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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어찌 믿음이 없느냐(마가복음 4장 35~41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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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믿음이 없느냐(마가복음 43541)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이적들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질적인 변화라든가 사람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고 하는, 말하자면 대체로 사람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보는 말씀은 자연에 대한 것입니다.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이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인이 되어주십니다. 주가 되십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자연이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절은 우리 신앙고백의 기초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만물의 근원, 만물의 목적, 만물의 종말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연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진화론에서는 아무리 설명하려고 해도 그 설명 중에 세 가지의 비약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무에서 유, 무기체에서 유기체, 유기체에서 인간-이렇게 세 가지 비약을 두고야 진화론이 설명됩니다. 진화됐다, 진화됐다 하지만 진화됐다면 그 만물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부득불 자연히 섰다, 저절로 있는 것이다, 절로 있은 것이다, 절로, 저절로 있었다고 해놓고 진화는 있었다고 말합니다. 진화의 원리는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거기에 목적을 부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진화론의 가장 큰 약점은, 도대체 자연은 어디서부터 왔느냐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진화론에서 저절로 자연이 섰다고 강변하려들지만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연도 피조물이다, 사람이 피조물이듯이 자연도 피조물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한 가지, 진화론의 보다 더 결정적인 약점은 무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무목적, 무인 격입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자연히 된 것이니까 목적이 없을 수 밖에요. 그러다 보니 결국은 인간 자체도 목적이 없습니다. 여기에 무슨 죄가 있고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오늘도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공산주의 사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목적 상실이 옵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것의 존재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과 똑같이 그저 먹고 살다 죽는 것일 뿐입니다. 그밖에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는 세계관으로 전락했고, 그 결과가 오늘의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연도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당연히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지배에 대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자연 계시적 지배요, 하나는 특별 계시적 지배입니다. 어차피 이것은 목적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배는 다 목적이 있습니다. 자연도 인간도, 심지어는 자연법칙도 다 하나님의 경륜하시는 뜻과 의미와 목적이 있어서 운행되는 것입니다. 풀포기 하나도 꽃 하나도 길가의 돌부리 하나도, 의미 없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연 계시적 역사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거기다 원리를 부여하셨습니다. 자연법칙이라고 하는 원리를 넣어서 그 법칙대로 되게 하신 것입니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지난여름에 백두산에 한번 갔다가 참 놀란 것이 있습니다. 천지가 2,774미터나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높은 산꼭대기에 큰 연못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웠습니다. 게다가 그 연못은 직경이 4.5킬로미터 곧 십 리가 넘는 데다 깊이는 300미터나 됩니다. 큰 연못이지요? 그런 연못이 왜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습니까? 물이란 밑으로 흐르게 되어 있는데 왜 올라가 거기에 있느냐 그 말입니다.

참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아무리 비가 쏟아져도 물이 그렇게 많이 괼 수는 없어요. 또 물이라는 것이 괴려면 높은 데서 흘러 낮은 데로 괴게 마련이지 꼭대기로 올라가면서 괴나요? 모세관현상으로 올라갔다면 설명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무래도 신비로웠습니다. 이게 자연법칙입니다. 산을 놓고 보아도 겉에서는 물이 흐르지만 속에서는 물이 위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순환하고 있으니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증기는 올라가고, 비는 내려오고, 이래서 땅을 적십니다. 자연법칙이 이렇게 오묘합니다. 심지어는 동물의 세계, 생식작용 하는 것은 또 얼마나 오묘합니까? 특별히 철새들이 날아다니는 것 보십시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도 자연법칙입니다.

삼라만상이 자연법칙에 따라 운행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추운 지방에 사는 것은 추운 데서 살수 있도록 마련되었고 더운 지방에는 또 거기 살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 삽니다. 제가 아는 여전도사 한 분이 개를 사랑해서 혼자 살면서도 개를 좀 키웠답니다. 개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옷을 해 입혀서 방안에다 두고 있어요. 그래놓으니 급기야는 개가 감기에 걸려 죽습니다. 그 전도사, 개가 죽었다고 섧게 울더구먼요. 그걸 보고 제가 한마디했습니다.

"개를 개 취급해야 살지 사람 취급 하니까 죽지 않았소?" 한데 두어야 추위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겨서 겨울에도 한데서 살 수 있게 되는데 이놈을 옷까지 해 입혀 가지고 그 짓을 하니까 털인들 제대로 납니까? 그러니 한번만 찬바람 쐬도 감기 걸려 죽을 수 밖에요. 여러분, 자연의 이치는 오묘합니다. 자연 계시적입니다. 자연법칙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운행되고 질서가 유지됩니다. 조화롭게 운행됩니다.

그리고 특별계시적 역사가 있습니다. 특별 계시적 사역이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계시적이요 구원론적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어떤 것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가령 소돔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유황불을 내리셨습니다. 이것은 자연 계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유황불이 늘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떨어질 때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사해 바다가 패이면서 염해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건도 그렇습니다. 벼락을 친다는 것, 물론 자연적인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왜 거기를 때렸습니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물론 이것은 자연 계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은 그렇게 갈라지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특별계시적 운행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적적인 사건입니다. 계시적인 사건이요, 구원을 위해서 있어지는 특별 사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적이란 자연법칙 위에 있는 법칙입니다. 자연 계시적인 법칙만이 아니라 특별 계시적 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이변-이것을 우리는 이적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오늘 자연을 향하여 명령을 하십니다. 풍랑을 꾸짖어 고요하게 하십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예수님의 능력 과시가 아닙니다.

그 마술적 능력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시위해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여기에는 엄청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리스도께서 그대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운행하시듯이 예수님께서도 자연을 지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람을 이리로 불게 하시고 저리로 불게 하시고, 홍수를 내리시고 거둬가시기도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 되시기에 자연을 향하여 명령할 권리가 있고 자연은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자연을 향하여 역사 하신 이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되심을 계시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만물의 주가 되시고 만인 위에 주가 되십니다.

그러니 바람도 비도 풍랑도 바다도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순종해야 합니다. Lordship over the nature -그러므로 바람의 힘, 물의 힘, 불의 힘, 전기의 힘…… 이 모든 힘도 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권세가 다 그에게 복종해야 됩니다. 오늘의 이적은 이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말합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나가시는 표적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표적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완전한 구속을 지향하는 표지입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구원 얻게 하는 데에 궁극 목적을 두고 자연을 운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맥락을 조금 생각해보십시다. 광풍을 잔잔케 하신 것은 날이 저물 때의 일입니다. 이 일이 있기 전, 낮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씨뿌리는 자 비유를 말씀하시기도 하고,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늘나라에 대해서 긴긴 설교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늘나라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입니다. 이는 자연을 포함한 하나님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구속받고 다스려지고,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이 평화가 깃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나간다-이런 신비로운 말씀을 저들이 여기서 듣고 공부를 했거든요. 그런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 저물 때에 배를 타고 건너가십니다. 그 후 여행을 하시면서 네 가지의 이적을 나타내시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연결해서 말하자면 하늘나라에 대한 교육, 교훈을 하신 다음에 그것을 실제를 통해서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어떻게 확장되어나가나 보라, 하늘나라가 어떻게 점점 더 세력을 얻어나가는가 보라, 겨자씨와 같이, 씨앗이 자라는 것처럼 그렇게 확장되어나간다 하십니다. 426절로 28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린 것과 같아서 저가 밤에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다음에는 이삭 중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식물이 이렇게 자라나는 것처럼 날로, 날로 확장되어나갈 것이다-이런 말씀을 하시고 나서 이적을 행하시는데, 네 가지를 행하셨습니다.

영어로는 이 네 가지 이적을 'Four D'라고 말합니다. Danger, Demon, Disease, Death가 그것입니다. 이제 그 다음 성경을 죽 봐나가면 오늘의 본문 말씀은 먼저 위험으로부터 구원하시는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다음 시간에 보게 되겠습니다마는 거라사에 있는 demon -악마를 내쫓는 이적을 나타내십니다. 세 번째로는 혈루증 앓는 여인의 그 병-disease를 고치시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어 네 번째로 야이로의 딸 죽은 것(death)을 살리시는, 다시말하면 죽음으로부터 건지시는 이적을 행하십니다. 이같이 차례차례 네 가지 이적을 나타내십니다. 여기서 이제 하늘나라에 대한 설교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확장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위험을 물리치시고, 마귀를 극복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다 하는 것을 실물로 계시적으로 교육하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얼마 전에 낮 예배 때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마는 여기에 '메갈레'라고 하는 말이 세 번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영어에서 말하는 메가톤(megaton)에 해당합니다. 메가스, '메가톤급이다'라는 말인데, 크다는 뜻이죠. '메가톤'이 헬라어 '메가스'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 메갈레가 다음과 같이 세번 나옵니다. 큰 광풍이 일어났다-'메갈레 아네무'입니다. 메가톤급의 광풍이라는 말이지요. 그 다음, 아주 잔잔해지더라 했는데 '아주 잔잔해졌다''갈레네 메갈레'입니다. 이 말은 또 큰 고요함을 말합니다. 고요한 것인데 그것도 메가톤급의 고요함, 즉 숨을 죽인 고요함이랄까, 큰 광풍이 일어났다가 그런 큰 고요함이 있는 것입니다. 극과 극입니다. 그런가하면 또 그 다음에는 이것을 보고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심히 두려워하더라"라는 말의 헬라 원문은 '포본 메간'입니다. 이것도 메갈레입니다. 그러니 결국 '메갈레'는 세 가지, 곧 큰 것이 세 가지 있는 셈입니다. 풍랑도 큰 것이요, 풍랑이 숙진 다음의 고요함이 큰 것이요, 이것을 보고 놀라 두려워함이 큰 것입니다. 퍽 재미있는 비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에서 가장 큰 주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무엇이냐?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풍랑 속에서도 조용하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퍽 고단한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쉬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배를 저어갑니다. 갈릴리바다는 바다도 아닙니다. 호수입니다. 그런데 그 주위가 사막으로 둘러 있기 때문에 느닷없는 광풍이 자주 일어나긴 한답니다. 주로 낮에 일어나며, 아침과 저녁에는 비교적 고요하답니다. 그러나 어쩌다 그 아침과 저녁에 풍랑이 한번 일어났다 하면 호되게 일어나는 모양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풍랑이 그런 저녁에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때마침 예수님은 아무 생각 없이 조용하게 쉬고 계셨습니다. 풍랑이 인 것을 모르고 계셨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쉬고 계셨고 제자들은 노를 젓다말고 풍랑이 워낙 크게 일어나 물이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는 지경이 되니까 혼비백산합니다. 죽게 됐다고 그렇게 야단들입니다.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인데 한쪽은 두려워하고, 한쪽은 태평으로 편히 쉬고 있습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고요합니다. 풍랑이야 있든 없든 평온하고 고요합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기야 풍랑이 없어도 두렵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을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죄인은 항상 두려운 것입니다. 얼마전 이야깁니다 마는 제가 한번은 비행기를 타려고 나갔는데, 어떤 장로님 한 분이 마침 자기 부인을 배웅하러 나왔어요. 아들이 미국에 있어서 아내를 보낸다나요. 그 부인이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본다고 하면서 "마침 잘됐네요"하더니 제 옆자리를 정해줍디다. 저로서는 좀 거북했지만 어쩌겠습니까? 그 부인과 얘기를 나누면서 가는데 보자하니 13시간 동안을 눈 똑바로 뜨고 한잠도 눈을 붙이지 않아요. 음식은커녕 물도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어보았더니 무서워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 저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끝에 농담하는 투로 한마디 던졌습니다. "죄가 많군요?" ", 죄야 많죠." "그렇다면 지옥가든 천당가든 운명은 결정되었겠는데 눈뜨고 있을 바에야 회개를 하지 그래요? 지금 눈뜨고 있다고 죽을 것이 안 죽습니까? 지옥갈 것이면 안가나요?" 그랬더니 "아이구, 그래도 무섭잖아요?" 합디다.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우리는 풍랑이 있다 없다는 것 가지고 이야기합니다마는 풍랑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문제라는 걸 일깨워주십니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풍랑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문제거리는 그게 아니니까요.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이냐?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 하나님이 능력이 있다는 믿음, 만사가 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 이 세계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당신의 경륜이 있습니다. 나는 것도 당신의 계획이요 죽는 것도 당신의 계획입니다. 어디서 죽느냐도 당신의 계획입니다. 어떻게 죽느냐도 당신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섭리 중에 있는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어떻다가 다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내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까지는 날 데려가시지 않을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틀림없지 않습니까? 어느 날 내가 세상을 떠난다면 나를 통하여 하실 당신의 일을 다 한 다음이지요. 하나님의 그 높은 섭리를 우리가 분명히 이해할 때에 우리는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평안하게 쉬십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갑니다. 도중에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바울은 담대하게 말씀합니다. 내가 로마에 가야 하므로 이 배는 무사할 것이라고.

배가 깨질 수는 있어도 여기에서 죽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요. 왜요? 사도 바울을 로마로 보내서 선교해야 될 하나님의 중요한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평온합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을 좀 봅시다.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저들은 어부 출신입니다. 예수님은 목수 출신입니다. 그러므로 풍랑 만나 두려워한다면 예수님이 두려워할 일이지 베드로 같은 어부가 두려워할 성격이 아니거든요. 바다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니까요. 그런데 죽겠다고 야단입니다. 물론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했을 것인데, 보십시오.

여기에 주신 말씀을 보면 실로 어이가 없는 말 한마디가 있어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원망조입니다. 이 원망이 어떤 것을 뜻하느냐-이것은 자못 신학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이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함께 있는데 어째서 풍랑이 일어났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타고 가는 배는 무사하게 가야지 왜 흔들리느냐, 이것입니다.

죄인들이 타고 가는 배라면 빠져죽기도 하겠지만 지금 어느 어른이 타셨는데 이 수난을 당하느냐-이런 불만입니다. 이런 생각에는 우리도 가끔 빠집니다. 내가 예수 믿는데 왜 사업이 이 꼴이란 말인가! 내가 예수 믿는데 시험치면 당연히 합격해야 될 것이 아닌가! 건강해야 될 것이 아닌가! 기도하고 예수 믿는 사람인데 말이야…… 그렇게만 생각하려들기 쉽습니다.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의식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인데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모르신 단 말입니까? 아무리 잠이 깊이 들었기로 난리가 났는데도 모르시다니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가, 우리 사정을 알고 계시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사정을 정말로 잘 아실까요?

미국의 젊은이들이 짓궂은 소리를 잘합니다. 하나님하고도 농담을 잘합니다.타임지에 한번은 이런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농담을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참 심심도 하시겠습니다. 변화가 없으시다니 얼마나 따분하시겠습니까? 영원하시다니 얼마나 지겹고 심심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가지, "하나님, 하나님은 높은 데 영화로운 곳에 계시니까 우리 같은 요 답답한 인생의 사정을 아실 리가 없죠." 그리고 "내 사정을 당신이 어떻게 알겠소? 나의 이 개인적인 고민을 당신이 어떻게 아신단 말입니까? 당신은 나 같은 사람되어 본 일이 없으니까 아실 리가 없지요."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 산부인과 의사에 여자가 아닌 남자도 많습니다. 아이 못 낳아본 남자 의사도 산부인과 잘합디다. 이와 같이 남의 사정을 똑같이 경험해보아야만 남의 사정을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아보지 않아도 아이 낳는 고통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예수님께서 풍랑 만난 저들의 고난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원망을 합니다. 어찌하여 우리 일에 이토록 무관심하실까, 어찌하여 이 사정을 돌아보지 않으시는가, 이렇게 원망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원망입니다. 한쪽 사람들은 눈뜨고 있고 한 사람은 자고 있습니다. 걱정을 할라치면 누가 누구를 걱정해야 되겠습니까? 그들은 잠들어 있는 예수님 걱정을 하지 않고 눈뜨고 있어 당장에 헤엄이라도 칠 수 있는 자신들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이렇게 주무시면 위험하십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잠든 사람보고 "우리를 안 돌아봅니까?" 하다니요. 제 생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기적인 생각이 또 다른 원망을 낳습니다. '우리'라는 개념 속에는 원망이 있습니다. 나만 생각하기 때문에 남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다 같게 생각하고 남의 처지를 먼저 생각한다면 무슨 원망이 있겠습니까? 나만 생각하기에 "내가 죽게 된 것을 예수님은 왜 안 돌아봅니까?" 원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탄 배도 풍랑은 만납니다. 다만 빠져죽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령 빠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모두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로 중단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빠져죽어도 하나님의 일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새겨두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순교해도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죽어도 하나님의 역사는 더 크게 더 넓게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나를 중심해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의 사업도 무너지는 것처럼 착각하지 마십시오. 풍랑은 있어도 주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습니다. 여기서 꾸짖는다는 것은 귀신을 꾸짖는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을 꾸짖기도 하십니다. 이 꾸짖음은 같은 꾸짖음입니다. 사람을 꾸짖기도 하시고 귀신을 꾸짖기도 하시며 자연을 꾸짖기도 하십니다. 다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동의어를 사용하십니다. 다 같게 꾸짖으셨습니다. 자연을 향해서도 잠잠하라 꾸짖으시고 귀신을 향해서도 나가라고 꾸짖으십니다.

죽은 사람을 향해서도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은 그대로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41절에 보면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라고 제자들이 놀랍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해야 됩니다. 순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찌 믿음이 없느냐"-예수님은 꾸짖으십니다. 믿음이 있으면 평안할 것이고 고요할 것이고 아무 걱정도 없는 것입니다. 풍랑이 있다 없다, 바다가 흉흉하다 고요하다, 물결이 높다 낮다, 이런 것은 걱정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근심, 두려움, 모든 고민의 원인은 믿음의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풍랑이 있어서 두려운 게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 두렵습니다.

믿음을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갈(一喝)에 고요해진 바다, 그런데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주님의 권세에 놀라고 있습니다. ", 굉장하다! 이 사람이 누구관대 바다라도 꾸짖으니 조용해지는가?" 권세와 능력에 놀랍니다. 그리고, "저가 뉘기에"라는 말씀에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What and who?'입니다. 무엇이냐가 아니고 누구냐 입니다. 언제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이루었느냐 입니다. 어떤 사건이 생겼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누가 그 사건을 경륜하셨느냐, 누가 이 일을 만들었느냐를 물으십시오. 궁극은 하나님께 기인(起因)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인격에 물어야 합니다. 돈이 벌렸느냐 안 벌렸느냐,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건강하냐 병들었느냐-이런 현상적이고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문제는 언제나 누가 그 일을 이루셨느냐 입니다.

오늘의 이 사건을 통해서 저들은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의 권세를 보게 되고 그가 누구인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이 사건 자체도 예수님이 누구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있게 된 사건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가 누구신지를 생각해야 되며, 그를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그는 구세주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그쪽으로 돌아가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 됨을 알고 그가 계시자임을 알고 그가 나를 사랑하는 분임을 알고, 그에 의해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서 평안한 것처럼 우리 역시 풍랑 가운데서도, 이 험한 세파 가운데서도 평온함과 고요함을 늘 지켜갈 수 있을 것입니다. 참 평안은 그래서야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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