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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목양 단상[1,073]〓/목양 처신 요령

목회자의 영성(벧전 2:1-5)

by 【고동엽】 2022. 2. 24.

목회자의 영성

(벧전 2:1-5)

 

 

 

하나님의 은혜로 제 4회 전국 목회자 세미나가 개최되었습니다. 참석하신 동역자님들께 주님의큰 은총이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제는 “교회 발전을 위한 영성 개발”입니다.

 

전 성서를 통하여 영성 개발에 위대한 가능성을 보여 주었던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교회를 세운 특별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베드로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문벌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능력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그는 높은 학문을 쌓은 지성인도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토록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나중 생애를 보면 그가 크게 쓰임받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될 충분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가 설교할 때 삼천 명이 회개하고 제자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한 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당시에 엘리트라고 하는 관원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높은 학문적 지성도 겸비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다가 인류 역사를 위해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능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살에 가슴이 설레이게 됩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우리의 영성도 베드로처럼 개발된다면 그런 체험적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위대한 가능성과 변화된 인격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갈릴리 어부로 잔뼈가 굵도록 고기를 잡던 시몬이 동생 안드레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게바’라고 하는 것은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배외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여기서부터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따라 다녔습니다. 가버나움으로, 사마리아로, 나사렛으로, 두루와 시돈으로 두루 다니면서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시는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고백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네 이름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완벽한 신앙고백과 그에 따른 주님의 칭찬도 놀라운 것이지만, 베드로의 책망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다시 놀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제 삼일 만에 살아 나리라”고 하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리 마옵소서!” 결단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라고 만류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생애에 그토록 큰 충격은 없었습니다. 책망는 여러 번 들었으나 그것들은 대부분 조용한 권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청천벽력 같은 책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나를 따락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으나 그는 언제나 인간적인 생각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일만을 생각하자 그의 영성은 신비롭게 개발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음으로 인하여 그이 생애는 영적인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고 참으로 위대한 영성의 사람으로 변회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신앙 고백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신도들의 인격 위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인격 위에 세워진다는 입장이 카톨릭입니다. 저는 오히려 가톨릭의 입장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입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는 신앙고백만으로 교회가 살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신앙과 인격이 결국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모두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인격의 영성은 다릅니다. 그러기에 영성이 바로 개발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교회로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제자가 나왔고 제자로 인해 성도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지상의 교회는 곧 사도들의 교회요, 사도들의 교회는 곧, 성도들의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세운 제자가 교회를 세웠고, 그 제자들의 교회가 곧 우리들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교회는 언제나 목사의 신앙, 사상과 인격 이상의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초대교회 위대한 모습은 베드로의 신앙과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요, 오늘의 한국 교회는 결국 우리들의 열정적인 사역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 교회가 역사적인 의미를 상실하는 모습의 원인 또한 목회자의 사상적인 빈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중대한 영적 자각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인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곧 교회이듯, 우리는 이 시대의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입니다. 저는 최근에 크게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는 교회다’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당을 세우는 일이나 교인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지상에 큰 교회가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신앙과 인격, 이것이 바로 그 시대의 교회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큰 교회는 교회이고, 작은 교회는 새끼 교회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사업적인 면으로 보면 큰 교회가 구제와 봉사 등의 일할 수 있는 능력이 더 큽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대에 어떤 목사가 있었느냐 입니다. 이것이 사업보다 중요합니다. 교회의 크고 작음보다 ‘살아있는 목사가 몇 명이나 있었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을 바로 깨닫는 것이 목사의 영성입니다. 오늘날 모두가 사업인들이 되었습니다. 큰 사업, 큰 교회, 큰 건물….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리.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한 자들이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니” 참으로 두려운 말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들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것이 사역의 본질이 아닙니다. 목회는 ‘Being’에 관한 문제이지 ‘Doing’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업에 관한 문제가 이니고 존재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목회가 일보다 인격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자신의 인격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하고 땅의 사업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일이요, 예수 따르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7장 15-20절을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른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매는 선지자의 행위와 인격입니다. 중요한 것은 목사와 맺은 교인의 인격입니다.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내 제자들이 어떤 인격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말씀하신 핵심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운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훌륭하심은 그 제자들 때문에 더욱 빛이 납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이 베드로의 인격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인격, 우리들의 나무 됨은 맺는 열매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섬기고 있는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는가를 보면 알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그 나무가 달라지므로 그의 교회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당시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로 그의 목양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시는 주님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며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신령한 젖’,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장’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성 개발은 신령한 변화입니다.

 

첫째, 목사는 신령한 젖을 공급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베드로는 신령한 젖을 공급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말씀을 신령한 젖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신령한 젖을 먹어야 신령하게 살이 찌고, 신령한 모습이 나타나고, 신령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신령한 젖은 신령한 목자만이 공급할 수가 있습니다. 신령한 젖은 곧 설교자의 영성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 젖을 먹습니다. 어머니의 젖은 생명의 양식이요, 건강의 원천입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따스한 젖가슴을 만지면서 잠이 듭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자기의 젖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기뻐하는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밥을 많이 먹었습니다. 가난해서 밥을 굶게 되면 아이에게 젖을 줄 수 없어 눈물로 아이의 얼귈을 적셨습니다. 가난한 시절, 우리 어머니들은 허기진 배를 부둥켜 안고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리지만 젖이 나오지 않아 눈물로 그 젖꼭지를 적시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요, 목자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엑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마음을 가질 때 목회자는 신령한 마음에서 신령한 젖을 공급하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가 마음이 상하면 아이는 젖을 먹고 설사를 했습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젖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젖이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 젖을 맛본 아이는 우유를 먹지 않습니다. 신령한 젖을 맛본 성도는 신령한 것을 사모합니다. 그러므로 순전한 신령한 젖을 맞본 우리의 양떼들은 세상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은 온통 세상의 일에 몰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들이 계속해서 신령한 하늘 젖을 먹이지 않고 세상의 우유와 같은 짐승의 젖을 먹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후, 신령한 젖이 흘러 넘쳤습니다. 신령한 젖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즉 생명의 영성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만날 때 큰 일이 이루어집니다. 에수님을 만날 때 병을 고침받는 것입니다. 사업이 번창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지혜를 얻고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설교는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신령한 젖을 먹이는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신령한 영성을 가진 최고의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마다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베드로처럼 위대한 설교자의 영성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주여, 십자가에 죽을 수 없습니다”하며 예수님의 사역을 막아서던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맏고 입을 열때마다 십자가의 부활을 외쳤습니다.

 

신령한 젖은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젖은 곧 자기가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산 사건의 체험 속에서만 공급되어 집니다. 신령한 젖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즉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시므로 제자들이 맛본 은혜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신령한 젖이 흘러 나오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신령한 집을 세우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4-5)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령한 집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있고, 성도가 있고, 설교가 있으면 교회가 이루어 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당 크게 짓고 그 곳에 성도가 많아야 큰 교회인 줄 알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돌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땅에 붙은 반석은 깨트려 운반해 와야 성전으로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베드로’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반석은 땅에 붙어 있는 돌로 집을 지을 수 있는 돌이 아닙니다. 반석을 깨어지고 운반되어야만 집짓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시몬은 흙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선고를 받은 아담의 후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는 이게 흙이 아니고 반석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흙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반석은 땅에 붙어 있습니다 비바람이 불고, 홍수가 넘쳐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가 신앙 고백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반석은 땅에 붙은 반석입니다. 땅위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재하셔서 그 반석을 칠 때 떨어져 나왔습니다. 이제 집을 짓는 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결코 신앙 고백만으로 교회는 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검이 그 반석을 칠 때 반석을 깨어지고, 그때부터 머릿돌이신 주님에게 붙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일 신령한 집을 짓는 산돌의 신비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신비한 비밀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의 육체가 깨어지는 반석임을 알았고 부활로 산돌이 됨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신령한 성전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지상에 세우는 돌집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46년간이나 지은 헤롯의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삼 일만에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성전이 예수님의 몸을 가리킨 것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날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나가면서 “예수님, 저 성전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모든 건물을 잘보아 두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저 돌들이 어느 하나라도 제자리에 얹어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질 것이다” 예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건물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 있고 지금도 세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마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예루살렘 성전을 짖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은 성전을 지은 솔로몬을 자랑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 그의 인생은 많은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일생이었습니다. 우리가 성전을 지은 솔로몬의 축복을 이야기하지만 축복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은 지었으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다시 사는 부활의 신비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솔로몬은 눈에 보이는 돌집은 지었으나 신령한 집은 짓지 못하고 넘어진 사람입니다.

 

성서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왜 위대합니까? 베드로나 바울이 땅 위에 건물을 짓는데 신경을 썼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도들의 발 앞에 날마다 재물을 갖다 놓았지만 사도들은 그것으로 교회당을 짓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교회당을 짓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모이려면 건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당을 크게 짓고 하나님의 일을 모두 다 한것처럼 자기 만족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십자가와 부활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는 인격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 건물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한 가지 기억하십시오. 역사 속에서 성전을 크게 짓던 타락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을…. 중세기 기독교가 타락했습니다. 한국의 불교가 타락했습니다. 인격위에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성장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회 성장이라는 것을 교회를 크게 짓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질이 많이 쌓이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 속에 신령한 인격의 집이 없다면 허상입니다. 예수님이 거하실 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은 건물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신령한 돌이 된 성도들이 심령입니다. 곧 반석처럼 굳어진 심령을 깨트리고, 옛 사람을 헐고, 산 돌로 세워진 신령한 집에 주님이 거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새 성전을 건축한 사도의 승리를 본받아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가 산 것이니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 자기 몸에 성전을 건축했던 사도들의 영성을 전수받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초대 교회는 베드로의 위대한 영성으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이들은 땅의 일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몸으로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활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을 보십시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음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 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교회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위대한 교회를 세우는 목회자의 영성을 보게 됩니다. 반석이 깨지고 산 돌이 된 베드로의 위대한 영성이 교회에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된 것은 결국 순교자가 된 데에서 찾아집니다. 목회자가 가야 할 길은 순교자의 길입니다. 목회자의 최고의 영성은 순교자의 영성입니다. 이러한 영성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순교자는 십자가와 부활을 몸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셋째, 목회자는 신령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시대 성전에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는 칼잡이들입니다. 칼을 들고 짐승을 잡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말씀의 칼을 들고 교인들의 짐승의 근성을 잘아야 합니다. 칼로 죽이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만날 때마다 동물의 근성을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불태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자기 피로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간 거룩한 제사장이십니다. 자기 몸을 친히 죽이셨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집에서 신령한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린 자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셨고 사도들도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양치을 자들인데 그릇된 목양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양을 사업적을고 기른다는 것입니다. 양을 먹이고 살찌워 털을 깎고 젖 짜먹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털 깎고 젖을 짤만 하면 다들 가버려요.”라고 하면서 섭섭하다고 합니다. “그래, 자네는 양을 길러서 젖을 짜 먹고 털을 깎아쓰려고 길렀는가?” 우리는 젖과 털을 탐하는 목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성서적인 의미에서 양은 젖을 짜먹고 털을 깎아 가지기 위한 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양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죽였습니다. 양치는 자는 털을 깎고, 젖을 짜 사업을 확장하려고 양을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양을 죽이기 위해 기르는 것입니다. 신령한 목회는 양들에게 신령한 젖을 먹이고, 신령한 집에서 살게 하다가 결국 신령한 제물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제물은 스스로 죽는 제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희생 제물이 되셨듯, 이제 목회자는 스스로 주의 제단에 순교의 제물로 자원하여 올라가야 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믿음의 선지자들 대부분이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아벨,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많은 사람들이 양치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고 그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털을 깎거나 젖을 짜기 위해 양을 기르지 않았습니다. 제물이 되도록 길렀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부흥될 때 목장이 번영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한 마리도 제물 될 사람이 없으면 그 목장은 실패하는 것을…. 털 깎고, 젖 짜고, 새끼 낳고, 그래서 번창하기 위한 목장이 아닙니다. 제물 삼을 양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인들을 보면서 ‘신령한 살이 찌고 신령한 털이 자랐으니 저 양이 제물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아, 저 사람 헌금 잘내고, 저 사람이 젖을 잘내는 것을 보니 이제 살맛이 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면 회개할 일입니다.

 

베드로 목자에게서 신령한 젖을 먹고 자란 스데반은 주의 제단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순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신앙적 열정고 헌신의 절정이 스데반에게서 나타납니다. 초대 교회가 모이고, 기도하며, 성령이 충만하고, 기적이 나타나며 남녀의 무리가 수만 수천이 되는 것에 순교자들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스데반의 순교는 베드로의 신령한 목회에 나타난 최고의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네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며 무릎을 꿇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자기 몸을 제물로 삼는 신령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제물이 되어 양을 살려야 합니다. 양은 마지막 제물입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목표는 평신도입니다. 이들을 위하여 목사도 세우고 장로도 세웁니다. 목사는 소모품입니다. 목사는 죽으라고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성을 가진 목사의 의식입니다. 자신을 소모시켜서 양을 살찌워야 합니다. 죽음으로 양의 양식이 되어준 목자만이 제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양을 길러 털을 깎아 옷을 해입고, 젖이나 짜먹는 목자에게는 결코 제물될 양이 나오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사에서 나오는 위대한 순교 사화입니다. 로마 교회의 식스투스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는 경건하고 인자하여 그의 목회에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는 빈민 구제와 사랑을 실천하여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그를 처형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조용히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식스투스 감독이 사형장에 끌려 갈 때 라우렌티우스 집사가 식스투스의 뒤를 따라 가면서 “아버지여, 당신께서 제단으로 나아가실 때 늘 저에게 도움을 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식스투스는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며칠 후면 나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당시에 식스투스 감독의 교회 수석 집사로 거대한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식스투스는 수천 명의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와 불구자들을 살리는 민중적 목회를 하는 감독이었습니다. 이 막대한 재산을 알게 된 로마 시장은 교회의 모든 재산을 상납토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교회 재산을 정리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워 상납일을 연기하도록 허락받고 교회당의 모든 보물을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의존하고 있는 수천명의 민중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그 사람들을 모집하였습니다. 약속한 날 시장이 교회당으로 올라오면서 “보물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문을 활짝 열고 소경, 병어리, 걸인, 병자, 고아, 과부의 무리를 가리키며 “교회의 보물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목회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에 돈 많은 사람이 등록하면 보물이 들어 왔다고 생각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들을 보면 걸레처럼 여기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나 저나 그렇게 생가할 때가 많았을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들이 바로 나다. 이들이 바로 나다. 이들이 바로 보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식스투스의 위대한 신앙을 본받는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로마 황제 앞에서 숯불로 달구어지는 수난을 당합니다. 그는 불에 타 마지막 순교의 제물로 죽어갔습니다.

 

신령한 목자가 있는 곳에 순전한 양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신령한 목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령한 목자가 있는 곳에 신령한 교회가 있습니다. 신령한 베드로에게 신령한 스데반이 나오듯, 신령한 목자가 될 때 교인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위대한 목회자의 영성은 순교자의 영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땅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을 들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때도 갈릴리 바다로 고기잡으러 갔습니다. 연약한 베드로였습니다. 제자로서도 실패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3년동안 따르며 배웠으나 주님을 닮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후, 베드로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 못하던 일들이 성령을 받으므로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서 신령한 세계를 알았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령한 젖을 공급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반석은 깨져 산 돌이 됐고 신령한 집이 세워졌습니다. 신령한 제사장으로 자기 몸을 순교의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기간에 세 가지면에서 영성을 개발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영성을 개발하여 신령한 젖이 흘러 넘치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의 영성을 개발함으로 교회가 발전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영성이 개발되어 하늘나라 면류관을 쓸 수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관점에서 본 목회자의 자세

 

제 1장 서론 ․․․․․․․․․․․․․․․․․․․․․․․․1

1. 연구동기와 목적․․․․․․․․․․․․․․․․․․․․․1

2. 연구범위와 방법․․․․․․․․․․․․․․․․․․․․․1

 

제2장 베드로의 성장환경과 부르심․․․․․․․․․․․․․․․․․․․․․2

1. 베드로의 직업․․․․․․․․․․․․․․․․․․․․2

2. 베드로의 부르심․․․․․․․․․․․․․․․․․․․․․2

 

제3장 베드로의 훈련과 참 사도가 되기까지․․․․․․․․․․․․․․․․․․3

1. 베드로의 훈련․․․․.................................․․․․․․․․․․․․․․․․3

2. 부인과 회복․․․․․․․․․․․․․․․...................................․․․․․․5

3. 참 사도가 되기까지․․․․․․․․․․․․․․.........................․․․․․․․6

 

제4장 베드로의 사역․․․․․․․․․․․...........................․․․․․․․․․․7

1. 기도하는 베드로․․․․․․․․․․․.............................․․․․․․․․․․7

2. 동역자들․․․․․․․․․․․․․․.......................................․․․․․․․8

3. 선교현장의 평신도 동역자․․․․.................․․․․․․․․․․․․․․․10

4. 성령의 사람 베드로․․․․․․․․․․․․․․․........................․․․․․․11

5. 예수를 위하여 능욕받는 기쁨․․․․․․․․․․․․․...........․․․․․․․․12

6. 베드로의 이적․․․․․․․․․․․․․․․․․․․............................․․․․․14

7. 삼천명의 침례․․․․․․․․․...............................․․․․․․․․․․․․15

8. 베드로의 순교․․․․...............................․․․․․․․․․․․․․․․․․16

 

제5장 결론․․․․․․․․․․․․․.......................................․․․․․․․․17

 

?현대목회자의 방향․․․․․․․............................․․․․․․․․․․․17

1. 부르심의 확인․․․․․․․․․․․.................................․․․․․․․17

2. 영성회복․․․․․․․․․․․․.....................................․․․․․․․․․17

3. 순교의 날까지․․․․․.................................․․․․․․․․․․․․․18

 

참고문헌․․․․․․․․․........................................․․․․․․․․․․․․19

 

 

 

 

제1장 서론

 

 

 

1. 연구동기와 목적

 

1. 기독교 한국침례회 구로 지방회 ‘98 시취 위원회 전도학 부분논제를 베드로의 사역에 대하여 논하라 ’를 제시한데 기인하며

2. 베드로의 사역을 연구하여 실전 목회에서 응용함으로서 참된 목회 전도하는 목회를 실천할 수 있는 목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3.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요 사도행전에 중심적으로 나타나는 인물 중에 하나이다. 무엇 때문에 그가 그토록 열정 적으로 전도 할 수 있었는지 어떠한 조건들이 긍의 사역을 가능케 했는지 그의 부르심과 그의 행적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2. 연구범위와 방법

 

1. 베드로의 사역에 대하여 베드로의 성장환경부터 조사하였고 베드로의 사역을 하게된 원동력 그리고 순교까지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부분을 고찰해 보았다.

2. 연구자료는 베드로의 성장 환

경에 대한 책들 그리고 인간적인 면을 다른 부분들을 주로 참고했으며 주석과 논문집도 인용하였다.

 

제2장 베드로의 성장환경과 부르심

 

1. 베드로의 교육과 직업

베드로는 벳세다에서 자라났다. 그의 직업이 어부인 것으로 보아 그의 선친도 어부였을 것이다. 그는 성장한 사람이 되어 가버나움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형제 안드레와 짝이 되어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와 함꼐 어업에 종사하였다. 베드로의 직업이 어부인지라 그의 이미지는 건장한 몸에 굵은 손과 팔씨름꾼 같이 뚜벅뚜벅 걷는 모습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성격은 마음이 여리고 순진하며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다. 주의 부름을 받았을 때 망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마 4:14-20).

그는 회당교육이상을 받지 못했다. 아니면 그 이하일수도 있다. 토라는 회당에서 구전으로 알았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공회원 조차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이 여겨(행 4:13)라는 공개적 반응이 나온다.

 

2. 베드로의 부르심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을 때 그는 기혼자였고 형제 안드레와 공유하는 집에서 장모를 모시고 있었다(막 1:29-30). 베드로는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게바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성급한 베드로가 떼로는 비겁하기도 했던 베드로는 성난 거센 파도에 끄덕하지 않고 태연히 고난과 대결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출발시킨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의 능력부터 보여 주셨다. 그때부터 베드로는(눅 5:8)라고 외친 것은 그 자신이 주님을 인해 자신의 위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베드로는 언제나 주님을 가까이 따라 다녔다. 회당장 딸이 죽었다 살때도 그랬고 변화산에서 주님과 함께 엘리야와 모세를 만났으며 겟세마네 동산에도 주님을 따라갔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기도 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서 주께서는 사랑을 확인하시고 ‘젊어서는 제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띄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5-18)고 말씀하시므로 주의 종으로 부르심에 대한 사명을 부여하신다.

 

 

 

 

제3장 베드로의 훈련과 참 사도가 되기까지

 

1. 베드로의 훈련

주님은 베드로를 특별히 아끼셨지만 베드로는 약한 인간이요 성미 급한 야생마일 뿐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붙들어 여러 가지 훈련을 시켜서 길이 잘든 적토마 같은 주님의 제자로 만들어 놓으신다. 예수님은 어디나 베드로를 데리고 다니셨고 베드로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을 많이 보며 따라 다녔다. 그중 베드로의 중요한 훈련 몇 가지를 짚어보자.

 

1) 물위를 걸어감

심한 바람과 파도가 있는 갈릴리 해 밤새도록 노를 저어도 얼마 나가지 못하였을 새벽에 무슨 물체가 물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접근하였다. 그때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소리 지르지만 예수께서 내니 두려워말라고 안심시키신다. 그때 베드로는 충동적으로 “주시거든 나를 명하여 물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7-28)하고 주님께 말한다. 주님은 “오라”하시고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가다 제 정신이 들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소리 질렀고 예수께서 붙잡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훈련시키는 방법이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여 없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도발적인 믿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신 것이다.

 

2) 신앙고백

베드로는 충동적인지 신앙의 고백인지는 잘 파악되지 않지만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한다. 직선적이고 대담한 고백을 한 것이다. 이 고백에 주님은 네 이름이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약속하셨다.

 

3)모세와 엘리야를 만남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 다니다. 메시아에 대한 회의가 있을 법도 할 때 주님은 베드로를 변화산으로 이끌고 가신다. 이곳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모습이 기도 중에 그 옷이 희어지는 문득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데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때 베드로는 생각 없이 “주여 우리가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나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베드로의 신앙에 확신을 준 사건임을 두말할 것도 없고 평생 중요한 경험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2. 부인함과 회복

베드로는 주님에게 훈련받은 3년을 기억하고 있고 그가 메시야라는 확신도 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죽으리라는 생각은 미쳐 못했다. 그 운명의 밤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은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고 떠나지 않겠노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더 크게 다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말한다(막 14:29). 그러나 겟세마네에서 잠을 이기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한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자르지만 주님을 위해선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리고 주님의 잡혀가는 뒷모습만 바라보다 요한의 도움으로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 갈 수 있었지만 그곳에서 “예수당”이 아니냐고 묻자 아니라고 부인을 세 번씩이나 하고 닭이 두 번째 울자 베드로는 주님의 경고가 생각나서 목놓아 울고 만다. 이러한 베드로의 부인은 단순히 3회 반복이 아니라 진행적으로 증폭되는 것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두 번째는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게 되는 증폭 형식을 띠고 있다. 베드로는 변명의 여기가 없었다.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심하게 울었다. 예수는 전혀 가망이 없는 ?사태가 되고 정오쯤 진행되는 십자가의 처형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베드로는 한없이 울었다. 예수는 장사되었다. 베드로의 의기양양했던 모습은 간데 없고 무력한 외톨이가 되어 눈물만 흘렸다. 그런데 부활의 새벽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묘한과 함께 달려 먼저 무덤 안으로 뛰어 들었다. 주님은 계시지 않았다. 다시 사신 것이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첫 번째 회복신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그의 옛 직업으로 돌아갔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를 찾으셨다. 처음 베드로를 부를 때와 같은 물고기 잡는 이적으로 제자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 부탁하신다. 베드로는 드디어 회복된 것이다. 다시 주님을 뵈올 수 있고 부인한 것에 대한 용서도 받은 것이다.

 

3. 참 사도가 되기까지

그를 참 사도가 되게 한 것은 성령으로의 침례였다. 그는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개조되었다. 이전 베드로는 주님을 만났지만 그 시대 상황 때문에 나가서 전하지 못했고 또한 주님의 승천하시며 하신 말씀을 준행하기 위하여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기다렸다. 그때 가롯유다로 인하여 생긴 사도의 빈자리도 채우고 전혀 기도에 힘썼다고 말하고 있다. 오순절은 기쁨의 절기이나 오순절은 첫 열매를 거둔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나 바로 그 기쁨의 절기에 성령께서 임하신 것이다. 성령의 충만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신 명령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충만은 한계선이 설정되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체험은 완전하고 만족한 체험이다. 하나님께서는 체한된 분량만큼의 성령을 주신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예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다(요 3:34). 하나님에게는 인색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그때야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참 사도는 성령 충만한 즉 성령으로 일 할 수 있는 사도를 말한다. 성령 충만하기 전 베드로는 성질 급한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고 달라진 것이다. 담대해졌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적과 표적이 동반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알고 깨닫고 나가서 시작했고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진정한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로서 거듭난 것이다. 결국 베드로가 참 사도 되게 한 것은 성령 충만이었다. 목회자로서 완벽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영성의 회복 즉 성령 충만하여 주께서 원하시는 목회자가 돼야 할 것이다.

 

 

 

제4장 베드로의 사역

 

1. 기도하는 베드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형성사를 보면, 초대교회가 선교하는 교회였고, 기도하는 교회였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승천하신 후 성령강림 때까지 10일간 기도하고(행 1:4) 하늘로부터 권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남아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교회가 탄생한 성령강림절은 바로 열흘간의 기도로 잉태된 것이다. 거룩한 성령께서 오셨다고 해서 그들의 기도가 약해지지는 않았다. 실제로 성령 충만은 제자들을 더욱 기도에 의지하도록 했다. 성령강림에 이어 제자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쓴 것을 알 수 있다(행 2:42).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기도시간’(행 3:1)에 성전에 올라간 것을 알 수 있으며, 처음 박해를 받은 후에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다락방으로 돌아가서 연약한 교회를 위해 위로의 기도를 했다(행 4:23-24). 베드로는 욥바에서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던 짧은 시간 동안에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놀라운 환상을 보았다(행 19:9). 베드로는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고 그 지시대로 행했기 때문에 이방인 고넬로를 전도할 수 있었고, 이방인에 대한 복음전파가 하나님의 뜻임을 증거하는 사건으로 제시되었다. 헤롯에 의해 야고보가 순교를 당한후 베드로마저 붙잡혀 옥에 갖히게 되었을 때 초대교인들은 “그를 위하여 초대교회 전체 분위기가 기도를 앞세운 삶이었다. 이런 가운데서 지도자인 베드로가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2. 동역자들

베드로가 선교를 하는데 있어서 그 자신의 길만을 가거나 그 자신의 일만을 하려고 했던 고립적인 인물이 아니라, 단단히 결속된 동역의 필요성과 가치를 인식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재림이후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나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 수장 겪인 자로서 독선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모든 다른 사도들과 동역하는 좋은 본을 보이고 있다(행 2:14, 32).

3장에서 사도요한과 함께 동역하여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그로 인한 고통을 받게 되는데 여기서도 베드로는 혼자가 아닌 동역을 통한 선교를 하고 있다(행 3:1이후). 10장에선 고넬료와 그 가장에 성령을 부어 주심을 인하여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고백이 있은 후에 베드로는 침례를 베푸는데, 이때 자신이 직접 침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동역자 들에게 침례를 대신 베풀도록 했다(행 10:44-48). 이때 자신의 동역자 들에게 침례를 베풀도록 한 것은 ‘베드로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는 말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이때의 동역자는 베드로 선교에 있어서 소중한 힘이 된 것이 사실이다. 사도행전 외에도 베드로의 동역자를 만나 볼 수 있는 곳은 베드로전서다. 베드로전서 5장을 끝맺으면서 베드로는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벧전 5:12)라고 표현하며 한 동역자를 소개한다. 실루아노는 아마도 베드로전서를 대서해준 것 같다. 동시에 “내 아들 마가(벧전 5:13)라고 하며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소개한 것과 유사한 표현을 통해 또 다른 동역자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흔히 바울은 동역을 통한 선교를 한 반면, 베드로는 그렇지 못한 인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점은 바울의 저작이 많고, 베드로보다 바울의 선교활동이 더욱 상세히 알려져 있는 이유에서도 비롯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바울 못지 않게 베드로 역시 동역을 통한 선교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그로 인해 선교의 많은 결실을 거두었음이 분명하다.

 

3. 선교현장의 평신도 동역자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롯다에서 중풍병으로 8년을 누워있던 애니아라고 하는 사람의 병을 고치며(행 9:32-35), 이어 욥바에서는 병들어 죽은 다비다라고 하는 여제자를 성령의 능력으로 살리는 일을 한다(행 9:36-43). 이들이 고침을 받고 평신도로서 베드로를 도왔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또한 베드로는 욥바에서 다비다를 살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여러날 동안 하였는데, 피장 시몬의 집에 유하면서 그 일들을 감당했다고 할 때, 피장 시몬도 좋은 평신도 동역자가 분명하다(행 9:43, 10:6).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야고보 사도의 순교이후 베드로까지 옥에 갇히게 되었다(행 12:1-4). 이때 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교회가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다(행 12:5). 물론 핍박을 당하는 사도들을 위해 평신도들이 간절히 기도를 한 것은 초대교회의 소중한 힘이 되었다. 천사를 보내어 탈옥하게 하신 은혜에 힘입어 베드로가 먼저 간 곳은 이들 평신도들이 모여서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마가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었다. 이곳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로데라고 하는 계집아이 또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한 평신도 중 하나인 것이다.

베드로가 베드로전서에서 언급한 ‘실루아노’나 ‘마가’등의 중요한 동역자를 제외하더라도, 베드로에게는 많은 평신도들의 도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완벽한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선교사가 아닌, 핍박과 고통을 항상 곁에 두고 있는 베드로인지라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현장에 살고 있는 평신도들의 도움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성령의 사람 베드로

보어는 선교사역은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있다고 주장한다. 오순절에 교회는 증거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위임이 교회의 유기체적인 존재의 일부가 되었으며, 교회의 삶을 본질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자연히 그리고 불가피하게 증거하는 교회가 된다. 이는 어떠한 외부로부터 명령 때문이 아니라 자생적이고도 불가항력적인 내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함으로써 영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한 설교가 성령으로 이어감으로 된 것임을 아무도 의심할 수는 없다.

그의 설교는 능력과 확신에 가득차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관련되었던 예수님 생전의 대적들이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라고 물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의 말씀이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여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나가리라.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도 같은 경우이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돈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 8:20-23).

베드로는 자신의 뜻으로는 결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것이나, 성령께서 그를 택하시어 처음으로 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셨다(행 15:7).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 성령의 강력한 인도였음을 위에서 기록했지만, 사실 베드로가 환상을 세 번씩이나 보고 나서야 순종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말고 함께 가라 하셨다”라고 철저히 자신의 복음전파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행 11:12). “성령이 충만하여”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한 베드로는 분명 성령의 사람이요, 성령의 도구인 것이다.

 

5. 예수를 위하여 능욕 받는 기쁨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용기를 거의 보여주고 있지 못하며,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버려 두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쳤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이르러서는 이야기가 딴판이 된다. 그들은 놀라운 용기를 가진 자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 할 뿐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러번 걸쳐 그들이 대적들은 그들의 담대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행 4:13). 이는 자연적인 담대함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상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특별한 형태의 담대함이었다(행 4:31).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된 광경은 매우 인상적이다(행 4:1-4). 이 둘을 체포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백성을 가르치기 때문이요.

둘째,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을 전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섯째, 말씀을 전하니 믿는 자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곤경에 빠진 가운데서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행 4:9)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주의 이름을 전한다. 특별히 이 자리에서 베드로는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게 됨을 강력하게 전한다(행 4:10-12). 이 자리에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위협하며 다시는 예수의 이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베드로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 담대하게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

베드로는 고통 가운데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 더욱이 행 5장에서는 붙잡혀서 채찍질을 당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 당하는 무서운 고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여김을 기뻐했다(행 5:41). 그런 고통과 위협을 당한 후에 더더욱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행 5:42). 베드로는 철저히 성령을 의지하는 선교사였기에 고통 가운데서도, 죽음 앞에서도 당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이름이 전해지기만 한다면 나의 고통도 오히려 기쁨이라는 담대한 신앙을 가졌기에 그를 통해 놀라운 복음전파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복음을 위한 담대한 용기는 베드로 시대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선교사에게 필수적인 자질이다.

 

6. 베드로의 이적

사도행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기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베드로의 사역을 취급한 앞 부분에서 그러하다(행 3:6-8, 4:30, 5:12, 9:32-42). 사도들은 단지 기적만을 행하지는 않았다. 사마리아의 도시에서 빌립은 말씀을 선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적도 행하였다(행 8:7). 초대 교회에 있어서 기적은 예수의 사역에서와 같은 목적, 즉 믿음을 일깨우기 위하여 행해졌다. 거의 모든 경우에 기적에는 “많은 이가 믿었더라”(행 5:14, 9:42)는 결과에 대한 언급이 뒤따랐다. 이적 없이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유지되고 계승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그 당시에 만연하던 신비 종교들과 경쟁하는 새로운 신앙이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와 바울의 이적을 통한 선교를 여러 가지 형태로 평행 시켜 제시하고 있다. 베드로의 이적을 통한 선교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성전 미문에서 고침(행 3:1-10)

(2) 베드로가 저주하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음(행 5:5)

(3) 그림자의 치료능력(행 5:15)

(4) 귀신들린 사람을 고침(행 5:16)

(5)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함(행 8:14-17)

(6) 죽은 도르가를 살림(행 9:36-43)

(7) 이적 적으로 옥에서 풀려남(행 12:6-11)

위에서 기록한대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베드로의 이적사건 뒤에 “많은 이가 믿었더라”(행 5:14, 9:42)라는 결과를 볼 때, 베드로의 이적을 통한 선교는 초대교회의 선교방법 중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7. 삼천명의 침례

예수께서 선포하신 대위명령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가르침과 침례가 제자삼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사도행전에서 최초로 침례에 대해 언급한 것은 베드로였다. 그의 오순절 설교가 끝나자 듣고 있던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꾜?”라고 외쳤다. 이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 2:37-38) 회개하고 믿게 된 후에야 사도들이 침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행 8:36-38). 침례는 베드로(행 2:41), 빌립(행 8:38), 아나니아(행 9:18), 바울(행 16:15, 33, 19:5) 등에 의해 유대인(행 2:41), 사마리아인(행 8:12), 이방인(10:47-48), 그리고 침례요한의 제자들(행 19:5)에게 베풀어졌다. 특별히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후에 3천명에게 침례를 베풀었고(행 2:41),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의 문을 열게 된 고넬료 가정을 향한 선교에 있어서는 베드로 자신이 직접 침레를 주지 않고 그와 함께 온 형제 중 몇몇에게 침례를 베풀기를 부탁했다(행 19:47-48) 이는 만을 베드로가 침례를 주면 사람들은 ‘베드로의 이름으로’침례를 받았다고 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참조, 고전 1:15). H. Kane의 주장을 보게되면 침례가 선교에 크게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침례는 삶의 변화를 초래한 내적인 마음의 변화를 외부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그것은 새 신자가 공개적으로 기독교신앙을 고백하는 하나의 가시적인 행위이다”라고 말하며 새 신자가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인 기독교 신앙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는 가시적인 선포식이기도 하기에 선교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결실이며 동시에 죄사함과 구원을 가르칠 수 있는 기독교 신앙교육의 기회이기도 하다.

누구보다도 베드로는 침례를 선교의 중요한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 사도행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8. 베드로의 순교

베드로는 A.D 65년 전후하여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그의 ‘그 밖의 문서’에 기록 하였다가 후에 유세비우스가 교회사에 수록한 그대로를 굿 스피드(EdgarJ. Good Speed "The Twelue:9157)까 옮겨 놓은 글에 의하면 십자가에 거꾸로 달린 자기 앞으로 순교의 처형을 당하기 위하여 끌려 지나가는 자기 처를 보고 드디어 하늘의 본향으로 돌아감을 크게 기뻐하며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 격려와 위로를 하여 임자여 주님을 기억하시오” 하였고 이것이 베드로의 최후의 말이었다고 한다.

 

 

제5장 결론

 

? 현대 목회자의 방향

 

1. 부르심의 확인

베드로를 연구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뜨겁다 하더라도 부르심에 대한 소명감이 없이는 목회자로서 기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베드로에게 있어서도 처음에 잊을 수 없는 부르심으로 주님이 불러 주셨고 그가 세 번 부인하고 다시 물고기 잡으러 돌아갔을 때 똑같은 부르심으로 다시 한번 불러주시는 주님을 볼 때 부르심을 확인하는 것은 목회자로서 가장 기본을 갖추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베드로가 순교까지 이를 수 있는 은혜의 원동력이라 하겠다. 이제 현대 목회자로서 첫발을 내딛는 본인에게 있어서도 부르심의 확인은 중요한 것 중의 하나라고 믿는다.

 

2. 성령충만 - 영성회복

베드로를 연구하면서 베드로의 전환점에 주시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성질 급하고 덤벙대며 겁 많은 베드로였으나 오순절 성령의 체험이후로 베드로는 변하였다. 겁 많던 베드로는 담대한 베드로로 변했고 성미가 급하며 덩벙대던 베드로는 통찰력 있고 판단력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 또한 학문이 없는 베드로는 아주 유식한 자로 변해 있었다. 어디서 이런 은혜가 있어진 것일까? 바로 성령의 은혜인 것이다. 그가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하면서 성령의 사람이 되었고 하루에 3,000명, 5,000명을 구원시키는 능력의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3. 순교의 날까지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순교했을까? 라는 의문을 가져 보았다. 베드로 또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었으니 가장 행복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한번 태어나면 육신은 한번 죽게 되어 있다. 그러나 다 같은 죽음일지라도 누군가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면 값진 죽음일 것이다. 바울은 당당히 말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 말씀은 바울이 자기의 일을 마치려 할 때 말한 것이다. 자기 일을 다 마치고 인생의 뒤를 돌아볼 때 바울은 후회하지 않았으며 후회할 것이 없이 열심을 다 한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는 어디에 평생의 푯대를 삼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종착역이 어디일까? 목회자의 종착역은 순교일 것이다. 순교하는 그날까지 순교의 길을 걸으며 살아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이상훈 신약의 열두제자와 그 밖의 열두사람, 서울: 종로서적 1954

D. Guthrie 이상원 역, the apostles(사도들), 서울: 아가페 1991

염명수 성서인물연구, 서울: 한국문서선교회 1989

박윤선 성서주석 사도행전, 서울: 영음사 1981

W. S. Mcbirnie 이남종 역, 열두사돌의 발자취, 서울: 솔로몬 1991

Justo Lo. Gonzalez 서영일 역, 초대교회사, 서울: 은성 1987

Michael Green 김경진 역, 초대교회의 전도, 서울: 말씀사 1984

H.. Kane 이재범 역, 선교신학의 성서적 기초, 서울: 나단 1988

 

 

출처 : 주와함께
글쓴이 : jjbb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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