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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강 신상에 절하지 않은 세 사람(3:8-12)

by 【고동엽】 2022. 4. 13.

제28강 신상에 절하지 않은 세 사람(3:8-12)

 

3:8-12
그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무릇 사람마다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리어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바벨론의 두라 평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던 벳새다 들판에 장정만 오천 명이 모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 그보다도 훨씬 이전이고, 또 왕이 집결시킨 사람들이니까 더 많은 숫자가 모였을지 모릅니다. 하여튼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저들은 바벨론 각 도에서 올라온 관리들이었습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세운 금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바벨론 각 도에서 올라왔습니다.
지금 중앙에는 느부갓네살 임금이 만든 거대한 금 신상이 놓여 있습니다. 햇빛을 받아서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옆에는 금 신상을 만드는데 사용한 거대한 풀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풀무에서 극렬히 타오르는 화염이 멀리서도 보였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금 신상이냐, 그렇지 않으면 풀무불이냐? 금 신상에 꿇어 절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지느냐?
어제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만일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여러분이 만일 그런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그분은 처자가 맘에 걸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리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위해서 부모, 형제, 가족을 버리는 자는 축복을 받을 것이라." 원리는 우리가 분명히 압니다. 그런데 현실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리는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이지만 곧 그 길이 영생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것을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길은 가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길의 종국은 멸망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드디어 왕실 관현악단의 합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연주 소리와 함께 모든 사람이 금 신상 앞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였습니다. 저들은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의 정신을 가지고 금 신상 앞에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다니엘의 세 친구의 마음에는 자기들과 같이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고 신앙의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많이 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유다에서 온 동족만큼은 하나님 앞에 신앙의 일편단심을 지키기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풀무불의 위협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금 신상 앞에 다 절하고 말았습니다.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은 나라 이름이고, 갈대아라는 것은 인종학적인 이름입니다. 제가 과거에 중국 북경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 계신 선교사님을 따라서 북경의 포장마차 골목을 가본 적이 있습니다. 워낙 유명하다고 해서 가보았습니다. 100m 정도의 거리가 양쪽으로 다 포장마차입니다. 중국 곳곳에서 온 포장마차와 관련된 특산물들이 다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저는 중국 사람들도 다 우리처럼 생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노랗고 눈동자가 파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련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중국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인데 어떻게 머리가 노라냐고 했더니 땅덩어리가 하도 넓어서 카자흐 쪽에는 틀림없이 중국 사람이고 중국어를 쓰는데도 머리가 노랗고 파란 눈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안에는 나라는 중국이지만 조선족도 있고, 한족도 있고 족속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바벨론 나라 안에 유다 족속도 있고, 갈대아 족속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갈대아 사람은 본토 사람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도 역시 갈대아 족속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통하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갈대아 사람들이 나와서 유다 사람들을 참소했습니다. 참소라는 말은 좋은 말입니까? 나쁜 말입니까? 나쁜 뜻입니다. 악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다니엘과 세 친구에 대해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는 유다에서 끌려온 포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본토 사람을 제치고 국무총리가 되고 도지사가 되었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거기에서 악의에 찬 참소를 하게 된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먼저 인사를 했습니다.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옛날 독일 사람들은 지체 높은 사람들 앞에 가면 "하일!"이라고 인사했습니다. 히틀러에게 "하일! 히틀러!"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라고 인사했습니다. 우리 나라 옛날 조선 왕조 때는 신하들이 왕 앞에서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왕을 알현할 때 제일 먼저 무엇이라고 인사했겠습니까? "성은이 망극하나이다"라고 했을까요? 바벨론 사람들은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라고 왕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격식을 차리고 나서 10절에 보니까 갈대아 사람들이 왕이 내린 명령을 왕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무릇 사람마다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리어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왕이 이렇게 친히 명령을 내리지 않았느냐고 왕이 내린 명령을 왕 자신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1절에 보면 왕이 내린 벌이 무엇인지도 왕에게 상기키시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다.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지금 은근히 왕에게 구실을 가하는 것입니다. "왕이여,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왕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왕이 내린 명령대로 과연 처분을 하실 것인지, 실행에 옮기지 않으실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참소가 시작됩니다. 12절입니다.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 이름은 바벨론식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식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라고 했습니다.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그 세 사람은 왕께서 친히 세운 사람이고, 왕께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왕명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을 더 나쁜 사람으로 몰기 위해서 세 사람이 왕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가지로 참소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왕의 명을 어긴 것은 왕을 무시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우리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라고 하지 않고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자꾸 "왕의 명," "왕의 신들," "왕이 세우신 금 신상"이라고 하면서 왕을 강조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개인적인 감정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왕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왕으로 하여금 화가 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나쁜 일을 하려면 자기 혼자 나쁜 일을 할 것이 지, 꼭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이런 좋지 못한 심리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입니까? 하와 때부터 그랬습니다. 혼자 따먹지 왜 아담까지 같이 먹게 합니까? 그때부터 시작해서 사람은 자기 혼자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같이 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사람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의롭게 살려고 하면 핍박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바르게 살고자 할 때, 정직하게 살고자 할 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고자 할 때 당하는 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정직하게 살고 바르게 살아가는 길이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요, 영생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면 그 순간은 쉽지만 그 넓은 길의 종국은 멸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고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의의 길, 바른 길, 생명의 길을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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