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강 누가 너희를 내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랴(3:13-15)
3:13-15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말을 두 번 사용하였습니다. 노하고 분했다고 했습니다. 대단히 화가 난 것입니다. 왜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렇게 화가 났습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틀림없이 분명하게 명을 내렸습니다. "왕실 관현악단의 연주 소리가 나면 내가 만든 신상 앞에 꿇어 엎드려 절해라." 분명히 명령을 내렸습니다. 거기다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고 하면서 엄하게 벌을 주겠다고 위협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 임금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진 것입니다.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절하지 아니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화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노하고 분했다고 했는데 이 두 단어를 한 단어로 합치면 무슨 말이 됩니까? "분노했다." 제가 너무 쉬운 질문을 했습니까? 묻는 데 의도가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하나 하면서 조금 어려운 것을 물을 테니까 잘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 사나이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의 소원이 무엇이냐? 내가 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사나이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왕이 되고 싶습니다." 첫째 사나이는 자기 소원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두번째 사나이는 "저는 아름다운 별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소원도 들어주었습니다.
세번째 사나이는 욕심이 많았습니다. 앞에 두 사람이 하나는 왕이 되었고, 하나는 별이 되었는데 자기는 둘 다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저는 둘 다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셨습니다.
뭐가 되었을 것 같습니까? 별왕이요? 왕별이요? 그렇게 쉬우면 제가 묻겠습니까? 노와 분을 합치면 분노가 되었습니다. 분이 먼저 왔습니다. 왕을 영어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킹(king)이라고 합니다. 별은 영어로 스타(star)입니다. 둘 다 되고 싶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양말이 되었습니다. 왜요? 스타와 킹을 합치면 스타킹이 되니까요. 욕심 부리면 안됩니다. 현실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하나님이 지난 일년 동안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현실에 만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꾸 욕심을 부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더 나아지려고 하니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내일이 무슨 날입니까? 맥추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리는 날인데 아직까지 준비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가족이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내 생일도 몰라주고 무관심 속에 넘어가 버린다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내일은 맥추감사주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 주셨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꼭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서 감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헌금할 때도 되는 대로 헌 돈으로 하나님께 드리지 말고 새 돈으로 바꿔서 준비해야 합니다. 돈 드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작은 정성이라도 하나님께 우리 마음으로 표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어떻게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까? 끌어오라고 했습니다. 조심해서 모셔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왕이 명령하니까 신하들은 느부갓네살 임금의 명령대로 시행했습니다. 발길질을 하면서 마구 끌고 왔을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드디어 느부갓네살 임금이 심문합니다. 무엇이라고 심문하는지 보십시다.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느부갓네살 임금은 갈대아 사람들의 참소를 그대로, 여과 없이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확인해 보기 위해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세 가지로 참소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다.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첫째로,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둘째로,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셋째로,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했는데 지금 14절에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물을 때는 하나가 빠졌습니다. 무엇입니까? 첫번째 것이 빠졌습니다.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가 빠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은 그 동안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자기를 섬긴 과거의 모습들을 봐서 그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왕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사랑하고 아끼고 총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냐?"고 확인을 하면서 15절을 보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세 친구를 아끼는 마음에서 다시 한번 기회를 줍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느부갓네살 임금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위해서 왕실 관현악단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합주를 시킬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세 친구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능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죽이기 아까웠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들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 위협도 합니다.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보세요.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런 일에 눈도 꿈쩍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풀무불을 가지고 위협했지만 세 친구는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벌써 죽었어야 할 몸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항복했을 때 이미 죽었을 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지금까지 살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에서 그들을 높이 들어 써주셨습니다.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임금 앞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마음을 평안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이군인이 간증을 하기 위해서 단상에 섰습니다. 사회자가 그를 소개하면서 나라를 위해서 한쪽 다리를 다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이군인이 단상에 서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우리 조국을 이미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 조국은 내 몸과 마음 가운데 다리 한쪽만 받고 그 나머지는 내게 다 돌려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어야 하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 그때에 우리는 이미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주님을 위해서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생명 주시고, 우리에게 건강 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시금 다 되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우리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내 시간, 내 목숨, 내 건강, 내 물질이라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마음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의 그런 마음 자세와는 달리 느부갓네살 임금을 보세요. 느부갓네살 임금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보십시다.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믿고 의지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도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교만합니까? 분노 때문에 이성조차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교만은 무엇의 선봉이라고 했습니까?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교만이 있으면 가정이든, 개인이든, 국가든 패망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완전히 침착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가르쳐준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분명히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잊어버렸습니다.
일제 시대 때 평양에서 장로교 총회가 열렸습니다. 목사들과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결정했습니까? 신사 참배는 죄가 아니다, 애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그것을 결정했습니다. 한부선 선교사님이 반대했습니다.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반대했습니다. 목사직을 면직 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교계의 영적인 지도자들이 신사 참배하기를 공식적으로 가결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평양에 사탄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공산 정권이 들어선 것이 당연합니다.
살고자 하면 죽습니다. 주를 위해서 죽고자 하면 삽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덤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생각하면서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말고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주님이 주신 이 생명을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도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발걸음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말을 두 번 사용하였습니다. 노하고 분했다고 했습니다. 대단히 화가 난 것입니다. 왜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렇게 화가 났습니까? 느부갓네살 왕이 틀림없이 분명하게 명을 내렸습니다. "왕실 관현악단의 연주 소리가 나면 내가 만든 신상 앞에 꿇어 엎드려 절해라." 분명히 명령을 내렸습니다. 거기다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고 하면서 엄하게 벌을 주겠다고 위협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 임금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지금 벌어진 것입니다.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절하지 아니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화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노하고 분했다고 했는데 이 두 단어를 한 단어로 합치면 무슨 말이 됩니까? "분노했다." 제가 너무 쉬운 질문을 했습니까? 묻는 데 의도가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하나 하면서 조금 어려운 것을 물을 테니까 잘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 사나이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의 소원이 무엇이냐? 내가 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첫째 사나이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왕이 되고 싶습니다." 첫째 사나이는 자기 소원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두번째 사나이는 "저는 아름다운 별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소원도 들어주었습니다.
세번째 사나이는 욕심이 많았습니다. 앞에 두 사람이 하나는 왕이 되었고, 하나는 별이 되었는데 자기는 둘 다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저는 둘 다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소원도 들어주셨습니다.
뭐가 되었을 것 같습니까? 별왕이요? 왕별이요? 그렇게 쉬우면 제가 묻겠습니까? 노와 분을 합치면 분노가 되었습니다. 분이 먼저 왔습니다. 왕을 영어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킹(king)이라고 합니다. 별은 영어로 스타(star)입니다. 둘 다 되고 싶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양말이 되었습니다. 왜요? 스타와 킹을 합치면 스타킹이 되니까요. 욕심 부리면 안됩니다. 현실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하나님이 지난 일년 동안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현실에 만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꾸 욕심을 부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더 나아지려고 하니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내일이 무슨 날입니까? 맥추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께 큰 감사를 드리는 날인데 아직까지 준비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가족이 다른 일에 신경 쓰느라 내 생일도 몰라주고 무관심 속에 넘어가 버린다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내일은 맥추감사주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 주셨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꼭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서 감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헌금할 때도 되는 대로 헌 돈으로 하나님께 드리지 말고 새 돈으로 바꿔서 준비해야 합니다. 돈 드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작은 정성이라도 하나님께 우리 마음으로 표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어떻게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까? 끌어오라고 했습니다. 조심해서 모셔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왕이 명령하니까 신하들은 느부갓네살 임금의 명령대로 시행했습니다. 발길질을 하면서 마구 끌고 왔을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드디어 느부갓네살 임금이 심문합니다. 무엇이라고 심문하는지 보십시다.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느부갓네살 임금은 갈대아 사람들의 참소를 그대로, 여과 없이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확인해 보기 위해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세 가지로 참소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다.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첫째로,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둘째로,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셋째로,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했는데 지금 14절에서 느부갓네살 임금이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물을 때는 하나가 빠졌습니다. 무엇입니까? 첫번째 것이 빠졌습니다.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가 빠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은 그 동안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자기를 섬긴 과거의 모습들을 봐서 그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왕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사랑하고 아끼고 총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냐?"고 확인을 하면서 15절을 보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세 친구를 아끼는 마음에서 다시 한번 기회를 줍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느부갓네살 임금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위해서 왕실 관현악단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합주를 시킬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세 친구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능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죽이기 아까웠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들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 위협도 합니다.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보세요.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런 일에 눈도 꿈쩍 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풀무불을 가지고 위협했지만 세 친구는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벌써 죽었어야 할 몸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항복했을 때 이미 죽었을 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지금까지 살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에서 그들을 높이 들어 써주셨습니다.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임금 앞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마음을 평안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이군인이 간증을 하기 위해서 단상에 섰습니다. 사회자가 그를 소개하면서 나라를 위해서 한쪽 다리를 다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이군인이 단상에 서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우리 조국을 이미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 조국은 내 몸과 마음 가운데 다리 한쪽만 받고 그 나머지는 내게 다 돌려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어야 하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 그때에 우리는 이미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주님을 위해서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생명 주시고, 우리에게 건강 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시금 다 되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우리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내 시간, 내 목숨, 내 건강, 내 물질이라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마음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의 그런 마음 자세와는 달리 느부갓네살 임금을 보세요. 느부갓네살 임금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보십시다.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믿고 의지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도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교만합니까? 분노 때문에 이성조차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교만은 무엇의 선봉이라고 했습니까?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교만이 있으면 가정이든, 개인이든, 국가든 패망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완전히 침착을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가르쳐준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분명히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 임금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잊어버렸습니다.
일제 시대 때 평양에서 장로교 총회가 열렸습니다. 목사들과 장로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을 결정했습니까? 신사 참배는 죄가 아니다, 애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그것을 결정했습니다. 한부선 선교사님이 반대했습니다.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반대했습니다. 목사직을 면직 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교계의 영적인 지도자들이 신사 참배하기를 공식적으로 가결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평양에 사탄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공산 정권이 들어선 것이 당연합니다.
살고자 하면 죽습니다. 주를 위해서 죽고자 하면 삽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덤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생각하면서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말고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주님이 주신 이 생명을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도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저와 여러분의 복된 발걸음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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