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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성아! 평화를 알라 /눅19:28-44

by 【고동엽】 2022. 8. 14.

눅19:28-44  

전 세계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종교적으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만큼 중요한 도시는 없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 회교, 유대교 모두 각각 자기 종교의 성지로 삼고 있는 거룩한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인류 역사 속에서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거룩한 땅이요, 신비의 땅이며 축복의 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라는 말은 평화의 땅, 평화의 성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평화, 신의 가호가 있는 땅이라는 뜻이 예루살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인류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만큼 전쟁과 파괴와 피의 역사로 점철된 도시는 없습니다. 예루살렘 도시의 역사는 약 B.C. 400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6000년의 역사 속에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이 그렇게 인류의 역사 속에서 불안과 공포와 싸움의 도시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을 오늘 주님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19:41-42)
주님이 우시기까지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은 평화에 대한 길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니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이제 평화의 왕이 우리 삶 속에 오실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주님을 모실 나귀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맞은 편 마을 벳베게와 베다니 마을에 가까이 왔을 때 가서 나귀를 끌고 오리고 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눅19:30-31)
(1)정말로 주님이 쓰신다고 하면 아무 이유없이 내 주는 이름없는 나귀 주인이 나옵니다. 나귀는 유대나라 이스라엘에서 제일 가는 재산 목록입니다. 농사도 짓고 물건도 나르고 사람도 타는 최고의 운송수단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사막같은 중동 지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농부는 주님이 쓰신다고 할 때 물어보지 않고 선뜻 내놓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귀합니다.
(2)여기서 주님을 모시는 나귀는 내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나귀가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귀는 착각하면 안됩니다. 자기가 잘나서 환영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축복받고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등에 타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우리도 쫓겨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을 모시고 사는 나귀의 위치를 잘 지켜야 평화의 축복을 받습니다.
두 번째, 우리의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모시려면 겸손히 겉옷을 깔아야 합니다.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눅19:35-36)
여기서 겉옷은 우리의 명예요, 우리의 자존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님 오시는 길에 깔을 수 있을 때 평화의 왕은 오실 수 있습니다. 참 이것이 어렵지만 이것이 온전히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최고 영성 목회자로 알려진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자기가 조금이라도 스스로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쓰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어떤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자는 오직 스스로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자를 불러서 하나님이 쓸모있게 쓰시어 영광 돌리게 하신다.”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지금 여기서 구원하신다는 호산나 찬양 하는 자 속에 오십니다.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은 지금 여기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입니다.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고 미래에만 역사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지금 역사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고백하는 자 속에 역사하고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서 역사하십니다. 주님을 평화의 왕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출처/민경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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