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제26강 금 신상을 세움(3:1-3)

by 【고동엽】 2022. 4. 13.

제26강 금 신상을 세움(3:1-3)

 

 

3:1-3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느부갓네살 왕이 보내어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을 자기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게 하매 이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여 느부갓네살의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 거대한 신상을 보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자기가 꿈에 보았던 신상 그대로 실제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있어서 거대한 신상을 만드는 일은 어떻게 보면 공통적인 일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애굽에 가면 아시겠지만, 그 모래 벌판에 스핑크스를 만들었습니다. 높이가 약 22m, 길이가 80m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입니다. 그때가 주전 약 2500년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한 것이 주전 586년입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이 신상을 세우기 2천년 이전에 애굽은 모래 벌판에 거대한 신상 스핑크스를 만들었습니다. 애굽의 람세스 2세는 자기 모양의 거대한 신상을 돌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도 자기가 꿈에 보았던 신상을 세웠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마 자기 모양을 본떴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무엇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까?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느부갓네살 임금이 꿈에 보았던 신상은 머리만 금이었습니다. 두 팔과 가슴은 은으로 되어 있고, 그밖에 놋과 철, 발가락 일부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임금은 신상을 만들 때 몽땅 다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다니엘이 꿈을 해석해주면서 "왕은 금머리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 나라가 더 이상 다른 나라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금머리로 상징되는 자기 나라가 영원히 든든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신상 전체를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엄청난 신상을 속까지 전부 금덩어리로 만들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사 40:19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금으로 입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안에는 나무로 만들고 겉에만 금으로 입힌 것입니다. 금으로 온통 신상을 칠했습니다.
그 다음을 보십시다. "고는 육십 규빗이요 광은 여섯 규빗이라." 높이가 60규빗이라고 했습니다. 1규빗은 팔꿈치부터 손가락 끝까지로 대략 45㎝ 정도 됩니다. 계산하기 편하게 50㎝로 잡으면 높이가 얼마나 됩니까? 30m 정도 됩니다. 10층 건물 정도 되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키가 큰 것입니다. 그리고 광은, 즉 너비가 여섯 규빗이라고 했습니다. 3m 정도 됩니다. 어깨의 너비가 3m, 높이가 30m입니다.
보통 사람은 제 체구를 한번 보세요. 어깨가 약 40㎝, 제 키가 기분이 좋으면 약 177㎝, 기분이 언짢으면 175㎝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네 배 내지 다섯 배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임금이 세운 신상은 어깨 너비에 비해 키가 열 배입니다. 보통 사람 모양보다 키만 두 배가 높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어깨 너비와 똑같고 키는 저보다 두 배가 크다고 생각해보세요. 균형이 잡히지 않은 모습입니다. 꺽다리입니다. 63빌딩처럼 아주 높게 세웠습니다.
고고학적으로 바벨론 사람들은 6진법을 썼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10진법을 씁니다. 1부터 0까지 10개의 숫자를 쓰는 것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12진법을 썼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6진법을 썼다고 했는데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성경에 6이라고 하는 숫자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의 숫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몇째 날에 창조하셨습니까? 여섯째 날에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숫자인 완전수는 7입니다. 6은 아무리 해도 늘 7보다 못합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커도 하나님 아래입니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임금의 꿈에 보여준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박살나 버리지 않았습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은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굴복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그것을 알아야 하는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내게 있노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금 신상을 만든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는데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금 신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어디에 두었습니까?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평지에 세웠습니다. 바벨론 도성에서 동남쪽으로 6마일, 약 10㎞ 떨어진 곳에 두라 평지가 있습니다. 왜 평지에 세웠을까요? 어디서나 누구나 잘 볼 수 있도록 평지에 세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느부갓네살 임금은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권세와 자기의 영화를 과시하기 위해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상입니다. 신으로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늘 싸움에서 승리를 안겨다 준 바벨론 최고의 신인 벨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종교적으로 바벨론을 통일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2절을 보십시다. "느부갓네살 왕이 보내어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을." 일반 서민을 불러 모은 것이 아닙니다. 관리들을 몽땅 다 불러 모았습니다. "자기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게 하매." 왕이 명령을 내리니까 그 결과 3절에 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모이라고 한 2절과 관원들이 다 모인 3절을 비교해보십시다. 무엇이 빠졌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을."
3절을 읽어봅니다.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누가 빠졌습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예, 아무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어떤 사람인데 감히 빠집니까? 느부갓네살 임금 앞에서 불순종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한 것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감히 느부갓네살 임금이 누구인데 느부갓네살 임금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거역하면 어떻게 됩니까? 몸은 쪼개지고 집은 거름터가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누가 있습니까? 어제 우리가 보았습니다만 다니엘의 세 친구가 도지사로 발령났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2:49 끝 부분을 보니까 다니엘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 그러니까 왕이 낙성 예식에 참여하는 동안 국무총리였던 다니엘은 궁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빠졌습니다. 만일 다니엘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다니엘도 왕이 만든 신상에 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 친구와 함께 풀무불에 던져졌겠지요? 그러나 그때 다니엘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왕이 없는 동안 왕을 대신해서 왕궁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서 깨달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어린 나이에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그리고는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엄청난 시련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로 몸을 더럽히느냐 마느냐하는 갈림길에 놓였습니다. 참으로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이 꾸었던 꿈으로 인해서 죽을 뻔했습니다. 이번에는 왕이 거대한 신상을 만들고 꿇어 엎드려 절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극심한 시련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길은 끊임없는 환난의 연속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든지 없는 사람이든지 늘 시련 속에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다니엘과 세 친구를 보살펴주셨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뜻을 정하고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갈 때 그 극심한 환난들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는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되지 않고 더 크게 더 귀하게 쓰임 받는 축복의 디딤돌이요,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살아가는 가운데 이런저런 환난과 시험과 고난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것 때문에 세상과 타협해서 넘어지는 연약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지 말고, 다니엘과 세 친구처럼 뜻을 정하고 뒤돌아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나아가서 우리가 당한 어려운 일들이 더욱더 큰 축복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