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장로회 광주노회
BILLY GRAHAM(1918- )
들어가는 말
빌리 그래함이 20세기의 역사에서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WHY BILLY GRAHAM?>의 David Poling은 빌리 그래함 ;세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존경받는 그리스도인 중 한 사람이라고 했다(빌리 그래함의 성공비결, 서문 참고). 그의 본명은 윌리암 프랭클린 그래함이지만 Billy라는 애칭이 평생 강단의 이름으로 인상깊게 남아 있다.
그의 대중적 영향은 역사상 그 어느 설교자보다도 크다. <결단의 시간>이라는 그의 방송 프로그램은 매주 전세계의 일천여 개의 방송국을 통해 전달되고 있으며,2천 5백만명이 청취하고 있다. 그의 전도 집회에는 종종 수십만명이 참석한다. 전도용 영화는 2백 곳 이상의 지역 TV 방송국을 통해서 방영되고 있다. 그가 쓴 책은 수백만명이 열심히 읽었다. 월간지 <결단>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적인 신앙 잡지이다.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에서는 4백명 이상의 간사들이 일하고 있으며,1년에 1천 4백만 달러 이상의 예산을 집행하고 있다. 빌리는 매주 2만 5천 통 이상의 편지를 받고 있다. 그의 사역으로 회심한 사람은 백만명이 넘는다. 그는 <타임>지에 의해 그 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10대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갤럽 여론 조사). 또한 그는 많은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회사 핸드북>에서 리챠드 피에라드(인디아나 주립대학교 역사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빌리 그래함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대중 전도자이며 그를 통해서 수백만 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따뜻하고도 매력적인 인격을 소유하고 있는 그는 성경중심의 복음에 관한 간략한 설교를 전달하기 위해 현대적인 대중 매체와 조직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개인적인 결정과 새신자를 교회 안으로 인도하기 위한 세심한 사후 지도를 강조하였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지만, 몇몇 비평가들은 그의 사회적인 견해가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이라고 주장한다.(교회사 핸드북,623쪽)
1. 출생과 성장 배경
빌리의 본명은 William Franklin Graham이다. 그는 1918년 북 캘리포니아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이 부친은 결코 까닭 없이 화를 내지 않는 침착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신실한 장로교인인 모친은 빌리가 회심하고 설교자가 되는 길을 기도로 닦아준 믿음의 인도자였다. 빌리의 성품은 우선 부지런함이 큰 장점이었다. 그리 가난한 집은 아니었지만 소년 시절부터 꼭 세시면 일어나 소의 젖을 짰다. 그는 역사책을 애독하였고 이를 통해 질이 좀 낮은 교육의 약점을 극복하였다. 그는 14세 때에 100여권의 책을 읽었다. 빌리는 1934년 한 복음전도 집회에서 회심을 경험하였다. 그때의 설교자 모더카이 (Mordecai Ham)는 지옥과 심판을 선포하는 보수적 내용의 설교를 일관하였지만 빌리의 마음을 강하게 자극했고 그 결단에 따라 평생 설교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1943년에 일리노이주 휘튼(Wheaton) 대학을 졸업하였고, 중국에서 선교를 했던 외과 의사의 딸 루스 벨(Ruth Bell)과 결혼했다.
그는 십대선교회(YFC)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했다. 그는 1946년에서 1949년까지 회장으로 일했다. 이 경험운 그로 하여금 강한 확신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에 미니아폴리스에 전도협회를 만들었다(1950). 또한 <결단의 시간>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개설되어 매스컴 설교가 활기찬 진척을 보였다.
YFC 활동을 통해 빌리는 서구 사회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영적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빌리는 대학 졸업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우리 머리가 지식으로 가득 차 있지만 마음은 텅 비어 있습니다.
우리는 문명의 역사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비참한 자가 우리들입니다.
그는 청중을 알았다. 그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상처와 기대를 일깨워 주는데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빌리 그래함의 성공비결,18쪽).
그는 인간의 참 모습을 나타내는 세 가지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는 죄로 가득 차 있고 현재는 슬픔으로 덮여 있으며 미래는 죽음의 확실성에 직면해 있다"
그의 설득력 있는 설교는 개심한 사람들의 삶에 계속해서 깊이 침투해 들어갔다. 그는 처음과 같은 신앙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기도의 능력을 믿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그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을 통해 새롭고도 놀라운 일을 행하시리라는 것을 믿었다. 그의 설교 주제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단지 예화만이 바뀌었다.
1949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전도집회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회개운동을 일으켰다. 이 집회를 인도한 빌리 그래함은 최고의 부흥 설교자로 부각되게 되었다. 예정을 연장하여 8주간 동안 계속된 이 집회에서 설교자인 빌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었다. 그의 설교는 점차 세계의 온 인류를 향해 폭을 넓혀 갔다. 특히 1954년의 런던 집회는 설교의 힘과 회중
들의 호응에 있어 영국교회에 새로운 이정표를 이룰만한 사건이었다.
빌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젊은 심령들은 강하고 도전적인 그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강하고도 도전적으로 부딪혀 올 때,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삶의 길이 바꾸어지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젊은이들의 마음을 끌게 될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의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0 하나님과의 평화(생명의 말씀사 역간)
0 불타는 세계
0 천사론
그는 1956년 정기간행물 <크리스챠니티 투데이>를 창간하였고, 1960년 잡지 <결단>을 창간하였다. 그는 베를린 선교대회(1966)와 로잔 선교대회(1974)를 제안하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를 포함하여 전세계의 대도시에서 복음전도집회를 가졌다. 그 집회 가운데 많은 것들이 그 영향을 확산시키기 위해 TV로 방영되었다.
그의 첫 한국 집회는 1952년 겨울에 있었다. 1956년에 두번째 집회가 있었다.
1973년에 세 번째 집회가 있었다. 그는 1980년대에 다시 한국을 찾아 왔다.
2. 20세기 최대의 전도 설교자
(1) 빌리와 성경
그는 성경을 가리키면서, "세상의 모든 해답은 이 작은 책 속에 들어있다"라고 말했다. 1976년 봄 <카톨릭 월드>지는 빌리 그래함과 회견을 가졌다. 기자는 빌리의 메시지에 대해 개인적이고도 세심한 질문들을 던졌다. 빌리는 그의 메시지의 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마음을 꿰뚫는 능력을 그 자체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기자(에드 워킨)의 질문: 왜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성공적으로 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까?
대답: 예를 들어 말하자면, 요나나 다른 선지자들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게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나는 나가서 가르쳤던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고 믿습니다. 그가 나를 삼십오년 전에 부르셔서 나가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빌리가 초기 몇달 동안의 공적 사역 기간 동안에 처음으로 굳게 결심한 것은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믿고, 성경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단은 빌리에게 일관성 있는 권위를 주었다(빌리 그래함의 성공비결,122쪽). 그는 "지옥은 로스 앤젤레스와 다를 바 없는 문자적 장소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였다. 그는 성경을 항상 가까이 함으로써 문화나 일시적 유해이나 대중의 변덕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세계관을 지켜왔다.
"오늘날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사게 만드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빌리 그래함일 것이다"(David Poling). 빌리는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성경으로 되돌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에 성경 안에서 살기를 원했다.
빌리는 성경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예수 그리스도,우리 구세주의 메시지는 성경의 이야기이다. 즉 그것은 구원의 이야기이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갔다. 왜냐하면 그는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의 참된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창세기에서 여인의 후손으로 나타나 있다.
출애굽기에서 그는 유월절 어린양이다.
레위기에서 그는 속죄 제물이다.
민수기에서 그는 모세가 지팡이로 두드린 반석이다.
신명기에서 그는 선지자이다.
여호수아에서 그는 여호와 군대의 총수이다.
사사기에서 그는 구원자이다.
룻기에서 그는 천국의 친족이다.
왕들에 대한 여섯권의 책에서 그는 약속의 왕이다.
느헤미야에서 그는 그 민족의 회복자이다.
에스더서에서 그는 변호자이다.
욥기에서 그는 구속자이다.
시편에서 그는 나의 전부이다.
잠언에서 그는 나의 귀감이다.
전도서에서 그는 나의 목표이다.
아가서에서 그는 나를 만족시키는 자이다.
예언서에서 그는 장차 오실 평강의 왕이시다.
복음서에서 그는 (죄인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사도행전에서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서신서에서 그는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이다.
요한게시록에서 그는 다시 돌아와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이것이 성경의 영원한 메시지이다. 그것은 생명과 화평과 영원, 그리고 천국의 이야기이다. 성경에는 감추어진 목적이 없다. 거기에는 특별한 해석이 필요 없다. 그것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을 위한 유일하고도 뚜렷하며 대담한 메시지-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화목제가 되신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빌리는 <불타는 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성경의 가르침을 현대 철학과 조화시키려고 시도해야 할 책임이 없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어떤 세대이든 인간의 의견과 필적하지 않습니다. 보통 그것과는 반대입니다. 우리는 증인들이 되어야지 모방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 설교의 주제- 그리스도께로 나오라!
빌리의 설교에서는 놀랄만한 내용이나 형식을 찾아 볼 수 없다. 그의 설교 주제는 크게 두 가지 였다.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관한 메시지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선포였다. 그는 날이 갈수록 후자의 주제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회중들은 그가 어떤 본문으로 설교하든지 간에 그 속에서 <그리스도께로 나오라>는 간곡한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설교의 내용 구성에 있어서 본문에 대한 설명과 전개과정을 거의 생략하였다.
그는 설교에 오직 한가지 주안점만을 강조하는 방법을 씹으며 그것을 철저하게 성경의 권위에 근거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그의 선포는 다른 변명이나 설명이 없이 권위 있게 외쳐지는 강점을 갖고 있다. 그는 성경의 권위에 의존하여 메시지를 선포하면 분명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권위로 만들어진다고 믿고 있었고, 또 권위를 가지고 성경을 선포하면 현저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설교자였다. 그는 재치나 웅변에 앞서 성경 자체에 의존하는 권위를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의 전달력은 완벽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다양한 성경 연구로서 원고의 준비를 끝내면 곧장 자기의 집 3층에서 연습시간을 갖는 것이 상례였다. 그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그는 소홀한 준비로 강단에 나서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연습하였고 한 밤중에도 소리쳐 설교하였다.
그는 회중에 따라 전달방법을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능숙한 선포자가 되었다.
회중에게 감동력을 안겨주는 강조의 어투를 계속 유지하면서도 말 한 번 더듬는 일이 없고 그토록 명확한 음성을 발할 수 있는 설교자가 바로 그래함이다(정장복 ,설교의 역사, 하권,384쪽).
(3) 설교와 삶
빌리의 영향력을 지탱시켜 준 힘은 그의 삶의 중심에서 나왔다. 그는 군중 앞에서만 설교하지 않았다. 그는 주일 아침에 산골의 열 두 가족 혹은 두 가족에게 자주 설교하였다. 빌리에 의하면, 설교해 달라고 부탁 받은 사람은 그 부름과 특권을 기뻐해야 한다.
빌리는 윈스톤 처칠경을 만난 적이 있었다. 처칠은 낙심 상태에 있었다. 그는 빌리에게 "젊은이, 당신은 이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있소?"
라고 물었다. 빌리는 신약성경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몇 귀절 읽어 드릴까요? 수상님, 이 책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반시간 동안 빌리는 처칠에게 적합한 귀절들을 읽어주었다.
그가 일기를 마치자 처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맙소. 당신은 늙은 사람에게 미래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불어넣어 주었구료"
빌리의 생활에는 놀랄만한 것이 없다. 그에게도 사생활이 있고 상심하고 좌절하며 실망하고 슬퍼할 때가 있다. 그는 많은 병들로 고통 당했다.
담석증으로 계속 거동을 할 수 없었고, 병이 재발되기도 했다. 그는 거의 항상 장염으로 시달려 왔다. 장염으로 인해 수년간 준비했던 집회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기도 했다.
그의 아내 루스는 뛰어난 내조자였다. 휘튼 대학 시절에 그녀는 남부 출신의 빌리에 의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루스는 빌리가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서, 그가 하나님을 매우 독특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첫 눈에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빌리는 루스가 침례교인이 될 것을 권했다. 루스는 성경을 조용히 연구하고 나서 아버지와 그 문제를 의논했다. 그녀가 얻은 결론은 명백하였다. 그것은 그녀가 장로교인으로 남아 있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빌리와 결혼할 뜻을 비쳤다. 루스는 상냥하고도 견실했다.
맺는 말
빌리 그래함은 성경의 권위로 선포하는 확신의 설교자이다. 그가 확신에 찬 말씀을 외칠 때마다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기 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은 그칠 줄 모르고 줄을 이었다.
그의 메시지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설교가 동시대적이다. 그 메시지가 항상 우리의 관심 안에 있다.
2) 설교의 권위를 성경의 많은 인용구로서 강조한다.
3) 친근한 카운셀링 어조를 구사하고 있다.
그는 대중 매체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전도자였다. 문서와 방송은 그의 설교를 세계
구석구석으로 전해 주었다. 그의 저서들도 그의 설교 사역을 뒷받침했다.
WILLIAM FRANKLIN GRAHAM의 약력
1918년 11월 7일 North Carolina, Charlotte에서 태어남
1934년 부흥 집회에서 회심
1936년 밥 죤스 대학 입학
1937년 플로리다 성경학원 입학
1938년 설교자가 되기로 결심하다
1939년 남침례교 목사가 되다
1940년 플로리다 성경학원에서의 연구를 마치고 휘튼대학 입학
1943년 휘튼대학에서 문학사 학위 받고,일리노이즈주 시카고의 웨스턴 스프링스 침례교회 목사가 되다 8월 13일 Ruth Bell과 결혼
1944년 라디오 프로그램 <Songs in the Night>을 시작, YFC 사역
1947년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의 노스웨스턴 학교의 교장이 됨
1949년 LA에서 전도대회를 인도하였고, 그 결과 전국적으로 유명해짐
1950년 라디오 방송 <결단의 시간> 시작
1953년 <하나님과의 평화> 집필
1965년 <불타는 세계> 집필
1970년 7월 4일 Washington,D.C.에서 독립기념일 연설
(cf. 20 CENTURIES OF GREAT PREACHING,vol.xii,p.281)
<참고도서>
대빗 폴링, 빌리 그래함의 성공비결(1979)
빌리 그래함, 도전, 생명의 말씀사
빌리 그래함, 하나님과의 평화, 생명의 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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