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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서 녹취 3

by 【고동엽】 2023. 1. 12.

한 주간도 건강하셨습니까. 오늘은 욥기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욥기를 설명드리면서 욥기는 논쟁이 주인 본문임을 강조했습니다. 욥과 세 친구 사이의 세계관의 충돌, 패러다임의 충돌이 욥기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세월 갖고 있었던 전형적인 신학 사상이 신명기 신학입니다. 이 신명기 신학을 가지고 이스라엘은 모든 사건을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과응보 신학을 수용할 수 없는 세대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유 없는 고난 가운데 처하게 된 사람들의 항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인과응보의 신학을 가지고 모든 사건을 해석하려는 세대와 인과응보 신학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새로운 세대간의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 충돌을 다루고 있는 본문이 욥기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러하지만 현실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논리가 인과응보입니다. 이 인과응보는 논리적으로는 과거에서 현재로 진행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 인과응보가 적용될 때는 현재에서 과거로 역주행을 합니다. 이것을 잘 보셔야 합니다. 인과응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께 순종을 하면 복이라는 열매를 거두는 것이고 네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심판이라는 열매를 거두는거야’라고 하면서 과거에 무엇을 뿌렸느냐에 따라서 현재 그 열매를 거둔다고 주장합니다. 인과응보가 논리적으로는 내가 과거에 뿌린 것을 현재에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인과응보가 적용될 때에는 현실의 그 존재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에 그가 그러했을 것이라고 역추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삶을 24시간 내내 추적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한 존재의 모습을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정말 그 사람이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행동과 홀로 있을 때의 모습이 똑같은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을 10년 동안 알았다고 해서 10년 동안 그 사람을 24시간 내내 살펴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나는 그 사람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말하기가 참 조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과응보를 적용할 때에는 그 사람이 처해 있는 현실을 가지고 판단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성공을 했거나 경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거나 현재 승승장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너무 쉽게 그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 라고 진단을 내립니다. 그리고 나서 인과응보의 논리를 가지고 그가 왜 이렇게 복을 받게 되었을까를 분석을 합니다. 그 결과 이 사람이 교회에 충성을 많이 했어, 예배를 잘 드렸어, 매일 큐티를 했어, 새벽기도 안 빠졌어 라는 식으로 그가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된 이유를 역추적을 하는 것입니다. 왜 성공한 사람들이 인과응보라는 논리를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이냐면 자기의 성공을 신앙적으로 정당화 시켜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논리가 인과응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지금 가난해졌거나 육신에 병이 들었거나 굉장히 힘겨운 인생의 먹구름을 통과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또 분석을 합니다. 왜 이 사람에게 이런 곤고한 현실이 닥치게 되었을까, 왜 이 사람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게 되었을까 라고 했을 때 이 사람은 지금 하나님께 매를 맞고 있는거야, 심판을 받고 있는거야 라고 진단을 하고 그 이유로 이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규정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가지고 그의 과거를 함부로 진단하기 쉬운 것이 인과응보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사실 인과응보라는 것을 아무 때나 함부로 적용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해석했던 가장 중요한 잣대가 인과응보였습니다. 결국 뿌린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순종했던 사람은 복을 받는 것이고 불순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라는 주장을 신봉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들을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이방 제국에 의해서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그 이방 제국의 왕이 금 신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때 하나님께만 무릎을 꿇겠다고 한 사람들은 절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인가요? 다니엘과 세 친구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만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복이 아니라 풀무 불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이유로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짐을 당했습니다. 다니엘만이 그랬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만 순종하고자 했던 무수한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이 순교 당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까? 그들이 일찍 죽었으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입니까?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가 하나님께 불순종 했기 때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인과응보라는 논리 하나로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과응보 라는 논리 하나를 가지고 인간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진단하지 말라는 것이 욥기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임을 꼭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인간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고난이 다 죄의 열매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힘겨운 삶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그가 죄를 범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인간이 고난을 받는 것은 매우 다양한 경로가 있습니다. 어떤 고난은 개인이 짊어져야 합니다. 자기가 감당해야 될 자기 잘못의 열매일 수 있습니다. 너무 게으르고 나태하게 산 사람이 열심히 살지 못해서 가난해 질수 있습니다. 너무나 방탕하게 살았던 사람이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잘못으로 짊어지게 되는 고난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고난이 다 자기 잘못의 열매는 아닌 것입니다. 어떤 불의한 자에 의해서 내가 고난을 짊어질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엄청난 죄를 범했기 때문에 히틀러라는 사람에 의해서 600만 명이 학살을 당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의한 독재자가 등장하게 되면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거짓 충만한 사회에서는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피해를 입습니다. 그가 고난을 받고 있지만 자기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자들 때문에 고난을 짊어지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와 있는 많은 예언자들은 타인을 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가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타인을 위해서 고난을 감수하는 예언자 같은 존재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동안 인과응보라는 논리 하나를 가지고 인간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실을 해석하고 진단했는데 인과응보라는 논리 하나를 가지고 인간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진단하고 해석할 수 없고 의인이 받는 고난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욥기입니다.

 

욥기에서 많은 신앙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욥기 8장 7절이 뽑힐 것입니다. 욥기 8장 7절에 내용이 무엇입니까?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보통 자신이 알고 있는 지인이 어떤 사업을 개업하게 되면 보통 개업 선물로 욥기 8장 7절이 쓰여 있는 말씀 액자를 많이 선물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욥기 8장 7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의로운 자였던 욥의 말도 아닙니다. 욥과 대립하였던 수아 사람 빌닷의 말입니다. 수아 사람 빌닷의 말은 욥기 42장 7절에 보면 하나님에 의해서 정당하다는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욥기 8장 7절의 말씀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말씀입니다. 몇 십년 전에 한국의 크리스천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가장 사랑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요 라고 질문을 하면서 한국 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구 구절을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1~3등으로 뽑힌 말씀들은 욥기 8장 7절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빌립보서 4장 13절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마태복음 7장 7절의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한국 교인들이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같은 말슴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은 욥기 8장 7절이나 빌립보서 4장 13절이나, 마태복음 7장 7절 같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들을 좋아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본래 의미를 너무나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래의 의미는 잘 모르고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그 말씀을 해석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구하라고 하고 무엇을 찾으라고 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쏙 빼고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면 하나님께 얻을 수 있다, 응답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을 많이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신약 성경에서 ‘안에서’ 라는 말이 나오면 ‘함께’라고 번역하셔도 좋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와 함께라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을 많이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13절을 제대로 이해하시려면 11절과 12절을 제대로 보셔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1~12절에 보면 바울은 자기가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안다고 하면서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바로 4장 13절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와 함께라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그 모든 것 안에 무엇이 들어가는 것입니까? 풍부와 비천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건 간에 나는 주님과 함께 한다면 그 모든 일들을 다 행할 수 있다,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주님과 함께 한다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주님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욥기 8장 7절도 너무나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수아 사람 빌닷은 ‘네 시작은 미약하다’고 말합니다. 여기 미약하다는 것은 뭐냐면 욥이 처해 있는 지금의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욥이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자녀들은 다 죽었고 재산은 다 상실했습니다. 욥의 온 몸에는 악창이 났습니다. 욥이 처해 있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비참합니다. 이것이 바로 네 시작은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나중은 창대해 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 중간에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네가 회개하면’입니다. 네가 지금은 너무나 비참한 상황 가운데 처해 있지만 네가 회개하기만 하면 너는 다시 창대해 질 수 있어, 회복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이 욥기 8장 7절의 수아 사람 빌닷의 메시지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전형적인 인과응보 주의자들입니다. 욥이 처해 있는 현실을 보면서 네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범했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께 벌을 받고 있는거야, 그러니까 너 빨리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해야 해, 그러면 너는 회복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욥기 8장 7절 말씀의 핵심입니다. 네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은 비참하지만 네가 회개하면 너는 다시 회복될 수 있어 라고 빌닷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왜 틀린 말입니까?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불순종해서 지금 이런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님을 욥기 1~2장이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아 사람 빌닷의 말은 틀린 말입니다. 잘못된 진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어떤 내용인지 이것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자체만 쏙 빼내서 오늘 개업하는 사람들 지금은 손님이 별로 없지만 나중에는 문전성시를 이룰 거야 라는 마음으로 욥기 8장 7절의 말씀이 새겨져 있는 액자들을 선물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 받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마치 점을 치듯이 성경은 어차피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일까 하면서 아무데나 펴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사탄의 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이 돌을 떡 덩이가 되게 해라,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탄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옳다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의 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욥기에 나와 있는 세 친구입니다. 그들의 말은 욥기 42장 7절에 하나님에 의해서 옳다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욥기를 읽으실 때 욥기 42장 7절의 평가를 중심으로 욥기를 읽으셔야 합니다. 얼핏 보면 욥의 친구들의 말은 읽다 보면 다 아멘이 나옵니다. 마치 목사님의 멋진 설교를 듣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왜 친구들의 말이 하나님에 의해서 옳다 인정받지를 못한 것입니까? 인과응보의 논리만을 가지고 욥이 처해 있는 상황을 진단했기 때문입니다. 욥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데 그들은 욥이 처해 있는 현실을 죄에 대한 심판으로 이해했습니다.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운 일 때문에 욥은 지금 고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욥이 처해 있는 현실을 보면서 인과응보의 논리를 가지고 네가 하나님께 불순종 했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께 이런 벌을 받고 있는거야, 하루 빨리 이 비참한 현실로부터 전환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회개를 해, 그래야만 너가 회복될 수 있어 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건넨 말입니다. 진단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의 말은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받지 못합니다. 욥기를 읽으실 때 욥기 42장 7절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욥기를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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