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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신 주님의 얼굴 /사 52:13-15

by 【고동엽】 2022. 8. 14.

사 52:13-15

오직 예수!
고난의 계절입니다. 오는 주일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받으심을 묵상하며 주님의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주간의 행사가 연례행사의 수준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기간에 진행되는 특별새벽기도회는 문자 그대로 특별한 기도의 시간이 되어 주님의 고난을 더욱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어야겠습니다. 특별히 고난주간의 목요일과 금요일 저녁에 모이는 통곡기도회는 북한의 학대받는 교회와 동족들의 믿음과 자유를 위한 진한 통곡의 기도모임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부활의 광명한 아침이 와도 큰 의의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의 환희와 승리의 함성은 고통의 심연에서 절규해 본 사람만이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적으로 기록한 성경으로는 단연 이사야서가 압권입니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가 노래한 네 편의 ‘여호와의 종의 노래’ (42장, 49장, 50장, 53장) 중 마지막인 네 번째 종의 노래(사 52:13~53:12)의 서론 부분입니다.

  이 네 번째 ‘고난 받는 종의 노래’에는 구약성경  가운데 그 어떤 본문보다도 수난 사역의 세부 요소들이 생생하고도 비장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메시야의 숭고한 희생의 자세, 그 위대한 결과에 대한 감격과 찬탄, 그리고 구속 사역을 위하여 처절하게 낮아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역동적 승귀에 대한 기쁨 등, 기독교 진리의 핵심 요소들이 생생한 이미지들과 가슴 울리는 시적 운율에 담겨 표현되고 있습니다.

  본문(13~15절)은 여호와 종의 수난과 승귀에 대한 여호와의 선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51:5, 52:10)에서 언급한 ‘주님의 팔’이 역사 과정에서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실 본 단락에서 제시되는 구원의 방법은 한마디로 말해서 여호와의 종의 고난과 죽음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내용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때에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시고 홍해의 물을 가르사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셨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사 구원하신 바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제2의 출애굽이라 할 수 있는 바벨론으로부터의 탈출은 더욱 놀랍고 이기적이고 기이한 방법을 통하여 구원하실 것이라고 기대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 단락에서 제시되는 구원의 방법은 이러한 기대와 정반대인 종의 고난과 죽음으로 이루어진다고 제시하는 것입니다. 여기 예언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메시야의 고난의 모습은 신약 사복음서에서 역사적 사실로 기록된 고난의 생생한 증언을 능가할 만큼 사실적이라는 점에서 구약 메시야 예언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가운데 14절 말씀을 보면,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받은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50장 6절에는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수염을 뽑는 사람들에게 뺨을 맡겼으니 그 얼굴이 오죽했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이 시간 상하신 주님의 얼굴을 우리의 영혼의 눈으로 바라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환한 얼굴, 자비와 인자로 넘치는 얼굴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하신 얼굴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 가신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볼 때 비로소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상하신 주님의 얼굴!  그 얼굴에 배어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얼굴이 내게 주는 깨달음과 감동은 어떤 것입니까?


1. 우리를 대신하여 겪으신 주님의 아픔과 고통
  상하신 주님의 얼굴은 주님께서 겪으신 참혹한 아픔과 고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고통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한 고통입니다.

  14절,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여기서 ‘상하였고’(미쉬하트)는 ‘심각한 결점’(레 22:25)과 ‘신체적인 훼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신체의 외모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의미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의 탄생과 신분과 삶 등이 매우 비참할 것임과 정신적·육체적으로 치명적인 큰 고난을 받게 될 것임을 아우르는 표현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나타내는 ‘인생보다’(메 이쉬)라는 말을 사용하여, 메시야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매우 비천한 삶을 살고 극심한 고난을 받게 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했던 메시야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출애굽을 인도했던 여호와의 종 모세는 매우 빼어난 외모에(출 2:2) 왕실의 고등 교육을 받은 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거 출애굽의 구원보다 더 놀라운 바벨론에서의 구원을 이룰 메시야는 더 훌륭한 배경과 조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으나 놀랍게도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 못한 배경과 조건을 가지며 매우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여호와의 종의 면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여호와의 종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초라한 시골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으며, 목수의 아들로서 공식적인 학문수업을 받지 못했습니다(요 7:15).
  또한 그는 죄인으로 고소를 당해 온갖 고난을 당하였고, 흉악범들이 당하는 십자가 형으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14절하,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의 몰골은 처참하게 망가져 눈뜨고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145장을 작사한 버나드는,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  조롱과 욕에 싸여 가시관 쓰셨네
    아침 해처럼 밝던 주님의 얼굴이 고통과 치욕으로 창백해 지셨네“  
라고 노래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상한 것은 많은 고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이를 토로하셨습니다.
  마 26:38,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아무 것도 모르는 제자들은 피곤하여 골아 떨어졌지만 주님은 피땀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마 26: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많은 고민이 예수님의 얼굴을 상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상했던 또 다른 이유는 물리적인 상처 때문입니다.
  주님은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며 재판을 받고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군병들에 의해 많은 채찍을 맞으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에 대못을 박히셨습니다. 그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씌어졌고 가시대문에 흘러내리는 피는 그 얼굴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그 엄청난 육체적인 고통으로 몰골이 다 망가졌습니다. 일찍이 그렇게 잔인하게 다루어진 자도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철저하게 망가져야 했습니다.

  시편 22편 6절에서는 메시야의 모습을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이니이다” 라고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그를 미워했고, 그를 만물의 찌꺼기로 취급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왜 이렇게 되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의 상하신 얼굴은 우리를 대신하여 겪으신 그 모진 고난과 고통이 어떠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컸기에 주님이 이런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우리의 죄가 얼마나 많았기에 주님이 이런 아픔을 겪으셔야 했습니까?

  고난의 계절에 주님의 상하신 얼굴을 바라보며 나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깊이 깨닫고, 죄를 멀리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
  주님의 상하신 얼굴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만들어진 얼굴입니다. 주님의 망가진 모습을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자신을 던져 사랑하셨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엄청난 고통과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얼마든지 로마 군병들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열두 영 더 되는 천군 천사를 동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발아래 무릎꿇게 할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 주님이 이처럼 처참한 몰골이 되기까지 고통의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명심 때문입니까?  자랑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고지식해서입니까?

  주께서 고난의 잔을 기꺼이 마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원하여 고통을 받으신 주님의 사랑을 상하신 주님의 얼굴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주님의 상하신 얼굴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당하신 주님의 사랑의 흔적입니다.

  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우리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주님의 승리
  주님의 상하신 얼굴이 영원한 주님의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그 상하신 얼굴은 잠시 후 영광스런 얼굴로, 해처럼 밝은 모습으로 변하셨습니다.

  15절,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열방이 놀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들이 입을 봉할 만큼 크게 놀라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선 14절에서는 사람들이 메시야의 비참함과 고난으로 인해 놀랄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본 절에서는 이와 대구를 이루면서 메시야의 영광스러운 승귀(=높아지심)로 인해 열방들이 놀랄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 사람들이 이전에는 결코 알지 못한 것을 지칭합니다. 그것은 메시야의 구속 사역에 포함된 역설적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으로써 다시 살아나며,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며, 철저히 낮아지심으로써 지극히 높아지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이 세상 나라의 원리와는 다른 역설적 원리가 적용되는 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역설의 원리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즉음으로써 다시 살고 낮아지심으로써 높아지는 나라입니다.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요 12: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우리 예수님은 이러한 원리를 따라 친히 낮아지시고 친히 그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주님은 무덤을 깨치시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사 지극히 높임을 받으셨고, 우리 스스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선사하셨습니다.

  이러한 역설적인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고 그 사역의 결과로 인해 우리는 구원을 얻었고, 지극히 높은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감당키 어려운 고통이 있습니까?  주님의 상하신 얼굴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상하신 얼굴이 승리의 얼굴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공 앞에는 남모르는 고통의 고비가 있듯이 부활의 기쁨을 맛보려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상하신 얼굴에서 주님의 부활과 주님의 왕 되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독일의 화가인 슈테른 베르그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슈테른 베르그는 예수님의 그림을 그리려고 했지만 잘 그려지지 않아 한쪽 구석에 그냥 방치해 둔 채, 돈을 벌기 위해 집시를 데려다가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그 집시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묻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데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슈테른 베르그는 별 생각 없이 흔히 하는 상식적인 대답을 합니다.  ‘이 분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그 집시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죄를 위해서도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말에 슈테른 베르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나를 위해 이런 큰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던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큰 은혜를 받은 후에 그는 ‘이 사람을 보라’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이 독일의 한 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이 그림을 보던 한 사람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독일의 한 백작이 관람하러 왔다가 그 그림 앞에서 자석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림 속의 얼굴이 살아서 자기를 보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떨면서 그 앞에 서 있던 그는 그림 아래에 있는 글씨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글씨도 살아서 자기에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내 몸을 주고 너를 위해 죽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얼 하고 있느냐?”

  그는 거기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할까요?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요?”  그는 그 앞에서 울며 크게 헌신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전 재산을 바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선교사를 훈련하여 파송했습니다.  그가 바로 모라비안 선교회에 열풍을 일으킨 진젠 돌프 백작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 ‘그 상하신 주님의 얼굴을 보라’,  ‘나를 위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보라’

  주님은 오늘 우리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소망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주님의 그 상한 얼굴을 바라보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출처/박순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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