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강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3:19-23)
3:19-23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19절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고 뉘우치고 자기가 만든 금 신상에 절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어떠한 태도를 보였습니까? "왕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지라도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또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왕이 만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말했습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대담했습니다.
그러니 왕이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얼굴빛이 확 변했습니다. 무안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으니까 얼굴빛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평소에 풀무불의 온도는 섭씨 1000°였습니다. 칠 배라고 하는 것은 꼭 1000°의 일곱 배인 7000°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잠 24:16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그러면 일곱 번 넘어지고 일어난 다음에 여덟 번째는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7이란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칠 배나 뜨겁게 하라는 말은 할 수 있는 대로 최대로 뜨겁게 온도를 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느부갓네살 임금은 이성을 잃은 것입니다. 저 같으면 사람을 태워 죽일 듯 말 듯한 온도로 해서 오래도록 괴롭힐 텐데 평소보다도 일곱 배나 뜨겁게 하면 고통 없이 금방 죽어버리지 않겠습니까?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고통 없이 죽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군대 중에서 비리비리한 사람 말고 가장 용감하고 가장 힘이 센 용사 몇 사람을 뽑아서 명하였습니다.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느부갓네살 임금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한 말 중에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지라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에 대해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세 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무슨 조치입니까? 첫째는, 풀무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했습니다. 두번째, 가장 힘센 용사에게 명했습니다. 세번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꼼짝 못하도록 결박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고 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다.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고의가 무엇입니까? 속바지입니까? 그러면 속바지 입고, 속옷도 입고, 그 위에 겉옷을 입었으니까 3중으로 입었습니다. 거기다가 또 별다른 옷을 걸쳤습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느부갓네살 임금이 만든 금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석했으니까 모두가 겉에 별다른 옷, 예복이나 관복을 입고 그 자리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하여튼 옷 입은 채로 결박해서 그대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졌습니다. 맨몸으로 던지는 것보다 옷 입은 채로 던지면 불이 붙기가 쉬울 것입니다.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그때까지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으신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지금 구해주시는 것보다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구해주시면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벨론 사람과 느부갓네살 임금도 지금보다는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면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고, 다니엘의 세 친구도 하나님의 은혜에 더 크게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시간까지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그 길이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가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실 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구원의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눈동자와 같이 지금도 저들을 지금도 살피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의 명령이 엄하고." 평소보다 풀무의 온도를 더 뜨겁게 한 것이라든지, 왕의 얼굴빛이 변한 것이라든지, 왕이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 등을 보아서 용사들은 왕의 명령이 얼마나 엄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세 사람을 결박하여 풀무 속으로 던졌습니다.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라고 했습니다. 제가 한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옛날 풀무는 우윳병처럼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밑에서 아궁이에다 불 땔 연료를 집어넣고 위에 있는 아구에 원료를 집어넣습니다. 금 신상을 만들기 위해서 금이나, 광물질을 위에서 부어서 녹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구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집어던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아직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쳐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2절이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용사 몇 사람을 태워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은 아무리 권세가 대단하다 할지라도 자기에게 충성하는 불쌍한 용사들의 생명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믿으면, 사람에게 충성하면 결국은 낙심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에게 충성하는 용사의 생명을 지켜주었습니까?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믿고, 사람을 따르고, 사람을 의지하면 이와 같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느부갓네살 임금의 권세가 대단하다 해도 자기 부하들의 생명조차 구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믿지 마세요. 풀무불 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는 구원을 얻었고, 풀무불 밖에 있던 던지는 용사들은 죽었습니다. 결박당한 사람들은 살았고, 결박한 용사들은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자기 스스로는 아무런 힘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내가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오히려 온전하여진다고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나는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에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 사람이 만든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더 좋은 포도주를 비로소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이제는 끝장이라고 하지 마세요. 바로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사 형통하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법관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어려운 일을 만났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그때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이 하루도 넉넉하게 승리하시고 주님 안에서 기쁘고 감사하고 즐겁고 행복한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19절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느부갓네살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고 뉘우치고 자기가 만든 금 신상에 절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어떠한 태도를 보였습니까? "왕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을지라도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또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가 왕이 만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말했습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대담했습니다.
그러니 왕이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얼굴빛이 확 변했습니다. 무안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했으니까 얼굴빛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평소에 풀무불의 온도는 섭씨 1000°였습니다. 칠 배라고 하는 것은 꼭 1000°의 일곱 배인 7000°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잠 24:16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그러면 일곱 번 넘어지고 일어난 다음에 여덟 번째는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7이란 숫자는 완전수입니다. 그러니까 칠 배나 뜨겁게 하라는 말은 할 수 있는 대로 최대로 뜨겁게 온도를 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느부갓네살 임금은 이성을 잃은 것입니다. 저 같으면 사람을 태워 죽일 듯 말 듯한 온도로 해서 오래도록 괴롭힐 텐데 평소보다도 일곱 배나 뜨겁게 하면 고통 없이 금방 죽어버리지 않겠습니까?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고통 없이 죽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군대 중에서 비리비리한 사람 말고 가장 용감하고 가장 힘이 센 용사 몇 사람을 뽑아서 명하였습니다.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느부갓네살 임금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한 말 중에서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지라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라는 말에 대해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세 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무슨 조치입니까? 첫째는, 풀무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했습니다. 두번째, 가장 힘센 용사에게 명했습니다. 세번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꼼짝 못하도록 결박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고 했습니다.
21절을 보십시다.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고의가 무엇입니까? 속바지입니까? 그러면 속바지 입고, 속옷도 입고, 그 위에 겉옷을 입었으니까 3중으로 입었습니다. 거기다가 또 별다른 옷을 걸쳤습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느부갓네살 임금이 만든 금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석했으니까 모두가 겉에 별다른 옷, 예복이나 관복을 입고 그 자리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하여튼 옷 입은 채로 결박해서 그대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졌습니다. 맨몸으로 던지는 것보다 옷 입은 채로 던지면 불이 붙기가 쉬울 것입니다.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그때까지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으신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지금 구해주시는 것보다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구해주시면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드러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벨론 사람과 느부갓네살 임금도 지금보다는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난다면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고, 다니엘의 세 친구도 하나님의 은혜에 더 크게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시간까지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그 길이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가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실 때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구원의 능력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눈동자와 같이 지금도 저들을 지금도 살피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왕의 명령이 엄하고." 평소보다 풀무의 온도를 더 뜨겁게 한 것이라든지, 왕의 얼굴빛이 변한 것이라든지, 왕이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 등을 보아서 용사들은 왕의 명령이 얼마나 엄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세 사람을 결박하여 풀무 속으로 던졌습니다.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라고 했습니다. 제가 한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옛날 풀무는 우윳병처럼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밑에서 아궁이에다 불 땔 연료를 집어넣고 위에 있는 아구에 원료를 집어넣습니다. 금 신상을 만들기 위해서 금이나, 광물질을 위에서 부어서 녹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구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집어던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아직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쳐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2절이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용사 몇 사람을 태워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느부갓네살 임금은 아무리 권세가 대단하다 할지라도 자기에게 충성하는 불쌍한 용사들의 생명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믿으면, 사람에게 충성하면 결국은 낙심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이 자기에게 충성하는 용사의 생명을 지켜주었습니까?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믿고, 사람을 따르고, 사람을 의지하면 이와 같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느부갓네살 임금의 권세가 대단하다 해도 자기 부하들의 생명조차 구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믿지 마세요. 풀무불 안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는 구원을 얻었고, 풀무불 밖에 있던 던지는 용사들은 죽었습니다. 결박당한 사람들은 살았고, 결박한 용사들은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 자기 스스로는 아무런 힘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내가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오히려 온전하여진다고 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나는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때에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 사람이 만든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더 좋은 포도주를 비로소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이제는 끝장이라고 하지 마세요. 바로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사 형통하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다니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법관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어려운 일을 만났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그때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이 하루도 넉넉하게 승리하시고 주님 안에서 기쁘고 감사하고 즐겁고 행복한 아름다운 삶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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