 구약을 읽으실 때 많은 신앙인들이 구약에 기록된 많은 이야기들은 다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실이다 라는 이해를 많이 갖고 계십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성경은 일차적으로 역사책이 아니고 계시의 책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수아부터 에스더 같은 역사서는 역사적인 사실에서 출발해야 되겠죠. 역사서가 만약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면 이것은 황당해지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일차적으로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역사 책이 아니라 계시의 책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욥기가 언제 쓰여졌는가 질문을 하다 보면 많은 신앙인들은 욥기가 모세 시대 또는 아브라함 족장 시대 때 기록된 것이 아닌가 라는 대답을 많이 합니다. 왜 그러냐면 실제 욥기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족장 시대와 연관된 내용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욥이 동방에서 가장 큰 자이다, 가장 복을 많이 받은 자이다 라고 할 때 욥이 받은 복의 내용이 어떤 거냐면 자녀의 다산, 가축의 번성 이런 겁니다. 이것이 전형적으로 족장 시대의 복입니다. 그다음에 욥기 42장에 보시면 욥이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 나서 이후에 140년을 더 살았다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욥이 그 많은 고난을 받을 때가 몇 살이었을까, 족장 시대에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40세 정도에 결혼합니다. 욥이 10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40세에 결혼을 하고 한 20년 동안 10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할 때, 그러면 60세 정도에 재산도 다 상실하고 자녀들도 다 죽임을 당하고 욥의 온 몸에 악창이 임하는 이런 것을 욥이 60살 정도에 경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140년을 더 살았다고 하면 욥은 한 200살 정도가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 175세, 이삭 180세였던 족장 시대와 유사한 겁니다. 욥기의 본문의 배경을 보면 족장 시대의 어떤 기록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들이 욥기가 언제쯤 기록되었을까 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다 족장 시대 때 기록되었을 것이다 라는 대답을 많이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꼭 기억하셔야 될 것이 뭐냐면 성경 본문을 보실 때 이 본문과 관련된 시점에 대해 크게 세 가지를 기억하셔야 됩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본문이 말하고 있는 시대적인 배경이 1입니다. 그리고 그 본문이 쓰여진 시점이 2입니다. 그리고 그 본문이 최종 하나님의 영감 받은 말씀으로 인정되어진, 즉 정경으로 확정된 시점이 3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1이고 본문이 쓰여진 시점이 2이고 본문이 정경으로 최종 확정된 것이 3입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의 본문 가운데 1, 2, 3이 동일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욥기의 배경이 족장 시대라고 하더라도 욥기가 족장 시대에 쓰여진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구약의 원어가 뭐냐 라고 하면 히브리어라고 합니다. 족장 시대가 BC 20세기부터 18세기까지인데 그때 히브리어라는 문자가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다. 욥기가 족장 시대에 히브리어로 기록될 수 없는 겁니다. 욥기가 말하고 있는 본문의 배경은 족장 시대인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러나 욥기가 쓰여진 시점은 보통 페르시아 시대 이후라고 봅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욥기 안에 기록된 단어들이 언제 만들어진 신조어인가 그러니까 성경 원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것을 굉장히 주목합니다. 본문 안에 기록된 단어들을 볼 때 이 단어가 언제 만들어진 신조어인가 라는 것을 연구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약 2500년 경에 우리나라 어딘가에서 어떤 문서가 발견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문서를 읽다 보니까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창제하는 가운데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기록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내용만 읽다 보면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창제하는 이야기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한글이 만들어진 것이 AD 1443년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이 15세기 조선시대에 기록된 문서인가보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 안의 내용을 보니까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초안을 보고 세종대왕이 “대박, 잘 만들었어, 헐” 이런 식의 표현이 나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대박’이나 ‘헐’이라는 단어가 언제 만들어진 신조어이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신조어입니다. 그러니까 학자들은 뭐를 보는 거냐면 그 문서를 보았을 때 여기 나온 단어들이 21세기에 처음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라고 하게 되면 이 문서는 아무리 빨라도 21세기 이전에 기록될 수는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욥기 1장에 갈대아인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갈대아인이라는 것은 뭐냐면 주전 626년에 나보폴라사르가 창궐했던 신바벨론 사람들을 갈대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와서 공격했다, 우리의 재산을 빼앗아 갔다 라고 할 때 이 갈대아인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 갈대아인이라는 단
어를 통해서 욥기는 아무리 빨라도 주전 626년 이전에는 기록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욥기 안에 보면 페르시아 시대 때 만들어진 신조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욥기가 페르시아 시대 이후에 기록된 텍스트이다, 그러니까 본문의 배경은 족장 시대이지만 욥기가 기록된 시점은 페르시아 시대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욥기가 하나님의 영감 받은 말씀, 정경으로 인정된 시점은 AD 90년입니다. 성경 모든 본문이 본문의 배경 1, 본문이 기록된 시점 2, 본문이 정경으로 확정된 시점 3이라고 할 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이 다 1, 2, 3이 다릅니다. 그런데 1, 2, 3의 간격이 가장 큰 본문이 욥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배경은 주전 20세기부터 18세기 사이의 족장 시대이고 욥기가 기록된 시점은 주전 5세기나 4세기 경의 페르시아 시대입니다. 욥기가 정경으로 확정된 시점은 AD 90년입니다. 그렇다면 1번과 2번이 거의 시간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 뭘까요? 서신서이죠. 바울의 편지 이런 것은 본문의 배경과 본문이 쓰여진 시점이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가 정경으로 확정된 것은 AD 397년입니다. 2번과 3번은 시간적인 간격이 많이 있는 겁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개 복음서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다루고 있으니까 AD 20년대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서가 기록된 시점은 마가복음이 AD 70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AD 80년, 요한복음이 AD 90년입니다. 그리고 정경으로 최종 확정된 것은 AD 397년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경의 본문이 1, 2, 3의 시간적 간격이 있는데 이 간격이 가장 큰 본문이 무엇이냐 라고 묻게 되면 욥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족장 시대, 본문이 쓰여진 시점은 페르시아 시대, 본문이 정경으로 최종 확정된 것은 AD 90년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성경의 다른 본문과 다른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욥기를 보시면 욥기 대부분의 본문은 논쟁이 주입니다. 욥과 흔히 세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의 논쟁이 욥기의 중심 내용입니다. 그래서 논쟁, 토론 이것이 성경의 주된 본문인 것이 바로 욥기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흔히 욥과 세 친구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욥기 15장 10절에 보면 이 세 친구라고 흔히 얘기하는 사람들이 욥의 아버지 나이뻘 되는 사람들입니다. 머리도 흰 사람들이고 욥 보다 나이가 연장자입니다. 사실은 욥을 위로하러 온 욥보다 연장자인 사람들입니다. 편의상 우리가 욥과 세 친구 라고 하는데 실제는 나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는 논쟁이 핵심입니다. 왜 논쟁을 하게 되냐면 욥과 세 친구가 패러다임의 충돌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뭘 패러다임이라고 하죠? 대부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견해 이런 것들을 보통 패러다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욥과 세 친구 사이에 일어난 사건과 관련하여 패러다임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한국 사회와 유사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국 사회에 전통적인 갈등하면 영남과 호남의 지역 갈등, 보수와 진보의 이념 갈등 이런 이야기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최근에 많이 부각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남성과 여성의 젠더 갈등, 나이 드신 어른들과 젊은 세대의 세대 갈등입니다. 이 세대 갈등이 현대 사회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많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나이드신 어른들과 젊은 세대가 왜 충돌하고 갈등하게 되냐면 패러다임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공통의 견해 이것을 패러다임이라고 할 때 나이 드신 분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견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드신 분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견해를 잘 수용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견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제 나이만 되어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어른들이 타시면 자리를 양보한다 이것을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리에 앉아 있는데 나이드신 어른이 타셨는데 내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으면 양심의 가책이 밀려옵니다.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은 잘 자리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젊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온라인 카페에서 그런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에게 자리 양보하는 것이 옳은가, 그것을 나에게 설득시켜 봐라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올리니까 사람들이 거기에 댓글을 막 달았습니다. 그래도 나이 드신 분들이 연로하지 않냐, 몸이 힘드시지 않냐 그래서 양보하는 것이 옳지 않냐 글을 다니까 거기다 뭐라고 답글을 다냐면 젊은 사람들이 가장 피곤하다, 더 힘들다 이런 식으로 댓글을 답니다. 그래도 나이 드신 분에게 양보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러니까 우리는 돈을 내고 지하철을 타는데 나이 드신 분들은 돈도 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가 자리까지 양보해야 하는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것들을 나이 드신 어른들이 보게 되면 너무 황당하고 마음이 상하시겠죠. 나이 드신 어른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부모님들과 젊은 자녀들 사이에도 갈등이 많습니다. 옛날에 부모님들은 좀 환경이 안 좋아도 네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어 그래서 많이 회자되었던 이야기가 개천에서 용 난다는 것 아닙니까, 환경이 어려워도 상황이 어려워도 네가 열심히만 하면 성공할 수 있어 개천에서 용 나는 거야 이런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부모님들이 젊은 자녀에게 네가 상황이 좀 어려워도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어 제발 열심히 좀 해 개천에서 용 나는거야 이렇게 얘기하면 옛날의 자녀들은 대부분 다 부모님 말씀하시면 수용을 했습니다.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 이렇게 얘기하면 젊은 세대가 뭐라고 반박합니까? 그 개천에 있던 용들 다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욕 밖에 안 나온다 이런 식으로 반박합니다. 이런 것들이 전형적인 패러다임의 충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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