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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21세기엔 이런 교회라야 성장한다

by 【고동엽】 2022. 2. 23.

21세기엔 이런 교회라야 성장한다

한국 교회 성장의 현장

 

 


김재헌목사 지음
글을 열면서

21세기 한국교회의 성장, 희망은 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지금까지 경이적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구미교회들의 부러움을 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따른 부정적인 요소가 너무나 많았다. 교회의 성장에 비해서 사회적인 신인도가 너무나 낮은 것이다.
21세기에 관한 진단 중 많은 부분에서 한국 교회도 40-50년 후가 되면 유럽 교회와 같이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미래를 예견한다. 하지만 아무런 처방 없이 쇠퇴론 만을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 곧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21세기는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나 세상에 살고 있다.(“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밖에서 따로 떨어져 살 수 없다. 세상의 변화는 교회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는 신앙의 방법과 세계관과 가치관을 많은 부분 바꾸어 놓고 있다. 목회자는 변치 않는 성경의 복음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해 가는 세상에 증거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목회자가 무서운 속도로 변하는 세상을 바로 읽지 못한다면 시대의 낙오자가 되거나, 그 시대에 풍속에 빠져서 무력한 종교 지도자로 전략하기 쉽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시대의 징조를 바로 알아 깨어 있어서 오는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미래의 세계와 한국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를 예측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는 워낙 돌발적인 사건, 사고가 많기에 역사의 방향이 어떻게 전개될는지 단적으로 결론 짓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대안적인 미래를 제시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에 이바지하므로 미래의 연구는 불완전하다고 해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처럼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과학기술 적인 변화가 가속화되고, 미래의 모습에 대해서 기대와 불안이 교차되고 있는 시대의 변화에 추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국가나 민족은 세계사의 흐름에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회는 보다 다양하고 다변화될 다음 세기에 교회가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미래를 보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과거를 살피는 일이다. 우리가 과거의 교회사를 돌이켜보면 앞으로의 교회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사명감으로 필자는 한국교회의 성장의 현장을 담기를 원했다. 특히 20세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한국교회의 20세기를 마감하고 그 지도력이나 영향력이 21세기에까지 이어질 교회들을 기록으로 남겨놓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100개의 교회를 선정해서 이들의 교회들에 대한 탐방에 들어갔다. 모두 11개의 질문에 대해 인텨뷰를 신청하고 그리고 면담방식을 통하여 자료를 수집해 나갔다. 총 3년 반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정말 지루하고도 힘든 작업이었다. 10개의 교회를 선정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각 교회의 목사님들을 만나 개별적으로 인텨뷰를 요청하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방법으로 접촉을 시도했고 나중에는 서면이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하여 자료를 보충하면서 드디어 한국의 100대교회를 CD-ROM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알짜배기만 골라 이제 한국의 30대 교회를 책으로 엮게 된 것이다.
한국 교회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10년마다 수 적 배가를 이룰 만큼 급성장 한 교회이다. 이러한 성장은 세계 교회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한국 교회만이 자랑이다. 1992년 8월 [뉴욕 타임즈]의 발표에 의하면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한국 교회가 22개가 있다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성장요인에도 불구하고 성숙하지 못한 병리 현상을 동시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은 한국 교회가 있는 자리이며, 목회자 개인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를 기대하면서 한국 교회의 목회는 새로운 구조적 개혁이 필수적이며, 다가오는 미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모델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지난 세기의 성장한 교회들을 살펴보면서 새로운 전망을 가지도록 하는데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교회들은 세상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키고 구원시키는 일에 매우 헌신적으로 사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적으로 매우 앞서 있다. 놀라운 것은 한결 같이 그들이 다른 교회들보다 한 걸음씩 앞서 있다는 것이다.
미래 세계는 전통적인 교회의 형태에 의하여 효율적으로 만족을 주지 못할 것이다. 최근의 한국 교회는 젊은이들을 잃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신세대들의 사고 전환으로 교회는 더 이상 그들의 흥미의 대상이 아니며 케케묵은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할 위기에 있다. 그들은 재미있는 프로그램, 새롭고 낙관적인 예배 분위기, 넓은 주차공간, 부담감이 없는 교회생활을 원하고 있다. 이런 '잃어버린 세대'를 얻기 위하여 교회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터인데, 오늘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교회들이 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에 이르러서 패러다임이 바뀌고 교회의 구조도 상당 부분 바꾸리 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21세기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이다. 오늘 이 책에 소개하는 교회들은 이처럼 사람을 키우는 일에 아주 탁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미래 사회의 또 다른 변화의 하나는 다양성의 극대화이다. 그러므로 미래 교회는 다양성을 포용해야 하며 동시에 통일성을 추구해야 하는 이중성을 가지게 된다. 다양한 목회구조 속에서 일치와 통일성을 이루기 위하여 연구 시도되고 있는 것이 팀 목회이다. 이것은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목회에 참여하는 총체적 개념을 가진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에 소개되는 교회들은 팀목회를 지향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간의 사고 구조는 정보로 변화하고, 지역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간의 사고는 지역화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여 교회는 교회의 구조를 블록화하고 정보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말 놀랍게도 이 책에 소개되는 교회들은 이미 이러한 정보화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들 교회는 성장할 수 밖에 없는 구조와 사람들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 책에서 바로 이러한 점을 읽어야 한다. 단순히 프로그램을 베끼고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관심을 갖기보다는 시대적 흐름, 즉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라는 것이다. 제네바의 칼빈은 그 당시로서는 첨단을 걷는 사람이었다. 우리도 이 시대를 꿰뚫어보는 영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그릇과 그릇에 담겨있는 보물의 차이를 인식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성장하는 교회들을 리서치하는 동안 협조해주신 각 교회 목사님들과 스텝들 그리고 자료를 모으느라고 수고해준 김용주, 최형준 전도사 또 이 책의 출판을 허락해주신 나침반사의 김용호 사장님과 김응국 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저는 이 책을 낼 수 없었을는지 모릅니다.

 

1999년 7월1일
시화에서 김재헌 목사
1.분당중앙교회

“한발 앞서고 목숨을 건 목회로 분당을 복음화 한다”

최종천 목사
●총신대학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한 발만 앞서라

분당중앙교회의 성장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포인트는 한 발 앞서간다는 것이다. 단순한 말 같지만 이것은 많은 대가를 치룰 것을 전제로 한다. 그는 남들이 분당을 생각지도 않을 때 이미 그곳을 내다보았다. 대개 분당의 대형교회들이 서울의 강남지역에서 이사 온 교회들이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맨주먹으로 시작해 오늘날 대형교회를 이루어 낸 장본인이다.

분당에서 죽으리라

“분당 개척교회 제 1호”, “죽기 살기로 목회 하는 목회자”, “개척 5년만에 3000명 교회로 성장” 이러한 수식어가 붙어 있는 목회자가 최종천 목사이다. 일년에 걸친 인터뷰 요청에도 번번이 바쁜 일정 때문에 만날 수 없었던 최종천 목사를 겨우 만날 수 있었던 것은 1997년 한해가 저물어가던 겨울 아침이었다. 필자의 사무실로 급하게 걸려온 전화는 분당 중앙교회의 비서실이었다. “목사님께서 오늘 아침 잠시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괜찮으시면 지금 오실 수 있으신 지요.” 전화를 받고 나서 몇 가지의 도구만 챙겨서 그 길로 분당으로 향했다. 마침 이른 아침이어서 제 2 경인 고속도로는 한산했고 필자가 살고 있는 시화에서 분당까지 30여분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전에 한국 강해 설교학교의 일로 잠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그를 만나고 그와 일대일로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저으기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뛰었다. 1층 로비 뒤편에 마련된 목양실로 안내되어 차와 함께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로 각오하고 합니다.

175cm 이상이 되는 훤칠한 키, 깡마른 체구, 크지 않은 눈이지만 빛이 나는 눈에서 예사롭지 않는 기운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100여명이 넘는 목사님들을 만나고 그분들과 인터뷰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성공한 목회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투철한 소명의식” 이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예레미야 주석을 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대하고 그 안에 평안이 있으라. 네가 솔로몬과 다니엘 보다 지혜가 많을지라도 부르심이 아니면 지옥을 피하는 것같이 전도사업에 임하라”고 하였고, 휫필드는 “어떤 목사든지 주의 성신이 내게 임하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말할 수 없으면 반드시 설교직을 중지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 말씀이 딱 들어맞는 사람이 분당 중앙교회의 최종천 목사라고 한다면 필자의 억측일까(?)
“그 때가 1991년 10월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지역을 달라고 기도하는 증거였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닌 늦깍이 신자였습니다. 6학년 때 홍릉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해서 분당에서 개척할 때까지 23년간 한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다른 분이 목회 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홍릉 교회에서 은혜 받아 총신대로 신학 했고 그 교회에서 교육 전도사, 강도사, 부 목사로 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분당 신도시 계획을 신문에서 알게 되었고, 그 때부터 분당을 돌아다니며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일면은 제가 기도하고 개척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분당 중앙교회를 개척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담히 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목회철학은 대충 대충 하는 것이 아니다. 대충 대충 하였더라면 개척한지 8년만에 5000명을 넘는 대 교회가 될 수 있었겠는가?
“목사님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하자’는 것입니다. 사생 결단의 각오이지요. 열심히 하는 정도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무슨 일이든지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항상 죽기 살기로 각오하고 한다는 생각으로 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면 즉각적으로

최 목사는 사실 신학대학에 다니면서 진로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재학 중 40일 철야기도를 작정한다. 이 때부터 죽기 살기로 기도하는 습관이 붙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기도하는 첫날밤에 “복음으로 이 세상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그 때부터 39일간 이 말씀만을 붙들고 기도할 때에 교회를 담당하는 목회의 꿈을 굳혔고, 기왕 목회를 할 바에야 개척 목회를 하리라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개척 교회의 은사가 있고, 개척교회 스타일의 목사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저는 개척 정신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곳 분당에서 개척하리라 마음먹고는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 말은 듣지도 않았습니다. 재정적인 문제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리라 믿고 친구 두 가정과 제자 한 가정 전도사님 한 분과 처음 개척을 했습니다. 당시 이곳은 허허벌판이었고, 길조차 제대로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분당 전 지역을 다니면서 먼 미래를 보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면 이곳에서도 주의 백성이 구원받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는데 실제 그 기도대로 지금 분당 전 지역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골고루 교우들이 출석하고 있습니다”.
인텨뷰를 하는 도중인데도 최목사는 죄송하다는 소리를 연발하면서 교역자실로 왔다갔다하였다. 그 사이 글을 또 정리하고 한참을 있으니 또 그가 다시 들어와 인텨뷰를 한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지금 사실은 부목사 이하 부교역자들 시험치는 날입니다. 자신의 담당하는 교구와 기관의 성도들 이름을 외우게 해서 기록하게 하는 시험인데요 저는 한 달에 한번씩 꼭 이 시험을 칩니다. 그래서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필자는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몇 명씩의 이름을 외워야 한다는 것인가를 묻자.
“예! 수석 부목사는 1000명정도의 성도들 가정의 이름을 외우게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목사님들도 대개 80명 정도씩은 항상 외우도록 강조합니다. 전도사님들도 적어도 자신의 기관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외우게 합니다. 저는 목회란 곧 양떼를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목자가 자기 양떼의 이름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시험을 친 뒤에 성적이 좋지 않으면 반드시 인사상의 불이익을 줍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적이 아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또 어떻게 보면 양떼들에 섬김의 철저한 자세라고 생각이 들었다.
최종천 목사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가슴에 많이 남았다. 그 뿐 아니다. 부 목사에 대한 그의 교육은 철저하다고 소문이 나있다. 호텔의 과장을 데려다가 매너 교육을 시키는가 하면 교역자들이 일단 교회에 부임해오면 생명보험부터 들어놓게 한다는 것이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전도하고 심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각오하라고 생명보험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그의 지론은 이렇다. 신학교에서 배출되어 나오는 목사는 기본적인 이론밖에 배워 나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첫 번째 담임목사를 잘못 만나면 평생 잘못된 방법으로 목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한국교회에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당중앙교회를 거쳐가는 목사에게는 목회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알게 해서 부 목사들을 통하여 한국 교회를 갱신하겠다는 당찬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분당을 한국의 표본으로

분당중앙교회를 거쳐간 목회자들은 이미 각 교회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그는 자랑했다.
실제로 그는 말을 먼저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실천을 중시하는 사람이요. 행동하는 목회자였다. 그렇다고 그가 과격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는 현재 교단의 신학교인 총신대학에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학과 전학생들이 모두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올해는 일차로 1000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 뿐 아니라 석좌교수제를 실천하고 있는데 지금도 3명의 교수가 총신대학교 석좌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저는 새벽 4시 30분 새벽기도 가는 것을 출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6시부터 9시까지는 어김없이 심방을 다닙니다. 그것이 제게 주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이렇게 많이 모이게 되고 소문이 좋게 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보여드릴 것이 없으니 보신 그대로 솔직하게 적어 주십시오”
인텨뷰를 끝내면서 최 목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분당중앙교회를 나서면서 그가 한 말이 귀를 떠나지 않았다.
“목사님 저는 분당을 복음화 할 것입니다”
그렇다 누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다고 하는가? 아직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위하여 일군을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영광을 받고 계신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시간이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분당중앙교회를 통하여 분당이 한국의 표본적인 복음화 도시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2.안산제일교회

“십자가 목회로 안산을 깨치는

고훈 목사
(장로회신학대학원, 시인, 현안산제일교회 담임)

안산고잔벌의 십자가

서울에서 광명을 거쳐 수인산업도로를 타고 20여분간 달리다 보면 안산의 중심가라고 할수 있는 고잔동에 도착한다. 지하철 4호선이 거의 종점에 이르는 곳 안산 중앙역에 내려도 된다. 전원공업도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국에서 경남 창원 다음에 조성되어진 공업도시 안산, 이제 2단계로 고잔벌 200여만평에 새로운 주거지를 건설 중이다. 그곳 고잔 2동에 안산제일교회는 자리잡고 있다. 37년전 포구가 가까운 허허 벌판에 불과하던 이곳에서 청년 전도사로 부임해와 이제 안산제일의 교회로 성장한 안산제일교회는 그야말로 고훈 목사의 십자가의 목회의 결과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재 이교회는 해외에 30여곳 그리고 10군데의 직접적인 선교지원 국내 특수 선교 30여곳등 나아가서 150여군데의 미자립 농.어촌 교회에 지원을 하는 십자가를 지는 교회로 소문나게 되었다. 어느듯 3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되었지만 그 세월동안 고훈 목사는 한순간 한눈 팔지 않고 묵묵히 한자리를 지키면서 십자가를 지는 신앙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왔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이 교회성장은 고훈 목사의 이러한 십자가 목회의 당연한 결과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산제일교회는 일찍부터 선교와 구제 봉사에 남다르게 헌신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이러한 선교와 구제 봉사는 교회의 제도적 측면 보다는 각기관 혹은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다른 교회와 다르다. 이렇게 해서 매년 거두어 지는 선교비가 10억에 육박한다고 한다.

십자가를 경험하는 예배

안산제일교회는 현재 주일 낮예배는 모두 4부로 나누어서 드리고 있다. 그러니까 1부가 오전8시, 2부는 9시30분, 3부가 11시. 4부는 오후 1시로 모이고 있다. 현재 연건평 1000평의 교육관 건립을 마치고 제2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교육의 기틀을 확실히 다지는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안산제일 교회의 예배의 특징은 겉으로 보아서는 장로교의 다른 예배와 같이 평범하게 보인다. 그러나 고훈 목사의 십자가 목회철학에 의해 구성되어진 치밀한 구성이 엿보인다. 그것은 에배가 십자가를 체험케 한다는 것이다. 첫째 십자가의 체험은 회개의 기도를 통한 갈보리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다. 우리가 갈보리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그 참혹한 십자가를 경험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에서는 언제나 이 갈보리의 십자가 생각나야 하는데 안산제일교회의 예배에는 이것이 느껴 지는 것이다. 성결교회나 감리교회의 예배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장로교 예배에서는 이것이 자주 생략되는 수가 많다. 그런데 안산제일 교회는 담임목사인 자신의 대표기도에서부터 참회의 기도를 드린다.
“오 하나님 자비로우신 주님, 지나간 한주간을 우리가 주님과 무관하게 살며 주님과 동행하지 않은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구원 받은 ㅈ로서 마땅히 주님의 닮아 주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닮고 세상의 말을 쓰고 세상방법으로 살았읍니다. ------ 해서는 안될 일을 행하므로 지은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알면서도 지은 고범죄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성령을 거스린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이렇게 목사 자신의 죄부터 솔직히 드러낸 다음 성도들에게 회개 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함께 통성 기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성도들은 갈보리의 십자가를 경험케 되는 것이다.
통성기도가 끝난 후 고훈 목사는 참회의 선언을 한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하사고 그 땅을 고칠지라.’ 그 다음 경험케 되는 십자가는 우리 대신 질고를 지시는 예수님의 한 없는 사랑에 대한 십자가이다. 이는 곧 우리를 부하게 하시려고 가난학 되신 예수님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내가 져야할 십자가이다. 우리 각자에게도 주님은 십자가 있다고 말씀 하셨는데 인생은 이러한 자기의 십자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날마다 주님을 쫓아가야 하는 삶인 것이다. 고훈 목사는 이러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아무 말없이 37년을 져 왔기 때문에 교인들도 스스로 제십자글 지는 일을 기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이러한 십자를 경험케 되는 예배가 오늘의 안산제일교회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십자가를 경험케 되는 예배는 다른 곳에 있는 것 아니라 단위에서 목사가 선포하는 말씀과 단밑에서 그대로 살고자 십자가를 지는 삶을 일치 시킬 때에 그 효과가 나타난다. 그런 면에서 고훈목사의 설교와 삶은 십자가 그 자체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큰 부흥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고 생각 되어진다.
그는 늘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예배라고 말한다. 창세가 8장 20정에서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순결한 짐승들을 종류별로 잡아서 번제 드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순결할 짐승은 축복의 씨앗이라고 할 수있는데 그것을 잡아서 드렸다는 것을 보면 인간의 축복보다 더 소중한 것이 예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 창세기 22장 5월 이하에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는 장면이 나온다. ‘번제’는 오늘날 ‘예배’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독자(独子)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예배라고 말한다. 또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았었는데 사탄이 나에게 경배 하면 천하의 모든 것을 다 주겠다 시험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물리치시면서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그것을 오나전히 물리치셨다. 이것을 보건대 하나님이 얼마나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받고 싶어하시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예수님의 삶을 연결시켜 보면 예배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출애굽의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할 때 단순히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유를 허락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바로 예배에 있음도 우리는 잘알고 있다.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에서요 또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도 히13:14에서 찬미의 제사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고훈 목사는 말하길 요사이 교회마다 성경공부 운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성경공부도 예배보다 우선이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야말로 가장 중요한 교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고 고훈 목사는 두 번 세 번 힘주어말한다.

모이는 교회

서구 교회가 흩어지는 교회의 기능은 발전했어도 모이는 교회의 기능을 읽어 버렸는데 이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날이 가까옴을 볼수록 더욱그렇게 하자’는 히브리서의 말씀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은 서구의 전철을 발지 않기 위해서는 끝임없이 에배를 개혁해얗 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안산제일교회는 21세기의 예배 위원회를 마들었다고 한다.
레저 문화의 발달은 주일 예배에 위기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는데. 요사이는 I. M. F 때문에 상당히 수그러 들었지만 이러한 위기를 한국교회는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남은 자’들을 통하여 어두움을 밝히고 새벽을 열어가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모든 예배에서 평신도 참여를 극대화 하는 것을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예배에서의 구경꾼이 아니라 자기 역할, 자기 드림의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은 그리스도’로 살아가라고 늘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작은 그리스도’가 많아질 떄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고 그것이 생활 속에서 삶 전체로 그리는 예배의 진정한 의미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십자가를 만남으로

고훈목사가 오늘의 이 자리에 오기 까지 그는 젊은 시절 한창 떄 누워만 있어야 했던 투병생활의 깊은 곤고가 있었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시금도 기억하기 싫은 고통의 시간 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쓴 시에서 병을 고치는데 10여년의 세월이 걸리고 다시 자신의 못난 자아와 자존심을 고치는데 무려 1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말한다.
그는 늘 말하기를, 그 시절 그 아픔의 계절을 얘기하지 않는 다면 저의 신앙과 목회, 인생과 시의 진정한 생명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일찍이 삶과 죽음의 기로를 넘나들던 저는 무엇이 존재의 의미이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잊지 않으려고 무진장 노력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라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약하면 약할수록 하나님은 그만큼 더 강하게 역사하시며, 내가 강해지면 하나님의 손길은 그만큼 작아진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폐결핵으로 10년 동안 외딴 섬에서 요양하게 하시고 낮추셨을떄, 가장 밑바닥에서 자신의 실존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으며, 비교적 축복 가운데 안정된 목회를 하고 있는 지금도 그 삶이 뒷받침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의 목회나 글, 시는 이러한 자기자신의 깊은 고뇌와 하나님의 연단이 없었으면 나올 수 없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실제로 얼마전 안산에 이웃해 있는 시화지역에 안산쪽의 대형교회들이 지교회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안산제일교회내에서도 시화쪽 교인들을 위하여 지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쪽으로 중지가 모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화지역의 개척교회 목사들이 이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아직 자립단계에 있는 시화에 대형교회들이 지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하면 개척교회 목사들은 어떻게 하는냐고 말을 하자 전격적으로 그것을 철회 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시화에 있는 목사들이 고 훈 목사에게 많은 감도을 받았다. 이처럼 고훈 목사는 자신의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고 그것을 당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동하는 목회자 인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목회 그것이 고훈목사의 철학 인 것이다.

십자가를 선포하는 설교

 

고훈목사는 주일 예배의 설교뿐아니라 평소에서 많은 설교를 하게 되는데 설교 준비는 어떻게 할까? 그는 무엇보다 먼저 설교는 첫째, 하나님 말씀자체를 선포하는 것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즉 종교개혁자들의 전통 가감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둘째는 목회자의 삶을 통하여 선포되는 설교 즉 설교하는 목회자 자신의 삶의 고백이 있고 실천속에서 볼여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성도들의 삶의 고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성서의 말씀대로 설교의 목회자가 살고 그리고 그 경험을 교인들에게 전달하게 되면 듣는 교인들의 삶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설교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가 어렵다고 말한다. 고훈 목사의 이러한 설교관은 그의 십자가신학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 십자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헤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살리고 영을 살리는 능력이 되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그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고 자신도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고훈 목사 자신이 그러한 삶을 상아왔고 또 그것을 선포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그는 설교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살기 어려운 것이지. 그 만큼 고훈 목사는 설교를 목회의 비중있는 부분으로 생각한다.

 

십자가를 증거하는 일

 

안산제일 교회에서 그 다음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축호전도이다. 교인들이 1,000명이 넘어갈 때도 담임목사가 직접 나가서 축호전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장년 출석이 3,000명이넘어가면서부터 외부의 부흥회나 세미나 인도 횟수가 잦아져 부교역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도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시작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안산제일교회의 표어가 나도 한사람의 공동체라는 것인데 그 의미는 나도 한사람을 전도해서 공동체를 키워가고 소속력을 키워가자는 것이란다. 그의 목회 방침이 십자가를 지고 말씀으로 산다인데, 고린도전서에 보면 세가지 교회가 있다. 첫째는 헬라파 교회로 시직을 추구하는 교회이고. 둘째는 유대파 교회로 능력을 구한다. 그러나 세 번째 교회인 복음주의 교회는 바울이 주장하는것처럼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전하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안산제일교회는 십지가를 통한 자기 헌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교회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서 말씀이 뒷받침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보듯이 복음을 증거하고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은 교회의 일상사 였습니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그것이 하나의,프로그램이나 단발성 행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실제 고훈 목사의 말처럼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안산제일교회는 이제 21세기를 앞두고 새로운 비전을 세워두고 기도하고 있다. 처음에는 고잔벌에 신도시가 세워지면 한번 더 옮길 것을 생각해 보았으나 그 것보다 다시금 현재의 위치에서 재 도약의 기회를 잡기로 하고 다가오는 21세기 서해안 시대의 기수가 되기 위해서 원대한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청소년과 노인들을 위한 수련관과 요양원을 세우는 일이다. 이일로 얼마전 위원회가 구성되고 제부도에 필요한 대지를 구입 이미 등기 절차를 마쳤단다. 이제 설계가 끝나면 곧 착공할 터인데 그곳을 통하여 청소년 선교와 노인복지의 새로운 장을 열게될 것이라고 한다. 선교에 있어서 만큼은 한국제일의 교회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꿈을 추진하고 있다고 고훈 목사는 이야기 한다.

 

3.경향교회

 

불꽃 같은 절개로 한국교회에 도전하는

 

담임목사 석원태

고려대학교 문학석사

 

 

개혁주의 신앙으로 강서로 시대를 연다

선지와 사도의 터 위에서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그 중심사상으로 하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고려)에 속한 교회로서 예수를 믿는 것이 삶의 목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된 사명을 감당하여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드리는 교회입니다

이 말은 경향교회가 인터넷에서 자신들을 알리는 교회의 머리 글이다. 이 글에서도 나와 있듯이 경향교회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한국교회에 대단히 큰 영향을 준 교회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먼자 간략하나마 경향교회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을지로에서의 경향

 

경향교회는 당회장 석원태 목사에 의해서 개척되어진 교회였다. 당회장 석원태 목사는 1973325일 서울시 중구 을지로 31101번지 건물 3,4층을 전세금 200만원에 계약하고, 부산에서 6명의 가족들이 그해 410일 이사하여 415일 가족 포함 13명이 첫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경향교회의 시작이었다. 그 해 4월말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기노회(고신측)로부터 교회설립허가를 받고 그해 11월 초대장로로 박을생 장로가 취임하여 1113일 당회를 조직하여 조직교회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동자동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된다. 1974216일 서울역 앞 중구 동자동에 소재한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관 건물2층을 임대하여 교회를 옮기면서 경향의 이동시대가 시작되었다. 개척 1년만에 교인수의 빠른 증가로 인한 것이다. 이해 526일 석원태 목사 위임식을 거행하였으며 그해 우종선 장로가 장립을 받았다. 동자동에서는 28개월 15일간 머물면서 여러가지 축복의 징조들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본격저그올 경향교회가 발전하게된 것은 여의도에서이다. 19761031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당시 주부생활빌딩(LG금융빌딩) 3100평을 임대하여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실로 대단한 모험이었고 결단이었다. 교회적으로는 이 결단을 '한강도하작전'이라 부를 정도로 비장함이 있었다. 이 시기는 교회적으로 참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로 기억된다고 교인들은 입을 모은다.

 

반고소의 대명사 고려교단 태동

 

19771218일 주부생활건물 맞은 편의 여의도동 53번지 우정빌딩 4117평을 임대가 아닌 분양을 받아 교회를 옮기었다. 이 무렵 부산고신총회가 신자간의 불신법정 고소가 가하다고 의결하므로 빚어진 신학적인 변질과 생활의 불순에 대한 항의가 발단이 되어 경향교회는 이에 항거하고 총회를 향한 행정보류를 선언한 것이 이른바 고려신학교 복교운동과 반고소 고려측 운동의 산실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경향교회가 받은 3중 개척의 과제였으니, , 교회개척, 신학교 복교, 교단형성이었다. 결코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섭리적 역사였다.

19771219일 주일 우정빌딩 4층으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우리는 이 시기를 교회의 정착기라 부른다. 교회 설립 이후 을지로에서 동자동으로, 여의도 우정빌딩으로 옮기면서 임대가 아닌 분양을 받아 비록 상가 건물이지만 교회소유의 예배당을 갖게 됨으로 안정된 교회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경향선교회의 발족과 더불어 세계선교에 헌신하게 된다. 19804월에 경향선교회를 설립하고 82년에 이태리 선교사로 한평우 목사를 파송, 83년에 인도인 선교사를 파송한 후 미주, 구라파 지역에 계속적인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89년부터는 제3지역 선교를 위하여 남미의 브라질, 러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에 선교사를 집중적으로 파송하여 선교의 방향을 교포선고에서 원주민 선교를 집중적으로 하였다. 또한 선교 정책도 교회 개척에 중점을 두어 현재 오대양 육대주에 74개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8,277명의 성도들이 출석하고 있다. 매스컴 선교에 있어서도 초창기 단순한 문서선교에서 라디오 방송선교, 카세트테이프 제작, TV방송선교 등으로 확대하여 선교의 효과성을 극대화 해나가고 있다.

이때부터 경향교회는 주는 교회로서의 로운 발걸읆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개척교회운동 전개로 350여 교회 해산의 산실

 

경향교회 개척으로 시작된 교회개척운동은 개혁주의 신앙의 고려교단을 형성하는 350여 국내의 교회설림의 모체가 되었으며 바른 교회운동으로 발전시켜 계속적인 교회 개척운동에 앞장서가고 있다.

기독교 사회복지운동의 전개를 위한 한국성민회 설립은 또 다른 발걸음의 시작이었다. 기독교적인 사회복지 사업을 위하여 사회복지법인 한국성민회를 설립하고 신림동 지역의 주민들을 위하여 199512월 종합사회복지관을 건축하였다. 한국성민회에서는 다양한 사회 복지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여 복음과 접목시켜 영육간의 건강한 삶을 누리도록 힘쓰고 있다.

또 하나 경향문화사 설립하여 100여권 서적 출판했는데 가장 최근에 한국교회를 위하여 다락방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한국교회에서 제일먼저 이단성을 문제삼아 이를 책으로 출판하여 개교회의 피해를 막는 일을 했다.

경향문화사는 본격적인 문서선교사업을 위해 1983년에 설립한 것이다. 지금까지 석원태 목사의 설교집, 강해집, 평신도문고, 교리집 등 다양한 서적들을 출판하여 보급함으로 문서선교의 폭을 확대해 가고 있다.

경향수양관 건립및 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 건립은 기독교 역사에 남을 일로서 1976년 동자동 경향교회서 복교된 고려신학교는 날로 늘어나는 선지생도들을 수용하고자 삼각산 기도원, 청량리 동도교회, 강남구 신사동의 상아탑 학원에서 다시 여의도 경향교회로 옮겨가며 수업을 하던 중 관악구 신림동에 2층 교사를 신축하고 안정된 학사일정을 수행하던 중 다시 하나님의 뜻이 있어 1989717일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눌노리 산 2번지 65백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1,500여평의 경향수양관 및 신학교 건축 기공예배를 드렸다. 다음해 12월 공사를 완료하고 1991620일 준공감사예배를 드림으로 오늘의 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로 성장하게 되었다.

 

새로운 강서시대의 경향

경향학원의 인수 및 새성전 건축의 결의는 하나님이 경향에 주신 큰 축복이었다. 1994년은 경향교회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해였다. 하나님께서는 학교법인 경복학원을 인수케하시고 새 성전 신축을 결의하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경향교회 설립 20여 년이 지나도록 몇 차례의 새성전 건축을 시도하였지만, 때가 이르지 아니하여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세계선교운동, 개척교회운동, 신학교 운동에 전력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보다 큰 축복으로 경향 새 성전 건축을 허락하신 것이다.

1995717일 역사적인 경향교회 새 성전 건립 기공예배를 학교법인 경향학원 현장에서 드렸다. 새 성전 건축공사를 시작으로 새로운 강서시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

1997416일 주일에 새성전 건축공정 50% 진척 감사예배를 드렸으며, 그해 928일 주일에는 새성전 상량감사예배를 드림으로 새성전의 위용을 실감하게 된다. 199831일 주일에는 새성전 실내 체육관을 완공하고 개관기념예배 에벤에셀 감사예배를 드렸다.

I.M.F. 경제난의 여파는 여러가지로 새성전 건축에 어려움을 주기도 하였지만, 경향의 성도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의 대 역사를 이루어 오늘 입당감사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을지로와 동자동시대는 경향의 출발이었다. 여의도 22년은 사실상 21세기를 대비하는 준비기간이었다. 개척교회운동, 신학교 운동, 세계선교운동은 새로운 강서시대 도래와 함께 예기되는 21세기를 향한 준비 시기였다. 바야흐로 도래하는 21세기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세기이다. 마지막 세계종말의 선교시기이다. 모든 민족에게 땅 끝까지 예수의 복음이 증거도리 시대이다. 그래서 경향교회는 바로 세계를 받은 교회로 세계선교의 활주로가 될 것이다.

현재 경향교회에서 전개하고 있는 7대복음화 운동은 앞으로 이러한 비젼을 엿보게 한다. 첫째, 개인 구령운동- 교회부흥운동(3.3.3. 운동) 둘째. 개척교회 운동- 500교회 이상의 교회 설립 운동(개혁주의 한국 교회 건설 운동), 셋째, 신학교 운동-고려신학교 아카데미 캠퍼스 운동(개혁주의 신학운동) 넷째. 세계선교운동-100명 이상 선교사 파송 운동(세계원주민 선교 운동) 다섯째. 학원복음화 운동-학원전도운동(기독교 학교 경영 운동) 여섯째. 기독교 사회 복지 운동- 이웃 사랑 실천 운동(시회 복지를 통한 전도 운동) 일곱째. 기독교 문화 운동-비기독적 문화 선용운동(빛과 소금의 역할 운동)등이다. 참으로 한국교회의 영성을 일깨워주는 불꽃같은 영성의 교회가 되기를 필자는 기대해본다.

 

 

 

 

 

 

4.갈보리교회

 

한국교회에 새 좌표를 주는

박조준 목사

 

 

성장과정은

 

세상적으로 말해서 가정이 불우했습니다. 아버지가 16세 때 결혼하셔서 21세 때 저를 낳고 2년 후에 저의 여동생을 낳고 23세 때, 즉 제가 3살 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사실 하나님 믿어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렀지 육신적으로는 아버지라 불러 볼 기회가 없어서 지금도 아버지의 감회가 남다릅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가정적으로 하나님을 믿었고 우리 가정이 풍유(?)가 있어서 우리 동네에 예배당을 짓는 터를 네 놓았는데 시골이었지만 예배당이 꽤 컸습니다.

그 당시에 평양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그것과 못지않게 큰 교회로 있었습니다. 또한 지금은 천명 모이는 것이 별거 아니지만 당시에 5600명 모이는 교회(어른들이)가 상당히 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교회에 대한 애착이 컸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평남에서 태어나 자라서 거기서 자랐습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어릴 때부터 믿는 가정이지만 믿음이라는 것이 뭔지 모르고 교회만 다니다가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삼촌이 계셨는데 삼촌도 26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만 둘 낳고, 그래서 남자라곤 그렇게 두 분이 계셨는데 남자 둘이 모두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까 내 마음이 우리 집안은 이렇게 20대에 세상을 떠나는구나라는 생각을 가져서 나는 어릴 때 뭐할까?’라는 생각을 자연히 가지게 되었는데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남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나도 잘하면 하나님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공부하고 교회 출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625동란이 나고 14후퇴 때 피난 나오면서 애국심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군대에 들어가게 됐는데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면서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하나님 살려만 주시면 내가 하나님 위해서 전적으로 일하겠습니다.’라는 결심을 하게 됐죠.

신학을 하려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대학에 다니고, 사실 같이 공부하고 같은 실력에 있던 사람이 연세대학 의과대학을 갔는데 나도 의과대학 갈 수 있지만 의사가 되는 것보다 목사가 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의사보다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대학을 졸업한 다음 신대원(장로회 신학교)에 갔죠.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뜻

 

첫째는 하나님께 있는데 하나님하고 사람이 똑같이 일해야 하잖아요. 고린도서에 보게 되면 우리는 심고 가꾸고 물주지만 비를 주고 햇빛을 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니까 하나님과 우리는 동역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축복도 하고 우리가 그만큼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철학을 물어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오늘 시대에 사람에게 이미 주어진 말씀인데 이 말씀을 어떻게 주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성경말씀을 가지고 주시는데 그래서 오늘 이 시대 사람과 이미 주어진 말씀을 연결해서 이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이 시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 사명이라 생각하고 성도들을 양육시키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양육시키는 것이 바른 목회라고 확신합니다. 사도바울도 폐역한 시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그랬는데 이처럼 방향감각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먹이고 바로 훈련시켜서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무엇인가를 지도할 책임이 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성장을 위한 조언

 

성장이라는 것은 질적인 성장과 양적인 성장이 있는데 이 두가지가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수적으로 성장을 말한다면 콘츠탄 대제때가 제일 성장 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나 그 시대을 가르켜 기독교 역사상 암흑의 시대라 말하는 데 수가 성장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바른 기독교인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워내는 것이 교회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수적으로 많이 성장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지만 과거에 교회스럽지 못하고 복음에서 떠난, 말하자면 샤머니즘적인, 기복적인 그런 것에 탈피해야 바른 성도들이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에 기대도 많이 있는데 자기들이나 믿고 하는제 복이나 받고자하는 그런 교인들은 아무리 많아봐야 그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제가 왜 샤머니즘적인 것을 말했냐 하면 과거에 한국이 무속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굿하고 하는데 그 사람들이 본 뜻은 이렇게 굿을 해서 어려움을 모면하고 복받고 편하게 살겠다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사람이 천명이고 어떻고, 이천명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문자적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해야 하는데 빛이 발하려면 자신이 타야하고 소금이 맛을 내려면 자신이 녹아져야하는 것 처럼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섞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섞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는데 그런 정신이 한국교회에 있어야 한국 사회를 위해서도 문자적으로 빛을 바라고 맛을 내는 교회로써 존재 의미를 갖을 수 있다고 봅니다”.

 

비젼이 있어야 하나님이 쓰신다.

 

목회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vision이 있어야 하는데 옛날 모세도 하나님이 보여주신데로 vision을 가지고 일했고 이 vision이 있을 때에야 어려움이 있어도 낙심치 않고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vision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vision이 있어야 Vital 생명력이 있고, venture가 있어서 모험이 있고 victor가 있어서 승리가 있다라고 하는데 목회에 있어서 이런 vision이 꼭 필요하고 저는 복잡한게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교회가 되나하는 게 저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크고 작고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만 들면 바로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선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새로운 목회 프로그램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교회가 교회다워야겠다라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힘쓰고 있고, 지금 한국이 경제적으로 만불시대가 됐다고 해서 선진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말도 하고 그러는데, 만불, 이만불, 삼만불 GNP시대가 된다고 해서 국민의식 자체가 선진국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이 되려면 국민들이 특히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의식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애인을 어떻게 대하나인데 옛날에도 장애인이라하면 벌 받아서 그렇게 됐다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그 사람이 범한 것도 아니요 그 부모가 범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안 믿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인 마저도 육체적 어려움을 당하면 꼭 예수를 잘못 믿어서 그렇게 됐고, 벌 받았다하는 것은 성경 사상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고 세속적인 생각, 미신적인 생각이고 무속적인 생각인데 이걸 답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교회가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지만 좀더 발전시킬 계획인데) 시각 장애인, 언어 장애인, 지체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금년부터 분당에 새로 짓는데 공간이 넓어지게 되면 그것을 확대해서 많이 돕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걸 앞장서는데 사회가 앞장설 수 없습니다. 가령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점자를 찍어 보급하는데 현재로는 우리가 제일 큽니다. 다른데에서 하다가 힘들어서 포기하지만 국가에서 갖고 있는 점자 도서관이 13개가 있지만 이름뿐이지 잘 운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안 만들어 놓을 수 없으니까 해 놓은 정도인데, 실제적으로 할 수 있어서 교회가 앞장 서가지고 사회가 이 방면에 따라와서 정말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는 곳이 교회다라고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확장시켜 나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장애인 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그곳을 후원하는 분이 여러분이 있어서 거기서 모아지는 것으로 녹음봉사회와 점자 봉사회를 운영하고, 사랑부라고 해서 주일 날은 장애인들을 모아서 따로 예배 드리는 일을 합니다.”

한때 영락교회에서의 일로 전 정권의 박해를 받았던 적이 있는 박목사님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위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시면서 묵묵히 목회에만 전념해와서 오늘날 갈보리교회를 이만큼이나 성장시키셨다. 참으로 어려운 순간들이었노라고 회고 하시면서도 결코 흔들림이 없으신 목사님을 보면서 우리는 목회자의 한 표상을 보게되는 것 같아 마음 뿌듯하다.

 

5.한신교회

 

별세목회 별세의 삶으로 목회한다.”

 

이중표 목사

한신대학원, 미국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박사(D.Min)

 

교회성장은 진정 멈추었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성장한 뒤안길에서 큰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성장을 추구하던 열정이 식어가고 있으며 또한 성장의 결과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주님의 교회라면 그 목표가 주님의 교회라면 그 목표가 주님의 기대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만약에 주님의 뜻에 일치하지 못한다면 주님의 교회가 되지 못한다. 목회자가 목표를 세운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28:19-20)고 하셨다. 그러므로 목회의 최대 목표는 제자를 삼는 데 있어야 한다.

목회를 하면서 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에 목표를 세우면 세운 대로 이루어지고, 기도하면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할 때 그 결과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에 스스로 성찰하는 일이다. 필자는 개척하고 3년 되던 해에 이런 목표를 세웠다. “전교인 성령 충만, 출석 교인 천명 돌파, 성전부지 300이 제목을 보던 전도사님께서 필자에게 말하길, “목사님, 없는 것은 마찬가진데 1,000평으로 하시죠라고 하여 그 말을 듣고 1,000평을 기도했더니, 1,000평을 주셨다. 참 신기했다. 그때 기도라는 것이 참 중요하고 목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느끼는 것이 있었다. 목표를 세우고 기도한 대로 주신다는 것이다. 하루는 교인 한 분이 오셔서 필자에게 목사님은 ‘0’을 치는 대로 잘되니 한번 더 쳐보시죠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말에 ‘0’을 한번 더 치면 10,000평이 되는데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주께 여쭤보았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후 ‘0’을 하나 더 치고 기도하였는데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분당에 성전 대지 6,500평을 주셨다. 성전 대지 6,500평을 사놓고 자동차로 달려보니 너무 큰 땅이었다. “나도 한을 풀었구나! 이제 큰 교회의 목사가 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가슴이 부풀었다. 그리고 평소에 하지 않던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바람 불던 어느 날 배드민턴을 치다가 공이 날아가는 것을 쫓다 그만 넘어져 팔이 부러졌다. 그래서 두 달 동안 붕대를 감고 갖은 고생을 하여야 했다. 어느 날 누워서 빌 헐이 쓴 [목회자가 제자 삼아야 교회가 산다]라는 책을 읽다가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 너는 지금까지 목표를 세우고 많은 교인들을 모으고 목회를 해서 네 욕망과 꿈을 성취하려고 달려온 것이지 주님께서 세우신 목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을 깨달았다. “너는 넘어져야 한다. 지금 네 목표는 넘어져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성령의 감동이 전해져 왔다. “네 목표는 나의 뜻이 아니다. 내가 네 기도대로 교회당을 세울 수 있는 넓은 땅도 준다마는 그것으로는 내 제자가 되지는 못한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이상은 이중표 목사가 한 세미나에서 밝힌 간증이다.

 

먼저가 제자가 되겠다는 심정으로

 

먼저 목회를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궁금해서 이를 먼저 살펴보았다.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교 3학년 때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처음 읽고 성경을 접근하였으며 고등학교 2학년때 폐결핵 3기로 사경을 헤매다가 부흥회에 참석하고 예수를 영접하여 다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민족 복음화에 헌신을 결심,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한국 민족을 사랑하는 열정이 한국신학대학을 지원케 하였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사역으로 목회철학을 삼게 된 경우는 무엇일까?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전북 정읍군 고부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하였다. 신앙적인 가정 배경도 없이 선배의 목회 지도를 받지 못한 채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10여명의 교인들과 함께 시작된 목회였으나 평생 잊을 수 없는 은혜를 받게 되었다. 주님을 사랑하여 날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밤이면 산에 올라가 이슬에 젖도록 기도했고 구원받지 못한 내 형제들의 영혼을 위하여 통곡하며 울었다. 가난한 형제들의 영혼을 위하여 나의 것은 저들의 것이 되었다. 살아있는 삶 전체가 빚진 자의 심정이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나무 한 그루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음성이 나를 사로잡았기에 사는 것 전체가 주님의 사랑에 미친 사람 같았다. 그곳에서의 5년의 목회는 하늘과 땅을 안고 살아가는 감격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곳에서 살기가 힘들었기에 아내의 떠나자는 호소에 다른 농촌교회(군산 옥구교회)에서 6년의 행복한 목회가 계속되었다. 전 지역은 나의 교구가 되었고, 불신자 한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섬기며 돌보는 대상이었기에 지역 사회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보다 지역 사회 전 주민을 사랑하고 섬기는 목민의 목회자가 되려고 했다. 그 후 친구의 간절한 소개로 서울에 올라와 관악구 난곡동의 가난한 달동네에서 13개월동안 교회를 섬기고 사임했다. 이러한 목회 과정속에서 목회 철학은 형성되어갔다. 나의 목회는 다시 사는 심정으로 일관되었다.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혜라는 철저한 신앙고백이었으며 별세를 사는 심정으로 목회하여 별세목회를 추구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중표 목사의 목회의 중요 특징은 첫째 민족교회 목회라고 하겠는데, 그의 목회는 한국 민족을 위한 목회자가 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특징이 있다면 순교자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 한국 민족을 사랑하게 된 동기는 어린 시절에 받은 영향이 있다고 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국사를 공부하는 시간에 담임 선생이 이 민족의 비극의 역사와 망국의 한을 가르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자신의 눈물이 되었고 한국은 가슴에 새겨져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으면서 눈물로 몇 번이고 적시어 책을 얼룩지게 했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비록 작은 농촌교회 목회자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목회자로 순교자의 삶을 살고 싶은 심정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신학대에 입학하게 된 동기는 단 한가지였는데. 한국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한국신학대학을 지망했다는 것이다. 한신교회를 개척할 때 그 이름도 한국 민족을 신자화한다는 뜻으로 한신교회라 이름을 지었다고 밝혔다.

이중표 목사의 목회철학은 한 마디로 공동체 교회로서 나눔의 목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한 교회의 성장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주님의 교회가 함께 성장하는 것이 소원이다. 그러므로 내 교회가 성장한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히려 내 교회 하나의 성장으로 많은 작은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에 주님의 마음에서 아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 교회가 성장하기 위하여 많은 다른 교회의 교인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는 한신교회를 개척한 후 42개 교회를 개척하여 지원했다. 우리 교회는 값비싼 올갠 하나가 없다. 그러나 필요한 자의 요청이 있을 때는 거절할 수 없다. 주님의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 주님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저 달동네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 가난해진 후배 목사들이 많이 있다. 이들을 민중 교회 목회자라 부른다. 이들은 넥타이를 메지 않고 노동자들처럼 옷을 입고 다닌다. 우리는 큰 교회가 되어 물질을 나누어줄 수는 있다. 그러나 스스로 가난하여져서 가난하게 산다는 것을 어려운 일이다. 가난을 자원하여 함께 살아가는 민중 목회자들과 마음을 같이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몸을 드리는 성전 목회, 곧 별세목회

 

또 두 번째 목회철학은 몸을 드리는 성전목회이라고 하였다. “나의 일생의 목회는 나의 몸을 성전으로 삼고 목회하는 것이다. 많은 목회가 교회당을 성전으로 삼고 이루어지며 그 안에서 예배하는 인원, 공부하고 있는 사람 수,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사람으로 목회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최대의 목회 사역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예수님이 인류를 대표하여 별세하심으로 구원을 완성시키듯 교회를 대표하고 있는 목사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일어나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한국교회 목회는 지금도 자기 몸을 성전으로 삼은 주기철, 손양원 목사와 같은 순교자에게서 계속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이 순교자의 영성으로 목회하려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빚진 자의 목회, 나눔의 목회, 순교자의 목회로 일관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기에 전 삶을 빚진 자의 심정으로 나에게 있는 것을 필요한 자에게 나누어 주며 별세한 자의 심정으로 순교하신 신앙의 선배를 본받아 살려고 노력한다.”하였다.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고 뜨거워지는 말씀이다.

이중표 목사는 다른 목회자가 자신의 목회를 분석한 목회의 장단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요약한다. 장점이라면 철저한 소명감과 헌신에서 오직 목회에만 열정을 쏟는 점과 개교회를 위한 목회가 아니라 교단과 한국교회 전체와 민족을 위한 심정으로 목회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단점이라면 목회행정과 교인 조직관리가 허술한 점을 단점으로 지적한다는 것이다.

목회의 최대 목표는 제자양육이다. 다음은 이중표 목사가 밝히는 목회관이다. “목회자는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교회는 구제사업을 하여야 한다. 예배도 드려야 한다. 선교도 하여야 한다. 그러나 목표는 분명하다. 제자삼는 데 있어야 한다. 목회자는 목회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교인들을 제자삼는 목표를 세우는 일을 중요시해야 한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에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으나 몇 명을 고치시겠다는 목표는 세우지 않으셨다. 구제했으나 그것은 형편에 따랐을 뿐이요, 목표는 세우지 않으셨다. 그러나 두 가지 목표는 분명하였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는 일과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필자는 오랫동안 목회하면서 전도하는 목표를 세웠다. 총동원 목표를 세우고 수십년 동안 목회를 했다. 그러나 제자를 삼겠다는 목표를 세운 일은 없었다. 우리 주께서 원하시는 그 숭고한 목표는 전혀 세우지 않고 열심을 다하였다. 참으로 부끄러운 목회를 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자기 목회를 반성해야 한다.

빌 헐은 이런 사람을 교회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생동안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고 교회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로 교회는 붐비고 있다고 탄식했다. 우리는 천국에 가서 내 교인을 몇 명이나 만나게 될까? 둘째는 과업지향에서 인격지향적 목회로의 반성이다. 목회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과업지향적 목회와 인격지향적 목회다. 과업지향적 목회는 사업에 목표를 정하고 모임을 갖는 것이다. 당회를 하고 제직회, 여전도회 등 교회의 거의 모든 조직이 과업지향적이며 총회와 교회연합운동이 과업을 위해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으나 결국 과업을 위한 조직관계에만 있을 뿐이다. 일반 목회는 대부분 과업지향적 목회라는 데 문제가 있다. 과업을 위해 모여있기 때문에 그 과업의 진행을 위해 기도와 회의로 대부분의 정력을 소모하고 있다. 과업지향적인 교회들은 상업주의와 세속주의에 빠져 초대 교회의 신앙정신을 타락시키고 있다.

셋째는 청중에서 제자목회로의 반성이다. 목회자는 청중을 모으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편리한 시설과 그들의 기호에 맞는 예배순서를 통하여 교회롤 불러 모은다. 그래서 결국 교회는 청중을 모은 집합소가 되고 회개 없는 교인으로 전락시켜, 생명 없는 교회로 변하고 있다. 이제는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교인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지금 청중이 모여들 때를 교회성장의 전성기로 여기며, 그때를 흠모하고 있다. 청중은 오직 설교에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예배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설교에 심혈을 기울이기는 하지만 설교로는 예수께서 원하시는 제자를 만드는 데는 역부족이다. 여기에 고민이 있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교인을 제자삼는데로 목회의 목표를 전환해야 한다

그러므로 제자화 훈련목회로 전환해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역설한다. 제자화 목회는 훈련목회이다. 한국교회가 어느 정도는 훈련목회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훈련은 관리자의 훈력이요, 조직훈련에 그치고 있다. 교인들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구역 조직은 있으나 인격성숙을 위한 훈련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를 수정하지 않으면 소망이 없다고 단호히 말하는 그의 소신에서 우리는 아직도 한국교회의 살아있는 미래를 본다.

 

이중표목사의 설교를 분석

 

첫째 설교를 원고에 기록하는 타입이다. 처음 목회할 때부터 노트에 원고를 일일이 쓰기 시작했다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성경을 너무 몰랐기에 쓰지 않으면 전혀 할 말이 없으므로 써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다닌 기간이 짧았기에 설교를 들은 잠재된 실력이 없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고 말한다. 그보다 더 큰 이유로 나는 천부적으로 말의 표현이 비교적 순조롭지 못했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쓰지 않으면 전혀 할 말이 없으므로 일일이 써야만 되는 운명적인 목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목회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30년동안 설교 전체를, 심지어 예화까지 전부를 써야만 했다는데. 토요일은 아침부터 온종일 써야만 한다고 한다. 연약한 체력 때문에 토요일에 설교를 쓰느라 고심하노라면 그날의 내 얼굴은 평소의 내 얼굴이 아니다고 말하기도 한다. 환자처럼 눈이 들어가고 혈색이 파리한 모습을 보고 스스로 놀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고를 씀으로 은혜로운 설교를 창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힘든 설교를 함으로 결국 많은 은혜를 받게 된 것을 감사한다고 했다. 그것은 설교를 쓸 때 성령의 감동으로 평소에는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을 문자화시킨 것이다. 만약에 하루종일 기록하지 않았다면 영영 생각해볼 수 없는 신비한 성경적 영감과 엄청난 보화를 어찌 얻을 수 있었겠는가. 세월이 지나서 이런 생각을 한다면서. ‘하나님은 이 종을 너무 사랑하시기에 이렇게 사로잡아 당신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깨닫게 하신다.’고 말했다. 설교를 쓰다가 너무 눈물이 나고 감격하여 펜을 적신 시간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설교를 씀으로 많은 실력을 양성케 했다는 것은 새겨들을 말이라고 생각된다. 또 하나 이중표 목사에게서 배울 점은 유명한 설교집을 다독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들의 성경의 영감과 설교자의 내용들을 읽고 기록함으로 결국 나의 실력이 된 것이다. 나는 전도사 시절에 유명한 스펄전 목사의 설교를 거의 나의 것처럼 내용을 만들어 기록했다. 그것을 기록할 때 자연적으로 나의 설교가 되는 것을 실감했다. 이렇게 하여 목회 초년부터 어는 곳이든 어떤 대상이든 거기에 맞는 은혜스러운 설교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기록함으로 결국 설교집 출판이 순조로웠다고 말한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전 내용을 기록하고 기록하므로 고통도 많지만 결과적으로 설교집 출판이 순조롭게 된 것이라고 한다.

 

성장포인트

 

한 잡지에 실린 한신교회의 성장 평가를 엿보자. 여기서 이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한신교회는 197765일 신반포 어린이 놀이터에서 창립을 선언했다. 나는 100만원을 빌려 아파트 보증금으로 걸고 아파트 32평 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197712월에 상가 18평을 임대하여 들어갔다. 이때 교인은 100명이 되었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마다 아파트를 월세로 빌료 예배 처소를 네 곳에 두어 각각 모이게 하였고, 2년 반이 지난 후(803) 유치원 건물 150평을 임대하여 한 곳으로 모이니 그때 교인이 1,000명이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이 지역에 성전부지 700평은 구입하였으나 건축할 수 없었다. 그 후 6년이 지난 뒤 유치원 건물(대지 570, 건평 300)을 매입하여 좁은 공간에서 주일이면 혼잡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개척한 지 17년이 지난 지금 재적교인 5000여명이요, 출석교인은 2,500여명에 이른다. 교회가 기대에 비해 크게 성장하지 못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교회성장에 따른 건물 공간이 비례하여 확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성장과 함께 건물 확장이 따르지 못했다. 그러므로 초창기 몇 년 동안은 주변의 교회들과 성장이 거의 비슷했으나 교회당 건축이 지연되면서부터 상상할 수 없는 격차를 가져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교회성장의 한계를 절감했다. 둘째, 교파 신학의 차이점에서 한계를 느꼈다. 개 교회가 성장을 추구해도 교단의 신학이 하나님의 선교신학(Missio Dei)이므로, 교단 선교정책의 영향으로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적인 성향의 교회들이 기장교회를 비판하므로 일반 교인들의 전입이 어려웠고, 80년대의 군사 독재시대에 교단의 사회 참여와 민주화, 민족 통일운동으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인 압력이 성장을 더욱 어렵게 했다. 셋째, 목회자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지역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과 평신도 지도자 양성에 힘썼으면 조금은 더 성장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이상의 성장의 어려움 속에서 오늘 이 성장을 이루어놓은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장점으로 이루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첫째는 감동적인 설교에서 찾을 수 있다. 30년 가까운 사역기간 중 농촌에서 11, 서울에서 19년 동안 거의 나의 목회는 설교로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는 목회에 헌신적인 열정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교회에서 살고 있다. 대외적인 일로 시간을 사용하는 일은 적다. 셋째는 교회 위치가 주거지역이라는 장점이 있다. 인구가 밀집된 아파트 지역에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고 밝혔다.

성장 포인트의 세 번째는 교인들을 별세시키는 것이다. 별세가 예수 그리스도의 최대의 선교사역이라면 교인들을 별세시키는 것은 목회자의 최대의 과제라고 본다는 것이다. 많은 형제들이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였다 할지라도 별세신앙을 확립하여 주지 않으면 죽은 뒤에 천국을 약속 받고 현실에서 탄식하는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강조하는 그의 목회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별세이다.

성경에서 흐르고 있는 맥이 별세의 진리라고 한 마디로 말한다. 요한복음 5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한 것이라하였다. 그러므로 성서를 연구하고 암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별세의 신비를 알 때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고 한 그것이 주효 한 것이다. 그러므로 별세는 최고의 신학 공부요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하셨다. ‘나의 멍에는 십자가요, 십자가를 배우는 것이 예수를 배우는 것이다. ‘나는 예수로 죽은 몸이다. 이제 예수로 산다할 때 최고의 신학 공부가 된다. 별세 공부 못하는 성경 연구는 콘 변화가 없다. 그 공부는 인격의 변화도 없고, 행복도 없다. 이런 공부는 하면 할수록 교인들의 지성만 개발하여 바리새인이 되기 시작한다. 성도는 별세의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별세는 자기 죽음을 이미 선언한 별세의 신앙고백이며, 별세의 영성은 순교자의 삶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별세한 신앙은 천국을 사모하게 된다. 현세에서 별세한 사람만이 천국을 사모하며 살고 있다하는데에 성도들이 올바르게 자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신교회의 성장은 결국 예수를 따라 죽은 결과로 얻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6.창훈대교회

 

섬김과 사랑으로 지역복음화에 성공한

한명수 목사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기독신보 주필, 창훈대교회 담임)

수원시 연무동 조용한 주택가 이제 막 새로운 시가정비가 시작되고 용인 수지 지역으로 이어 지는 새로운 도로가 뚫려 조금 번잡한 듯 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면 여전히 한적한 주택가가 나온다. 그 호젓한 주택가에 평범하게 자리잡은 교회가 창훈대 교회이다.

 

창훈대교회와 한명수 목사

원래 창훈대교회는 국가 보훈가족들과 지체장애인들을 돌보기 위하여 창훈대라는 교회라고 하였다. 그 뜻은 보훈대상자들을 돌본다는 뜻이란다. 이제 개척한지 33년 되던 지난 1996426일 대지 1,191, 건평 1,233평의 교회를 건축하고 입당예배를 드렸다.

한명수목사는 20세에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 계기가 된것이 당시 안용준 목사가 쓴 손양원 목사에 대한 책인 <사랑의 원자탄>이었다. 그리고 일본인이 쓴 <사선을 넘어서>, 성다미안의 전기 특히 그가 나환자들과 함께한 이야기들은 그로 하여금 소외 계층, 눌린자, 힘이 없는 약한 사람 편에 서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그 영향으로 19634월에 이곳 창운대 탑이 있는 곳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창훈대탑의 의미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몸을 바친 상의 군경, 전쟁 유자녀 등을 기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창훈대교회라고 이름을 짓고 그러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에는 여기에 국립원호원, 직업재활원이 있었단다. 그런데 몇해 전에 그곳을 보훈원으로 바꾸었다. 그러다가 현재 국립보훈원뒤편쪽에 상이군경과 전쟁유가족을 위한 복지타운이 생겼다. 그들이 창훈대교회의 핵심멤버요 일군이 도니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들은 창훈대교회가 자기들의 교회라고 생각을 하고 신앙생활을 한단다. 그래서 창훈대교회는 66일 현충일 날 예배를 33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고 드렸고 6월은 보훈의 달이라고 해서 교회는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행사를 준비한다. 창훈대교회는 수년내에 교회자체에 1,000평 가까운 복지관을 건립해서 사용하려고 한다. 한목사는 이일을 자신이 해야할 마지막 사명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대개의 교회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창훈대교회 교인들의 건축헌금은 다른 교회의 그것과 남다른 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보훈연금으로 건축헌금으로 드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글세방에 살면서 자신내집마현의 꿈을 위해 한푼 두푼 모아 놓았던 피와 땀방울같은 헌금을 드린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건축을 위해 장애인들도 일심으로 동참하여 적지 않은 헌금을 드렸던 것이다. 이런 헌금이 모아져 교회당이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는 것을 볼 때 목회자의 심정은 어떠할까? 더더구나 한명수목사는 교계에서도 잘알려진 지도자이다. 그는 인정이 많고 베풀줄 아는 목회자로 유명하다. 오늘날과 같이 이 어려운 아이 엠 에프의 경제 위기 시대에는 한국교회에 모범이 될만한 교회인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명수목사를 한번이라도 대면하여 본 사람은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소탈한 것이 마치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을 준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하지만 그 소탈함에서 사람을 끌어 당기고 또움직이는 알 수 없는 힘이 어디선가 나타나는 것이다. 아마도 2000년전 갈릴리의 망을 들을 다니시면서 전도하시고 죄인과 창기들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던 그분 예수님이 그러했으리라고 생각해보면 그의 모습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한명수 목사의 이 순수함이 나오게 된데에는 그의 고백과 간증처럼 그도 남다른 아픔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그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에 위암 말기의 사형선고를 받았었다. 그러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가운데 떨쳐 일어날 수 있었다. 한명수 목사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한다. “여러분 저는 위장이 수술을 받아 거의 절단되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함 말기였지요 그 위암선고를 받고 그 선고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위안 선고가 결국엔 저의 주님께 대한 신앙을 확인케 하는 기회였습니다. 솔직히 선고 초기에는 걱정이 앞서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러 어쩌겠습니까? 목사가 되어 가지고 이 병을 상대로 싸워야지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시한번 제 신앙의 기초부터 자신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과 말씀안에서 기도할 수있다는 사실이 저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결국 그것이 저를 그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했다고 말씀 드릴 수있습니다.”

말이 쉽지 일단 병에 걸리게 되면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벌써 병에 대해 지고만다. 마음을 지키고 이를 이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든가? 그러나 한명수 목사는 구원받은 백성이요 주의 종이 사명을 마치기 까지 쉽사리 데려가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믿고 기도한 결과 결국 병마를 이기게 도니것이다. 이는 우리 목회자들이 그 무엇보다도 무릇 그 마음을 지킬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창훈대교회의 목회 비결-예배에의 집중

 

창훈대교회의 목회 비결은 여러군데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예배에 대한 재발견과 집중이라고 할 것이다. 전통적인 예배를 재해석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맞는 예배가 많은 창훈대교회 교인들을 한공동체오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창훈대교회의 예배는 예배 20분 전부터 시작도니다고 할 수있다.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준비찬송이라는 것이없다. 20분전부터 오르가니스트가 온 교회당을 가득히 경건한 성가곡을 연주한다. 성도들 스스로가 각각 자리에 않아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기에 준비된 심령으로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데에는 성량이 풍부한 오르간 선율이 한몫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등단하는 예배위원들과 성가대원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예배의 감동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치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물가 없으면서도 잔잔한 감동이 일어나게 된다. 전통적이면서도 또 언딘가 모르게 세련도니 분위기가 느쎠지는 예배였다. 예배는 한달을 두고 볼 때 두주일에 한번 꼴로 부교역자들에게 설교의 기회를 주고 있다. 이것이 다른 교회들과의 차이점인데 한명수 목사의 열린 마음과 자신감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단 위에는 항상 3명의 목사가 선다. 설교 담당, 사회 담당, 축도 담당의 목회자와 기도를 맡은 장로님 등 네 분의 등단으로 강단이 언제나 섬기는 자들로 붐빈다. 이러한 에배에 대해 한명수 목사는 예배에 있어 삶의 자세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즉 마음과 뜻과 정성을 기울여서 정말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우리의 삶의 자세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배는 주일에 교회에 와서 드리는 예배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있는 주중의 어느 자리에서든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중의 삶은 내멋대로 살고 주일 교회에 와서는 거룩한 체 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면전 즉 코람데오의 정신으로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우리 모습이 예배임을 알아야한다고 그는 늘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는 부교역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많이 줄 수 있는 것 같다. 그는 고린도 전서 117을 예로 들기 좋아한다.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설교가 예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꼭 담임목사만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원칙은 없다는 것이다. 참된 신본주의란 당회장으로서의 목사가 아니라 꼭 권위로 눌러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야 말로 참도니 신본주의란 것이다. 다시말해 인간적인 방벙이나 계산으로는 목회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강단철학인 것 같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설교를 하면 담임목사가 하든 부목사가 하든 그것은 별 중요하지 않고 그시간에 성도들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코이노니의 예배

 

창훈대교회의 예배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각각의 예배요소가 어느정도 구별이 되게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다는 것이다. 드리는 요소와 받는 요소 그리고 서로 나누는 요소로 적절하게 구분이 잘 되어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특히 마지막 부분 전도에 대한 강조와 새신자 환영 순서는 잘 짜여진 프로그램등에 의해 새신자들 본인이 느끼기에도 과분한 대접과 반응을 느끼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현대교인들은 어느시대 사람들보다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이는 의식이 이제 깨여서 자신들의 실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느 누구라도 오면 인정받고 배려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충분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새신자환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본다.

 

섬김과 봉사의 목회

 

흔히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의 목회를 머슴목회라고 이야기한다. 종이라는 순수한 우리말 식 개념은 머슴이므로 머슴처럼 하나님의 일에 수종 드려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섬김과 봉사가 한명수 목사에게서는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나타났다. 창훈대교회는 안 밖으로 장애인 노약자 노인에 대한 배려속에서 건축되어졌다는 것을 쉽게 느끼게된다. 교회 들어서는 좌편으로 장애인과 노약자들의 전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고, 각 층 계단뿐 아니라 그리고 놀랍게도 모든 복도에는 나무로 된 손잡이 봉이 설치되어 있다.이는 노인들은 물론 장애인들이 쉽게 의지해서 걷도록 배려인 것이다. 또 모든 계단 옆으로는 휠체어가 쉽게 올라가고 내려갈 수 있는 입구 진입로가 준비되어 있었다. 바라기는 각 교회마다 돈이 더 투자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제반 사항이 있더라도 이러한 배려 즉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일은 꼭 필요하다.

 

한명수 목사의 설교준비

 

한명수목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 자신의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본다면 설교자는 전달자일 뿐이라는 뜻이 된다. 실제로 그는 설교에서 이러한 원칙에 매우 충실하다. 이 원칙이 있기 때문에 그는 항상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설교한다. 한명수목사는 장로교합동교단지인 기독신보에서 오랫동한 주필과 논설위원을 맡아왔는데 간결한 필치와 직설적인 논리로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명쾌함을 주는 이로 유명하다. 이러한 그의 단순한 삶이 그대로 설교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다. 무궁무진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자는 단지 현대 감각에 맞게 풀어 전하는 것이 설교자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철저한 칼빈주의자라고 이야기 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너무 많은 거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인데 인간에게 쉽사리 변화가 나타나고 성숙이 나타날 리 없다는 것이다. 자신부터도 주일 예배를 드리고 한 주간을 살면 말씀대로 살지 못한 아쉬움과 후회가 있는데 교인들에게는 예배드린 후에 세상에서 바로 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들을 바리새인 만드는 것밖에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항상 새벽 350분이면 눈을 떠, 남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그는 그 시간이 영적으로 가장 예민한 시간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교제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그는 늘 고백하기를 목회의 힘의 근원은 새벽시간의 기도와 말씀묵상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큰 빛을 남긴 성인들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삶으로 보여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중세기 성 프랜시스가 그렇고 칼빈이나 웨슬레가 그러했다. 또 한국교회사에 드러나는 손양원목사나 주기철 목사 같은이는 우리민족을 위한 살아있는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영적 거목들과 같이 우리도 움직이는 성전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 보이는 목사가 되고 교인들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한목사의 목회 목표인 것이다.

 

사랑의 목회 그리고 눈물의 목회

 

창훈대 교회의 사역초점은 지역사회에 대한 사랑과 섬김이다. 우리는 이 교회를 리서치하면서 한명수목사의 삶에서 예루살렘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목회에서 특별하게 획기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킨 비결을 물어 보거나 찾는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 일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 역시 방법이나 프로그램에 의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확장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할 것이다. 그 본질이 무엇인가. 주님이 목자 이셨듯이 우리 목회자가 목자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잃지 않는 것이 아닐 까 한다. 그리고 목자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랑과 눈물이라고 할 것이다. 한명수 목사는 보훈 가족들을 가슴에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부터 그리고 이제는 장애인들을 가슴에 않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지금 까지 오다보니 어느새 성장한 교회가 되었다 라고 밖에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 오늘날 꿩 잡는게 매라는 식으로 본질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고 방법이나 프로그램만을 찾는 잘못된 목회 풍토에 창훈대교회와 한명수 목사의 목회는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리라고 믿어진다.

 

 

 

7.신길교회

 

사랑방 비젼으로 오래된 교회를 갱신하는

 

이신웅목사

(성결교 신학대학원)

매년 9%이상의 경이적 성장을보이던 한국의 교회가 1988년을 기점으로 둔화되더니 1994년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성장이 멈추고 작금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고있다. 월간 메세지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일선 목회자들과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해보고자 이 시점에서도 계속 성장해 가는 교회들을 탐방해 보기로 했다. 그 첫 시도로 영등포에 소재한 신길교회를 찾아가 보았다.

 

전교인을 예수 제자로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신길교회(이신웅 담임목사)를 제일먼저 탐방하기로 한 것은 기성교회이면서도 새로운 전도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는 좋은 소문 때문이었다.

"성령으로 배우고(教育) 전하고(宣教) 치유하는 (奉仕)교회"를 비젼으로 삼고 질적, 양적 성장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신길교회는 사실 우리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전형적인 중형교회였다. 1946426일이 교회 설립 일이니까 올해 꼭 49년이 되는 교회로써 기독교 대한성결 교단에서도 큰 교회에 속한다.

담임 이신웅 목사는 2년전에 부임해 왔고 이낙현 원로목사와 19분의 장로와 성도들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신웅 목사는 제주도에서 제주제일교회를 10년간 목회하였다고 한다. 10년전 부임해 갈 당시 70여명에 불과한 교회를 1,000명이 넘는 교회로 일궈놓고 하나님의 인도로 신길교회에 온 것이다.

이미 제주도에 있을 때 부터 철저한 대민 접촉 프로그램을 많이 개발시행 해 왔는데, 교회근처에 있는 하천오물 제거 작업에서 부터 관공서 직원 초청잔치와 경로잔치를 매년 벌여 좋은 소문이 나도록 한 뒤에 사랑방전도를 통하여 하나 하나 전도했다고 한다.

이신웅 목사는 목회철학이 뚜렸했다. 그의 목회철학은 한마디로 '전교인의 구원확신과 예수제자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철학 위에 성령운동과 체계적인 성경공부로 지성인 그룹과 일반서민들을 대상으로 복음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복음은 보수, 방법은 최첨단'이라는 행동지침에서 이 목사의 신앙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지성인 전도를 자주 언급했다. 이제 이천 년대가 되면 대개의 사람들이 지성인이 될 것이고 지금까지 서민 또는 저소득 계층을 대상으로 행해졌던 교회의 전도 프로그램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전도운동을 일으켜야 하는데 그것을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지성인들을 복음으로 공략할 것인가? 무엇보다 새로운 성령운동을 일으켜야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성령운동이 외적이고 은사중심으로 흘러가버렸지만 이제는 외적인 능력뿐 아니라 내적인 성령의 치유와 위로 그리고 인격적 성숙에 초점을 맞춘 성령운동으로 사람들을 일단 복음으로 인도한 다음 성경공부 특히, 소그룹을 통하여 내면적 치유와 위로에 힘쓰는 것이 차세대를 위한 목회대안 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교회 성장은 구원의 회복부터

 

이러한 바탕 위에서 제주도에서나 현재의 신길교회에서도 가장 먼저 한 일은 성경공부와 상담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그가 처음 제주도에 부임했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한 것은 신앙상담이었는데, 점검결과 70명 교인 중에 3명 빼고는 구원의 확신이 전무하였다고 한다.

신길교회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 전교인을 대상으로 구원을 확신시키는 설교와 성경공부를 다시 시켰다.

수요일 설교는 O.H.P(Over Head Projecter)를 사용해서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모든 교인들에게 주지 시켰으며 지금도 '구원의 감격과 회복'에 초점을 둔 설교를 계속해서 O.H.P를 동원해서 하고 있다.

시청각 자료를 동원하자 수요예배 참석자가 늘어났다. 그 다음에 나타난 현상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이 회복되고 감격이 회복되자 전도에 불이 붙었다. 말씀이 흥왕하자 부가효과들이 많이 나타난 것이다.

 

사랑방 운동

 

이신웅 목사가 강조하는 '사랑방'이란 무엇인가?

사랑방모임은 전도프로그램이다. 제주도에 있을 때 부터 해 왔지만 신길교회에서는 시행초기단계에 있다고 한다. 교재도 준비중에 있는데 내년쯤 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사랑방은 팀목회가 아닌 스텝목회의 일환이라고 한다(필자가 보기에는 기존의 교회 조직체계는 그대로 유지하되 새로운 모달리티를 조직하여 기존의 교회체제에 연결시키는 그런 프로그램속에서 한 부분의 모달리티를 책임지는 전담목회자를 두는 그런 뜻인 것 같았다). 사랑방은 하나의 스텝목회로서 전문스텝에 의해서 행정 관리되도록 시스템을 운영한다.

사랑방은 자신의 집을 제공하는 자원 봉사자에 의해서 지역별로 생겨나는데 그 지역의 새신자나 전도가능자들을 초대하여 성경공부를 가진단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관심자가 생기게 되면 지역 부흥회를 실시하여 회심시킨 다음 그 구역만 총동원시킨다. 이때 전담 스텝인 부교역자가 책임지고 총동원시에 꼼꼼하게 챙기도록 완벽한 사후 조치를 한다.

총동원 전도운동도 성경적이다. 그런데 일시에 너무 많이 왔다 가기 때문에 사후처리에 전혀 손을 쓸 수 없다. 그래서 다 놓쳐버리기 때문에 지탄을 받아왔다.

사랑방 전도의 핵심은 이런 총동원 전도의 미비점을 지역별 총동원으로 보충한다는데 있다.

담당 부교역자의 책임있는 사후대처로 보완해서 운영하게 됨으로 일석이조의 효과까지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지난 95년 한해동안 600명정도가 등록해서 400명정도가 정착되는 놀라운 효과를 얻게 되었다.

 

사랑방 전도의 비젼

앞으로의 목회비젼은 전인적인 구원운동과 대사회 프로그램의 개발과 시행이라고 하는데 이목사가 밝히는 가장 중요한 목회 사역은 첫째, 영혼구원이요 둘째는 능력배양이며 세번째는 재생산 시스템을 가동시켜 온 교인들이 모두 전도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며, 지역주민 전도를 위한 접촉점을 많이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혼구원의 뜨거운 비젼 위에 지역주민 접촉을 위한 많은 봉사프로그램을 실시해서 접촉점을 가지고 있다가 성경에 있는 대로 눌린 자, 갇힌 자, 어렵고 환난당한 자를 만나게 되면 사랑방모임에 데리고 와서 복음으로 고치고 희망과 용기를 주게 되면 분명히 능력이 나타나고 회심하는 사람이 늘어간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사랑방 모임을 도입하더라도 지역주민 접촉을 위한 프로그램 (경로당, 무료탁아소나 병원, 휴게실, 또는 무료개방 주차장) 이 없다면 사랑방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신길 교회와 이신웅 목사를 탐방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기회를 가졌다. 무엇보다도 그는 다음세대를 위한 열린 마음과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어떤 교수의 말처럼 '작년과 올해의 내 생각이 같다면 나는 영안실에 있다가 나온 것이다'는 말뜻을 새겨야 할 것이다.

갇히지 않은 사고와 마음 자세만 해도 그는 분명히 괄목할 만한 기독교 발전을 가져 올 사람이다. 거기에다가 연배에 맞지 않을 만큼 현장전도와 사랑방전도에 대한 남다른 포부가 돋보였다. 지역주민을 접촉해서 회심시키는 것이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교회성장인 것만은 틀림없다.

오늘날 기독교가 침체의 위기에 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교회가 신자들이 복음증거를 생활화 하도록 길러내지 못하고 다른 교회 교인들이나 뺏어 오려는 안일한 자세에서부터 기인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행정이나 조직에 있어서도 새로운 제도나 방법은 이미 오랜 시간 체제에 굳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위나 효과의 여부에 앞서 거부감을 준다. 그래서 쉽사리 도입하거나 개선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목사는 '스텝목회'라는 나름대로의 목회경영을 가지고 기존체계는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별동대와 같은 사랑방조직을 전문 스텝목사에게 맡겨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안목은 놀랍다고 할 수 있다.

그것뿐 아니라 사랑방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서 주변의 지역주민들에 대한 관심 끄는 봉사의 사업을 교회가 시행하고 그것이 무르익었다 싶을 때에 지역별로 '지역주민 초청잔치'를 통한 총동원을 실시하는 점은 이 목사만의 '독특한 노하우'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신길교회 탐방을 끝내면서 아무리 기독교의 발전이 멈추었다고 우려해도 신길교회와 이신웅 목사같은 사람이 있다면 미래에 대해 다시 기대를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복음의 뜨거운 열정과 감격이 있다면 지금까지 2천년 교회역사가 그래왔듯이 줄기차게 복음의 생명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그룹 모임 많게

 

신길교회는 평신도 지도자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평신도 지도자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끊임없이 찾고 훈련해야 한다. 평신도들 전체를 총동원하여 교회를 사역공동체(ministr ycommunity)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목사의 비전을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나누는 교회는 성장하는 교회이다. 혼자 일하지 않고 팀으로 일하는 교회는 건강한교회이다. 목사를 닮은 평신도가 많은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이다. 작은교회(소그룹)를 많이 만들고 작은 목사(평신도 사역자)를 많이 키우는 교회가되어야 한다. 건물 안에 갇혀있는 교회가 아니라 건물밖에 흩어져서 끊임없이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교회가 21세기를 책임질 것이다. 필자는 신길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라는 확신을 갖게된다.

8.고잔제일교회

전원교회의 비젼으로

한기동 목사

 

교회는 무엇하는 곳일까요?

학교는 지식을, 병원은 건강을, 산업시설은 우리를 잘 살게 하기에 필요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일까요? 교회는 학교가, 병원이, 산업시설이 주지 못하는 것을 주는 곳입니다. , 교회는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을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습관적인 실패에서 승리를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를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만물의 영장으로 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는 곳입니다. 교회는 참된 평안, 참된 희망, 참된 자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곳입니다.”

위의 글은 고잔 제일교회가 만든 전도지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문명사회에서 현대인들에게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초대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도 평택통합시 청북면 고잔리의 외따로이 떨어진 야산 언덕배기에 세워진 마치 별장같은 고잔 제일교회는 말그대로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 같았다.

고잔 제일교회는 1975417일에 설립되었는데 19899월에 한기동 목사가 부임해 와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한기동 목사는 고신대를 졸업하고 친한 친구의 권유로 나사렛 신학대학원을 졸업, 대한기독교 나사렛 성결회에서 82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스무 살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하는데, 당시 결핵 3기로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6개월만에 깨끗이 치료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당시 부산 침례병원의 방사선과 과장은 한 목사의 X-ray 사진을 보고는 기적이라고 하며 대단히 놀랐다고 한다. 한 목사는 기도원 집회를 통해 하나님께 주의 종이 되겠다는 서원 기도를 하고 바로 고신대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고 대구와 포항에서 약 7년간 목회를 하다가 좀더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 수도권 근처의 교회로 부임해 왔다. 그저 소개만 받고 한 번도 사전 답사도 않은채 이삿짐을 싸들고 찾아온 교회는 이미 14년이란 역사를 지녔음에도 버려진 교회와 다를바 없었다. 지난 89년만 해도 옛날 방식인 흙담과 흙바닥에 스레트를 얹어놓은 전형적인 그런 농촌교회였다.

 

초기의 좌절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했다.

 

이사오던 첫날 30여명 되는 농촌의 순박한 교인들이 이삿짐을 날아다 주려고 모였다. 이미 포항에서 개척서부터 150여 평의 교회를 짓기까지 갖은 고생을 다했던 강미숙 사모였음에도 참담한 교회의 모습을 보고 도착하자 마자 교회당에 들어가 울어 버렸단다. 교인들이 보건 말건 상관 않고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하다고 한 목사는 회고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정도 고생을 했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조금 나은 곳으로 인도해 주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보내어진 곳은 사람이 살기에 너무나도 외질 뿐 아니라, 교회며 사택도 낡았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거기에다 교회주변은 아무리 둘러봐도 인가가 드물었다. 나즈막한 동산이나 양지바른 곳에 집이 몇 채 있긴 해도 사방 십리 집을 다 합쳐 봐야 200여 호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러니 사모는 사모대로 낙심했고 한 목사 자신은 자신대로 실망으로 그날 밤을 지샜다고 한다. 자신이 너무 경솔했다고 판단했지만 이미 때는 한참이나 늦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한목사는 자신이 고잔 제일교회로 온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에 대해 개인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조심스럽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절박한 심정으로 그 다음날 새벽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똑똑히 들었다고 한다. "내가 너를 이곳으로 인도하였고 너를 통해 새 일을 행하리라"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뜻을 가지고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된다. 그저 밥술이나 먹으면 좋겠다는 그의 기도가 그때부터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은 그로 하여금 지적이고 상식적인 목회의 차원에서 성령을 의지하고 바라는 신령한 목회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가 확신을 가지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설교 메시지에 혼신의 힘을 쏟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지 않는 그저 관념적인 기독교의 사랑을 외치는 메시지만을 던져 왔음을 회개한 것이었다.

 

전도로 불을 붙였다

 

비록 농촌 교인들이었지만 생명력있는 복음의 말씀앞에서 성도들이 삶에 힘을 얻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다. 30명이던 성도들이 40명으로 늘어나고 어느새 교인들에게 신앙의 불, 기도의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한 목사는 그 불을 전도에 쏟았다. 우선 200여 호 되는 가구의 전 마을을 찾아다니며 전도하기 시작했다. 누가 뭐래도 정해진 시간이면 나가서 전도했고 또 멀리 시내에까지 나가자고 교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목사와 교우들의 정성어린 수고에 힘입어 성령이 역사하셔서 1년만에 30명에서 70명의 성도들이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마을 전도가 어느정도 성취되었다 싶어서 평택, 송탄, 안중에까지 연고자를 통한 네트워킹 전도에 주력하였다.

 

초기엔 축호전도 다음에는 네트웤 전도(Net Working)

 

대개의 교회가 그렇겠지만 개척 초기엔 목사 중심으로 개인전도 혹은 축호전도가 일반적인 전도방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구성원이 생기면 목사 혼자서 계속 전도 할 것이 아니고 기존 교인들의 연고자들을 대상으로 전도 접촉점을 넓혀 가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된다. 이러한 전도를 선교학적인 용어로는 네트워킹 전도라고 하는데 이것은 교회 성장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고잔 제일교회의 한 기동 목사는 이러한 네트워킹 전도와 함께 도시인들을 이곳 한적한 농촌교회로 까지 데려오기 위해서는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색다른 매력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 전원교회에 대한 이상이었다고 한다. 말이 쉬워 비젼이고 이상이지 이제 겨우 70여명 나오는 농촌교회에서 보면 꿈만같은 이야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한 목사의 설교와 삶 그리고 비젼에서 예수의 생명력을 느끼기 시작한 성도들은 그러한 비젼에 따라오기 시작했고 드디어 교회설립 15주년 기념일인 90417일에 전원교회 건축을 위한 첫삽을 떴다. 그때부터 5년여에 걸친 길고도 긴 전원교회 건축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안으로는 교회 건축, 또 밖으로는 송탄읍과 인근의 도시를 19개 지역으로 나누어 네트워킹 전도를 펼쳐 도시인들에게 신선한 감흥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한 명 씩 두 명 씩 교회로 등록하기 시작 한 것이 이제는 450여명의 재적이 모이게 된 것이다.

대지 1300여평, 건축면적 250여평, 사택 35평 주차장 500여평 그리고 공사비 5억에 달하는 대규모의 역사가 빚한푼 없이 완공 되기에 이른 것이다.

주일이면 원근각지의 교우들이 승용차를 몰고와서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또 교회 앞 농장에서 주말 농장을 가꾸다가 저녁이면 돌아간다고 한다. 고향집을 찾는 즐거움과 기쁨을 말씀의 은혜와 함께 누리고 가는 그들을 볼 때, 고잔 제일교회 교인들이야말로 작은 천국을 미리 맛보는 복된 사람들이라고 본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놀라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고잔 제일교회 성도들 자신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기도를 하고 모이기는 하지만 정말 그것이 이루어질까 꿈같이만 느꼈던 그들에게 고잔 제일전원교회는 현실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고 성장하길 원하는 목사와 교인들 앞에 기적도 보여 주셨고 치유의 역사도 강하게 하셨다. 특히나 잊혀지지 않는 것은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환갑이 넘은 여집사님이 수술을 열흘남겨 놓았는데, 한목사의 기도로 거짓말 같이 나아 지금까지 전혀 재발이 없는 일이며,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웃 사람들까지 교회에 와서 건축을 도와준 일이며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 것이다.

더욱이 고무적인 것은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자 겨우 젖소 한두마리나 키우며 만족해 하던 교우들이 믿고 기도하면 주신다는 믿음속에서 농장을 키워 이제는 십일조를 40만원, 50만원 하는 사람이 여럿 생겨났다고 한다. 교회 다니는 성도들이 농장을 크게 하는 것을 보고 이웃의 믿지 않는 사람들도 덩달아 사업이 번창했고 교회는 이래저래 좋은 소문을 내기에 이른 것이다.

평택군에 산재한 50여개의 나사렛 교회중에서 재정적으로나 교세로 가장 말석을 차지하던 교회가 이제는 2, 3 등을 다투는 교회로 성장한 이유는 한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일 뿐이었다고 한 목사는 겸손하게 말한다.

도시교회들도 어려워하는 이 마당에 어떻게 보면 전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외딴 시골교회에서 가까운 지역 주민뿐 아니라 멀리 있는 대도시 교인들까지 역류시키는 이 놀라운 역사는 분명코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보여진다.

농촌교회가 자립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낙담할 이유가 없다.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생소한 교회모델이긴 하지만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인간의 본능을 최대한 파악해서 농촌 교회의 새로운 모델로 제시해 볼만도 하게 여겨진다.

적어도 몇가지만 갖춰 진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성장프로그램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네트워킹 전도 즉, T.L.C(Tender Loving Care)를 통한 전도 방법의 효율성을 다시한번 생각케 되는 것이다.

앞으로 고잔 제일교회는 보다 확대된 전원교회를 갖추기 위하여 도시인을 위한 각종 시설과 프로그램을 개발중에 있다고 한다. ,전원교회로서 필수적인 레저시설과 휴식시설을 갖추는데 역점을 두고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 교회 뒷편을 매입해서 5층 정도의 문화센터를 건축하여 그곳에 소극장, 도서관, 스포츠센타 등을 만들고, 또 청소년들을 위해서는 수영장, 체육시설 등을 별도로 만들 계획으로 기도하고 있다. 전원교회를 꿈꾸고 기도한지 이제 5년만에 그 기쁨의 열매 가까이에 도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목사는 농촌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의 말을 하였다.

첫째는, 의존적인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좀 부족하고, 궁핍하더라도 인간적인 도움의 손길만 찾지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며, 물질적인 면에서 당당하게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두번째는, 비록 열악한 환경이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곳에 보내신데는 다 뜻이 있으니까, 믿고 기도하면, 또 인내하면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한 목사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한다.

자신의 뒤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는 아들(1)과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데 한 부분이 되기 위해 변호사가 꿈이라는 딸(3)에 대한 한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으로 떠나기 싫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며 고잔 제일교회를 나섰다.

 

9.부천성만교회

 

개척교회 성공의 전형을 마련한

이찬용목사

 

한국교회의 침체 우려 속에도 여전히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들이 있다. 기도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목자에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그 약속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 여간 반갑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30대의 목사 신세대(?)라고 할 수 있는 약관의 목사들이 곳곳에서 영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목회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 목회자들에겐 매우 고무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것이다.

 

상가교회도 성공할 수 있다

 

5년만에 기존의 도심지에서 개척한지 5년만에 신도시가 형성되는 이웃으로 이사와 1,000명의 성도들이 회집하고 있는 "신세대 목사" 이찬용 목사를 만난 것은 지난 2월 중순이었다. 부천중동 동사무소 앞 지하 150평을 분양 받아 가일층 성장하고 있는 부천성만교회 입구에 들어서자 은혜충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젊게 보이는 이 목사를 만나 그 동안의 목회과정을 질문하며 탐방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성장과정과 은혜 체험에 대해 물어보았다.

"저는 어머니가 이북에서부터 예수 믿었기 때문에 모태신앙인 입니다. 하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교회 다니다가 군제대할 때까지 주님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대 후 진로문제를 상당히 고민하고 마음의 곤고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 보라고 해서 기도원에 갔는데 금요일 밤 집회 중에 뜨거운 말씀의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꿈인지 생시인지는 모르지만 두 장면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때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이지요. 그리고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신학교를 갔고 주님을 만난 이 행복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개척동기

 

그러면 현재 섬기시고 있는 교회의 개척동기와 과정을 좀 말씀해 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이목사는 겸손해 하면서 한마디 한마디 질서있게 전해주었다.

"개척동기는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필요한 달란트가 부교역자 달란트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부교역자로 있던 중 평생을 부교역자로 있을려고도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개척해야 되겠다는 마음의 부담이 들면서 부교역자로 있던 교회에 담임목사님과 의논 후 교회를 사임하고, 개척장소를 물색했습니다."

"제가 개척한다고 하니까, 같이 개척하겠다고 나서는 성도들도 생겨났지만, 제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분들이 오지 못할 가장 먼 거리에 개척하고자 생각하고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인천시 부평에 5층짜리 건물 중 440여평을 계약하고 계약금 200만원을 지불했습니다. 약 두달이 가까워지자 건물주인이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안 일이지만 4층 전체를 다른 교회가 분양받았기에 제가 밀려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제가 지불했던 계약금 200만원과 100만원을 더 얹어서 300만원을 주었고, 그 돈을 받고 올라가던 중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를 우연하게 계약하게 되었습니다"

 

개척의 어려움

 

"사실 부교역자로 있으리라는 생각만 했기에, 개척에 대해서 많이 기도한 것도 없었고, 준비도 없었기에 모든 것이 어려웠습니다. 2,000만원의 개척자금으로 4,500만원에 월90만원의 건물을 임대하고, 또 막상 어려운 형편 중에 계약하고 시설을 하고 있는데 복도를 사이에 두고 다른 교회가 웅변학원을 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시작하게 되어 1년을 같이 예배하는 고통과 처음 교회에 왔던 성도들도 그런 양쪽에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되돌아가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신도시 개척은 대부분 어렵게 1년은 버티겠지만 경제력이 부족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1년 내에 자립하지 못하면 실패하게 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이 목사에게 물어 본 것은 교회부흥의 비결이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한다.

"교회들이 대부분 개척을 하면 장년부만을 상대로 목회하기 쉽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부교역자 때 아동부를 성장시켜 본 경험이 있었기에 제가 자신있는 아동부를 먼저 부흥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즉 담임 목회자가 가장 자신있는 부서를 먼저 성장시키면 교회 전체가 서서히 부흥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교회부흥의 키(key)를 잡아야 한다). 목자의 임무 중 중차대한 부분은 양들을 구출하는 일입니다. 양들은 길을 잘 잃는 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어리석음과 우둔함과 부주의로 쉽게 무리를 이탈합니다. 양은 계속해서 코를 땅에 박고 가장 푸른 풀을 따라가다가 조금씩 양떼에서 떨어져나가 마침내 무리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이 고립된 가련한 양은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일단 길 잃는 상태를 알게되면 격동하여 그의 무리를 찾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양은 혼자 살지 못하며 항상 무리를 지어삽니다. 혼자있으면 겁이 많아져 쉽게 공포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무엇을 보아도 놀래고 어떤 조그만 소리에도 겁을 먹게 됩니다. 이때 양은 길을 찾아 여기저기 성급하게 달려가 보게되나 대체적으로 그러한 시도는 무익하게 끝나고 맙니다. 길 잃은 양은 집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길을 찾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양때들로부터 더 멀리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필사의 노력으로 덤불 속으로 뛰어들거나 혹은 늪 속으로 가라 앉기도 하며 구덩이에 빠지기도 한다. 목자가 발견하지 않는 한 그 양은 그곳에서 죽게 됩니다. 목회자가 방황하는 교인을 되찾고자 할 때 그는 목자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목회자들은 잃은 자를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로서의 이러한 특징을 재현해 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 안에 있는 양들에게만 관심이 있으며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에게는 많은 주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목회자는 속으로 '왜 우리안에 들어오지 않고 난리야? 양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다 자신들 책임이야. 교회문은 열려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좋은데 이런데도 길을 헤매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이런 형태의 주장은 일부 목회자들의 마음에 위안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런 목회자들은 사람들을 돌이킬 수 없으며, 당연히 교회 안의 새신자의 수도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을 보살피는 일은 정성이 요구되며, 양을 보호하는 일은 지혜를 필요로 하고, 양을 지키는 일은 용기를 가져야 하며, 양을 치료하는 일은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잃은 양을 찾는 일은 사랑이 필요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사랑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더 선한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이면 전도를 나가서 아이들을 전도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전도하는 아이면 전도하는 선생님의 반이 되게 했습니다.

 

신도시에서는 어린이를 잡아라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엔 어린이 구역예배 식으로 각 가정에서 모여 예배드리고 간식을 나누어주고, 성경공부 후엔 자동적으로 전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선생님을 하실만한 분들이 교회에 등록하시면 자연스럽게 아동부 교사가 되었고, 열심이고, 성장하는 분위기에 선생님들은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항상 개별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개별적인 사랑이 양들의 애칭을 짓는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한 과제의 해답은 바로 "목회자"가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단한 웅변은 없더라도 사랑과 위로와 치료함을 가지고 양떼들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목자에게서 그 해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주된 문제는 바로 교회가 세상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뭇 영혼들이 현재 당하는 고통과 필요에 손을 거두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교회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오늘날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목양'인 것이다. 세상은 많은 문명의 이기와 화려함으로 가득차 있으나 '사랑'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랑은 이 세대의 가수들의 노래 몇소절이나 부흥사의 여러 강단에서의 연설이나 교리와 같은 것으로는 만족스럽게 표현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오늘날 요구하는 사랑의 표현은 오직 어린양을 품에 안고 양떼를 온유하게 인도하며 날마다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목자'의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부모초청 예배를 드려서 아이들이 주일예배시간에 발표회를 갖는 순서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부모님을 초청하는 식으로 부모들이 전도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 성탄절때는 그 주일저녁 예배를 축제형식으로 해서 모든 교우와 아동부 부모님들이 자연스럽게 교회 출석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동부가 많아지자 한 선생님이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이 초과되기 시작했고, 중고등부 학생들 중에 자질이 있는 학생들을 선별해서 보조교사로 임명했습니다. 현재는 아이들이 많아졌고, 전도사님도 새로 청빙해서 유년부와 초등부로 나누어 분반을 하고 있습니다.

토요일 제자 성경공부 때 한달에 한 번쯤 드라마 예배를 구상중입니다. 계속적인 전도를 강조하고, 담임목회자가 주중 1회 전도를 나가 몸소 전도에 모범을 보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월과 9월에 하는 특별 새벽기도회에 아동부와 전교인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맨 마지막 날은 안수 주일날로 계획하고 아동부 아이들만 안수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데 부모님들과 아동부 아이들의 호응이 굉장히 좋습니다.

한국교회는 담임목사와 아동부와 거리가 너무 먼 것이 현실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작은 어린아이 한 영혼 그들 가운데 세우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때묻지 않은 어린이들의 순수함과 가식없음은 그리스도께서 목회자들에게 바라시는 비밀 그 자체입니다.

 

향후 비젼은

 

앞으로의 전망과 비젼에 대해 한말씀 부탁드렸더니 이 목사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말을 끊었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부교역자를 청빙해서 각 부서를 맡겼다고 그에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위임하는 것은 무리수가 따르게 됩니다. 감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목회방향이 다를 수도 있고, 부교역자의 역량이 부족할 수도 있는 여러 가지 문제자 있기에, 1회정도는 교회의 각부서(아동부, 중고등부, 청년부) 회의에 직접 참석해서 각 부서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회는 담임목사에게 주님이 위임하셨다는 것을 믿기에, 담임목사가 지혜를 구하면서 뛰는 것만큼 성도들도 같이 따라와 주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실때에 그가 사역한 교회의 크기에 관해서 목회자에게 묻지는 않으실 것이며 단지 그가 사역을 어떠한 정신으로 감당했을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양을 친 모든 목자들에게 온전한 목자이신 그분을 닮아가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교회가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모든 목회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 위로란 선한 목자되시는 이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 그것입니다. 부천성만교회를 섬기면서 주중 1회는 반드시 교회에서 철야하고, 주중 1회는 반드시 전도하러 직접나가고, 주중 1회는 금식하는 것을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부천성만교회의 이찬용 목사를 만나고 느끼는 것은 결국 목회의 성공여부는 목회자에게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성장세미나에 다니면서 이것 저것 배워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내가 잘하는 것을 가지고 해야 성공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자리였다.

 

 

 

 

 

 

 

 

10.경인제일교회

신도시 전도의 경인교회

이길원 목사

(장로회 신학대학원)

 

한국교회의 개척교회 수는 날로 늘어가고 있지만 실제적성장에 있어서는 정체내지 감소현상에 직면해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교계 안팎에서는 나름대로 다각적인 면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지만 이렇다할 효과가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런데 최근 신생교회로서 주목할 교회가 있어 찾아 보았다.

 

신도시 전도로 성장한다

 

신도시 현장에서 몸소 실패와 실패를 거듭 체험해 오며 개척의 성공을 이룬 개교회의 목회자가 자신이 겪어온 경험을 토대로 "개척 교회 세미나"가 열린다는 교계신문의 광고를 보고 본 기자는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세미나를 마친 후 대담하기로 사전에 약속을 하였다.

그 장본인은 중동 신도시 반달마을 삼익상가 3층에 소재한 경인 교회의 담임인 이길원 목사(42)이다.

이 목사는 지난 19877월 부천시 원종동에 교회를 처음 개척했다. 그래서 어느정도 성장을 했을 무렵 아파트 단지내에 있는 유치원을 매입하여 성전으로 사용하고자 구청에 허가 신청을 내었다. 그러나 공동주택 단지 안에 있는 유치원은 종교시설로 전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성전 매입이 난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십자가와 교회 간판도 달지 못한 채 1년여 가량 예배만 몰래 드리게 되었고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교회 성장은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다시 중동 신도시의 한 상가를 매입하여 잠시 예배를 보다가 지금의 반달마을쪽에 교회를 이전하기로 했으나 거리가 너무 먼 관계로 따라오는 교인이 없어서 그곳에다 새로운 교회를 분립 개척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7년이 흘렀는데, 처음에 중동 반달 마을에 이전 해 올때의 교인은 불과 40여명 남짓이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현재의 지역에서 부지런히 전도를 하여 지금은 180명의 성도가 운집하는 교회로 급성장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목사는 이와같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개척교회 목회자 세미나"를 개최한 것인데 이 세미나를 갖게 된 동기는 좌절을 겪고 있는 개척교회 목회자들에게 자신이 몸소 체험해 온 개척방법을 전해 주어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줌과 동시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경인제일교회의 창립

 

우선 교회당으로 들어서면서 경인 교회의 주보와 전도지를 집어들었다. 교회를 소개하는 전도지는 바로 그 교회 목사의 전도와 성장에 대한 철학을 읽게 해 주기 때문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16절지 모조지에다 푸른색 마스타 인쇄로 소박하게 꾸며진 전도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경인 교회를 소개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신선한 설교 하나님을 만난 자만이 갖는 독특한 체취를 경험하며, 설교를 듣는 사이 내 영혼은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의 명쾌한 답을 제시합니다.

예배의 평안 경인교회에서 예배 드려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의 한결같은 말은 평안함을 체험했다고 간증합니다.

24시간 개방 24시간 교회문이 열려 있으므로 밤낮으로 기도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마땅히 기도할 곳이 없는 분은 오십시오.

꿈꾸는 사회 예배, 새벽기도회, 전도, 교육, 봉사, 선교에 관한 구체적인 비전이 있습니다. 오셔서 함께 꿈을 이루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점은 전도지가 대중용으로 많은 양이 배포되기에 알맞게 제작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흔히 우리가 전단지로 신문에 삽입하여 배포하는 광고 전단과 같이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경인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장점만을 소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로, 그것은 불신자보다는 우선 이사온 기성신자나 잠재적 신자층을 주로 흡수하겠다는 전략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튼 세미나가 마치고 난 뒤 오후 7시 경에 당회장실에서 이 목사와 만나 대담을 나누었다. 강의를 듣고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몇 가지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고 그리고 부족하다 싶은 부분만을 질문키로 하였다.

 

목회자의 의식이 무엇보다 중요

우선 목회자의 올바른 의식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무엇보다도 목회자가 프로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이 상가 건물의 100평을 분양 받았는데 시가로 한 6억 됩니다. 물론 한꺼번에 다 구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은행 대출을 받아 먼저 상가를 구입하고 30평은 태권도장으로 임대해 주었습니다. 주일에는 우리가 쓰기로 하고 말이죠. 그래서 지금의 교회당을 꾸밀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는 장사라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투자가 따른다고 보아야 되겠지요. 목사도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뛰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개척교회로서 6억을 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그 6억이란 재원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는 그동안 약 9년동안 옮겨 다니면서 늘어난 교회 전세금이며, 그 다음으로는 유치원을 구입했다가 판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조달 방법은 대출을 받기 위해 그 동안에 쌓아 놓았던 은행과의 신용거래로서 이것이 좀더 많은 대출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특히 알려 드리고 싶은 것은 '마이너스 통장'인데 은행은 개인의 통장잔고 3개월을 합산해서 평잔을 기준으로 최고 10배까지 대출해 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담보가 없어도 신용만으로 대출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이미지 전도

 

그러면 교회가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과 목회자 자신이 중점을 두는 교회 사역은 무엇일까? 그 점을 물어 보았다.

"저는 이 시대가 이미지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목회도 이미지고 전도 역시 이미지라고 봅니다. 노방전도를 통하여 직접적인 회심자를 만나기는 사실 힘이 들것입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의 전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강력한 그 이미지는 결국 니느웨성 전부와 왕까지도 회개시켰습니다.

이와같이 목회자 자신이 앞장서서 노방전도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회신념으로 생각하며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마치면 전철역으로 전도하러 갑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교회 가까운 길거리에 서서 크게 외치며 전도하고 전도지를 나누어줍니다. 저는 이 노방전도를 하면서 하나 얻게 된 큰 확신이 있는데 어디에서 개척을 해도 100명 정도 모으는 것은 별문제가 없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목회자 자신의 노방 축호전도는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교인들보고 '전도합시다'라는 권면 백번보다 낫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 목사는 "노방전도 예찬론자"였다. 그러면 그가 그러한 신념을 갖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물어 보았다.

"그것은 오늘날 산업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3년단위로 이사 다닙니다. 내 집 장만을 위해서, 또 좀더 넓은 집을 장만하려고 자주 정기적으로 이사 다니는데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다니기를 쉬는 신자가 많습니다. 특히 어떤 교회를 정할까 하고 고민하는 교인들이 많은데 이들의 잠자고 있는 신앙을 깨우는데는 노방전도가 최고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나태한 자신의 심령이 불타는 전도자를 보면서 부끄러워지고 부러워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교회다녔던 경력이 있는 사람 집 근처에서는 더 큰 목소리로 전도합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치는 것이지요."

그러면 교회성장의 요소로서 노방전도만 강조하고 설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느냐고 물었다.

"야구 선수들은 타율을 높이기 위해 밤새도록 연습합니다. 우리는 과연 설교, 전도의 타율을 높이기 위해 밤새도록 연습하는가 하고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설교는 30초의 연출이라고 생각합니다. 광고가 30초동안 재미없으면 채널이 돌아가듯 설교도 30초 동안만 재미없으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공상이 떠오른다고 봅니다. 그래서 설교작성은 시나리오 작성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나리오만 좋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배우가 현실감 있게 연기해야 합니다. 목사는 진실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배우 이상으로 열정적이고 감동적으로 전해야 한다고 봅니다. 배우는 허구를 가지고도 실감있게 전하는데 목사는 진실을 가지고도 자신없게 전합니다."

전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함으로 원고 준비는 어떻게 하고 설교자료들은 무엇을 참고하는지에 대해 이목사에게 물어 보았을 때, 이목사는 자신의 설교는 '표절설교'(?)라고 한마디로 말한다. 무슨 말이냐면 개척교회 목사가 설교 준비하는데 하루 종일을 허비하는 것은 직무유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실험적으로 검증이 끝난 성장하는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기초로 하여 자신의 경험과 경인 교회의 현실에 비추어 새롭게 각색해서 준비한다는 것이다. 그런일로 해서 설교 준비에 쏟는 시간을 전도하는 일에 보다 더 투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목사는 1988년 통합측 서울 서남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초창기때부터 온 동네 사람이 다 알아 줄 만큼 노방 전도에 열심이었다. 매일 오후 5시만 되면 여리고성을 돌 듯이 주변 지역을 전도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으며 그들을 교회안으로 끌어 들이고 또 붙잡기 위해서 설교에 혼신의 힘을 쏟는 아주 전형적인 복음사역자 였다.

 

한국교회에 바라는 말

 

이제 10살된 아들과 8살된 딸이 있는데 비교적 젊은 이목사는 끝으로 메세지사 독자와 한국교회를 위한 당부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사실 교회 개척의 성패는 열심입니다. 열심만 있으면 적어도 100명은 모입니다. 열심을 가지고 목사 자신이 노방 전도하면 이미지 효과가 굉장히 큽니다. 지역의 교회와 다른 교인들이 주목하기 시작하고 우리교인들도 뜨거워집니다. 거기에다 노방 전도하는 목사는 성도들이 다른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성령충만의 표시는 복음 전도입니다.

그러나 신도시 개척은 재정적 부담이 너무 큽니다. 그러므로 재정적 준비를 충분히 한 뒤에 도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특별히 교회 건축을 중요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가 전체를 다 구입할까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당 지어 놓고 나면 제 자신이 나태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과거 경험을 돌이켜 볼 때 우리 교회가 찾기도 힘든 구석에 있을 때 교회를 알리기 위해 더 열심히 전도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전도하는 목사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오늘날 노방전도와 축호전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잊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도 방법이 선교 2세기에 세상의 늪에서 잠자고 있는 교인들을 깨우는 새로운 방법임을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12백만이라고 하지만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영혼의 깊은 잠에 빠졌는가? 우리가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를 하루라도 빨리 앞당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잠자는 교인들을 깨워야 할 것이다. 그런점에서 경인교회와 이길원 목사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는 교회요 목회자가 아닐 수 없다. 대담을 마치고 밖에 나오니 중동의 큰 아파트 단지 그 어두운 밤거리 사이로 굵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11.새벽교회

우리교회의 전도전략을 말한다

 

이승영목사

(춘천중학교, 대광고등학교, 1973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장로회신학대학교 신대원(M.Div.), 풀러신학대학 목회학)

 

송파의 새벽을 깨운다

 

새벽교회 이승영 목사, 특히 본 필자가 사역을 하였던 월간 메시지를 음으로 양으로 후원하며 도와주었던 관계로 특히나 관심이 가는 교회였다. 김대원목사와 함께 만날 약속을 하고 새벽교회를 방문 한 것은 무더위가 막 기승을 부리는 초 여름 이었다. 당회장실로 안내된 우리 일행은 무엇보다 먼저 목회철학과 교회의 이름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저는 복음전도에 대한 정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말씀 특별히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함으로 영생을 얻도록 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남을 확신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 살게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복음전도는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이다는 것이지요.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해서 복음전도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선순위에 있어 제일 우위에 위치한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전도사역자인 담임목사가 자신이 복음전도에 대한 확고부동한 철학과 가치관을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교회의 전도사역에 대한 몇 가지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첫째로,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의 복음전도는 그 동기, 내용, 방법, 목적 등에 있어 다분히 인간 중심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전도의 목적을 영혼 구원 단 한가지로 결론을 내려 버리는데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물론 죄인의 회심은 진정한 전도의 목적이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고상한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행복도 아니요 외적 축복도 아니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다. 둘째로 전도사역은 전도자 자신을 생명력있게 성장시킨다는 것이다. 개인 신앙생활의 온전한 3요소로서 우리는 말씀, 기도, 전도를 말한다. 그런데 말씀과 기도의 생활은 잘하면서 전도를 하지 않을 때 이기적인 신앙이 되고 폐쇄적이며 자기중심적이 되버린다. 생동감 있는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신앙생활은 관계성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 예수의 생명을 얻은 자는 말씀의 목격자로 살게 되는 것이다. 전도에는 다소의 부담과 수고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전도사역에 참여하는 성도는 그 자체로서 온전한 신앙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교회와 성도의 진정한 기쁨은 한 생명을 얻는데서 온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늘 기쁨에 젖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기쁨은 분위기적이고 감성적인 도취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한 영혼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늘의 기쁨이다. 주 안에서만 경험하는 살아 있는 기쁨이다 입니다

 

복음전도의 전략

이와같은 맥락에서 새벽교회는 복음전도의 전략으로 크게 세 가지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교회를 통한 전도이다.

복음전도의 메시지는 항상 그리스도이지만 복음전도의 목적과 수단은 교회이다. 교회를 통하지 않은 전도, 교회 안으로 들어오도록 목적하지 않는 전도는 진정한 열매를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구체적인 전도의 내용중의 하나로 교회와 담임목사를 적극적으로 자랑한다.

둘째, 평신도 사역자 양육이다.

복음전도 전략에서 평신도는 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동시에 이제까지 많이 사용되지 않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 영혼을 구하는 것보다 구령자들인 평신도 사역자들을 양육하는 것이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교회는 전도를 위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평신도 훈련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셋째, 복음적 설교를 통한 전도이다.

전도사역에 있어서 담임목사는 평신도들을 훈련시키는 단순한 코치가 아니다. 교회로 인도되어 온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을 먹이는 전달자이다. 특히 담임목사가 복음적인 설교를 할 때 문서전도의 가능성이 더욱 열려지게 된다. 실제로 집()앞에 놓여진 설교집을 읽고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특히 전도에 있어서 복음적인 설교는 긍정적이고,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파고드는 설교라야 한다. 윤리적 훈화나 단순한 선행에 대해 솔깃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생명의 말씀 앞에 압도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목회자 자신이 성령 충만함으로 바른 성서 해석을 하는 가운데서 되어진다.

 

전도사역의 실제

 

우리교회의 전도사역의 실제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고 한다.

첫째 목요전도사역,

우리교회가 개척된 이래 지속적으로 해 오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목요전도사역이다. 매주 목요일 오전 10:30에 교회에 모여서 전 지역으로 흩어져 전도한다. 매주 백명이상의 평신도들이 항상 참여하는데, 2-3명씩 짝을 이루어 접촉이 있었던 대상자의 집을 향하게 된다. 우리교회가 있는 지역은 아파트 밀집 지역인데 목요일만 되면 주민들이 일제히 피신하는 상황까지도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목요전도사역을 통해 매주 10명 이상의 새신자들이 꾸준히 등록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교회의 등록 새신자들은 담임목사의 설교를 듣고 마음을 정한 사람들 외에는 대부분이 목요전도 사역시 전도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우리교회의 전도 사역의 특징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전도하기 보다 함께 기도하며 이 사역에 참여하게 될 때 전도의 맛을 알게 되고 전도자의 숫자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도 사역의 활성화는 교회전체를 전도의 공동체로서 응집시키는 것도 보게 된다. 또한 전도 대원의 방문을 받고 귀찮아하며 거부하던 주민들도 막상 교회에 나가고자 하거나 교회를 찾는 이웃이 있으면 "역시 새벽교회를"하며 우리 교회로 오는 것이다.

둘째 지역과의 관계를 통한 전도(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전도전략)

우리교회는 특별히 지역에 대한 섬김과 봉사를 많이 하고 있다. 교회내에 있는 사단법인인 생명문화회를 통해 교회가 속한 동(송파2)이 중국 훈춘시의 경신진과 자매결연을 맺도록 직접 역할을 감당했다(주요 일간 신문에 보도됨). 또한 우리 지역에 개장한 공원에다 통나무 팔각정을 세우는 등 각종 행사를 지원하는 섬김을 통해 주민들이 교회를 향한 호감과 호평을 갖게 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담임목사가 구의 도시계획 자문 위원으로 위촉되고 또 모범 시민 표창을 받게 되었으며 전도의 좋은 기반을 조성하게 되었다.

셋째 사역훈련을 통한 전도

사역훈련을 받으면 교회 안에서 은사대로 서로 봉사하며 유기적인 관계를 이끌어 가는 주역을 담당하게 된다. 다른 형제를 가르치며 세워주는 섬김을 통해 전 교회가 세상 앞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나타나며 복음전도의 사역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교회는 처음 나온 성도에게 먼저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고 일대일 양육(5)을 시킨 후 소그룹 새 교우 훈련인 '라이프-스터디'(8)양육을 받게 한다. 그리고 나서 본격적인 훈련인 제자훈련(1), 사역훈련(1), 순장사역반(6개월)양육을 한다. 이렇게 훈련되어 파송된 순장들이 전도와 양육의 공동체인 '순모임'을 통해 능력있고 폭발적인 전도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넷째 소그룹 공동체를 통한 전도

우리교회는 소그룹 공동체의 활성화를 통한 성장으로 한국교회의 모델 중의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우리 교회의 가장 기초적인 양육 소그룹은 '순모임'이다. 평신도 지도자인 순장이 인도하는데 말씀, 기도, 전도로 양육사랑의 교제를 이루는 소그룹 단위의 교회 세포모임이다. 순모임의 생명은 성장과 번식이기에 전체 공동체 내에서 모든 순들이 선의의 경쟁처럼 전도와 양육에 열심을 내고 있다. 그 결과 9345개 순(36, 청년9)에서 95년말 93개 순(:54, :19, 청년:20)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 교회는 생명문화회의 새벽문화센타를 통해 전도를 위한 소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외국인 영어회화, 바이올린, 첼로, 크로마하프 강좌, 꽃꽂이 강좌, 미술 강좌 등을 통해 불신자들이 교회와 접촉 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마련하고 있다.

그리고 관심과 돌봄의 그룹이 있어서 병원 봉사, 지역의 기관들 위문, 복지 단체의 자원봉사 활동 등을 맡고 있다.

다섯째 문서 전도

문서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활동하는 전도의 무기이다. 우리 교회는 인쇄물의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정기적으로 "새벽월드", "말씀의 새벽(설교집)", "생명문화"지 등을 발간하여 좋은 전도 문서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문서를 통해 말씀 양육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접하고 스스로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또한 생일 카드 보내기, 새신자에게 7주간 양육 편지 보내기를 꾸준히 하고 있는데 당연히 우리 모든 교우들은 전도 문서의 분배자가 되고 있다. 평소 전도하는 것을 주저하던 성도들로 하여금 문서의 전달자가 되게 함으로써 전도에 참여하게끔 돕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섯째 예배, 교회 절기, 행사를 통한 전도

우리 교회는 분기에 한 번씩 예수 복음 초청 예배를 드린다. 이 때에는 매 분기마다 등록한 새신자들을 비롯하여 평소 접촉하던 불신자들을 대거 초청한다. 특별 찬양팀을 통해 마음을 열고 복음적인 설교로 주님을 영접하도록 돕는다. 진정한 예배에 참여하게 될 때 치유와 만남의 역사가 있는 것을 많이 목격하고 있다.

 

전도사역의 비전

 

마지막으로, 21세기를 바라보면서 앞으로의 우리교회 전도전략을 말하겠다. 우리 교회는 그동안 제임스 케네디의 전도 폭발 무장사역으로 전도사역자들을 양육했다. 그래서 300여명 이상의 잘 훈련된 전도사역자들이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훈련은 다분히 서구적인 취향에 바탕을 두고 있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는 보다 더 한국적이며 우리 국민의 정서에 부합되는 복음 제시의 내용, 전도 방법이 절실히 요청되어 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새벽교회는 앞으로 한국교회에 모델이 될 한국적 복음의 내용과 전도 방법을 준비하는 중에 있다. 그것은 복음으로 초청하는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복된 모임"이라고 부른다. 이 복된 모임은 소그룹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 소그룹은 1, 2, 3으로 명칭 된다. 샘이 하나의 팀이 되 는데 팀장을 "전도교사"라고 호칭한다. 대상자와 접촉하면서 이 모임을 소개할 때도 "진정 복 받으셨나요", "참 복된 우리 모임에 한번 와보시지 않겠어요"라는 질문법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복된 모임 전도를 위한 소그룹 공동체인데 순모임과 성격이 좀 다르다. 교회에 정식으로 등록하기 전까지 가정에서 노출되지 않은 상태로 전도한 사람들을 직접 양육하는 모임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이 되어 진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한국적 정서와 우리 민족의 심성에 적합한 이 "복된 모임"을 통해 풍성하면서도 새로운 전도의 바람을 몰고 갈 것이다.

 

목회를 하게 된 동기

 

무엇보다 5대째 내려오는 기독교적인 집안 배경이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청소년 시절죄와 죽임에 대한 심각한 갈등을 겪으면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고3 때 주님의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다. 대학생 시절 교회에 대한 진실과 사랑을 깨닫고 목회를 하게 되었다. 현재와 같은 사역으로 목회철학을 세우게 된 경위는 어려서부터 교회생활은 나의 불가분의 관계였고 교회의 여러 경험이 자연히 몸에 배이게 되었다. 그러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청년운동 등 새로운 경험과 학문을 접하면서 기존 교회에 대하여 상당히 갈등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장로회신학 대학교를 다닐 때 교회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 등에 대하여 고민을 많이 하였다. 개척 교회를 통하여 목회의 실제를 체험하게 되었고 아세아연합신학대학과 미국의 풀러신학교 목회학 박사과정을 통하여 현재와 같은 목회철학과 뿌리를 정립하게 되었다.

목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교회와 세계 속에서 행하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정통 기능과 함께 목회도 교회에 주어진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목회란 각 개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어주고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며, 교회 안에 삶을 보존시켜주는 성화와 훈련의 행위인 것이다. 이 행위는 성령에 의해서 시작되며 진행되므로 성령의 역사 없이는 목회를 행할 수 없다.

교회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내적인 생명의 기초를 둠으로써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며 공통된 이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유대를 맺는 위치에 서있다. 한편, 교회의 본질과 선교는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생명력에 의존한다. 이것을 위해서 교회는 성령 안에서 생명력을 부여받고 그것을 또한 영위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 없이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둔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교회의 본질과 선교는 세상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향해 수행하셨던 사역을 계속해서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이것을 위해서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 그것들을 지체 가운데 활용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항상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에서 자신의 사역을 계속해 나가신다. 이 사역이 곧 목회이다.

오순절 사건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교회, 즉 다시 사신 주님께 대한 충성과 더불어 성령을 공통적으로 체험함으로써 뭉쳐진 종말론적인 새로운 공동체의 출발과 구성을 위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오순절 사건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세상에 나타나심을 통해 성령의 체험 및 능력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교 사이에 중대한 연결이 유지된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본질적으로 성령의 공동체임을 웅변하고 있고 그 초기에 벌써 마지막 날의 추수’(a last day-like harvest)를 체험하며 또한 세상의 종말을 향하여 복음을 호소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증거한다.

교회의 그러한 선교는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의 지휘에 의해 미리 짜여진 전략에 따라 면밀히 계획되고 추진된 그 어떤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그것은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에서 성령이 내몰고, 성령이 다스리시며, 지시함으로써 일어난 그야말로 자발적인 운동이었다.

성령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교회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도록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고 지체로 만든다. 또한 성령은 모든 귄능의 근원이 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어 그리스로의 몸인 공동체의 지체로서 직분을 감당하게 한다. 교회의 본질이 성령공동 사역으로서 새롭게 해석되지 아니하면 성경적인 교회의 두 가지 근본적인 구성요소인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만인 제사장직)과 그리스도인의 참된 교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교회로서의 참된 본질을 망각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선교 수행에 있어서도 한층 더 무력함을 드러내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구성원 개개인 모두가 성령의 교통 안에서 바르게 성장하며 서로의 행복 증진을 위하여 관심을 쏟기보다는, 오히려 피차 무관심한 관계 속에서 저마다의 실속을 차리기 위하여 교회 봉사에 참여하는 집단으로 변하게 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온 지체들이 다 함께 협력하여 그리스도 왕국의 눙력을 갖도록 지체들의 은사를 발견하고 훈련시키며, 은사받은 자로 하여금 교회가 말씀을 선포하게 하고, 세상을 향하여 봉사케 하는 훈련을 시킨다.

성령공동체의 사역이 목회의 본질로서 재조명되고 적용되어질 때, 교회는 초대 교회와 같이 생명을 불어넣게 되며 그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성령공동체 사역으로서의 목회가 새벽교회의 목회뿌리이다.

 

12.은평성결교회

교육과 성령운동을 조화롭게 이룬 목회

이병돈 목사

(서울신학대학, 인디아나 대학 석사과정, 트리니티(D.Min)

 

목회자와 가정

한국교회에 목회자들을 위한 다양한 사역으로 섬기고 있는 은평설결교회를 탐방키로 하였다. “가족관계로는 아내와 아들 둘, 딸 하나이다. 아들 둘 다 목회를 하고 있다. 큰 아들은 부목이며, 둘째 아들은 선교사로 나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신촌교회 부목사로 있다. 딸은 우리교회 청년하고 결혼했고 사위는 일본회사의 과장으로 있다. 손자가 세 명 있다. 취미는 등산을 좋아해서 거의 하루에 한번씩 산에 갔다올 정도이다. 아침의 신선하고 좋은 공기를 마시는 시간을 좋아한다는 말로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한 다음 월 평균 신앙의 선배 및 그 영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월 세권 정도 읽으며, 어거스틴의 [참회록]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후배들에게 권하고 싶다. 중요한 신앙의 선배 및 그 영향은 신학 수업을 받을 때 서울 신학의 학장으로 있던 임형규 목사님이다. 이 분은 성결교단뿐 아니라 교계에 성자로 이름난 분이며 성결교단에서는 사부라고 불리운다. 성결교단은 선교사가 교단을 시작했지만, 이 분은 선교사들과 함께 교단을 키운 분이다. 겉으로 풍기는 인상도 좋았지만 사생활이나 우리에게 말하지 않고 보여주고 물려주는 신학적인 유산이 훌륭했던 분이다. 또 한분은 이성복 목사님으로 이 분은 부흥사로 유명했지만 목회자로서 오점을 남기지 않았고 실수가 없으셨다. 성결교와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교회 그리고 국내와 해외에서 성공적인 부흥사로서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셨고 그 분이 전한 메시지도 복음적이었기 때문에 교계에도 공헌했거니와 개인적인 신앙의 모습도 남겨주었다고 말한다.

 

성경경통독 횟수 및 성경연구 방법

 

나는 성경을 32번 읽었는데, 하나님 앞에 항상 죄송하게 생각된다. 삼백 독을 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어떻게 그렇게 많이 읽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필자는 큐티를 항상 하기 때문에 적은 분량을 가지고 깊이 묵상하고 있다. 성경연구의 방법은 신학적 연구, 주석 연구, 강해 연구등 여러가지 있지만 필자는 목회자로서 성경르 어떻게 다루어야 하고 어떻게 풀이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는 수원교회에서부터 은평교회에까지 26년 동안 강해설교를 해왔다. 구약은 장별강해, 신약은 한 장에도 스토리가 몇개씩 있어서 한 장 가지고도 두세 번씩 설교를 하게 된다. 강해설교를 하니까 성경전체를 보는 안목이 생기고 성경연구가 설교 중심이 되고 큐티훈련도 되는 것 같아 설교준비가 어려움없이 항상 즐거우며 설교에 대한 부담을 가지지 않게 된다. 또 항상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게 되므로 교훈이 되고 필자가 먼저 은혜를 받는다. 즉 큐티로 성경을 대하고 강해 중심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강해설교를 해온 것이 필자의 성경연구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은평교회에 와서 17년 이상 성경공부를 인도해오고 있는데, 지금은 목요일 날 성경공부를 인도하며 성경공부반이 열 반이 넘는다. 제자훈련은 필자가 하고 그외의 성경공부는 다른 교역자들이 인도하고 있다

 

개인 기도생활

새벽기도시간을 주로 활용하며 1시간 이상 기도한다. 그리고 주로 무시기도를 한다. 이것도 훈련이 안되면 잘 되지 않는데, 이제는 훈련이 되어서 순간순간 기도한다. 그리고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이때 아내와 둘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목회자는 중보기도가 대부분을 차지하므로 중보기도를 세밀하게 하려고 애를쓴다. 교인들이 점차 많아지니까 일일이 다해주지는 못하나 일반적인 내용일지라도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한마디가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 비중있는 기도가 되어서 응답받았을 때 정말 감사하다. 또한 필자는 맡기는 기도를 많이 한다. “하나님, 맡기고 맡깁니다. 내 마음을 비웁니다. 하나님이 다 인도하시옵소서. 하나님보다 절대 앞서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신신자들을 직접 양육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이 일일이 보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저녁때 하루를 무사히 보내게 되면 그렇게 감사하고, 많은 신자 가운데 하나님께서 오늘도 함께 하셨구나 하는 감사기도가 절로 나오게 된다. 한편 기도가 더 깊어지고 성숙해질수록 중요한 것은 내 뜻과 내가 원하는 기도제목,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할 때 선뜻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포기하겠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중요한 사건이라도 그렇게 태도를 정한다는 것, 즉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 편을 따른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영적 수준이 올라가지 않으면 잘 안된다. 그런데 그런 면에서 자유하게 되니 마음이 편하다. 이것은 영적으로성숙하지 않으면 어려운데, 젊은 목회자들에게 선배 목사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성격과 목회

 

다른 사람이 외모로 보기에도 그렇지만, 필자는 스스로 나는 겸손한 사람이다. 타고나기를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고 실제로 내 마음이 그런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 자체가 오히려 교만이었다. 또한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럽게 타고났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영적인 성장의 장해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쨌든 목회자는 하나님께 빨리 적응할수록 목회에 성공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 빨리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적응하는 데 몇 십년 걸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평생 안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의 헌 방법으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자기를 못박았다고 하는 것처럼 자기를 완전히 주의 손에 붙들리게 하고 영적으로 하나님께 잘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격은 한번 깨달았다고 해서 다 바뀌는 것이 아니며, 시간이 가면서 자기 자신에게서 몰랐던 부분, 점진적으로 자기의 성격을 깊이 진단하고 하나님께 순수하게 적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갈 때 목회가 더 힘있고 즐겁게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목회를 하게 된 동기

 

고등학교 2학년 때 부흥회에 참석해 소명을 받아 목회자가 되었다. 우리 가정은 할머니 때부터 믿어서 삼대재 믿으며, 손자는 오대째 믿는 셈이다. 할머님이 충남 부여에 있는 은산교회 초대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할머니 후손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래서 권사와 장로가 많고 목사도 7명이나 된다. 일찍 복음을 받고 주님을 영접한 결과가 지금과 같은 결실을 맺게 된 것 같다. 목회철학은 누구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필자가 원래부터 교육목회에관심이 있었기에 강해설교를 했고, ‘80년부터 집중적으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제자훈련은 성경공부와 한부분으로써, 우리교회는 성경공부를 통한 교육목회를 하고 있다. 따라서 13년간 부흥회를 안했어도 신자들이 영적인 갈급함이나 왜 부흥회를 안하느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새가족들을 초청해 시낭부흥의 계기를 위한 부흥회를 1년에 한번씩 하고 있다. 교육목회에다 성령운동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 이 가운데 하나만 택하라 하면 필자는 성령운동을 선택할 정도로 성령운동을 주장하고 싶다. 교육목회는 일꾼양성을 위해서 무척 중요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것으로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말로서가 아닌 생활로서 교회를 보여주고 인격으로 성경을 말해주는 증인이 되어 흩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우라교회 성도들에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누가 봐도 그리스도의 제자 같고, 또한 대화하거나 사귈 때 회개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그런 영적인 감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참 그리스도의 제자요 증인이다라는 아야기를 많이 한다. 이런 생활은 성령운동을 통해서 일어나며, 성경공부만해서는 안된다. 성경공부는 성령이 역사할 수 있는 매체이며, 우리에게 변화를 주고 새힘을 주고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작업으로 성령의 사역이다. 그래서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된다. 그러나 성령은 성경공부 없이도 사람을 변화시키실수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셩령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성령께 강하게 의존하고, 위임받고, 도움을 받기 원해야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할 수 있다”.

 

설교 분석

 

새벽설교와 주일낮예배 설교를 필자가 하는데, 새벽설교는 30-1시간 정도 준비하며, 주일 낮 설교는 15시간 정도 준비한다. 주로 성경본문을 관찰하는 데 1시간 이상 걸린다. 그리고 본문에 대한 탈선을 방지하고, 본문이 목표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주석이나 자료를 4권 정도본다. 주석을 참고하고 자료를 참고하는 데 4시간이 걸리고, 본문과 자료에서 묵상한 내용을 정리하는 데 4시간이 걸린다. 그 다음에 설교를 정서한다. 전에는 원고지에 썻지만, 지금은 먼저 대학노트로 3장 정도쓰고, 이것을 여러 번 읽고 정리해서 대학 노트 1장으로 만든다. 여기까지 작업하는 데 4시간 정도 걸리며, 외우는 데 2시간 해서 15시간이 걸린다. 형용사나 수식어를 세련되게 쓰려고 노력하면 좋은 설교를 할 수 있다. 목회자는 현실적인 시대감각과 새로운 것에 뒤떨어지면 안된다. 현 시대의 감각이 포함된 언어, 형용사, 수식어를 설교에 포함시키면 같은 설교의 내용이지만 휠씬 품위가 있고 설득력이 있다. 거기다가 성령의 영력을 포함시키면 산 설교가 된다

 

교회의 성장분석

 

은평성결교회는 1962103일 창립했으므로 만 35년 정도 되었다. 장년과 주일학교를 합치면 5천명 정도이며, 장년만 따지면 2,500, 유초등부가 800명 정도이고, 중고등부와 영아부가 있다. 또한 베데스다부(지체부자유자들) 50명과 교사들을 합하면 백여 명가량 되는데, 독립예배를 드린다. 우리교회는 4년 전부터 자체로 장애인주일을 지킨다. 이번에도 장애인들이 주일 낮예배에 나와서 합창을 했는데 온교회가 울음바다가 되었다.

교회 조직은 당회 밑에 기획위원회가 있어서 산하기관들을 조정한다. 여전도회가 39, 남전도회가 17, 권사회가 3, 운영위원회가 18개가 되는데, 기획위원회는 이들 각기관장들 70-80명이 모여서 행사가 중복되지 않도록 조정하고 같은 행사이면 협력하면서 교회의 유익한 모임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인 기관이다. 우리교회에서 가장잘된 것은 새가족양육체계이다. 국민일보의 교회성장연구원에 필자가 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강사로 많이 나가고, 우리교회 교재도 많이 나가고 있는데, 우리교회가 전국에서 가장 잘되었다고 평가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선 새가족이 들어오면 환영식은 생략하고 새가족양육가정을 일대일로 거친다. 새가족들을 그룹으로 지도하려면 그들을 다 참석시킬 수 없으나 일대일로 하면 다 참석시킬수 있다. 그룹으로 공부하게 되면 제대로 양육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일대일로 하게 되면 모든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충족시킬 수 있고 전체 상담도 가능해진다. 이것을 우리교회에서는 영친관계라 한다.

그 방법을 소개하자면, 첫번째 심방을 해서 교역자가 그 사람의 현재 영적인 상태를 진단해서 진단카드를 넘겨주게 되면 양육자가 판단할 수 있는데 이를 제1진단이라 한다. 일대일 양육과정에서 둘이 사귐이 있게 되고 친숙해져서 마음이 있는 것들을 털어놓게 되는데 이것을 제2진단이라 하며, 그래서 이러한 양육의 과정이 참으로 이상적이다. 3개월간 양육을 하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세례를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놀라운 변화들이 있게 된다.

 

교회의 성장 추이

 

작년에는 1,227명이 등록을 했다. 어린이들 5백여 명, 어른 8백여 명이 등록했으며결실 인원은 4백여 명이었다. 금년에도 6월 현재 461명이 등록했는데, 장년이 3백여 명, 어린이가 150명 정도이다. 교회성장은 교회분위기가 목회자의 강단이 중요하며, 신자들의 전도열기가 중요하다. 주택단지인 우리교회의 경우 폭발적인 성장은 어렵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교회성장은 교회 위치가 중요하므로 아파트단지냐, 주택가냐, 도시교회냐, 농촌교회냐에 따라서 성장의 속도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목회자의 영적 리더십이 큰 영향을 끼친다. 또한 교회 자체가 성장의지를 갖고 노력해야 한다. 성장하는 것이 교회 목표가 되서는 안되며, 왜 성장을 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두고 노력하면 자연히 성장할 수밖에 없다.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소원이며, 성장의 이유가 많은 선교와 많은 봉사, 구제 이런 것을 더 많이 감당하기 위한 것이라느 목회철학을 갖고 나가게 되면 교회는 성장한다.

그리고 지역에 있는 선덕원, 고아원등과 부모결연을 맺어서 그 핵생들을 명절때 데리고 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생일날 초청하며, 또 졸업식 날 부모 대신 학부모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사랑의 빵에 1,500만원, 사랑의 쌀에 천만원 정도 지원하고 있다. 경로잔치, 지역의 미화원들 1,500여 명을 초청해 선물을 주고 식사도 대접하며, 농촌과 도시 사이에 농산물 직거래와 일일시장 등을 열어 농촌 사람들을 제 값을 받고 도시민들은 무공해 식품을 싸게 구입하게 하고 있다. 또한 지역사회를 위해 도시락 지참하기운동, 바르게 살기운동, 자가용 덜 타기운동, 쓰레기 줄이기운동 등을 하고 있다. 이런 일을 많이하다 보니 교화와 지역사람들이 거리감이 없어 친근해졌다. 얼마전에는 지역주민을 위한 베데스다 음악학원을 개설하기도 했다.

2천년대를 대비한 중요한 목회정책

 

먼저 통일 대비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교회는 북한에 적어도 10개 이상의 교회를 세우고, 중상층의 가정은 북한의 한 가정을 재정적으로 도와줄 각오를 하고 있다. 어느 지역에 어떤 방법으로 교회를 세울 것인가도 준비하고 있다.

그 다음 청소년 문제로 교회에서 청소년을 선도하는 책임을 지고 청소년들을 바르게 지도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 교회가 사회에서 비중을 차지한다면 교회가 해야 할 몫,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 우리교회는 사회사업이라든지 사회에 환원해 줄 수 있는 것들을 책임지고 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세계선교로, 앞으로는 제3세계 선교가 중요하다. 회교권, 힌두권, 불교권, 미신권, 이런 곳에는 목사가 들어갈 수 없으므로 장단기 평신도 선교사들이 기술을 가지고 들어가서 선교해야 한다. 이제는 목사나 선교사들 외에 평신도 선교사들을 많이 양육해 미전도종족을 선교하는 전략을 짜야 한다.

 

13.부산 신평로교회

믿음과 지성의 조화로 부산을 복음화 한다

 

김태우 목사

(총신대학.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미국 훼이스신학교 목회학박사)

 

 

 

부산 신평로교회는 부산에서 몇 안되는 급 성장한 교회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부산은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어느 지역보다도 복음 전하기가 어렵고, 도시가 정주형이기 때문에 인구의 이동이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 대하여서는 매우 보수적이다. 반면에 항구도시의 특성상 외래문화의 유입은 매우 빠른 편이다. 바울이 복음전하였던 유럽의 관문도시 고린도처럼 저질스러운 외래문화와 우상숭배가 가득하다. 이러한 부산을 그래도 복음으로 변화시킨 사람들은 6.25한때 피난 내려온 이북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데, 부산에서 교회를 담임하고 크게 부흥시켰던 60, 70년대의 목사님들은 이북출신이 많았다. 부산영락교회도 그런 교회중의 하나이고 좌천동에 있는 모교회와 영도에 있는 모교회는 대표적인 이북출신들이 모여 만든 교회이다.

또한 부산지역의 특징이라면 고신대학출신의 고신측 교회와 목사들이 많다는 것인데, 이것이 이 지역 교회의 흐름을 상당히 주도하고 있어서 신앙도 매우 보수적이다.

이런 가운데서 필자는 이제 다시 재부임 하여 다시금 부흥을 일으키고 차세대의 교회와 지도자상을 보여주는 교회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산으로 달려 갔다. 부산신평로교회는 옛날 서대신동에 자리잡고 있던 서대신제일교회를 모체로하여 현재 신평동으로 옮기면서 신평로교회로 교회명칭을 바꾸었다. 또한 서대신제일교회는 필자의 모교회이기도 하다.

서대신제일교회를 신평로교회가 되게하기까지 수고하신분은 김태우목사인데(현재 서대문교회 담임) 100평도 채 되지 않는 교회를 10년여 만에 1,000명이 넘는 교회로 급성장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교회성장이 어렵다고만 생각하던 부산교계에 수영로교회와 함께 일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다가 5년 전 갑자가 김태우 목사가 사임하고 1년여의 공백기간동안 신평로교회는 다시 한번 침체기를 맞게 된다. 1년 이상을 담임목사 없이 지내오다가 현재의 이규왕 목사가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규왕목사가 5년여를 시무하다가 수원제일교회로 전격적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 신평로교회 당회는 신평로교회의 성장의 주역이었던 김태우 목사를 재 청빙하기에 이른 것이다. 과거에 몇 교회에서도 이러한 예가 있긴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필자는 매우 놀라웠다.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한 진단을 묻는 질문에

"글쎄요! 어느 시각에서 보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저는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다고 봅니다. 먼저 한국교회가 침체기에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겠지요. 즉 이러한 침체의 원인을 그 동안 한국교회가 급 성장하면서 잊어버렸고, 또 놓쳐 버렸던 부분과, 많은 문제점들을 되돌아보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해서 새로운 성장의 계기를 만드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면 상당히 긍정적일 수 있겠지요. 반면에 한국교회를 사랑하시고 한국교회에 큰 기대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큰 고난이 온다는 것은 성경 속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침체기는 그런 연단과정중의 하나겠지요. 그것이 부정적인 면입니다."

김태우 목사는 이북 출신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았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 서대문교회에서 담임을 5년간 맡았다. 넓은 얼굴, 서글서글한 눈매 그리고 정확한 발음, 그의 면모만큼이나 확실한 진단과 답변이었다. 필자는 연이어서 앞서의 질문과 연결해서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부족한 것은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만들려고 그들을 선택하시고 가나안에 심으셨습니다. 이것은 열방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게 하자는 하나님의 깊은 경륜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북아의 작은 나라 한반도를 이렇게 복음과 함께 경제적으로 축복하신 것은 우리 또한 제사장 나라가 되어 일본과 중국을 비롯해서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곳에 선교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즉 현시점에서 하나님의 기대는 더 증대되는데 선교에 있어서나 대 사회적인 봉사의 부분이 너무 줄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너무 분파주의, 갈등 등의 요소로 인해 힘이 너무 소진되어 버렸습니다. 같은 기간 기독교는 침체한데 반해 천주교는 100%이상 증가했다는 것은 교회가 좋은 이미지를 세상에 심는데에 실패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므로 다음 세기의 전략은 교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기 위한 데에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김태우 목사의 지적은 너무도 타당하다. 주님은 우리가 산 위에 있는 동네이기 때문에 숨겨질 수 없다고 하셨다. 이미 드러나 있어 많은 사람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이 좋은 이미지를 세상에 심는 데에는 실패했다. 물론 지나온 세월동안 자유주의와 이단들과의 힘겨운 싸움 때문에 신학적 정립과 올바른 신앙의 정진에만 힘을 쏟았지 빛과 소금이 되라는 명령에는 불충실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이제 이것을 타개해 나가려면 어느 것부터 손을 대어야 할까? 그것을 김목사님에게 물어 보았다.

"요사이 와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되는 것이 있습니다. 본질문제인데요. 타종교는 그 종교의 목표가 인간이 신이 되는 것입니다. 신은 되지 못하더라도 신의 경지에까지 가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독교는 신이 인간이 된 사건입니다. 즉 성육신(Incarnation)이 핵심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을 거꾸로 가르쳐 왔습니다. 즉 사람들을 신이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지요. 신비주의운동, 은사주의, 기도원운동 등은 이러한 잘못된 신앙형태들 중의 하나입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문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형상을 닮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신앙을 가르치니까 신자들부터 세상에 대한 제사장으로서의 책임이나 사명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6-8에 있는 대로 우리는 '종의 도'를 배워야 합니다. 성육신하시고 사람가운데 낮아지셔서 함께 해 주셨던 그분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이 관심을 가졌던 것에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그 동안 자유주의의 물결 때문에 구속사만 굉장히 강조했는데, 이제부터는 구속의 은총을 믿는 사람의 삶을 강조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강조되고 실천되면 우리의 문제는 곧 타개되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그의 말을 종합해 보자면 현재의 위기상황을 위기 상황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새로운 전환기라고 보는 것 같다. 즉 한국교회가 침체되는 면은 있지만 지금까지 신앙의 수직적면만 너무 강조한 나머지 야기된 문제라면 앞으로 신앙의 수평적인 면, 즉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다하면 얼마든지 재도약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평로교회 상황은 어떠할까? 재부임할때의 상황과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하여 질문을 해보았다.

"! 신평로교회는 재부임 전부터 소문을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임하면서 내가 과연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교회가 안고 있고, 또 앓고 있는 병이 없는 교회가 없을 테지요. 물론 전임목사님이 짧은 기간이지만 목회를 잘해주셨고 그분의 사랑과 정성이 구석구석에 배여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다른 교회에 비해 깨어있는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탁아방이나 노인대학등과 같은 프로그램은 21세기 교회가 가져야 할 특별한 프로그램입니다. 그래서 비젼과 가능성이 많이 있는 교회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교육이 없이는 21세기를 주도하는 교회가 되기 어렵겠다는 판단 하에 교육에 다시 주력하기 원합니다. 교육의 내용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생각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누는 교회가 된다고 할 때에도 먼저 주님의 뜻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뜻은 우리도 주님을 닮아 세상 사람들 속으로 낮아져서 그들을 구원시키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는 철저한 성육신의 삶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교회는 100년만에 기적 같은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성장에 대한 너무 큰 집착으로 말미암아 교회 본연의 임무를 잊어버린 것과 같다. 신데렐라의 잃어버린 유리구두처럼 우리는 오늘날 중요한 한가지를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신평로교회의 새로운 성장 방법은 무엇이었으며 또 앞으로는 어떤 방법론이 제시될 것인가? 그 점이 궁금하여 질문을 해 보았다.

 

동기부여가 중요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의 사역을 뒤돌아보면 제1차 적으로 필요한 것이 동기부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동기여부가 되면 이일에 적합한 사람들을 찾는 일 일 것입니다. 즉 소명으로 사람들을 헌신하도록 초청하는 것이지요. 어떤 일이든지 거기에 적합한 일꾼은 주님이 항상 준비하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교회가 한 사람의 불신자를 교회로 인도해서 한사람의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투자를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산을 들여 가지고 프로그램을 짜는 것인데, 그 동안 저희 교회에는 이러한 통일성을 가진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교회나 다 그렇겠지만 한해에 5-600명의 새신자가 등록하는데 계속적으로 신앙이 성장하고 교회에 정착하는 확률이 10%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저희들은 새 신자를 위한 양육, 교회정착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부터 착수했습니다. 현재 김백석목사가 새신자부를 맡고 있는데 이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새신자부터 양육, 교육을 습관화시키고 이어서 제자훈련의 단계로 넘어가 훈련받아 전도하고, 이웃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까 합니다. 두 번 째로 착수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예배의 갱신입니다. 교리에 얽매이고 전통에 얽매인 기존의 예배프로그램을 완전히 허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후 4부 예배 때에는 열린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새들백교회의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이냐고 물으시는데 그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의 성공은 분명한 의식을 가진 교회입니다. 올바른 의식에서 나온 프로그램이라야 진정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부흥의 전기를 맞은 신평로교회

 

신평로교회는 80년 김태우 목사가 부임한 후 931월 사임할 때까지 연평균 60%씩을 성장했던 교회이다. 그러다가 사임한 뒤 이규왕목사가 부임할 때 재적은 1,100명이 채되지 않았다. 지금은 서부경남에서 가장 큰 교세로서 재적 성도 2,500여명에 매주일 1,600여명이 출석하는 대형교회가 되었다. 특히 이규왕목사가 재직시 매주일 예배 시에 이 목사가 직접 컴퓨터와 OHP를 이용한 멀티미디어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말씀선포와 교육에 아주 큰 효과를 발휘했었다. 앞으로 김태우 목사는 이러한 단계를 어떻게 이어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태우 목사님의 생년월일은 1945228일이다. 가족으로는 아내(황정숙)2(승헌, 승진)이 있다. 여행과 등산을 좋아하며 정기간행물 4-5종과 일반도서 2-3권을 읽고 바쁠 때는 읽지 못할 때도 있다. 추천하고 싶은 책으로는 앤드루 머레이의 [겸손], 조지 마르스텐. 프랑크 로버츠의 [기독교와 역사이해] 그리고 안이숙의 [죽으면 죽으리라]이다. 원서로는 아브라함 카이퍼9Abraham Kuyper)Lectures on Calvinism와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Immortality를 추천하고 싶다.

 

목회동기와 영향받은 인물

 

본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모태신앙이었으나 특별한 은혜와 변함없는 신앙생활을 하였다. 공군 제대 후에 다시 총신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형수님(윤심순 권사)의 도움을 받아 시작하였으며 신학 공부하는 중에 사명을 깨닫고 변화 받아 목회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졸업 후 부산에 있는 수영로교회에서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의 훈련과정을 거치면서 정필도 목사님의 목회관이나 방법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 김성환 목사님에게서도 목회를 배웠다. 신학공부 할 때와 처음 목회 때에는 통독을 많이 했으나 요즘에는 통독보다는 주석과 사전 등을 참고하여 깊이 있게 연구하는 편이다. 성경통독의 정확한 횟수는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다.”

하루 시작은 420분경에 기상하여 새벽기도 인도와 개인기도로 시작되며 오전 930분에 교직원 회의로 모여경건회와 교회 전반에 걸친 점검과 분담과 지시를 한다. 하루 일과는 요일별로 일정이 다르다. 보통 화요일에는 구역장 훈련 프로그램이나 심방이 있고, 수요일에는 구역장 성경공부와 직장인들과 함께 드리는 정오예배, 그리고 오후에 구역임원들의 특별훈련시간, 저녁에는 수요일 저녁예배, 목요일은 주일주보에 싣는 설교 원고정리, 그리고 금요일 저녁에는 심야기도회를 인도하고, 개인기도를 새벽 1시 정도에 끝내고 토요일은 주일준비를 한다. 필자 자신이 생각해볼 때 기도와 말씀준비에 시간이 부족함을 느껴서 요즘에는 목요일 오후에 기도원에 들어가 금요일 오후 3시까지 말씀준비와 기도시간도 갖는다. 자기개발을 위해서 정기간행물이나 연구모임에 참석하여 도전받으며 교회행정은 행정담당 부목사에게 의존한다”.

 

자기개발을 위한 훈련의 중요성

 

자신이 가장 급하고 또 힘쓰는 분야는 영성이다. 영성은 곧 경건의 능력과 관계가 깊으며, 성경강해 시간에 말씀에 의한 변화는 영적 능력에 의해서 좌우된다. 결과적으로는 교회의 바람직한 변화와 성장도 목회자의 영성 곧 영적 능력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좀더 깊은 기도의 시간과 묵상의 기회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성경연구를 충분히 하길 원하지만 이와 병행한 설교준비의 부족을 늘 느끼고 있다.”

성격분석과 목회 적 적응상태에 대한 질문에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변화되기 이전과 이후의 성격에 차이가 있다. 근본적인 차이라기보다는 깨닫고 난 뒤에 변화가 나타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성격이 좀 급한 편이면서 완벽한 것을 추구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반면에 일이 벌어지면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므로 낙심하거나 크게 고민하지 않는 편이다. 목회를 처음 시작한 것이 부산 신평로교회인데, 부 목사로 있으면서 담임목사에게 배운 대로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목회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때문인지 목회를 힘들고 괴롭거나 어렵게 여기기보다는 감사하고 재미있고 기뻐하는 편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목회현장(부산 신평로교회)이 성장하고 문제없는 편안한 교회이며, 당회나 부교역자들까지도 잘 협력하고 조화를 이룬 것도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라고 겸손히 대답했다.

필자의 목회철학은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 뜻을 찾고 성경에 나타난 말씀으로 신앙이 개혁되는 것이며 세상 사람들이 찾고 원하는 참 교회가 되기를 원하면서 목회에 임하고 있다는 말로 인텨뷰를 마쳤다.

 

목회프로그램과 훈련과정

교회의 목회프로그램은 목회철학과 관계된다. 또한 어떠한 교회가 되느냐 하는 것은 담임목사가 어떤 설교를 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양육과 훈련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프로그램마다 모두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한다.

첫째, 기도훈련이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예배를 통하여 받은 말씀이 어떻게 삶에 적용이 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머리로만 아는 성도가 아니라, 지식을 뜨거운 열정으로 삶에 적용할 힘을 얻기 위해 강도높고 열정적인 기도 프로그램을 갖는다. 20일 작정 기도회는 신년초와 가을에 20일간 작정하여 새벽기도회를 한다. 매일하는 새벽기도회지만 새벽기도회에 잘 참석 못하는 교인들에게 단기간 작정하여 기도하게 함으로써 실생활에서 기도의 불씨를 살려간다. 특별심야기도회는 1년에 2차례 실시하며 기간은 약 2주간 걸쳐서 밤 930분부터 12시까지 기도회로 모인다. 매일 특별헌금을 드리고, 기도카드를 작성하여 교환기도를 드리며, 매일 다른 합심기도제목으로 기도드린다. 이는 깨어 있기 위한 몸부림이며 온 교인 깨우기 운동이다. 산성기도회는 구역임원들을 중심으로 기도원으로 가서 말씀과 찬양, 그리고 교회 일군들(구역장)의 영적 충전에 힘쓴다. 금요기도회는 교회의 핵심이 되는 기도 프로그램으로 한 주도 빠짐없이 연중 계속되며 전교역자는 밤늦도록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교역자 기도는 연초에 전교역자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산상기도회를 갖게 한다. 금식 또는 개인기도의 시간을 가짐으로 탈진하기 쉬운 교역자들에게 영적 재충전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둘째, 말씀훈련이다. 한 마디로 성경공부 프로그램이다. 단순한 성경지식 전달이나 공부보다는 성경을 통한 자기발견 곧 깨달음이 목적이다. 깨달으면 변화되기 때문이다. 구역장 성경공부는 구역예배시에 가르칠 공부를 담임목사와 함께 공부한다. 준비공부 성격보다는 구역장 자신을위한 성경공부다. 화요성경연구는 초신자나 성경을 더 배우기를 원하는 분들이 자원하여 참여하는 성경공부이다. 기관성경공부는 남.여전도회에서 기관별로 성경을 공부하는 그룹성경공부이다. 현재 제 1, 2, 3청년, 5남전도회, 7, 8여전도회 등이 주간 성경공부 시간을 가지고 있다. 주일 오후 성경연구는 잠시 중단된 상태이지만 주일 식사 후에 평신도를 위한 성경연구의 시간이다. 셋째, 동기성경학교다. 평신도양육을 목표로 1우러 중 2주에 걸쳐서 하루에 2시간씩 낮반과 저녁반으로 나누어서 공부하는데, .구약 성경개론, 요약조직신학, 교회사, 기독교교육, 교회음악, 주기도문, 사도신경 등의 특강이 있으며 3년만에 수료하게 되어있다. 넷째, 새가족반이다. 주일에 등록된 초신자 또는 새가족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처음 등록하면 새가족반에 편성되어서 7주간의 교육을 수료함으로 구역에 편성된다. 다섯째, 전도운동이다. 여섯째, 각종집회는 교인들의 영적 싸이클(Cycle)에 생명력과 생동감을 위하여 심령대부흥회, 청년집회, 교회부흥회, 전도회 부흥회 등을 연중 실시하여 영적인 충만을 꾀한다. 일곱째, 청년집회로 본교회는 청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힘쓰고 지원하고 있다여덟째, 전교인 수련회는 2년마다 전교인(어린이 포함)들이 참여하는 수련회를 갖고 공동체훈련, 영성훈련을 통한 일치운동 프로그림을 갖는다.

 

교회갱신

 

교회갱신협의회에서 함께 사역하고 있기도 한 김태우 목사님은 한국교회와 신평로교회의 갱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의 갱신분야는 먼저, 말씀을 듣고 깨달아 믿음에 이를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 삶의 목표와 사명감을 일깨워주어서 신앙=의 현장으로 이어지는 일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문화며 사회변화이다. 둘째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 교회성장은 거룩한 변화이며 거룩한 생명이다. 그러나 성장위주보다는 조화도니 교회의 아름다움을 위한 종합적인 교회성장운동, 곧 갱신이 있어야 시대를 이끌 교회가 될 수 있다. 셋째는 선교운동이다. 선교는 자랑도 아니고 서둘 일도 아니다. 교회의 본래 사명이며 기능이다. 연구하며 협력하는 역사성을 가진 선교의 갱신운동이 필요하다. 넷째, 목회자와 장로들의 갱신이다. 자신은 죽고 교회가 교회되게 해야 한다. 교회 되기 위한 협력과 동반자로 갱신되어야 한다. 다섯째, 지역교회(Local Church)로의 갱신이다. 교회는 어느 일정한 지역에 위치하여 그 지역사회를 떠날 수 없다. 교회의 이름도 지역성을 띠어야 옳다고 생각하며 그 시대적 사명과 배경에 교회는 동반자와 협력자로 책임지는 갱신이 필요하다.” 이상의 여러 비젼과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는 부산지역에서 다시한번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리라고 믿으며 부산을 떠나왔다.

 

14.도림교회

 

은혜, 충성, 사랑 의식으로

신앙의 대를 잇는 공동체

유의웅목사

 

아버지가 있는 교회

도림교회에 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신앙을 느낄 수 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권위가 실추되어간다는 요즘, ‘존경하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행복이 아닐까.

서울 영등포구 도림 2동에 위채한 도림교회 성도들과 그 지역 주민들은 그 행복을 누리고 있다. ‘노인 학교’, ‘소암 장학회’, ‘경로식당등 도림교회에서 주최하는 10여 개의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들은 서로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40여 년 동안 말이다.

오늘의 도림교회는 어제의 유병관 목사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는 도림교회 현 당회장인 유의웅 목사(57)의 아버지이다.

6·25 직후, 이념과 정치의 혼란, 경제적 빈곤의 상황 속에서 유병관 목사는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조직(64), 국내 처음으로 산업선교를 시작했다. 그전에 성경구락부(55) 등으로 지역 교육 사업을 해오고는 있었지만, 조직을 갖추지는 못했었다. 유병관 목사는 이후 도림유치원을 설립하여 지역에서 처음으로 취학 전 아동교육을 시작하였으며(65), 산업학원 단기교육을 실시하여 기술교육을 통한 직업을 갖게 하였고(68), 도림 새마을학교 상록교실의 문도 열었다(72). 74년 원로 목사로 추대된 유병관 목사는 당시 100만원을 장학기금으로 헌금하면서 28년의 담임목회를 정리했다. 이것이 오늘의 소암장학회의 기초이다.

유병관 목사의 뜻은 그의 셋째 아들 유의웅 목사를 통해 더욱 빛났다. 지역 사회봉사를 위한 목회의 대가 이어진 것이다. 지난 74년 제 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유의웅 목사(이하 유목사)는 지역사회개발교육원(이하 개발원)을 설립하여 지역 사회선교의 전통을 새롭게 발전시켜 나갔다.

개발원은 지난 81215일 설립된 이후 도림어린이집, 신용협동조합, 소암장학회, 노인학교, 한글학교, 시만교육, 지역신문, 공부방, 도서관, 경로식당, 경건절제 등 10여 개 부서로 활동하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개발원의 활동은 도림교회를 총회 주관 제1사회봉사상 교회 부문상’(69회 총회)을 수상하게 했으며, 각종 언론에 오르내리는 결과를 낳게 했다. 개발원은 도림교회를 대표할 만큼 활동의 폭을 넓혔다.

교회 부흥도 이 때 일었다. 무엇보다 사회 봉사를 통해 성도들의 신앙의 마음이 뜨겁게 일었다. ‘화목전도의 열매가 봉사를 통해 열리기 시작했다. 지역 사회 봉사는 분쟁이라는 단어를 도림교회에서 감추어 버렸다. 성전 건축 등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일어 날 수 있는 교회 분쟁의 모습이 사회 봉사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23명의 장로와 담임 목사와의 화목은 이 교회의 자랑거리다. 1천여 명의 성도가 10여년 만에 4천명 이상으로 늘어난 것은 뒤따라 오는 당연한 결과였다. 지역 주민을 생각하는 진정한 마음, 그것이 바로 복음이었다. 지역 사회 봉사는 아버지가 물려준 도림교회의 재산인 것이다.

동네 사람들!

 

도림교회는 항상 시끄럽다. 한글을 배우는 늑깍이 학생의 글읽는 소리, 노인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고 소리, 매일 무료 급식의 식사 소리, 교회 마당에서 농구 등으로 뛰노는 학생들 소리 등 조용할 틈이 없다. 그러나 이 시끄러움을 불평하는 지역 주민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시끄럽게 하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마치 도림교회의 지역사회개발교육원을 자신들의 생활의 한 터로 생각하는 듯하다. 개발원은 과연 어떤 곳인가. 대를 잇는 51년 부자(父子) 목회의 결정체라고 하는 그곳을 들여다보자.

지난 81215일 개원된 개발원의 활동 방향은 정관에 잘 나타나 있다.

본 지역사회개발교육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하여 지역 사회 주민에 대한 교육봉사 및 복지사업을 실시하고, 이로써 주민생활을 향상시키고 복음을 더욱 전파하여 지역주민과 교회가 함께 살아가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개발원은 아버지때부터 해오던 유아원, 장학회, 경로잔치, 지역봉사위로회 등을 지역성에 맞게 3단계로 개편, 확장한 것이다.

기초단계인 1단계(81. 2.84. 12.) 기간에는 청소년 학교라는 야학과, 주부교실, 장수학교 등의 사업을 세웠다. 이것은 8215일부터 9일까지 실시한 지역사회 주민 실태조사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이다.

확립단계인 2단계(85.1.89.12.) 기간에는 1단계의 부족한 부분을 보안, 발전시키는데 주력했다. 장수학교를 노인학교로, 주부교실을 시민대학으로 명칭을 변경, 전문성을 강화했다. 유아원의 경우도 서울시 시범 운영으로 영아반을 신설하여 맞벌이 가정 자녀들을 종일 보육할 수 있어서 지역성에 더 접근한 유아원 운영의 전기를 맞이했다. 소암장학회의 범위가 지역 대학생에게까지 확대한 것도 이때다. 푸름도서관, 지역신문 창간, 한글학교, 사랑의 바자회의 활동도 이 기간에 시작됐다.

확장단계인 3단계(90.1.현재)는 개발원 본 목적에 수행할 능력이 극대화되고 한 지역교회로서의 지역사회를 위한 선교작업이 어느 정도 틀을 이루게 된 시기다. 개발원의 사업도 10여 개로 확장, 현재 운영되고 있다.

도림어린이집은 맞벌이 부부, 영세 가정이 많은 지역 특성상 절실한 것이었다. 취학전 아동을 대상으로 부모가 작장에서 퇴근 후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보호해주고 있다. 현재 90여 명의 아동이 있다. 신용협동조합은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주민들을 도와주는 비영리 민간 협동조합이다. 대출은 물론, 공동 주택사업, 지역문화사업, 공동 구입판매, 농수산물 직거래, 우리 농수산물 먹기 운동 들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소암장학회는 지난해 말로 기금이 4억원이 넘었다. 이것으로 교회 내외 대학생 40여 명에게 매 학기 장학금이 지급되고 있다.

노인학교는 개발원 사업중 가장 신경쓰고 있는 부분이다. 흔히 빈곤, 질병, 고독, 무료함 등에 시달린다는 노인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이다. 지역 노인들에게 제 3의 인생을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데 큰 목적을 두고 있다. 경로 식당에서 매일 60여 명의 노인에게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 <모랫말이야기>라는 이름의 지역신문은 생활정보 제공 및 상담 등의 역할로 지역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매월 5천부를 발행하고 있다. 이때 문제가 발생했다. 한글을 모르는 주민이 상당히 있다는 사실이다. 글을 모르니 신문의 효과가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한글학교이다. 도림동과 인근 지역 비문해자들을 위해 한글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현재 매녀 150명이 등록하고 있다.

시민교육은 지역주민과 교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교육세미나 사업이다. 도림도서관에서는 11천여권의 장서를 구비하여 주민들에게 무료로 대출해주고 있다. 1일 평균 56권이 대출되고 있다. 방과후 혼자 남는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 도림공부방이다. 아이들의 생활교육이나 숙제 지도 등 가정의 역할을 대신 감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70여 명의 학생들이 이곳을 이용하고 있다. 경건절제운동은 신앙갱신, 선교운동, 복음의 윤리적 실천 등을 목적으로 바르게 살기 운동, 아껴쓰기 운동, 3대 안하기 운동(과소비 안 하기, 쓰레기 안 버리기, 외국 농산물 및 유해음식 안 먹기) 등을 주된 사업으로 하고 있다. 매년 2차례의 알뜰시장과 유기농산물 직거래시장 등을 통해 경건절제 사업을 실천하고 있으며, 수익금이 발생할 경우 전액 구제비로 사용하고 있다.

개발원 사역 17. 몇가지 보안점도 발견됐다. 지속적인 프로그램 개발, 과감한 예산 투자, 시설 확충 등이 당면 과제이다. 이를 위해 사회선교 지도자 양성, 교회 예산 20% 책정 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시설 확충을 위해서는 사회봉사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해놓은 상태다.

 

미래로

 

개발원은 5년마다 지역실태 조사를 해오고 있다. 주민의식과 생활상황을 파악, 효과적인 사역을 하기 위해서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도림교회 성도들의 노력은 끊임없다. 그것이 곧 교회와 자신의 발전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림교회는 이러한 성도들의 손길을 바탕으로 지역 봉사의 사업을 확대할 소망을 갖고 있다. 한국교회 발전과 민족 복음화에도 일익을 감당하고픈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사회봉사를 통한 독특한 선교의 결과를 결코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창립 71주년을 맞는 도림교회는 유의웅 목사를 중심으로 4천여 명의 성도가 화목으로 뭉쳐 미래로 향하고 있다.

 

당회 목회에 성공해야 교회 목회에 성공합니다

 

유의웅 목사의 첫인상은 시골 아저씨였다. ‘아버지에게 물려 받았는지 조금 작아 보이는 양복에 쇼파에 처음 앉아 보이는 듯한 그의 자세는 한마디로 촌스러웠다. 그러나 그와의 대화 속에서 강인하고 세련된 목회 철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은혜의식을 강조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교훈을 성도들에게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죠. 이러한 은혜의식이 충만할 때 자연히 나오는 것이 충성의식입니다. 은혜의 감격이지요. 세번째 사랑의식을 외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말입니다.”

유목사는 대를 잇는 목회를 명예로 생각하고 있다. 선친의 훌륭한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창조적 사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아버지진실한 사람이었다. 또한 유목사는 어머니지혜의 여인으로 표현했다. 그는 진실과 지혜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지역 사회를 위해 쏟은 것이다.

지역 사회를 섬기는 것도 하나의 은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은사 많은 모양입니다.”

유목사는 도림교회를 장수 목회’ ‘화목한 교회’ ‘섬기는 교회로 특징지었다.

특히, 당회원의 화목은 교회의 우리 교회의 자랑입니다. 당회 목회에 성공해야, 교회 목회에 성공한다는 자세로 저는 목회에 임하고 있습니다. ”

귀공자풍의 외모에 서민적 이미지를 풍기는 목회자.얼핏 들으면 어눌한 것 같지만 익살과 재치에 핵심을 놓치지 않고 대중을 사로잡는 언변의 달변가. 온건한 개혁주의자. 서울 도림교회 유의웅목사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강단에서, 각종 세미나에서 23년간의 목회과정을 통해 그는 이러한 트레이드 마크를 자연스럽게 형성했다. 그러나 유목사의 진짜 트레이드마크는 순수 사랑 열정으로 표현된다. 유목사가 순수하다는 것은 그의 인성이 착하고 부지런하며 효심이 지극한데다가 목회가 순수하기 때문이다.사랑은 도림교회의 특징인 사회선교로 나타나고 열정은 어느 자리에서 든 최선을 다하는 전도와 선교의 열의를 보이는 성품을 묘사한 것이다.

유목사는 1942년 고 유병관목사와 안창옥권사(81) 사이의 7남매 가운데 셋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도림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신앙을 물려받은 그는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을 교회에서 배웠다. 그것은 바로 이웃에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임없이 베푸는 것이었다.

어릴때 어머님이 목회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권면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목회의 길을 택했지요. 그때 부터 하나님이 많은 것들을 나를 위해 예비했습니다

유목사는 배재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응원단장을 하며 리더십을 키웠고 장신대(61)에 재학중일 때는 홀리 보이스라는 서클을 조직, 정기연주회도 가졌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도서관 옆에 있던 대형 배지를 강나루 한강변에서 직접 실어 나른 모래로 만들기도 했다.그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도와 영성훈련을 쌓았다고 고백했다.

69년 영은교회 전도사로 박조준목사 밑에서 목회수업을 쌓은 그는 공군군목을 마치고 74년 아버지 고 유병관목사의 뒤를 이어 도림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부자세습에 강한 반대를 보이고 있던 교계 풍토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유목사의 커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장로 권사들이 그의 담임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23년동안 1천명의 교인을 5천여명으로 키웠으며 25백평의 넓은 대지위에 730평의 아름다운 교회와 560평의 교육관을 갖추고 지역사회에복음을 전하고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올해로 창립 74주년을 맞은 도림교회는 사회봉사선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교회로 꼽힌다. 도림교회가 운영하는 사회선교분야는 어린이 집, 신용협동조합, 경로식당, 한글학교,노인학교, 소암장학회, 도서관, 주부대학, 공부방 등을 들수 있다.도림교회의 사회봉사선교현장을 보기 위해 매주 전국에서 목회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15.성덕중앙교회

세대를 허무는 예배로 성장하는

김준수 목사

(총신대학 신학 대학원)

 

 

예배형태의 갱신은 가장 신나는 싸움이다.

나는 아직도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 아직도 '예배 형식'의 갱신에 대해 '신앙적'인 열심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식'은 말 그대로 '형식'일 뿐이다. 어떤 '본질'이나 '내용''형식'의 목에 잡아맬 때, '의식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이때의 '의식'들은 '내용'이나 '본질'들을 압도하고 변질시킨다.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그런 '의식주의자'들로 부터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태어났다. "개혁은 계속 개혁되야 한다"란 우리의 구호는 분명 그런 '형식'의 지속적인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혁교회는 '형식'의 계속적인 갱신을 통해서 자꾸만 가려지려는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고 또 그것을 확장, 강화시켜 나간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교회 예배는 시간에 따라, 공간에 따라 그렇게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의 모든 문화를 주권적으로 평가하고, 수용하거나 버리거나 갱신해 나간다. 특별히 교회는 계속적인 예배갱신을 통해 세상 문화를 평가하고 영향을 주고 개량하면서 정복해 나간다. 이것은 교회가 해야 하고 또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신나는'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배갱신은 '편견의 장애물' 때문에 방해를 받고 있다.

 

성경은 라틴어로만 쓰여져야 한다?

로마카톨릭이 한 때 신앙처럼 고집했던 것이다. 성경은 오직 라틴어로만 쓰여져야 했다. 그들에게는 라틴어만이 거룩했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라틴어 성경을 자기네 나라 언어로 번역하려다가 잡혀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들의 죄목은 '불경죄'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종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자기 평생을 바치려는 선교사들이 구름떼처럼 일어나고 있다. 라틴어외의 언어(형식)로 성경(본질)을 번역하면 성경 파괴인가? 이젠 더 이상 아무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조차 않는다. 이미 성경언어의 '형식' 파괴(?)는 상식이 되어 버렸다. 현재 우리가 옛날에 번역된 한글개역 성경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 번역만 거룩해서가 아니다. 아직 새롭게 번역할 여건과 실력이 안되기 때문이다. '현대화'된 번역이 나올 것으로 기대되지만, 때늦은 감이 많다. 시대에 뒤 떨어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 때문에 진리에서 멀어지고 돌아서버린 새 세대의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찬송가에 없는 노래는 부를 수 없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보수적인 교회들 안에서 쉽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이다. 예배 중에는 절대 '복음성가'를 부를 수 없었다. '복음성가'는 거룩한 예배에 어울리지 않는 '불경건한 찬송'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졸지에 '복음'까지 불경건해진 것이다. 조금 더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찬송가 중에서도 앞부분에 있는 예배용 '찬양곡'들만 부른다. 그리고 그보다 더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아예 찬송가를 버리고 시편만을 새로 작곡해서 부른다. 하나님을 더 아름답게 섬기려는 것은 아주 잘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들이 선택한 '표현방식'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아주 잘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본질화'하고 '교리화'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면 불필요한 분쟁만 낳을 뿐이다. 어떤 교회가 어떤 형식의 곡으로 된 노래를 부를 것이냐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서 있는 시대와 지역과 삶의 정황 속에서 선택하고 결정할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고 또 지금까지 그래 왔다. 따라서 그런 결정은 또한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 음악가로서도 하나님은 얼마나 탁월하시고 풍성하신가! 그러나 인간의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음악은 제한 받으신다. '찬송'의 대상과 내용 등은 바꿀 것이 없다. 그러나 예배의 '찬송가'는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부르는 사람들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찬송'은 불변하나 '찬송가'는 늘 변한다. 이렇게 교회는 예배용 찬송가를 통해 세상 음악을 평가하고 승화시키고 선도한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현대화는 세속화이다?

예배의 형태를 현대화한다는 것은 곧 세속화를 의미하는가? 나는 현대화와 세속화를 이렇게 구별하고 싶다. 즉 현대화는 교회가 주권적으로 세상의 문화를 정복하는 것이고, 세속화는 교회가 피동적으로 세상의 문화에 정복당하는 것이다. 현대화는 교회의 본질적인 것들이 세상 문화로 옷입는 것이고, 세속화는 세상의 본질적인 것들이 교회의 문화로 옷입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현대화에 성공한다는 말은 세상 문화를 충분히 평가하고 심판하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드는 일에 성공한다는 말도 된다. 이러한 교회의 현대화를 말씀의 성육화에 비유해 설명할 수 있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그 말씀은 '육신'(지금, 여기의 문화)을 입을 때 비로소 '복음'이 된다. 그리고 '복음'이 되어야 사람들이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다. 교회의 현대화는 그 말씀이 '지금', '여기'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들려지는 '복음'이 되기 위해 '성육화'(문화화)하는 한 과정이다. 모든 '표현방식'은 그렇게 '시대성''공간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현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현대화하지 않으면 교회는 세속화된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도 당대의 문화를 평가, 검증하고, 그 방향을 지시해주는 최종,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땅위에 임한 천국 군대로서 세상 문화를 그렇게 정복한다.

 

예배의 갱신은 예배의 파괴이다?

 

예배는 한번 '복음화'하느라고 진통을 겪은 적이 있다. 신약교회가 율법의 성전제사에서 다락방 예배로 거듭날 때이다. 그 때 당시 사회와 교계에 이것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아마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율법 파괴, 성전 파괴, 제사(예배)파괴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예배가 복음화되는 충격이었다. 그로부터 1500여년 뒤 다시 한번 '복음화'를 위한 진통을 겪는다. 교회가 로마카톨릭의 의식주의화된 예배에서 믿음의 예배로 돌이킬 때였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오직 믿음으로!" 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와, 예식의 공로를 내세우던 로마교회의 심장을 말씀의 검으로 찔러 버렸다. 당시 개혁자들의 갱신 행위들이 로마교회에서 볼 때는 분명 파괴행위에 불과했다. 그렇다! 항상 '복음화''파괴 행위'이다. 그러나 예배의 갱신은 예배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대한 비복음적이고 비신앙적인 사상과 예식 행위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뒤로 교회의 예배는 거듭 거듭 '복음화'해 왔다. 복음이 전파되는 지역에 따라, 또 교회가 세워지는 시대에 따라 교회 예배는 계속 옷을 갈아 입었다. 그것은 철을 따라 자연이 옷을 갈아 입듯, 시대에 따라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듯 매우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만약 그런 '형식들'에 우리의 믿음을 실으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경건한 죄이다. 초대교회의 예배갱신이 그리스도의 재발견으로 인한 것이고, 중세 개혁교회의 예배갱신이 성경의 재발견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면, 현대 교회의 예배갱신은 삶의 정황들을 새롭게 인식하는데서 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예배갱신은 본질과의 싸움이 아니라, 본질을 더 강화 시키고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형식들과 벌이는 싸움이다.

 

전통적 예배가 성경적이고 현대화된 예배는 유행적이다?

 

'전통적'이란 말 자체가 곧 '문화적'이란 말이다. 예배 형식을 전통적으로 고수하겠다는 말은 옛 문화옷을 그대로 입겠다는 뜻이고, 예배 형식을 현대화하겠다는 말은 새 문화로 갈아 입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배를 현대화하려 할 때 '유행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지만, 전통주의라는 것도 역시 큰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하나의 유행적이다. 역사 속에서의 보수와 개혁은 두고두고 갈등하는 존재다.그러나 전통이 되지 않으려는 유행이 없고, 변하지 않으려는 전통은 없다. 사실은 전통이든 유행이든 그 변화에 있어서 '속도''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사이에는 경계선이 없다. 옛 문화와 새 문화의 경계선은 멀리서 보면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사라져 버린다. 엄밀히 말한다면 전통적이란 것은 현대화되어 가는 속도가 '유행적'인 것 보다 조금 늦은 것이고, 유행적이란 말은 그 속도가 '전통적'인 것보다 조금 빠르다는 것일 뿐이다. 그 둘의 차이는 시간과 정도의 차이다. 그러므로 같은 개혁 교회들 안에서의 다양한 예배 형태의 차이는 신학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와 시간의 차이다. 그런 갈등과 혼란들은 자유에서 오는 것이기에 교회를 쇠퇴 시키지 않고 오히려 신선하게 하고 강화시키고 성장시킨다. 그러므로 예배의 갱신을 두려워하거나 소극적으로 대하기 보다는 적극적 긍정적 자세로 그 작업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시작한 것은 교회안에 들어오면 안된다?

 

민감하지만 너무나 상식적인 문제이다. 만약 교회 안에서 이교도나 불신자들이 먼저 사용한 문화(언어, , 예식, 습관등)들을 다 골라내 버려야 한다면 어쩌면 건물도 안남을지 모른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약속을 담기 위해 취하고 있는 '언약형태'도 고대 근동지역 여러 나라들이 사용하던 '계약방식'이 아니던가? 또 그것은 당시대 사람들의 '종교예식'이기도 했다. 할례도 그렇고, 제사들도 그렇다. 구약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들이 사실은 대부분 이방인 중에 이미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문화들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것들에 새 이름을 주시고 새 의미를 부여하시고, 그리고 새 형태로 갱신해 주신다. 하나님의 그일은 세상 역사 속에서 교회를 통해 계속 시행되고 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의 어느 것이든 주권적으로 평가 혹, 취하기도 하시며 버리기도 하신다. 무엇이든 하나님 손안에 잡히면 새 것이 되며 특별한 것이 된다. 십자가는 저주의 사형 ''에 불과했지만, 보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 안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신 최고의 예배 ''이 되었다. 교회가 예배의 ''을 갱신한다는 것은 세상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교회의 사명이라는 맥락속에서 이해되고 또 진행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신앙의 본질을 사람들에게 표현하기위해 세상의 모든 문화를 평가하고, 취하거나, 버리거나, 새로 바꿀 수 있는 권세와 의무를 갖는다.

 

예배는 오직 드리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는 것일까? 물론 '드리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예배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예배의 의미를 좁게 이해한 것이 아닐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도 하고, 예배자끼리 서로 나누기도 하고,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증거하기도 한다. 쉽게 성찬식은 모든 예배 예식의 정점이다. 그런데 성찬식은 드리는 것과 받는 것, 그리고 서로 나누고 증거 하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성찬예식의 중요한 목적은 네가지이다.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감사 기념하고, 그 회복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된 은사들을 서로 나누고, 그리고 증거하는 것이다. 예배는 찬미의 기능과, 연합과 교제, 그리고 세상 문화와 영혼들에 대한 복음선포라는 '선교적 기능'을 갖는다. 실제로 많은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의 예배를 '보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 '와 보라'고 외쳐야 한다면 교회에서 저들에게 보여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영광스런 예배인 것이다. 그러기에 불신자들을 하나님의 예배에 초청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예배에 처음 참석한 불신자도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다. 누가 감히 '당신은 예배자가 될 수 없어!'라고 하면서 저들을 가로 막아 서고 되돌려 보낼 수 있는가?

 

성덕중앙교회는 매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즐긴다.

 

본인이 섬기고 있는 성덕중앙교회에서 매주일 밤마다 3년째 드리고 있는 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간단히 소개한다.

첫째, 온 가족이 드리는 '세대통합'예배이다. 예배를 통해 세대차이가 극복된다. 예배의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앉아서 함께 춤을 추며 노래부르고 함께 설교 듣고 함께 기도 드린다.

둘째, 찬양의 강물에 순서들을 꽃잎처럼 띄운다. 경쾌하고 쉬운 곡조의 찬양들을 주로 부른다. 윈도우즈라는 중창단이 전체 노래를 진행하고, 매주일 돌아가면서 부서별 성가대가 특별 찬양들을 주로 부른다. 한달에 한번씩은 미리암, 마스길등 성인 남녀 중창단이 특송을 부른다. 드럼, 키보드, 피아노, 호른, 클라리넷 서폰, 나팔, 기타등 가능한 많은 악기가 동원된다. 그리고 율동으로 찬양한다. 할아버지부터 유치부 아이까지 온 몸으로 찬양한다. 강대상을 치워 무대로 준비된 강단에는 담임목사와 율동 팀이 선다. 그 아래 강단에는 윈도우즈 노래 팀이 선다.

셋째 단막극을 무대에 올린다. 매주 새로운 주제로 10여분짜리의 단막극을 한다. 생활 주변에서 부딪치는 갈등들을 다룬다. 단막극을 보면서 온 회중의 마음이 강단 위로 다 올라오고, 활짝 열린다. 재미가 있고 공감대가 있다. 삽시간에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회중석에서 박수와 함성과 웃음과 응원 등이 터져 나온다. 단막극은 어른부터 아이까지 모두가 부서별로 돌아가면서 한다. 자기 차례가 돌아올 때 누구 하나 마다하질 않는다.

넷째, 현실의 문제를 치료하는 복음을 설교한다. 단막극이 끝나자 마자 설교가 시작된다. 주제는 단막극이 다룬 것과 똑같다. 단막극을 통해 잘 갈린 밭고랑에 이제 씨만 뿌리면 된다. 그러나 이 설교는 쉬워야 하고, 또 짧은 시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15). 일단 말씀이 선포되면 그 이전의 모든 순서(단막극 등)들을 깨끗이 잊을 정도로, 순식간에 회중을 설교에 몰입시켜야 한다. 설교에 실패하고 예배에 성공할 수 없다.

다섯째, 뜨거운 통성기도가 있다. 아이들이 자기 부모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들으며 함께 기도한다.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기도 드린다. 나라를 위한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 가정과 학업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온 가족이 함께 기도 드리는 것이다. 현실의 여러 문제를 직접 하나님께 내놓은 연습을 부모자녀가 함께 하는 것이다.

여섯째, 수십 명이 예배를 준비한다. 성가대나 안내위원등 일반적인 봉사자들을 빼고도 최소한 50여명이 열심히 뛰어야 예배가 준비되고 진행된다. 그만큼 온 교우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예배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만큼 열의가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다. 그 중 대부분은 우리 자녀들이다. 열심히 예배 준비하는 저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심정을 상상해 보라!

일곱째, 철저히 준비한다. 예배의 진행은 대단히 자연스럽고 부드러워 보인다. 모든 순서가 거의 자동으로 진행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방송 콘티를 짜듯 예배 진행표를 계획하고 연습해서 진행한다. 전체 진행 시간은 70분 정도이다. 다양한 순서이지만 진행속도는 무척 빠른 편이다.

매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끝내고 나면 잔치를 치른 기분이다. 마음에 예배의 감흥이 강물처럼 남아 출렁거린다. 온 가족이 매주일에 한번씩 이런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큰 행복이 아닌가?

요즘 '열린 예배'란 말을 많이 한다. 열린 예배가 되려면 우선 하나님을 향해 열려야 하고, 예배자(세대간에)끼리 서로를 향해 열려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세상 불신자들을 향해서도 열려야 한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도 세상 문화와 영혼들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창조명령(문화명령)을 수행해 나간다. 예배 형식의 갱신은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흑백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와 시간의 문제이다.

16.광명교회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는 교회

함기룡 목사

(그리스도의 신학대학, 신학 대학원)

 

오직 말씀으로

개척 10, 복음을 전하기가 수도권 중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광명시 본 동에서 인근교회의 부러움을 사며 매일매일 새롭게 성장하는 교회가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광명교회, 담임목사 함기룡, 아직 매스컴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씀을 들어본 사람들은 그를 "말씀에 사로 잡힌 목사"로 기억한다.

광명시청을 못가서 광명 1동 후미진 골목 안쪽에 위치한 광명교회는 개척후 2년만에 지어져 연건평 400평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겉모습과는 달리 사치스럽지도 않고 그저 소박한 예배당에서는 매주일마다 3부예배가 드려져 일주일내내 천여명의 성도가 몰려와 은혜받고 새로워져서 돌아간다.

광명교회 함목사의 목회사역은 한마디로 말해 살아있는 운동력을 믿고 그 말씀을 높이며 자랑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광명교회에는 보통교회들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프로그램이 없다. 전도운동도, 총동원 주일같은 것도 없다. 오직 성경읽기와 성경공부 그리고 예배와 찬양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100%이상의 성장을 해온 것이다. 인근의 교회들이 힘들어서 들어서고 나가고 하는 가운데서도 광명교회는 소문없이 성장해온 것이다.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는 함목사를 붙들고 기자는 몇가지만 대답해 달라고 부탁했다.

 

신앙의 배경

 

먼저 함목사 자신의 신앙배경부터 물어 보았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믿음이 싹텄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도 어렸을 때부터 성경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도와야겠다고 느끼게 된 것은 '상주심에 대한 믿음'이 생길때부터였습니다. 즉 주님을 믿는 신앙에서 더 성숙하여 내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섬김의 믿음은 목회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에는 은사가 나타나서 기도해주고 심방해서 위로해주는 정도였지 내가 받은 은사로 사람을 섬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지요. 그러다가 목회를 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 분이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나를 섬겨 주신 것처럼 나도 사람을 섬겨야 겠구나 생각하게 된 것이 제 믿음이 자라게 된 결정적인 계기인 것입니다"

인터뷰에 앞서 참석해 들어본 목회자를 위한 성경공부 모임(매주 목요일 5시부터 광명교회에서 모이고 있다)에서 함목사는 유달리 "십자가의 도"를 강조했다. "십자가의 도"란 한마디로 주님의 고난당하시고 죽으심 즉 섬김의 도를 믿고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부활과 영생과 섬김과 고난을 강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축복을 강조하고 은사와 신유를 강조하면 사람들이 모이지만 "십자가의 도"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일"에는 모두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다. 비단 오늘의 신자들만 그러한가? 아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들도 십자가의 도를 배우기 전에 모두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함목사는 주님을 믿는 진정한 맛은 섬기면서 내짐을 질 뿐 아니라 남의 짐까지 져주는 말씀을 실천을 할 때에 느낄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필자는 아직 불혹의 나이에도 이르지 않는 함목사에게 신학을 하게 된 동기를 물어 보았다. 그가 굳이 신학의 길을 택하고 목사 안수를 받게 되기까지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부터 신학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새벽기도는 빠지지 않고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그중에 곁에서 목회하시는 분들을 보게 되니까 목사님의 사역중에 비성경적인 것 같은 부분도 많아 보이고, 또 목회를 너무 어렵게 하시는 것도 같고, 교회마다 문제 없는 곳도 없고, 그 뿐 아니라 장로님들의 알력은 어떻게 그렇게 많을까요? 그래서 제 어린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믿되 목회는 절대 안해야 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3때 진로를 결정하려는데 하나님의 소명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한다는 마음보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부정적인 생각들 때문에 하지 말아야 겠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그 음성을 거부했지요. 그래서 그런지 그 후에 복막염을 앓게 되었습니다. 3년정도 복막염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3학년은 두 번을 다녔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하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아버렸지요. 그런 후에야 '!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징계였구나'하고 생각게 된 것이지요. 그후 하나님이 저를 구체적으로 인도하셔서 졸업때까지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틈나는대로 주신 은사를 따라 전도하고, 심방하고 또 환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나음을 입었고 그 일로 인해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신학교 졸업반때 였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다져진 영성첫째, 기도훈련이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예배를 통하여 받은 말씀이 어떻게 삶에 적용이 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머리로만 아는 성도가 아니라, 지식을 뜨거운 열정으로 삶에 적용할 힘을 얻기 위해 강도높고 열정적인 기도 프로그램을 갖는다. 20일 작정 기도회는 신년초와 가을에 20일간 작정하여 새벽기도회를 한다. 매일하는 새벽기도회지만 새벽기도회에 잘 참석 못하는 교인들에게 단기간 작정하여 기도하게 함으로써 실생활에서 기도의 불씨를 살려간다. 특별심야기도회는 1년에 2차례 실시하며 기간은 약 2주간 걸쳐서 밤 930분부터 12시까지 기도회로 모인다. 매일 특별헌금을 드리고, 기도카드를 작성하여 교환기도를 드리며, 매일 다른 합심기도제목으로 기도드린다. 이는 깨어 있기 위한 몸부림이며 온 교인 깨우기 운동이다. 산성기도회는 구역임원들을 중심으로 기도원으로 가서 말씀과 찬양, 그리고 교회 일군들(구역장)의 영적 충전에 힘쓴다. 금요기도회는 교회의 핵심이 되는 기도 프로그램으로 한 주도 빠짐없이 연중 계속되며 전교역자는 밤늦도록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교역자 기도는 연초에 전교역자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산상기도회를 갖게 한다. 금식 또는 개인기도의 시간을 가짐으로 탈진하기 쉬운 교역자들에게 영적 재충전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둘째, 말씀훈련이다. 한 마디로 성경공부 프로그램이다. 단순한 성경지식 전달이나 공부보다는 성경을 통한 자기발견 곧 깨달음이 목적이다. 깨달으면 변화되기 때문이다. 구역장 성경공부는 구역예배시에 가르칠 공부를 담임목사와 함께 공부한다. 준비공부 성격보다는 구역장 자신을위한 성경공부다. 화요성경연구는 초신자나 성경을 더 배우기를 원하는 분들이 자원하여 참여하는 성경공부이다. 기관성경공부는 남.여전도회에서 기관별로 성경을 공부하는 그룹성경공부이다. 현재 제 1, 2, 3청년, 5남전도회, 7, 8여전도회 등이 주간 성경공부 시간을 가지고 있다. 주일 오후 성경연구는 잠시 중단된 상태이지만 주일 식사 후에 평신도를 위한 성경연구의 시간이다. 셋째, 동기성경학교다. 평신도양육을 목표로 1우러 중 2주에 걸쳐서 하루에 2시간씩 낮반과 저녁반으로 나누어서 공부하는데, .구약 성경개론, 요약조직신학, 교회사, 기독교교육, 교회음악, 주기도문, 사도신경 등의 특강이 있으며 3년만에 수료하게 되어있다. 넷째, 새가족반이다. 주일에 등록된 초신자 또는 새가족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처음 등록하면 새가족반에 편성되어서 7주간의 교육을 수료함으로 구역에 편성된다. 다섯째, 전도운동이다. 여섯째, 각종집회는 교인들의 영적 싸이클(Cycle)에 생명력과 생동감을 위하여 심령대부흥회, 청년집회, 교회부흥회, 전도회 부흥회 등을 연중 실시하여 영적인 충만을 꾀한다. 일곱째, 청년집회로 본교회는 청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힘쓰고 지원하고 있다여덟째, 전교인 수련회는 2년마다 전교인(어린이 포함)들이 참여하는 수련회를 갖고 공동체훈련, 영성훈련을 통한 일치운동 프로그림을 갖는다.

 

교회갱신

 

교회갱신협의회에서 함께 사역하고 있기도 한 김태우 목사님은 한국교회와 신평로교회의 갱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의 갱신분야는 먼저, 말씀을 듣고 깨달아 믿음에 이를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 삶의 목표와 사명감을 일깨워주어서 신앙=의 현장으로 이어지는 일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문화며 사회변화이다. 둘째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 교회성장은 거룩한 변화이며 거룩한 생명이다. 그러나 성장위주보다는 조화도니 교회의 아름다움을 위한 종합적인 교회성장운동, 곧 갱신이 있어야 시대를 이끌 교회가 될 수 있다. 셋째는 선교운동이다. 선교는 자랑도 아니고 서둘 일도 아니다. 교회의 본래 사명이며 기능이다. 연구하며 협력하는 역사성을 가진 선교의 갱신운동이 필요하다. 넷째, 목회자와 장로들의 갱신이다. 자신은 죽고 교회가 교회되게 해야 한다. 교회 되기 위한 협력과 동반자로 갱신되어야 한다. 다섯째, 지역교회(Local Church)로의 갱신이다. 교회는 어느 일정한 지역에 위치하여 그 지역사회를 떠날 수 없다. 교회의 이름도 지역성을 띠어야 옳다고 생각하며 그 시대적 사명과 배경에 교회는 동반자와 협력자로 책임지는 갱신이 필요하다.” 이상의 여러 비젼과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는 부산지역에서 다시한번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리라고 믿으며 부산을 떠나왔다.

 

14.도림교회

 

은혜, 충성, 사랑 의식으로

신앙의 대를 잇는 공동체

유의웅목사

 

아버지가 있는 교회

도림교회에 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신앙을 느낄 수 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권위가 실추되어간다는 요즘, ‘존경하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행복이 아닐까.

서울 영등포구 도림 2동에 위채한 도림교회 성도들과 그 지역 주민들은 그 행복을 누리고 있다. ‘노인 학교’, ‘소암 장학회’, ‘경로식당등 도림교회에서 주최하는 10여 개의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들은 서로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40여 년 동안 말이다.

오늘의 도림교회는 어제의 유병관 목사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는 도림교회 현 당회장인 유의웅 목사(57)의 아버지이다.

6·25 직후, 이념과 정치의 혼란, 경제적 빈곤의 상황 속에서 유병관 목사는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조직(64), 국내 처음으로 산업선교를 시작했다. 그전에 성경구락부(55) 등으로 지역 교육 사업을 해오고는 있었지만, 조직을 갖추지는 못했었다. 유병관 목사는 이후 도림유치원을 설립하여 지역에서 처음으로 취학 전 아동교육을 시작하였으며(65), 산업학원 단기교육을 실시하여 기술교육을 통한 직업을 갖게 하였고(68), 도림 새마을학교 상록교실의 문도 열었다(72). 74년 원로 목사로 추대된 유병관 목사는 당시 100만원을 장학기금으로 헌금하면서 28년의 담임목회를 정리했다. 이것이 오늘의 소암장학회의 기초이다.

유병관 목사의 뜻은 그의 셋째 아들 유의웅 목사를 통해 더욱 빛났다. 지역 사회봉사를 위한 목회의 대가 이어진 것이다. 지난 74년 제 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유의웅 목사(이하 유목사)는 지역사회개발교육원(이하 개발원)을 설립하여 지역 사회선교의 전통을 새롭게 발전시켜 나갔다.

개발원은 지난 81215일 설립된 이후 도림어린이집, 신용협동조합, 소암장학회, 노인학교, 한글학교, 시만교육, 지역신문, 공부방, 도서관, 경로식당, 경건절제 등 10여 개 부서로 활동하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개발원의 활동은 도림교회를 총회 주관 제1사회봉사상 교회 부문상’(69회 총회)을 수상하게 했으며, 각종 언론에 오르내리는 결과를 낳게 했다. 개발원은 도림교회를 대표할 만큼 활동의 폭을 넓혔다.

교회 부흥도 이 때 일었다. 무엇보다 사회 봉사를 통해 성도들의 신앙의 마음이 뜨겁게 일었다. ‘화목전도의 열매가 봉사를 통해 열리기 시작했다. 지역 사회 봉사는 분쟁이라는 단어를 도림교회에서 감추어 버렸다. 성전 건축 등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일어 날 수 있는 교회 분쟁의 모습이 사회 봉사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23명의 장로와 담임 목사와의 화목은 이 교회의 자랑거리다. 1천여 명의 성도가 10여년 만에 4천명 이상으로 늘어난 것은 뒤따라 오는 당연한 결과였다. 지역 주민을 생각하는 진정한 마음, 그것이 바로 복음이었다. 지역 사회 봉사는 아버지가 물려준 도림교회의 재산인 것이다.

동네 사람들!

 

도림교회는 항상 시끄럽다. 한글을 배우는 늑깍이 학생의 글읽는 소리, 노인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고 소리, 매일 무료 급식의 식사 소리, 교회 마당에서 농구 등으로 뛰노는 학생들 소리 등 조용할 틈이 없다. 그러나 이 시끄러움을 불평하는 지역 주민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시끄럽게 하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마치 도림교회의 지역사회개발교육원을 자신들의 생활의 한 터로 생각하는 듯하다. 개발원은 과연 어떤 곳인가. 대를 잇는 51년 부자(父子) 목회의 결정체라고 하는 그곳을 들여다보자.

지난 81215일 개원된 개발원의 활동 방향은 정관에 잘 나타나 있다.

본 지역사회개발교육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하여 지역 사회 주민에 대한 교육봉사 및 복지사업을 실시하고, 이로써 주민생활을 향상시키고 복음을 더욱 전파하여 지역주민과 교회가 함께 살아가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개발원은 아버지때부터 해오던 유아원, 장학회, 경로잔치, 지역봉사위로회 등을 지역성에 맞게 3단계로 개편, 확장한 것이다.

기초단계인 1단계(81. 2.84. 12.) 기간에는 청소년 학교라는 야학과, 주부교실, 장수학교 등의 사업을 세웠다. 이것은 8215일부터 9일까지 실시한 지역사회 주민 실태조사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이다.

확립단계인 2단계(85.1.89.12.) 기간에는 1단계의 부족한 부분을 보안, 발전시키는데 주력했다. 장수학교를 노인학교로, 주부교실을 시민대학으로 명칭을 변경, 전문성을 강화했다. 유아원의 경우도 서울시 시범 운영으로 영아반을 신설하여 맞벌이 가정 자녀들을 종일 보육할 수 있어서 지역성에 더 접근한 유아원 운영의 전기를 맞이했다. 소암장학회의 범위가 지역 대학생에게까지 확대한 것도 이때다. 푸름도서관, 지역신문 창간, 한글학교, 사랑의 바자회의 활동도 이 기간에 시작됐다.

확장단계인 3단계(90.1.현재)는 개발원 본 목적에 수행할 능력이 극대화되고 한 지역교회로서의 지역사회를 위한 선교작업이 어느 정도 틀을 이루게 된 시기다. 개발원의 사업도 10여 개로 확장, 현재 운영되고 있다.

도림어린이집은 맞벌이 부부, 영세 가정이 많은 지역 특성상 절실한 것이었다. 취학전 아동을 대상으로 부모가 작장에서 퇴근 후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보호해주고 있다. 현재 90여 명의 아동이 있다. 신용협동조합은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주민들을 도와주는 비영리 민간 협동조합이다. 대출은 물론, 공동 주택사업, 지역문화사업, 공동 구입판매, 농수산물 직거래, 우리 농수산물 먹기 운동 들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소암장학회는 지난해 말로 기금이 4억원이 넘었다. 이것으로 교회 내외 대학생 40여 명에게 매 학기 장학금이 지급되고 있다.

노인학교는 개발원 사업중 가장 신경쓰고 있는 부분이다. 흔히 빈곤, 질병, 고독, 무료함 등에 시달린다는 노인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이다. 지역 노인들에게 제 3의 인생을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데 큰 목적을 두고 있다. 경로 식당에서 매일 60여 명의 노인에게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 <모랫말이야기>라는 이름의 지역신문은 생활정보 제공 및 상담 등의 역할로 지역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매월 5천부를 발행하고 있다. 이때 문제가 발생했다. 한글을 모르는 주민이 상당히 있다는 사실이다. 글을 모르니 신문의 효과가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한글학교이다. 도림동과 인근 지역 비문해자들을 위해 한글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현재 매녀 150명이 등록하고 있다.

시민교육은 지역주민과 교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교육세미나 사업이다. 도림도서관에서는 11천여권의 장서를 구비하여 주민들에게 무료로 대출해주고 있다. 1일 평균 56권이 대출되고 있다. 방과후 혼자 남는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 도림공부방이다. 아이들의 생활교육이나 숙제 지도 등 가정의 역할을 대신 감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70여 명의 학생들이 이곳을 이용하고 있다. 경건절제운동은 신앙갱신, 선교운동, 복음의 윤리적 실천 등을 목적으로 바르게 살기 운동, 아껴쓰기 운동, 3대 안하기 운동(과소비 안 하기, 쓰레기 안 버리기, 외국 농산물 및 유해음식 안 먹기) 등을 주된 사업으로 하고 있다. 매년 2차례의 알뜰시장과 유기농산물 직거래시장 등을 통해 경건절제 사업을 실천하고 있으며, 수익금이 발생할 경우 전액 구제비로 사용하고 있다.

개발원 사역 17. 몇가지 보안점도 발견됐다. 지속적인 프로그램 개발, 과감한 예산 투자, 시설 확충 등이 당면 과제이다. 이를 위해 사회선교 지도자 양성, 교회 예산 20% 책정 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시설 확충을 위해서는 사회봉사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해놓은 상태다.

 

미래로

 

개발원은 5년마다 지역실태 조사를 해오고 있다. 주민의식과 생활상황을 파악, 효과적인 사역을 하기 위해서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도림교회 성도들의 노력은 끊임없다. 그것이 곧 교회와 자신의 발전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림교회는 이러한 성도들의 손길을 바탕으로 지역 봉사의 사업을 확대할 소망을 갖고 있다. 한국교회 발전과 민족 복음화에도 일익을 감당하고픈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사회봉사를 통한 독특한 선교의 결과를 결코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창립 71주년을 맞는 도림교회는 유의웅 목사를 중심으로 4천여 명의 성도가 화목으로 뭉쳐 미래로 향하고 있다.

 

당회 목회에 성공해야 교회 목회에 성공합니다

 

유의웅 목사의 첫인상은 시골 아저씨였다. ‘아버지에게 물려 받았는지 조금 작아 보이는 양복에 쇼파에 처음 앉아 보이는 듯한 그의 자세는 한마디로 촌스러웠다. 그러나 그와의 대화 속에서 강인하고 세련된 목회 철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은혜의식을 강조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교훈을 성도들에게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죠. 이러한 은혜의식이 충만할 때 자연히 나오는 것이 충성의식입니다. 은혜의 감격이지요. 세번째 사랑의식을 외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말입니다.”

유목사는 대를 잇는 목회를 명예로 생각하고 있다. 선친의 훌륭한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창조적 사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아버지진실한 사람이었다. 또한 유목사는 어머니지혜의 여인으로 표현했다. 그는 진실과 지혜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지역 사회를 위해 쏟은 것이다.

지역 사회를 섬기는 것도 하나의 은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은사 많은 모양입니다.”

유목사는 도림교회를 장수 목회’ ‘화목한 교회’ ‘섬기는 교회로 특징지었다.

특히, 당회원의 화목은 교회의 우리 교회의 자랑입니다. 당회 목회에 성공해야, 교회 목회에 성공한다는 자세로 저는 목회에 임하고 있습니다. ”

귀공자풍의 외모에 서민적 이미지를 풍기는 목회자.얼핏 들으면 어눌한 것 같지만 익살과 재치에 핵심을 놓치지 않고 대중을 사로잡는 언변의 달변가. 온건한 개혁주의자. 서울 도림교회 유의웅목사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강단에서, 각종 세미나에서 23년간의 목회과정을 통해 그는 이러한 트레이드 마크를 자연스럽게 형성했다. 그러나 유목사의 진짜 트레이드마크는 순수 사랑 열정으로 표현된다. 유목사가 순수하다는 것은 그의 인성이 착하고 부지런하며 효심이 지극한데다가 목회가 순수하기 때문이다.사랑은 도림교회의 특징인 사회선교로 나타나고 열정은 어느 자리에서 든 최선을 다하는 전도와 선교의 열의를 보이는 성품을 묘사한 것이다.

유목사는 1942년 고 유병관목사와 안창옥권사(81) 사이의 7남매 가운데 셋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도림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신앙을 물려받은 그는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을 교회에서 배웠다. 그것은 바로 이웃에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임없이 베푸는 것이었다.

어릴때 어머님이 목회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권면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목회의 길을 택했지요. 그때 부터 하나님이 많은 것들을 나를 위해 예비했습니다

유목사는 배재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응원단장을 하며 리더십을 키웠고 장신대(61)에 재학중일 때는 홀리 보이스라는 서클을 조직, 정기연주회도 가졌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도서관 옆에 있던 대형 배지를 강나루 한강변에서 직접 실어 나른 모래로 만들기도 했다.그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도와 영성훈련을 쌓았다고 고백했다.

69년 영은교회 전도사로 박조준목사 밑에서 목회수업을 쌓은 그는 공군군목을 마치고 74년 아버지 고 유병관목사의 뒤를 이어 도림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부자세습에 강한 반대를 보이고 있던 교계 풍토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유목사의 커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장로 권사들이 그의 담임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23년동안 1천명의 교인을 5천여명으로 키웠으며 25백평의 넓은 대지위에 730평의 아름다운 교회와 560평의 교육관을 갖추고 지역사회에복음을 전하고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올해로 창립 74주년을 맞은 도림교회는 사회봉사선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교회로 꼽힌다. 도림교회가 운영하는 사회선교분야는 어린이 집, 신용협동조합, 경로식당, 한글학교,노인학교, 소암장학회, 도서관, 주부대학, 공부방 등을 들수 있다.도림교회의 사회봉사선교현장을 보기 위해 매주 전국에서 목회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15.성덕중앙교회

세대를 허무는 예배로 성장하는

김준수 목사

(총신대학 신학 대학원)

 

 

예배형태의 갱신은 가장 신나는 싸움이다.

나는 아직도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 아직도 '예배 형식'의 갱신에 대해 '신앙적'인 열심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식'은 말 그대로 '형식'일 뿐이다. 어떤 '본질'이나 '내용''형식'의 목에 잡아맬 때, '의식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이때의 '의식'들은 '내용'이나 '본질'들을 압도하고 변질시킨다.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그런 '의식주의자'들로 부터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태어났다. "개혁은 계속 개혁되야 한다"란 우리의 구호는 분명 그런 '형식'의 지속적인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혁교회는 '형식'의 계속적인 갱신을 통해서 자꾸만 가려지려는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고 또 그것을 확장, 강화시켜 나간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교회 예배는 시간에 따라, 공간에 따라 그렇게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의 모든 문화를 주권적으로 평가하고, 수용하거나 버리거나 갱신해 나간다. 특별히 교회는 계속적인 예배갱신을 통해 세상 문화를 평가하고 영향을 주고 개량하면서 정복해 나간다. 이것은 교회가 해야 하고 또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신나는'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배갱신은 '편견의 장애물' 때문에 방해를 받고 있다.

 

성경은 라틴어로만 쓰여져야 한다?

로마카톨릭이 한 때 신앙처럼 고집했던 것이다. 성경은 오직 라틴어로만 쓰여져야 했다. 그들에게는 라틴어만이 거룩했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라틴어 성경을 자기네 나라 언어로 번역하려다가 잡혀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들의 죄목은 '불경죄'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종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자기 평생을 바치려는 선교사들이 구름떼처럼 일어나고 있다. 라틴어외의 언어(형식)로 성경(본질)을 번역하면 성경 파괴인가? 이젠 더 이상 아무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조차 않는다. 이미 성경언어의 '형식' 파괴(?)는 상식이 되어 버렸다. 현재 우리가 옛날에 번역된 한글개역 성경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 번역만 거룩해서가 아니다. 아직 새롭게 번역할 여건과 실력이 안되기 때문이다. '현대화'된 번역이 나올 것으로 기대되지만, 때늦은 감이 많다. 시대에 뒤 떨어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 때문에 진리에서 멀어지고 돌아서버린 새 세대의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찬송가에 없는 노래는 부를 수 없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보수적인 교회들 안에서 쉽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이다. 예배 중에는 절대 '복음성가'를 부를 수 없었다. '복음성가'는 거룩한 예배에 어울리지 않는 '불경건한 찬송'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졸지에 '복음'까지 불경건해진 것이다. 조금 더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찬송가 중에서도 앞부분에 있는 예배용 '찬양곡'들만 부른다. 그리고 그보다 더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아예 찬송가를 버리고 시편만을 새로 작곡해서 부른다. 하나님을 더 아름답게 섬기려는 것은 아주 잘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들이 선택한 '표현방식'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아주 잘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본질화'하고 '교리화'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면 불필요한 분쟁만 낳을 뿐이다. 어떤 교회가 어떤 형식의 곡으로 된 노래를 부를 것이냐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서 있는 시대와 지역과 삶의 정황 속에서 선택하고 결정할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고 또 지금까지 그래 왔다. 따라서 그런 결정은 또한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 음악가로서도 하나님은 얼마나 탁월하시고 풍성하신가! 그러나 인간의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음악은 제한 받으신다. '찬송'의 대상과 내용 등은 바꿀 것이 없다. 그러나 예배의 '찬송가'는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부르는 사람들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찬송'은 불변하나 '찬송가'는 늘 변한다. 이렇게 교회는 예배용 찬송가를 통해 세상 음악을 평가하고 승화시키고 선도한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현대화는 세속화이다?

예배의 형태를 현대화한다는 것은 곧 세속화를 의미하는가? 나는 현대화와 세속화를 이렇게 구별하고 싶다. 즉 현대화는 교회가 주권적으로 세상의 문화를 정복하는 것이고, 세속화는 교회가 피동적으로 세상의 문화에 정복당하는 것이다. 현대화는 교회의 본질적인 것들이 세상 문화로 옷입는 것이고, 세속화는 세상의 본질적인 것들이 교회의 문화로 옷입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현대화에 성공한다는 말은 세상 문화를 충분히 평가하고 심판하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드는 일에 성공한다는 말도 된다. 이러한 교회의 현대화를 말씀의 성육화에 비유해 설명할 수 있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그 말씀은 '육신'(지금, 여기의 문화)을 입을 때 비로소 '복음'이 된다. 그리고 '복음'이 되어야 사람들이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다. 교회의 현대화는 그 말씀이 '지금', '여기'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들려지는 '복음'이 되기 위해 '성육화'(문화화)하는 한 과정이다. 모든 '표현방식'은 그렇게 '시대성''공간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현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현대화하지 않으면 교회는 세속화된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도 당대의 문화를 평가, 검증하고, 그 방향을 지시해주는 최종,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땅위에 임한 천국 군대로서 세상 문화를 그렇게 정복한다.

 

예배의 갱신은 예배의 파괴이다?

 

예배는 한번 '복음화'하느라고 진통을 겪은 적이 있다. 신약교회가 율법의 성전제사에서 다락방 예배로 거듭날 때이다. 그 때 당시 사회와 교계에 이것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아마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율법 파괴, 성전 파괴, 제사(예배)파괴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예배가 복음화되는 충격이었다. 그로부터 1500여년 뒤 다시 한번 '복음화'를 위한 진통을 겪는다. 교회가 로마카톨릭의 의식주의화된 예배에서 믿음의 예배로 돌이킬 때였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오직 믿음으로!" 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와, 예식의 공로를 내세우던 로마교회의 심장을 말씀의 검으로 찔러 버렸다. 당시 개혁자들의 갱신 행위들이 로마교회에서 볼 때는 분명 파괴행위에 불과했다. 그렇다! 항상 '복음화''파괴 행위'이다. 그러나 예배의 갱신은 예배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대한 비복음적이고 비신앙적인 사상과 예식 행위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뒤로 교회의 예배는 거듭 거듭 '복음화'해 왔다. 복음이 전파되는 지역에 따라, 또 교회가 세워지는 시대에 따라 교회 예배는 계속 옷을 갈아 입었다. 그것은 철을 따라 자연이 옷을 갈아 입듯, 시대에 따라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듯 매우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만약 그런 '형식들'에 우리의 믿음을 실으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경건한 죄이다. 초대교회의 예배갱신이 그리스도의 재발견으로 인한 것이고, 중세 개혁교회의 예배갱신이 성경의 재발견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면, 현대 교회의 예배갱신은 삶의 정황들을 새롭게 인식하는데서 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예배갱신은 본질과의 싸움이 아니라, 본질을 더 강화 시키고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형식들과 벌이는 싸움이다.

 

전통적 예배가 성경적이고 현대화된 예배는 유행적이다?

 

'전통적'이란 말 자체가 곧 '문화적'이란 말이다. 예배 형식을 전통적으로 고수하겠다는 말은 옛 문화옷을 그대로 입겠다는 뜻이고, 예배 형식을 현대화하겠다는 말은 새 문화로 갈아 입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배를 현대화하려 할 때 '유행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지만, 전통주의라는 것도 역시 큰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하나의 유행적이다. 역사 속에서의 보수와 개혁은 두고두고 갈등하는 존재다.그러나 전통이 되지 않으려는 유행이 없고, 변하지 않으려는 전통은 없다. 사실은 전통이든 유행이든 그 변화에 있어서 '속도''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사이에는 경계선이 없다. 옛 문화와 새 문화의 경계선은 멀리서 보면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사라져 버린다. 엄밀히 말한다면 전통적이란 것은 현대화되어 가는 속도가 '유행적'인 것 보다 조금 늦은 것이고, 유행적이란 말은 그 속도가 '전통적'인 것보다 조금 빠르다는 것일 뿐이다. 그 둘의 차이는 시간과 정도의 차이다. 그러므로 같은 개혁 교회들 안에서의 다양한 예배 형태의 차이는 신학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와 시간의 차이다. 그런 갈등과 혼란들은 자유에서 오는 것이기에 교회를 쇠퇴 시키지 않고 오히려 신선하게 하고 강화시키고 성장시킨다. 그러므로 예배의 갱신을 두려워하거나 소극적으로 대하기 보다는 적극적 긍정적 자세로 그 작업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시작한 것은 교회안에 들어오면 안된다?

 

민감하지만 너무나 상식적인 문제이다. 만약 교회 안에서 이교도나 불신자들이 먼저 사용한 문화(언어, , 예식, 습관등)들을 다 골라내 버려야 한다면 어쩌면 건물도 안남을지 모른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약속을 담기 위해 취하고 있는 '언약형태'도 고대 근동지역 여러 나라들이 사용하던 '계약방식'이 아니던가? 또 그것은 당시대 사람들의 '종교예식'이기도 했다. 할례도 그렇고, 제사들도 그렇다. 구약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들이 사실은 대부분 이방인 중에 이미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문화들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것들에 새 이름을 주시고 새 의미를 부여하시고, 그리고 새 형태로 갱신해 주신다. 하나님의 그일은 세상 역사 속에서 교회를 통해 계속 시행되고 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의 어느 것이든 주권적으로 평가 혹, 취하기도 하시며 버리기도 하신다. 무엇이든 하나님 손안에 잡히면 새 것이 되며 특별한 것이 된다. 십자가는 저주의 사형 ''에 불과했지만, 보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 안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신 최고의 예배 ''이 되었다. 교회가 예배의 ''을 갱신한다는 것은 세상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교회의 사명이라는 맥락속에서 이해되고 또 진행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신앙의 본질을 사람들에게 표현하기위해 세상의 모든 문화를 평가하고, 취하거나, 버리거나, 새로 바꿀 수 있는 권세와 의무를 갖는다.

 

예배는 오직 드리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는 것일까? 물론 '드리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예배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예배의 의미를 좁게 이해한 것이 아닐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도 하고, 예배자끼리 서로 나누기도 하고,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증거하기도 한다. 쉽게 성찬식은 모든 예배 예식의 정점이다. 그런데 성찬식은 드리는 것과 받는 것, 그리고 서로 나누고 증거 하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성찬예식의 중요한 목적은 네가지이다.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감사 기념하고, 그 회복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된 은사들을 서로 나누고, 그리고 증거하는 것이다. 예배는 찬미의 기능과, 연합과 교제, 그리고 세상 문화와 영혼들에 대한 복음선포라는 '선교적 기능'을 갖는다. 실제로 많은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의 예배를 '보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 '와 보라'고 외쳐야 한다면 교회에서 저들에게 보여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영광스런 예배인 것이다. 그러기에 불신자들을 하나님의 예배에 초청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예배에 처음 참석한 불신자도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다. 누가 감히 '당신은 예배자가 될 수 없어!'라고 하면서 저들을 가로 막아 서고 되돌려 보낼 수 있는가?

 

성덕중앙교회는 매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즐긴다.

 

본인이 섬기고 있는 성덕중앙교회에서 매주일 밤마다 3년째 드리고 있는 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간단히 소개한다.

첫째, 온 가족이 드리는 '세대통합'예배이다. 예배를 통해 세대차이가 극복된다. 예배의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앉아서 함께 춤을 추며 노래부르고 함께 설교 듣고 함께 기도 드린다.

둘째, 찬양의 강물에 순서들을 꽃잎처럼 띄운다. 경쾌하고 쉬운 곡조의 찬양들을 주로 부른다. 윈도우즈라는 중창단이 전체 노래를 진행하고, 매주일 돌아가면서 부서별 성가대가 특별 찬양들을 주로 부른다. 한달에 한번씩은 미리암, 마스길등 성인 남녀 중창단이 특송을 부른다. 드럼, 키보드, 피아노, 호른, 클라리넷 서폰, 나팔, 기타등 가능한 많은 악기가 동원된다. 그리고 율동으로 찬양한다. 할아버지부터 유치부 아이까지 온 몸으로 찬양한다. 강대상을 치워 무대로 준비된 강단에는 담임목사와 율동 팀이 선다. 그 아래 강단에는 윈도우즈 노래 팀이 선다.

셋째 단막극을 무대에 올린다. 매주 새로운 주제로 10여분짜리의 단막극을 한다. 생활 주변에서 부딪치는 갈등들을 다룬다. 단막극을 보면서 온 회중의 마음이 강단 위로 다 올라오고, 활짝 열린다. 재미가 있고 공감대가 있다. 삽시간에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회중석에서 박수와 함성과 웃음과 응원 등이 터져 나온다. 단막극은 어른부터 아이까지 모두가 부서별로 돌아가면서 한다. 자기 차례가 돌아올 때 누구 하나 마다하질 않는다.

넷째, 현실의 문제를 치료하는 복음을 설교한다. 단막극이 끝나자 마자 설교가 시작된다. 주제는 단막극이 다룬 것과 똑같다. 단막극을 통해 잘 갈린 밭고랑에 이제 씨만 뿌리면 된다. 그러나 이 설교는 쉬워야 하고, 또 짧은 시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15). 일단 말씀이 선포되면 그 이전의 모든 순서(단막극 등)들을 깨끗이 잊을 정도로, 순식간에 회중을 설교에 몰입시켜야 한다. 설교에 실패하고 예배에 성공할 수 없다.

다섯째, 뜨거운 통성기도가 있다. 아이들이 자기 부모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들으며 함께 기도한다.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기도 드린다. 나라를 위한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 가정과 학업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온 가족이 함께 기도 드리는 것이다. 현실의 여러 문제를 직접 하나님께 내놓은 연습을 부모자녀가 함께 하는 것이다.

여섯째, 수십 명이 예배를 준비한다. 성가대나 안내위원등 일반적인 봉사자들을 빼고도 최소한 50여명이 열심히 뛰어야 예배가 준비되고 진행된다. 그만큼 온 교우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예배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만큼 열의가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다. 그 중 대부분은 우리 자녀들이다. 열심히 예배 준비하는 저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심정을 상상해 보라!

일곱째, 철저히 준비한다. 예배의 진행은 대단히 자연스럽고 부드러워 보인다. 모든 순서가 거의 자동으로 진행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방송 콘티를 짜듯 예배 진행표를 계획하고 연습해서 진행한다. 전체 진행 시간은 70분 정도이다. 다양한 순서이지만 진행속도는 무척 빠른 편이다.

매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끝내고 나면 잔치를 치른 기분이다. 마음에 예배의 감흥이 강물처럼 남아 출렁거린다. 온 가족이 매주일에 한번씩 이런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큰 행복이 아닌가?

요즘 '열린 예배'란 말을 많이 한다. 열린 예배가 되려면 우선 하나님을 향해 열려야 하고, 예배자(세대간에)끼리 서로를 향해 열려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세상 불신자들을 향해서도 열려야 한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도 세상 문화와 영혼들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창조명령(문화명령)을 수행해 나간다. 예배 형식의 갱신은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흑백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와 시간의 문제이다.

16.광명교회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는 교회

함기룡 목사

(그리스도의 신학대학, 신학 대학원)

 

오직 말씀으로

개척 10, 복음을 전하기가 수도권 중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광명시 본 동에서 인근교회의 부러움을 사며 매일매일 새롭게 성장하는 교회가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광명교회, 담임목사 함기룡, 아직 매스컴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씀을 들어본 사람들은 그를 "말씀에 사로 잡힌 목사"로 기억한다.

광명시청을 못가서 광명 1동 후미진 골목 안쪽에 위치한 광명교회는 개척후 2년만에 지어져 연건평 400평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겉모습과는 달리 사치스럽지도 않고 그저 소박한 예배당에서는 매주일마다 3부예배가 드려져 일주일내내 천여명의 성도가 몰려와 은혜받고 새로워져서 돌아간다.

광명교회 함목사의 목회사역은 한마디로 말해 살아있는 운동력을 믿고 그 말씀을 높이며 자랑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광명교회에는 보통교회들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프로그램이 없다. 전도운동도, 총동원 주일같은 것도 없다. 오직 성경읽기와 성경공부 그리고 예배와 찬양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100%이상의 성장을 해온 것이다. 인근의 교회들이 힘들어서 들어서고 나가고 하는 가운데서도 광명교회는 소문없이 성장해온 것이다.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는 함목사를 붙들고 기자는 몇가지만 대답해 달라고 부탁했다.

 

신앙의 배경

 

먼저 함목사 자신의 신앙배경부터 물어 보았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믿음이 싹텄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도 어렸을 때부터 성경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도와야겠다고 느끼게 된 것은 '상주심에 대한 믿음'이 생길때부터였습니다. 즉 주님을 믿는 신앙에서 더 성숙하여 내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섬김의 믿음은 목회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에는 은사가 나타나서 기도해주고 심방해서 위로해주는 정도였지 내가 받은 은사로 사람을 섬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지요. 그러다가 목회를 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 분이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나를 섬겨 주신 것처럼 나도 사람을 섬겨야 겠구나 생각하게 된 것이 제 믿음이 자라게 된 결정적인 계기인 것입니다"

인터뷰에 앞서 참석해 들어본 목회자를 위한 성경공부 모임(매주 목요일 5시부터 광명교회에서 모이고 있다)에서 함목사는 유달리 "십자가의 도"를 강조했다. "십자가의 도"란 한마디로 주님의 고난당하시고 죽으심 즉 섬김의 도를 믿고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부활과 영생과 섬김과 고난을 강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축복을 강조하고 은사와 신유를 강조하면 사람들이 모이지만 "십자가의 도"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일"에는 모두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다. 비단 오늘의 신자들만 그러한가? 아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들도 십자가의 도를 배우기 전에 모두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함목사는 주님을 믿는 진정한 맛은 섬기면서 내짐을 질 뿐 아니라 남의 짐까지 져주는 말씀을 실천을 할 때에 느낄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필자는 아직 불혹의 나이에도 이르지 않는 함목사에게 신학을 하게 된 동기를 물어 보았다. 그가 굳이 신학의 길을 택하고 목사 안수를 받게 되기까지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부터 신학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새벽기도는 빠지지 않고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그중에 곁에서 목회하시는 분들을 보게 되니까 목사님의 사역중에 비성경적인 것 같은 부분도 많아 보이고, 또 목회를 너무 어렵게 하시는 것도 같고, 교회마다 문제 없는 곳도 없고, 그 뿐 아니라 장로님들의 알력은 어떻게 그렇게 많을까요? 그래서 제 어린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믿되 목회는 절대 안해야 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3때 진로를 결정하려는데 하나님의 소명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한다는 마음보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부정적인 생각들 때문에 하지 말아야 겠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그 음성을 거부했지요. 그래서 그런지 그 후에 복막염을 앓게 되었습니다. 3년정도 복막염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3학년은 두 번을 다녔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하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아버렸지요. 그런 후에야 '!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징계였구나'하고 생각게 된 것이지요. 그후 하나님이 저를 구체적으로 인도하셔서 졸업때까지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틈나는대로 주신 은사를 따라 전도하고, 심방하고 또 환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나음을 입었고 그 일로 인해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신학교 졸업반때 였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다져진 영성  

교회갱신

 

교회갱신협의회에서 함께 사역하고 있기도 한 김태우 목사님은 한국교회와 신평로교회의 갱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의 갱신분야는 먼저, 말씀을 듣고 깨달아 믿음에 이를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 삶의 목표와 사명감을 일깨워주어서 신앙=의 현장으로 이어지는 일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문화며 사회변화이다. 둘째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 교회성장은 거룩한 변화이며 거룩한 생명이다. 그러나 성장위주보다는 조화도니 교회의 아름다움을 위한 종합적인 교회성장운동, 곧 갱신이 있어야 시대를 이끌 교회가 될 수 있다. 셋째는 선교운동이다. 선교는 자랑도 아니고 서둘 일도 아니다. 교회의 본래 사명이며 기능이다. 연구하며 협력하는 역사성을 가진 선교의 갱신운동이 필요하다. 넷째, 목회자와 장로들의 갱신이다. 자신은 죽고 교회가 교회되게 해야 한다. 교회 되기 위한 협력과 동반자로 갱신되어야 한다. 다섯째, 지역교회(Local Church)로의 갱신이다. 교회는 어느 일정한 지역에 위치하여 그 지역사회를 떠날 수 없다. 교회의 이름도 지역성을 띠어야 옳다고 생각하며 그 시대적 사명과 배경에 교회는 동반자와 협력자로 책임지는 갱신이 필요하다.” 이상의 여러 비젼과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는 부산지역에서 다시한번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리라고 믿으며 부산을 떠나왔다.

 

14.도림교회

 

은혜, 충성, 사랑 의식으로

신앙의 대를 잇는 공동체

유의웅목사

 

아버지가 있는 교회

도림교회에 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신앙을 느낄 수 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권위가 실추되어간다는 요즘, ‘존경하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행복이 아닐까.

서울 영등포구 도림 2동에 위채한 도림교회 성도들과 그 지역 주민들은 그 행복을 누리고 있다. ‘노인 학교’, ‘소암 장학회’, ‘경로식당등 도림교회에서 주최하는 10여 개의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들은 서로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40여 년 동안 말이다.

오늘의 도림교회는 어제의 유병관 목사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는 도림교회 현 당회장인 유의웅 목사(57)의 아버지이다.

6·25 직후, 이념과 정치의 혼란, 경제적 빈곤의 상황 속에서 유병관 목사는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조직(64), 국내 처음으로 산업선교를 시작했다. 그전에 성경구락부(55) 등으로 지역 교육 사업을 해오고는 있었지만, 조직을 갖추지는 못했었다. 유병관 목사는 이후 도림유치원을 설립하여 지역에서 처음으로 취학 전 아동교육을 시작하였으며(65), 산업학원 단기교육을 실시하여 기술교육을 통한 직업을 갖게 하였고(68), 도림 새마을학교 상록교실의 문도 열었다(72). 74년 원로 목사로 추대된 유병관 목사는 당시 100만원을 장학기금으로 헌금하면서 28년의 담임목회를 정리했다. 이것이 오늘의 소암장학회의 기초이다.

유병관 목사의 뜻은 그의 셋째 아들 유의웅 목사를 통해 더욱 빛났다. 지역 사회봉사를 위한 목회의 대가 이어진 것이다. 지난 74년 제 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유의웅 목사(이하 유목사)는 지역사회개발교육원(이하 개발원)을 설립하여 지역 사회선교의 전통을 새롭게 발전시켜 나갔다.

개발원은 지난 81215일 설립된 이후 도림어린이집, 신용협동조합, 소암장학회, 노인학교, 한글학교, 시만교육, 지역신문, 공부방, 도서관, 경로식당, 경건절제 등 10여 개 부서로 활동하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개발원의 활동은 도림교회를 총회 주관 제1사회봉사상 교회 부문상’(69회 총회)을 수상하게 했으며, 각종 언론에 오르내리는 결과를 낳게 했다. 개발원은 도림교회를 대표할 만큼 활동의 폭을 넓혔다.

교회 부흥도 이 때 일었다. 무엇보다 사회 봉사를 통해 성도들의 신앙의 마음이 뜨겁게 일었다. ‘화목전도의 열매가 봉사를 통해 열리기 시작했다. 지역 사회 봉사는 분쟁이라는 단어를 도림교회에서 감추어 버렸다. 성전 건축 등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일어 날 수 있는 교회 분쟁의 모습이 사회 봉사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23명의 장로와 담임 목사와의 화목은 이 교회의 자랑거리다. 1천여 명의 성도가 10여년 만에 4천명 이상으로 늘어난 것은 뒤따라 오는 당연한 결과였다. 지역 주민을 생각하는 진정한 마음, 그것이 바로 복음이었다. 지역 사회 봉사는 아버지가 물려준 도림교회의 재산인 것이다.

동네 사람들!

 

도림교회는 항상 시끄럽다. 한글을 배우는 늑깍이 학생의 글읽는 소리, 노인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고 소리, 매일 무료 급식의 식사 소리, 교회 마당에서 농구 등으로 뛰노는 학생들 소리 등 조용할 틈이 없다. 그러나 이 시끄러움을 불평하는 지역 주민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시끄럽게 하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마치 도림교회의 지역사회개발교육원을 자신들의 생활의 한 터로 생각하는 듯하다. 개발원은 과연 어떤 곳인가. 대를 잇는 51년 부자(父子) 목회의 결정체라고 하는 그곳을 들여다보자.

지난 81215일 개원된 개발원의 활동 방향은 정관에 잘 나타나 있다.

본 지역사회개발교육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하여 지역 사회 주민에 대한 교육봉사 및 복지사업을 실시하고, 이로써 주민생활을 향상시키고 복음을 더욱 전파하여 지역주민과 교회가 함께 살아가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개발원은 아버지때부터 해오던 유아원, 장학회, 경로잔치, 지역봉사위로회 등을 지역성에 맞게 3단계로 개편, 확장한 것이다.

기초단계인 1단계(81. 2.84. 12.) 기간에는 청소년 학교라는 야학과, 주부교실, 장수학교 등의 사업을 세웠다. 이것은 8215일부터 9일까지 실시한 지역사회 주민 실태조사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이다.

확립단계인 2단계(85.1.89.12.) 기간에는 1단계의 부족한 부분을 보안, 발전시키는데 주력했다. 장수학교를 노인학교로, 주부교실을 시민대학으로 명칭을 변경, 전문성을 강화했다. 유아원의 경우도 서울시 시범 운영으로 영아반을 신설하여 맞벌이 가정 자녀들을 종일 보육할 수 있어서 지역성에 더 접근한 유아원 운영의 전기를 맞이했다. 소암장학회의 범위가 지역 대학생에게까지 확대한 것도 이때다. 푸름도서관, 지역신문 창간, 한글학교, 사랑의 바자회의 활동도 이 기간에 시작됐다.

확장단계인 3단계(90.1.현재)는 개발원 본 목적에 수행할 능력이 극대화되고 한 지역교회로서의 지역사회를 위한 선교작업이 어느 정도 틀을 이루게 된 시기다. 개발원의 사업도 10여 개로 확장, 현재 운영되고 있다.

도림어린이집은 맞벌이 부부, 영세 가정이 많은 지역 특성상 절실한 것이었다. 취학전 아동을 대상으로 부모가 작장에서 퇴근 후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보호해주고 있다. 현재 90여 명의 아동이 있다. 신용협동조합은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주민들을 도와주는 비영리 민간 협동조합이다. 대출은 물론, 공동 주택사업, 지역문화사업, 공동 구입판매, 농수산물 직거래, 우리 농수산물 먹기 운동 들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소암장학회는 지난해 말로 기금이 4억원이 넘었다. 이것으로 교회 내외 대학생 40여 명에게 매 학기 장학금이 지급되고 있다.

노인학교는 개발원 사업중 가장 신경쓰고 있는 부분이다. 흔히 빈곤, 질병, 고독, 무료함 등에 시달린다는 노인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이다. 지역 노인들에게 제 3의 인생을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데 큰 목적을 두고 있다. 경로 식당에서 매일 60여 명의 노인에게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 <모랫말이야기>라는 이름의 지역신문은 생활정보 제공 및 상담 등의 역할로 지역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매월 5천부를 발행하고 있다. 이때 문제가 발생했다. 한글을 모르는 주민이 상당히 있다는 사실이다. 글을 모르니 신문의 효과가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한글학교이다. 도림동과 인근 지역 비문해자들을 위해 한글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현재 매녀 150명이 등록하고 있다.

시민교육은 지역주민과 교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교육세미나 사업이다. 도림도서관에서는 11천여권의 장서를 구비하여 주민들에게 무료로 대출해주고 있다. 1일 평균 56권이 대출되고 있다. 방과후 혼자 남는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 도림공부방이다. 아이들의 생활교육이나 숙제 지도 등 가정의 역할을 대신 감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70여 명의 학생들이 이곳을 이용하고 있다. 경건절제운동은 신앙갱신, 선교운동, 복음의 윤리적 실천 등을 목적으로 바르게 살기 운동, 아껴쓰기 운동, 3대 안하기 운동(과소비 안 하기, 쓰레기 안 버리기, 외국 농산물 및 유해음식 안 먹기) 등을 주된 사업으로 하고 있다. 매년 2차례의 알뜰시장과 유기농산물 직거래시장 등을 통해 경건절제 사업을 실천하고 있으며, 수익금이 발생할 경우 전액 구제비로 사용하고 있다.

개발원 사역 17. 몇가지 보안점도 발견됐다. 지속적인 프로그램 개발, 과감한 예산 투자, 시설 확충 등이 당면 과제이다. 이를 위해 사회선교 지도자 양성, 교회 예산 20% 책정 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시설 확충을 위해서는 사회봉사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해놓은 상태다.

 

미래로

 

개발원은 5년마다 지역실태 조사를 해오고 있다. 주민의식과 생활상황을 파악, 효과적인 사역을 하기 위해서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도림교회 성도들의 노력은 끊임없다. 그것이 곧 교회와 자신의 발전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림교회는 이러한 성도들의 손길을 바탕으로 지역 봉사의 사업을 확대할 소망을 갖고 있다. 한국교회 발전과 민족 복음화에도 일익을 감당하고픈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사회봉사를 통한 독특한 선교의 결과를 결코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창립 71주년을 맞는 도림교회는 유의웅 목사를 중심으로 4천여 명의 성도가 화목으로 뭉쳐 미래로 향하고 있다.

 

당회 목회에 성공해야 교회 목회에 성공합니다

 

유의웅 목사의 첫인상은 시골 아저씨였다. ‘아버지에게 물려 받았는지 조금 작아 보이는 양복에 쇼파에 처음 앉아 보이는 듯한 그의 자세는 한마디로 촌스러웠다. 그러나 그와의 대화 속에서 강인하고 세련된 목회 철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은혜의식을 강조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교훈을 성도들에게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죠. 이러한 은혜의식이 충만할 때 자연히 나오는 것이 충성의식입니다. 은혜의 감격이지요. 세번째 사랑의식을 외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말입니다.”

유목사는 대를 잇는 목회를 명예로 생각하고 있다. 선친의 훌륭한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창조적 사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아버지진실한 사람이었다. 또한 유목사는 어머니지혜의 여인으로 표현했다. 그는 진실과 지혜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지역 사회를 위해 쏟은 것이다.

지역 사회를 섬기는 것도 하나의 은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은사 많은 모양입니다.”

유목사는 도림교회를 장수 목회’ ‘화목한 교회’ ‘섬기는 교회로 특징지었다.

특히, 당회원의 화목은 교회의 우리 교회의 자랑입니다. 당회 목회에 성공해야, 교회 목회에 성공한다는 자세로 저는 목회에 임하고 있습니다. ”

귀공자풍의 외모에 서민적 이미지를 풍기는 목회자.얼핏 들으면 어눌한 것 같지만 익살과 재치에 핵심을 놓치지 않고 대중을 사로잡는 언변의 달변가. 온건한 개혁주의자. 서울 도림교회 유의웅목사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강단에서, 각종 세미나에서 23년간의 목회과정을 통해 그는 이러한 트레이드 마크를 자연스럽게 형성했다. 그러나 유목사의 진짜 트레이드마크는 순수 사랑 열정으로 표현된다. 유목사가 순수하다는 것은 그의 인성이 착하고 부지런하며 효심이 지극한데다가 목회가 순수하기 때문이다.사랑은 도림교회의 특징인 사회선교로 나타나고 열정은 어느 자리에서 든 최선을 다하는 전도와 선교의 열의를 보이는 성품을 묘사한 것이다.

유목사는 1942년 고 유병관목사와 안창옥권사(81) 사이의 7남매 가운데 셋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도림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신앙을 물려받은 그는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을 교회에서 배웠다. 그것은 바로 이웃에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임없이 베푸는 것이었다.

어릴때 어머님이 목회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권면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목회의 길을 택했지요. 그때 부터 하나님이 많은 것들을 나를 위해 예비했습니다

유목사는 배재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응원단장을 하며 리더십을 키웠고 장신대(61)에 재학중일 때는 홀리 보이스라는 서클을 조직, 정기연주회도 가졌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도서관 옆에 있던 대형 배지를 강나루 한강변에서 직접 실어 나른 모래로 만들기도 했다.그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도와 영성훈련을 쌓았다고 고백했다.

69년 영은교회 전도사로 박조준목사 밑에서 목회수업을 쌓은 그는 공군군목을 마치고 74년 아버지 고 유병관목사의 뒤를 이어 도림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부자세습에 강한 반대를 보이고 있던 교계 풍토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유목사의 커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장로 권사들이 그의 담임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23년동안 1천명의 교인을 5천여명으로 키웠으며 25백평의 넓은 대지위에 730평의 아름다운 교회와 560평의 교육관을 갖추고 지역사회에복음을 전하고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올해로 창립 74주년을 맞은 도림교회는 사회봉사선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교회로 꼽힌다. 도림교회가 운영하는 사회선교분야는 어린이 집, 신용협동조합, 경로식당, 한글학교,노인학교, 소암장학회, 도서관, 주부대학, 공부방 등을 들수 있다.도림교회의 사회봉사선교현장을 보기 위해 매주 전국에서 목회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15.성덕중앙교회

세대를 허무는 예배로 성장하는

김준수 목사

(총신대학 신학 대학원)

 

 

예배형태의 갱신은 가장 신나는 싸움이다.

나는 아직도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 아직도 '예배 형식'의 갱신에 대해 '신앙적'인 열심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식'은 말 그대로 '형식'일 뿐이다. 어떤 '본질'이나 '내용''형식'의 목에 잡아맬 때, '의식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이때의 '의식'들은 '내용'이나 '본질'들을 압도하고 변질시킨다.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그런 '의식주의자'들로 부터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태어났다. "개혁은 계속 개혁되야 한다"란 우리의 구호는 분명 그런 '형식'의 지속적인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혁교회는 '형식'의 계속적인 갱신을 통해서 자꾸만 가려지려는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고 또 그것을 확장, 강화시켜 나간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교회 예배는 시간에 따라, 공간에 따라 그렇게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의 모든 문화를 주권적으로 평가하고, 수용하거나 버리거나 갱신해 나간다. 특별히 교회는 계속적인 예배갱신을 통해 세상 문화를 평가하고 영향을 주고 개량하면서 정복해 나간다. 이것은 교회가 해야 하고 또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신나는'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배갱신은 '편견의 장애물' 때문에 방해를 받고 있다.

 

성경은 라틴어로만 쓰여져야 한다?

로마카톨릭이 한 때 신앙처럼 고집했던 것이다. 성경은 오직 라틴어로만 쓰여져야 했다. 그들에게는 라틴어만이 거룩했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라틴어 성경을 자기네 나라 언어로 번역하려다가 잡혀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들의 죄목은 '불경죄'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종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자기 평생을 바치려는 선교사들이 구름떼처럼 일어나고 있다. 라틴어외의 언어(형식)로 성경(본질)을 번역하면 성경 파괴인가? 이젠 더 이상 아무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조차 않는다. 이미 성경언어의 '형식' 파괴(?)는 상식이 되어 버렸다. 현재 우리가 옛날에 번역된 한글개역 성경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 번역만 거룩해서가 아니다. 아직 새롭게 번역할 여건과 실력이 안되기 때문이다. '현대화'된 번역이 나올 것으로 기대되지만, 때늦은 감이 많다. 시대에 뒤 떨어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 때문에 진리에서 멀어지고 돌아서버린 새 세대의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찬송가에 없는 노래는 부를 수 없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보수적인 교회들 안에서 쉽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이다. 예배 중에는 절대 '복음성가'를 부를 수 없었다. '복음성가'는 거룩한 예배에 어울리지 않는 '불경건한 찬송'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졸지에 '복음'까지 불경건해진 것이다. 조금 더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찬송가 중에서도 앞부분에 있는 예배용 '찬양곡'들만 부른다. 그리고 그보다 더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아예 찬송가를 버리고 시편만을 새로 작곡해서 부른다. 하나님을 더 아름답게 섬기려는 것은 아주 잘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들이 선택한 '표현방식'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아주 잘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본질화'하고 '교리화'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면 불필요한 분쟁만 낳을 뿐이다. 어떤 교회가 어떤 형식의 곡으로 된 노래를 부를 것이냐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서 있는 시대와 지역과 삶의 정황 속에서 선택하고 결정할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고 또 지금까지 그래 왔다. 따라서 그런 결정은 또한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 음악가로서도 하나님은 얼마나 탁월하시고 풍성하신가! 그러나 인간의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음악은 제한 받으신다. '찬송'의 대상과 내용 등은 바꿀 것이 없다. 그러나 예배의 '찬송가'는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부르는 사람들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찬송'은 불변하나 '찬송가'는 늘 변한다. 이렇게 교회는 예배용 찬송가를 통해 세상 음악을 평가하고 승화시키고 선도한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현대화는 세속화이다?

예배의 형태를 현대화한다는 것은 곧 세속화를 의미하는가? 나는 현대화와 세속화를 이렇게 구별하고 싶다. 즉 현대화는 교회가 주권적으로 세상의 문화를 정복하는 것이고, 세속화는 교회가 피동적으로 세상의 문화에 정복당하는 것이다. 현대화는 교회의 본질적인 것들이 세상 문화로 옷입는 것이고, 세속화는 세상의 본질적인 것들이 교회의 문화로 옷입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현대화에 성공한다는 말은 세상 문화를 충분히 평가하고 심판하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드는 일에 성공한다는 말도 된다. 이러한 교회의 현대화를 말씀의 성육화에 비유해 설명할 수 있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그 말씀은 '육신'(지금, 여기의 문화)을 입을 때 비로소 '복음'이 된다. 그리고 '복음'이 되어야 사람들이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다. 교회의 현대화는 그 말씀이 '지금', '여기'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들려지는 '복음'이 되기 위해 '성육화'(문화화)하는 한 과정이다. 모든 '표현방식'은 그렇게 '시대성''공간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현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현대화하지 않으면 교회는 세속화된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도 당대의 문화를 평가, 검증하고, 그 방향을 지시해주는 최종,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땅위에 임한 천국 군대로서 세상 문화를 그렇게 정복한다.

 

예배의 갱신은 예배의 파괴이다?

 

예배는 한번 '복음화'하느라고 진통을 겪은 적이 있다. 신약교회가 율법의 성전제사에서 다락방 예배로 거듭날 때이다. 그 때 당시 사회와 교계에 이것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아마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율법 파괴, 성전 파괴, 제사(예배)파괴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예배가 복음화되는 충격이었다. 그로부터 1500여년 뒤 다시 한번 '복음화'를 위한 진통을 겪는다. 교회가 로마카톨릭의 의식주의화된 예배에서 믿음의 예배로 돌이킬 때였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오직 믿음으로!" 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와, 예식의 공로를 내세우던 로마교회의 심장을 말씀의 검으로 찔러 버렸다. 당시 개혁자들의 갱신 행위들이 로마교회에서 볼 때는 분명 파괴행위에 불과했다. 그렇다! 항상 '복음화''파괴 행위'이다. 그러나 예배의 갱신은 예배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대한 비복음적이고 비신앙적인 사상과 예식 행위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뒤로 교회의 예배는 거듭 거듭 '복음화'해 왔다. 복음이 전파되는 지역에 따라, 또 교회가 세워지는 시대에 따라 교회 예배는 계속 옷을 갈아 입었다. 그것은 철을 따라 자연이 옷을 갈아 입듯, 시대에 따라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듯 매우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만약 그런 '형식들'에 우리의 믿음을 실으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경건한 죄이다. 초대교회의 예배갱신이 그리스도의 재발견으로 인한 것이고, 중세 개혁교회의 예배갱신이 성경의 재발견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면, 현대 교회의 예배갱신은 삶의 정황들을 새롭게 인식하는데서 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예배갱신은 본질과의 싸움이 아니라, 본질을 더 강화 시키고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형식들과 벌이는 싸움이다.

 

전통적 예배가 성경적이고 현대화된 예배는 유행적이다?

 

'전통적'이란 말 자체가 곧 '문화적'이란 말이다. 예배 형식을 전통적으로 고수하겠다는 말은 옛 문화옷을 그대로 입겠다는 뜻이고, 예배 형식을 현대화하겠다는 말은 새 문화로 갈아 입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배를 현대화하려 할 때 '유행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지만, 전통주의라는 것도 역시 큰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하나의 유행적이다. 역사 속에서의 보수와 개혁은 두고두고 갈등하는 존재다.그러나 전통이 되지 않으려는 유행이 없고, 변하지 않으려는 전통은 없다. 사실은 전통이든 유행이든 그 변화에 있어서 '속도''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사이에는 경계선이 없다. 옛 문화와 새 문화의 경계선은 멀리서 보면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사라져 버린다. 엄밀히 말한다면 전통적이란 것은 현대화되어 가는 속도가 '유행적'인 것 보다 조금 늦은 것이고, 유행적이란 말은 그 속도가 '전통적'인 것보다 조금 빠르다는 것일 뿐이다. 그 둘의 차이는 시간과 정도의 차이다. 그러므로 같은 개혁 교회들 안에서의 다양한 예배 형태의 차이는 신학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와 시간의 차이다. 그런 갈등과 혼란들은 자유에서 오는 것이기에 교회를 쇠퇴 시키지 않고 오히려 신선하게 하고 강화시키고 성장시킨다. 그러므로 예배의 갱신을 두려워하거나 소극적으로 대하기 보다는 적극적 긍정적 자세로 그 작업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시작한 것은 교회안에 들어오면 안된다?

 

민감하지만 너무나 상식적인 문제이다. 만약 교회 안에서 이교도나 불신자들이 먼저 사용한 문화(언어, , 예식, 습관등)들을 다 골라내 버려야 한다면 어쩌면 건물도 안남을지 모른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약속을 담기 위해 취하고 있는 '언약형태'도 고대 근동지역 여러 나라들이 사용하던 '계약방식'이 아니던가? 또 그것은 당시대 사람들의 '종교예식'이기도 했다. 할례도 그렇고, 제사들도 그렇다. 구약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들이 사실은 대부분 이방인 중에 이미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문화들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것들에 새 이름을 주시고 새 의미를 부여하시고, 그리고 새 형태로 갱신해 주신다. 하나님의 그일은 세상 역사 속에서 교회를 통해 계속 시행되고 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의 어느 것이든 주권적으로 평가 혹, 취하기도 하시며 버리기도 하신다. 무엇이든 하나님 손안에 잡히면 새 것이 되며 특별한 것이 된다. 십자가는 저주의 사형 ''에 불과했지만, 보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 안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신 최고의 예배 ''이 되었다. 교회가 예배의 ''을 갱신한다는 것은 세상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교회의 사명이라는 맥락속에서 이해되고 또 진행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신앙의 본질을 사람들에게 표현하기위해 세상의 모든 문화를 평가하고, 취하거나, 버리거나, 새로 바꿀 수 있는 권세와 의무를 갖는다.

 

예배는 오직 드리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는 것일까? 물론 '드리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예배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예배의 의미를 좁게 이해한 것이 아닐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도 하고, 예배자끼리 서로 나누기도 하고,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증거하기도 한다. 쉽게 성찬식은 모든 예배 예식의 정점이다. 그런데 성찬식은 드리는 것과 받는 것, 그리고 서로 나누고 증거 하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성찬예식의 중요한 목적은 네가지이다.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감사 기념하고, 그 회복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된 은사들을 서로 나누고, 그리고 증거하는 것이다. 예배는 찬미의 기능과, 연합과 교제, 그리고 세상 문화와 영혼들에 대한 복음선포라는 '선교적 기능'을 갖는다. 실제로 많은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의 예배를 '보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 '와 보라'고 외쳐야 한다면 교회에서 저들에게 보여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영광스런 예배인 것이다. 그러기에 불신자들을 하나님의 예배에 초청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예배에 처음 참석한 불신자도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다. 누가 감히 '당신은 예배자가 될 수 없어!'라고 하면서 저들을 가로 막아 서고 되돌려 보낼 수 있는가?

 

성덕중앙교회는 매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즐긴다.

 

본인이 섬기고 있는 성덕중앙교회에서 매주일 밤마다 3년째 드리고 있는 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간단히 소개한다.

첫째, 온 가족이 드리는 '세대통합'예배이다. 예배를 통해 세대차이가 극복된다. 예배의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앉아서 함께 춤을 추며 노래부르고 함께 설교 듣고 함께 기도 드린다.

둘째, 찬양의 강물에 순서들을 꽃잎처럼 띄운다. 경쾌하고 쉬운 곡조의 찬양들을 주로 부른다. 윈도우즈라는 중창단이 전체 노래를 진행하고, 매주일 돌아가면서 부서별 성가대가 특별 찬양들을 주로 부른다. 한달에 한번씩은 미리암, 마스길등 성인 남녀 중창단이 특송을 부른다. 드럼, 키보드, 피아노, 호른, 클라리넷 서폰, 나팔, 기타등 가능한 많은 악기가 동원된다. 그리고 율동으로 찬양한다. 할아버지부터 유치부 아이까지 온 몸으로 찬양한다. 강대상을 치워 무대로 준비된 강단에는 담임목사와 율동 팀이 선다. 그 아래 강단에는 윈도우즈 노래 팀이 선다.

셋째 단막극을 무대에 올린다. 매주 새로운 주제로 10여분짜리의 단막극을 한다. 생활 주변에서 부딪치는 갈등들을 다룬다. 단막극을 보면서 온 회중의 마음이 강단 위로 다 올라오고, 활짝 열린다. 재미가 있고 공감대가 있다. 삽시간에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회중석에서 박수와 함성과 웃음과 응원 등이 터져 나온다. 단막극은 어른부터 아이까지 모두가 부서별로 돌아가면서 한다. 자기 차례가 돌아올 때 누구 하나 마다하질 않는다.

넷째, 현실의 문제를 치료하는 복음을 설교한다. 단막극이 끝나자 마자 설교가 시작된다. 주제는 단막극이 다룬 것과 똑같다. 단막극을 통해 잘 갈린 밭고랑에 이제 씨만 뿌리면 된다. 그러나 이 설교는 쉬워야 하고, 또 짧은 시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15). 일단 말씀이 선포되면 그 이전의 모든 순서(단막극 등)들을 깨끗이 잊을 정도로, 순식간에 회중을 설교에 몰입시켜야 한다. 설교에 실패하고 예배에 성공할 수 없다.

다섯째, 뜨거운 통성기도가 있다. 아이들이 자기 부모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들으며 함께 기도한다.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기도 드린다. 나라를 위한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 가정과 학업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온 가족이 함께 기도 드리는 것이다. 현실의 여러 문제를 직접 하나님께 내놓은 연습을 부모자녀가 함께 하는 것이다.

여섯째, 수십 명이 예배를 준비한다. 성가대나 안내위원등 일반적인 봉사자들을 빼고도 최소한 50여명이 열심히 뛰어야 예배가 준비되고 진행된다. 그만큼 온 교우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예배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만큼 열의가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다. 그 중 대부분은 우리 자녀들이다. 열심히 예배 준비하는 저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심정을 상상해 보라!

일곱째, 철저히 준비한다. 예배의 진행은 대단히 자연스럽고 부드러워 보인다. 모든 순서가 거의 자동으로 진행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방송 콘티를 짜듯 예배 진행표를 계획하고 연습해서 진행한다. 전체 진행 시간은 70분 정도이다. 다양한 순서이지만 진행속도는 무척 빠른 편이다.

매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끝내고 나면 잔치를 치른 기분이다. 마음에 예배의 감흥이 강물처럼 남아 출렁거린다. 온 가족이 매주일에 한번씩 이런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큰 행복이 아닌가?

요즘 '열린 예배'란 말을 많이 한다. 열린 예배가 되려면 우선 하나님을 향해 열려야 하고, 예배자(세대간에)끼리 서로를 향해 열려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세상 불신자들을 향해서도 열려야 한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도 세상 문화와 영혼들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창조명령(문화명령)을 수행해 나간다. 예배 형식의 갱신은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흑백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와 시간의 문제이다.

16.광명교회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는 교회

함기룡 목사

(그리스도의 신학대학, 신학 대학원)

 

오직 말씀으로

개척 10, 복음을 전하기가 수도권 중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광명시 본 동에서 인근교회의 부러움을 사며 매일매일 새롭게 성장하는 교회가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광명교회, 담임목사 함기룡, 아직 매스컴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씀을 들어본 사람들은 그를 "말씀에 사로 잡힌 목사"로 기억한다.

광명시청을 못가서 광명 1동 후미진 골목 안쪽에 위치한 광명교회는 개척후 2년만에 지어져 연건평 400평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겉모습과는 달리 사치스럽지도 않고 그저 소박한 예배당에서는 매주일마다 3부예배가 드려져 일주일내내 천여명의 성도가 몰려와 은혜받고 새로워져서 돌아간다.

광명교회 함목사의 목회사역은 한마디로 말해 살아있는 운동력을 믿고 그 말씀을 높이며 자랑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광명교회에는 보통교회들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프로그램이 없다. 전도운동도, 총동원 주일같은 것도 없다. 오직 성경읽기와 성경공부 그리고 예배와 찬양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100%이상의 성장을 해온 것이다. 인근의 교회들이 힘들어서 들어서고 나가고 하는 가운데서도 광명교회는 소문없이 성장해온 것이다.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는 함목사를 붙들고 기자는 몇가지만 대답해 달라고 부탁했다.

 

신앙의 배경

 

먼저 함목사 자신의 신앙배경부터 물어 보았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믿음이 싹텄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도 어렸을 때부터 성경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도와야겠다고 느끼게 된 것은 '상주심에 대한 믿음'이 생길때부터였습니다. 즉 주님을 믿는 신앙에서 더 성숙하여 내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섬김의 믿음은 목회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에는 은사가 나타나서 기도해주고 심방해서 위로해주는 정도였지 내가 받은 은사로 사람을 섬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지요. 그러다가 목회를 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 분이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나를 섬겨 주신 것처럼 나도 사람을 섬겨야 겠구나 생각하게 된 것이 제 믿음이 자라게 된 결정적인 계기인 것입니다"

인터뷰에 앞서 참석해 들어본 목회자를 위한 성경공부 모임(매주 목요일 5시부터 광명교회에서 모이고 있다)에서 함목사는 유달리 "십자가의 도"를 강조했다. "십자가의 도"란 한마디로 주님의 고난당하시고 죽으심 즉 섬김의 도를 믿고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부활과 영생과 섬김과 고난을 강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축복을 강조하고 은사와 신유를 강조하면 사람들이 모이지만 "십자가의 도"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일"에는 모두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다. 비단 오늘의 신자들만 그러한가? 아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들도 십자가의 도를 배우기 전에 모두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함목사는 주님을 믿는 진정한 맛은 섬기면서 내짐을 질 뿐 아니라 남의 짐까지 져주는 말씀을 실천을 할 때에 느낄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필자는 아직 불혹의 나이에도 이르지 않는 함목사에게 신학을 하게 된 동기를 물어 보았다. 그가 굳이 신학의 길을 택하고 목사 안수를 받게 되기까지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부터 신학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새벽기도는 빠지지 않고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그중에 곁에서 목회하시는 분들을 보게 되니까 목사님의 사역중에 비성경적인 것 같은 부분도 많아 보이고, 또 목회를 너무 어렵게 하시는 것도 같고, 교회마다 문제 없는 곳도 없고, 그 뿐 아니라 장로님들의 알력은 어떻게 그렇게 많을까요? 그래서 제 어린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믿되 목회는 절대 안해야 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3때 진로를 결정하려는데 하나님의 소명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한다는 마음보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부정적인 생각들 때문에 하지 말아야 겠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그 음성을 거부했지요. 그래서 그런지 그 후에 복막염을 앓게 되었습니다. 3년정도 복막염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3학년은 두 번을 다녔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하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아버렸지요. 그런 후에야 '!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징계였구나'하고 생각게 된 것이지요. 그후 하나님이 저를 구체적으로 인도하셔서 졸업때까지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틈나는대로 주신 은사를 따라 전도하고, 심방하고 또 환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나음을 입었고 그 일로 인해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신학교 졸업반때 였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다져진 영성교회갱신

 

교회갱신협의회에서 함께 사역하고 있기도 한 김태우 목사님은 한국교회와 신평로교회의 갱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의 갱신분야는 먼저, 말씀을 듣고 깨달아 믿음에 이를 뿐 아니라 성도들에게 삶의 목표와 사명감을 일깨워주어서 신앙=의 현장으로 이어지는 일이 일어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문화며 사회변화이다. 둘째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 교회성장은 거룩한 변화이며 거룩한 생명이다. 그러나 성장위주보다는 조화도니 교회의 아름다움을 위한 종합적인 교회성장운동, 곧 갱신이 있어야 시대를 이끌 교회가 될 수 있다. 셋째는 선교운동이다. 선교는 자랑도 아니고 서둘 일도 아니다. 교회의 본래 사명이며 기능이다. 연구하며 협력하는 역사성을 가진 선교의 갱신운동이 필요하다. 넷째, 목회자와 장로들의 갱신이다. 자신은 죽고 교회가 교회되게 해야 한다. 교회 되기 위한 협력과 동반자로 갱신되어야 한다. 다섯째, 지역교회(Local Church)로의 갱신이다. 교회는 어느 일정한 지역에 위치하여 그 지역사회를 떠날 수 없다. 교회의 이름도 지역성을 띠어야 옳다고 생각하며 그 시대적 사명과 배경에 교회는 동반자와 협력자로 책임지는 갱신이 필요하다.” 이상의 여러 비젼과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는 부산지역에서 다시한번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리라고 믿으며 부산을 떠나왔다.

 

14.도림교회

 

은혜, 충성, 사랑 의식으로

신앙의 대를 잇는 공동체

유의웅목사

 

아버지가 있는 교회

도림교회에 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신앙을 느낄 수 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권위가 실추되어간다는 요즘, ‘존경하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행복이 아닐까.

서울 영등포구 도림 2동에 위채한 도림교회 성도들과 그 지역 주민들은 그 행복을 누리고 있다. ‘노인 학교’, ‘소암 장학회’, ‘경로식당등 도림교회에서 주최하는 10여 개의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들은 서로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40여 년 동안 말이다.

오늘의 도림교회는 어제의 유병관 목사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는 도림교회 현 당회장인 유의웅 목사(57)의 아버지이다.

6·25 직후, 이념과 정치의 혼란, 경제적 빈곤의 상황 속에서 유병관 목사는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 조직(64), 국내 처음으로 산업선교를 시작했다. 그전에 성경구락부(55) 등으로 지역 교육 사업을 해오고는 있었지만, 조직을 갖추지는 못했었다. 유병관 목사는 이후 도림유치원을 설립하여 지역에서 처음으로 취학 전 아동교육을 시작하였으며(65), 산업학원 단기교육을 실시하여 기술교육을 통한 직업을 갖게 하였고(68), 도림 새마을학교 상록교실의 문도 열었다(72). 74년 원로 목사로 추대된 유병관 목사는 당시 100만원을 장학기금으로 헌금하면서 28년의 담임목회를 정리했다. 이것이 오늘의 소암장학회의 기초이다.

유병관 목사의 뜻은 그의 셋째 아들 유의웅 목사를 통해 더욱 빛났다. 지역 사회봉사를 위한 목회의 대가 이어진 것이다. 지난 74년 제 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유의웅 목사(이하 유목사)는 지역사회개발교육원(이하 개발원)을 설립하여 지역 사회선교의 전통을 새롭게 발전시켜 나갔다.

개발원은 지난 81215일 설립된 이후 도림어린이집, 신용협동조합, 소암장학회, 노인학교, 한글학교, 시만교육, 지역신문, 공부방, 도서관, 경로식당, 경건절제 등 10여 개 부서로 활동하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개발원의 활동은 도림교회를 총회 주관 제1사회봉사상 교회 부문상’(69회 총회)을 수상하게 했으며, 각종 언론에 오르내리는 결과를 낳게 했다. 개발원은 도림교회를 대표할 만큼 활동의 폭을 넓혔다.

교회 부흥도 이 때 일었다. 무엇보다 사회 봉사를 통해 성도들의 신앙의 마음이 뜨겁게 일었다. ‘화목전도의 열매가 봉사를 통해 열리기 시작했다. 지역 사회 봉사는 분쟁이라는 단어를 도림교회에서 감추어 버렸다. 성전 건축 등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일어 날 수 있는 교회 분쟁의 모습이 사회 봉사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23명의 장로와 담임 목사와의 화목은 이 교회의 자랑거리다. 1천여 명의 성도가 10여년 만에 4천명 이상으로 늘어난 것은 뒤따라 오는 당연한 결과였다. 지역 주민을 생각하는 진정한 마음, 그것이 바로 복음이었다. 지역 사회 봉사는 아버지가 물려준 도림교회의 재산인 것이다.

동네 사람들!

 

도림교회는 항상 시끄럽다. 한글을 배우는 늑깍이 학생의 글읽는 소리, 노인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고 소리, 매일 무료 급식의 식사 소리, 교회 마당에서 농구 등으로 뛰노는 학생들 소리 등 조용할 틈이 없다. 그러나 이 시끄러움을 불평하는 지역 주민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시끄럽게 하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마치 도림교회의 지역사회개발교육원을 자신들의 생활의 한 터로 생각하는 듯하다. 개발원은 과연 어떤 곳인가. 대를 잇는 51년 부자(父子) 목회의 결정체라고 하는 그곳을 들여다보자.

지난 81215일 개원된 개발원의 활동 방향은 정관에 잘 나타나 있다.

본 지역사회개발교육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하여 지역 사회 주민에 대한 교육봉사 및 복지사업을 실시하고, 이로써 주민생활을 향상시키고 복음을 더욱 전파하여 지역주민과 교회가 함께 살아가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개발원은 아버지때부터 해오던 유아원, 장학회, 경로잔치, 지역봉사위로회 등을 지역성에 맞게 3단계로 개편, 확장한 것이다.

기초단계인 1단계(81. 2.84. 12.) 기간에는 청소년 학교라는 야학과, 주부교실, 장수학교 등의 사업을 세웠다. 이것은 8215일부터 9일까지 실시한 지역사회 주민 실태조사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이다.

확립단계인 2단계(85.1.89.12.) 기간에는 1단계의 부족한 부분을 보안, 발전시키는데 주력했다. 장수학교를 노인학교로, 주부교실을 시민대학으로 명칭을 변경, 전문성을 강화했다. 유아원의 경우도 서울시 시범 운영으로 영아반을 신설하여 맞벌이 가정 자녀들을 종일 보육할 수 있어서 지역성에 더 접근한 유아원 운영의 전기를 맞이했다. 소암장학회의 범위가 지역 대학생에게까지 확대한 것도 이때다. 푸름도서관, 지역신문 창간, 한글학교, 사랑의 바자회의 활동도 이 기간에 시작됐다.

확장단계인 3단계(90.1.현재)는 개발원 본 목적에 수행할 능력이 극대화되고 한 지역교회로서의 지역사회를 위한 선교작업이 어느 정도 틀을 이루게 된 시기다. 개발원의 사업도 10여 개로 확장, 현재 운영되고 있다.

도림어린이집은 맞벌이 부부, 영세 가정이 많은 지역 특성상 절실한 것이었다. 취학전 아동을 대상으로 부모가 작장에서 퇴근 후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보호해주고 있다. 현재 90여 명의 아동이 있다. 신용협동조합은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주민들을 도와주는 비영리 민간 협동조합이다. 대출은 물론, 공동 주택사업, 지역문화사업, 공동 구입판매, 농수산물 직거래, 우리 농수산물 먹기 운동 들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 소암장학회는 지난해 말로 기금이 4억원이 넘었다. 이것으로 교회 내외 대학생 40여 명에게 매 학기 장학금이 지급되고 있다.

노인학교는 개발원 사업중 가장 신경쓰고 있는 부분이다. 흔히 빈곤, 질병, 고독, 무료함 등에 시달린다는 노인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이다. 지역 노인들에게 제 3의 인생을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데 큰 목적을 두고 있다. 경로 식당에서 매일 60여 명의 노인에게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 <모랫말이야기>라는 이름의 지역신문은 생활정보 제공 및 상담 등의 역할로 지역운동을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매월 5천부를 발행하고 있다. 이때 문제가 발생했다. 한글을 모르는 주민이 상당히 있다는 사실이다. 글을 모르니 신문의 효과가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한글학교이다. 도림동과 인근 지역 비문해자들을 위해 한글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현재 매녀 150명이 등록하고 있다.

시민교육은 지역주민과 교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교육세미나 사업이다. 도림도서관에서는 11천여권의 장서를 구비하여 주민들에게 무료로 대출해주고 있다. 1일 평균 56권이 대출되고 있다. 방과후 혼자 남는 아이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 도림공부방이다. 아이들의 생활교육이나 숙제 지도 등 가정의 역할을 대신 감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70여 명의 학생들이 이곳을 이용하고 있다. 경건절제운동은 신앙갱신, 선교운동, 복음의 윤리적 실천 등을 목적으로 바르게 살기 운동, 아껴쓰기 운동, 3대 안하기 운동(과소비 안 하기, 쓰레기 안 버리기, 외국 농산물 및 유해음식 안 먹기) 등을 주된 사업으로 하고 있다. 매년 2차례의 알뜰시장과 유기농산물 직거래시장 등을 통해 경건절제 사업을 실천하고 있으며, 수익금이 발생할 경우 전액 구제비로 사용하고 있다.

개발원 사역 17. 몇가지 보안점도 발견됐다. 지속적인 프로그램 개발, 과감한 예산 투자, 시설 확충 등이 당면 과제이다. 이를 위해 사회선교 지도자 양성, 교회 예산 20% 책정 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시설 확충을 위해서는 사회봉사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해놓은 상태다.

 

미래로

 

개발원은 5년마다 지역실태 조사를 해오고 있다. 주민의식과 생활상황을 파악, 효과적인 사역을 하기 위해서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도림교회 성도들의 노력은 끊임없다. 그것이 곧 교회와 자신의 발전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림교회는 이러한 성도들의 손길을 바탕으로 지역 봉사의 사업을 확대할 소망을 갖고 있다. 한국교회 발전과 민족 복음화에도 일익을 감당하고픈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사회봉사를 통한 독특한 선교의 결과를 결코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창립 71주년을 맞는 도림교회는 유의웅 목사를 중심으로 4천여 명의 성도가 화목으로 뭉쳐 미래로 향하고 있다.

 

당회 목회에 성공해야 교회 목회에 성공합니다

 

유의웅 목사의 첫인상은 시골 아저씨였다. ‘아버지에게 물려 받았는지 조금 작아 보이는 양복에 쇼파에 처음 앉아 보이는 듯한 그의 자세는 한마디로 촌스러웠다. 그러나 그와의 대화 속에서 강인하고 세련된 목회 철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은혜의식을 강조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교훈을 성도들에게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죠. 이러한 은혜의식이 충만할 때 자연히 나오는 것이 충성의식입니다. 은혜의 감격이지요. 세번째 사랑의식을 외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말입니다.”

유목사는 대를 잇는 목회를 명예로 생각하고 있다. 선친의 훌륭한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창조적 사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아버지진실한 사람이었다. 또한 유목사는 어머니지혜의 여인으로 표현했다. 그는 진실과 지혜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지역 사회를 위해 쏟은 것이다.

지역 사회를 섬기는 것도 하나의 은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은사 많은 모양입니다.”

유목사는 도림교회를 장수 목회’ ‘화목한 교회’ ‘섬기는 교회로 특징지었다.

특히, 당회원의 화목은 교회의 우리 교회의 자랑입니다. 당회 목회에 성공해야, 교회 목회에 성공한다는 자세로 저는 목회에 임하고 있습니다. ”

귀공자풍의 외모에 서민적 이미지를 풍기는 목회자.얼핏 들으면 어눌한 것 같지만 익살과 재치에 핵심을 놓치지 않고 대중을 사로잡는 언변의 달변가. 온건한 개혁주의자. 서울 도림교회 유의웅목사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강단에서, 각종 세미나에서 23년간의 목회과정을 통해 그는 이러한 트레이드 마크를 자연스럽게 형성했다. 그러나 유목사의 진짜 트레이드마크는 순수 사랑 열정으로 표현된다. 유목사가 순수하다는 것은 그의 인성이 착하고 부지런하며 효심이 지극한데다가 목회가 순수하기 때문이다.사랑은 도림교회의 특징인 사회선교로 나타나고 열정은 어느 자리에서 든 최선을 다하는 전도와 선교의 열의를 보이는 성품을 묘사한 것이다.

유목사는 1942년 고 유병관목사와 안창옥권사(81) 사이의 7남매 가운데 셋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도림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신앙을 물려받은 그는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을 교회에서 배웠다. 그것은 바로 이웃에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끊임없이 베푸는 것이었다.

어릴때 어머님이 목회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권면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목회의 길을 택했지요. 그때 부터 하나님이 많은 것들을 나를 위해 예비했습니다

유목사는 배재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응원단장을 하며 리더십을 키웠고 장신대(61)에 재학중일 때는 홀리 보이스라는 서클을 조직, 정기연주회도 가졌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도서관 옆에 있던 대형 배지를 강나루 한강변에서 직접 실어 나른 모래로 만들기도 했다.그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도와 영성훈련을 쌓았다고 고백했다.

69년 영은교회 전도사로 박조준목사 밑에서 목회수업을 쌓은 그는 공군군목을 마치고 74년 아버지 고 유병관목사의 뒤를 이어 도림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부자세습에 강한 반대를 보이고 있던 교계 풍토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유목사의 커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장로 권사들이 그의 담임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23년동안 1천명의 교인을 5천여명으로 키웠으며 25백평의 넓은 대지위에 730평의 아름다운 교회와 560평의 교육관을 갖추고 지역사회에복음을 전하고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올해로 창립 74주년을 맞은 도림교회는 사회봉사선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교회로 꼽힌다. 도림교회가 운영하는 사회선교분야는 어린이 집, 신용협동조합, 경로식당, 한글학교,노인학교, 소암장학회, 도서관, 주부대학, 공부방 등을 들수 있다.도림교회의 사회봉사선교현장을 보기 위해 매주 전국에서 목회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15.성덕중앙교회

세대를 허무는 예배로 성장하는

김준수 목사

(총신대학 신학 대학원)

 

 

예배형태의 갱신은 가장 신나는 싸움이다.

나는 아직도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 아직도 '예배 형식'의 갱신에 대해 '신앙적'인 열심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식'은 말 그대로 '형식'일 뿐이다. 어떤 '본질'이나 '내용''형식'의 목에 잡아맬 때, '의식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이때의 '의식'들은 '내용'이나 '본질'들을 압도하고 변질시킨다.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그런 '의식주의자'들로 부터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태어났다. "개혁은 계속 개혁되야 한다"란 우리의 구호는 분명 그런 '형식'의 지속적인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혁교회는 '형식'의 계속적인 갱신을 통해서 자꾸만 가려지려는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고 또 그것을 확장, 강화시켜 나간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교회 예배는 시간에 따라, 공간에 따라 그렇게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의 모든 문화를 주권적으로 평가하고, 수용하거나 버리거나 갱신해 나간다. 특별히 교회는 계속적인 예배갱신을 통해 세상 문화를 평가하고 영향을 주고 개량하면서 정복해 나간다. 이것은 교회가 해야 하고 또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신나는'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배갱신은 '편견의 장애물' 때문에 방해를 받고 있다.

 

성경은 라틴어로만 쓰여져야 한다?

로마카톨릭이 한 때 신앙처럼 고집했던 것이다. 성경은 오직 라틴어로만 쓰여져야 했다. 그들에게는 라틴어만이 거룩했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라틴어 성경을 자기네 나라 언어로 번역하려다가 잡혀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저들의 죄목은 '불경죄'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종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 자기 평생을 바치려는 선교사들이 구름떼처럼 일어나고 있다. 라틴어외의 언어(형식)로 성경(본질)을 번역하면 성경 파괴인가? 이젠 더 이상 아무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조차 않는다. 이미 성경언어의 '형식' 파괴(?)는 상식이 되어 버렸다. 현재 우리가 옛날에 번역된 한글개역 성경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 번역만 거룩해서가 아니다. 아직 새롭게 번역할 여건과 실력이 안되기 때문이다. '현대화'된 번역이 나올 것으로 기대되지만, 때늦은 감이 많다. 시대에 뒤 떨어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 때문에 진리에서 멀어지고 돌아서버린 새 세대의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찬송가에 없는 노래는 부를 수 없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보수적인 교회들 안에서 쉽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이다. 예배 중에는 절대 '복음성가'를 부를 수 없었다. '복음성가'는 거룩한 예배에 어울리지 않는 '불경건한 찬송'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졸지에 '복음'까지 불경건해진 것이다. 조금 더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찬송가 중에서도 앞부분에 있는 예배용 '찬양곡'들만 부른다. 그리고 그보다 더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아예 찬송가를 버리고 시편만을 새로 작곡해서 부른다. 하나님을 더 아름답게 섬기려는 것은 아주 잘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들이 선택한 '표현방식'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아주 잘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본질화'하고 '교리화'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면 불필요한 분쟁만 낳을 뿐이다. 어떤 교회가 어떤 형식의 곡으로 된 노래를 부를 것이냐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서 있는 시대와 지역과 삶의 정황 속에서 선택하고 결정할 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고 또 지금까지 그래 왔다. 따라서 그런 결정은 또한 임시적일 수밖에 없다. 음악가로서도 하나님은 얼마나 탁월하시고 풍성하신가! 그러나 인간의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음악은 제한 받으신다. '찬송'의 대상과 내용 등은 바꿀 것이 없다. 그러나 예배의 '찬송가'는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부르는 사람들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찬송'은 불변하나 '찬송가'는 늘 변한다. 이렇게 교회는 예배용 찬송가를 통해 세상 음악을 평가하고 승화시키고 선도한다.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현대화는 세속화이다?

예배의 형태를 현대화한다는 것은 곧 세속화를 의미하는가? 나는 현대화와 세속화를 이렇게 구별하고 싶다. 즉 현대화는 교회가 주권적으로 세상의 문화를 정복하는 것이고, 세속화는 교회가 피동적으로 세상의 문화에 정복당하는 것이다. 현대화는 교회의 본질적인 것들이 세상 문화로 옷입는 것이고, 세속화는 세상의 본질적인 것들이 교회의 문화로 옷입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현대화에 성공한다는 말은 세상 문화를 충분히 평가하고 심판하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드는 일에 성공한다는 말도 된다. 이러한 교회의 현대화를 말씀의 성육화에 비유해 설명할 수 있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그 말씀은 '육신'(지금, 여기의 문화)을 입을 때 비로소 '복음'이 된다. 그리고 '복음'이 되어야 사람들이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다. 교회의 현대화는 그 말씀이 '지금', '여기'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들려지는 '복음'이 되기 위해 '성육화'(문화화)하는 한 과정이다. 모든 '표현방식'은 그렇게 '시대성''공간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현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현대화하지 않으면 교회는 세속화된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도 당대의 문화를 평가, 검증하고, 그 방향을 지시해주는 최종,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땅위에 임한 천국 군대로서 세상 문화를 그렇게 정복한다.

 

예배의 갱신은 예배의 파괴이다?

 

예배는 한번 '복음화'하느라고 진통을 겪은 적이 있다. 신약교회가 율법의 성전제사에서 다락방 예배로 거듭날 때이다. 그 때 당시 사회와 교계에 이것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아마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율법 파괴, 성전 파괴, 제사(예배)파괴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예배가 복음화되는 충격이었다. 그로부터 1500여년 뒤 다시 한번 '복음화'를 위한 진통을 겪는다. 교회가 로마카톨릭의 의식주의화된 예배에서 믿음의 예배로 돌이킬 때였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오직 믿음으로!" 개혁자들은 인간의 의와, 예식의 공로를 내세우던 로마교회의 심장을 말씀의 검으로 찔러 버렸다. 당시 개혁자들의 갱신 행위들이 로마교회에서 볼 때는 분명 파괴행위에 불과했다. 그렇다! 항상 '복음화''파괴 행위'이다. 그러나 예배의 갱신은 예배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대한 비복음적이고 비신앙적인 사상과 예식 행위들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 뒤로 교회의 예배는 거듭 거듭 '복음화'해 왔다. 복음이 전파되는 지역에 따라, 또 교회가 세워지는 시대에 따라 교회 예배는 계속 옷을 갈아 입었다. 그것은 철을 따라 자연이 옷을 갈아 입듯, 시대에 따라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듯 매우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만약 그런 '형식들'에 우리의 믿음을 실으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경건한 죄이다. 초대교회의 예배갱신이 그리스도의 재발견으로 인한 것이고, 중세 개혁교회의 예배갱신이 성경의 재발견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면, 현대 교회의 예배갱신은 삶의 정황들을 새롭게 인식하는데서 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예배갱신은 본질과의 싸움이 아니라, 본질을 더 강화 시키고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형식들과 벌이는 싸움이다.

 

전통적 예배가 성경적이고 현대화된 예배는 유행적이다?

 

'전통적'이란 말 자체가 곧 '문화적'이란 말이다. 예배 형식을 전통적으로 고수하겠다는 말은 옛 문화옷을 그대로 입겠다는 뜻이고, 예배 형식을 현대화하겠다는 말은 새 문화로 갈아 입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배를 현대화하려 할 때 '유행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지만, 전통주의라는 것도 역시 큰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하나의 유행적이다. 역사 속에서의 보수와 개혁은 두고두고 갈등하는 존재다.그러나 전통이 되지 않으려는 유행이 없고, 변하지 않으려는 전통은 없다. 사실은 전통이든 유행이든 그 변화에 있어서 '속도''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사이에는 경계선이 없다. 옛 문화와 새 문화의 경계선은 멀리서 보면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사라져 버린다. 엄밀히 말한다면 전통적이란 것은 현대화되어 가는 속도가 '유행적'인 것 보다 조금 늦은 것이고, 유행적이란 말은 그 속도가 '전통적'인 것보다 조금 빠르다는 것일 뿐이다. 그 둘의 차이는 시간과 정도의 차이다. 그러므로 같은 개혁 교회들 안에서의 다양한 예배 형태의 차이는 신학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와 시간의 차이다. 그런 갈등과 혼란들은 자유에서 오는 것이기에 교회를 쇠퇴 시키지 않고 오히려 신선하게 하고 강화시키고 성장시킨다. 그러므로 예배의 갱신을 두려워하거나 소극적으로 대하기 보다는 적극적 긍정적 자세로 그 작업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시작한 것은 교회안에 들어오면 안된다?

 

민감하지만 너무나 상식적인 문제이다. 만약 교회 안에서 이교도나 불신자들이 먼저 사용한 문화(언어, , 예식, 습관등)들을 다 골라내 버려야 한다면 어쩌면 건물도 안남을지 모른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이 약속을 담기 위해 취하고 있는 '언약형태'도 고대 근동지역 여러 나라들이 사용하던 '계약방식'이 아니던가? 또 그것은 당시대 사람들의 '종교예식'이기도 했다. 할례도 그렇고, 제사들도 그렇다. 구약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들이 사실은 대부분 이방인 중에 이미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 문화들에 대해서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것들에 새 이름을 주시고 새 의미를 부여하시고, 그리고 새 형태로 갱신해 주신다. 하나님의 그일은 세상 역사 속에서 교회를 통해 계속 시행되고 있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의 어느 것이든 주권적으로 평가 혹, 취하기도 하시며 버리기도 하신다. 무엇이든 하나님 손안에 잡히면 새 것이 되며 특별한 것이 된다. 십자가는 저주의 사형 ''에 불과했지만, 보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 안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신 최고의 예배 ''이 되었다. 교회가 예배의 ''을 갱신한다는 것은 세상 문화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교회의 사명이라는 맥락속에서 이해되고 또 진행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신앙의 본질을 사람들에게 표현하기위해 세상의 모든 문화를 평가하고, 취하거나, 버리거나, 새로 바꿀 수 있는 권세와 의무를 갖는다.

 

예배는 오직 드리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는 것일까? 물론 '드리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예배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예배의 의미를 좁게 이해한 것이 아닐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도 하고, 예배자끼리 서로 나누기도 하고,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증거하기도 한다. 쉽게 성찬식은 모든 예배 예식의 정점이다. 그런데 성찬식은 드리는 것과 받는 것, 그리고 서로 나누고 증거 하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성찬예식의 중요한 목적은 네가지이다.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감사 기념하고, 그 회복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된 은사들을 서로 나누고, 그리고 증거하는 것이다. 예배는 찬미의 기능과, 연합과 교제, 그리고 세상 문화와 영혼들에 대한 복음선포라는 '선교적 기능'을 갖는다. 실제로 많은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의 예배를 '보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 '와 보라'고 외쳐야 한다면 교회에서 저들에게 보여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영광스런 예배인 것이다. 그러기에 불신자들을 하나님의 예배에 초청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예배에 처음 참석한 불신자도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다. 누가 감히 '당신은 예배자가 될 수 없어!'라고 하면서 저들을 가로 막아 서고 되돌려 보낼 수 있는가?

 

성덕중앙교회는 매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즐긴다.

 

본인이 섬기고 있는 성덕중앙교회에서 매주일 밤마다 3년째 드리고 있는 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간단히 소개한다.

첫째, 온 가족이 드리는 '세대통합'예배이다. 예배를 통해 세대차이가 극복된다. 예배의 커뮤니케이션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앉아서 함께 춤을 추며 노래부르고 함께 설교 듣고 함께 기도 드린다.

둘째, 찬양의 강물에 순서들을 꽃잎처럼 띄운다. 경쾌하고 쉬운 곡조의 찬양들을 주로 부른다. 윈도우즈라는 중창단이 전체 노래를 진행하고, 매주일 돌아가면서 부서별 성가대가 특별 찬양들을 주로 부른다. 한달에 한번씩은 미리암, 마스길등 성인 남녀 중창단이 특송을 부른다. 드럼, 키보드, 피아노, 호른, 클라리넷 서폰, 나팔, 기타등 가능한 많은 악기가 동원된다. 그리고 율동으로 찬양한다. 할아버지부터 유치부 아이까지 온 몸으로 찬양한다. 강대상을 치워 무대로 준비된 강단에는 담임목사와 율동 팀이 선다. 그 아래 강단에는 윈도우즈 노래 팀이 선다.

셋째 단막극을 무대에 올린다. 매주 새로운 주제로 10여분짜리의 단막극을 한다. 생활 주변에서 부딪치는 갈등들을 다룬다. 단막극을 보면서 온 회중의 마음이 강단 위로 다 올라오고, 활짝 열린다. 재미가 있고 공감대가 있다. 삽시간에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회중석에서 박수와 함성과 웃음과 응원 등이 터져 나온다. 단막극은 어른부터 아이까지 모두가 부서별로 돌아가면서 한다. 자기 차례가 돌아올 때 누구 하나 마다하질 않는다.

넷째, 현실의 문제를 치료하는 복음을 설교한다. 단막극이 끝나자 마자 설교가 시작된다. 주제는 단막극이 다룬 것과 똑같다. 단막극을 통해 잘 갈린 밭고랑에 이제 씨만 뿌리면 된다. 그러나 이 설교는 쉬워야 하고, 또 짧은 시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15). 일단 말씀이 선포되면 그 이전의 모든 순서(단막극 등)들을 깨끗이 잊을 정도로, 순식간에 회중을 설교에 몰입시켜야 한다. 설교에 실패하고 예배에 성공할 수 없다.

다섯째, 뜨거운 통성기도가 있다. 아이들이 자기 부모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들으며 함께 기도한다.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기도 드린다. 나라를 위한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 가정과 학업과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온 가족이 함께 기도 드리는 것이다. 현실의 여러 문제를 직접 하나님께 내놓은 연습을 부모자녀가 함께 하는 것이다.

여섯째, 수십 명이 예배를 준비한다. 성가대나 안내위원등 일반적인 봉사자들을 빼고도 최소한 50여명이 열심히 뛰어야 예배가 준비되고 진행된다. 그만큼 온 교우가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예배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만큼 열의가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다. 그 중 대부분은 우리 자녀들이다. 열심히 예배 준비하는 저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심정을 상상해 보라!

일곱째, 철저히 준비한다. 예배의 진행은 대단히 자연스럽고 부드러워 보인다. 모든 순서가 거의 자동으로 진행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방송 콘티를 짜듯 예배 진행표를 계획하고 연습해서 진행한다. 전체 진행 시간은 70분 정도이다. 다양한 순서이지만 진행속도는 무척 빠른 편이다.

매주일밤 '행복한 예배'를 끝내고 나면 잔치를 치른 기분이다. 마음에 예배의 감흥이 강물처럼 남아 출렁거린다. 온 가족이 매주일에 한번씩 이런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큰 행복이 아닌가?

요즘 '열린 예배'란 말을 많이 한다. 열린 예배가 되려면 우선 하나님을 향해 열려야 하고, 예배자(세대간에)끼리 서로를 향해 열려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세상 불신자들을 향해서도 열려야 한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도 세상 문화와 영혼들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창조명령(문화명령)을 수행해 나간다. 예배 형식의 갱신은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흑백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와 시간의 문제이다.

16.광명교회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는 교회

함기룡 목사

(그리스도의 신학대학, 신학 대학원)

 

오직 말씀으로

개척 10, 복음을 전하기가 수도권 중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광명시 본 동에서 인근교회의 부러움을 사며 매일매일 새롭게 성장하는 교회가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광명교회, 담임목사 함기룡, 아직 매스컴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씀을 들어본 사람들은 그를 "말씀에 사로 잡힌 목사"로 기억한다.

광명시청을 못가서 광명 1동 후미진 골목 안쪽에 위치한 광명교회는 개척후 2년만에 지어져 연건평 400평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겉모습과는 달리 사치스럽지도 않고 그저 소박한 예배당에서는 매주일마다 3부예배가 드려져 일주일내내 천여명의 성도가 몰려와 은혜받고 새로워져서 돌아간다.

광명교회 함목사의 목회사역은 한마디로 말해 살아있는 운동력을 믿고 그 말씀을 높이며 자랑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광명교회에는 보통교회들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프로그램이 없다. 전도운동도, 총동원 주일같은 것도 없다. 오직 성경읽기와 성경공부 그리고 예배와 찬양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100%이상의 성장을 해온 것이다. 인근의 교회들이 힘들어서 들어서고 나가고 하는 가운데서도 광명교회는 소문없이 성장해온 것이다.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는 함목사를 붙들고 기자는 몇가지만 대답해 달라고 부탁했다.

 

신앙의 배경

 

먼저 함목사 자신의 신앙배경부터 물어 보았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믿음이 싹텄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도 어렸을 때부터 성경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도와야겠다고 느끼게 된 것은 '상주심에 대한 믿음'이 생길때부터였습니다. 즉 주님을 믿는 신앙에서 더 성숙하여 내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섬김의 믿음은 목회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에는 은사가 나타나서 기도해주고 심방해서 위로해주는 정도였지 내가 받은 은사로 사람을 섬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지요. 그러다가 목회를 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 분이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나를 섬겨 주신 것처럼 나도 사람을 섬겨야 겠구나 생각하게 된 것이 제 믿음이 자라게 된 결정적인 계기인 것입니다"

인터뷰에 앞서 참석해 들어본 목회자를 위한 성경공부 모임(매주 목요일 5시부터 광명교회에서 모이고 있다)에서 함목사는 유달리 "십자가의 도"를 강조했다. "십자가의 도"란 한마디로 주님의 고난당하시고 죽으심 즉 섬김의 도를 믿고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부활과 영생과 섬김과 고난을 강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축복을 강조하고 은사와 신유를 강조하면 사람들이 모이지만 "십자가의 도"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일"에는 모두 도망가 버리기 때문이다. 비단 오늘의 신자들만 그러한가? 아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들도 십자가의 도를 배우기 전에 모두 주님을 배반하고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함목사는 주님을 믿는 진정한 맛은 섬기면서 내짐을 질 뿐 아니라 남의 짐까지 져주는 말씀을 실천을 할 때에 느낄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필자는 아직 불혹의 나이에도 이르지 않는 함목사에게 신학을 하게 된 동기를 물어 보았다. 그가 굳이 신학의 길을 택하고 목사 안수를 받게 되기까지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부터 신학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새벽기도는 빠지지 않고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그중에 곁에서 목회하시는 분들을 보게 되니까 목사님의 사역중에 비성경적인 것 같은 부분도 많아 보이고, 또 목회를 너무 어렵게 하시는 것도 같고, 교회마다 문제 없는 곳도 없고, 그 뿐 아니라 장로님들의 알력은 어떻게 그렇게 많을까요? 그래서 제 어린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믿되 목회는 절대 안해야 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3때 진로를 결정하려는데 하나님의 소명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해야 한다는 마음보다 어렸을 때부터 품었던 부정적인 생각들 때문에 하지 말아야 겠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그 음성을 거부했지요. 그래서 그런지 그 후에 복막염을 앓게 되었습니다. 3년정도 복막염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3학년은 두 번을 다녔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하고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깨끗이 나아버렸지요. 그런 후에야 '!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징계였구나'하고 생각게 된 것이지요. 그후 하나님이 저를 구체적으로 인도하셔서 졸업때까지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틈나는대로 주신 은사를 따라 전도하고, 심방하고 또 환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나음을 입었고 그 일로 인해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신학교 졸업반때 였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다져진 영성

올해 39, 아직은 원숙한 중년의 모습보다는 청년의 기개가 더 느껴지는 함목사, 어디서부터 그런 믿음과 말씀이 샘솟듯이 나오는지 궁금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새벽기도에 나가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새벽기도 한 번 빠진적이 없는 신앙, 그리고 성경은 100독이상 했고, 시편과 잠언은 도대체 얼마나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없다는 함목사, 우리는 그에게서 인간적인 모든 요소를 배제한 채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그 말씀에만 의지하는 참 목자를 보게된다. 특히 광명교회는 시간시간마다 칠판 설교를 한다. 거의 두시간 정도 진행되는 설교동안 한 번도 성경책을 펴들지 않고 오직 기억에만 의지한채 설교 한편당 100여구절의 성경을 구슬꿰듯이 꿰어 나가며 설교한다. 듣는 이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비밀이 풀려나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필자는 다시한번 교회개척때의 이야기와 목회철학을 물어보았다.

"교회 개척도 하나님의 강권하심 때문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길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의 허물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차츰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주님의 심정을 깨닫게 된것이지요. 영광의 보좌에 계셨던 주님도 나를 위하여 섬기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어 주셨는데 내가 섬기고 고난당하고 죽음에 넘기우는 것을 무서워하고 싫어한다면 그것이 어찌 믿음일까 보냐 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왜냐면 사실 은사로 사람고쳐주고 다니면서 전도하고 성경가르치면 대접은 더 잘받거든요. 그러나 목회는 인내하지 않거나 섬기지 않으면 열매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처음 병고침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청 건너편에서 개척되었고, 개봉동으로 잠시 이전했다가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따라 지금 이곳에 와서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10년이 되었는데 정말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10년을 돌이켜 보면서 왜 이렇게 우리교회가 많은 축복을 받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해답을 주의법을 사랑해서 읽는것과 가르치는 것과 짐을 지는 순종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광명교회의 새신자 교육은 특이하다. 새신자로 등록하면 특별한 새신자 공부를 시키는 것 아니라 시편과 잠언부터 읽게 한다. 이는 시편 19편에 있는데로 하나님의 법이 영혼을 소생케하고,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교육의 방법상으로도 거부감이 없으며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잇점외에 말씀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닫게 해준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기도를 너무 강조해왔다. 그결과 신비주의와 기복주의가 속출하게 되었는데 이를 치료하고 교정하는 일은 성경읽기를 시작하는 일이라고 함기룡 목사는 힘주어 말한다.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할 때 비가오고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는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 읽기는 기본적이며 쉬운 영성운동

 

필자는 함목사에게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질문해 보았다.

"제 자신부터 은사만 강조하고 그것을 사용할 때는 조금 교만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외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러한 신앙은 믿음의 초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울 사도도 믿음의 역사보다 사랑의 수고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보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실 성경중심으로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어디있겠습니까마는 저는 더더욱이 강조합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교회에서 은사받고 교만하다가 넘어진 사람도 우리교회에 오면 안정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경에 이미 모두 다 말씀해 놓으셨기 때문이지요. 유혹도 이기고 자신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하나님말씀을 두기보다는 세상의 철학,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지요. 그게 다 속는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주일동안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앞에서는 신앙을 잘 시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원수앞에서도 시인하라고 했는데 이 입술의 고백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찬미의 제사라고 했는데 이게 잘 안되거든요, 저도 옛날에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자주 읽고, 또 마음 그대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의 죽음이 나타나는 것은 말씀의 경륜대로 하자면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서 이거든요. 그러니까 감당해야 할 고난이나 짐이 내게 오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 뒤에 영광과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엔 이 비밀을 몰라서 성도들을 때로는 미워하고 고난을 비켜 갈려고 꾀를 많이 부렸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그 비밀을 깨닫게 된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목회가 참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함목사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순리이고, 또 그것이 능력이라고 재삼 강조한다. 끝으로 광명교회의 향후 비젼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저는 우리교회의 비젼은 마태복음 28:19-20에서 찾고져 합니다. 특히 그 중에서 '가르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 성경책은 여러 종류가 많이 나와 있지만 그것을 매일매일 읽고 낭독하는 신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 먼저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며'라고 말씀하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그 가운데 기록한 데로 다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다음에 여리고성을 7일동안 도는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기도가 먼저냐 말씀이 먼저냐고 묻는다면 성경은 기도보다 말씀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매자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지혜자는 듣기를 좋아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듣는 가운데에 내마음에 그 말씀이 부딪히면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길을 이미 성경에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즐겨 읽는자가 평강을 얻고 축복을 얻는 것입니다. 광명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미국이든 중국이든 가리지 않고 가서 가르칠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이 때를 위해 가르치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이시대의 잣대로 보면 광명교회는 좀 별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성경의 잣대로 본다면 성경의 원리에 더 충실하게 가까운 교회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광명교회가 더욱 부흥성장하여 앞으로 한국교회의 말씀 사역에 더 큰 도전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 흔하디 흔한 교회성장 프로그램 하나 없이 오직 성경읽기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개척10년만에 600여명이 회집하는 기적을 일으킨 광명교회 위에 하나님의 더큰 축복이 넘치게 될 것을 기대해 본다.

 

 

 

 

17.분당 샘물교회

 

순교자의 믿음과 영성으로 현대에 도전하는

박은조 목사

(고려신학대-대학원-영국 런던바이블칼리지 졸업. 서울 영동교회 담임목사 현재 분당샘물교회 담임목사 고신목회자협의회 공동회장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운영위원)

 

 

도덕적인 본모습으로...고신교단 새신앙 추구

 

장로교 고신교단은 개신교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으로 꼽힌다. 일제말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던 인사들에 의해 해방 후 만들어진 고신교단은 '하나님 앞에 살자'는 모토처럼 대외적 활동보다 성경 정신 에 충실한 복음적 삶을 추구한다.

사진설명 : "땅 사서 예배당

짓는 교회가 아니고 지역사

회에 봉사하는 교회를 만들

고 싶다"고 말하는 박은조 목사.

 

그러나 80년대 이후 고신교단 내부에서는 무엇이 복음적인 삶인가 에 대한 성찰이 제기되고 새로운 신앙 형태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 나고 있다. 분당샘물교회 박은조(47) 목사는 그런 흐름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박은조 목사는 지난해말까지 17년간 봉직했던 서울영동교회 담임목 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박 목사는 70년대 후반 손봉호 서울대교수가 주도해서 평신도교회로 출범한 서울영동교회의 첫번째 담임목사로 시 무하며 고신교단 교회에 대한 외부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고신 교단 역시 종교개혁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은 세상을 섬기고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단이 그동안 폐 쇄적으로 보였지만 이제는 교회가 사회의 도덕성을 담보하는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예산의 절반을 지역을 위해

 

서울영동교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헌금의 절반 이상을 교회 가 아니라 외부를 위해서 쓴다는 점. 지난 97년의 경우 20억원의 헌금 중 11억원을 선교, 구제, 장학 등에 사용했다. 또 교인들은 혼자 사는 노인을 돌보는 등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에 열심이고 기독교윤리실천운 동, 밀알선교단 등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사회운동 단체에도 적극 참 여했다.

 

서울영동교회는 장애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전북 장수에 장애 인을 위한 11만평의 농장을 조성하는 등 장애인들에게도 관심을 쏟았 다. 또 북한돕기에도 적극 나서 평양의 병원 건립, 나진-선봉지구의 제약공장 건립에 적극 참여했고 탈북자들의 정착을 위해 강원도 홍천 에 '고향마을'이란 농장을 조성 중이다.

 

 

샘물교회의 분당시대

 

박은조 목사는 지난해 10월 스스로 서울영동교회를 떠나 분당에 샘물교회를 개척했다. 상가 건물을 빌어 서울영동교회 분당지역 교인 200 여명과 함께 시작한 샘물교회는 6개월만에 1000명이 출석하는 중형 교회로 자리잡았다.

"한 교회에 너무 오래 있으니까 영적인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이 50이 넘기 전에 변화를 시도해 보고 싶었습니다."박은조 목사는 "학교를 세워서 기독교적 교육을 실시하고 지역주민에 시설도 개방하는 새로운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필자는 향후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성장은 목회자가 평신도를 얼마나 잘 동원하고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볼 때에 평신도를 활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역조직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로버트 로건박사는 다가오는 21세기의 교회는 구역교회(thecellgrou pchu -rch)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도 이 말에 동의 한다. 여기서 구역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에서 모이는 구역예배이상의 것이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소그룹, 혹은 자석집 단(magneticgroup)을 의미한다. 새 시대의 새 교회는 감옥과 같이 사람들을 교회당에 가두어두는 교회가 되지말고 중앙집권에 서 탈피하여 현장목회로 분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분당샘물교회가 지향하고자 하는 교회도 이러한 교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구역은 인간적 조직이상의 영적 생명체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구역교회는 바로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사도행전 242절에서 47절에 나오는 신약교회는 건강한 구역의 7대 기능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교육---가르침을 배우고 적용했다(42)

교제---다 함께 떡을 떼며 나누었다(42,46)

예배---성찬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 광을 돌렸다(42,47)

기도---기도하기에 힘썼다(42)

능력---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43)

봉사---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다(45)

전도---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다(47)

"고삐를 풀어라"

필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효과적인 구역 혹은 소그룹을 가지려면 소그룹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분당과 같은 문화률이 높은 신흥도시는 상대적으로 개인주의 가 강하므로 소그룹을 통하여 교인들간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해놓지 않으면 결국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나 현대인들은 익명성을 원하며 대형교회를 찾기 때문에 건강한 교회를 위헤서는 소그룸은 필수적이다. 소그룹은 교회 속의 교회이다. 소우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소그룹만 잘 활용하면 교회의 본질적 특성을 체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소그룹은 또한 자석집단으로서 다양성과 수용성을 살려 모든 종류의 사람을 다 끌어들일 수 있고 포함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성별 나이 학력 경제 경험 직업 등에 따라서 얼마든지 독특한 자아정체를 가진 소그룹을 확장시켜 나 갈 수 있다. 살아있는 소그룹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포분열과 신진대사 가 원할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

다중리더십 필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당 샘물교회를 보며 생각하는 것은 다중리더쉽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소그룹 혹은 구역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다중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즉 전체를 관장하는 구역장(leader)외에도 회원들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목양자(shepherd)가 있어야 하고, 비신자들을 끌어오는 은사를 가진 전도자(evangelist)가 있어야 하며, 장소와 음식을 제공하는 초청자(host)가 필요하고 또한 말씀을 가르치는 인도자(teacher)가 함께 있어 일종의 팀 사역이 가능해야 건강한 구역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맡게되면 항상 탈진하고 지쳐서 할 수 없이 일하는 형식적 리더십밖에 남지 않게 된다.

구역 활성화의 열쇠는 올바른 지도자의 선발과 훈련에 있다. 구역지도자를 위한 교육은 이른바 도제식 양육(appre -nticeship)이 성서적이다. 목회자가 생활과 사역가운데에서 함께 거하고 부딪치며 가르치는 교육이 실제적이고 효과적이다. 구역 지도자를 선발할 때에는 세 가지 자격, 곧 성품 경험 기술을 살펴야 한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영적 성품이 가장 중요하다. 경험과 소질도 중요하지만 우 선하는 것은 성품이 되어야 한다. 경험과 소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충될 수 있지만 좋은 성품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으면 쉽게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역은 말 그대로 세포단위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세포분열이 일어나서 복제되고 재생산되어야 그 존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성도 수 1백명 당 6개 이상의 소그룹이 형성되고 가급적 모든 성도가 다 참 여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회에서 전체성도 의 25-30정도만이 구역 혹은 소그룹에 가입되어 있는데 이 수치를 70-80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성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구역을 성도들의 동질성, 예를 들어 직업이나 나 이,혹은 은사에 따라 구분하는 새로운 시도도 필요하다.

이러한 일련의 보충이 있을 때 분당샘물교회는 한국사회와 교계가 요구하는 그러한 교회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2001! 새로운 세기가 시작하는 2001년이 불과 수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격동과 변화의 20세기를 살아왔습니다.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을 시작으로 하여 20세기는 이상 사회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신념이 이 지구촌을 전쟁의 포화 속으로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20세기를 살았던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그 공산주의자들의 이념 전쟁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산주의의 망령이 걷히자 마자 옛날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는 인종과 종교가 얽힌 대 살육 전쟁이 몸부림치도록 처절하게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심슨 재판의 판결 결과가 보여주듯이 흑백간에 그리고 소수 민족과 주류 민족 사이에 심각한 인종간의 갈등에 시달릴 것이 분명합니다. 앞으로 인종과 종교 문제는 인류에게 심각한 갈등과 문제를 던져 줄 것입니다. 또 처처에서 기근과 홍수로 인한 죽음의 소식이 들려 오고, 이상 기온이 전 지구촌에 엄습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구촌의 위기는 이러한 외부적 환경에만 감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부적으로 현대인들은 전통적 가치 체계의 붕괴라는 정신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특별히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하지 않으며 공공연히 교회를 비난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나태하고 게으르며, 일부는 교회를 떠나가기도 하는 배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잘못된 가치와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고 가는 거짓 선생들, 거짓 교훈들, 거짓 가치관과 사상들이 만연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모습은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지구촌의 마지막 날이 가까이 다가올 때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었던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는 21세기에는 과연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어떠한 변화들이 우리 지구촌에 일어날 것이며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크리스천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21세기의 전망

 

다가오는 21세기를 맞이하는 이 지구촌은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 서 있습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지구촌에는 창조로부터의 변화에 버금갈 정도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쳐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오는 21세기의 것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이러한 변화의 폭이나 속도가 줄어들는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과학 문명 (Technology) 입니다. 현대인들은 누군가가 하나의 이념(Ideology)이라고 까지 불렀던 이 과학문명을 통하여---플라톤이 철학자들의 지배를 통하여, 모어가 유토피아를 통해서,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이 공산 사회를 통하여 꿈꾸었던 이상 사회를 이루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학 문명은 지구촌과 인간의 생활을 빠르고, 편하며, 안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작고, 간편하며, 편리하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도달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고, 단축시켜 왔습니다. 모든 것들은 인간의 노동에 의해 창조하였지만 지금은 기계가 만들어 내고, 인간은 기계를 조작하거나 기계를 감리, 감독하는 일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컴퓨터 하나만 하더라도 옛날에는 집채만한 컴퓨터를 가지고 일을 했지만 지금은 노트북이라고 하는 작은 컴퓨터로 대체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 문명에 의해 주도되는 엄청난 변화 앞에서 인간의 생활 구조와 사회구조 역시도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 속에 있었습니다.

 

정보 시대의 기계문명과 서비스 산업의 비대화

 

엘빈 토플러는 이 시대가 제3의 물결이라는 정보 시대 속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보 시대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지식들을 축적해 놓았다가 그것을 필요할 때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 정보 시대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옛날 컴퓨터 앞에서 책의 목록이나 찾던 시대에서 이제는 CD- ROM에 저장된 정보를 빼내어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보 혁명의 큰 발전 중에 하나가 Internet이라는 정보망입니다. 이를 통하여 세계가 하나의 Commu -nication-net로 묶여지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쉽게 말해 기계가 무엇을 인지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컴퓨터를 통하여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공지능을 발전시키고 있는 기계문명은 인간의 노동 형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과거 땀을 흘리며 일하던 노동자들은 점점 기계에 의해 대체되어 왔고 인간은 이 기계들을 감독하고 감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계 의존도는 나날이 높아 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저 기계만 작동시키면, 그 기계가 알아서 모든 일을 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기계에 의한 노동은 기계에 의한 인간의 지배와 함께 인간의 기능상실이나, 혹은 인간의 정신적인 쇠퇴를 불러올 위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계로 대체된 후 인간의 노동인구는 어디로 갈 것인가? 현재로는 대부분 서비스 직종으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21세기에 산업 구조는 1차 산업(농업과 어업등)2차 산업(기계 산업) 인구가 축소되는 반면, 3차 산업 (금융, 세일즈, 가게 점원등 서비스 업) 종사자가 비대해 질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 보십시오. 실제로 우리 주변에 엔지니어나 아니면 철강 노동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화이트칼라 종사자들이거나, 세일즈맨이거나, 아니면 서비스를 판매하는 자그마한 업체 종사자들입니다. 이러한 서비스 산업의 비대는 인간들을 더욱 첨예한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그 뿐 만 아닙니다. 인간의 실수나 아니면 파괴된 인공지능에 의해 기계가 인간을 공격하거나, 인간에게 엄청난 위해들 가져올 수 있는 일들이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도시화 및 인구의 도시 집중

20세기 우리는 이미 농촌의 붕괴를 경험하였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문화생활을 즐기기를 원하는 인간들은 이제 농촌이나 어촌을 떠나서 도시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농촌은 이제 농촌이라 불릴 만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2백년 전에는 95%의 인구가 농촌에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 때만 하더라도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도시가 많지 않았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사람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약 1백년 전에는 농촌 인구가 44%로 감소하더니 현재는 약 2%의 사람만이 농업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2025년이 되면 약 90%의 사람이 도시에 살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시화 현상과 농촌의 도시화는 다양한 삶의 변화를 가져올 뿐 아니라, 동시에 많은 도시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인구의 도시 집중은 오히려 이웃과의 경쟁심과 경계심을 유발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이 주변인 (Secondary person)으로 전락하고, 이 주변인들의 소외감과 상실감, 그리고 범죄가 날로 증가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경계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집을 폐쇄시키고, 고립시킴으로 말미암아 점차 이웃이란 개념이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알고 있지 못하며, 그러한 지역적인 공동체 의식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 집중은 도시의 거주 환경을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자기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공해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앞으로 20년 내에 남극의 오존층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인구가 모여 살다보니 사회는 복잡하고 다원화되어 인간에게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안겨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성역 침범

 

21세기 노인 인구는 23%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가 있듯이 다가오는 세대에 인간의 생명은 연장될 것이고 어쩌면 22세기에 인간의 수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이 될는지 모릅니다. 이제 하나님의 것으로만 여겨졌던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이제는 인간의 것이 되었습니다. 낙태로 인한 생명의 단절은 이미 옛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낙태를 범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유전 공학의 발전은 생명의 기원과 생명의 존재 방식에 대한 유전자 코드를 발견해 내 가고 있습니다. 이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어쩌면 인간은 생명의 비밀을 밝혀 내기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인공적으로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 생명을 마음대로 연장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생명을 언제 끝내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안락사 문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것으로만 여겨졌던 생명에 대한 권리가 점차로 인간에 의하여 조절되어 가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경시 현상은 20세기와 21세기에 중요한 흐름이 될 것입니다.

 

변화가 던져 준 문제들

 

기계문명이 가져다준 이 변화의 회오리는 인간의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게 많은 문제를 던져 준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전통 가치의 상실과 질병들 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계문명이 가져다준 많은 혜택 속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기계문명이 가져다주는 변화의 폭과 깊이, 그리고 그 속도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나아가 인간의 정신은 이러한 변화를 따라잡고 그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변화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가기에 급급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조절에 대하여 어떠한 윤리를 적용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분분하며, 낙태 문제를 놓고 찬반 여론이 갈라져 있습니다. 앞으로 인간이 기계를 지배할 것인가 기계에 의해서 인간이 주도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미 컴퓨터가 인간을 주도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빠른 사회적 변화 속에서 인간은 그 변해 가는 세상의 여러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한 변화를 충분하게 소화하고, 그 변화된 세상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그리고 그 현상에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나 명분들을 축적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류는 전통 가치들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또 상실돼서는 안될 귀한 가치들---진정한 사랑이라든지, 우정이라든지 하는 고귀한 정신적 가치들---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많은 상실 속에서 미래를 지배하고 이끌어 나갈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지 못합니다. 기계문명은 사회를 복잡하게, 그리고 다원화 사회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서비스 산업이 비대해 지면 비대해 질 수록 서비스 업종이 분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다양한 가치들이 새로이 창출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원화된 사회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상실되었습니다. 인간을 자제시킬 수 있는 전통 가치들이 그 힘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인간은 가치를 상실하고 표류하는 혼돈과 혼란의 삶을 이어나갈 것이 분명합니다. 이 혼란과 혼돈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21세기의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가치 상실에서 오는 심각한 범죄의 양상들, 심각한 스트레스에서 오는 각종 질병들이 인간을 위협하고 있고, 땀흘리는 노동의 상실과 과다한 칼로리 흡수 때문에 야기되는 각종 질병들 앞에 인간은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병들은 기계의 힘으로 조절할 수 없고 고칠 수 없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기계문명의 한계입니다. 기계문명은 인간의 물질적 생활은 조정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물질을 조정함으로써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병들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을 조정하고, 그 물질을 통하여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오염시킴으로서 발생한 인간의 정신적 질병과 문제들은 이 기계가 치료할 수 없습니다.

둘째, 서비스 산업과 오락의 지나친 비대 입니다.

1차 산업과 2차 산업에 치중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점점 그들의 직장을 떠나서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소형화를 추구하는 기계문명 속에서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편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을 노동에 빼앗겼던 인간은 기계가 그일을 대신하여 줌으로 인하여 상당한 시간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가 다원화되고 복잡하게 변화된 구조에서 인간은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남아 있는 시간의 여가를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여러 가지 오락을 즐기는 것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여가 선용과 스트레스 해소 욕구는 점차 거대한 힘으로 미국의 오락 산업(Entertainment)을 주도하여 가고 있습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은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요구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이들은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어떤 이들은 직접 스포츠를 즐기는 방법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레저를 즐기기 위하여 바닷가나 호수나 아니면 캠핑을 하면서, 조금 더 극단적인 사람들은 알코올이나, 마약의 남용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도박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걷잡을 수 없는 성 관계를 통해서 그들의 쾌락의 욕구를 해소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들은 텔레비전에 의존하여 코미디 프로그램을 즐기거나 음탕한 심야 토크쇼를 즐기거나, 아니면 이상한 성적 주제들을 설정하고 상대방과 치열한 입싸움을 바라다보거나, 아니면 영화를 통해서, 다시 말하면 이러한 미디어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통해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면서 그들의 여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여러 다양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 철학과 종교에서 일파를 형성했던 쾌락 주의자 에피쿠로스가 다시 살아나 이 시대를 지배하는 거대한 쾌락주의 (Hedonism)의 공격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셋째, 물질의 인간 지배 입니다.

이러한 오락을 통한 즐거움의 추구 속에서, 그리고 물질과 기계에 의하여 주도되는 현대인들이 겪어야 할 가장 무서운 도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성의 몰락입니다.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인간이 물질과 정신의 배합 속에 있다면, 인간이 다른 짐승과 물질 세계와 다른 점은 하나님이 인간을 영성을 가진 생각하는 동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영성의 상실이란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타락후 인간의 노동은 무엇을 창조하기 위한 노동보다는 자기의 먹을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노동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타락 후에 인간은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먹는 문제가 상당히 해소된 21세기에도 인간은 먹기 위해서 노동을 할 뿐 아니라, 좀더 가지기 위해서, 좀 더 편하게 살기 위하여 타락된 노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지금 21세기를 맞이하는 지구촌의 인류들은 물질의 지배라는 이상기류 속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영적이거나 도덕적인 일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그러한 도덕적인 힘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조절하고 억제시켜 주는 여러 도덕적 가치나 표준이 그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현대인을 지배하는 것은 편하고 안락한 삶이요, 남에게 구애받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이것을 행복이라고 오해하고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주는 돈을 벌어들입니다. 사람들은 그 돈을 획득하기 위하여 남과 경쟁하고, 직장 생활을 합니다. 자기의 삶을 편하게 하는 이 돈을 획득하는 것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최우선적인 고려 사항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돈의 획득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최우선적 가치가 되어 버렸다는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이것을 수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 고려 가치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의 일과 영적인 일의 우선성 (Priority)를 따질 때 영적인 일을 우위에 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돈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충분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물질이 행복의 척도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돈을 버는 일을 최우선에다 두고 살고 있습니다. 이 현상이 물신숭배(Mammonism) 혹은 물질의 인간 지

배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도덕적 동물이요, 영적 동물입니다. 만약 도덕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이라는 사실들이 인간에게서 배제된다면 결국 인간은 포유류 동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동물적 본능을 억제하고 정신적 가치를 우위에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도덕성, 혹은 영성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물질과 본능에 의해 지배된다면 이것이 바로 파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야고보 기자는 이러한 물질 추구에 대하여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 1:15).

인간은 "영성의 상실""물신숭배"( Mammonism), 그리고 "쾌락주의" (Hedonism) 의 엄청난 영향력 속에서 점차 창조된 본래의 모습을 잃어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21세기에 예측되는 문제들을 정리하면 결국 사람들이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 속에서 가치(Value)와 표준 (Norm)을 형성하고 정립하지 못한 채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자기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하는 것"(사사기 17:6; 21:25)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전통의 가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이 더 이상 현대인에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전통적 가치와 표준을 상실하고 자기 욕심이나, 자기 만족이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 가치이자 표준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와 표준의 상실은 인간에게 물신숭배라는 우상 숭배와 쾌락주의라는 부도덕성을 더욱 심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21세기 인간은 영성의 상실, 물신숭배, 그리고 쾌락주의 공격 앞에 대책 없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공격 속에서 교회마저도 그 빛을 잃어 가고 그 맛을 잃어 가며, 세속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이 던져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선적으로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살았는가?

 

2천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는 목수 일을 하다가 30세에 공적인 사역에 뛰어들어 3년의 사역을 통하여 수제자 12명과 핵심적인 제자 120(예수의 승천 후에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리며 미래를 대비했던 사람들), 추종자 5백명(예수의 죽음 후에도 40여일 동안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 그들은 감람산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승천을 바라다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엄청난 무리에게 강한 감화력과 영향을 미치고 사형수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그분이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살았고, 그들을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사역을 통하여 모든 민족,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분이 바라다보는 구원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으로 귀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예비자 였던 세례요한이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쳤고, 또한 예수 그분도 그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치십니다. 모든 이들이 누리는 천국 생활이야말로 예수님의 비전이자,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 시대의 민중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천국"이라는 비전을 통하여 그 시대의 민중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는가? 그것은 그 시대 민중들의 삶이 극도의 비참함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또한 경제적으로 그 시대 민중은 혹독한 좌절과 절망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나라가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베트남의 붕괴를 통해 그 나라를 탈출한 무수한 베트남 난민, 일명 보트피플(Boat People)을 보았습니다. 나라가 없는 설움이란 자기 자신을 보호할 자기 정체성 (Identity)의 상실과 같은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시리아와 이집트라는 두 강대국의 확장 정책 속에서 그들 두 세력이 마주치는 경계선이 되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늘 전쟁의 포화에 시달리면서 이집트와 시리아 두 강대국의 속국으로 전전하다가 마침내는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그 민중들이 절대적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그 백성들을 인도할 영적 감화력을 상실한채 형식에 급급하고, 무수한 민중들은 그들의 힘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각종 질병과 가난 속에서 찌들릴 대로 찌들려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보셨을 때 그들의 삶을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유리하고 방황하였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들을 보호할 사람이 없이 그저 그 삭막한 삶속에 내동댕이쳐 진 채로 삶의 목적이나 희망을 잃고 되는대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참하고 암울한 삶에 대하여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의 비전

 

이렇듯 유리하고 방황하고 있었던 그 시대 민중들을 예수께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그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연민'(Compassion)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그들을 위하여 산에 올라 밤새도록 기도하셨으며, 때때로 그들을 위하여 우셨으며, 때때로 그들로 인하여 가슴아파 하셨으며,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으며, 또한 그들의 마음과 육신의 질병을 고치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께서 웃지 않으셨겠습니까 만은 복음서 기자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그만큼 죄로 인하여 방황하고 죽어 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급기야 유리하고 방황하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구원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사형수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천국 복음. 이것이 예수가 짧은 생애를 통하여 꿈꾸셨던 비전입니다. 그의 생애와 그의 사역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케뤼소),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디다케), 그 시대 민중을 치료하셨고( 테라피), 그는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천국을 이루는 것이 그가 모든 이들과 더불어 함께 들어가시고자 하셨던 구원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그분이 여셨으며, 그분을 통하여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갈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시대, 과학 문명이 이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 21세기의 상황 속에서 과연 인간의 삶의 질은 무엇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예수 시대를 살았던 민중의 삶과 오늘 최첨단의 과학기술의 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은 그들의 삶의 질에서 무엇을 변화시켰는가? 걸어다니던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있으며, 목화나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다가 떨어지면 기워 입던 사람들이 입고 싶은 옷을 마음대로 입고 살며, 때때로 예수님이 떼어 주던 기적의 떡을 기대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성인병을 걱정할 정도로 잘먹고, 잘 마시고 살고 있으며, 여름이나 겨울, 더위와 추위를 걱정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그런 걱정하지 않고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 시대와 마찬가지로 병들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장티푸스로 죽던 사람들이, 페스트로 인하여 죽고, 페스트로 죽던 사람들이 천연두로 죽었으며, 이제는 암으로 인하여, 또 에이즈로 인하여 죽어 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끊임없는 전쟁 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민족과 민족이 서로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17.명성교회

명일동의 종소리에서 세계를 울리는 종소리로

 

김삼환 목사

(장로회신학대-아세아연합 신학대학원 졸업, 1980년 명성교회 설립, 당회장, 현재 숭실대-장신 대-국민일보 이사, 한기총 남북협력위원장.)

 

신앙심 불지핀 `새벽의 전도사'

 

매년 3월과 9월초가 되면 서울 강동구 명일동 일대의 도로는 새벽마다 인파로 붐빈다. 손에 성경과 찬송가 책을 들고 이들이 줄지어 향하는 곳은 명성교회(예장 통합). 이 교회가 일주일 내지 열흘간 실시하는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교인 수는 매일 2만여명에 이른다. 또 명성교회 가 평상시 매일 갖는 새벽기도에도 50006000명이 참석한다.

 

'새벽기도로 교회 부흥의 불을 당겼다'는 명성교회는 19807월 김삼환(54) 목사에 의해 설립됐다. 경북 영양 출신인 김 목사는 장로회신학대를 졸업한 후 허허벌판이던 명일동에서 상가의 방 한칸을 빌어 교회를 시작했 다.

"목회 방향을 고민하다가 새벽기도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노인과 여자뿐 아니라 젊은 남자도 참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새 방식이 필요했 습니다. 그래서 방언이나 통성기도보다는 성경 공부와 설교에 중점을 두 기로 했죠.".

명성교회의 새벽기도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명으로 출발한 신자는 매년 두배씩 증가, 등록신자 5만명의 초대형교회로 커졌다. 신자가 급증 하자 1984년 인근 논에 1500명이 들어가는 자체 교회를 지었고 1 989년 그자리에 다시 4000석 규모의 현재 교회 건물을 신축했다.

이 같은 성장의 원인에 대해 김 목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창립 이후 교회에 사고와 갈등이 없었고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노력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들어 쓰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명성교회는 교회의 안정과 성장을 바탕으로 점차 밖으로 눈을 돌렸다. 전국 각지의 어려운 교회와 해외선교사를 후원하고 장애인-교도소- 군경 등 특수선교로 지원 대상을 확대했다. 명성교회는 현재 경상비의 절반을 선교와 사회봉사에 사용하고 있다. 김 목사는 "한국 교회는 영혼 구 원과 교회 건물 짓는데만 치중한 느낌"이라며 "이제 사회와 시대의 요구 에 부응하는데 눈을 돌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제는 한국교회를 디더하는교회로

 

김삼환 목사가 또 하나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개신교의 일치 와 협력. 한국 개신교의 최대 과제가 교파와 교단을 넘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연합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다 른 교단 중진 목회자들과도 자주 만나 함께 할 일을 찾으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의 교회학교를 꿈꾼다.

 

1980년 명성교회가 개척되어 창립한 이래로 교회 전체의 성장에 따라 교회학교도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다. 명성교회의 성장 이면에는 주일학교의 성장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명성교회 교회학교가 먼저 비약적인 성장을 한 것이다. 명성교회 교회학교의 일반적 상황을 보면, 현재 교회학교 재적인원이 11,000명이며 매 주일 출석하는 인원이 8,500-9,000명 선이다. 물론 이 인원은 영아부에서 청년부까지를 포함하는 인원이다. 통상적으로 재적인원은 허스가 많다고들 하는데 본 교회학교의 경우는 재적인원이 거의 출석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예배가 중심이다.

 

우리 교회학교의 모임은 주일예배와 반별 공과공부로 단순하다. 오후에 부서별로 제자훈련을 하는 부서도 있지만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주일 오전에 모든 모임이 끝난다. 모든 교회학교의 예배는 같은 예배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영아부에서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대예배실에서 장년이 드리는 예배순서와 같은 순서로 진행되어 아이들이 각 부서별로 예배를 드리다가 대예배실 장년예배를 참석하더라도 큰 어려움이 없다. 장년 예배와 아이들 예배의 차이가 있다면 설교시간이 짧아진다는 것과, 축하순서와 광고시간이 아이들에 맞게 운용된다는 점이다. 보통 한개 부서가 모이는 시간은 1시간 20분으로 1시간은 예배를, 20분은 반별로 공과공부를 하게 된다. 교육관 시설이 많이 모자라서 한개의 예배실을 가지고 세개의 부서가 번갈아가며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가장 빠르게 모이는 부서는 아침 750분에, 그 다음에는 930분에, 마지막으로 1120분에 모이게 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시설이 모자라서 시간을 나누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선택 폭이 넓어져서 출석인원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이다이 것은 담당 목사의 말이다.

명성교회 교회학교는 예배가 중심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만치 예배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가장 은혜스러운 시간으로 느낀다. 이를 위해서는 엄숙함도 있지만 기쁨도 함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우선 장년예배 자체가 축제적이기 때문에 교회학교도 이런 영향을 받아 대체적으로 축제적이다.

 

교회전체 행사에 전교육부서가 함께 참여해

 

명성교회만의 특징중의 하나는 특별한 프로그램은 평소에는 하지 못하고 교회 행사 때나 절기 시에 교회 전체가 모여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50여 개 부서 각자가 어떤 행사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보다는 전체의 역량과 노력과 현신을 모아 함께 하는 개념이다.

보통 한달에 한번꼴로 교회적인 큰 행사나 절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쉴새없이 프로그램이 진행된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행사가 진행되는지는 아래의 표를 참고하되, 장년에 행당되는 행사나 절기에 교회학교 학생들이 모두 참여한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목회자 중심, 교회 중심의 조직 운영

 

교회를 운용하는 조직은 매우 단순하다. 전체적으로는 담임목사와 교구목사 그리고 교육목사들과 교육전임 사역자들이 있다. 교역자들은 부서운영 전반을 지도하면서 예배의 설교를 담당하며, 무엇보다 담임목사님의 목회철학과 지시가 각 부서에서 실현되도록 철저한 대리목양을 담당한다.

교육위원회는 위원장 1인과 부위원장 3, 그리고 실무조직 위원 40여명이 교회학교 전반에 관한 재정관리와 사역지원을 하고 아울러 감독기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교육부 사무실에 상주하는 장로 1인과 집사 1, 사무원 1인이 일반행정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부서는 영아부에 청년부까지 50여개 부서로 구성됟어 있고, 각 부서마다 부장 1인과 부감 1, 총무 1인 교사 평균 25, 보조교사 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교회 조직의 특징은 철저하게 목회자 중심, 교회 중심의 운영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각 부서별로 나름대로의 무엇을 하기보다는 교회 전체의 흐름에 함께하는 데 그 초점이 있다. 교역자들은 토요일 오전 10시에 전체가 모여 주일을 준비하는 모임을 한다. 30분간 진행되는 모임을 통해서 경건회로 사명을 고취하고, 각 부서 주보로 교회나 교회학교 전체의 지시사항을 전달한다. 아울러 다음날의 설교에 대한 점검을 하게 된다. 주일을 지난 후에는 저녁 예배를 마친 9시경에 모여 각 부서 사항을 교역자 보고를 통해서 확인하고 평가한다. 교육위원회는 매월 마지막주일에 열리는 부장월례회를 통해 각 부서에 필요한 지원사항을 점검하고 행정적인 지도를 한다. 매 부일 새벽기도회 후에는 총무 전체 모임을 통해서 지도 사항을 전달한다. 그외에도 많은 것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의 방향은 일사불란한 사역을 위한 조직운용이라는 것이다.

다른 교회에서는 신앙교육은 해도 되도 안해도 되는 선택사항에 가깝지만 본 교회에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사항으로 자리잡아 있다. 이는 담임목사인 김삼환 목사님의 목회철학이며 17년 동안 변함없이 강단에서 증거하신 메시지를 전한 것은 아니지만 어른이건 아이건 모든 사람은 신앙이 제일 앞서야 한다는 복음적 메시지에 기안한다.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들필자는 다시한번 교회개척때의 이야기와 목회철학을 물어보았다.

"교회 개척도 하나님의 강권하심 때문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길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의 허물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차츰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주님의 심정을 깨닫게 된것이지요. 영광의 보좌에 계셨던 주님도 나를 위하여 섬기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어 주셨는데 내가 섬기고 고난당하고 죽음에 넘기우는 것을 무서워하고 싫어한다면 그것이 어찌 믿음일까 보냐 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왜냐면 사실 은사로 사람고쳐주고 다니면서 전도하고 성경가르치면 대접은 더 잘받거든요. 그러나 목회는 인내하지 않거나 섬기지 않으면 열매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처음 병고침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청 건너편에서 개척되었고, 개봉동으로 잠시 이전했다가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따라 지금 이곳에 와서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10년이 되었는데 정말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10년을 돌이켜 보면서 왜 이렇게 우리교회가 많은 축복을 받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해답을 주의법을 사랑해서 읽는것과 가르치는 것과 짐을 지는 순종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광명교회의 새신자 교육은 특이하다. 새신자로 등록하면 특별한 새신자 공부를 시키는 것 아니라 시편과 잠언부터 읽게 한다. 이는 시편 19편에 있는데로 하나님의 법이 영혼을 소생케하고,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교육의 방법상으로도 거부감이 없으며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잇점외에 말씀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닫게 해준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기도를 너무 강조해왔다. 그결과 신비주의와 기복주의가 속출하게 되었는데 이를 치료하고 교정하는 일은 성경읽기를 시작하는 일이라고 함기룡 목사는 힘주어 말한다.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할 때 비가오고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는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 읽기는 기본적이며 쉬운 영성운동

 

필자는 함목사에게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질문해 보았다.

"제 자신부터 은사만 강조하고 그것을 사용할 때는 조금 교만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외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러한 신앙은 믿음의 초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울 사도도 믿음의 역사보다 사랑의 수고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보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실 성경중심으로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어디있겠습니까마는 저는 더더욱이 강조합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교회에서 은사받고 교만하다가 넘어진 사람도 우리교회에 오면 안정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경에 이미 모두 다 말씀해 놓으셨기 때문이지요. 유혹도 이기고 자신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하나님말씀을 두기보다는 세상의 철학,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지요. 그게 다 속는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주일동안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앞에서는 신앙을 잘 시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원수앞에서도 시인하라고 했는데 이 입술의 고백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찬미의 제사라고 했는데 이게 잘 안되거든요, 저도 옛날에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자주 읽고, 또 마음 그대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의 죽음이 나타나는 것은 말씀의 경륜대로 하자면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서 이거든요. 그러니까 감당해야 할 고난이나 짐이 내게 오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 뒤에 영광과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엔 이 비밀을 몰라서 성도들을 때로는 미워하고 고난을 비켜 갈려고 꾀를 많이 부렸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그 비밀을 깨닫게 된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목회가 참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함목사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순리이고, 또 그것이 능력이라고 재삼 강조한다. 끝으로 광명교회의 향후 비젼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저는 우리교회의 비젼은 마태복음 28:19-20에서 찾고져 합니다. 특히 그 중에서 '가르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 성경책은 여러 종류가 많이 나와 있지만 그것을 매일매일 읽고 낭독하는 신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 먼저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며'라고 말씀하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그 가운데 기록한 데로 다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다음에 여리고성을 7일동안 도는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기도가 먼저냐 말씀이 먼저냐고 묻는다면 성경은 기도보다 말씀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매자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지혜자는 듣기를 좋아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듣는 가운데에 내마음에 그 말씀이 부딪히면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길을 이미 성경에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즐겨 읽는자가 평강을 얻고 축복을 얻는 것입니다. 광명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미국이든 중국이든 가리지 않고 가서 가르칠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이 때를 위해 가르치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이시대의 잣대로 보면 광명교회는 좀 별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성경의 잣대로 본다면 성경의 원리에 더 충실하게 가까운 교회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광명교회가 더욱 부흥성장하여 앞으로 한국교회의 말씀 사역에 더 큰 도전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 흔하디 흔한 교회성장 프로그램 하나 없이 오직 성경읽기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개척10년만에 600여명이 회집하는 기적을 일으킨 광명교회 위에 하나님의 더큰 축복이 넘치게 될 것을 기대해 본다.

 

 

 

 

17.분당 샘물교회

 

순교자의 믿음과 영성으로 현대에 도전하는

박은조 목사

(고려신학대-대학원-영국 런던바이블칼리지 졸업. 서울 영동교회 담임목사 현재 분당샘물교회 담임목사 고신목회자협의회 공동회장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운영위원)

 

 

도덕적인 본모습으로...고신교단 새신앙 추구

 

장로교 고신교단은 개신교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으로 꼽힌다. 일제말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던 인사들에 의해 해방 후 만들어진 고신교단은 '하나님 앞에 살자'는 모토처럼 대외적 활동보다 성경 정신 에 충실한 복음적 삶을 추구한다.

사진설명 : "땅 사서 예배당

짓는 교회가 아니고 지역사

회에 봉사하는 교회를 만들

고 싶다"고 말하는 박은조 목사.

 

그러나 80년대 이후 고신교단 내부에서는 무엇이 복음적인 삶인가 에 대한 성찰이 제기되고 새로운 신앙 형태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 나고 있다. 분당샘물교회 박은조(47) 목사는 그런 흐름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박은조 목사는 지난해말까지 17년간 봉직했던 서울영동교회 담임목 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박 목사는 70년대 후반 손봉호 서울대교수가 주도해서 평신도교회로 출범한 서울영동교회의 첫번째 담임목사로 시 무하며 고신교단 교회에 대한 외부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고신 교단 역시 종교개혁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은 세상을 섬기고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단이 그동안 폐 쇄적으로 보였지만 이제는 교회가 사회의 도덕성을 담보하는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예산의 절반을 지역을 위해

 

서울영동교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헌금의 절반 이상을 교회 가 아니라 외부를 위해서 쓴다는 점. 지난 97년의 경우 20억원의 헌금 중 11억원을 선교, 구제, 장학 등에 사용했다. 또 교인들은 혼자 사는 노인을 돌보는 등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에 열심이고 기독교윤리실천운 동, 밀알선교단 등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사회운동 단체에도 적극 참 여했다.

 

서울영동교회는 장애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전북 장수에 장애 인을 위한 11만평의 농장을 조성하는 등 장애인들에게도 관심을 쏟았 다. 또 북한돕기에도 적극 나서 평양의 병원 건립, 나진-선봉지구의 제약공장 건립에 적극 참여했고 탈북자들의 정착을 위해 강원도 홍천 에 '고향마을'이란 농장을 조성 중이다.

 

 

샘물교회의 분당시대

 

박은조 목사는 지난해 10월 스스로 서울영동교회를 떠나 분당에 샘물교회를 개척했다. 상가 건물을 빌어 서울영동교회 분당지역 교인 200 여명과 함께 시작한 샘물교회는 6개월만에 1000명이 출석하는 중형 교회로 자리잡았다.

"한 교회에 너무 오래 있으니까 영적인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이 50이 넘기 전에 변화를 시도해 보고 싶었습니다."박은조 목사는 "학교를 세워서 기독교적 교육을 실시하고 지역주민에 시설도 개방하는 새로운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필자는 향후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성장은 목회자가 평신도를 얼마나 잘 동원하고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볼 때에 평신도를 활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역조직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로버트 로건박사는 다가오는 21세기의 교회는 구역교회(thecellgrou pchu -rch)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도 이 말에 동의 한다. 여기서 구역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에서 모이는 구역예배이상의 것이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소그룹, 혹은 자석집 단(magneticgroup)을 의미한다. 새 시대의 새 교회는 감옥과 같이 사람들을 교회당에 가두어두는 교회가 되지말고 중앙집권에 서 탈피하여 현장목회로 분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분당샘물교회가 지향하고자 하는 교회도 이러한 교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구역은 인간적 조직이상의 영적 생명체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구역교회는 바로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사도행전 242절에서 47절에 나오는 신약교회는 건강한 구역의 7대 기능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교육---가르침을 배우고 적용했다(42)

교제---다 함께 떡을 떼며 나누었다(42,46)

예배---성찬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 광을 돌렸다(42,47)

기도---기도하기에 힘썼다(42)

능력---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43)

봉사---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다(45)

전도---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다(47)

"고삐를 풀어라"

필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효과적인 구역 혹은 소그룹을 가지려면 소그룹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분당과 같은 문화률이 높은 신흥도시는 상대적으로 개인주의 가 강하므로 소그룹을 통하여 교인들간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해놓지 않으면 결국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나 현대인들은 익명성을 원하며 대형교회를 찾기 때문에 건강한 교회를 위헤서는 소그룸은 필수적이다. 소그룹은 교회 속의 교회이다. 소우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소그룹만 잘 활용하면 교회의 본질적 특성을 체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소그룹은 또한 자석집단으로서 다양성과 수용성을 살려 모든 종류의 사람을 다 끌어들일 수 있고 포함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성별 나이 학력 경제 경험 직업 등에 따라서 얼마든지 독특한 자아정체를 가진 소그룹을 확장시켜 나 갈 수 있다. 살아있는 소그룹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포분열과 신진대사 가 원할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

다중리더십 필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당 샘물교회를 보며 생각하는 것은 다중리더쉽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소그룹 혹은 구역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다중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즉 전체를 관장하는 구역장(leader)외에도 회원들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목양자(shepherd)가 있어야 하고, 비신자들을 끌어오는 은사를 가진 전도자(evangelist)가 있어야 하며, 장소와 음식을 제공하는 초청자(host)가 필요하고 또한 말씀을 가르치는 인도자(teacher)가 함께 있어 일종의 팀 사역이 가능해야 건강한 구역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맡게되면 항상 탈진하고 지쳐서 할 수 없이 일하는 형식적 리더십밖에 남지 않게 된다.

구역 활성화의 열쇠는 올바른 지도자의 선발과 훈련에 있다. 구역지도자를 위한 교육은 이른바 도제식 양육(appre -nticeship)이 성서적이다. 목회자가 생활과 사역가운데에서 함께 거하고 부딪치며 가르치는 교육이 실제적이고 효과적이다. 구역 지도자를 선발할 때에는 세 가지 자격, 곧 성품 경험 기술을 살펴야 한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영적 성품이 가장 중요하다. 경험과 소질도 중요하지만 우 선하는 것은 성품이 되어야 한다. 경험과 소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충될 수 있지만 좋은 성품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으면 쉽게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역은 말 그대로 세포단위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세포분열이 일어나서 복제되고 재생산되어야 그 존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성도 수 1백명 당 6개 이상의 소그룹이 형성되고 가급적 모든 성도가 다 참 여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회에서 전체성도 의 25-30정도만이 구역 혹은 소그룹에 가입되어 있는데 이 수치를 70-80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성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구역을 성도들의 동질성, 예를 들어 직업이나 나 이,혹은 은사에 따라 구분하는 새로운 시도도 필요하다.

이러한 일련의 보충이 있을 때 분당샘물교회는 한국사회와 교계가 요구하는 그러한 교회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2001! 새로운 세기가 시작하는 2001년이 불과 수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격동과 변화의 20세기를 살아왔습니다.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을 시작으로 하여 20세기는 이상 사회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신념이 이 지구촌을 전쟁의 포화 속으로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20세기를 살았던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그 공산주의자들의 이념 전쟁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산주의의 망령이 걷히자 마자 옛날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는 인종과 종교가 얽힌 대 살육 전쟁이 몸부림치도록 처절하게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심슨 재판의 판결 결과가 보여주듯이 흑백간에 그리고 소수 민족과 주류 민족 사이에 심각한 인종간의 갈등에 시달릴 것이 분명합니다. 앞으로 인종과 종교 문제는 인류에게 심각한 갈등과 문제를 던져 줄 것입니다. 또 처처에서 기근과 홍수로 인한 죽음의 소식이 들려 오고, 이상 기온이 전 지구촌에 엄습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구촌의 위기는 이러한 외부적 환경에만 감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부적으로 현대인들은 전통적 가치 체계의 붕괴라는 정신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특별히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하지 않으며 공공연히 교회를 비난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나태하고 게으르며, 일부는 교회를 떠나가기도 하는 배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잘못된 가치와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고 가는 거짓 선생들, 거짓 교훈들, 거짓 가치관과 사상들이 만연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모습은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지구촌의 마지막 날이 가까이 다가올 때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었던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는 21세기에는 과연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어떠한 변화들이 우리 지구촌에 일어날 것이며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크리스천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21세기의 전망

 

다가오는 21세기를 맞이하는 이 지구촌은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 서 있습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지구촌에는 창조로부터의 변화에 버금갈 정도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쳐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오는 21세기의 것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이러한 변화의 폭이나 속도가 줄어들는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과학 문명 (Technology) 입니다. 현대인들은 누군가가 하나의 이념(Ideology)이라고 까지 불렀던 이 과학문명을 통하여---플라톤이 철학자들의 지배를 통하여, 모어가 유토피아를 통해서,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이 공산 사회를 통하여 꿈꾸었던 이상 사회를 이루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학 문명은 지구촌과 인간의 생활을 빠르고, 편하며, 안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작고, 간편하며, 편리하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도달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고, 단축시켜 왔습니다. 모든 것들은 인간의 노동에 의해 창조하였지만 지금은 기계가 만들어 내고, 인간은 기계를 조작하거나 기계를 감리, 감독하는 일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컴퓨터 하나만 하더라도 옛날에는 집채만한 컴퓨터를 가지고 일을 했지만 지금은 노트북이라고 하는 작은 컴퓨터로 대체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 문명에 의해 주도되는 엄청난 변화 앞에서 인간의 생활 구조와 사회구조 역시도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 속에 있었습니다.

 

정보 시대의 기계문명과 서비스 산업의 비대화

 

엘빈 토플러는 이 시대가 제3의 물결이라는 정보 시대 속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보 시대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지식들을 축적해 놓았다가 그것을 필요할 때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 정보 시대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옛날 컴퓨터 앞에서 책의 목록이나 찾던 시대에서 이제는 CD- ROM에 저장된 정보를 빼내어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보 혁명의 큰 발전 중에 하나가 Internet이라는 정보망입니다. 이를 통하여 세계가 하나의 Commu -nication-net로 묶여지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쉽게 말해 기계가 무엇을 인지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컴퓨터를 통하여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공지능을 발전시키고 있는 기계문명은 인간의 노동 형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과거 땀을 흘리며 일하던 노동자들은 점점 기계에 의해 대체되어 왔고 인간은 이 기계들을 감독하고 감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계 의존도는 나날이 높아 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저 기계만 작동시키면, 그 기계가 알아서 모든 일을 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기계에 의한 노동은 기계에 의한 인간의 지배와 함께 인간의 기능상실이나, 혹은 인간의 정신적인 쇠퇴를 불러올 위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계로 대체된 후 인간의 노동인구는 어디로 갈 것인가? 현재로는 대부분 서비스 직종으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21세기에 산업 구조는 1차 산업(농업과 어업등)2차 산업(기계 산업) 인구가 축소되는 반면, 3차 산업 (금융, 세일즈, 가게 점원등 서비스 업) 종사자가 비대해 질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 보십시오. 실제로 우리 주변에 엔지니어나 아니면 철강 노동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화이트칼라 종사자들이거나, 세일즈맨이거나, 아니면 서비스를 판매하는 자그마한 업체 종사자들입니다. 이러한 서비스 산업의 비대는 인간들을 더욱 첨예한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그 뿐 만 아닙니다. 인간의 실수나 아니면 파괴된 인공지능에 의해 기계가 인간을 공격하거나, 인간에게 엄청난 위해들 가져올 수 있는 일들이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도시화 및 인구의 도시 집중

20세기 우리는 이미 농촌의 붕괴를 경험하였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문화생활을 즐기기를 원하는 인간들은 이제 농촌이나 어촌을 떠나서 도시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농촌은 이제 농촌이라 불릴 만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2백년 전에는 95%의 인구가 농촌에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 때만 하더라도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도시가 많지 않았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사람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약 1백년 전에는 농촌 인구가 44%로 감소하더니 현재는 약 2%의 사람만이 농업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2025년이 되면 약 90%의 사람이 도시에 살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시화 현상과 농촌의 도시화는 다양한 삶의 변화를 가져올 뿐 아니라, 동시에 많은 도시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인구의 도시 집중은 오히려 이웃과의 경쟁심과 경계심을 유발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이 주변인 (Secondary person)으로 전락하고, 이 주변인들의 소외감과 상실감, 그리고 범죄가 날로 증가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경계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집을 폐쇄시키고, 고립시킴으로 말미암아 점차 이웃이란 개념이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알고 있지 못하며, 그러한 지역적인 공동체 의식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 집중은 도시의 거주 환경을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자기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공해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앞으로 20년 내에 남극의 오존층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인구가 모여 살다보니 사회는 복잡하고 다원화되어 인간에게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안겨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성역 침범

 

21세기 노인 인구는 23%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가 있듯이 다가오는 세대에 인간의 생명은 연장될 것이고 어쩌면 22세기에 인간의 수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이 될는지 모릅니다. 이제 하나님의 것으로만 여겨졌던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이제는 인간의 것이 되었습니다. 낙태로 인한 생명의 단절은 이미 옛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낙태를 범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유전 공학의 발전은 생명의 기원과 생명의 존재 방식에 대한 유전자 코드를 발견해 내 가고 있습니다. 이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어쩌면 인간은 생명의 비밀을 밝혀 내기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인공적으로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 생명을 마음대로 연장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생명을 언제 끝내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안락사 문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것으로만 여겨졌던 생명에 대한 권리가 점차로 인간에 의하여 조절되어 가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경시 현상은 20세기와 21세기에 중요한 흐름이 될 것입니다.

 

변화가 던져 준 문제들

 

기계문명이 가져다준 이 변화의 회오리는 인간의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게 많은 문제를 던져 준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전통 가치의 상실과 질병들 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계문명이 가져다준 많은 혜택 속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기계문명이 가져다주는 변화의 폭과 깊이, 그리고 그 속도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나아가 인간의 정신은 이러한 변화를 따라잡고 그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변화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가기에 급급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조절에 대하여 어떠한 윤리를 적용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분분하며, 낙태 문제를 놓고 찬반 여론이 갈라져 있습니다. 앞으로 인간이 기계를 지배할 것인가 기계에 의해서 인간이 주도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미 컴퓨터가 인간을 주도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빠른 사회적 변화 속에서 인간은 그 변해 가는 세상의 여러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한 변화를 충분하게 소화하고, 그 변화된 세상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그리고 그 현상에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나 명분들을 축적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류는 전통 가치들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또 상실돼서는 안될 귀한 가치들---진정한 사랑이라든지, 우정이라든지 하는 고귀한 정신적 가치들---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많은 상실 속에서 미래를 지배하고 이끌어 나갈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지 못합니다. 기계문명은 사회를 복잡하게, 그리고 다원화 사회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서비스 산업이 비대해 지면 비대해 질 수록 서비스 업종이 분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다양한 가치들이 새로이 창출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원화된 사회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상실되었습니다. 인간을 자제시킬 수 있는 전통 가치들이 그 힘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인간은 가치를 상실하고 표류하는 혼돈과 혼란의 삶을 이어나갈 것이 분명합니다. 이 혼란과 혼돈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21세기의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가치 상실에서 오는 심각한 범죄의 양상들, 심각한 스트레스에서 오는 각종 질병들이 인간을 위협하고 있고, 땀흘리는 노동의 상실과 과다한 칼로리 흡수 때문에 야기되는 각종 질병들 앞에 인간은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병들은 기계의 힘으로 조절할 수 없고 고칠 수 없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기계문명의 한계입니다. 기계문명은 인간의 물질적 생활은 조정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물질을 조정함으로써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병들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을 조정하고, 그 물질을 통하여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오염시킴으로서 발생한 인간의 정신적 질병과 문제들은 이 기계가 치료할 수 없습니다.

둘째, 서비스 산업과 오락의 지나친 비대 입니다.

1차 산업과 2차 산업에 치중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점점 그들의 직장을 떠나서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소형화를 추구하는 기계문명 속에서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편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을 노동에 빼앗겼던 인간은 기계가 그일을 대신하여 줌으로 인하여 상당한 시간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가 다원화되고 복잡하게 변화된 구조에서 인간은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남아 있는 시간의 여가를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여러 가지 오락을 즐기는 것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여가 선용과 스트레스 해소 욕구는 점차 거대한 힘으로 미국의 오락 산업(Entertainment)을 주도하여 가고 있습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은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요구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이들은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어떤 이들은 직접 스포츠를 즐기는 방법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레저를 즐기기 위하여 바닷가나 호수나 아니면 캠핑을 하면서, 조금 더 극단적인 사람들은 알코올이나, 마약의 남용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도박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걷잡을 수 없는 성 관계를 통해서 그들의 쾌락의 욕구를 해소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들은 텔레비전에 의존하여 코미디 프로그램을 즐기거나 음탕한 심야 토크쇼를 즐기거나, 아니면 이상한 성적 주제들을 설정하고 상대방과 치열한 입싸움을 바라다보거나, 아니면 영화를 통해서, 다시 말하면 이러한 미디어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통해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면서 그들의 여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여러 다양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 철학과 종교에서 일파를 형성했던 쾌락 주의자 에피쿠로스가 다시 살아나 이 시대를 지배하는 거대한 쾌락주의 (Hedonism)의 공격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셋째, 물질의 인간 지배 입니다.

이러한 오락을 통한 즐거움의 추구 속에서, 그리고 물질과 기계에 의하여 주도되는 현대인들이 겪어야 할 가장 무서운 도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성의 몰락입니다.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인간이 물질과 정신의 배합 속에 있다면, 인간이 다른 짐승과 물질 세계와 다른 점은 하나님이 인간을 영성을 가진 생각하는 동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영성의 상실이란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타락후 인간의 노동은 무엇을 창조하기 위한 노동보다는 자기의 먹을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노동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타락 후에 인간은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먹는 문제가 상당히 해소된 21세기에도 인간은 먹기 위해서 노동을 할 뿐 아니라, 좀더 가지기 위해서, 좀 더 편하게 살기 위하여 타락된 노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지금 21세기를 맞이하는 지구촌의 인류들은 물질의 지배라는 이상기류 속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영적이거나 도덕적인 일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그러한 도덕적인 힘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조절하고 억제시켜 주는 여러 도덕적 가치나 표준이 그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현대인을 지배하는 것은 편하고 안락한 삶이요, 남에게 구애받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이것을 행복이라고 오해하고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주는 돈을 벌어들입니다. 사람들은 그 돈을 획득하기 위하여 남과 경쟁하고, 직장 생활을 합니다. 자기의 삶을 편하게 하는 이 돈을 획득하는 것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최우선적인 고려 사항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돈의 획득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최우선적 가치가 되어 버렸다는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이것을 수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 고려 가치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의 일과 영적인 일의 우선성 (Priority)를 따질 때 영적인 일을 우위에 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돈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충분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물질이 행복의 척도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돈을 버는 일을 최우선에다 두고 살고 있습니다. 이 현상이 물신숭배(Mammonism) 혹은 물질의 인간 지

배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도덕적 동물이요, 영적 동물입니다. 만약 도덕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이라는 사실들이 인간에게서 배제된다면 결국 인간은 포유류 동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동물적 본능을 억제하고 정신적 가치를 우위에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도덕성, 혹은 영성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물질과 본능에 의해 지배된다면 이것이 바로 파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야고보 기자는 이러한 물질 추구에 대하여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 1:15).

인간은 "영성의 상실""물신숭배"( Mammonism), 그리고 "쾌락주의" (Hedonism) 의 엄청난 영향력 속에서 점차 창조된 본래의 모습을 잃어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21세기에 예측되는 문제들을 정리하면 결국 사람들이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 속에서 가치(Value)와 표준 (Norm)을 형성하고 정립하지 못한 채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자기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하는 것"(사사기 17:6; 21:25)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전통의 가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이 더 이상 현대인에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전통적 가치와 표준을 상실하고 자기 욕심이나, 자기 만족이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 가치이자 표준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와 표준의 상실은 인간에게 물신숭배라는 우상 숭배와 쾌락주의라는 부도덕성을 더욱 심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21세기 인간은 영성의 상실, 물신숭배, 그리고 쾌락주의 공격 앞에 대책 없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공격 속에서 교회마저도 그 빛을 잃어 가고 그 맛을 잃어 가며, 세속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이 던져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선적으로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살았는가?

 

2천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는 목수 일을 하다가 30세에 공적인 사역에 뛰어들어 3년의 사역을 통하여 수제자 12명과 핵심적인 제자 120(예수의 승천 후에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리며 미래를 대비했던 사람들), 추종자 5백명(예수의 죽음 후에도 40여일 동안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 그들은 감람산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승천을 바라다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엄청난 무리에게 강한 감화력과 영향을 미치고 사형수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그분이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살았고, 그들을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사역을 통하여 모든 민족,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분이 바라다보는 구원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으로 귀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예비자 였던 세례요한이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쳤고, 또한 예수 그분도 그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치십니다. 모든 이들이 누리는 천국 생활이야말로 예수님의 비전이자,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 시대의 민중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천국"이라는 비전을 통하여 그 시대의 민중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는가? 그것은 그 시대 민중들의 삶이 극도의 비참함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또한 경제적으로 그 시대 민중은 혹독한 좌절과 절망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나라가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베트남의 붕괴를 통해 그 나라를 탈출한 무수한 베트남 난민, 일명 보트피플(Boat People)을 보았습니다. 나라가 없는 설움이란 자기 자신을 보호할 자기 정체성 (Identity)의 상실과 같은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시리아와 이집트라는 두 강대국의 확장 정책 속에서 그들 두 세력이 마주치는 경계선이 되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늘 전쟁의 포화에 시달리면서 이집트와 시리아 두 강대국의 속국으로 전전하다가 마침내는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그 민중들이 절대적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그 백성들을 인도할 영적 감화력을 상실한채 형식에 급급하고, 무수한 민중들은 그들의 힘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각종 질병과 가난 속에서 찌들릴 대로 찌들려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보셨을 때 그들의 삶을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유리하고 방황하였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들을 보호할 사람이 없이 그저 그 삭막한 삶속에 내동댕이쳐 진 채로 삶의 목적이나 희망을 잃고 되는대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참하고 암울한 삶에 대하여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의 비전

 

이렇듯 유리하고 방황하고 있었던 그 시대 민중들을 예수께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그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연민'(Compassion)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그들을 위하여 산에 올라 밤새도록 기도하셨으며, 때때로 그들을 위하여 우셨으며, 때때로 그들로 인하여 가슴아파 하셨으며,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으며, 또한 그들의 마음과 육신의 질병을 고치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께서 웃지 않으셨겠습니까 만은 복음서 기자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그만큼 죄로 인하여 방황하고 죽어 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급기야 유리하고 방황하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구원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사형수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천국 복음. 이것이 예수가 짧은 생애를 통하여 꿈꾸셨던 비전입니다. 그의 생애와 그의 사역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케뤼소),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디다케), 그 시대 민중을 치료하셨고( 테라피), 그는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천국을 이루는 것이 그가 모든 이들과 더불어 함께 들어가시고자 하셨던 구원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그분이 여셨으며, 그분을 통하여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갈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시대, 과학 문명이 이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 21세기의 상황 속에서 과연 인간의 삶의 질은 무엇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예수 시대를 살았던 민중의 삶과 오늘 최첨단의 과학기술의 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은 그들의 삶의 질에서 무엇을 변화시켰는가? 걸어다니던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있으며, 목화나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다가 떨어지면 기워 입던 사람들이 입고 싶은 옷을 마음대로 입고 살며, 때때로 예수님이 떼어 주던 기적의 떡을 기대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성인병을 걱정할 정도로 잘먹고, 잘 마시고 살고 있으며, 여름이나 겨울, 더위와 추위를 걱정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그런 걱정하지 않고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 시대와 마찬가지로 병들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장티푸스로 죽던 사람들이, 페스트로 인하여 죽고, 페스트로 죽던 사람들이 천연두로 죽었으며, 이제는 암으로 인하여, 또 에이즈로 인하여 죽어 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끊임없는 전쟁 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민족과 민족이 서로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17.명성교회

명일동의 종소리에서 세계를 울리는 종소리로

 

김삼환 목사

(장로회신학대-아세아연합 신학대학원 졸업, 1980년 명성교회 설립, 당회장, 현재 숭실대-장신 대-국민일보 이사, 한기총 남북협력위원장.)

 

신앙심 불지핀 `새벽의 전도사'

 

매년 3월과 9월초가 되면 서울 강동구 명일동 일대의 도로는 새벽마다 인파로 붐빈다. 손에 성경과 찬송가 책을 들고 이들이 줄지어 향하는 곳은 명성교회(예장 통합). 이 교회가 일주일 내지 열흘간 실시하는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교인 수는 매일 2만여명에 이른다. 또 명성교회 가 평상시 매일 갖는 새벽기도에도 50006000명이 참석한다.

 

'새벽기도로 교회 부흥의 불을 당겼다'는 명성교회는 19807월 김삼환(54) 목사에 의해 설립됐다. 경북 영양 출신인 김 목사는 장로회신학대를 졸업한 후 허허벌판이던 명일동에서 상가의 방 한칸을 빌어 교회를 시작했 다.

"목회 방향을 고민하다가 새벽기도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노인과 여자뿐 아니라 젊은 남자도 참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새 방식이 필요했 습니다. 그래서 방언이나 통성기도보다는 성경 공부와 설교에 중점을 두 기로 했죠.".

명성교회의 새벽기도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명으로 출발한 신자는 매년 두배씩 증가, 등록신자 5만명의 초대형교회로 커졌다. 신자가 급증 하자 1984년 인근 논에 1500명이 들어가는 자체 교회를 지었고 1 989년 그자리에 다시 4000석 규모의 현재 교회 건물을 신축했다.

이 같은 성장의 원인에 대해 김 목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창립 이후 교회에 사고와 갈등이 없었고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노력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들어 쓰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명성교회는 교회의 안정과 성장을 바탕으로 점차 밖으로 눈을 돌렸다. 전국 각지의 어려운 교회와 해외선교사를 후원하고 장애인-교도소- 군경 등 특수선교로 지원 대상을 확대했다. 명성교회는 현재 경상비의 절반을 선교와 사회봉사에 사용하고 있다. 김 목사는 "한국 교회는 영혼 구 원과 교회 건물 짓는데만 치중한 느낌"이라며 "이제 사회와 시대의 요구 에 부응하는데 눈을 돌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제는 한국교회를 디더하는교회로

 

김삼환 목사가 또 하나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개신교의 일치 와 협력. 한국 개신교의 최대 과제가 교파와 교단을 넘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연합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다 른 교단 중진 목회자들과도 자주 만나 함께 할 일을 찾으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의 교회학교를 꿈꾼다.

 

1980년 명성교회가 개척되어 창립한 이래로 교회 전체의 성장에 따라 교회학교도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다. 명성교회의 성장 이면에는 주일학교의 성장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명성교회 교회학교가 먼저 비약적인 성장을 한 것이다. 명성교회 교회학교의 일반적 상황을 보면, 현재 교회학교 재적인원이 11,000명이며 매 주일 출석하는 인원이 8,500-9,000명 선이다. 물론 이 인원은 영아부에서 청년부까지를 포함하는 인원이다. 통상적으로 재적인원은 허스가 많다고들 하는데 본 교회학교의 경우는 재적인원이 거의 출석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예배가 중심이다.

 

우리 교회학교의 모임은 주일예배와 반별 공과공부로 단순하다. 오후에 부서별로 제자훈련을 하는 부서도 있지만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주일 오전에 모든 모임이 끝난다. 모든 교회학교의 예배는 같은 예배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영아부에서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대예배실에서 장년이 드리는 예배순서와 같은 순서로 진행되어 아이들이 각 부서별로 예배를 드리다가 대예배실 장년예배를 참석하더라도 큰 어려움이 없다. 장년 예배와 아이들 예배의 차이가 있다면 설교시간이 짧아진다는 것과, 축하순서와 광고시간이 아이들에 맞게 운용된다는 점이다. 보통 한개 부서가 모이는 시간은 1시간 20분으로 1시간은 예배를, 20분은 반별로 공과공부를 하게 된다. 교육관 시설이 많이 모자라서 한개의 예배실을 가지고 세개의 부서가 번갈아가며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가장 빠르게 모이는 부서는 아침 750분에, 그 다음에는 930분에, 마지막으로 1120분에 모이게 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시설이 모자라서 시간을 나누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선택 폭이 넓어져서 출석인원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이다이 것은 담당 목사의 말이다.

명성교회 교회학교는 예배가 중심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만치 예배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가장 은혜스러운 시간으로 느낀다. 이를 위해서는 엄숙함도 있지만 기쁨도 함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우선 장년예배 자체가 축제적이기 때문에 교회학교도 이런 영향을 받아 대체적으로 축제적이다.

 

교회전체 행사에 전교육부서가 함께 참여해

 

명성교회만의 특징중의 하나는 특별한 프로그램은 평소에는 하지 못하고 교회 행사 때나 절기 시에 교회 전체가 모여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50여 개 부서 각자가 어떤 행사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보다는 전체의 역량과 노력과 현신을 모아 함께 하는 개념이다.

보통 한달에 한번꼴로 교회적인 큰 행사나 절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쉴새없이 프로그램이 진행된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행사가 진행되는지는 아래의 표를 참고하되, 장년에 행당되는 행사나 절기에 교회학교 학생들이 모두 참여한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목회자 중심, 교회 중심의 조직 운영

 

교회를 운용하는 조직은 매우 단순하다. 전체적으로는 담임목사와 교구목사 그리고 교육목사들과 교육전임 사역자들이 있다. 교역자들은 부서운영 전반을 지도하면서 예배의 설교를 담당하며, 무엇보다 담임목사님의 목회철학과 지시가 각 부서에서 실현되도록 철저한 대리목양을 담당한다.

교육위원회는 위원장 1인과 부위원장 3, 그리고 실무조직 위원 40여명이 교회학교 전반에 관한 재정관리와 사역지원을 하고 아울러 감독기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교육부 사무실에 상주하는 장로 1인과 집사 1, 사무원 1인이 일반행정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부서는 영아부에 청년부까지 50여개 부서로 구성됟어 있고, 각 부서마다 부장 1인과 부감 1, 총무 1인 교사 평균 25, 보조교사 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교회 조직의 특징은 철저하게 목회자 중심, 교회 중심의 운영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각 부서별로 나름대로의 무엇을 하기보다는 교회 전체의 흐름에 함께하는 데 그 초점이 있다. 교역자들은 토요일 오전 10시에 전체가 모여 주일을 준비하는 모임을 한다. 30분간 진행되는 모임을 통해서 경건회로 사명을 고취하고, 각 부서 주보로 교회나 교회학교 전체의 지시사항을 전달한다. 아울러 다음날의 설교에 대한 점검을 하게 된다. 주일을 지난 후에는 저녁 예배를 마친 9시경에 모여 각 부서 사항을 교역자 보고를 통해서 확인하고 평가한다. 교육위원회는 매월 마지막주일에 열리는 부장월례회를 통해 각 부서에 필요한 지원사항을 점검하고 행정적인 지도를 한다. 매 부일 새벽기도회 후에는 총무 전체 모임을 통해서 지도 사항을 전달한다. 그외에도 많은 것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의 방향은 일사불란한 사역을 위한 조직운용이라는 것이다.

다른 교회에서는 신앙교육은 해도 되도 안해도 되는 선택사항에 가깝지만 본 교회에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사항으로 자리잡아 있다. 이는 담임목사인 김삼환 목사님의 목회철학이며 17년 동안 변함없이 강단에서 증거하신 메시지를 전한 것은 아니지만 어른이건 아이건 모든 사람은 신앙이 제일 앞서야 한다는 복음적 메시지에 기안한다.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들"교회 개척도 하나님의 강권하심 때문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길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의 허물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차츰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주님의 심정을 깨닫게 된것이지요. 영광의 보좌에 계셨던 주님도 나를 위하여 섬기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어 주셨는데 내가 섬기고 고난당하고 죽음에 넘기우는 것을 무서워하고 싫어한다면 그것이 어찌 믿음일까 보냐 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왜냐면 사실 은사로 사람고쳐주고 다니면서 전도하고 성경가르치면 대접은 더 잘받거든요. 그러나 목회는 인내하지 않거나 섬기지 않으면 열매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처음 병고침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청 건너편에서 개척되었고, 개봉동으로 잠시 이전했다가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따라 지금 이곳에 와서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10년이 되었는데 정말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10년을 돌이켜 보면서 왜 이렇게 우리교회가 많은 축복을 받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해답을 주의법을 사랑해서 읽는것과 가르치는 것과 짐을 지는 순종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광명교회의 새신자 교육은 특이하다. 새신자로 등록하면 특별한 새신자 공부를 시키는 것 아니라 시편과 잠언부터 읽게 한다. 이는 시편 19편에 있는데로 하나님의 법이 영혼을 소생케하고,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교육의 방법상으로도 거부감이 없으며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잇점외에 말씀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닫게 해준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기도를 너무 강조해왔다. 그결과 신비주의와 기복주의가 속출하게 되었는데 이를 치료하고 교정하는 일은 성경읽기를 시작하는 일이라고 함기룡 목사는 힘주어 말한다. 여호와의 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할 때 비가오고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는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하는 것이다.

 

성경 읽기는 기본적이며 쉬운 영성운동

 

필자는 함목사에게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질문해 보았다.

"제 자신부터 은사만 강조하고 그것을 사용할 때는 조금 교만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외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러한 신앙은 믿음의 초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울 사도도 믿음의 역사보다 사랑의 수고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보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실 성경중심으로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어디있겠습니까마는 저는 더더욱이 강조합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교회에서 은사받고 교만하다가 넘어진 사람도 우리교회에 오면 안정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경에 이미 모두 다 말씀해 놓으셨기 때문이지요. 유혹도 이기고 자신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하나님말씀을 두기보다는 세상의 철학,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지요. 그게 다 속는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주일동안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앞에서는 신앙을 잘 시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원수앞에서도 시인하라고 했는데 이 입술의 고백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찬미의 제사라고 했는데 이게 잘 안되거든요, 저도 옛날에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자주 읽고, 또 마음 그대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의 죽음이 나타나는 것은 말씀의 경륜대로 하자면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서 이거든요. 그러니까 감당해야 할 고난이나 짐이 내게 오면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 뒤에 영광과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엔 이 비밀을 몰라서 성도들을 때로는 미워하고 고난을 비켜 갈려고 꾀를 많이 부렸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그 비밀을 깨닫게 된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목회가 참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함목사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순리이고, 또 그것이 능력이라고 재삼 강조한다. 끝으로 광명교회의 향후 비젼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저는 우리교회의 비젼은 마태복음 28:19-20에서 찾고져 합니다. 특히 그 중에서 '가르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교회 성경책은 여러 종류가 많이 나와 있지만 그것을 매일매일 읽고 낭독하는 신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여리고성을 앞에 두고 먼저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며'라고 말씀하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그 가운데 기록한 데로 다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다음에 여리고성을 7일동안 도는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기도가 먼저냐 말씀이 먼저냐고 묻는다면 성경은 기도보다 말씀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매자는 말하기를 좋아하고 지혜자는 듣기를 좋아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듣는 가운데에 내마음에 그 말씀이 부딪히면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길을 이미 성경에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즐겨 읽는자가 평강을 얻고 축복을 얻는 것입니다. 광명교회는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미국이든 중국이든 가리지 않고 가서 가르칠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이 때를 위해 가르치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이시대의 잣대로 보면 광명교회는 좀 별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성경의 잣대로 본다면 성경의 원리에 더 충실하게 가까운 교회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광명교회가 더욱 부흥성장하여 앞으로 한국교회의 말씀 사역에 더 큰 도전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 흔하디 흔한 교회성장 프로그램 하나 없이 오직 성경읽기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개척10년만에 600여명이 회집하는 기적을 일으킨 광명교회 위에 하나님의 더큰 축복이 넘치게 될 것을 기대해 본다.

 

 

 

 

17.분당 샘물교회

 

순교자의 믿음과 영성으로 현대에 도전하는

박은조 목사

(고려신학대-대학원-영국 런던바이블칼리지 졸업. 서울 영동교회 담임목사 현재 분당샘물교회 담임목사 고신목회자협의회 공동회장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운영위원)

 

 

도덕적인 본모습으로...고신교단 새신앙 추구

 

장로교 고신교단은 개신교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으로 꼽힌다. 일제말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던 인사들에 의해 해방 후 만들어진 고신교단은 '하나님 앞에 살자'는 모토처럼 대외적 활동보다 성경 정신 에 충실한 복음적 삶을 추구한다.

사진설명 : "땅 사서 예배당

짓는 교회가 아니고 지역사

회에 봉사하는 교회를 만들

고 싶다"고 말하는 박은조 목사.

 

그러나 80년대 이후 고신교단 내부에서는 무엇이 복음적인 삶인가 에 대한 성찰이 제기되고 새로운 신앙 형태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 나고 있다. 분당샘물교회 박은조(47) 목사는 그런 흐름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박은조 목사는 지난해말까지 17년간 봉직했던 서울영동교회 담임목 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박 목사는 70년대 후반 손봉호 서울대교수가 주도해서 평신도교회로 출범한 서울영동교회의 첫번째 담임목사로 시 무하며 고신교단 교회에 대한 외부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고신 교단 역시 종교개혁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은 세상을 섬기고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단이 그동안 폐 쇄적으로 보였지만 이제는 교회가 사회의 도덕성을 담보하는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예산의 절반을 지역을 위해

 

서울영동교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은 헌금의 절반 이상을 교회 가 아니라 외부를 위해서 쓴다는 점. 지난 97년의 경우 20억원의 헌금 중 11억원을 선교, 구제, 장학 등에 사용했다. 또 교인들은 혼자 사는 노인을 돌보는 등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에 열심이고 기독교윤리실천운 동, 밀알선교단 등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사회운동 단체에도 적극 참 여했다.

 

서울영동교회는 장애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전북 장수에 장애 인을 위한 11만평의 농장을 조성하는 등 장애인들에게도 관심을 쏟았 다. 또 북한돕기에도 적극 나서 평양의 병원 건립, 나진-선봉지구의 제약공장 건립에 적극 참여했고 탈북자들의 정착을 위해 강원도 홍천 에 '고향마을'이란 농장을 조성 중이다.

 

 

샘물교회의 분당시대

 

박은조 목사는 지난해 10월 스스로 서울영동교회를 떠나 분당에 샘물교회를 개척했다. 상가 건물을 빌어 서울영동교회 분당지역 교인 200 여명과 함께 시작한 샘물교회는 6개월만에 1000명이 출석하는 중형 교회로 자리잡았다.

"한 교회에 너무 오래 있으니까 영적인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이 50이 넘기 전에 변화를 시도해 보고 싶었습니다."박은조 목사는 "학교를 세워서 기독교적 교육을 실시하고 지역주민에 시설도 개방하는 새로운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필자는 향후 한국교회의 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성장은 목회자가 평신도를 얼마나 잘 동원하고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볼 때에 평신도를 활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역조직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로버트 로건박사는 다가오는 21세기의 교회는 구역교회(thecellgrou pchu -rch)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도 이 말에 동의 한다. 여기서 구역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에서 모이는 구역예배이상의 것이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일종의 소그룹, 혹은 자석집 단(magneticgroup)을 의미한다. 새 시대의 새 교회는 감옥과 같이 사람들을 교회당에 가두어두는 교회가 되지말고 중앙집권에 서 탈피하여 현장목회로 분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분당샘물교회가 지향하고자 하는 교회도 이러한 교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구역은 인간적 조직이상의 영적 생명체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구역교회는 바로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사도행전 242절에서 47절에 나오는 신약교회는 건강한 구역의 7대 기능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교육---가르침을 배우고 적용했다(42)

교제---다 함께 떡을 떼며 나누었다(42,46)

예배---성찬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 광을 돌렸다(42,47)

기도---기도하기에 힘썼다(42)

능력---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43)

봉사---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다(45)

전도---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다(47)

"고삐를 풀어라"

필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효과적인 구역 혹은 소그룹을 가지려면 소그룹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분당과 같은 문화률이 높은 신흥도시는 상대적으로 개인주의 가 강하므로 소그룹을 통하여 교인들간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해놓지 않으면 결국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나 현대인들은 익명성을 원하며 대형교회를 찾기 때문에 건강한 교회를 위헤서는 소그룸은 필수적이다. 소그룹은 교회 속의 교회이다. 소우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큰 교회일지라도 소그룹만 잘 활용하면 교회의 본질적 특성을 체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소그룹은 또한 자석집단으로서 다양성과 수용성을 살려 모든 종류의 사람을 다 끌어들일 수 있고 포함시킬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성별 나이 학력 경제 경험 직업 등에 따라서 얼마든지 독특한 자아정체를 가진 소그룹을 확장시켜 나 갈 수 있다. 살아있는 소그룹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포분열과 신진대사 가 원할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

다중리더십 필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당 샘물교회를 보며 생각하는 것은 다중리더쉽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소그룹 혹은 구역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다중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즉 전체를 관장하는 구역장(leader)외에도 회원들을 개인적으로 돌보는 목양자(shepherd)가 있어야 하고, 비신자들을 끌어오는 은사를 가진 전도자(evangelist)가 있어야 하며, 장소와 음식을 제공하는 초청자(host)가 필요하고 또한 말씀을 가르치는 인도자(teacher)가 함께 있어 일종의 팀 사역이 가능해야 건강한 구역의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맡게되면 항상 탈진하고 지쳐서 할 수 없이 일하는 형식적 리더십밖에 남지 않게 된다.

구역 활성화의 열쇠는 올바른 지도자의 선발과 훈련에 있다. 구역지도자를 위한 교육은 이른바 도제식 양육(appre -nticeship)이 성서적이다. 목회자가 생활과 사역가운데에서 함께 거하고 부딪치며 가르치는 교육이 실제적이고 효과적이다. 구역 지도자를 선발할 때에는 세 가지 자격, 곧 성품 경험 기술을 살펴야 한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영적 성품이 가장 중요하다. 경험과 소질도 중요하지만 우 선하는 것은 성품이 되어야 한다. 경험과 소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충될 수 있지만 좋은 성품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으면 쉽게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구역은 말 그대로 세포단위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세포분열이 일어나서 복제되고 재생산되어야 그 존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성도 수 1백명 당 6개 이상의 소그룹이 형성되고 가급적 모든 성도가 다 참 여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회에서 전체성도 의 25-30정도만이 구역 혹은 소그룹에 가입되어 있는데 이 수치를 70-80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성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구역을 성도들의 동질성, 예를 들어 직업이나 나 이,혹은 은사에 따라 구분하는 새로운 시도도 필요하다.

이러한 일련의 보충이 있을 때 분당샘물교회는 한국사회와 교계가 요구하는 그러한 교회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든다.

 

 

2001! 새로운 세기가 시작하는 2001년이 불과 수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격동과 변화의 20세기를 살아왔습니다.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을 시작으로 하여 20세기는 이상 사회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신념이 이 지구촌을 전쟁의 포화 속으로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20세기를 살았던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그 공산주의자들의 이념 전쟁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산주의의 망령이 걷히자 마자 옛날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는 인종과 종교가 얽힌 대 살육 전쟁이 몸부림치도록 처절하게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심슨 재판의 판결 결과가 보여주듯이 흑백간에 그리고 소수 민족과 주류 민족 사이에 심각한 인종간의 갈등에 시달릴 것이 분명합니다. 앞으로 인종과 종교 문제는 인류에게 심각한 갈등과 문제를 던져 줄 것입니다. 또 처처에서 기근과 홍수로 인한 죽음의 소식이 들려 오고, 이상 기온이 전 지구촌에 엄습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구촌의 위기는 이러한 외부적 환경에만 감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부적으로 현대인들은 전통적 가치 체계의 붕괴라는 정신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특별히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하지 않으며 공공연히 교회를 비난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나태하고 게으르며, 일부는 교회를 떠나가기도 하는 배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잘못된 가치와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끌고 가는 거짓 선생들, 거짓 교훈들, 거짓 가치관과 사상들이 만연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모습은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지구촌의 마지막 날이 가까이 다가올 때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었던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는 21세기에는 과연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어떠한 변화들이 우리 지구촌에 일어날 것이며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크리스천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21세기의 전망

 

다가오는 21세기를 맞이하는 이 지구촌은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 서 있습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지구촌에는 창조로부터의 변화에 버금갈 정도로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쳐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오는 21세기의 것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이러한 변화의 폭이나 속도가 줄어들는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 불확실성 속에서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과학 문명 (Technology) 입니다. 현대인들은 누군가가 하나의 이념(Ideology)이라고 까지 불렀던 이 과학문명을 통하여---플라톤이 철학자들의 지배를 통하여, 모어가 유토피아를 통해서,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이 공산 사회를 통하여 꿈꾸었던 이상 사회를 이루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학 문명은 지구촌과 인간의 생활을 빠르고, 편하며, 안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작고, 간편하며, 편리하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도달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하고, 단축시켜 왔습니다. 모든 것들은 인간의 노동에 의해 창조하였지만 지금은 기계가 만들어 내고, 인간은 기계를 조작하거나 기계를 감리, 감독하는 일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컴퓨터 하나만 하더라도 옛날에는 집채만한 컴퓨터를 가지고 일을 했지만 지금은 노트북이라고 하는 작은 컴퓨터로 대체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 문명에 의해 주도되는 엄청난 변화 앞에서 인간의 생활 구조와 사회구조 역시도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 속에 있었습니다.

 

정보 시대의 기계문명과 서비스 산업의 비대화

 

엘빈 토플러는 이 시대가 제3의 물결이라는 정보 시대 속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보 시대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지식들을 축적해 놓았다가 그것을 필요할 때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 정보 시대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옛날 컴퓨터 앞에서 책의 목록이나 찾던 시대에서 이제는 CD- ROM에 저장된 정보를 빼내어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보 혁명의 큰 발전 중에 하나가 Internet이라는 정보망입니다. 이를 통하여 세계가 하나의 Commu -nication-net로 묶여지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류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쉽게 말해 기계가 무엇을 인지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컴퓨터를 통하여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공지능을 발전시키고 있는 기계문명은 인간의 노동 형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과거 땀을 흘리며 일하던 노동자들은 점점 기계에 의해 대체되어 왔고 인간은 이 기계들을 감독하고 감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계 의존도는 나날이 높아 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저 기계만 작동시키면, 그 기계가 알아서 모든 일을 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기계에 의한 노동은 기계에 의한 인간의 지배와 함께 인간의 기능상실이나, 혹은 인간의 정신적인 쇠퇴를 불러올 위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계로 대체된 후 인간의 노동인구는 어디로 갈 것인가? 현재로는 대부분 서비스 직종으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21세기에 산업 구조는 1차 산업(농업과 어업등)2차 산업(기계 산업) 인구가 축소되는 반면, 3차 산업 (금융, 세일즈, 가게 점원등 서비스 업) 종사자가 비대해 질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주변을 살펴 보십시오. 실제로 우리 주변에 엔지니어나 아니면 철강 노동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화이트칼라 종사자들이거나, 세일즈맨이거나, 아니면 서비스를 판매하는 자그마한 업체 종사자들입니다. 이러한 서비스 산업의 비대는 인간들을 더욱 첨예한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게 하였습니다. 그 뿐 만 아닙니다. 인간의 실수나 아니면 파괴된 인공지능에 의해 기계가 인간을 공격하거나, 인간에게 엄청난 위해들 가져올 수 있는 일들이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도시화 및 인구의 도시 집중

20세기 우리는 이미 농촌의 붕괴를 경험하였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문화생활을 즐기기를 원하는 인간들은 이제 농촌이나 어촌을 떠나서 도시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농촌은 이제 농촌이라 불릴 만한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2백년 전에는 95%의 인구가 농촌에 있었습니다. 이 말은 그 때만 하더라도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도시가 많지 않았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사람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약 1백년 전에는 농촌 인구가 44%로 감소하더니 현재는 약 2%의 사람만이 농업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2025년이 되면 약 90%의 사람이 도시에 살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시화 현상과 농촌의 도시화는 다양한 삶의 변화를 가져올 뿐 아니라, 동시에 많은 도시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인구의 도시 집중은 오히려 이웃과의 경쟁심과 경계심을 유발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들이 주변인 (Secondary person)으로 전락하고, 이 주변인들의 소외감과 상실감, 그리고 범죄가 날로 증가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경계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집을 폐쇄시키고, 고립시킴으로 말미암아 점차 이웃이란 개념이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알고 있지 못하며, 그러한 지역적인 공동체 의식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 집중은 도시의 거주 환경을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자기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뿐입니다. 공해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앞으로 20년 내에 남극의 오존층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인구가 모여 살다보니 사회는 복잡하고 다원화되어 인간에게 많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안겨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성역 침범

 

21세기 노인 인구는 23%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가 있듯이 다가오는 세대에 인간의 생명은 연장될 것이고 어쩌면 22세기에 인간의 수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이 될는지 모릅니다. 이제 하나님의 것으로만 여겨졌던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이제는 인간의 것이 되었습니다. 낙태로 인한 생명의 단절은 이미 옛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낙태를 범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유전 공학의 발전은 생명의 기원과 생명의 존재 방식에 대한 유전자 코드를 발견해 내 가고 있습니다. 이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어쩌면 인간은 생명의 비밀을 밝혀 내기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인공적으로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 생명을 마음대로 연장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생명을 언제 끝내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안락사 문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것으로만 여겨졌던 생명에 대한 권리가 점차로 인간에 의하여 조절되어 가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경시 현상은 20세기와 21세기에 중요한 흐름이 될 것입니다.

 

변화가 던져 준 문제들

 

기계문명이 가져다준 이 변화의 회오리는 인간의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게 많은 문제를 던져 준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전통 가치의 상실과 질병들 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계문명이 가져다준 많은 혜택 속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기계문명이 가져다주는 변화의 폭과 깊이, 그리고 그 속도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인간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나아가 인간의 정신은 이러한 변화를 따라잡고 그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변화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가기에 급급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의 조절에 대하여 어떠한 윤리를 적용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분분하며, 낙태 문제를 놓고 찬반 여론이 갈라져 있습니다. 앞으로 인간이 기계를 지배할 것인가 기계에 의해서 인간이 주도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심각한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미 컴퓨터가 인간을 주도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빠른 사회적 변화 속에서 인간은 그 변해 가는 세상의 여러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한 변화를 충분하게 소화하고, 그 변화된 세상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그리고 그 현상에 대하여 가져야 할 태도나 명분들을 축적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류는 전통 가치들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또 상실돼서는 안될 귀한 가치들---진정한 사랑이라든지, 우정이라든지 하는 고귀한 정신적 가치들---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많은 상실 속에서 미래를 지배하고 이끌어 나갈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지 못합니다. 기계문명은 사회를 복잡하게, 그리고 다원화 사회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서비스 산업이 비대해 지면 비대해 질 수록 서비스 업종이 분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다양한 가치들이 새로이 창출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원화된 사회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이 상실되었습니다. 인간을 자제시킬 수 있는 전통 가치들이 그 힘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인간은 가치를 상실하고 표류하는 혼돈과 혼란의 삶을 이어나갈 것이 분명합니다. 이 혼란과 혼돈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21세기의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가치 상실에서 오는 심각한 범죄의 양상들, 심각한 스트레스에서 오는 각종 질병들이 인간을 위협하고 있고, 땀흘리는 노동의 상실과 과다한 칼로리 흡수 때문에 야기되는 각종 질병들 앞에 인간은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병들은 기계의 힘으로 조절할 수 없고 고칠 수 없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기계문명의 한계입니다. 기계문명은 인간의 물질적 생활은 조정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물질을 조정함으로써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병들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을 조정하고, 그 물질을 통하여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오염시킴으로서 발생한 인간의 정신적 질병과 문제들은 이 기계가 치료할 수 없습니다.

둘째, 서비스 산업과 오락의 지나친 비대 입니다.

1차 산업과 2차 산업에 치중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점점 그들의 직장을 떠나서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소형화를 추구하는 기계문명 속에서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편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을 노동에 빼앗겼던 인간은 기계가 그일을 대신하여 줌으로 인하여 상당한 시간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가 다원화되고 복잡하게 변화된 구조에서 인간은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남아 있는 시간의 여가를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여러 가지 오락을 즐기는 것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여가 선용과 스트레스 해소 욕구는 점차 거대한 힘으로 미국의 오락 산업(Entertainment)을 주도하여 가고 있습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은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요구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이들은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어떤 이들은 직접 스포츠를 즐기는 방법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레저를 즐기기 위하여 바닷가나 호수나 아니면 캠핑을 하면서, 조금 더 극단적인 사람들은 알코올이나, 마약의 남용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도박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걷잡을 수 없는 성 관계를 통해서 그들의 쾌락의 욕구를 해소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들은 텔레비전에 의존하여 코미디 프로그램을 즐기거나 음탕한 심야 토크쇼를 즐기거나, 아니면 이상한 성적 주제들을 설정하고 상대방과 치열한 입싸움을 바라다보거나, 아니면 영화를 통해서, 다시 말하면 이러한 미디어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통해 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면서 그들의 여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여러 다양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 철학과 종교에서 일파를 형성했던 쾌락 주의자 에피쿠로스가 다시 살아나 이 시대를 지배하는 거대한 쾌락주의 (Hedonism)의 공격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셋째, 물질의 인간 지배 입니다.

이러한 오락을 통한 즐거움의 추구 속에서, 그리고 물질과 기계에 의하여 주도되는 현대인들이 겪어야 할 가장 무서운 도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성의 몰락입니다.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인간이 물질과 정신의 배합 속에 있다면, 인간이 다른 짐승과 물질 세계와 다른 점은 하나님이 인간을 영성을 가진 생각하는 동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영성의 상실이란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타락후 인간의 노동은 무엇을 창조하기 위한 노동보다는 자기의 먹을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노동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타락 후에 인간은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먹는 문제가 상당히 해소된 21세기에도 인간은 먹기 위해서 노동을 할 뿐 아니라, 좀더 가지기 위해서, 좀 더 편하게 살기 위하여 타락된 노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지금 21세기를 맞이하는 지구촌의 인류들은 물질의 지배라는 이상기류 속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영적이거나 도덕적인 일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그러한 도덕적인 힘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조절하고 억제시켜 주는 여러 도덕적 가치나 표준이 그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현대인을 지배하는 것은 편하고 안락한 삶이요, 남에게 구애받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이것을 행복이라고 오해하고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주는 돈을 벌어들입니다. 사람들은 그 돈을 획득하기 위하여 남과 경쟁하고, 직장 생활을 합니다. 자기의 삶을 편하게 하는 이 돈을 획득하는 것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최우선적인 고려 사항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돈의 획득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최우선적 가치가 되어 버렸다는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이것을 수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 고려 가치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의 일과 영적인 일의 우선성 (Priority)를 따질 때 영적인 일을 우위에 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돈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충분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물질이 행복의 척도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돈을 버는 일을 최우선에다 두고 살고 있습니다. 이 현상이 물신숭배(Mammonism) 혹은 물질의 인간 지

배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도덕적 동물이요, 영적 동물입니다. 만약 도덕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이라는 사실들이 인간에게서 배제된다면 결국 인간은 포유류 동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동물적 본능을 억제하고 정신적 가치를 우위에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도덕성, 혹은 영성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물질과 본능에 의해 지배된다면 이것이 바로 파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야고보 기자는 이러한 물질 추구에 대하여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 1:15).

인간은 "영성의 상실""물신숭배"( Mammonism), 그리고 "쾌락주의" (Hedonism) 의 엄청난 영향력 속에서 점차 창조된 본래의 모습을 잃어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21세기에 예측되는 문제들을 정리하면 결국 사람들이 엄청난 변화의 회오리 속에서 가치(Value)와 표준 (Norm)을 형성하고 정립하지 못한 채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자기 생각하기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하는 것"(사사기 17:6; 21:25)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전통의 가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이 더 이상 현대인에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전통적 가치와 표준을 상실하고 자기 욕심이나, 자기 만족이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 가치이자 표준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와 표준의 상실은 인간에게 물신숭배라는 우상 숭배와 쾌락주의라는 부도덕성을 더욱 심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21세기 인간은 영성의 상실, 물신숭배, 그리고 쾌락주의 공격 앞에 대책 없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공격 속에서 교회마저도 그 빛을 잃어 가고 그 맛을 잃어 가며, 세속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이 던져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선적으로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살았는가?

 

2천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는 목수 일을 하다가 30세에 공적인 사역에 뛰어들어 3년의 사역을 통하여 수제자 12명과 핵심적인 제자 120(예수의 승천 후에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리며 미래를 대비했던 사람들), 추종자 5백명(예수의 죽음 후에도 40여일 동안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 그들은 감람산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승천을 바라다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엄청난 무리에게 강한 감화력과 영향을 미치고 사형수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그분이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살았고, 그들을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사역을 통하여 모든 민족,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분이 바라다보는 구원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으로 귀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예비자 였던 세례요한이 사람들을 향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쳤고, 또한 예수 그분도 그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치십니다. 모든 이들이 누리는 천국 생활이야말로 예수님의 비전이자, 사역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 시대의 민중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천국"이라는 비전을 통하여 그 시대의 민중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는가? 그것은 그 시대 민중들의 삶이 극도의 비참함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또한 경제적으로 그 시대 민중은 혹독한 좌절과 절망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나라가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베트남의 붕괴를 통해 그 나라를 탈출한 무수한 베트남 난민, 일명 보트피플(Boat People)을 보았습니다. 나라가 없는 설움이란 자기 자신을 보호할 자기 정체성 (Identity)의 상실과 같은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시리아와 이집트라는 두 강대국의 확장 정책 속에서 그들 두 세력이 마주치는 경계선이 되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늘 전쟁의 포화에 시달리면서 이집트와 시리아 두 강대국의 속국으로 전전하다가 마침내는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그 민중들이 절대적으로 따르는 하나님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그 백성들을 인도할 영적 감화력을 상실한채 형식에 급급하고, 무수한 민중들은 그들의 힘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각종 질병과 가난 속에서 찌들릴 대로 찌들려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보셨을 때 그들의 삶을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유리하고 방황하였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들을 보호할 사람이 없이 그저 그 삭막한 삶속에 내동댕이쳐 진 채로 삶의 목적이나 희망을 잃고 되는대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참하고 암울한 삶에 대하여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의 비전

 

이렇듯 유리하고 방황하고 있었던 그 시대 민중들을 예수께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그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연민'(Compassion)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그들을 위하여 산에 올라 밤새도록 기도하셨으며, 때때로 그들을 위하여 우셨으며, 때때로 그들로 인하여 가슴아파 하셨으며, 그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셨으며, 또한 그들의 마음과 육신의 질병을 고치셨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께서 웃지 않으셨겠습니까 만은 복음서 기자들의 눈에 비친 예수는 그만큼 죄로 인하여 방황하고 죽어 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급기야 유리하고 방황하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구원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사형수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천국 복음. 이것이 예수가 짧은 생애를 통하여 꿈꾸셨던 비전입니다. 그의 생애와 그의 사역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케뤼소),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디다케), 그 시대 민중을 치료하셨고( 테라피), 그는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사역을 통하여 천국을 이루는 것이 그가 모든 이들과 더불어 함께 들어가시고자 하셨던 구원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그분이 여셨으며, 그분을 통하여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갈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시대, 과학 문명이 이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 21세기의 상황 속에서 과연 인간의 삶의 질은 무엇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예수 시대를 살았던 민중의 삶과 오늘 최첨단의 과학기술의 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은 그들의 삶의 질에서 무엇을 변화시켰는가? 걸어다니던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있으며, 목화나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입다가 떨어지면 기워 입던 사람들이 입고 싶은 옷을 마음대로 입고 살며, 때때로 예수님이 떼어 주던 기적의 떡을 기대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성인병을 걱정할 정도로 잘먹고, 잘 마시고 살고 있으며, 여름이나 겨울, 더위와 추위를 걱정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그런 걱정하지 않고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 시대와 마찬가지로 병들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장티푸스로 죽던 사람들이, 페스트로 인하여 죽고, 페스트로 죽던 사람들이 천연두로 죽었으며, 이제는 암으로 인하여, 또 에이즈로 인하여 죽어 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끊임없는 전쟁 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민족과 민족이 서로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17.명성교회

명일동의 종소리에서 세계를 울리는 종소리로

 

김삼환 목사

(장로회신학대-아세아연합 신학대학원 졸업, 1980년 명성교회 설립, 당회장, 현재 숭실대-장신 대-국민일보 이사, 한기총 남북협력위원장.)

 

신앙심 불지핀 `새벽의 전도사'

 

매년 3월과 9월초가 되면 서울 강동구 명일동 일대의 도로는 새벽마다 인파로 붐빈다. 손에 성경과 찬송가 책을 들고 이들이 줄지어 향하는 곳은 명성교회(예장 통합). 이 교회가 일주일 내지 열흘간 실시하는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교인 수는 매일 2만여명에 이른다. 또 명성교회 가 평상시 매일 갖는 새벽기도에도 50006000명이 참석한다.

 

'새벽기도로 교회 부흥의 불을 당겼다'는 명성교회는 19807월 김삼환(54) 목사에 의해 설립됐다. 경북 영양 출신인 김 목사는 장로회신학대를 졸업한 후 허허벌판이던 명일동에서 상가의 방 한칸을 빌어 교회를 시작했 다.

"목회 방향을 고민하다가 새벽기도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노인과 여자뿐 아니라 젊은 남자도 참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새 방식이 필요했 습니다. 그래서 방언이나 통성기도보다는 성경 공부와 설교에 중점을 두 기로 했죠.".

명성교회의 새벽기도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명으로 출발한 신자는 매년 두배씩 증가, 등록신자 5만명의 초대형교회로 커졌다. 신자가 급증 하자 1984년 인근 논에 1500명이 들어가는 자체 교회를 지었고 1 989년 그자리에 다시 4000석 규모의 현재 교회 건물을 신축했다.

이 같은 성장의 원인에 대해 김 목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창립 이후 교회에 사고와 갈등이 없었고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노력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들어 쓰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명성교회는 교회의 안정과 성장을 바탕으로 점차 밖으로 눈을 돌렸다. 전국 각지의 어려운 교회와 해외선교사를 후원하고 장애인-교도소- 군경 등 특수선교로 지원 대상을 확대했다. 명성교회는 현재 경상비의 절반을 선교와 사회봉사에 사용하고 있다. 김 목사는 "한국 교회는 영혼 구 원과 교회 건물 짓는데만 치중한 느낌"이라며 "이제 사회와 시대의 요구 에 부응하는데 눈을 돌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제는 한국교회를 디더하는교회로

 

김삼환 목사가 또 하나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개신교의 일치 와 협력. 한국 개신교의 최대 과제가 교파와 교단을 넘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연합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다 른 교단 중진 목회자들과도 자주 만나 함께 할 일을 찾으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의 교회학교를 꿈꾼다.

 

1980년 명성교회가 개척되어 창립한 이래로 교회 전체의 성장에 따라 교회학교도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다. 명성교회의 성장 이면에는 주일학교의 성장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명성교회 교회학교가 먼저 비약적인 성장을 한 것이다. 명성교회 교회학교의 일반적 상황을 보면, 현재 교회학교 재적인원이 11,000명이며 매 주일 출석하는 인원이 8,500-9,000명 선이다. 물론 이 인원은 영아부에서 청년부까지를 포함하는 인원이다. 통상적으로 재적인원은 허스가 많다고들 하는데 본 교회학교의 경우는 재적인원이 거의 출석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예배가 중심이다.

 

우리 교회학교의 모임은 주일예배와 반별 공과공부로 단순하다. 오후에 부서별로 제자훈련을 하는 부서도 있지만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주일 오전에 모든 모임이 끝난다. 모든 교회학교의 예배는 같은 예배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영아부에서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대예배실에서 장년이 드리는 예배순서와 같은 순서로 진행되어 아이들이 각 부서별로 예배를 드리다가 대예배실 장년예배를 참석하더라도 큰 어려움이 없다. 장년 예배와 아이들 예배의 차이가 있다면 설교시간이 짧아진다는 것과, 축하순서와 광고시간이 아이들에 맞게 운용된다는 점이다. 보통 한개 부서가 모이는 시간은 1시간 20분으로 1시간은 예배를, 20분은 반별로 공과공부를 하게 된다. 교육관 시설이 많이 모자라서 한개의 예배실을 가지고 세개의 부서가 번갈아가며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가장 빠르게 모이는 부서는 아침 750분에, 그 다음에는 930분에, 마지막으로 1120분에 모이게 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시설이 모자라서 시간을 나누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선택 폭이 넓어져서 출석인원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는 것이다이 것은 담당 목사의 말이다.

명성교회 교회학교는 예배가 중심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만치 예배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가장 은혜스러운 시간으로 느낀다. 이를 위해서는 엄숙함도 있지만 기쁨도 함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우선 장년예배 자체가 축제적이기 때문에 교회학교도 이런 영향을 받아 대체적으로 축제적이다.

 

교회전체 행사에 전교육부서가 함께 참여해

 

명성교회만의 특징중의 하나는 특별한 프로그램은 평소에는 하지 못하고 교회 행사 때나 절기 시에 교회 전체가 모여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50여 개 부서 각자가 어떤 행사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보다는 전체의 역량과 노력과 현신을 모아 함께 하는 개념이다.

보통 한달에 한번꼴로 교회적인 큰 행사나 절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쉴새없이 프로그램이 진행된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행사가 진행되는지는 아래의 표를 참고하되, 장년에 행당되는 행사나 절기에 교회학교 학생들이 모두 참여한다는 점을 기억하여야 한다.

 

목회자 중심, 교회 중심의 조직 운영

 

교회를 운용하는 조직은 매우 단순하다. 전체적으로는 담임목사와 교구목사 그리고 교육목사들과 교육전임 사역자들이 있다. 교역자들은 부서운영 전반을 지도하면서 예배의 설교를 담당하며, 무엇보다 담임목사님의 목회철학과 지시가 각 부서에서 실현되도록 철저한 대리목양을 담당한다.

교육위원회는 위원장 1인과 부위원장 3, 그리고 실무조직 위원 40여명이 교회학교 전반에 관한 재정관리와 사역지원을 하고 아울러 감독기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교육부 사무실에 상주하는 장로 1인과 집사 1, 사무원 1인이 일반행정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부서는 영아부에 청년부까지 50여개 부서로 구성됟어 있고, 각 부서마다 부장 1인과 부감 1, 총무 1인 교사 평균 25, 보조교사 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교회 조직의 특징은 철저하게 목회자 중심, 교회 중심의 운영을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각 부서별로 나름대로의 무엇을 하기보다는 교회 전체의 흐름에 함께하는 데 그 초점이 있다. 교역자들은 토요일 오전 10시에 전체가 모여 주일을 준비하는 모임을 한다. 30분간 진행되는 모임을 통해서 경건회로 사명을 고취하고, 각 부서 주보로 교회나 교회학교 전체의 지시사항을 전달한다. 아울러 다음날의 설교에 대한 점검을 하게 된다. 주일을 지난 후에는 저녁 예배를 마친 9시경에 모여 각 부서 사항을 교역자 보고를 통해서 확인하고 평가한다. 교육위원회는 매월 마지막주일에 열리는 부장월례회를 통해 각 부서에 필요한 지원사항을 점검하고 행정적인 지도를 한다. 매 부일 새벽기도회 후에는 총무 전체 모임을 통해서 지도 사항을 전달한다. 그외에도 많은 것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의 방향은 일사불란한 사역을 위한 조직운용이라는 것이다.

다른 교회에서는 신앙교육은 해도 되도 안해도 되는 선택사항에 가깝지만 본 교회에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사항으로 자리잡아 있다. 이는 담임목사인 김삼환 목사님의 목회철학이며 17년 동안 변함없이 강단에서 증거하신 메시지를 전한 것은 아니지만 어른이건 아이건 모든 사람은 신앙이 제일 앞서야 한다는 복음적 메시지에 기안한다.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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